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 잡는 모임국어국문학과죽음, 그 범접할 수 없는 것-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고며칠 전, 과외를 받는 초등학교 4학년 애가 ‘선생님, 선생님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해요?’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죽음. 꼬마아이도 궁금할법한 하나의 세계이다. 무서우면서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그런 것이 바로 죽음이다. 하지만 ‘죽음’이란 주제로 심도 있게 다룬 작품을 정작 많이 접해보진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나의 눈길을 끌었다.‘자살’을 미학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실제로 예술가들이 ‘자살’이란 죽음을 택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았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자살’에 대해 미학적인 관점으로 다가간다. 1,3,5장에서 ‘나’라고 표현되는 사람은 바로 자살안내자이다. 그는 사람에 따라 그에게 맞는 자살방법을 알려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 이는 일종의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라고들 하는데 사실 읽으면서 ‘이게 과연 판타지적 요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현실에서 있음직한 일이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실제로 죽음에 대해 편집광적 집착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테러나 혁명을 이루면 더 관심을 이끌고 혹은 추앙받고, 어딘가에 저항을 할 때도 금식 등 극단적으로 생존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하며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할 때 자살 등으로 협박을 하는 사례들이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렇게 죽음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에서 미학적으로 자살하려는 집착 역시 존재하지 않을까. 소설 안에서 미미를 보아도 그녀는 자신을 미적 욕망을 충족시켜줄 누군가를 찾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죽음을 찾으며 미학적 욕망을 충족시킨다.또한 소설의 내용을 보면 세연은 늘 춥파춥스를 입에 달고 사는데, 여기에서 문득 춥파춥스와 죽음의 연관성은 어떤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추측해 보건데 춥파춥스는 세연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살아 있는 동안 세연은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자신 맘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늘 방황하며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자살하는 방법을 찾는 동안에 세연은 춥파춥스를 더 이상 물지 않게 된다. 죽음이 또 다른,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하나의 자신이 조절하고 주무를 수 있는 것이라는 사고의 전환이 충격적이었다. 이렇게 보면 세연 역시 하나의 정복 욕망 혹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욕망의 대상으로 죽음을 본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하나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죽음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또 나아가 이 점을 판타지적 요소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으며 또 한 가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작가의 필체이다. 신경숙 작가나 박민규 작가에 대한 토론을 통해 우리는 이미 작가의 필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다. 김영하는 신경숙이나 박민규와는 다르게 냉소적인 느낌이 드는 필체를 사용한다. 개인적으로는 신경숙의 따뜻하고 오밀조밀한 정이 있는 느낌의 필체를 선호하지만 김영하의 책을 읽으면서 그만의 필체에도 매력을 느꼈다. 『퀴즈쇼』에서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도 사람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필체에서 오히려 소설 속 인물에 대해 더 (감정이입이라기보다는) 감정을 줄 수 있었고 연민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번 소설에서는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루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냉소적이고 무미건조한 말투가 인물을 화자같이 냉정하게 바라보면서도 더 연민을 가지게 만드는 아이러니컬한 느낌을 받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