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어떤 사건을 바라보고, 그것을 판단할 때 우리는 종종 냉철함과 비판적 사고를 잊곤 한다. 감정에 동요되어 어느 쪽이든 한 쪽으로 치우치는 순간 그 판단은 모두 쓸모 없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대개, 과거 우리의 역사와 마주해야만 하는 영화를 보면 불편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어서 영화를 제대로 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보더라도 사건을 진실되게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주변에 독립영화를 즐겨보는 지인들이 많아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 2 ’는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영화다. 하지만 그 때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거운 느낌 때문에 역시나,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버렸고, 그 후로도 다시 제주 4.3 사건을 검색해 볼 일은 없었다. 이번에 한 번 더 ‘지슬’을 감상할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을 확실하게 알고 보는 것 보다, 우선 먼저 영화를 보고 영화가 나에게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차분히 생각한 후에 자세한 조사를 해보려 했다. 만약 내가 제주 4.3 사건에 얽힌 복잡한 배경과 이념적 다툼의 실상을 알고 이 영화를 봤더라면 나는 분명히, 제대로 영화를 감상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영화의 갖가지 장치들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성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처음부터 끝까지 흑백으로 이루어진 영화. 오색의 영상이 익숙해져 버린 나에게 흑백영화는 처음엔 그저 무거운 감정을 요구하는 일종의 도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되려, 영화가 흑백이라 다행이었다. 아마도 총에 맞은 사람들, 칼에 튄 새빨간 피가 본연의 색으로 보여졌다면, 이 영화는 나에게 역사적 사건을 자극적으로 다룬 그저 그런 영화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이 영화는 역사적 사건을 그려낸 여타 영화들과 같이 절대적 악인이 표면에 등장하고, 그로 인해 선한 사람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영화는 아니다. 어디에도 확실하게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 대한 흔적은 없다. 원인을 파헤치고 분노하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고 영화는 그저 제사 형식을 빌려 신위, 신묘, 음복, 소지의 네 장으로 구성되어, 덤덤하게 희생자들을 위로한다. 여기에서 희생자들에 어느 정도의 범위를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 우선 이 영화는 단순하게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는 군인과 그들에게 학살 당하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고,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희생자다. 언뜻 보면 반대편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군인이나 마을 주민들 모두 절대 선, 절대 악이라 할 수 없다. 육지에서 온 군인들은 빨갱이를 잡으러 왔다고 무섭도록 외치며 총을 들고, 식칼을 갈고, 그 식칼로 사람을 죽이고, 시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과를 깎아 먹기도 하지만, 여기에 그런 군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중에는 사람 된 도리로서 마을 사람들의 편에 본능적으로 서서 사람을 살리려는 군인들도 있다. 어쨌든 이성적인 군인이든, 비 이성적인 군인이든 간에 모두가 명령에 따라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고, 광기 어린 학살을 일삼는 군인으로 비춰지는 사람들도 이념적 대립의 또 다른 희생양으로 그려진다.(이념 대립의 여파로 상처를 받거나, ‘빨갱이’는 곧 처단해야 할 대상이라고 세뇌 당함으로써 사람들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학살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대로 그들에게 쫓기는 마을 사람들의 대화는 이상하리만치 순박하다. 주민들은 사람만큼 돼지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쫓기는 와중에도 마음속에 품은 사람과의 결혼얘기를 하는 등의 대화를 통해서 정말 순하디 순한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영화가 마을 사람들을 단순히 순하기만 한 존재로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죽음이 코 앞까지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저 단체로 존재하는 순한 농민에 불과하지만,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독립적인 존재로 발돋움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주민들은 끝까지 공동체를 지키려 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사실 영화에서는 단편적으로 중산간마을의 사람들을 조금은 어리숙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주목해야 할 사실은 실제 제주도민들이 당시 좌우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도망만 다녔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친일파와 우익청년단에 맞서 나름의 항쟁을 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잔인한 공권력에 의해 제주도라는 공동체가 학살당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금 다르게 비춰졌지만, 이 제주 4.3 사건이 한국사의 비극인 이유는 ‘빨갱이가 뭐길래 …’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며 지슬을 품는 어머니의 모습, 마을 사람들이 폭동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군인들의 불만 섞인 외침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이들에게 ‘빨갱이’라는 단어가 왜 붙어야만 했고, 군인들에게 광기 어린 학살을 행하게끔 만든 그 ‘명령’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군인들을 가장해 학살을 저지른 것이었을까? 우선 대내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좌파, 우파진영 모두가 가세한 대중적 집회였던 1947년 3.1절 행사에서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 아이가 채이는 일이 발생했고, 그냥 가려고 하는 기마경관을 쫓아 군중들이 몰려오자 이들을 폭도로 오인하여 경찰들이 총으로 사살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후 경찰과 주민들의 대립이 계속되었고, 이후에 얽힌 갖가지 사건들에 좌파 세력인 남로당이 개입하면서 점점 정치적인 이념이 대립하는 상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당시의 중요한 정치적인 사건은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 결의에 이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안’ 즉, ‘남한만의 단독선거’였다. 남한 단독 선거안에 많은 정당과 단체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여기에는 좌파, 우파 일부와 중도파도 가세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남로당이 강력한 투쟁계획을 세워 대치하였고, 경찰은 이들의 배후에 북한이 개입해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후에 허위로 밝혀졌지만 제주도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강경작전을 시행하는 명분이 되어버렸다. 또한 4.3사건의 배경에는 대외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관계변화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동, 서 진영의 냉전체제는 ‘트루만독트린’의 선포 이후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그 무렵에 동서냉전이 첨예하게 표출되던 곳이 바로 한반도였으며, 그 결정적인 희생양이 된 곳이 바로 제주도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우선 제주도민들이 집단으로 희생되는데 가장 책임이 있는 사람은 이승만이다. 그는 ‘반민법’ 제정으로 인해 자신의 그나마 있던 정치기반을 잃을 위기에 처했고, 그에게는 반대세력을 물리쳐서 정권을 안정시키는 일이 시급했다. 그러려면 미국의 원조가 절실했지만, 미국의 지지부진한 반응에 이승만이 꺼낸 카드가 바로 반공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주민들을 초토화 시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수없이 죽어갔다. 이것은 정말 제대로 된 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도 안 되는 지시였고,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몰아내고자 하는 미국의 의지가 확실히 반영되어 있는 지시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지도자의 명령은 주민들 뿐만 아니라 총을 겨눈 군인들의 영혼까지 말살시켰다.일제가 분단을 낳았고, 그 분단은 4.3을 낳았고, 4.3사건의 비극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는 아직도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간섭들은 언제 어디서 제 2의 비극적인 사건을 낳을 지 모를 일이다. 오류투성이의 비극적인 과거사는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새로운 곳을 향해서 나아가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할 과거가 있고, 바로잡아야 할 과거가 분명히 존재한다. 마을 주민들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품속에 있던 감자를 먹으면서도 살려고 노력하듯이,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비록 그것이 마주하기 힘든 과거라 할 지라도 제대로 마주하고 역사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빨갱이’, ‘좌파’를 운운하며 나 아니면 적이라는 생각에 가득찬 사람들이 이 영화를 한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만약 그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도 여전히 색깔 나누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면, 그들은 대한민국의 진정한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이 말도 안되는 비극에 함께 아파하고, 반성하고,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했으면 좋겠다. 제주 4.3 사건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위한 제사,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 2’가 끝났을 때 무고한 희생자들은 어떤 위로를 받았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위로는 아마도 이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사건의 본질을 깨닫는 것일 것이다.참고자료 :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4.3과 제주 역사』
볼링포컬럼바인,그리고미디어에 대한 오해볼링 포 콜럼바인은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 주 리틀턴시에 위치한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이 사건의 범행자들은 13명을 죽였고,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범행당시 사용한 총기는 합법적으로 구입된 것이었으며 총알은 마트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바탕으로 하되,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것을 시사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엄밀히 말하자면 미디어, 정부, 정치인들로 인해 조장된 인식이 이 사건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미국은 총기 소유가 합법이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 총기 소지를 한다. 이렇게 총을 권하는 사회가 된 가장 큰 이유는 미디어라고 감독은 제시하고 있다. 사실, 감독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완전히 동의하는 바는 아니나, 전부터 횡행해온 언론의 행위들은 결코 사람들에게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끼쳐왔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곧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미디어가 어떤 측면에서는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미디어도 결국은 어떤 기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들 또한 여타 기업들과 같이 시청률이나 이슈가 되는 것, 즉 이익에 민감하다. 그들에게 돈이 되는 것은 곧 이슈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그들은 돈을 번다. 또한 사람들은 때로는 잔인하고, 자극적인 것들에 더욱 더 관심을 가지고 놀라워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분노한다. 사람들을 동요하기 위해서는 한 사건을 포장하고, 한 측면만 부각시키며 더 자극적이게 감정적이게끔 내보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 들어 하루가 멀다하고 언론에 비춰지고 있는 성범죄 사건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예전에도 성범죄가 많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다만, 한 사건이 크게 터짐으로써 그 다음부터 성범죄 기사만 뜨면 사람들이 그것을 계속해서 보게 되고 더 조심하게 되고 더욱 더 분노한다. 유독 겁이 많아 그런 기사를 많이 보는 나는 기사의 패턴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사건의 잔혹성을 언급하는 기사들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하고, 그 다음에는 꼭 피해자 가족들의 안타까운 사연, 피해자의 사연을 부각시키는 기사를 많이 내보내서 공감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 때로는 억지스러운 기사에 눈꼴이 시릴 정도로 보기 싫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누군가에게는 잊혀지지 않을 상처가 될 일에 대해서, 정작 그것을 알려주는 통로가 되는 미디어는 진정한 공감을 하지 않고 관심거리만 찾아다니기에 급급하다. 이것은 이익을 추구해야하는 미디어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이것은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한다는 역할에 어긋난다. 제대로 알권리를 보장해야하는 것이지 한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감독 마이클 무어는 언론이 부각시키며 이용하는 감정 중에서도 공포를 부각시켰지만 나는 그것이 꼭 공포라는 감정에 제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포는 사람들에게 가장 다가가기 쉬운 감정, 크게 다가오는 감정일 뿐이다. ‘역대급 태풍이 온다.’‘전국에 휴교령이 내렸다.’며 엄청난 언론 플레이를 해대던 태풍 볼라벤의 기사가 뜨자마자 사람들은 온갖 물품들을 사재기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리창에 테이프를 붙이고, SNS에서는 실시간으로 태풍상황이 나돌아다녔다. 물론 조심한다고 해서 나쁜건 아니나, 사람들은 공포라는 감정에 휩싸여서 과하게 반응하게 된다. 반면에 공포 이외의 감정에 사람들은 조금 인색한 편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나오는 더욱 더 자극적인 기사들 때문인지 이제 사람들은 조그마한 사건에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미디어는 더욱 더 자극적인 것만 내보내려하고, 이것은 결국 악순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