어느 인터넷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이런 글귀를 읽은 것이 기억이 난다. ‘코리아는 몰라도 삼성은 안다.’ 그만큼 삼성의 둥근 파란 마크 하나가 태극기만큼이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파란마크 속에 점점 갖혀 사는 것이 점점 당연하다는 생각이 점점 늘어가는 현시점에서 우리는 그 타원형 파란마크, 삼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아니 꼭 다시 생각해봐야만 하는 그 시점에 다 달았다. ‘삼성 불매 운동’이란 칼럼 속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점은 삼성 제품을 사지말자는 칼럼리스트의 주장 보다는 그 결론에 도달하게 한 원인에 있다고 본다. 한국의 한 구성원인 칼럼리스트가 우리나라 경제의 주축인 삼성을 무너뜨려 보자는 나쁜 심상으로 그런 글을 쓴 건 물론 아닐 터이니.한국 땅을 밟고 있는 그 어떤 누구도 'SAMSUNG' 이란 로고가 찍혀진 제품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전 국민 중 거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대기업 삼성은 우리의 생활을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래 속에 매어버렸다. 즉 한국 속 삼성이 아닌 삼성속의 한국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말이다. 자본주의 경제를 따르는 한국 사회 속에서 언젠가부터 삼성이 가진 자본권력이 아주 조금씩 조금씩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나라 속 시민의 자유와 주체성을 억압하게 되더니, 이제는 자본이라는 새로운 독재자로써 우리를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 스스로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삼성이 우리나라의 심장부로 자리 잡아 삼성 속 염증이 생기면 우리나라도 함께 그 염증을 겪어 내야 하게 되었다. 즉 삼성의 비리가 바로 대한민국의 비리가 된 것이다.요즘 삼성은 몰아치는 한파로 누구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아이폰 열풍 덕에 죽어가는 삼성휴대폰이며, 삼성 부사장의 투신 그리고 삼성가의 칼바람이 되고 있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와 함께 삼성의 언론에 대한 압력행사라는 바람 등 세차게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들. 이제 점점 조금씩 썩어가고 있던 삼성의 가지가 하나둘씩 자신의 썩은 부위를 드러내가는 것이다. 그 썩은 가지의 뿌리 속에는 삼성의 관리와 공포의 경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삼성을 생각한다’ 라는 책에서도 나왔듯이 삼성의 경영은 옛 비서실이자 현 구조본에서 지시를 받아 위에서 아래를 계속 서로를 조아가는 경영 체제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일명 ‘삼성맨’ 이라고 불리는 삼성의 직원들은 점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 기사에서 그랬듯이 삼성의 뒷사람 지시 없으면 머리 안 쓰는 문화는 항상 성공모델이 없으면 도전하지 않았던, 즉 계발보다는 지나친 안정만을 추구하는 그런 윗 자리의 손안의 인형같은 생각들은 삼성을 지금의 자리에서 맴돌게 하였다. 그런 문화가 점점 깊어져 사람들에게 부정과 부패라는 생각을 심어주었고 지금의 썩은 가지의 삼성을 만들게 되었다. 삼성 내 언론인 에서 ‘1등기업의 함정’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삼성의 언론 조차도 자신들을 추격자의 전략이며 보수적 기업문화라고 소개 하고 있었다. 항상 1등이긴 하지만 성공모델만을 쫓았지만 이제 쫓을 모델이 없어진 상황을 말하고 있었다. 또 어느 언론에서는 삼성을 ‘세일즈 머신’이라고 소개하기 까지 하였다. 우리의 대표가 된 삼성이 그런 비꼼을 받는 것이 대해 우리는 가만히 묵과해선 안될 것이다. 이젠 삼성이 내 품안의 자식이 아니라 밖으로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잘못된 습관을 고쳐서 올바르게 곧게 자랄수 있도록 우리가 꾸짖어야 할 때이다. 비록 삼성의 권력 앞에 무릎 꿇은 언론의 사명을 잊은 몇몇 언론사들이 있긴 하지만 삼성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삼성의 힘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선 몇몇 언론사들이 있기에 아직 꾸짖음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다문화 사회란 말 그대로 내부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를 말한다. 아직 ‘문명화’되지 못한 채 고립되어 살고 있는 단일 문화의 원시공동체가 지구 어딘가에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다른 문화와 아무런 교류도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단일 사회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속의 한국, 이제 한국도 다민족·다문화 사회이다.한국이 다민족 다문화 사회임을 인정하라는 사실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척이나 낯설게 들렸을 것이다. 어릴 적 노랫말 속에서도 배워왔듯 우리의 대한민국은 우리 머릿속에서 언제나 백의민족이며 단일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사회에 불고 있는 다문화 바람 때문에 우리가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주장은 이제 더 이상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한민족 개념을 버릴 수 있게 된 것은 우리가 갑자기 너그러워지고 계몽되어서가 아니다. 다문화 사회로 점점 진입해가고 어쩌면 이미 다문화 사회 일지도 모르는 이 땅에서 다문화 사회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다문화 사회 속에서 다문화 가정의 탄생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서로 피부색과 언어가 조금 다른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며 가정을 꾸려나간다는 것.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을 요즘 들어서 더 자주 듣게 되는 것 같다. 다문화와 관련한 많은 것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인터넷에서도 다문화 가정 사이트를 힘들지 않게 다양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 주변의 도서관에서도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하는 충청남도 천안시, 경상남도 김해시에 지어진 다문화 도서관을 비롯해 다문화 가정이 많은 지역인 서울시 강동구 강동 성내, 강동 해공, 대구 달서구 등의 지역의 도서관에서 열리는 일반인 대상 타문화 이해 교육 프로그램 등 많은 프로그램을 주위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이렇듯 다문화 가정을 위한 것들이 많이 생기긴 했지만 다문화 가정이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정착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만은 않다고 한다. 이들이 이 땅에서 다문화 가정으로 살기에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제일 시급하고 큰 문제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자라면서 받는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세상의 따가운 시선이 아닐까?피부색과 외모가 서로 다른 부모를 가진 그 아이들에 대한 용어들은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 용어는 그 아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대안적인 용어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혼혈인을 지칭한 비하적인 의미로 많이 쓰이는 ‘튀기’는 사전적으로는 원래 ‘종(種)이 다른 두 동물 사이에서 난 새끼’를 의미하는 말로 사람에게 적용해서 ‘혈종이 다른 종족 간에 태어난 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튀기’는 동물에게 적용을 하면 특별히 부정적인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표현이지만, 사람에게 적용을 할 때에는 순수혈통이 혼혈보다 우월한 것으로 보고 두 인종의 피가 섞여 있음을 비하하는 경멸적인 의미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용어로 ‘혼혈’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혼혈은 ‘서로 인종이 다른 혈통이 섞임, 또는 그 혈통’을 의미한다. ‘튀기’라는 용어에 비해 ‘혼혈’이라는 표현은 비하적인 의미가 아닌 것처럼 받아 들여 진다. 그러나 피의 순수성이 특히 강조되어 왔던 우리나라에서 ‘혼혈’ 또는 ‘혼혈인’ 이라는 용어는 어떤 대상을 나타내는 중립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미 부정적인 가치가 내포된 표현이 될 수 있다. ‘혼혈인’ 을 대체하는 용어로는 ‘이중·다중문화가정의 자녀’, ‘국제아’ 등이 있다. ‘이중·다중문화가정의 자녀’라는 표현은 일부 혼혈인 복지단체에서 창안한 용어로써 인종적, 문화적 차원에서 혼혈인을 고려하고 혼혈인들의 정체성을 중요시한다는 측면이 반영되어 있다. ‘국제아’라는 표현은 미국이 일본이나 한국과 체결한 ‘주둔군 지위협정(SOFA)' 이 서독과 체결한 협정에 비교하여 어린이와 여성에 대한 보고, 환경 보전, 인권 존중 등에서 많이 뒤떨어져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군의 지워 협정의 개정에서 주권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인권의 측면이 부각되어야 하며 이에 외국군의 전쟁 개입이나 장기주둔 하에서 발생하는 ’혼혈아‘를 ’국제아‘로 명칭을 바꿔 이들의 인권을 보호하자는 차원에서 제안된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한 가지 그 아이들의 국가 소속감에 대한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다문화 가정 청소년에게 자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지에 관한 조사가 있었다. 그 결과, 43.5%가 자신을 ’한국인과 외국인 모두‘에 해당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32.6%는 본인을 ’한국인‘이라고 지각하고, ’외국인‘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는 응답의 비율은 ’17.4%‘ 였다 (국가청소년위원회, 한국청소년 상담원). 위에서 보여 지는 아이들의 문제뿐 아니라 법적인 장치가 미비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다문화 가정이 정착 하기 까지의 금전적이나 교육적 장치도 아직까지 부족하다고 다문화 가정에서 소리 높여 얘기한다.다문화 사회 얘기를 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인정하건 말건 간에 이미 한국이 매우 ‘다문화적’ 인 사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미군 부대 주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외국인들은 이제 아무 데서나 쉽게 지나치게 되었다. 서울 이태원에 가면 멋지게 생긴 이슬람 사원이 있고, 경기도 안산에 있는 ‘국경 없는 마을’ 에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을 언제나 볼 수 있다. 어디 그곳뿐인가. 제주도에 있는 작은 공장에서도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베트남 출신 노동자를 만날 수 있고, 강원도 홍천의 작은 마을에서도 역시 몽골에서 온 ‘새댁’ 의 사연을 접할 수 있다. 서울 안에는 외국인 마을도 제법 여러 개가 있는데, 방배동 서래마을은 고급스런 프랑스 마을이고, 동부이촌동에는 일본인 마을, 동대문운동장 옆에는 러시아와 중앙 아시아촌이 있다. 필리핀 문화를 접하고 싶으면 일요일 오후 대학로에 나가면 된다. 그곳에는 수천 명의 필리핀인이 모인 한바탕 장터가 벌어진다. 이렇게 보면 다문화 사회 얘기가 쏟아져 나오는 이유는 급격하게 증가한 인구의 국제 이동 때문에 한국 사회에 ‘이방인’ 에 해당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한국이 다인종·다민족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우리 학교’를 보고이번 과제 때문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우리 학교’라는 영화에 대해서 소개 시켜준 적이 있으셨다. 그래서 그 때 처음으로 ‘우리 학교’라는 영화를 알게 되었는데 줄여 말하자면 이 번을 계기로 해서 이 영화를 접한 것이 나에게는 참 큰 행운이었다.‘우리 학교’는 내가 참 오랜만에 본 다큐 영화였다. 일본에서 조총련계 재일동포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우리학교'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색한 말투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 우리학교를 지켜나가는 이들의 진솔된 이야기였다. 원빈을 좋아하고 오 필승 코리아도 외치는 우리와 별반 다른 것을 느낄 수 없는 같은 민족이었다.영화 중간에 북한에 비해 남한의 무지원에 대한 아쉬움과 수학여행도 복잡한 절차를 겪어야 하는 점에서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는 자칫 결국엔 북한의 주체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는 공간이라서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다큐 속의 아이들을 보면 정말 진지한 고민따위 보다는 그냥 자신의 민족을 지켜나간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만이 가득 차 있었다. 우리학교 한 학생이 남조선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 일본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조금은 다르다고 말했다. 남조선에서는 내면적으로만 가지고 있어도 되는 문제이지만. 이쪽 일본에서는 내면적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이 일본에서는 자꾸 그 정체성이 안으로 계속 들어가 나중에는 잃어버리게 된다는 그래서 우리는 저고리도 입고 수업도 한글말로 하고 있다면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실천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이름과 지금 쓰고 있는 우리말을 나는 과연 얼마나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던가 반성하며 그들 앞에 왠지 부끄러움을 느낄 뿐이다. 우리학교의 학생들은 학교 행사 등에 그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 및 의견 등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조별로 한글점수 매기기 및 깃발 만들기 등등 선생님에게 장난을 걸면서 체육관에서 놀던 모습, 기숙사 생활을 하는 초급부 학생들과 잠자리 전에 같이 만화책보는 모습, 담임선생님을 소개할 때 자신의 반 선생님의 이름이 호명되면 좋아서 큰소리로 고함지르는 모습... 같이 고민하고 실천하며 땀흘리고 같이 울고 서로 어우러져 같이 만드는 학교였다. 우리 학교는.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공부하는 학생이 많을 것이고,우리 학교 학생들이 축구에서 패배 한 후에 쓰러져서 모두 울던 장면에서 단순히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써 패배했다면 저 학생들은 저토록 눈물 흘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네들 남의 나라에서 우리 것을 지키며 힘겹게 살아온 그간의 무수히 말 못할 재일동포들의 애환이 그들의 눈물 속에 담겨 있을 것이고, 일본인이 아닌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앎으로써 당당한 조선인으로써 조선인이 당연히 조선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어렵게 하는 차별적 일본인들에 대한 저항의 표현일 것 이고, 우리학교 학생, 선생님 및 조선인 모두에게 축구지만, 이김으로써 작지만 기쁨과 용기를 선물하지 못한 분함에 있을것이다.우리 학교의 학생들 같은 재일동포가 일본에서 살아가는데 차별, 소외감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힘들어할 때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라는 이름으로 언제든지 그들을 품에 보듬어야 할 것이다.영화 속에서 나는 이 조선학교의 모습을 보며 정말 맑고 깨끗한 마음에서의 '애국심, 혹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가려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인지를 새삼스레 느낄 수가 있었다.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50년 넘게 조선학교를 지켜온 이들의 뜨거운 열정과 조국에 대한 순수한 마음이 절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한국이란 나라에 '애증'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감정을 지닌 나로선 저들의 맹목적 애국심이 부러울 뿐이다. 분명 피는 묽어질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재일동포들은 일본의 문화, 사회에 완전히 동화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타국에서 꿋꿋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을 기억해 주었으면한다. 나아가 조선학교 학생들이 소망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이념'이라는 그릇된 잣대가 사라지기를 바란다.해방 직후, 그 때까지 일본 국적이었던 재일동포들에겐 '식민지 이전 시대의 조선'국적이 부여되었다. 즉 현실적으로는 무국적자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이들 재인 조선인 1세들은 우리 말과 글을 몰랐던 자녀들이 조국으로 돌아가 불편이 없도록 가장 먼저 학교를 세웠다. 500여개가 넘던 조선학교는 일본 우익세력의 탄압 속에서 이제 80여개 학교만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우리학교'라는 또 하나의 소중한 이름으로 불리며 조선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이어가고 있다.이 시점에서 우리는 남북한이 헌제 처해있는 현실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전 발생한 천안함 사태로 얽힌 남과 북 관계로 우리가 10년 전 힘들게 이루어 낸 6. 15 선언도 무산 되게 되었다.한겨레 신문의 뉴스를 조금 인용하겠다.‘6·15선언 10돌’ 남북공동행사 사실상 무산남측위 관계자 “정세악화로 불가능…분산 개최”6·15 공동선언 발표 10돌 기념 남북 공동행사가 무산될 전망이다.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남측위) 고위 관계자는 12일 “안타깝게도 6·15 공동선언 열 돌인 올해 남북 공동행사는 열리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앞서 11일 6·15 공동선언 남과 북, 해외측 위원회 관계자들은 개성에서 실무접촉을 벌여 올해 6·15 공동선언 10돌 기념 공동행사(‘6·15 민족통일대회’)를 평양에서 열기로 하고 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로 합의했다고 12일 남측위가 발표했다. 남측위는 “각 정당, 시민사회 여러 단체는 물론 정부측과 관련한 구체적 협의를 진행할 계획이며 여러 상황을 고려해 최종 계획을 확정할 것”이라고 밝혔다.하지만 남측위 고위 관계자는 “현재의 정세(와 남쪽 정부의 태도)를 고려할 때 남북 공동행사의 평양 개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올해 남북 공동행사가 열리지 못하게 됐다는 걸 언제 어떤 식으로 알릴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와 집 근처에 있는 문화 예술회관에서 하는 작은 그림 전시회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림에 대해 완전 문외한 이었던 나와 친구는 전시회를 구경하는 내내 의구심 가득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때 전시회에 전시되어 있던 작품들 중 거의 대부분이 하얀 캔버스지에 물감 몇 방울 떨어뜨린 그림이거나, 중간에 선을 하나 그어 두거나 하는 작품들이었다. 제목이 ‘나와 자아 세계의 이중적 만남’ ‘이성의 성찰’ 같은 그림들이었는데 그 때 우리는 작가의 심오한 예술 세계를 우리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과연 진짜 예술이란 저런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라는 책을 읽게 되면서 그 때 그런 나의 생각을 조금 더 정당화 하고 나 스스로 이해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 않나 싶다. 이제 현대 미술은 평범한 나 같은 사람에게 언젠가부터 예술이 아니었다. 작품을 보고 감상만 하기에는 현대 미술은 너무 많은 의미를 담은 텍스트가 되어버린 것이다.이 책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를 읽는 내내 나 또한 즐거움과 희열을 느낄 수 있었듯, 현대예술의 난해함과 오만함에 기죽어 지내는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시원스럽고 통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또한 이 책은 예술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제멋대로 만든 자신의 작품에 난삽한 해설을 붙인 현대예술가들에 더 이상 휘둘리지 말고, 예술의 본래 정신, 자신의 취향 그리고 자신만의 엄격한 분류의 잣대에 의거해서 이들 작품들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강하게 호소하고 있다.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 작품들을 억지로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못했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 미리 말해두는 이 책의 결론이자 본론이다.‘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는 풍자와 더불어 정확하고 다양한 예시들을 통해 천박하고 무가치한 현대예술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의 저자 에프라임 키숀의 시각에서는 현대예술가들은 일상에서 사용한 물건들을 짧은 시간 안에 서로 엮고 만들고 해서 이에 이해 불가한 해석을 대강 붙여서 작품이라 하거나, 예술기법의 새로운 창제라는 명분하에서 물감을 단순히 흩뿌리거나 짓눌러서 만든 것을 예술작품이라고 하기도 하였으며, 새하얀 캔버스에 도형을 다각도로 그려놓고서는 자신의 철학 세계를 표현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의 저자 에프라임 키숀은 이런 현대예술 작품들이 전부 쓰레기이고 관객들과 예술의 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는 주요 요소라고 열변을 토한다. 예술 앞에 지레 겁먹은 대중들에게 교묘히 사기를 치는 예술품들이 넘쳐나고 있을 거라는 심증은 있는데 비평가나 지식인들이 모두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만 있으니 평범한 대중들은 물증을 잡지 못해 답답하기만 하다.다양한 현대예술의 유파들이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것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서는 대체로 회화라는 것이 어떠한 대상을 재현하고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화가만의 주관적 관념 세계를 주관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만든 작품들에는 매우 기하학적이고 난해한 해석들이 덧붙여짐으로써 관객들을 무언중에 압박하였으며, 무의식중의 열등감에 관객들을 몰아넣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의 예술이론은 철학적 깊이가 있다기보다는 실제론 보잘 것 없는 것을 복잡 난해한 문장들의 조합으로 무엇인가 깊이가 있는 듯 허황된 면을 과장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예술품이 그 자체로 높은 가치를 가질 수 있다기보다는 훌륭한 재테크의 수단으로 활용 되어 명맥이 이어져가는 현실에서 미술의 예술적 본질에 대한 진위를 판단하는 부분의 진보는 없을 것이고, 현재에 계속 머물러 있는 한 지금의 예술계는 변하지 못할 것이다.클라겐푸르트의 안드레아스 브루거가 에프라임 키숀에게 쓴 편지 내용의 일부이다. ‘예술가들이 이번엔 어떤 오물을 들이대고 그것을 예술이라고 말할지 이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어느 전시회에서 진짜 똥거름을 감히 예술이라고 들이댔을 때 우리의 인내심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 ‘ 피카소의 달콤한복수 ’ 27Page 中) 이 부분을 읽을 때 만약에 작가 자신이 작품을 그리거나 제작할 때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난해한 개인적 의미를 부여 하였다고 하여도 그 것이 거의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이론으로 설명 된다면 과연 그 것이 예술인가 똥거름인가 한 번 고민 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 취미 활동과 예술가의 활동이 엄격히 구분되어야 함에도 지극히 사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개인의 자아 성취가 예술의 독립성과 작가의 고유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우리는 작품을 보는 새로운 비평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공적 범위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예술의 활동 영역이 개인의 취미활동에 의해 침범당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 작품 속에 작가는 정말 예술적 신념을 담은 것인가 예술적 신념을 담았다고 믿는 우리를 조롱하는 것인지 또한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작가들의 대중에 대한 조롱은 비평가들과 지식인들의 조롱에 대한 침묵으로 인해 더욱더 심화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이 다반사이다. 과연 비싼 것이 훌륭한 작품인지 훌륭한 작품이라서 비싼 것인지 대체 그것마저 현대 예술품들은 혼돈이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경외하는 미술가들이 진정 거짓 없이 진정성을 가지고 자신의 작품을 창조 했는가 아닌가에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판단은 관객이나 비평가의 몫이 아니라 오로지 작품을 창조한 작가의 양심에 맡겨야 할 것이다.‘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의 저자는 현대예술이 저지르는 최대의 죄악은 관객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름다움은 예술로부터 추방당할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사랑 또한 사라져버릴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을 또한 강조 하고있다. 관객으로 멀어진 예술은 메말라가는 샘물처럼 생명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저자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에 호소할 수 있는 예술작품을 만듦으로써, 예술을 다시 관객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 첫 번째 시퀀스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강 위를 훑는 화면이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집에 벨을 누르고 케이크를 전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케이크의 이동이 중요한 화면 이동의 중심이 되는 케이크, 소년이 만드는 예쁜 모양의 계란 프라이, 그리고 주의 깊게 살피면 보이는 이 소년의 집 정원에 핀 해바라기 꽃들 등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첫 번째 시퀀스와 결말부를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다.- 두 번째 시퀀스는 카메라가 숲속을 달리는 듯한 장면으로 시작해서 숲 속 밝은 터널 속으로 꼬마 아이, 아빠 그리고 엄마의 어두운 실루엣이 들어가는 장면으로 두 번째 시퀀스는 끝이 난다. 이 시퀀스의 숲속을 달리는 듯한 장면은 사실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시선이다. 이 소년이 자전거에서 내려서 바라보는 밝은 터널 속으로 걸어가는 세 가족이 소년의 부모님과 어릴 적 소년임을 알 수 있다. 소년의 내레이션과 시선을 통해 소년이 있는 이 숲이 영화의 내용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고, 그 세 가족을 지그시 바라보며 소년의 내레이션이 시작 되는데, 내레이션과 함께 소년의 과거 회상이 시작된다.- 세 번째 시퀀스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title 시퀀스이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영상효과로 title 시퀀스를 보여준다. title을 이렇게 보여줌으로써 영화 속에서 비가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알게 해준다.- 네 번째 시퀀스는 추모식을 진행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풀 숲 잔디에서 유우지가 책을 읽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 시퀀스의 마지막에 유우지가 나오는 장면에서 유우지의 목에 열쇠 달린 목걸이 걸려 있는데 그리 중요하게 비춰지지 않는다. 하지만 뒷부분에 가면 결말을 이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시퀀스에서 나오는 미오의 비석과 친척들의 대화를 통해서 비석이 미오의 것이라는 것, 미오의 나이가 29살 이라는 것, 미오가 1년 전에 죽었다는 것, 미오가 유우지를 무리해서 놓다가 죽었다는 것, 아빠의 칠칠치 못한 성격 등 많은 정보를 알려 주고 있가세(아이오의 직장 여자 동료)와 축제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다섯 번째 시퀀스에서 유우지가 읽는 동화책의 내용이 ‘그리움의 문을 열고 다시 돌아왔지요’ 임을 통해서 누군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예고해준다. 이 시퀀스에서도 나왔지만 유우지가 읽는 동화책의 내용이 영화의 전개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섯 번째 시퀀스에서도 네 번째 시퀀스와 마찬가지로 아이오가 넥타이에 뭔가를 묻히는 장면, 보내야 할 우편의 순서를 잘 정하지 못하는 장면 등을 통해서 아이오의 칠칠치 못한 성격을 이어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비의 계절이 영화 속에서 첫 등장 했고 아이오의 비의 계절이 대한 기대감을 엿볼 수 있는 시퀀스 이다. 또한 나가세가 아이오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도 엿볼 수 있는 시퀀스 이다.- 여섯 번째 시퀀스는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아이오가 유우지에게 축제에 가고 싶냐고 묻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 시퀀스에서 유우지의 대화를 통해 아이오가 병이 있음이 언급 된다. 하지만 아이오의 병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뒷부분에서 아이오의 병과 미오와의 사랑에 관련해서 자세히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형을 걸어두는 행동으로 유우지 또한 아이오와 마찬가지로 비의 계절에 미오가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고 비의 계절을 무척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곱 번째 시퀀스는 축제의 날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오가 유우지를 누워서 안아주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유우지가 쓰러진 아이오를 찾는 장면에서 나가세가 나와서 도와주는 장면이 나옴으로써 나가세가 유우지와 아이오를 챙겨주고 있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여덟 번째 시퀀스는 유우지와 아이오가 축제에서 돌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해 유우지와 아이오가 창 밖으로 비가 오는 것을 보고 있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유우지와 아이오의 대화와 아이오가 예전에 찍은 미오의 영상을 보는 장면을 통해 유우지와 아이오가 미오를 매우.- 아홉 번째 시퀀스는 비 내리는 숲 속을 아이오와 유우지가 걷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비 오는 숲의 정경을 비추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비와 함께 미오가 유우지와 아이오 앞에 등장한다. 미오가 등장하는 이 공간은 비와 풀로 덮혀 있고 무엇인가 판타지적인 공간이라는 분위기를 준다.- 열 번째 시퀀스는 카메라가 바깥쪽에서 아이오의 집으로 시선을 옮기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잠든 미오를 쳐다보면서 볼을 쓰다듬는 아이오의 모습을 비추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 시퀀스부터 이제 미오와 유우지와 아이오의 기적과도 같은 비의 계절이 시작 된다.- 열한 번째 시퀀스는 비가 오고 난 후의 아침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오에게 자신과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는 미오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영화 속에서 미오는 거의 흰색 계통의 옷만을 입었는데 이것은 미오가 신비스런 존재임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함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비의 계절에 돌아온 미오와의 즐겁고 소소한 일상이 시작된다.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미오에게 아이오가 다음 시퀀스에서 사랑이야기를 해 줄 것이 예상 된다.- 열두 번째 시퀀스는 숲 속을 걸으며 이야기하는 미오와 아이오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예전처럼 다시 다가가고 싶다는 말을 하며 아이오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함께 걸어가는 미오와 아이오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미오에게 자신과의 사랑이야기를 해주는 아이오의 내레이션과 함께 회상 장면으로 넘어간다. 아이오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미오에게 이야기 해 줄때 과거 회상 이야기가 지극히 아이오의 주관적 시선이라는 것이 이야기 전개에 매우 중요한 사실로 작용한다. 그리고 과거 회상 부분에서 약간 이해 할 수 없는 갑자기 불이 꺼지는 사건 등을 그냥 넘어 가는 것도 뒷부분에서 미오만의 시선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에서 중요하게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열세 번째 시퀀스는 비 오는 날 빨랫줄에 인형을 걸어두는 유우지의 모습으로 시작해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아이오의 어깨에 기대는퀀스는 의사와 아이오의 대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미오와 유우지와 아이오를 비추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의사와의 대화 장면에서 미오가 비의 계절, 즉 장마기간이 끝이 나면 가버릴 것이고 미오가 다시 떠나버리면 유우지와 아이오가 매우 슬퍼질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유우지가 동화책의 ‘비의 계절이 끝났어. 이젠 돌아가야 해’ 라는 부분을 읽음을 비춰줌으로 관객들에게 미오가 곧 돌아갈 것이란 것, 그 사실을 유우지가 알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 세 가족이 손을 잡고 숲 속 터널로 들어가는 부분을 통해서 첫 시퀀스에서 나왔던 장면이 유우지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시퀀스에서는 관객들에게 유우지 가족의 꿈과 같았던 비의 계절이 안타까운 운명으로 곧 끝이 날 것이라는 향기를 풍기고 있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오와 미오의 첫 키스신에서 미오가 ‘묘한 느낌이 들어요. 첫 키스한 느낌이에요.’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미오가 과거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 해주고 있다.- 열다섯 번째 시퀀스는 서류를 다 처리했다고 하는 아이오를 직장동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미오와 아이오가 서로 껴안고 잠에 드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 시퀀스에서 유우지가 항상 목에 걸고 있었던 열쇠로 미오와의 타임머신을 찾아서 열어본다. 타임머신 상자를 열기는 하지만 내용을 보지 않았다는 점이 뒤에서 중요하게 결론과 연결 된다. 그리고 미오가 청소하다가 유우지의 책상 서랍에서 발견하게 된 자신이 쓴 동화책 또한 또 하나의 결론을 이어주는 열쇠가 된다. 또한 이 시퀀스에서는 미오가 아이오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하고 과거 회상의 계기로 작용되기도 한다. 지극히 아이오의 시각으로만 보았던 과거의 사건들이 결말 부분에서 지극히 미오의 시각으로만 보았던 과거와 연결 되면서 이해의 고리가 된다. 그리고 이 시퀀스에서 나오는 해바라기 밭에서 미오와 아이오가 만나는 장면도 결말 부분과의 연결 고리가 된다. 약간 이해 할 수 없었아이오와 등교하는 유우지에게 인사하는 미오의 모습으로 시작해서 미오가 혼자 마루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 시퀀스에서 미오가 유우지가 발견했던 자신과의 타임머신을 꺼내 본다. 타임머신 안에 있는 자신의 다이어리를 펼쳐드는데 마치 신의 계시처럼 바람이 불어와 다이어리가 넘겨져서 어느 한 면이 펼쳐진다. 그 다이어리의 한 면을 봄으로써 미오는 자신이 죽은 사람이라는 것, 자신은 9년 전 과거에서 왔고 떠나야 한다는 것 등의 사실을 알 게 된다. 바람이 불고 유우지가 걸어둔 비의 인형이 날리는 장면, 미오가 다이어리를 읽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보아 미오가 진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퀀스이다.- 열일곱 번째 시퀀스는 미오가 첫 등장할 때 나왔던 숲속에 안개가 낀 장면과 거의 동일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미오와 아이오가 함께 누워있는데 미오가 아이오를 더욱더 껴안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숲 속에 안개가 낀 장면은 미오가 등장할 때와 유사한 장면이라는 점에서 미오가 비의 계절의 시작과 함께 왔던 것처럼 이제 떠나야 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미오가 아이오를 더욱더 껴안는 것으로 끝이 나는 장면에서 미오가 이제 헤어짐을 알게 되었지만 떠나기 싫어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미오가 유우지에게 달걀 프라이 만드는 법, 빨래하는 법, 구두를 닦는 법 등을 가르치는 것을 보아 미오와의 이별이 한 발짝 더 다가왔음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퀀스에서 미오가 유우지에게 해바라기 씨를 심어서 잘 키워야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이야기들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다. 과거의 미오가 아이오와 재회하기를 결심한 날 만났던 곳이 해바라기 밭이었기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고 아이오와 만났던 곳이 해바라기 밭인 것처럼 자신을 해바라기 씨에 비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첫 번째 시퀀스에서 주의 깊게 살피면 보였던 소년의 집 정원에 피어있던 해바라기가 이때 미오와 유우지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