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스 : 세상에 마음을 닫았던 한 소년이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교대에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교육과 관련된 서적을 읽어보자고 결심했던 적이 있었다. 그떄 읽게 된 책 중 하나가 딥스였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만 읽었었는데 이번에 유아교육개론 과목의 과제 덕분에 한 번 더 딥스와 만나게 되었다.딥스는 6살 남자 아이로,유복한 집안에서 명석한 부모님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의 가정환경은 부족한 것이 없어보인다. 딥스의 부모는 딥스의 지적 충족과 발달을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노력했고 딥스는 그에 걸맞게 평균적인 6세 아동 이상이 해낼 수 있는 지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딥스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책 속의 A 선생님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딥스는 일류 사립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선생님의 지시에도 따르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는다. 세상과 단절하고 자신만의 세계 속에 사는 아이였다. 교실의 가장자리를 따라 기어다니고 엄지 손가락을 빨고 책상 밑에 숨고 몸을 앞뒤로 흔드는 등 정신지체아의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책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등 지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 선생님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러나 내가 책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유치원의 선생님들이 이러한 딥스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인간적으로 존중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교육현장에서 어린 아이들 여럿이 모여 있는 가운데 딥스와 같이 이상행동을 보이는 아이가 있으면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아이를 처음에는 걱정하거나 한 인격체로 취급하더라도 오랜기간동안 선생님인 자신과 다른 아이들에게 적개심을 보이고 발달에 별로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면 저 아이는 원래 그런 아이야, 하면서 포기하거나 학부모에게 정신 지체아나 정서 장애아들을 위한 유치원.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딥스의 고모할 반복해주면서 그의 말을 이해했음을 전달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며 도와주어야할 상황이 있을 때는 적절한 도움을 주었고 딥스가 대화를 주도하게 해주어 딥스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녀는 딥스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기준치도 설정해주지 않았다. 조바심을 내는 대신 시간과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고 서로에게 정직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기다릴줄 알았다. 그렇게 딥스는 서서히 변화해갔다. 우선 박사 앞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말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닫은 아이가 말을 한번 트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딥스가 말을 튼 것은 자신이 쌓은 벽의 아주 작은 한 귀퉁이를 허무는, 아주 작은 시작이지만 진정한 치료의 첫걸음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침내 본격적인 상담 2주차가 되었을 때는 자신을 3인칭 대신 '나'로 지칭하기 시작하고 자신도 할 수 있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자존감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딥스는 액슬론 박사가 판단한대로 용기 있는 아이였다. 자신이 만든 벽을 조금씩 허물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과 감정을 느리게나마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본격적인 상담 2주차 때 딥스는 그림을 그려서 선생님에 대한 호감을 표하는데, 미술교육론 시간에 배웠던 미술치료가 떠올랐다. 미술은 언어적 능력이 떨어지거나 정서적 요인으로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내담자의 상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매개체이다. 또한 미술치료는 나이나 능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하고 다양한 미술활동을 통해 문제점을 경감할 수 있는 과정이므로 부담이 적다. 작품을 완성하면서 감정적인 해방과 자신에 대한 이해를 증가시켜서 자아존중감이 높아질 수 있다. 자신에게 의미와 가치가 있는 대상을 창조하면서 심리적으로 뿌듯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딥스도 부담없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그림 한장을 완성하고 가슴 속에 숨겨둔 호감을 표현했다. 딥스는 미술실력도 매우 뛰어난 아이였다. 3주차에서 딥스는 젖병을 빠는 유아기적인 행동을 한다. 동시에 딥스는 뚜껑에 친구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자연스레 딥스의 부모도 안정을 되찾고 딥스의 여동생도 집에 돌아와 그의 가정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여름 휴가 때 온 가족이 함께 바다로 놀러가고, 적대적인 관계였던 아버지는 딥스와 공원에 가서 함께 야구를 즐기고 액슬린 박사와 딥스는 치료를 마쳤고, 액슬린 박사는 2년 뒤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딥스가 친구와 정답게 대화하는 것을 듣게 되고, 우연히 가족과 함께 있는 밝고 쾌활한 딥스를 만나게 된다. 딥스는 영재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딥스가 놀이방에서 작은 딥스를 치우고 큰 딥스를 세워놓는 장면과 오버랩되었다. 또 몇 년 뒤에 딥스는 이사를 갔고, 액슬린 박사는 영재학교를 다니는 친구가 학교 신문에 실린 편지를 보여주어 읽게 되었다. 그 편지는 친구를 부정하게 퇴학시킨 학교와 선생님들을 비판하고 친구의 복학을 요구하는 분노의 편지였다. 편지를 쓴 사람은 '딥스' 였으며 액슬린 박사의 친구는 딥스를 총명하고 예리한 지도자감이라고 평가하였다. 딥스는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한동안 삶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여러이들의 사랑과 도움으로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 자신이 인생의 그늘과 양지를 잘 대처해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이 책의 주인공인 액슬론 박사는 '어린이들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기회만 주면 자신들의 생활을 더 잘 이해하고 용기있게 대처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첵을 읽으면서 군데군데 감명 깊은 부분은 포스트잇으로 표시해가면서 읽었는데, 첫번째로 표시해둔 구절은 그가 인간의 내적 가능성과 내적 세계에 대해 서술해놓은 부분이었다. 그는 딥스 문제 같은 경우에는 어떠한 것도 명확하지 않으니 오히려 딥스에게 내재된 역량과 한계를 평가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한 인간이 성장할 수 있는 내적인 힘, 즉 역량과 한계는 타인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해는 개인적인 경험-각 시에 도와주기 힘든 구조다. 딥스는 좋은 가정환경에서 인격적인 존중은 받지 못했을지언정 자신의 지적 욕구는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딥스와 같은 문제를 가진 아이들이 모두 잘 살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모님들이 신경을 쓰기 어려운 경우가 많을 것이다. 아직 사회와 접촉을 많이 하지 않은 어린 학생들의 정서적인 문제는 아이가 세계를 쌓는데 있어 첫번쨰로 공헌하는 가정환경(부모의 태도나, 형편)이 원인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물론 앞에서 이런 상투적이고 단순한 단정은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딥스의 사례나, 다른 케이스를 보았을 때 대개 그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학부모의 적극적인 협조가 요구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 속에서 우선 딥스가 변화하기 시작함에 따라 그 부모의 정신도 건강하게 치료된다는 점이 눈에 띤다. 부모에게 일방적인 짐을 지우지 않고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이가 먼저 변하든, 부모가 먼저 변하든 한국의 교육 과정에는 이런 복합적인 어려움에 놓인 이들이 변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체계적인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만약 이런 아이를 돕고 싶다면 선생님의 백방의 노력 없이는 해결하기 어렵다. 전문가의 도움도 선생님의 요청이 아니고서는 이끌어내기 어렵다. 이럴 경우 선생님은 더 큰 노력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자. '딥스'는 아직 6살이고 뚜렷한 이상 증상을 보여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쉽게 개선되었지만 어릴 때 자존감을 잃고 심리적으로 억눌린 상태가 성장하는 수년간 그대로 따라오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서울의 유명한 D 외고의 입시설명회에서 교장 선생님이 했다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 학교에는 인성 교육, 전인 교육 그런 것 없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시키는 공부만 제대로 따라온다면 SKY 다 갈 수 있습니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공부시키겠습니다." 물론 고등학교의 현실은 이 이 건강한 정신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상, 그 가치가 경시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황폐한 사회가 될 것은 당연하다.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을 지도할 떄 필요하겠구나 싶었던 것은 바로 적당한 단호함이었다. 즉 지나친 칭찬, 애정, 봐주기, 도움은 오히려 아이를 방해할 가능성을 심어놓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주도권이 자신에게 주어지면 최고로 자신있는 일부터 한다. 칭찬은 자신이 나갈 방향을 결정할 때 참고할 것이다. 그렇게되면 칭찬을 받고 싶어서 자신이 잘하는 것-자신에게 쉬운 것-만 꾸준히 하고 자신에게 더 중요한 부분을 탐사해보려는 노력을 아예 차단하게 될 수 있다. 또한 딥스와의 상담에서 발견할 수 있었듯이 아이들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덧붙일 수 있다. 선생님이나 부모가 급작스레 칭찬을 한다든지, 그들의의 가치관이나 기준을 드러낸다면 아이들은 자신만의 생각이나 느낌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표현할 기회가 있고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또한 아이들은 아직 복잡한 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워하기에 단호함이 필요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흐지부지한 상황은 아이에게 혼란을 가져올 뿐이다. 지적발달이 제법 뛰어난 딥스도 액슬론 박사와 대화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 있었다. 아이들은 예측할 수 있고 일관되며 현실적인 한계를 세웠을 때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액슬론 박사는 딥스가 집에 가고 싶어하지 않아도 그 마음은 어떤지 잘 알지만 가야하는 시간이라고 단호하게 말함으로써 딥스에게 감정과 행동은 다르다는 걸 알려준다. 사실 우리는 아이에게 어떤 개념을 심어주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우리가 받은 가르침이 그러하고 보통의 상식이 그러하니까. 그러나 그 '보통의 상식'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아동에게 개념을 심어줄 방법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단순한 논리이지만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애정과 감정이 앞서는 행동보다는 현실적인 판단으로 아이가 절제할 수 있는,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일.
경복궁 답사기20101125 정지안경복궁은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서울에 왔을 때 코스에 있던 곳이었다. 그 때는 어려서 궁궐을 보면서도 숨겨진 이야기와,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고, 게다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느라고 친구들과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기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건물 이름은 무엇인지는 관심 밖이었던 것 같다. 다만 경회루의 연못 위에 낙엽이 떨어져 있었고, 사진찍기에 매우 좋았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다. 그리고 다시는 경복궁을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 6년간 서울에는 단 한번도 와본적이 없었기에! 그러나 정작 서울에 살게 된지 약 7개월 동안에도 그 근처의 광화문 광장이나 청계천은 종종 거닐었지만 경복궁 안에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 스스로 궁궐에 가더라도 돌아다니면서 '즐겁게' 역사와 전통을 느끼기는 어려운 일이 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외국인이 아니기에 대충 보면 비슷하게 생긴 한국의 건축 양식에 흥미를 느낄 일도 없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서 궁궐에 담긴 역사를 읽기에는 안내판들이 너무 무뚝뚝했다. 그러나 이번 '한국의 역사와 문화' 수업의 한 일환으로 경복궁에 가게 되면서,(비록 너무 추워서 경복궁을 다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교수님의 안내를 받아 경복궁 곳곳을 재발견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11월 8일 무척 추웠던 날 '한국의 역사와 문화' 교수님과 미술교육과 동기들과 함께 경복궁에 답사를 가게 되었다. 144번 버스를 타고 동대문 근처에서 초록색 버스로 갈아탄뒤 경복궁 근처에 내려서 다같이 만나기로 했던 5번 출구로 향했다. 바람을 타고 조금씩 내리는 빗줄기가 우리 일행을 때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추운 날씨가 더 가혹해졌다. 너무 추워서 버스 정류장에서 광화문까지 가는 그 짧은 와중에 커피집에 들러서 따뜻한 커피를 사가지고 나왔다. 커피집 안에서 몸도 조금 녹였다. 그리고 마침내 광화문에 드디어 도착했다. 광화문 앞에서 두 마리의 해태상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이 다가 박정희 정권 떄 광화문 앞으로 돌아왔지만 당시 광화문은 일제에 의해 남산 쪽으로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해치 역시도 방향이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광화문 복원 사업을 통해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렇게 8월 15일 다시 새롭게 단장한 광화문을 지나 다 함께 만나기로 했던 5번 출구로 향했다. 동기들을 기다리는 사이 고궁 박물관에 들어가보려고 했지만 월요일이라 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아쉬웠다. 동기들이 언제쯤 오나, 5번출구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는데, 그렇게 꾸민지 얼마 되지 않아서 중후한 맛은 없었지만, 궁궐 내로 들어와있는 지하철 출구답게 천장과 벽, 바닥이 마치 중앙박물관 복도의 일부를 어두운 조명과 함께 가져다 놓은 듯 했다.동기들이 도착해서 작은 문을 지나 광화문쪽으로 이동했다. 이곳에 서서 교수님의 설명을 들었는데, 해치상이 하마비의 역할을 하여 가마를 타든, 말을 타든 해치가 있는 지점에서 내려서 걸어서 광화문, 흥례문을 통과해서 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옛사람들의 동선을 따르려면 실제로 광화문 사거리에서 만나서 경복궁으로 와야한다고 하셨다. 광화문이야말로 경복궁의 첫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복궁을 제대로 느끼려면 광화문을 찍고(!) 내부로 들어왔어야한다는 말씀이셨다. 나는 다른 동기들과 달리 버스를 타고 갔기 때문에 광화문의 앞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교수님께서도 광화문을 제대로 보라고 시간을 주셨기 때문에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후에 현직에 나가서 학생들과 경복궁에 견학을 가게 된다면, 좋은 날씨를 골라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경복궁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입궁하는 듯한 마음으로, 옛사람들이 봤던 모습을(비록 처음 지어질때와는 다르게 훼손되기는 했지만) 느끼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들어올 때 앞면을 봤기 때문에 이번에는 광화문을 등지고 서서 세종로를 바라보았는데, 예전에는 포장된 차도 대신 흙길과 여러 관청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곧 몇백년뒤, 아니 백년뒤라도 이 모습이 사라원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럴듯한 전통 건축을 흉내냈을 뿐 값싼 건축 재료인 철근 콘크리트를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근 광화문은 제대로 된 위치에 옮겨지고 부분적인 수정을 거쳐서 목조건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현재 공개된지 석달하고도 보름이 지났는데, 현판에 균열이 생기고 현판의 한자를 한글로 고쳐야한다는 주장도 나오는 등 여러 말이 많지만 분명 몇가지 잘못된 부분 수정도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방법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광화문을 지나 우리는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다리가 있었다. 교수님은 다리 밑에는 금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냇물이 궁궐과 궁궐밖을 구분짓고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고 하셨다. 다리 난간과 개천가에는 동물 석상이 놓여져 있었다. 이는 잡귀가 다리를 건너서 올까봐 막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난간에는 용이 앉아있었고 돌다리의 좌측과 우측에는 '천록'이라는 처음보는 영물이 있었다. 그 중에 천록은 바닥에 배를 엎드려서 다리 밑의 물을 바라다보고 있는듯한 개구쟁이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네마리의 천록 중 한마리가 메롱~하면서 혀를 내밀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깨알같은 유머를 지닌 영제교를 지나 근정전으로 향했다. 금정문을 지나 우측으로 이동해서 행각 모서리 위에 올라섰더니 교과서 사진에서 많이 본듯한 구도가 나타났다. 정확히 어떤 포인트가 그렇게 느껴지는 지 몰랐지만 교수님이 북악산과 근정전의 처마선을 자세히 보라고 해주셔서 살펴보았더니 북악산이 처마 선 두 개를 끼고 평행하게 뻗쳐올라 있었다. 건물을 지을때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했던 조상들의 의식이 만들어낸 멋진 모습이었다. 어떻게 산의 능선 각도와 처마 각도를 그렇게 평행하게 맞춰서 지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또 그 모습은 지금 도시의 건물들이 너무 높아서 주변의 자연(특히 산들)을 가려버리는 현실을 떠오르게 했다, 조상님들은 (지금은 민속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초가지붕들마저도 마을 뒷산 능선의 모습을 따부를 살펴보았더니 유명한 일월오악도 병풍이 자리잡고 있었다. 해,달,산,물,소나무가 도식적이면서도 강렬한 채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삼라만상의 주인이 왕임을 알리는 의도로 그려진 병풍으로, 왕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갔다고 한다. 근정전의 외부에는 사방신과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었다. 모두 익살스런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이12지신 중 없는 동물도 있다고 하셔서 추위와 싸우면서 찾아봤더니 개와 돼지, 용이 없었다. 또 자세히 봤더니 자그마한 해태 새끼를 품고 있는 해태 어미와 아비로 이루어진 해태 가족도 있었다.그리고 사정전으로 향했다. 사정전은 왕의 일터였다고 한다. 즉, 왕은 아침에 사정전으로 출근해 퇴근할 때까지 일상적인 업무를 보았다. 또한 왕과 신하가 나랏일을 의논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사정전의 양쪽에는 만춘천과 천추전이 있는데 그곳은 작은 공간이어서 그런지 온돌이 놓여져 있어서 그곳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의논했다고 한다그러나 사정전에는 난방이 안된다고 했다. 그때는 난로도 없고 전기장판, 오리털 파카는 더더욱 없었을테니 왕은 겨울에 일하다가 동상이 걸리지 않았을까. 물론 나름대로 이겨내는 방법이 있었겠지만. ... 이 곳에서 바람이 칼처럼 몰아쳐서 우리는 곧장 강녕전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어서 잔치도 벌였다고 하는데 아마 영화 왕의 남자에서 남사당패가 왕 앞에서 재주를 부리던 곳이 강녕전이었을 것이다. 잔치 장소는 강녕전의 부수적인 기능이고 본래 강녕전은 왕의 침실인데 용이 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용 자는 곳에 또 용을 둘 수 없어서 다른 건물과는 다르게 용마루가 없다고 한다. 왕의 침실을 둘러보았으니 왕비의 침실도 둘러보아야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교태전으로 향했다. 안타깝게도 왕과 왕비는 침실을 따로 썼다. 물론 조선시대의 사대부와 다른 백성들도 왕과 왕비처럼 따로 살았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는 부부 간에 불화가 있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유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부부가 한 이불을 덮고자는 현대인의 생활이고 섬세한 미가 느껴지는 뜰이었다. 각각 식물들이 층을 지어서 심어져 있었고 굴뚝이 좌우로 하나씩 있었다. 굴뚝에 새겨진 모습들은 아름다웠고 봄에 꽃이 핀다면 더욱 멋진 풍경이 될 것 같았지만 나는 어쩐지 속이 갑갑해졌다. 한번 궁으로 들어오면 바깥 출입이 거의 불가능한 왕비를 위해 만들어진 아미산. 봄에 나비나 새 한마리를 아미산에서 본다면 아마 왕비는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뜰이 계단식으로 층층이 되어있기 때문에 왕비의 눈높이가 되려면 계단에 올라서야 아미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계단에도 올라서 봤지만 좀더 넓은 시야에서 뜰을 감상할 수 있을뿐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아 서글퍼졌다. 날씨가 너무 추웠기 때문에 경회루와 향원정 등등은 포기하고 아미산을 넘어 바로 왕조의 시어머니들이 살았던 자경전으로 향했다. 아미산에서 자경전으로 넘어가는 공간에는 나이를 알 수 없는 소나무가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또 아미산에 쓰인 벽돌로 쌓은 담벽도 있었다. 담벽에 새겨진 소나무, 매화, 국화, 모란 등등 갖가지 무늬만으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나게 추운 날씨 때문에 자경전을 대강 둘러본뒤 바로 동궁으로 갔다. 동궁은 세자가 살던 곳인데 이곳에는 세자비의 침실도 있었다. 역시 교태전과 강녕전이 따로 떨어져있듯이 세자비의 침실도 세자의 침실과 떨어져 있었다.날씨가 너무 추워서 향원정과 경회루를 둘러보지 못해서 아쉬웠자만 광화문에서 동궁까지 둘러보고 나니 어렵게만 느껴지던 경복궁이라는 공간이 조금은 가깝게 다가왔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와도 같은 곳인데 사람이 살지 않게 된지 어언 백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비어있는 궁궐이 휑하니 쓸쓸해보였다. 경복궁도 사람이 살라고 만들어놓은 건축물인데 그렇게 비워놓으니 마음이 아팠다. 게다가 예전에는 지금보다 건축물이 훨씬 빽빽하게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군데 군데 빠진 건물도 많고 그래서인지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함부로 유린 한다.
나라야마 부시코자연환경과 인간의 관계20101125 정지안나라야마 부시코 속의 일본 문화는 현대 사회의 상식이나 도덕과는 엄청난 괴리를 보인다. 그곳에서 몇몇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하게 느껴지지만 어떤 장면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영화의 주된 흐름이 되는 고려장을 비롯하여 (일본에서는 기로풍습이라 한다) 영아 살해 및 유기, 우리의 가치관으로 파악했을 때 용납되지 않는 문란한 성생활 등은 이 작은 마을에서는 극히 정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먹을 것과 관련되는 범죄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타츠헤이의 며느리인 아야메네 가족에게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집안에 린치를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그 가족은 자식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하지만 사람들은 굴하지 않고 폭력을 행한다. 이렇게 보면 자식이 많은 것은 죄가 되고, 장차 자라서 식량을 소비하게 될 아기를 죽여서 유기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입을 하나라도 줄이려는 노력은 한 집안에서 장남만이 장가를 가는 풍습을 만들어냈다. 결혼은 최소한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제도화된 형태일 뿐이다. 게다가 이 마을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따로 묻는 일은 잘 없고 영아를 살해한 후 논에 유기하는 것처럼 절벽에 떨어뜨린다. 장례식 하느라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애절한 감정을 가질 시간에 차라리 더 열심히 일을 해서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하자는 것으로 생각된다. 노인들이 죽음에 내몰리는 날 아무리 추워도 솜옷을 입히지 않고 눈이 오면 오히려 운이 좋다는 노래가 존재한다. 나라야마 산에 가면 굶주려 죽게 되는데 이는 고통스러우니 차라리 추워서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어 동사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일말의 가책을 덜기 위해- 이런 노래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들은 밥을 먹을 때도 반찬과 같이 먹는 일이 없다. 이것도 부족한 자원 때문인 것 같아 보인다. 조선 사람들이 주막에 가서 돈을 내고 술을 마셨던-조선에서도 식량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으나 가난한 서민이 술을 파는 것은 허용되었다고 한다― 것과는 대조되게 영화 속의 사람들은 술을 제조할 곡물이 부족한 탓에 특별한 때만 술을 내놓는다.노인을 나라야마 산에 버리고 오는 것 또한 생존과 관련된 풍습이다. 먹을거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척박한 환경이다보니 노인 공경과 같은 도덕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문화 이전의 삶으로, 나라야마 산 밑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의 질은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삶을 유지하는가, 하는 것이다.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적어도 두가지 생각을 하게될 것이다. 하나는,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저렇게 야만스러워질 수 있는가, 최소한 인간이 할 도리는 하고 살아야 하지않겠는가, 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저런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려면 어쩔 수 없겠지 하는 생각이다. 영화 속에서 타츠헤이는 (비록 마을에서 부유한 쪽에 속하지만) 인간이 기본된 도리를 잊고 사는 마을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어머니를 나라야마 산에 유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는 인물이다.타츠헤이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유감없이 나라야마 산에 데려다 놓으려 했었다는 것과 대조하면 타츠헤이의 태도가 더욱 두드러진다. 또한 타츠헤이가 나라야마 산에 결국 어머니를 데려다 놓으려고 했을 때 나라야마 산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 치매 걸린 할아버지를 낭떠러지에 밀어뜨리는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즉 타츠헤이는 뿌리 박힌 풍습 속에 자신의 슬픔을 숨기고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묵인해야만 했다. 만약 그 풍습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마을의 다른 가족들에게 비난을 받았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만약 타츠헤이가 다른 가정들보다 부유하지 않았더라도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었을까.사람들은 영화 속의 이런 장면들을 보고 그나마 타츠헤이가 제일 사람답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러나 일본만 노인을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 남태평양의 피지섬에서는 아들이 자기 스스로 먹고 살 능력이 없는 노인을 살해하며, 아메리카 인디언 중 어느 부족은 노인에게 물과 약간의 식량만 주고 유기한다. 이누이트족의 노인들은 겨울에 식량이 바닥 났을때 노인 스스로 미끼가 되어 곰을 유인한다고 한다. 피지섬과 아메리카 인디언, 이누이트 족이 이런 풍습을 가지게 된 것은 영화 속의 사람들이 생존 본능에 충실하게 된 이유와 같다. 사람들은 자연환경이든, 사회환경이든,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 풍습을 만들어낼 만큼 환경이 절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20세기 초반까지도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정도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생존을 위해 노인을 억지로 죽음에 내모는 풍습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영화 속의 척박한 환경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고온/한랭, 건조/습윤한 기후를 모두 가지고 있고, 산지와 육지, 삼면인 바다를 끼고 있어서 식생 자원이 풍부하고 생태가 다양했다. 또 산세가 험하지 않고 군데 군데 평야와 분지가 존재해서 영화에서처럼 경작할 땅이 부족 한 고충을 겪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영아 유기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경작에 참여한다면 오히려 가족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어떻게 살았을까과목 : 한국의 역사와 문화제출일 : 2010.10.19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들어온 지금까지 국사를 배워왔다. 어릴 때는 뭣도 모르고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였지만 점차 나에게 자아가 생기면서 드는 의문이 있었다.왜 항상 우리가 배우는 역사의 중심은 왕과 집권층, 승리자이고 실제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옛날 서민 이야기는 밤톨만큼 나올까. 분명 우리와 같은 서민이 국가 구성원의 대부분이었을텐데 어째서 교과서에는 화려함 뒤에 가려진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루지 않는걸까. 모든 사건을 기록하기는 쉽지 않기에 굵직굵직한 사건들만 서술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소소한 이야기들도 중요하다. 우리의 조상이 모두 집권층이었을리는 없다. 오히려 일반적인 서민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조선 후기에 족보를 사고 팔고 좋은 집안 족보에 이름을 끼워넣는 세태가 만연했으니 설사 누군가의 집안이 양반이라고 족보에 나와 있어도 신빙성이 크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혹시 모르니) 나의 뿌리가 되는 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아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일반 서민들의 일화를 서술해놓은 사료는 잦은 전쟁과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사라졌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전통도 우리 역사 속의 시련을 거치면서 그 때와는 많은 변화가 있었으리라.과제를 위한 여러 책들 중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고른 것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말그대로 어떻게 살았는지가 궁금했다. 대한민국 바로 직전의 국가였던 조선 사람들은 어떤 체계를 갖추고 살았는지 이 책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의식주와 관련된 각각의 소주제들이 모여 조선의 일상사가 어떠했는지 전반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너무 생활사에만 치우치지 않고 경제 정치 등도 함께 다루고 있어 좋았다. 이것이 바로 내 뿌리를 조금만 타고 올라가면 계시는 조상님들의 일상이라니! 머리말에는 '과거는 현재의 원인이고,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다. 미래는 또한 가 수도를 옮기고 고려 왕족들을 무참히 살해한 후 명나라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받아 고려왕조에서 바로 조선왕조로 이어간 것이다. 이러한 조선시대를 간략히 살펴보면, 조선 왕조의 개혁정치로 고려말기의 여러 가지 모순이 시정되고, 정치 참여의 폭이 확대된 시기로 개인의 능력이 존중되고, 정치체제와 사회제도가 보다 합리적으로 개편되었다고 나와있다. 조선 왕조는 유교 정치 이념을 내세워,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이룩하였다. 대내적으로는 수취 제도를 개선하여 서민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교육의 기회를 넓히며, 관리 선발 제도를 정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신축성 있는 외교 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조선 사회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양반 사대부들에 의한 토지 겸병과 농장의 확대는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켜 경제의 피폐를 가져왔다. 이에 사회 병폐의 해결과 왕조의 안정을 위한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내세우는 사림의 진출이 현저하였다. 사림은 훈구파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몇 차례의 사화를 겪었으나, 16세기 후반에는 사림이 집권하면서 붕당정치가 전개되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유교적 민본주의를 토대로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전통적인 불교와 도교 및 무속 등 잡다한 토속 신앙과 관습을 유교적인 의례로 개혁하는 한편, 양반 중심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농본주의를 표방한 조선 사회에서는 모든 산업 시책을 농업 위주로 추진하였다. 따라서, 초기의 상공업은 국가의 통제 아래 억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16세기부터는 농업의 발달과 함께 상공업도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이 전개됨으로써, 수공업과 상업 및 대외 무역이 점차 발달하였다.조선시대의 문화는 크게 유교주의에 입각한 불교, 도교, 토속신앙이 융합된 서민 문화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발달에 따라 유교적인 양반 문화가 그 폭을 계속 넓혀 나갔다. 학문과 사상, 문학과 예술 등 그 문화를 향유한 계층은 것 같다. 신분제도는 유교가 함꼐 작용하면서 사회 전반적인 사람들에게 굴레를 씌웠다. 양반이 아니면 과거에 응시할 수 없어 인재를 고루 쓸 수 없었고 좋은 제도가 있어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폐단이 있었다. 처음에 좋은 의도로 시작된 시스템이 나중에는 결국 양반이 백성을 억압, 착취하는 구조로 변하게 마련이었고 이 때문에 어느 누구든 신분 상승의 욕구나 신분제도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천주교 사상이 널리 퍼지고 부유하지만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 신분을 사고 판 것은 이와 같은 현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양반이 아니면 그들에게서 인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삶이라니, 몇년전 사회적으로 대두된 학력위조 문제와 다를 바가 없다. 현재는 신분제도가 없어졌다고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유리층이 사람들을 나누는 현실이 슬프다. 우리나라 대부분 사람들이 대학 졸업자여서 몇십년전과 다르게 그 희소성이 떨어진 것처럼 조선 후기 누가 어떤 계급인지에 대한 가치는 하락하고 말았다. 이를 되새겨 볼때 신분질서(오늘날에는 학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제되지 않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 구조가 있지 않는 이상 뼈 아픈 사례는 반복될 것이다.또한 조선시대의 통념이었던 유교의 영향은 지금의 남녀의 역할을 크게 구분짓게 했다. 남자는 밖의 일을, 여자는 안의 일을 맡게 한 것이다. 물론 서민들의 경우는 내외법이 지켜지지 않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이 조상들이 양반이라고 고집하는 입장에서 보면 부부가 내외법을 지키는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평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여성의 사회적인 위치가 올랐다하더라도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집안일은 여성의 일이라고 생각되어 '수퍼 우먼 콤플렉스'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기에는 여성의 가정 내에서의 지위는 절대적이어서 혼인, 상속문제를 주도적으로 처리하였다. 수렴첨정도 여성의 이 권리에서 비롯되었다. 그 때는 상속도 딸과 아들 구분 없이 장남에게만 조금 더 많이 분배되었을 뿐 나머지 자식들은 공평하게 물려받았다진 위인이지만 당시에는 그녀의 재주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한 가정의 어머니로, 아내로 머물러 있어야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오늘날에는 떨어져 있는 여성의 위치를 올리려고 노력한 덕분에 여성의 지위는 많이 신장되었다. 물론 현재 여성 지위는 사회내에서 얻기 위한 것으로 조선전기에 가정에서 가졌던 여성의 지위와는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처가 이혼할 수 있는 경우는 남편이 의절을 범했을 경우, 집을 떠나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고 3년 이상 지났을 때이다. 또, 처가 남편을 구타했을 때는 상처여부에 상관없이 이혼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남편이 처를 때렸을 때는 뼈가 부러지는 이상의 중상을 당했을 때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남녀간의 차별적인 모습과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어 쫓겨난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생각났다. 위와 같은 모습과 동시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적극적으로 윤씨를 내쫓을 것을 주장했다는 사실로 보아 '삼종지도(三從之道)'라고는 하지만 어머니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습첩이나 소박과 같은 관습들은 결국 조선시대 여인을 남성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삶으로 만들어버렸다.오늘날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교육이란 중요한 것이었나 보다.그 목적은 현재와 달리 관료양성과 유교이념의 유지에 있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교육의 대상이 한정되고 차별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나 다를까양반, 서얼, 평민들 사이의 호칭이 바뀌기도 한다. 과거 시험에 서얼과 평민은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은 관료양성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기관인 향교에는 서얼과 평민이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성이 향교의 교육기능이 점차 약화되면서 향교의 성격은 양반 사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향촌 지배기구의 하나로 변질되었다. 조선후기 향교는 통치의 한 수단으로, 양반들은 여론을 불러일으켜 유회(儒會)를 열고 통문(通文)을 작성하여 관정(官政)을 시비하고 자신의 신분적 이해를 대변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담고 있는 대학교와 대학교육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진리탐구의 장소였던, 상아탑인 대학교가 요즘은 어떻게 변하였는가. 취업을 위한 대형 학원이 되진 않았나. 우리가 대학교와 전공을 선택할 때도 적성에 맞춰, 탐구심을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졸업 후 취업이 잘 될 과를 선택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교육대학교에도 진정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왔다기 보다는 직업의 안정성을 보고 진학한 사람들이 분명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현실 때문에 놓는 것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그 지위와 신분을 위해 교육기관을 이용해 폐단을 일으켰다면 오늘날 우린 학벌을 이용해 취직하고자 하는 폐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대학에 와서 그리고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오늘날 대학교에서는 어떠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단순히 나만 잘 먹고 잘 살 취업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정의사회 구현, 민주사회 구현 등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진정한 지식인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이 책에서는 또한 궁궐 사람들의 삶이나 왕실의 이야기, 옛 사람들이 우주와 대자연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어떤 무기를 이용하였는지,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그 소재들은는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사회 구조와도 맞물려 구성되어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이니만큼 현재와 비슷한 구석도 있지만 그에 반해 사라진 문화도 있었다. 현재 진리로 여겨지는 것도 후대에 더욱 발전한 기술로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을 것이고 분명 우리가 지금 당연히 여기는 관습도 몇십년, 몇백년이 지나고 나면 사라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조선시대는 근대와 이어지면서 신분제가 붕괴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때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양반이라는 신분과 지위를 통해 많은 폐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해본다.
#볼링의 역사-세계 볼링의 역사볼링의 기원은 명확하지는 않으나 영국의 고고학자인 페트리 교수가 기원전 5,000년 이상으로 보이는 이집트의 어린이의 무덤 속에서 현재의 볼링 용구와 아주 닮은 돌로 만든 볼과 핀을 발견했는데, 이것을 오늘날 지구상에 생겨난 최초의 볼링 도구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볼링이 고대이집트에서 어떠한 경로로 해서 중세유럽에 전해졌는가는 명확하지 않지만, 볼링이 역사상에 나타난 것은 13- 14 C의 중세 유럽에서이다. 그러나, 중세의 볼링은 현재와 같이 게임을 유쾌하게 즐긴 다기 보다 종교상의 의식이나 점을 치는데 이용되었다.중세 유럽에서는 볼링이 ‘보울즈’라고 불리면서 사람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고, 보울즈는나무토막과 나무 볼로 잔디 위에서 행해지는 게임이었다. 이 무렵 독일 교회에서 볼링이 ‘케글링(Kegling)`이라는 종교의식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케켈(Kegel)이란 원추형의 기둥이라는 뜻으로, 이것을 세워 놓고 둥근 물체를 굴려서 쓰러뜨렸는데, 케겔은 악마의 상징으로써 이것을 쓰러뜨린 사람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차츰 기둥을 쓰러뜨리는 것에 재미와 흥미가 생기면서 점차적으로 신앙심과 관계없이 취미로 즐기게 되었고, 흥미 본위의 놀이로 교회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볼링은 일정한 규칙 없이 행해지다가 마틴 루터에 의해 핀의 수가 9개로 정해지고(나인핀 게임), 다이아몬드 형으로 배열되는 등 게임의 규칙이 정해졌다.볼링은 청교도 유럽인들의 미국 이민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 전파되었지만 도박의 수단으로 변질되는 부작용으로 인해 몇몇 주에서 볼링 금지령이 내리게 되었다.하지만 건전한 오락으로 즐겼던 애호가들은 핀의 개수를 10개로 늘리고 다이아몬드 형 배열에서 역삼각형으로 배치하는 텐 핀 게임(Ten Ping Game)이 고안되어 다시 건전한 스포츠로 성행하게 되었다. 1895년 뉴욕에서 미국볼링협회가 설립되고 레인의 길이와 볼의 크기 등 볼링에 관한 여러 규칙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볼링은 대중들에게 가까이 하기는 어려운 여가활동이었다. 한 게임을 할 때마다 핀을 일일이 핀보이의 손으로 세워야해서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1951년 핀을 자동으로 세팅해주는 기계가 발명되면서 볼링은 대중들에게 좀 더 친숙한 스포츠가 되었다.-한국 볼링의 역사우리 나라의 볼링은 1920년대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해방 후의 일이다. 1960년대 초 미군부대 안에 볼링 경기장이 생긴 것을 시작으로 1967년 서울에 한국 볼링 센타가 설립되었고, 1973년 대한 볼링 협회가 창설되었다. 1978년에는 제 8회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FIQ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가맹하였다. 1979년에는 FIQ에 62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볼링은 1983년 전국체전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 후 한국 볼링 경영자협회와 학생 볼링 연합이 창설되고 1995년 한국 프로 볼링 협회가 공식 출범하여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 프로볼링국가가 되었다.#볼링의 예절과 에티켓볼링은 여러 사람이 함께 즐기는 스포츠로, 자신이 게임을 하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볼링장 시설물을 훼손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처음 볼링을 접하는 사람이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무심코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므로 볼링장에서 필요한 예절을 미리 숙지해놓는 것이 좋다.-동시에 올라섰을 때는 오른쪽 선수에게 양보한다.-로프트 볼링을 하지 않는다.볼을 레인에 릴리스할 때 자연스럽게 손에서 빠져나가서 굴러가야하는데 그렇지 않고 볼이 던져지듯이 떨어져서 큰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레인이 상하게 되고 손을 다치는 경우도 있어 조심해야 한다.-파울라인을 밟아서는 안 된다. 파울 라인을 밟으면 볼링화 바닥에 기름이 묻어서 어프로치 위를 오염시키고 미끄럽게 한다.-볼을 잡은 채 어프로치 위에 오래 서 있지 않도록 한다. 옆 사람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어 타이밍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투구 후 오랫동안 어프로치 위에 서 있지 않아야한다. 핀이 넘어지는 즉시 되돌아 올 것.-고성방가를 삼간다.-지정된 자기 볼을 사용한다. 옆에 있는 레인과 같은 리턴 랙으로 볼이 돌아오므로 여러 사람이 게임을 할 때에 바뀌지 않도록 한다. 볼 주인이 따로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투구는 볼이 완전히 세트된 다음에 한다. 미리 투구하면 기계가 부서지고 볼이 깨진다.-맨손으로 투구 연습을 충분히 배우고 난 후에 볼을 가지고 투구해야한다.-음주 후 볼링을 하지 않으며 흡연은 볼링장 내에서 하지 않도록 한다.-볼링화에 물기 또는 이물질이 묻지 않도록 주의한다. 슬라이딩 중 부상당할 우려가 있다.-볼링화 이외의 신발을 어프로치 위에서 신어서는 안된다. 어프로치 위를 오염시킨다.-투구 후 커버나 스트라이크를 쳤을 경우 축하해주고 오픈(2번 이상 던져도 10개의 핀을 다 쓰러뜨리지 못했을 때)시에는 위로를 보내준다.#볼링 시설과 용구① 레인볼링의 투구대를 레인이라고 하며, 레인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규격에 의하여 만들어진다.① 레인의 구조와 명칭-엘리 베드 : 실제로 볼이 굴러가는 바닥-어프로치 : 투구를 할 때 스텝하는 곳. 현재 일반 볼링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레인의 길이는 4.87m이다.-파울라인 : 엘리 베드와 어프로치의 경계를 표시하는 검은 선으로 이 라인의 폭은 약 2.5cm이다.-핀 택 : 엘리 베드 끝에 핀을 세워 놓는 곳으로, 핀의 위치를 늘 일정하게 하기 위한 표시가 되어있다. 이 표시는 인조섬유로 만든 직경5.71cm의 둥근 것으로, 핀스포트라고 한다.-피트 : 볼과 핀이 굴러 떨어지도록 낮게 되어 있는 부분이며, 뒤쪽에 볼의 충격을 막기 위한 쿠션장치가 되어있다.-킥백 : 핀 택에서 피트까지 양쪽으로 섬유제를 붙인 나무판 벽으로서 볼에 의해서 튄 핀이 여기에서 다시 튀어 다른 핀을 넘어뜨리기도 하는 곳이 다.-거터 : 엘리 베드 양쪽에 평행으로 판 홈통으로, 여기에 떨어진 볼은 핀에 맞지 않고 그대로 피트로 굴러 들어간다.-볼리턴 : 피트에 떨어진 볼은 자동기계에 의해 바닥 밑에 있는 코스 인 볼 리턴을 통하여 리턴 랙까지 되돌아온다. 되돌아 온 볼이 있는 대를 리턴 랙이라고 한다.-마스킹 : 핀 택 위쪽의 기계를 가리고 있는 볼링장의 얼굴에 해당하는 부 분으로 여기에 스트라이크나 남은 핀의 위치가 볼러에게 잘 보이도록 나타난다.-어프로치 스폿 : 어프로치 위에는 파울라인으로 부터 4.55m와 3.66m, 2.55cm지점 세 곳에 각각 둥글게 같은 간격으로, 일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파울라인과 거리가 2.55cm로 가장 가까운 표시는 볼을 던지는 순간 최후 스텝 위치를 알게 하는 점이고, 나머지는 투구 동작에 들어갈 때 최초의 위치를 잡기 위한 것이다.-가이드 스폿 : 정확한 컨트롤을 하여 에임 스폿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에임 스폿 : 엘리 베드 위의 가이드 스폿보다 멀리 산 모양으로 늘어 선 7개의 표시②핀- 핀의 재질핀은 볼과 부딪히는 강한 충격에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하고 견고한 단풍 나무를 재료로 하여 만들며, 표면은 특수하게 칠해져 있다. 핀의 밑 부분은 각이 지지 않아 넘어지기 쉬운데, 이것을 막기 위하여 고리모양의 글라스 파이버를 부착했다. 핀 표면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목 부분에는 표가, 어깨부분에는 공인표와 생산자의 마크가 붙어있다. 공통규격을 인정하는 표가 떨어지거나, 칠한 것이 벗겨진 핀은 공식 경기에는 사용할 수 없다.- 핀의 크기핀의 키는 37.5cm이고 목 부분의 직경은 3.5cm 머리 부분의 직경은6.37cm이며, 볼이 직접 닿는 불룩한 부분은 직경이 11.9cm 이곳의 높이는11.25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