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전개북유럽의 르네상스는 독일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북방 르네상스가 진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쇄술의 발달과 종교개혁이 있다.르네상스는 지역적으로 보았을 때 이탈리아 쪽의 르네상스와, 알프스 산맥 위쪽의 북부 르네상스로 나뉘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시작되었던 르네상스가 알프스 산맥 이북지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계기는 대서양 주변에서의 무역이었다. 예술, 학문 쪽으로 크게 발전하고 세속적인 그리스 로마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는 달리, 북부의 르네상스는 세속화된 교회문제와 사회문제에 치중하게 된다. 당시의 알프스 이북에는 아직도 중세의 봉건제도와 교회의 힘이 강력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와 같은 여건이 충분히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나 영국보다는 독일 지역에서는 당시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의 가혹한 통치가 있었고, 또한 독일 민족통일의 바람이 이러한 르네상스와 결합되면서 종교개혁이나, 사회적 문제 해결 등에 대한 요구가 더 많이 생겨났다고 보여진다. 즉 북부는 종교 사회개혁 문제에 오히려 관심을 가졌으며 성경과 초기 교회의 정신으로 복귀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북부는 르네상스가 자연스럽게 종교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라든가 프로테스탄트, 칼뱅, 쯔빙글리, 청교도 등등의 이러한 말들이 바로 여기서 나오게 된다.대표적인 북유럽 르네상스 작품들인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같은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나오게 된다.반면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전문화(고대 그리스, 로마문화)의 부활을 그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고대 유물이 많았고 따라서 조각가, 건축가 등이 고대 로마의 것을 공부하는 것이 가능했다. 건축에서는 브루넬레스키가 회화에서는 마사초가 조각에서는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음악은 르네상스 시기의 강력한 교황들의 후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시스티나 성당의 성가대는 전 유럽의 음악가, 성악가들로 이루어졌다.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만개한 곳은 피렌체,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등의 도시가 있다. 학술과 예술가들을 키웠던 후원자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 등이 알려져 있다. 15세기 사보나롤라의 개혁에 의해 피렌체의 예술이 쇠퇴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의해 밀라노의 스포르차가도 추방당했으나 로마에서는 교황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이 추진되어 많은 예술가가 모여들었다. 1527년 로마 약탈 사건 이후 로마가 일시적으로 황폐해지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토스카나 대공국 등에서 미술은 계속 꽃필 수 있었다.르네상스 시대는 밝은 시대가 아니라 페스트가 유행하거나 정치적 싸움, 전쟁이 계속된 시대였다.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은 궁정과 교황청 등 극히 일부에서뿐이었고 일반적으로는 미신과 마술이 믿어지던 시대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유럽의 근대를 이끈 역할을 했지만 그 시기 이탈리아 국내 정치는 엉망이었다. 교황령을 비롯한 여러 소국들로 갈라지고 외국으로부터 간섭 받아 국가의 통일이 늦어져 정치, 사회적 근대화가 지연되는 결과가 초래된 시기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한계점은 이 고전문화의 부활에 그쳤다는 점이다. 인간 중심적이고 현실 중심적인 새로운 문화의 시작을 알리긴 했지만, 로마 카톨릭의 본산이라는 점, 통일된 국가가 없다는 점, 각 지역의 독립적인 성향 등 때문에 결국 새로운 시대를 이끌만한 정치적, 군사적 세력을 이루어 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봉건제도의 형성과 쇠퇴중세시대의 봉건제도란, 중세 유럽에서 땅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군과 가신의 관계를 말한다. 봉건제도가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왕권이 상대적으로 미약하고 지방세력이 강력했던, 소규모 지역에 영주들과 가신들의 관계가 형성되기 좋은 특성이 있었다. 중앙의 권력이 지방의 봉신들에게 분산되는 지방분권체제의 형태를 띄었기 때문에 가신들은 봉토에 대해 주군의 간섭을 배제하는 불입권을 인정받고 자신의 영역 내에서 독자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이는 대등한 당사자간의 쌍무적 계약관계로서 상대방의 의무 불이행을 이유로 얼마든지 계약 파기가 가능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봉건제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봉건제도가 몰락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지를 중심질문으로 놓고 분석해 보았다.봉건제도의 형성이유로는 먼저, 중세 초기 프랑크 왕국이 해체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세력이 소멸하여 지방적 체제로 전환이 필요했음을 들 수 있다. 더불어 로마제국이 몰락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지중해 무역과 상품화폐경제가 쇠퇴하여 땅을 중심으로 하는 현물 경제가 등장한 것을 둘째 이유로 들 수 있다. 또한 군사적 전술에 있어서 보병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기병이 중요했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육성하기 어려웠다. 이는 지방의 권세 있는 영주들 자체적으로 군사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기사 계급이 형성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 봉건제도는 크게 두 가지 운영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주군과 가신의 관계가 상호 계약적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봉건제도가 장원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발전했다는 것이다. 주군은 가신에게 땅을 하사하였고 가신은 주군보호를 통한 충성을 약속함으로써 봉건제도가 형성되었다. 그의 가신이 됨과 동시에 이 영주에게 충성을 약속하는 또 다른 가신의 주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내려가다 보면 구조 말미에는 기사와 농노의 관계가 형성되게 된다. 이들의 관계는 그 위층의 다른 영주-기사 관계와 상이한 특징을 보이는데 기사는 농노에게 땅을 주고, 농노는 가신에게 부역과 지대를 지불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들의 계약은 다른 기사-영주 관계와 달리 결코 깨질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하지만 봉건제도도 시대의 변화를 맞아 결국 몰락하게 되는데 그 몰락 양상은 다음과 같다.첫째로 ‘권력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봉건제도의 붕괴를 바라보겠다, 원래 봉건제도란 영주의 권력이 강한 지방분권적인 사회 아래에서 형성 될 수 있었던 제도였는데, 왕권이 강화되고 영주들의 권한이 점차 약화되어 영주권이 왕권에 흡수되면서 봉건제는 서서히 그 붕괴를 알리게 되었다. 이러한 단적인 예는 프랑스에서 보여지는데, 프랑스의 왕은 백년전쟁 이후 상비군과 조세권을 손에 쥐고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여, 지방 영주들의 세력을 누르고 봉건제를 타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의 전쟁이 발생하면 비록 권위는 없다 하나 왕명이기에 대영주는 자신의 병사를 이끌고 출전해야 했다. 왕이 두렵기 보다 반역이라는 명분하에 다른 영주들에게 공격받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병력을 소모하게 되었고 이렇게 군을 소비한 영주에게 왕은 세금을 걷어 그들의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었던 것이다.그리고 더불어 십자군 전쟁 이후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점차적으로 교역 중심의 사회가 나타나게 되고 각종 상업 인구가 증가하게 된다. 때문에 이전의 가난한 평민의 집단에서 이제는 부자 평민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부자 평민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왕에게 많은 세금을 바치고 왕은 그 세금을 자신의 왕권 강화에 쓰고 시민들의 지위를 높여주어, 결과적으로 영주들의 상대적 위치는 하락하게 된다.두 번째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봉건제도의 붕괴에 대하여 설명을 해 보겠다. 십자군 전쟁 이후 넓어진 세계관으로, 무역이 성행하고 화폐경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도시들이 급격히 발달을 하게 되어 왕권이 이들과 결합하여 중세의 장원을 붕괴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흑사병과 백년전쟁 등 유럽의 재앙으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것 역시 장원붕괴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또한 흑사병의 창궐도 그 봉건제 몰락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농노 기반의 봉건사회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유럽인구의 3분의 1이 죽음에 이르렀고 영주의 경제 기반이 되어줄 농노가 상대적으로 급격히 감소하여 농노의 지위가 상승하게 되기 때문이다.한동안 중세 사회를 주름잡았던 제도인 봉건제는 이와 같은 이유로 막을 내리고 유럽은 자본제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