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만주로의 망명 전 이회영의 신민회 결성과 헤이그 특사파견
Ⅲ. 만주로의 망명과 신흥무관학교 설립
Ⅳ. 고종의 해외망명 주도
Ⅴ. 임시정부 수립 반대운동과 아나키즘의 수용
Ⅵ. 의열단의 후원과 ‘재중국 무정부주의연합’의 결성, 다물단의 지휘
Ⅶ. ‘한족총연합회’의 후원과‘재중국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의 결성
Ⅷ. 남화한인청년연맹·항일구국연맹 결성과 흑색공포단의 항일투쟁
Ⅸ. 운명의 대련행과 순국
Ⅹ.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1. 들어가며
우당 이회영 선생을 주제로 선정한 데는 어느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제목의 한 글을 보고 나서였다. 민족해방운동을 참가한 사람 1명을 골라서 생애를 정리하는 논고를 쓰게 되며 수많은 민족해방운동에 참가한 사람 중 누구를 할까 고민을 하며 도서관에서 여러 사람의 평전을 뒤져보기도 하고, 인터넷을 뒤져보기도 하다가 자주 들어가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들어갔는데 저러한 글을 보고 들어가니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이회영을 기억하나요?”라는 제목으로 장편의 사진을 동반한 글이 쓰여 있었다. 사실 이회영이라는 사람은 나름대로 역사에 관심이 많고 역사를 전공한다는 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이었지만 이 글을 보고나서 이런 사람이 국사 교과서나 근현대사 교과서에 이름 한줄 못 올렸다는 것에 대한 의문감과 조사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우리나라가 근대화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많은 서구 열강의 침탈을 받게 되었다.
<중 략>
하지만 이런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는데, 대련 부두에서 내리자마자 일제에 체포된 것이다. 1932년 11월 17일 장춘에 있던 딸 규숙이 대련수상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대련에 갔을 때, 이회영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 일제는 이회영이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이회영의 몸에 핏자국이 아롱져있는 것을 보고 고문사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회영이 대련 부두에서 내리자마자 수상서에 체포된 이유는 밀고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회영은 당시 상해 던 자신의 형인 이석영에게 만주행을 말했는데, 이때 정 요인의 친척이 이태공과 연충렬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회영이 만주로 떠났을 때는 일제가 만주를 완전히 장악한 이후여서 독립 운동가들이 오히려 만주를 탈출할 때였다. 그러나 이회영은 이상사회 건설과 민족 해방에 대한 굳은 신념으로 일제가 장악한 만주로 향했던 것이다. 1910년 말 일가족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한 것과 마찬가지의 목적을 지닌 것으로서, 이회영의 초지일관의 나라사랑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 자료
『이회영 평전』, 김삼웅, (주)책으로 보는 세상,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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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의 아나키즘 인식과 항일독립운동」, 김명섭, 동양정치사상사 제 7권 1호 119-137,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7
「이회영의 아나키스트활동」, 이호룡, 한국독립사 연구 제 33집 185-22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사연구소, 2009
「이회영의 생애와 민족운동」, 박환, 나라사랑 104집 23-54, 외솔회, 2002
「이회영과 그 일가의 독립운동」, 한상복, 나라사랑 104집 137-158, 외솔회, 2002
「이회영의 교육 운동과 독립군 양성」, 서중석, 나라사랑 104집 70-97, 외솔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