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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의 왕궁을 찾는 20여년의 여정, 익산 왕궁리유적 발굴 이야기를 읽고
    발굴이란 단어는 나에게 그리 생소한 단어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익숙하다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다. 07년도에 역사교육과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꾸준히 듣던 진로특강에서 빠지지 않던 것이 민속학과 고고학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때부터 꾸준히 고고학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또 우리 과에는 고고학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한창균 교수님이 계시고, 한국선사시대사같은 전공과목을 들으며 고고학에 대한 정보를 자주 들었었다. 후배 중에서는 고고학에 관심이 있어서 한창균 교수님이 계시는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입학한 학생도 있을 정도였다. 또 역사교육과 출신 선배님들 중 고고학계로 진출해계신 분들도 꽤 많고, 지금도 지속적으로 만나고 있는 동기도 금강문화재연구소에 고고학계로 진출해있다.이렇게 많은 정보를 듣고 가까이 있는 고고학, 발굴이고 내가 전공하고 있는 역사에도 꽤 가까이 있는 학문이지만 사실 별 관심은 없었다. 내가 배워오던 역사는 거의 사료를 중심으로 한 역사수업이었고,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가르는 ‘문자’라는 것이 나오고 기록이 시작되며 역사는 사료를 중심으로 짜이게 되었고, 발굴이라는 것은 사실 선사시대에 관한 연구에는 절대적인 학문이지만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사료를 바탕으로 하여 짜인 역사에 발굴된 유적·유물이 사료가 모두 못 채우는 간극을 채우고 있다고만 생각하였다. 떼려야 뗄 수 없는 학문인 고고학과 역사학임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의 하부정도에만 있었다고 군대 시절까지 역사를 전공한지 6년이 넘어가는 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고,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항상 사료비판, 사료비판하며 사료에 적혀진 모든 것을 믿으면 안 된다고 배워왔지만 사실 사료로만 역사가 짜인다고 생각한 나에 대해서 부끄러워졌다. 그러면, 책의 내용을 살펴보며 감상문을 이어나가도록 하자.먼저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발굴이 20여 년 동안이나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무령왕릉의 발굴생각을 심어준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현재는 발굴이 아주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익산 왕궁리 유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나의 유적을 20여 년 동안 발굴하고 있다는 점. 이러한 점이 무령왕릉 발굴에 대한 실망스러운 기억만 안고 있던 나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익산’이라는 도시가 백제에서 그렇게 중요한 고장이었는지에 대해 다시 알게 되었다. 사실 임용고사를 준비하고 있는 나이지만 ‘백제의 고도’를 생각하면 위례성이었던 서울, 웅진이었던 공주, 사비였던 부여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데 무왕대의 도읍지로까지 발전될 수 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아직도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구나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먼저 책은 왕궁리 유적의 발굴과정과 발굴성과에 대한 소개, 그리고 발굴 중 에피소드로 나누어져있다. 먼저 발굴과정에서 느낀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익산 왕궁리유적은 예전부터 왕궁평, 왕궁지 등으로 불리며 고대의 왕궁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되어 많은 관심을 받았고, 이러한 관심을 토대로 많은 견해가 제시되어 그 견해 규명을 하기 위해 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책에서 나오듯 사실상 왕궁리유적이 발견되기 전에는 익산지역에 왕궁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였는데, 왕궁리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하고 성과가 드러나며 확실한 견해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지명에서부터 발굴이 시작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또 이 책을 보며 처음 안 사실이다. 사실 역사교육과에서는 춘계답사, 추계답사를 나누어서 답사를 가게 되는데 춘계답사 같은 경우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민속답사’라고 하여 지역답사가 아닌 도시화되지 않은 농촌에 가서 마을의 관련된 민속신앙에 관해 묻거나 마을에 현존해있는 고고학에 관련된 유적·유물들을 찾는 답사를 행한다. 민속답사를 다니면서 마을 지명의 유래 같은 것을 듣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지명의 유래가 없이 마을이름이 정해진 곳은 거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왕궁리도 마을의 지명에서 백제사사원의 형식을 가진 관궁사일 확률이 높아졌다. 당시에는 이러한 왕궁설이 허황되게 들렸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무왕의 천도가 명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고려시대에 작성한 것으로,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진 고려이고, 삼국을 통일했던 통일신라의 뒤를 이은 나라이기 때문에 사실상 백제지역은 소략될 수 있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삼국사에 대한 공신력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료비판이 진행되지 않은 채로 맹신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든 생각은 ‘사료가 절대적인 것이 절대 아니고, 고고학을 통해서 역사가 새로 써질 수도 있구나!’라는 것이다.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이 진행되면서 왕궁리 5층 석탑을 중심으로 한 절터가 확인되면서 사찰이 존재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 사지에는 ‘관궁사’나 ‘왕궁사’라는 것이 써진 명문기와가 출토되면서 사찰이 존재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고 나왔는데, 관궁사나 왕궁사라는 것이 명문기와가 출토되었으면 왕궁 안에 있는 사찰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을테고 단순한 절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하긴 이러한 기와에 있는 것으로 판단하긴 그렇지만 이러한 유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이후 석축과 성벽이 등장하였다. 성벽이 등장하며 왕궁이나 그에 버금가는 중요한 건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확실해지는 시점이었다. 나는 특히 눈에 보이는 석축이 굉장히 신기했는데, 복원해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정교하고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모식도를 보았을 때 석축과 건물터를 보았을 때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항상 느껴왔지만 고대의 건축기술과 미술작품은 대단히 계획적이고 치밀한 과학적 기술을 활용하여 만들어졌다. 이러한 자연의 섭리와 과학적인 설계를 통해 어떻게 을까? 선조의 지혜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이후에 기와와 공방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먼저 기와에 대해 생각해보면, 하게 발견되는 유물에서도 끈기를 가지고 무엇인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 것은 끊임없이 찾아보고 분석하는 저 정신이 어떻게 보면 바로 사학자의 정신, 고고학자의 정신이 아닌가 싶다. 공방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이후의 일은 어찌 될지 몰랐겠지만 발굴하던 중 반짝거리는 빛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초점을 놓치지 않고 연구하고 분석한 결과 금을 세공하는 도가니 관련 유물을 다량 찾을 수 있었고, 당시 최고의 금세공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굉장히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발굴을 하다 보면 발굴자에게 유물이 말을 거는 극적인 순간을 경험한다고 한다. 매일 바라보던 유물들이 어느 날 다르게 보이는 순간, 무언가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그동안의 관점에서 조금 다르게 유물을 해석하는 순간, 그런 순간이 되면 유물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 이다. 사실상 유물이 말을 걸어올 일은 없다. 하지만 한참을 고생하며 연구하고, 바라보고, 관심 있게 지켜보다보니 새로운 관점에서 눈에 들어온 것일 것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닌 것 같다.다음으로 발굴된 것은 고대 화장실이다. 공방의 발굴로 단순히 절터가 아닌 것은 기정사실화되어있었고, 왕궁리유적의 위상이 높아가는 시점이었다. 그때 바로 고대 화장실이 발견되었다. 사실 굉장히 궁금한 부분이었다. 과연 옛날 사람들은 대·소변을 어디서 보았을까? 어떻게 처리했을까? 분뇨가 방치된다면 굉장히 큰 문제일 테니 말이다. 책을 읽으며 굉장히 신기했던 점은, 대형 화장실을 직접 땅을 파서 만들었으며 분뇨가 땅으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점토를 두껍께 칠했으며, 굉장히 과학적인 설계로 일정한 정도의 오수가 차면 자동으로 수로로 배출되게 하는 과학적인 설계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여 수세식으로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그냥 구덩이를 파서 화장실을 만들고 속칭 ‘똥장군’이라는 사람이 다니면서 처리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고대에 이렇게 효과적이고 는 새로운 시각의 전환이 일어났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내부의 변화도 있었고, 예산 편성의 변화도 있었다. 사실 ‘역사는 반칙’이라는 말을 즐겨쓰는 편인데, 지금에서야 이 왕궁리유적이 백제의 왕궁터라는 것을 알고 책을 보고 알았기 때문에 ‘조금 더 빨리 알아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조금 더 삼국시대에 대한 역사인식의 변화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문득 해보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모든 발굴이라는 작업은 국가에서 예산을 편성해서 나오는 것이고 그 예산이라는 것이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다시금 들었다. 이 발굴이라는 작업이 역사를 공부하는 나에게는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고고학의 중요한 방법이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각해보았을 때 세금낭비라는 생각도 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모든 일에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외벽이 발견되고, 여러 사실들이 나오면서 백제의 왕궁터를 찾을 수 있었다는 데 다행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이후 정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역사교육과에 재학중에 유적답사를 총 4번 다녀오기도 했고 이번에 일주일동안 기차여행을 하면서 유적답사를 꽤 많이 했는데, 갈 때마다 항상 굉장히 찬란했던 문화인 정원에 대해 항상 감탄하게 된다. 궁남지, 안압지 뿐만 아니라 경복궁의 정원 등의 정원을 복원하거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에 찾아가면 뭔가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고 ‘이곳이 바로 낙원이구나’라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물론 ‘아, 술맛 참 좋겠다.’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말이다. 그만큼 정원이라는 공간은 굉장히 중요시되는 곳이고,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미적 감각이 뛰어났고, 과학적이고,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원이 왕궁리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책의 말을 살짝 빌려보자면 “연못으로 들어오는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 ‘ㄱ’자 모양으로 만든 물길, 그 물다.
    인문/어학| 2013.04.09| 5페이지| 2,000원| 조회(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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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치호의 사회진화론에 관하여
    1. 서론(1)들어가며사회진화론은 1870년대부터 대두되어 1910년까지 크게 유행한 사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과 미국, 두 나라를 통해 최초로 접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은 양개초의 저작을 통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사회진화론이 유행하기 전 먼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자기 나름대로 적용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유길준과 윤치호라고 볼 수 있다.반대로 생각해보아서 윤치호는 한국 근대사에 족적을 남긴 거두였다. 말년에 친일적인 사상을 받아들여 윤치호 평전의 이름도 『윤치호의 협력일기』일 정도로 평가가 절하되고 있지만, 근대사의 거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에 일본, 중국, 미국에서 유학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었다. 두 번째로는 한말 개화ㆍ자강운동의 핵심인물이었으며, 세 번째로는 일제시기 조선 감리교의 대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일제말기 친일파의 대부로 활동하였다.그래서 이 논고에서는 한말 개화지식인이었던 윤치호가 받아들였던 사회진화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2)연구의 흐름윤치호에 대한 연구는 1975년 『尹致昊 日記』의 간행으로 본격화되었다. 일기 간행 이후 역사학계와 기독교계에서 연구가 되었는데, 역사학계에서는 「윤치호 연구 -그의 일기를 중심으로-」(1976, 박정신), 「윤치호의 일본유학」(1988, 이광린)등의 논문이 나오며 윤치호의 개화사상의 형성과 실천과정을 개화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고, 기독교계에서는 「초기 윤치호의 기독교신앙과 개화사상-1883년에서 1905년까지를 중심으로」(빈경배, 1978) 등의 논문으로 윤치호의 개화운동과 기독교와의 연관성을 연구하였다.이러한 개괄적인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1990년대 이후에는 윤치호의 사회진화론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역사학계와 정치학계에서 이루어졌는데, 역사학계에서는「일제하 윤치호의 내면세계 연구」(2000, 김상태) 등의 논문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사회진화론이 보급된 시기와 초기고, 그 이후에 일본에 잔류하여 도진샤(同人社)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는데, 이때 윤치호는 근대 사상을 가진 인물들과 접촉하면서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일본의 근대적 면모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윤치호는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의 발달된 모습에 매료되었고, 윤치호가 도진샤에 있을 당시 조선에서는 임오군란 이후 청에게 압제당하는 모습을 보며 조선의 현실에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러한 상태에서 근대사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사회진화론을 접하고 받아들이게 된다.윤치호가 처음으로 접한 사회진화론은 일본의 사회진화론인데, 이것은 일본에서 서구의 충격으로 신제도와 신사상을 수립해야 하는 과정에서 목적론적으로 우승열패·적자생존의 원리가 부국강병과 국가주의를 수립하는 이론으로 해석되었다. 윤치호는 이러한 ‘아시아적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또 일본에서 윤치호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았는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근대화를 저해하는 봉건적 잔재를 제거하기 위해 유교를 철저히 비판하고 민중교육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여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윤치호가 일본유학 이후 유교적 가치관을 완전히 비판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였는지는 논문간의 차이가 있다. 대다수의 논문은 일본유학 이후 윤치호가 유교적인 세계관을 비판하고 사회진화론적으로 선회하였다고 보고 당시 조선을 미증유의 야만국가라고 판단한다고 보았지만, 「개화기 윤치호의 사회진화론 수용과 적용」(2008, 박신애)에서는 동도서기적 입장에서 유교적 덕치를 따랐다고 보았다.(2)중국유학과 미국유학을 통한 사회진화론 수용윤치호는 갑신정변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기독교 선교학교인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여 조선인 최초로 남감리교 세례인이 되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처음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과정은 유교의 수기치인의 방법으로는 절제에 한계를 느껴 이를 대체할 만한 종교로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이것이 국가적인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이 기독교적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유길준과는 달리 사회진화론이 풍미하던 미국에서 직접 겪은 인종차별 경험을 바탕으로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을 원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영향으로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에 따라 도태될 민족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열등감은 적자로 진화한 일본에 대한 동경을 유발하였다.또한 윤치호는 차별적 사회질서의 책임은 강자보다는 약자에게 있다고 보았고, 백인들이 가지는 민족적·인종적 편견을 용인하며 이러한 현실 이해가 ‘힘’의 질서를 수용하는 태도였으며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가 정의가 아니라 ‘힘’이라는 입장에 이르게 된다.3. 윤치호의 사회진화론 특징(1)아시아적 사회진화론의 반영윤치호의 사회진화론은 수용과정에서도 보았듯이 아시아적 사회진화론·기독교·사회진화론의 배합을 시도하여 윤치호만의 독특한 사회진화론이 형성되었다. 먼저 유색인종차별이나 제국주의를 ‘힘’에 의한 사회 질서로 해석하였는데, 힘의 논리에 의해서 사회가 움직인다고 보고 이것은 윤치호가 사회진화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윤치호는 사회진화론에 동조했지만 조선의 개화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윤치호는 사회진화론의 우승열패·적자생존의 원리를 인정하면서도 모든 인종에게 공평한 기회가 부여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갖는다. 미국유학을 통해 세계는 힘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강자가 약자에게 지배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결론에 이르지만, 약자에게 개화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지고 조선을 아직 개화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고 보았다. 또 조선 또한 개화의 기회를 통해 생존하기 적합한 나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아시아적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고수하게 만들었지만, 조선이 개화의 기회를 얻어 개화운동을 시행한 후에도 사회발전이 실패한다면 약자로서의 자연도태도 인정한다는 의견이 포함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또한 윤치호는 개화 전의 조선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서, 앞에서도 말했듯 조선의 근본적인 유학 숭상을 부정하고, 논쟁되지 않고 중국의 개혁을 의미하며 동시에 전 아시아의 복지를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또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황인종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랑거리라며 환영하였다.이처럼 윤치호가 아시아연대론을 주장하고 일본을 지도자적인 위치에 올려놓은 것에는 수용과정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조선 민족의 일원인 자신에 대한 열등감 내지 차별의식으로 인해 동양에서 유일하게 적자로 진화한 일본에 대한 동경을 유발하였기 때문이다. 또 그는 국가와 인민을 서로 분리할 수 있는 실체로 인식하여 조선에서 불가능하다면 일본의 품에서 문명화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이런 윤치호의 인종주의적 사고는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그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민족의 실체는 경제적 부이지 정치적 지위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조선인들은 정치적 평등을 요구하기 전에 경제적 평등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싸울 수 없다면 독립을 외쳐봐야 소용없다. 강해지는 법을 모르는 이상 약자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인종주의 측면에서 아시아연대론을 주장한 것이다.윤치호의 사회진화론에는 수용과정에서도 살펴보았듯 사상적 갈등에서 사회진화론쪽으로 선회하긴 했지만 기독교의 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유니테리언주의가 가장 합리적인 교리라로 인정하면서도 삼위일체의 교리를 수용하였는데, 이는 언뜻 보면 모순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삼위일체의 교리를 수용한 것은 종교적 교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서 얻어지는 영적인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를 통해서 인종차별이나 제국주의와 같은 국제적 죄악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제국주의가 기독교화될수록 공중의 도덕성은 높아질 것이며 이에 따른 동정심·정의감·자유사상의 고양 등을 통해서 시간이 가면 더 이상 강자의 횡포가 영광스러운 것으로 칭송되지 않아 강자의 횡포를 조절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윤치호에게 기독교는 약자가 강자로, 이것이 바로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라고 볼 수 있다.하지만 윤치호는 조선인들의 시민의식은 아직도 낮은 수준이며, 바로 서구식의 대의 민주정치는 불가능하다고 보아서 독립협회를 인민의 대표기관으로 유일한 희망으로 보았고, 현실적인 방안으로 독립협회의 회원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는 중추원의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국왕을 통해서 의회를 승인하도록 하는 입헌군주정치를 구상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고종과 수구세력의 거센 반발을 받게 되고, 익명서사건을 계기로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실패되고 만다.(2)실업중심의 근대 교육 추진독립협회가 좌절된 후 윤치호는 교육을 통해 민권과 민력 신장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윤치호가 교육을 통한 사회변혁에 뜻을 둔 것은 독립협회 이전부터였는데, 일본 유학 이후 미국의 차관의 용도에 대해 고종과 황후에게 교사초빙을 건의한 것에서 알 수 있다.그는 “독립은 스스로 믿고 남에게 기대지 아니함을 뜻한다”라고 생각하고 인민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을 때 남에게 의지하는 악습을 버리고 정치적·경제적 평등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1906년 윤치호의 실업교육정신이 구현된 한영서원(韓英書院)을 만들고 그의 사상에 부합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먼저, 초·중·고등과 외에 반공과(半工科)를 설과하여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고등과 교육과정에 실업을 결합한 형태로 이는 윤치호의 서도서기론(西道西器論)을 잘 반영한 것인데, 조선 개화를 위해서는 서양의 기술과 가치관을 모두 수용하여야 한다고 보아 고등과 교육과정에 실업을 설치한 것이다. 이는 실업교육을 통해 민중에게 서양의 사상과 기술을 익히게 한 것이다.두 번째로 윤치호는 한영서원을 설립할 때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의 기술학교 사례를 참고하였는데, 부커 워싱턴은 미국의 흑인민권운동가이며 교육자로 흑인 기술학교를 설립하여 흑인들이 자조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도록 교육하였는데, 이러한 흑인 기술학교 사례를 참고하여 백인 사회에서 흑인이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자립능력과 도덕성 함양을타난다.
    인문/어학| 2013.04.09| 8페이지| 3,000원| 조회(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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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자명의 생애와 아나키즘에 관하여
    Ⅰ. 서론(1)들어가며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를 말하며, 개인이 지배하는 국가권력 및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고 절대적 자유가 행하여지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하는 운동을 말한다. 이 아나키즘은 한국의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크게 중국에서의 아나키즘과 일본에서의 아나키즘으로 나뉜다.유자명, 박열, 신채호 중 내가 유자명을 고른 이유는 3학년 2학기 한국독립운동사 시간에 독립운동가로 이회영을 뽑아 발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회영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기치에 맞추어서 21세기에 들어 다시 부각되어서 관심이 가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발표까지 하게 되었다. 이회영을 조사하며 아나키즘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조사를 해보았는데, 이회영은 운동가였지 사상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나키즘에 대해서는 사실상 잘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자명과 박열 둘 중에 고민하다가 ‘유자명의 아나키즘 인식을 알게 되면 지금 알고 있던 이회영의 활동 같은 것도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유자명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쓰게 되었다.(2)연구의 흐름1980년대 후반 이후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나, 그것들은 개별 아나키스트 단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또 아나키스트 개개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신채호에 집중되어있었다. 유자명에 대한 연구는 김성국의 「유자명과 한국 아나키즘의 형성」(2003)이 나오고 류연산이 쓴 평전 『류자명평전』(2004)가 나왔고, 그의 민족해방운동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세미나가 2003년 6월에 열렸다. 여기서는 주로 아나키스트들의 회고록에 의존하다보니 객관적 사실에서 오류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후 이호룡의 「류자명의 아나키스트 활동」이 나오고 유자명 뿐만 아니라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 운동에 조명을 돌리려고 노력을 하였고, 유자명의 회고록을 중심으로 최봉춘의「柳子明의 抗日歷程과 朝鮮革命運動」(2005)이 나와 비교적 세세하게 45p의 많은 분량으로 나왔다러나 아나키즘으로 기울게 되었다.)앞에서도 밝혔듯이 김한을 만나서 공산주의를 수용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잠깐 동안이나마 홍보하고 다녔지만 계급투쟁에 관점에 동의할 수 없게 되면서 공산주의에서 아나키즘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그가 아나키즘으로 기울게 되는 데는 크로포트킨의 저작이 큰 몫을 차지했다. “끄로뽀뜨낀의 저작은 철학·경제학·생물학·문학예술 등 광범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 「상호부조론」은 생존경쟁이 생물진화의 동력이라 인정하는 다윈의 「진화론」과는 반대로 상호부조가 생물진화의 주요 인소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구라파 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다윈의 생존경쟁의 학설을 저들의 식민침략전쟁을 변호하는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끄로뽀뜨낀의 「상호부조론」은 침략을 반대하는 근거로 된다고 나는 생각하였다.”)라는 구절을 보면 크로포트킨이 그에게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다. 유자명은 이러한 아나키즘에 대한 생각을 품고 한인독립운동 지역에 아나키즘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1920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유자명과 이회영이 만나 친밀하게 되어 결국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되는데 일조하였고, 신채호와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강연을 들었을 때부터 친분을 가져 이회영·이정규·이을규·신채호 등이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지고 몰입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이고,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신채호가 작성한 에도 유자명의 의견이 반영되었으리라는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그렇다면 유자명은 아나키즘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앞에서도 밝혔듯 크로포트킨에게 많은 감명을 얻었으므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면, 국가란 국민에 대한 지배 권력과 인민의 착취를 보장하기 위해 지배계급 상호간에 맺어진 ‘보험회사’같은 것에 불과하고, 강권이 지배하는 한 영원한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유자명은 이러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당시 제국주의의 전쟁을 변호하는데 이용되던 다윈의 생존경쟁론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여기서 유자명이 상호부조론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한 사실의 정신적 토양을 채호에게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이론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글을 작성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유자명은 신채호와 합숙하면서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는 것을 도왔다. 이는 일본제국주의와 함께 내정독립?자치?참정권 논자와 문화운동자 등을 민족의 적으로 규정하고, 민족해방운동 방략으로 외교론과 준비론을 주장하는 임시정부를 비판하면서, 민족해방운동 방법론으로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제기하였다. 이로써 테러는 단지 복수적 감정에서 매국노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처단하던 차원에서 벗어나 민족해방운동의 주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의열단의 테러활동이 진행되었지만 성과는 미미하고 인명피해만 속출하게 되자, 의열단 내 공산주의자들이 청년동맹회를 결성하고 테러활동을 모험주의로 규정하면서 이에 대해 조직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테러활동을 개인적 공포주의 만능론으로 규정하고 테러활동의 오류를 비판하였다. 의열단에서는 즉각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의열단 내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이 점차 커다란 세력을 형성해나가며 의열단은 결국 공산주의를 지도이념으로 채택하고 공산주의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의열단이 좌경화하면서 유자명은 단원의 신분을 유지한 채 아나키스트로의 독자적인 행보를 모색하고, 의열단의 좌경화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유자명 등은 의열단의 좌경화는 “공산주의 이용자의 애매한 사대사상”이라 비판하였고, 의열단 차원의 암묵적인 합의를 거스르며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이는 반발이나 저항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나키즘 운동의 대의에 대한 집착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자명은 1923년 무렵 이규준, 이규학 등이 다물단을 결성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다물단은 일제의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처단하였다. 또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사건에 관계하기도 하였다.유자명이 상해에서 테러활동에 주력하고 있을 때 일부의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다. 당시의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 1930년대 테러활동을 주도하였는데, 그 결성은 신현상과 최석영이 국내 호서은행으로부터 58,000원을 대출받아 베이징으로 간 데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그 돈을 테러활동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하였고, 톈진 일본영사관을 파괴할 계획을 세우고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상해에서 베이징에서 재중국 한국인아나키스트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반동 군벌이 숙소를 습격하는 바람에 자금이 강탈당하고 체포당하였다. 이로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이후 유자명은 중국 아나키스트 바진(巴金)·루오시미(羅世彌)등과 교류하는 한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편의를 돌보아주며 아나키스트들 간의 연락을 맡고,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재흥하기 위한 작업을 개시하였다. 먼저 아나키스트 몇 명과 함께 불멸구락부를 결성하여 아나키즘에 대한 연구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명의로 1931년 3월 1일 「3·1절 기념선언」을 살포하였으며, 여러 격문을 발행하여 각지에 발송하였다. 이처럼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연구·토론 등 각종 회의를 개최하고 정보수집과 이론구명에 주력하는 한편 일반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조직 확대를 도모하여 이회영·정해리 등과 함께 이용준 등의 여러 아나키스트들을 끌어들여 조직정비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정비된 남화한인청년연맹은 남화구락부를 설치하여 선전 작업을 담당하게 하였고, 유자명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의장 겸 대외책임자로 선출되었다.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선전활동을 계속 하는 한편, 중국 아나키스트와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공동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11월 중순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이 결성되자 유자명도 이에 참가하여, 기관지 「자유」를 주간으로 발간하여 아나키즘 이론투쟁을 전개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사업을 전개하는데 이 기관지를 만드는 인쇄소를 경영하면서 기관지의 주필을 맡는 등 아나키즘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이 항일구국연맹은 보통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으로 불렸는데, 이는 유자명이 선언문을 흑색공포단의 명의로 발표할 것을 을 부정하면서 그들과의 연합을 추구하던 공산주의자들을 개량주의자로 비판하는 등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배격하던 입정을 버리고 신간회를 타도하면서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던 종전의 태도도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가와 정부 및 중앙집권적 조직 등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써 아나키즘의 본령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볼 때 중국 관내지역을 무대로 전개된 한인아나키즘의 노선 전환과 성격 변화의 전기가 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같은 시기 유자명의 아나키즘 이해에도 변화가 일어나서, 그에 따르면 한국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압박과 경제착취가 중첩된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하는 혁명”이기 때문에, 한인독립운동 진영은 계급·당파를 막론하고 전 민족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항인독립의 문제는 독립운동세력간의 이념·노선의 상이함이 우선하는 민족 차원의 과제이므로, 협동전선 또한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1936년 초부터 아나키스트들은 침체된 아나키즘 운동을 되살리기 위해서 민족전선을 결성할 것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유자명에 의해서 민족전선론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36년 여름부터로, 1~2월부터 민족전선론을 제기하고 여름부터 논의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남화통신」을 통하여 민족전선의 필요성과 결성 방법 등을 집중적으로 선전하였고, 주요 투고자는 유자명이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자유평등을 탈환하고 만인공영의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있어서도 먼저 최대의 적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운동도 전개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일제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타파하는 데 가장 적합한 투쟁방식이 바로 민족전선이라고 단정하였다. 각장, 각파, 각 계급을 단결시켜 광범위한 대중적 기초 위에 결성된 민족전선만이 민족해방운동의 진로를 타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자명 또한 「남화통신다.
    인문/어학| 2013.04.09| 11페이지| 3,000원| 조회(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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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당 이회영의 삶과 사상에 대하여
    Ⅰ. 서론1. 들어가며우당 이회영 선생을 주제로 선정한 데는 어느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제목의 한 글을 보고 나서였다. 민족해방운동을 참가한 사람 1명을 골라서 생애를 정리하는 논고를 쓰게 되며 수많은 민족해방운동에 참가한 사람 중 누구를 할까 고민을 하며 도서관에서 여러 사람의 평전을 뒤져보기도 하고, 인터넷을 뒤져보기도 하다가 자주 들어가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들어갔는데 저러한 글을 보고 들어가니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이회영을 기억하나요?”라는 제목으로 장편의 사진을 동반한 글이 쓰여 있었다. 사실 이회영이라는 사람은 나름대로 역사에 관심이 많고 역사를 전공한다는 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이었지만 이 글을 보고나서 이런 사람이 국사 교과서나 근현대사 교과서에 이름 한줄 못 올렸다는 것에 대한 의문감과 조사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우리나라가 근대화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많은 서구 열강의 침탈을 받게 되었다. 근대화란 명목으로 각종 나라의 이권을 빼앗기고 그들의 침탈이 더욱 노골적으로 되었다. 러일 전쟁으로 한반도의 입지를 강화한 일본은 본격적 정치적, 사회적 침탈을 감행하며 한국의 보호국화를 내세우며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당시 고종은 협약의 재가를 하지 않고 미국에 비밀 전문을 보내 을사조약의 무효임을 전하고자 하였으나 미국의 묵인으로 을사조약은 체결되고 말았다. 조약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전 좌의정 조병세는 고종에게 유소를 올리고 각국 공사, 동포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 했으며 민영환도 자결로 나라의 운명을 같이 하였다. 또한 장지연은‘이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라는 뜻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다는 이유로 3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반면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조약 체결에 찬성하여 을사오적이 되었다. 이런 혼란과 불안의 시기에서 우리나라의 자주성과 주권을 지키고자한 많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에 대한 무력적 기지 설립을 권유하였다. 이상설은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성리학의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해 신학문을 배웠고 영어와 프랑스어등도 수준급이었다.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책임자로 지목받은 이상설은 1906년 곧바로 행장을 꾸려 만주로 떠났고 이동녕과 여준이 뒤를 따라가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건설하였다.다음 해인 1907년 4월경 상동교회 지하실 안에서 이동녕·양기탁·전덕기 등과 함께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하고 미국에서 안창호가 돌아온 이후 이동휘·김구·이갑·여준·김진호·김형선·이관직 등이 가입해 전국 규모의 비밀 결사로 발전했다.신민회는 항일 사상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 그 기관으로 『대한매일신보』로 전하여 일제의 친일파의 죄상을 폭로하게끔 하였고, 여러 동지들과 의논하여 대성학교·오산학교·협동학교에 각각 파견하였고, 의병장이던 성제구·이기영 등과 함께 지방의병 부대와 연락을 취하여 때때로 귀족이나 부호로 불리는 사람들을 찾아가 회유하거나 협박을 하여 자금을 만들기도 하였다.또 같은 해에 헤이그에서 열릴 예정이던 평화회의에 고종은 특사를 파견하고 싶었으나 일본에 의해 수족이 다 잘리고 외부로부터 차단된 고종으로써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 고종에게 이회영은 이상설을 추천하였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해외 사정에 밝은 이상설은 그 성품과 더불어 특사로 파견되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고종은 선교사 헐버트에게 신임장을 건넸고 헐버트는 다시 이회영을 통해 비밀연락망 끝에 있던 이상설에게 전했다. 이상설은 이준과 이위종의 3인으로 한국대표단을 결성해 헤이그로 떠났으나 결과적으로 일본이 조선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 조선독립을 위한 국제여론을 조성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 헤이그 특사 사건은 가뜩이나 좁던 고종의 지위를 더욱 위태롭게 하였다. 일제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 것이다.Ⅲ. 만주로의 망명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이런 국내의 상황이 독립운동을 하기에는 여의치가 않다고 생각한 신민회는 만주로의 집단망명과 독립년 9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도 사건’으로 주요간부 700명이 검거되고 그 중 105명이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사실상 해체 상태에 달하는 바람에 자금을 지원할 수 없었다. 학교 경영이 점차 어려워지자 학생들은 일과가 끝나면 편대를 지어 각 조별로 밭을 일구었다. 그러나 계속된 가뭄과 서리의 천재가 겹쳤고 고국에서는 볼 수 없던 수토병이 번졌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무관학교 본래의 사명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전략, 전술, 측도학등의 이론과 보, 기, 포, 총검술, 유술, 격검 등을 익혔다. 신흥무관학교는 국내와 만주 각지에서 애국 청장년들이 몰려들어 1920년 가을 폐교될 때까지 약 2,1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 대부분은 독립군이 되었다. 1920년에 있었던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전투 참가자 중 상당수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었고, 이들 전문전인 군사훈련을 받은 무관학교 출신들이 가담했기에 일제의 정규군을 상대로 전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지청천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안투현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였고, 김좌진부대의 뒤를 따라 미산에 도착해 여기에서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했다. 신흥무관학교가 없었다면 봉오동, 청산리 승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을 주도한 이회영은 그 흥망성쇠를 다 지켜보지 못하고 1913년 그곳을 급히 떠나야 했다. 일제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운동가들은 이상설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몸을 피하자 주장하였지만 이회영은 홀로 반대하고는 국내로 들어가 운동자금을 모금해오겠다고 결정하였다. 무사히 국내로 잠입한 이회영은 다른 동지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일제에게 노출되었으나 일제는 이회영을 무혐의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언동에 의심 가는 점이 없었고 무엇보다 명문가의 자제인 그의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껏 사대부등 지배층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선전해 왔던 일제이고 실제 사상이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운동 방향과 동일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3년 말에 이르러서는 무정부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고,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인 진독수를 비롯해 이석증·오치휘 등이 이회영을 비롯해 신채호, 정화암 등의 한인 망명객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된 까닭은 독립을 하기 위해 가장 좋은 사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제에 맞서 독립하기 위해서는 자유연합을 기치로 하는 아나키즘이 가장 적절한 이론이라고 생각한 그는 지금까지의 독립을 위한 여러 운동이나 단체들이 모두 누군가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하면 모든 운동이 아나키즘 적이라고 했다. “목적과 수단이 방법을 규정짓는 것이지 수단과 방법이 목적을 규정할 수 없다는 확고한 견지에서 볼 때 한 민족의 독립운동이란 그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뜻하므로 이렇게 확고한 자각과 목적의식이 뚜렷한 사람들이 하는 독립운동은 운동 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아나키즘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어떤 식으로 흡수되고 작용하였는가를 잘 보여준다.이회영은 이상주의적인 아나키즘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사회의 기본적인 골격은 자유, 평등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 민족 자결의 원칙 아래 세워진 민족 자체의 내부에서도 그 이념이 그대로 실현되어야 하며 국민 상호간의 불평등, 부자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 자유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운동자들의 조직적인 희생으로 인하여 쟁취된 독립이므로 독립 후의 내부적 정치구조는 권력의 집중을 피하여 지방 분권적인 지방자치제를 확립하고 이들 지방자치제의 연합으로 중앙 정치 기구가 구성되어야 한다. 경제 체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 재산의 사회화를 원칙으로 해 사회적 계획 아래 관리해야 하지만 자유를 제약할 위험이 있으므로 사회적 평등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관리와 운영이 합리화되어야 한다. 교육 역시 사회 전체의 비용으로한 채는 자신과 가족들이 사용하고 한 채는 아나키스트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1926년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의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과 일인사살사건이 이회영과 연루되면서 다시 딸들을 빈민구제원에 맡기면서 상해로 피신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김좌진장군의 조카인 시야 김종진이 찾아와서 이회영과 여러 날 묵으며 앞으로의 운동 방향에 대해 토론하게 되는데, 여기서 김종진은 이회영의 영향을 받고 아나키즘으로 전향하여 북만주로 떠나게 된다. 그는 만주에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에서 활동하다가, 아나키스트 이을규 등과 함께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게 된다. 또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김좌진이 주도하던 신민부 군정파와 상호 협의를 거쳐 '한족총연합회(이하 한족총련)'를 조직하고, 김좌진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상해의 아나키스트들이 만주에 대거 가담하면서 한족총련은 큰 속도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아나키스트들은 농민들로부터 일체의 자금을 걷지 않았기 때문에 자금난에 빠지게 된다. 국내에 잠입했던 아나키스트 신현상이 미곡상은 경영하는 친지 최석영과 함께 호서은행에서 5만 8천원이라는 거금을 빼내 북경에 왔는데, 이를 계기로 전중국 한인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일제가 이 회의를 하는 장소를 덮쳐 여러 명이 체포되고 돈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만주의 한족총련이 다시 자금난에 빠지게 되자 이회영은 만주의 조직을 복원하고 새로운 운동을 개시하기 위하여 은행을 털기로 결심하고,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행동대원으로 선발되어 일본 조계에 있는 중·일 합작은행인 정실은호(正實銀號)를 탈취하여 무사히 베이징으로 옮겨졌다가, 이 자금이 만주로 전해져 한족총련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한족총련은 이들의 가세로 욱일승천하지만 이들의 세력 확장에 우려를 느낀 만주의 공산주의 세력이 한족총련 지도자들의 암살에 나서게 되고, 김좌진이 암살되고 김좌진을 암살한 세력을 김종진이 다시 암살하자 김종진 또한 공산주의 세력에 피랍되어 암살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만주사변
    인문/어학| 2013.04.09| 12페이지| 3,000원| 조회(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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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의 교육철학(맹자, 순자, 노자와 이황, 이이를 중심으로)
    맹자(1)성선설일단 맹자 철학에 있어 중심문제는 성선설이므로, 그의 교육사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선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맹자는 인간의 성이 선하다는 사실을 유추와 직관에 의해서 설명하였다. 이는 사람들의 미각, 음감, 안목 등을 예로 들어 인간의 마음이 같지 않을 수 없다고 유추하였다. 대체적으로 맛이 있는 음식은 모든 사람의 입에 맛이 있기 마련이고 모든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것은 귀에 듣기 좋듯이 모든 사람의 마음은 인간의 선한 행위를 보면 흐뭇하게 되는 것이니, 이로 미루어 볼 때 인간의 마음은 선함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면, 그 순간 애처롭고 측은하여 누구라도 이를 구하려고 한다는 불인지심, 즉 참을 수 없는 마음을 들며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나누어서 이야기 하였다. 측은지심은 인의 실마리이고, 수오지심은 의의 실마리이고, 사양지심은 예의 실마리이며, 시비지심은 지의 실마리로 보아서 4덕이라고 부르는 인의예지는 이러한 실마리가 확충되어 하나의 덕으로서 제 모습을 갖춘 것이라고 본다.또한 인간이란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바(良知)와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바(良能)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어린애라도 그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아이는 없고, 좀 더 자라면 손위 사람을 공경할 줄 모르는 아이는 없다는 것을 그 예로 들었다. 이것이 직관에 의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환경이 개인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인정하였다. 이를 인정한 맹자는 교육을 중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환경의 자극으로부터 생기는 물욕을 누르고 본성을 확충시키는 데에 있어 교육은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마지막으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을 인의의 유무에 두었는데, 사람이 금수와 다른 바는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보통 사람은 그것을 버리고 군자는 그것을 간직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맹자의 교육의 목적은 인간으로서 짐승과 다른 유일한 특성인 그 선한 본성을 보마음을 찾는 것이라고 하여 물욕에 덮인 본성을 찾는다는 의미로, 4덕을 밝게 드러내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데에 학문의 본령이 있다고 함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윤리·도덕교육에 교육의 핵심을 두었는데, 공자와 다른 것은 도덕적인 인간 형성을 그 목적으로 함에 있어, 성에 대한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 이론적인 뒷받침을 보다 튼튼히 했다는 점이다.맹자는 도덕적인 인간 형성을 위한 방법으로서 자연주의 교육방법을 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맹자는 강요와 억압을 통한 교육을 부정하고 자율적인 교육을 강조했으며,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계발과 성장을 강조하였다.인위적인 조작이나 강요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큰 장애라고 판단하였으며,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자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기만 하고 공부는 자기 스스로 터득하여 깨우치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른 위한 방법으로 사색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는 타고난 본래의 성이 선한 것이니 인위적인 조작이나 억압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식물을 기르듯이 인성의 선한 실마리를 보존하고 길러서 확충하도록 도와주며, 공부하는 자가 사색을 통하여 스스로 깨쳐서 터득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이끌어 주며, 필요할 때는 논리적일 설명을 통해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해주는 것이 맹자의 교육방법순자(1)성악설순자는“사람의 성(性)이 악(惡)한 것은 분명하고, 선(善)이란 위(僞)이다.”라고 순자의 성악편에서 각 문단에 강조하고 있다. 순자는 배울 수 없고 힘쓸 수 없고 그러면서도 사람에게 있는 것, 이것을 성이라고 보고, 배워야 능해지고 힘써야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위라고 보았다. 순자가 말하는 성은 선천적인 것으로 본능에 가까운 본성을 말하는 것이고, 위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인위적인 것으로서 후천적인 인간의 성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순자가 생각했던 위(僞)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생각하기 쉬운 거짓이란 이름의 위(僞)가 아니고, 사람이 무엇인가 노력한다는 긍정적인 뜻이다. 어간다고 보았다.순자의 교육내용 역시 다른 유가사상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육내용으로서 시경, 서경, 예기, 춘추, 악기 등과 같은 유가의 경전을 중요시하였다.(3)교육방법성선설을 주장했던 맹자나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나 모두 그 교육 목적은 공자의 뜻을 이어받아 완전한 인격을 갖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성인이나 군자의 양성에 있었다. 교육내용도 비슷하지만, 교육방법은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순자는 교육방법에 있어서 적선(積善)의 방법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서 선을 쌓아나가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그는 사소한 선한 행위나 작은 마음이라도 꾸준히 쌓아가다 보면 누구라도 성인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적선은 마음과 행동 양면에서의 적선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마음과 행동 양면으로 선을 쌓는다는 것은 선한 행위와 선한 마음가짐이 동시에 습관이 되어버려 자신의 본성처럼 내면화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순자의 지행일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또한 순자는 감화의 의한 교육방법을 강조하였다. 이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가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인물을 좋아하여, 항상 그 사람과 똑같이 되기 워해 힘써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귀는 사람을 가려서 사귈 것을 순자가 강조한 것도 감화에 의한 교육의 효과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감화에 의한 교육을 강조하는 순자로서는 당연히 교사의 자질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다른 사람의 인격이 고상해지도록 하는 일은 자기의 인격이 고상할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순자는 태어날 때의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만, 그 이후에 인간이 악하냐 선하냐 하는 문제는 오직 그 환경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즉, 환경 여하에 따라서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바뀔 수 있다고 보면서, 교육의 성과에 있어서 인간의 유전적인 요소보다 환경적인 요소가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본 것이다.순자가 강조하는 환경은 교육적인 환경으로서 물적(物的)인 환경이라기보다 인적(의 이름이 아니다. 무(無)는 만물의 시초이고 유(有)는 만물의 근원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는 도를 무와 통한다고 보았다. “도는 볼래야 볼 수도 없고, 들을래야 들을 수도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기 때문이다.또한 “도(道)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다른 것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바, 즉 자연(自然)인 것이다.”이라고 보았다. 또한 도는 아무런 형상도 없고 의지와 자각도 없는 다만 원리 그 자체로서 그것의 작용은 바로 무위(無爲)이다. 여기서 무위는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인 성격이 없는 것으로서 하염없이 무심한 상태를 가리킨다.그래서 노자는 무위와 자연을 체(體)로 하여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것을 거부한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는 자연에 근거하여 종교에 반대하고 인의와 규범을 반대하고 지혜와 지식을 거부하고, 현 사회의 모든 부자연스러운 제도와 제약을 거부하였다. 자연의 법칙이란 모두 저절로 잘 되게 되어 있는 것이므로 굳이 인간이 인위적으로 제도를 만들고 덕목을 변화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노자의 주장이었기 때문이다.(2)노자사상에서의 교육노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영아(?兒), 즉 갓난아기 상태의 인간이었다. 영아는 자연 그대로의 마음을 지닌 천진하고 순박한 상태의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모든 인간이 영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노자사상에서 교육의 목적이란, 갓난아기로 돌아가는 것, 즉 도(道)를 터득하여 무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인위를 버리고 태어날 때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연인 본성이 선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노자사상 가운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교육방법론은 바로 ‘말없이 가르침(不言之敎)’이다. 노자는 무위의 상태에만 이르면 스스로 변화하고 스스로 바로 되고 저절로 풍부해지고 소은 아니라는 점에서 낭만적인 자연주의 교육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지나치게 도식화된 기존의 교육에 대해 한번쯤 겸허하게 볼 수 있는 기회와 자극을 준다는 점에서, 어떠한 교육 사상보다는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이황(1)교육목적이황의 교육목적은 지선(至善)의 경지인 경(敬)을 체득한 성현(聖賢)이 되게 하는 데에 있다. 여기서 경(敬)이란 인욕에 빠지지 않도록 만사에 자각·조심하고 성실한 태도를 유지하여 저절로 표리일체가 되는 경지를 말한다. 이것은 이황의 위기지학의 진리관에서 나온다. 이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근거하는데, 이는 발표시간이 넉넉하지 않음에 생략한다.이러한 목적 아래 교육활동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퇴계는 학습 경험을 통하여 인간행동을 어떻게 변화시켜나가는 것을 고려하였다. 이황은 무엇보다도 인간으로 하여금 인(仁)을 체득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장려하였다. 즉, 인간으로서 도덕적 완성을 기하는 것을 중요시한 것이 퇴계의 교육관이다.여기서 퇴계가 교육목적을 설정할 때 고려한 요인을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추려볼 수 있다. 첫째로 인간은 누구나가 보편적인 본성인 선(善)을 지녔지만 음양(陰陽)의 정기(精氣)를 받는 과정에서 그 기질에 차별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퇴계는 세 가지 인간으로 구분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성인(聖人), 군자(君子), 중인(中人)의 인간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각기 다른 인간의 품성을 보편적 차원에서 지선(至善)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획일적이 아니라 각기 다양한 개성에 따라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둘째로 인간발달단계에 따른 타당성인데, 이는 발달단계에 초점을 두고 그 단계마다 알맞은 성과에 참된 가치가 있다고 한 것이다. 즉 발달단계에 따라서 교육하되, 가까운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먼 것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셋째로 남을 위하는 학문(爲人之學)이 아닌 진정한 자기완성(爲己之學)을 근본 뜻으로 삼았다. 따라서 자기완성이 있은 연후에야 정의로운 사회완성이 이루어진다는 사고방식이 그의 교육목
    인문/어학| 2013.04.09| 7페이지| 2,000원| 조회(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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