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요, 쌍화점솽화뎜(雙花店)에 솽화(雙花) 사라가고신댄휘휘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이말슴미 이뎜(店)밧긔 나명들명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더러둥셩 다리러두러 다리러디려 다로로거디러 다로러긔자리예 나도자라 가리라위 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긔잔데 가티 덤거츠니 업다삼장사(三藏寺)애 블혀라 가고신댄그뎔샤주(社主) 내손모글 주여이다이말스미 이뎔밧긔 나명들명다로러거러디러 죠고맛간 삿기샹좌(上座)네 마리 호리라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긔자리예 나도자라 가리라위 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긔잔데 가티 덤거츠니 업다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회회(몽고인)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좌동)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좌동)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난잡한 곳이 없다)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만그 절 지주 내 손목을 쥐더이다.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나며 들며 하면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상좌 네 말이라 하리라(좌동)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좌동)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난잡한 곳이 없다)<중 략>공민왕의 동성애?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산고로 죽은 후 더 이상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대소 신하들이 후사를 잇기 위해 후궁을 맞게 하였으나 공민왕이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게다가 공민왕의 여인 거부증은 더욱 심해져 주변의 꽃 같은 여인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귀족의 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를 만들어 가까이 두었다.이때부터 공민왕의 수발은 자제위가 맡게 되었고, 공민왕은 그들과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겼다.이하생략
10123345 조은솔창덕궁답사보고서- 한국사의재조명 제 3차 보고서 -담당교수 : xxx 교수님xxxx대학교10123345 xxx10123345 xx학과 xxxCONTENTS- 조선 궁궐의 얼굴과 발자취- 창덕궁의 나날- 내가 지나간 창덕궁- 창덕궁과 나Ⅰ. 조선 궁궐의 얼굴과 발자취▷▶ 조선 궁궐의 역사조선의 궁궐 중 제일 먼저 세워진 궁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기면서 종묘, 사직과 함께 1394년에 지은 경복궁이다. 2번째 궁으로는 3대 태종 때(1405년)에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창건했다. 이로써 정궁 경복궁에 이어 이궁 창덕궁인 양궐 체제가 확립되었다.그러나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하여 많은 임금들이 창덕궁에서 거처하면서 함께 거처하는 식구들도 늘게 되었다. 따라서 성종 때에는 창덕궁 근처에 창경궁을 세우게 된다. 창경궁은 창덕궁 옆에 위치하여 창덕궁의 부속 역할을 많이 하였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소실되었다. 선조는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먼저 재건하게 되는데, 이는 경복궁이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하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그런 것이었다. 그리하여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 다시 지어져서 마지막 황제에 이르기까지 270여 년간 정궁의 역할을 하였고, 창경궁은 1616년에 복원되었다.반면 덕수궁(경운궁)은 원래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후손의 집이었으나 그 후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하였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한 후 경운궁이라 이름지어 7년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광해군은 인경궁과 경덕궁)을 지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왕이 되고, 인조는 광해군대에 지었던 인경궁을 헐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보수하였고, 경덕궁은 그대로 두어 이궁으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창덕궁과 창경궁이 정궁이 되고 경덕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 조선 후기 내내 지속되었다.1868년, 고종 초년에 경복궁이 중건되자 경복궁이 다시 정궁의 지위를 회복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이궁으로 쓰이며 이궁으로 쓰이던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1896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고종은 같은 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정궁인 경복궁이나 이궁인 창덕궁은 모두 빈 궁궐이 되고 만다. 고종은 1년 만에 궁궐로 돌아오는데, 월산대군 후손의 집을 확장, 대대적으로 보수하라는 명을 내리고 경운궁이라고 칭하고 그 곳으로 환궁한다. 그러나 경운궁은 1904년의 대화재로 인해 거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었다가 1905년-1906년에 대부분의 전각들이 복원되었다.한편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진 뒤 여러 왕들이 태어나고 즉위식을 갖는 등 이궁으로서 역할을 하다가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일제의 강점으로 뜯겨나가고 헐리고 하여 그 정확한 때를 알 수 없으며 오직 궁궐지의 기록에 의해서 찾아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궁궐이다. 또한 일제는 한 때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여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면서 격하시켜 '창경원'이라 부르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조선의 5대 고궁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다라 그 운명을 같이 해온 우리 역사의 동반자이다. 시대가 변하여 차차 원래의 모습으로 보수, 복원되어가고 있지만 지나온 그 역사는 궁궐 각 건물의 공간 안에 현존한다. 따라서 궁 탐방은 단지 휴식을 취하고 볼 것을 즐기는 눈요기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역사 현장으로의 초대이다.▷▶ 조선 궁궐의 구조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말이다. 궁은 왕이 신하와 함께 정무를 보고 거처하는 곳이고, 궐은 그 궁을 지키는 "궁성과 성루와 성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궁궐의 공간은 내전, 외전, 동궁, 주거공간, 후원, 궐내각사, 궁성문, 궐외각사로 분류된다. 다음은 일반적인 조선 궁궐 구조를 나타내는 그림이다.① 내전(內殿)내전은 왕과 왕비의 공적 사적 활동 공간으로, 위치와 기능면에서 궁궐의 중심이 되며 , 크게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으로 분류된다.대전은 왕이 기거하는 곳으로 특히 대전의 여러 채의 집들 중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공간을 "연거지소(燕居之所)" 또는 "침전(寢殿)"이라 하는데, 왕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주요 인물을 만나는 곳이므로 궁궐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며, 조선왕조 역사의 시작과 같은 곳이다.중궁전은 왕비가 기거하는 공간으로 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중전마마 납시오" 라는 말에서의 중전이 중궁전의 약자이기도 하다. 창덕궁의 대조전에 해당한다.② 외전외전은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를 만나는 의식이나 연회 등 행사를 치르는 공간으로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어 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곳이다. 외전의 중심은 정전(正殿) 혹은 법전(法殿)이라 부르는 건물이다. 정전 건물 주변에는 회랑이라는 담이 둘러싸여있다. 회랑 안 네모난 마당이 우리는 흔히 조정(朝廷)이라 말하는 곳이다.③ 동궁동궁이란 세자를 지칭하는 말이 동시에 세자가 기거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동궁은 다음 왕통을 이을 예비국왕이다. 따라서 떠오르는 해가 동쪽에 있듯이 동궁의 위치도 외전의 동쪽에 위치한다. 또한 세자와 관련 있는 관서도 같이 붙어있는데,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인 세자시강원과 세자의 경호를 담당하는 부서인 세자익워사rk 함께 있다.④ 후원후원은 궁궐의 북쪽에 조성되어있는 왕실의 공원으로, 이 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당시에는 휴식 말고도 과거시험도 치르고, 왕이 직접 군사훈련도 하고, 조그마한 논을 만들어 친히 농사도 지어보는 공간이였다.⑤ 궐내각사지금까지의 공간이 왕실의 공간이라면 궐내각사는 신하들의 활동공간이다. 정규관리들의 활동 공간/군사기구/왕실시중과 궁궐관리기구등이 있다.Ⅱ. 창덕궁의 나날창덕궁은 1405년 태종이 이궁으로 지은 궁궐로,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여 가까이 있는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고 불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서울 안의 모든 궁궐이 소실된 뒤 1610년 광해군이 재건하여 법궁으로 삼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창덕궁은 질서와 절제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경복궁과 달리, 전각들이 지형을 따라 다른 궁들에 비해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고, 규모도 배치된 공간과 쓰임에 맞게 지어졌다. 창덕궁은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494년에 꾸며진 창덕궁 후원은 다양한 정자와 연못, 수목, 괴석이 아름답게 어우러져있다. 이 후원에는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규장각이 설치되었다. 창덕궁은 탁월한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를 인정받아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Ⅲ. 내가 지나간 창덕궁처음 창덕궁은 돈화문을 지나 들어섰다.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609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돈화(敦化)는 ‘(큰 덕은 백성 등을)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돈화문을 지나면 궁의 관리들이 일을 보던 궐내각사가 나온다. 상당히 큰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왕의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 건강을 책임지던 내의원,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과 왕의 칙령,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 외의 여러 기관이 있다.우리는 안내를 받지 못 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그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으로 향했다. TV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배경과도 같은 인정전이 그 곳에 있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다.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 접견과 같은 국가적인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이다. 인정전 앞에는 좌우로 여러 돌 비석이 서있는데, 이는 품계석으로, 위와 같은 행사 때에는 그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고 서쪽에는 무관이 섰다고 한다.계속하여 정처 없이 떠돌다가 우리는 후원으로 가는 함양문에 도착했다. 이곳은 창덕궁의 후원으로 가는 문이다. 우리는 후원으로 가는 표를 사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어 아쉽게 단풍이 보이는 경치를 뒤로 하고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불꽃놀이를 하기도 했다는 후원은 창덕궁 전체의 60%를 차지한다고 하여 나중에 다시 가볼 계획이다.
태릉답사보고서- 한국사의재조명 제 2차 보고서 -담당교수 : xxx 교수님xxxx대학교10123345 xxx10123345 xx학과 xxxCONTENTS??Ⅹ?Ⅸ. 태릉과 강릉의 주인Ⅰ. 조선의 왕릉Ⅱ. 답사를 하며Ⅲ. 참고문헌 및 사이트Ⅰ. 태릉과 강릉의 주인태릉은 조선 제 11대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능이다.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이 새겨진 병풍석을 둘렀다. 그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하였고,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지만, 잦은 침수 피해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단릉에 안장되었다. 문정왕후의 능에 여느 왕비들의 능에 주로 붙는 여성적인 글자가 아니라 ‘태(泰)’자를 붙여 태릉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정왕후가 가진 탁월함과 카리스마를 느끼게 해주는 한 부분이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모습문정왕후는 수렴청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왕비로,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혹평을 받은 왕비라고 한다. 드라마 ‘여인천하’에 등장하기도 한 문정왕후는 중종의 왕비이자 명종의 모후로써 명종대에 수렴청정을 실시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는 성리학의 기본 이념을 뒷전으로 한 채 독재를 하였으며, 또한 억불정책을 무시하고 불교를 숭상하였다. 그런 점에서 문정왕후는 조선시대 내내 남성 지배층에게는 불편하고 불쾌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남성지배 관료층을 발아래 두고 자신의 권력과 왕권을 오롯이 지켰다는 점에서 탁월한 정치가로 평가 될 수도 있다. 역발상을 해보면 문정왕후의 독재 권력이 강했다는 점은 그만큼 문정왕후의 정치적 식견이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강릉은 조선 제13대 명종과 그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으로, 부부쌍릉이다. 태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을 두르고 12칸의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만석에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겼다.명종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파평윤씨 가문의 세도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나자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는 등 선정을 펴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인순왕후는 1544년에 당시 경원대군(慶源大君)이었던 명종과 혼인하여 부부가 되었다. 1545년, 명종이 후사가 없는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551년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다. 인순왕후 역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 가려 허수아비로 전락한 비운의 인물이다.Ⅱ. 조선의 왕릉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 왕릉이라 한다.) 조선 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가 있다고 한다. 특히, 세계적으로도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없이 남아 있는 예는 조선왕릉이 유일하다.현재 온전하게 남아있는 서울 근교의 왕릉은 40기이다. 조선 왕릉의 터를 잡는 데에는 그 당시에 유행한 풍수지리설이 한 몫 하였다. 현재 많은 왕릉이 자리 잡은 도성 안팎의 장소들은 각 시대 여건에서 판단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인 것이다. 또한, 왕릉을 조영할 때에는 되도록이면 본래의 지형 조건을 훼손하지 않고 최소한의 인공적인 시설을 설치하려고 노력하여, 자연 환경을 존중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보여준다.조선의 왕릉은 다른 주변의 시설로부터 격리시켜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두 겹 정도의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았다. 또, 능 근처에는 제례를 준비하기 위한 재실을 마련하였다. 재실을 지나면, 능역을 상징하는 홍살문을 통과하여 능역의 중심부로 접어들게 된다. 봉분 앞에는 다양한 석물과 문, 무석인을 설치하는 것이 조선 왕릉의 기본적인 구성이나, 이는 지형조건, 시대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어 왔다.조선 왕릉은 다양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왕실의 장례와 제례는 엄숙하고도 완벽한 예법에 따라 행해졌으며, 이 예법의 절차와 의미, 이에 포함되는 다양한 의물들은 각기 당시의 사상과 문화를 고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왕릉 조영 절차를 포함한 모든 의례 절차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 기록물들 자체만으로도 큰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왕의 삶과 죽음, 장례 절차, 왕릉의 조영을 살펴보면서 조선시대 왕실 문화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Ⅲ. 답사를 하며태릉을 직접 가보기 전에, 조선왕릉전시관을 들렸다. 조선왕릉전시관에는 전체적인 조선 왕릉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태릉과 강릉 이야기도 있었는데, 태릉과 강릉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점이 신기했다. 아마도 거의 비슷한 시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앞에 서있는 석인상의 모습이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점도 흥미롭게 보았다. 내 눈에는 전시되어있는 석인상들의 모습이 절에 있는 사대천왕의 모습과 비슷하게 보였다. 이는 불교의 흔적이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는데, 문정왕후가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싶다.태릉의 모형도가 만들어져 있어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해둔 것이 좋았다. 모형도에 건축물마다 해당되는 명칭을 적어두어 어디가 어디인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무덤의 구조에 대해 설명해 둔 것은 그 외에도 많았는데, 사실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이해가 힘들었다. 그 중에 내 눈에 가장 들어온 것은 왕릉을 반으로 갈라둔 모형도였다. 무덤이 단순하게 흙으로 덮여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운데에 돌로 된 층이 있었고, 안에도 튼튼하게 석실이 구축되어 있었다. 조선 왕릉이 별다른 훼손 없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는 비결은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 또, 삼국시대의 왕릉들은 석실이 하나였는데 조선의 왕릉은 석실이 2개로 나뉘어져 있어 더 체계적으로 보였다.
자기소개★ 이 시대 자본주의의 꽃"여러분, 용돈기입장을 쓰면 용돈을 아낄 수 있어요." 제가 믿지 못하는 말입니다. 단순히 용돈기입장을 '쓰기'만 한다고 해서 소비를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쓴' 것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돌아보아야만 비로소 돈이 들어오고 나간 것을 적은 것의 의미가 생기기 때문입니다.저는 어린 시절부터 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얘는 왜이렇게 돈을 밝혀?" 라는 말을 귀에 못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가계부를 쓰셨습니다. 재미로 따라하기 시작했던 가계부 쓰기가 저도 이제 몇년이 되었고, 최근에는 엑셀을 활용하여 통계적 분석도 해보고 있습니다.용돈도 처음부터 한 달 단위로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용돈을 필요할 때마다 주시지 않고, 한달에 정해진 금액만 주신 부모님이 너무 감사합니다. 특별한 재능도, 열정도 없던 저에게 '돈'에 대한 흥미를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달마다 정해진 때에 정해진 금액만 주어진다는 것은, 계획적으로 소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습관적으로 다음달에 어디에 얼마정도 써야 할지 생각을 하곤 합니다.물론 현실이 계획처럼 실천되지 않을 때가 많아 힘들 때도 많습니다. 예상보다 핸드폰비가 많이 나온다던지, 갑자기 생필품이 떨어진다거나 모임 자리가 많이 생겨서 잔고 1000원 미만대로 일주일동안 쪼들린 적도 꽤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젠 할인이나 저축, 이자 같은 혜택들에는 도가 텄습니다. 가끔씩 친구들이 "야, 넌 바쁘지도않냐, 그런것도 다 챙기고, 지독하다 야." 이럴 때도 있지만, 약간의 수고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내팽개치는 것은 '안 하면 안 한 만큼 손해다'라는 저 자신의 좌우명과, 현실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나 공부하는 사람이야그렇게 몇 년을 살다보니 돈을 모으고 쓰고 아끼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초등학교때 엄마가 저금하라고 주시는 용돈으로 한두푼 모았던 돈이, 졸업할 때 상당한 액수가 역시 상당한 이자와 함께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오, 바로이거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중학교 1학년 말이였던 것 같습니다. 아빠와 함께 동네 새마을금고에 가서 처음 적금통장과 요구불예금 통장을 만들었습니다. 현금카드라는 것도 처음 받아봤습니다. 어른들만 쓰는 줄 알았던 카드라는 것을 손에 받아 드니 어쩐지 우쭐해지는 마음도 있었습니다.그러나 역시 현금카드라는건 무조건 돈을 인출해서 사용해야 했고, 그 때마다 수수료가 드는 것도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이트를 뒤져보다가 '체크카드'라는 것을 알게 됐고, 만 14세가 지나자마자 근처 우리은행에 가서 계좌를 트고 체크카드를 발급받았습니다. 잘 사용하고 있다가, 언젠가 통장에 '체크카드할인' 비슷한 명목으로 얼마가 입금이 되어 있는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때부터 였습니다. 체크카드의 혜택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 여러 은행을 알아보다가 결국 선택한 것이 국민은행의 해피포인트 체크카드였습니다. 지금은 스타체크카드를 하나 더 발급 받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할인 금액이 입금 될 때마다 '아, 이게 다 내가 열심히 알아본 덕이지.' 라는 생각에 뿌듯하고 좋습니다.2학년을 마치고, 3학년 1학기 때 휴학을 하고 돈을 모은 뒤 여름방학 때 유럽으로 여행을 갈 생각입니다. '컨티키'라는 다국적 여행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조금 길게 여행을 갈 생각이라 돈이 꽤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조금씩 모으고 있습니다. 어느날 아빠가 "돈을 한 곳으로 모으라."고 하였고, 우연히 KB스타클럽 제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저도 대상자가 될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프리미엄스타를 목표로 국민은행으로 제 모든 자산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 목표는 달성 될 듯 싶습니다. 신용도와 혜택, 두 마리 토끼를 이젠 한꺼번에 잡고자 합니다.지원동기 및 활동계획★ 나는 그저 채권투자가 하고 싶었을 뿐이고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돈으로,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금융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만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되는 돈이기에, 주식이나 옵션등은 제하고, 안전하면서 적금보다 수익이 많다는 채권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과 오빠가 회장으로 있는 증권연구회에 가입하여 기업분석을 해보고, 밸류에이션, 모의투자등을 해보면서 색다른 느낌을 가졌습니다. 어려웠지만 신기하게도, 노는 것 빼고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 하는 제가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더 신기하게도, 지나가다 본 사주에 은행권에 종사하면 딱이라고 했습니다.'오, 이 길이 내길이구나?' 라고 어렴풋이 생각하던 중, 대학내일에서 KB캠퍼스스타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거다!" 라는 생각이 들어,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검색해보았습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국민은행에다가, 개인활동비도 지급하고, 단순한 홍보대사 활동이 아닌 사회공헌활동도 함께 하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검색을 통해 찾아낸 선기수의 블로그를 탐색해보니, 같은 팀끼리 친해보이는 것도 좋아보였습니다. 대학에 와서 얻어야 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인맥'이라고 생각했던 저에게 KB캠퍼스스타는 완벽히 들어맞는 기회입니다. 과제에, 시험에 바쁘게 흘러간 모집기간이였고, 지금은 지원 마지막 날입니다. 정말로 잠이 많은 제가 이렇게 밤을 새면서 지원서를 쓰고 있는 까닭은, 지원조차 못해보면 너무나도 후회돼 몇날 몇일을 더 밤을 새며 뒹굴 것 만 같기 때문입니다.
야누스의 과학김명진 저-20세기 과학기술의 사회사-사회적 배경을 통해 과학을 보다10123345경영학과 xxxⅠ 조각을 줍다우리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고, 매일매일 과학과 관련된 소식을 접하며, 그로인해 많은 과학적 사실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들이란, 대부분 배경을 알지 못한 채 단독으로 존재하는 ‘단편적’사실일 뿐이다. 여태까지 나는 과학적 이론과 사실들을 그냥 외워왔으며, 그러한 이론들이 내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시험을 풀기 위해서만 사용해왔다. 과학을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저러한 이유에 기초한 것일 것이다. TV에서 복제양 돌리가 탄생했을 때, 우주선 나로호가 발사될 때 그 장면을 방영해 주더라도 ‘와 신기하다’, ‘와 멋있네’ 정도의 생각만 했을 뿐이지 그러한 사실들이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과학에 대해 별 관심 없이 보내던 중,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이 책, 야누스의 과학은 저자가 서울시립대에서 자연과학개론 강의를 하면서 직접 쓴 ‘과학기술사’라는 젊은 학문을 다루는 책이다. 그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대부분이 비전공자였기 때문에, 그들을 고려하여 쓰여진 책이라 나 같은 문과 학생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제목, 부제목과 같이 20세기의 과학 분야를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통틀어, 시대적 ? 사회적 맥락 속에서 소개하여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가늠하게 해준다. 지구과학 ? 천문학 ? 화학 ? 생물학 등 넓은 범위에 대해 다루고 있어 서로 다른 과학 분야 사이들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전쟁과 과학 발전의 관계에 대해 많이 서술되고 있는데, 몇몇 위대한 과학적 발견들이 군사적 목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러한 사례들은 앞으로 간략하게 소개할 것이다. 여러 가지 예제를 통해 설명을 하고 있는 책이다 보니 내게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인 군사와 과학의 관계 부분만 집중적으로 정리하려고 한다.Ⅱ 전쟁, 그리고 과학현대 과학은 과거와 비교해 과학 활동이 양적으로 매우 팽창하였고, 연구단위가 거대과학화 되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1940년의 대학의 생물학 조교수는 연간 100달러가 안 되는 비용밖에 지원을 받지 못했고, 실험동물등도 직접 키워야 했지만, 1960년의 생물학 조교수는 연간 5만 달러의 연구비를 받으면서 여러 연구원과 조교, 실험장비들을 갖추고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급속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 원인에는 사회가 과학의 유용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특히 일반인들이 과학의 유용성을 인식하게 된 계기에는 전쟁이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일반 대중들은 과학이 갖는 힘을 생상하게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전쟁과 관련해 생각했을 때, 내개 떠오르는 과학의 분야는 항공우주학 뿐이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분야가 전쟁과 관련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 전기에너지의 40%를 공급하는 원자력 발전도 2차대전 때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척된 무시무시한 원자 폭탄의 원리를 평화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원자폭탄의 개발은 미국의 맨해튼 계획 -이후 거대과학 연구의 모델이 된 중요한 계획이였다- 에서 시작되었다. 이 맨해튼 계획은 2차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종결되었지만, 원자폭탄의 위력은 대중의 과학 인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만큼 강했고, 일본에 막대한 사상자를 낳았다. 전쟁이 끝난 후, 원자과학자들은 핵에너지를 평화적 용도로 사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1949년 소련이 원자탄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만약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전력생산용 원자로를 개발한다면 미국에 엄청난 타격으로 작용할 것이기에, 미국은 1953년 ‘평화를 위한 원자’ 선언을 하고, 그에 따라 전력생산용 원자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렇듯 원자력발전은 전후 과학자들이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현실로 끄집어 낸 것은 다름아닌 냉전기의 군사적 필요였다.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컴퓨터는 에니악(ENIAC)이다. 에니악은 ‘계산’용도로 개발된 기계이다. 그러나 그 ‘계산은’ 단순한 계산이 아니였다. 다시 한 번 자세히 말하자면 에니악은 제2차대전시기에 대포의 탄도 계산을 위해 탄생되었다(탄도를 계산하려면 7개 변수를 가진 미분방정식을 풀어야 했는데, 당시에 이런 계산을 하는 사람을 computer라고 불렀다). 에니악의 발명 이후 1960년대까지의 컴퓨터 발전은 군사기관이 주도하였다. 1950년대, 미국은 소련의 공격을 대비해 반자동 방공망 시스템(SAGE프로젝트)을 구축하기 위하여 컴퓨터 발전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 부었다. 또한 퍼스널 컴퓨터가 등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집적회로(IC)를 확산시키는 데에도 군사적 영향이 컸다. 군대는 미사일과 방어 시스템, 암호 해독 등을 위해 당시 고가였던 IC의 개발과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퍼스널 컴퓨터는 발전을 거듭해 오다가 애플2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대중화된다.오늘날 컴퓨터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인터넷을 빼놓을 수 없다. 인터넷은 대중화 된 지 10여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네트워크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인터넷 또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다. 인터넷 또한 냉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미국 국방부 소속 연구기구가 ARPANET(아르파넷)을 구상하면서 부터이다. 처음에 ARPANET을 만들기로 한 이유는, 당시 값비쌌던 대형 컴퓨터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컴퓨터 네트워크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온 것은 의외로 이메일이라는 기능이였다. 초기 ARPANET의 설계자들은 이메일을 중요한 용도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그 이후로 유즈넷, 텔넷 등 다양한 네트워크들이 등장하였다. 이후 인터네트워킹을 위한 월드와이드웹이 개발되고, 웹브라우저가 등장하면서 인터넷은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항공우주학의 발전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발전했다기보다는 냉전 체제의 산물에 더 가깝다. 1차대전이 끝나고 1920년대 후반, 베르사유조약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무기를 개발할 방법을 찾고 있던 독일에 의해 로켓은 군사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완성된 V-2로켓은 2차대전의 막바지에 투입되어 그 위력을 유감없이 보였다. 이에 전쟁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V-2 로켓 개발의 유산을 선점하기 위해 싸웠고, 결국 V-2로켓의 연구팀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에 비해 군사력이 약하다고 생각 한 소련은 미사일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는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 된 냉전 체제의 ‘부산물’이였다. 스푸트니크의 발사는 미국의 로켓 개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로켓은 미국에 미사일을 바로 겨냥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우주개발은 이데올로기적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고, 미국은 NASA를 설립하여 유인 우주 프로그램인 머큐리 계획을 발표하였다.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하였고,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TV로 중계되는 그 장면에 열광하였다. 그러나 우주개발은 의료 ? 교육과 같은 사회적 목표에 사용될 자금과 인력을 빨아들이고 있다며 많은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고, 현재에도 우주 계획은 경제성의 의문이 제기되어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합성살충제는 화학 산업이 낳은 ‘경이의 신물질’ 중의 하나였다. 20세기 이전에도 살충제는 사용되고 있었으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살충제의 사용량과 종류가 크게 늘었다. 1차대전 시기에는 군복, 붕대 등에 사용되는 면화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는데, 이 때 미국 남부에 면화씨바구미가 창궐하여 면화 농업에 큰 타격을 입혔고. 같은 시기 유럽에는 그에 의해 전염되는 발진티푸스가 크게 유행해 수많은 사망자를 내어 살충제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또한, 전쟁 중에 양측이 새로운 독가스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살충제가 연구되었고, 비인간적이라고 비난 받던 화학전 부대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독가스를 평화적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살충제로 탈바꿈시켰다. 2차대전 시기에는 해충을 독일군이나 일본군에 비유하여 박멸해야할 대상으로 판단케 하는 군사적 비유가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에는 식량과 면화 가격이 상승했고, 말라리아의 전염이 심각했다. DDT는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DDT를 낮게 희석하면 해충에만 작용하고, 인체에는 전혀 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곧 DDT는 전 세계에 살포되었고, 전염병의 확산을 중단시켰으며, 수많은 시민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곤충들이 곧 DDT에 대한 내성을 갖게 되어, 더욱 독한 살충제들이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다른 동물들에게까지 해를 끼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하였고,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출간 이후로 현대 환경운동이 시작되어 결국 DDT의 사용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그러나 DDT의 사용 금지 조치 이후 개발도상국에서 말라리아가 다시 창궐하였고, 말라리아의 위협과 살충제의 위협 중 어느 쪽이 더 심각한가의 문제는 아직도 국제적인 논쟁거리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