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이념의 관점에서 남한의 반공 위주 교육과정1. 해방 이후~3차 교육과정기 까지의 남한의 교육과정 변화(1) 해방과 미군정시대의 교육과정1945년 8월 15일 일본 군국주의가 패망함으로써 국가의 주권이 회복되어 정치적으로 큰 전환이 이루어 진 것과 아울러 한국의 교육이 전체주의적인 식민지 교육에서 민주주의적인 자주교육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해방직후의 교육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일제의 잔재를 버리고 민주주의의 정신을 기르는 일이었다.그래서 우선 한글을 가르치고 국사에 중점을 두어 각 교과를 지도하면서 시급히 각급 학교의 교과목 편제표와 시간배당표를 작성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의 미 군정청 학무국의 ‘신조선의 조선인을 위한 교육방침’에 의하여 우리의 것을 내용으로 하여 학교 교육이 출발되었다. 미군정기(1945~1948)의 교육과정은 그 성격상 과도기와 교수요목기로 구분할 수 있다.과도기임시 교과목 편제와 시간 배당표가 발표된 전후시기로 1945년 9월부터 1946년 9월까지 약 1년 동안 일본이 물러간 공백을 메우기 위한 긴급조치 성격의 교육이 이뤄졌다. 해방 후,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시급한 일은 무든 학교의 문을 빠른 시일 내에 여는 일이었다.당시 미군정청 산하 학무국에서는 각급 학교 개학을 위한 응급조치로서 1945년 9월 ‘신조선의 조선인을 위한 교육’이라는 교육방침을 발표하였다. 이 교육방침에는 주로 일제 잔재의 불식, 평화와 질서의 유지, 생활의 실제에 적합한 지식 기능의 연마 등을 강조하였다.이 시기의 특징으로 일본 지배 하에서는 수신이라는 과목이 있었으나 이것이 삭제되고 공민(민주시민을 기르기 위한 교과)이 추가된 것만 다를 뿐 나머지는 일본이 남긴 교과목을 그대로 유지한 점, 일본어 중심의 ‘국어’를 우리말과 글 중심의 ‘국어’로 바꾼 점, 일본 역사를 폐지하고 우리 역사교육을 시행했다는 점 등에서 일제의 황민화 교육을 말살하고 신생 민주 국가로서 가져야 할 교육 내용을 취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할 러나 대부분의 교과에서 단원명, 제재면, 내용 요소 등 가르칠 주제만을 열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후에 공포된 교육과정에 비하면 전재 체제, 내용 등의 면에서 미흡한 점이 많았다. 그리고 학생들의 지적 능력에 비해 내용의 수준이 너무 높다는 평이 있다. 이때의 교육과정은 각 급 학교의 교과편제와 시간배당이 함께 작성된 교수요목을 말하며, 현재와 같은 교육과정의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 이러한 교육과정이 적용되는 시기를 ‘교수요목기’라고 한다.(2) 남한정권 수립 이후의 교육과정(1차 교육과정)제1차 교육과정은 1954년 4월 20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법령 형태로 공포된「교육과정 시간 배당 기준령」과 그 이듬해인 1955년 8월 1일 공포된 초?중?고 사범학교「교과과정」으로서, 1963년에 공포된 제2차 교육과정이 적용될 때까지 시행된 교육과정이다. 이 시기에는 이후에 공포된 교육과정과 달리 각급 학교 교육과정 시간 배당과 교육과정이 별도로 공포되었으며, 국가 수준에서 공포된 교육과정에 관한 문서가 교육과정이 아닌「교과과정」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법령상의 명칭이 교과과정이었으므로 이 시기의 교육과정을 ‘교과과정 시기’또는 ‘교과중심 교육과정 시기’라고 부른다.제1차 교육과정은 6?25사변으로 인해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공포된 것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교수요목기로 유입되기 시작한 미국의 아동 중심 교육 사조는 6?25전쟁 동안 교육과정에 대한 연구에 영향을 주었다. 미국 교육과정 이론의 영향으로 제1차 교육과정에는 교육과정을 종래의 교수 내용의 나열을 의미하는 교수요목이 아닌 경험영역으로 보려는 시각이 일부 반영되어 있다. 그 예로 ‘특별활동’이 교육과정의 한 영역으로 설정되기 시작한다. 교과활동과는 별도로 특별활동 시간이 배당되었다는 것은 미국의 경험 중심 교육과정 사조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특별활동을 통해 전인교육을 강조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교육과정을 교과활동과 특별활동의 두 영역으로 제시한 교육과정 편제비해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바꾸었다.제1차 교육과정은 우리나라가 만든 최초의 교육과정이라는 점과 경험중심 교육과정의 시각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처음으로 ‘교육과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여전히 교육과정의 의미를 ‘가르칠 내용의 열거’라는 교수요목의 의미를 간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경험 중심 교육과정의 영향으로 교육과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전개되었지만, 그에 대한 충분한 개념 정립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제1차 교육과정은 교수요목기에 완성하지 못했던 각과 교수요목 작업을 마무리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3)제3공화국 하에서의 교육과정(제2차 교육과정)제2차 교육과정은 1963년 2월 15일 초등학교 교육과정이 공포된 이후 1973년에 공포된 제 3차 교육과정이 적용될 때까지 시행될 교육과정으로, 제1차 교육과정에서 별도로 공포했던「교육과정 시간 배당 기준령」과「교과과정」을 합쳐 일련의 체계를 갖춘 교육과정으로 공포함으로써 교육과정 기준령으로서의 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국가 수준에서 제시한 문서도 그 명칭이 제1차 교육과정때의「교과과정」에서「교육과정」으로 바뀌어, 교육과정이 교과 활동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의 전 활동과 관련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전체적인 특징으로 교과목으로 조직된 내용보다 학생들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육의 개념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경험중심’ 또는 ‘생활중심’ 교육과정이라는 점이다. 당시 교육과정의 개념을 ‘학생들이 학교의 지도하에 경험하는 모든 학습 활동의 총화’로 정의내리고 있다. 세부적인 특징으로 첫째, 교수요목기부터 형식적이고 초보적인 형태로 반영된 경험 중심 교육과정의 영향이 교과 내용을 조직하는 데에 충실히 반영되었다. 둘째,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과정에서 ‘반공?도덕’이 하나의 교육과정 영역으로 새로이 설정되었다. 셋째,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처음으로 ‘단위제’가 도입되었다. 마지막으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과정’을 도입하여 학생의 진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다.특히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에 따른 교육과정 개정의 요청이 있었다. 1960년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이 재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주체성을 강조, 한국의 전통을 존중, 창조의 정신을 기름으로서 국가발전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는 역군을 배양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에 나타난 교육의 지표로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 협동정신, 국민정신함양이 있다.국민교육헌장의 이념과 함께 제3차 교육과정을 이끈 것은 학문 중심 교육과정이다. 학문중심 교육과정의 방향은 제 3차 교육과정의 기본 방침에서 밝혀진 ‘지식 기술 교육의 쇄신’이라는 항목 속에 표현되어 있으며, 그 내용 중 특히 학문중심 교육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지식의 구조를 이루는 기본 개념과 그 관계를 이해하고 지적인 탐구 방법을 익힐 수 있도록 지도 내용을 정선하여야 한다’ 이 표현은 학문중심 교육과정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세부적인 특징으로 첫째,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있어서 교육과정의 하나의 독립된 영역이었던 ‘반공?도덕’ 영역이 교과 활동에 포함되면서 ‘도덕’이라는 교과가 새롭게 등장했다. 둘째, 몇 개의 교과가 신설되었다. 중학교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도덕’과 이외에도 ‘국사’가 교과로서 독립, 신설되었다. ‘국사’과의 신설은 당시 교육과정 개정의 방향을 반영한 것으로,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가치관의 확립을 명분으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이 교육과정은 지식의 학문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야기하게 된다. 즉 학습내용의 과다, ‘수학’, ‘과학’ 등 일부 교과에서의 지나치게 어려운 학습 내용, 아동의 흥미와 무관한 교과목 위주의 분과 교육, 일반 교육의 소홀, 전인 교육의 도외시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2. 남한의 민족교육과 홍익인간사상을 중심으로 홍익인간 교육의 변화일제 시대 당시 임정에 의해 제시된 삼균주의는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므로, 당시 정치이념보다 민족을 앞세운 의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삼균주의는 조소앙이 납북됨으로써 남한에서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이렇게 남한의 해방이 미군정에 의해 이룩됨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은 외형상의 교육이념으로 한정되게 되었으며 그 실질적인 주된 내용은 미국의 교육이론으로 채워지게 된다.그러나 당시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장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새로이 주장한 안호상이 등장한다. 그는 홍익인간의 이념에 입각하여 남북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민족적 염원을 ‘한백성주의(일민주의)’를 주장한다. 그는 한민족은 한 핏줄로 역사와 자연을 끊임없이 재창조해나가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로, 자유?진리?공정의 세 가지 원리를 가지고 남녀상하?지방파당?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야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자유는 균일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에, 진리는 균등을 목적으로 해아 할 교육에 마지막으로 공정은 균첨을 목적으로 해야 할 경제에 각각 적용되는 것으로 인간은 이 세 가지 원리를 실천해야 ‘참된사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홍익인간사상의 내용을 자유?진리?공정이란 근대적 의미로 해석하여 이를 민족통일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포괄적인 민족통일사사상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한편 그는 일민주의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닌 인간주의, 개인주의나 계급주의가 아닌 민족주의, 전제주의나 독재주의가 아닌 백성주의, 곧 민주주의 세 요소를 그 안에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일민주의가 시민 혹은 민중에 초점에 둔 것이 아닌 신인합일을 그 궁극적 이상으로 여겼다. 이러한 신인합일은 한민족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음을 또한 내포함으로써 일민주의를 다시 표현하면 ‘온백성주의로서의 민주적 민족주의’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는 진정으로 온 인류가 한 백성으로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추구한다는 것이었다.인간은 교육에 의하여 신에 가까워질 수 있기에 그는 일민주의 입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