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목차Ⅰ. 들어가며Ⅱ. 저자와 책에 대한 소개Ⅲ. 본문 감상1. 조선의 민중생활과 관습2. 조선의 왕실3. 조선의 사회제도Ⅳ. 나오며Ⅴ. 참고문헌서지사항제 목 -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저 자 -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역 자 - 조경철출판사 - 예담출판년도 - 2001Ⅰ. 들어가며19세기 말,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여행가, 선교사, 의사, 탐험가, 교육자 등 적지 않은 수의 낯선 서양인들이 찾아와 다양한 목적에서 조선 사회를 묘사하거나 분석하는 여행기를 저술하였다. 이들이 남긴 저서는 당시의 조선사회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국내에도 번역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혹은 서양의 문화적인 우월성을 주장하는 유럽우월주의적인 시각에서 조선에 방문하였고, 이러한 그들의 편향적인 시각은 그들의 저술에 그대로 반영되어있다. 이는 우리가 서양인이 남긴 기록을 볼 때 필히 주의를 기울이고 비판적인 자세로 살펴보아야 할 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러한 서양인의 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이는 타자의 시선에서 우리를 객관적으로 되돌아보게 해준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서양인에게는 놀랍게 여겨지기도 하고, 같은 현상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기존의 편향적인 시각에서 탈피하여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조선의 문화를 비교사적으로 연구하기도 하였다. 이에 필자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당시 조선을 어떻게 파악하였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며 책을 읽어나갔다. 특히 보통 서양인들의 저술은 그들이 직접 보고 경험한 민중들의 생활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라는 이번 수업의 주제에 맞게 당시의 민중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들며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Ⅱ. 저자와 책에 대한 맺었다. 이후 고종이 그의 노고에 대한 답례로 그를 “조선 국왕의 빈객”(the guest of the King)으로 초청하며 4개월간 조선을 여행하였고, 당시의 경험을 남긴 것이 『조선 : 조용한 아침의 나라』(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다. 이후 이 책은 2001년에 조경철에 의해 국내에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타자의 시선에서 세밀하게 묘사하고 기록하였으며, 당시의 조선사회를 사진 및 삽화 자료와 함께 기록하고 있어 개화기 풍속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미국에 파견되었던 보빙사 일행과 함께한 미국 측 인사.왼쪽부터 주한 미국 공사 루셔스 푸트, 전권대신 민영익, 참찬관 퍼시벌 로웰, 종사관 서광범, 부대신 홍영식, 미국 공사관 조지폴크)Ⅲ. 본문 감상책의 본문은 총 3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에서는 주로 지도에서 본 조선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조선의 사계, 부산항과 제물포의 모습 등이 소개되어 있다. 중반부 이후부터는 로웰이 서울로 상경하며 접한 장안풍경, 조선의 행정조직, 고종황제와의 알현 경험 등을 서술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저자가 직접 보고 경험한 민중생활과 조선의 풍속을 잘 녹여내고 있다. 필자는 로웰이 기록한 당시 조선의 모습을 큰 주제별로 3가지로 분류하여 소개하려고 한다.1. 조선의 민중생활과 관습로웰은 부산항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이후, 제물포를 거쳐 서울로 상경하였다.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서 보냈는데, 그 속에서 자신이 직접 관찰한 모습과 여러 조선 사람들과의 일화를 통해서 조선 민중들의 생활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특히 서울 거리의 밤낮의 풍경이나 조선의 가부장적인 풍습, 여성들의 지위, 결혼 양식과 상례 절차, 종교, 의복체계 등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며 소상히 다루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먼저 조선에 처음 온 외국인들이 대개 그러하듯 로웰 역시 조선의 장승에 족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집단에서 아버지의 위치는 통치자와 다름없이 높으며, 이러한 가부장제가 서양에서는 차츰 사라졌지만 조선을 비롯한 극동에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극동에 아직까지 가부장제가 남아있는 원인으로 특히 유교를 중요하게 꼽았는데,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도덕적 원리는 효孝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조선인들은 조상이 죽은 뒤에도 생전에 선조에게 바치던 존경의 마음으로 숭배를 계속하며, 조상들이 후손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아버지에 대해 가족들이 자신을 노예화하면 할수록 남들에게 더욱 높이 평가받는다며, ‘서구 사회는 전 세대로부터 받은 친절과 보살핌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일반적이나 동양인들은 봉사와 헌신을 윗대에 먼저 지불한 다음 그 대가를 자식에게서 기대한다’고 표현하였다.그는 가부장제 하에서의 재산 분배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는데, 일반적으로 재산의 소유권은 가장에게 있으며 아버지가 생존하는 한 어떤 이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는 장남이 실권자가 되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3분의 2가 장남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3분의 1이 다른 아들들의 몫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조선의 재산 분배 과정을 설명하면서 서구인의 편향적인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지 않고,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조선 민중들의 생활을 이해하였다. 즉 로웰은 모친과 다른 가난한 형제들을 보살피고 조상을 모시는 일을 담당하는 장남의 의무를 생각할 때, 이러한 방식의 재산분배는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또한 그는 덧붙여 이름을 정하는 문제를 통해 조선에 남아있는 가부장적 씨족 사회의 특징을 잘 알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즉 조선인들은 이름 석자 중 첫 글자는 성姓으로 같은 씨족의 모든 구성원과 공유하며, 나머지 두 글자 중 하나는 동일한 항렬을 나타내는 표시로 모두 같은 글자를 쓴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항렬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며, 조선인들은 서로 멀리 살아서 얼굴 된 모습에 대해 로웰이 느낀 바를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곱 살 이후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미혼인 여성들은 아버지와 형제 외에는 어떤 남자도 만날 수 없으며, 출가 후에도 남편과 시댁 식구들만이 여성들이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는 경제적 사회적 차이에 따라 여성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는데, 부유하기 때문에 ‘가마를 타고 다녀서 전혀 모습을 볼 수 없는 여성’, 그보다 덜 부유하여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걸어가는 옷 뭉치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여성’, ‘생계를 위해 일하느라고 남의 눈에 노출된 여성’으로 구분하였다. 그는 조선의 가부장적인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되지 못하고, 그저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특히 로웰은 이처럼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조선의 혼인 제도에 대해서도 의문을 드러냈다. 그는 조선의 결혼 의식은 서양인이 볼 때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문화라고 보았다. 조선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자손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며, 부를 얻거나 유력한 인척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조선에서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혼인을 해야만 ‘어른’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으며 이러한 일반적인 지위의 성취를 위해 혼인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혼인과정에서 모든 일의 절차가 서한을 통해 중매로써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드러내었다. 조선의 혼인 중매에서는 모든 일이 서한을 통해 비밀리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중개인이 쌍방을 속이는 일 또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이처럼 로웰은 조선 내에서 자신이 직접 듣고 경험한 것을 통해 민중들의 생활상을 상세히 묘사하고 기록하였다. 그는 서양인으로서 자신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조선의 생활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묘사하였으며, 그 속에서 조선민중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호기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특히 저자는 자신이 머무는 곳에 골동품 행상인이 방문할 에서 서울로 상경한 뒤에, 고종의 배려를 통해 직접 궁궐에서 고종을 알현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직접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이후 순종으로 즉위하는 왕세자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고종의 첫인상에 대해 매우 호감을 가졌다고 묘사하며, 고종의 웃음이 타인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게다가 로웰은 최초로 왕가의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얻었는데, 1884년 3월 10일 왕과 세자, 3월 13일에는 어진을 촬영하였다. 그리고 당시 로웰이 촬영한 고종의 사진은 왕실 사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자신의 책에 함께 수록하여 의미는 자료가 되고 있다. 다음은 당시 로웰이 직접 촬영한 고종의 어진이다.(고종황제의 어진)로웰은 고종과의 알현 이후 이어서 왕세자와도 만날 수 있었는데, 왕세자는 고종과 달리 위엄은 있으나 무력해보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은 왕자로서 격리된 궁중 생활과 강요된 위엄에 지쳐있는 듯 보였고, 시종일관 의무적인 얼굴만을 보였다고 했다. 또한 안색은 핏기 없이 보였으며, 왕세자의 눈은 동양인 중에서도 가느다란 편이어서 졸린 듯한 인상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는 두 명의 키 큰 대신이 뒤에 서서 허리를 굽혀가며 왕세자에게 해야 할 말을 일러주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이러한 왕세자의 모습이 흡사 권위와 무력無力이 혼합돼 있는 상태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는 아마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순종의 모습이 로웰에게는 궁중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무력한 왕세자의 모습으로 느껴진 듯하다.또한 이외에도 로웰은 궁중을 방문할 때, 관리들의 궁중 예복차림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 속에서 기묘한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앞에서 보면 양옆으로 날개를 단 듯한 관모의 형태는 임금의 명령을 언제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음을 상징하는 표시라는 설명을 들었다며 신기해하였다. 또한 궁중예복의 신발은 밖에서의 목이 짧은 신발에 비해 목이 긴 구두의 형태였는데, 이에 대해서 자신 나름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 서평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산시로』를 읽어보았다. 소세키는 근대 일본이 낳은 최고의 문장가라고 칭송받을 만큼, 일본 문학계에서 확고한 위치에 있는 국민작가라고 한다. 교수님께 『산시로』라는 책을 소개받은 후 단순한 청춘연애소설로 생각하고 가볍게 읽어나갔는데,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복잡미묘한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가벼운 듯 하면서도 많은 생각이 들게 했던 책이었다.먼저 이 소설은 23살이 된 산시로라는 시골청년이 대학입학을 위해 도쿄로 상경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산시로는 낯선 도시풍경에 놀라는 한편, 새로운 대학생활에 대한 부푼 기대를 가지고 도쿄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산시로는 주변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과 교류하며 지내는 평범한 일상들 속에서 많은 고민과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은 큰 줄기로 보자면 산시로가 미네코라는 도회지의 여성을 만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사랑의 감정과 고민을 따라가고 있지만, 그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인 주제는 아닌 것 같다. 청춘들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그 시기만의 방황과 고민들에 대한 위로,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가게 될 대학생들에 대한 작가의 염려와 애정,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고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되고 있는 근대화된 일본에 대한 작가의 견해가 잘 융화되어 녹아있는 작품이라고 느꼈다.이 책을 읽으며 나에게 특히 가장 와 닿은 부분은 청춘의 고뇌와 방황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이었다. 산시로는 구마모토라는 먼 시골에서 도회지의 문명과는 동떨어져 살다가, 대학에 입학하며 처음으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과 마주한다. 특히 당시는 일본의 에도막부가 타도되고 빠르게 근대화를 시도하던 메이지시대였기 때문에, 세상은 그 어느 때 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거의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지다시피 한 산시로는 자신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에 대해 충격을 받고 고뇌하게 된다. 도쿄의 한복판에서 서서 전차와 기차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동안 자신이 마치 낮잠을 자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렇게 깨달았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렇게 변화하는 세상을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불안한 존재라는 것도 느끼게 된다. 이에 자신도 새로운 세상의 일원이 되고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읽는 등의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는 청춘의 방황이 잘 녹아있다. ‘설마 이 책은 아무도 읽지 않았겠지’라고 생각하는 책을 일부러 빌렸지만, 이미 누군가가 벌써 읽은 책이라는 것을 깨닫고 좌절하는 장면은 이런 모습을 잘 묘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러한 산시로의 방황과 고뇌는 요즘 우리 청춘이 느끼는 감정과 많이 닮아있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데, 그 속에 나 혼자만 멈추어있고 도태되어 있는 것 같은 불안함을 요즘의 청춘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미래를 생각하며 많은 준비와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고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버겁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청춘이라면 어느 시대의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라고 느껴 조금은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묘하게 공감하기도 하고, 또 위로도 받으며 산시로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다음으로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은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가게 될 대학생들에 대한 작가의 염려와 애정이었다. 책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던 중, 작가인 소세키가 영국에 유학 중이던 시절에 친구에게 “여러 일들을 보고 또 들으니 일본의 장래 문제가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또 일본 사회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 미덥지 못하고 한심스런 기분이다. 일본의 신사가 덕육, 체육, 미육이란 점에서 상당히 부족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라고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소세키는 당시 청춘들이 갖추어야할 지적 요소와 문화적인 교양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인데, 이러한 모습은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20세기 초의 대학의 풍경과 학생들의 만남을 다루고 또 청춘들의 연애감정을 다루고 있는 소설임에도, 이 책의 대학생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학문적이다. 서로 모여 철학, 미술, 사회, 학문에 대해 갖가지 토론을 하며 미술전람회나 국화인형전시회, 연극공연장 등을 찾아다닌다. 또 대학생 외의 주변인물도 지하 실험실에서 ‘광선의 압력’을 연구하고 있는 선배 물리학자 노노미야나, 히로타 선생 등이 주로 나온다. 산시로의 친구 요지로는 잡지에 자신의 글을 싣기도 하고, 산시로 뿐만 아니라 주변의 대학생들은 여러 서양 서적을 읽는 것은 물론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시각을 드러낸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나는 작가가 이 시대의 대학생들이 무엇에 대해 고민해야 하며,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전달하고자 했다고 느꼈다. 대학생이 단순히 자유만을 부르짖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과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뇌하는 것이 진정한 대학생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청춘이라는 이름의 본질을 흐리면서 그저 유흥을 즐기는 데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나, 반대로 대학을 취업양성소 쯤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큰 의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광수 『무정』 서평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을 읽어보았다. 이광수의 무정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완독은 하지 못하고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작품을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 나는 친일지식인 이광수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까닭으로 그의 작품을 더 등한시했던 면도 있었다. 그러나 수업에서 교수님께 이광수가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접어든 것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이며, 그 전까지는 민족주의 지식인이었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이 작품은 1917년 매일신보에 발표된 것이므로, 그가 친일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전에 집필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 ‘이광수라는 지식인은 당시 식민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또 그의 현실인식이 왜 친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며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이광수의 무정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는데, 신소설의 과도기적 성격을 탈피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다른 면에서 이 소설은 지식인이 읽은 최초의 한글소설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당시 여성들뿐만 아니라 한글소설을 무시하고 외면하던 남성지식인들까지도 이 소설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이광수가 가지고 있었던 민족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과 신교육사상, 낡은 봉건제에 대한 비판, 자유연애에 대한 새로운 시각 등이 돋보이는 계몽소설이다.책의 줄거리는 크게 보자면, 표면적으로는 형식이 영채와 선형 사이에서 갈등하는 연애소설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한 연애소설이라면 이 소설이 이토록 오랫동안 회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채와 선형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형식은 단순히 한 개인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다. 당시 조선은 갑오개혁 이후 서양의 신문물을 흡수하고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내면적인 가치관으로까지는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이 되고, 개화기의 한 중간에 서있었던 지식인들과 민중들은 과도기의 혼란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 되어있었던 낡은 조선의 봉건체제와 새로운 서양의 신문물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소설 무정에서 이광수 자신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주인공 형식은 이러한 과도기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인물인 것이다. 영채는 과거에 자신을 거두고 교육시켜준 박 진사의 딸이며 봉건적인 조선의 교육을 받은 인물로 ‘낡은 과거’를 상징한다. 반면 새롭게 만난 선형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부유한 김 장로의 딸로 ‘새로운 미래’를 의미한다. 이러한 영채와 선형 사이의 방황은 곧 과거와 다가올 새로운 미래 사이에서 겪는 지식인의 방황이며, 결국 형식이 무엇을 선택하는 지가 작가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결말에서 형식은 영채를 저버리고, 선형을 선택하며 함께 유학길에 오른다. 이는 작가가 이제 그만 과거의 봉건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의 사상과 문명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인 것이다.이처럼 이광수는 소설 전반에서 우리 조선 민중들이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고 계몽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앞서 이 소설이 최초의 근대소설이자 계몽소설이라고 하였는데, 이광수는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 조선 민중들을 일깨우고 행동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무정에서 이광수를 대변하는 주인공 형식이 생각하는 조선인들은 게으르며, 조선의 현실은 미개하다. 또 형식은 이러한 미개하고 무지한 조선에서 벗어나는 길을 오직 교육에 있고, 그 교육은 서양을 비롯한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여기에서 형식은 일본을 서양보다 더 뛰어나며 세계에서 가장 문명한 민족으로 보고 있다. 이는 실제로 일본에서 유학하였던 이광수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이광수는 일본을 가장 문명화된 나라와 민족으로 보고 있었다.이광수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배경이 궁금하여 그의 생애에 대하여 알아보니, 그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에 1차 유학을 다녀왔고, 그때에 기독교와 톨스토이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당시는 아직 조선이 강제 병합되기 전이었으며, 그는 자신이 일본에서 배운 학문을 조선에 가서 활용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등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광수는 자신을 포함한 신지식층의 활동을 통해 조선이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신문명의 교육을 위해 귀국 직후 오산학교 교사직을 선택하였다.하지만 이러한 이광수의 자신감과 기개는 1910년의 강제병합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 지식인들은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으로 인해 정신적인 방황을 하였고, 이광수 역시 교육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 그는 오산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1913년 말 중국과 연해주로 길을 떠났는데, 이 과정에서 동양과 서양의 문명의 강렬한 대비를 맛보았다. 중국과 연해주에서 야만과 문명의 대비를 직접 경험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후 다시 1916년 2차 유학을 떠난 그는 새로운 동경 생활에서 기존의 기독교와 톨스토이주의에서 벗어나 ‘다윈의 진화론’을 접하게 되었고 이에 감화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을 접하며 세계를 좌우하는 힘에 매료되었고, 우승열패에서 뒤떨어진 조선의 현실을 한탄하고 낡은 조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유학한 일본이 빠르게 문명화되고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을 보며, 일본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는 아직까지 친일적인 메시지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다만 우리 민족이 일본처럼 문명을 받아들이고 계몽해야한다는 메시지만 드러날 뿐이지만, 결국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주장하고 완벽한 친일의 길로 돌아서게 되는 배경이 이처럼 진화론에 매료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앞서 언급하였듯 이 소설은 이광수가 친일로 변절하기 전에 집필된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반민족적인 친일의 메시지는 읽을 수 없었다. 오히려 조선이 낡은 봉건체제에서 탈피하고, 교육을 통해 문명을 받아들여 발전하기를 바라는 지식인의 간절한 바람이 느껴질 뿐이었다. 특히 자신의 소설을 통해 이광수가 당시 조선인들을 일깨우고 싶어 했던 것처럼, 실제로 당시의 많은 청년들이 소설에 열광하고 주인공의 행동을 따라하는 등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절 전 이광수의 민족주의는 한계점과 비판받을 여지가 분명하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 친일로 변절된 그의 논리와 연관시켜 생각해보자면, 이광수의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진 민족주의였다. 당시 일본에 강제병합되어 식민지가 된 조선의 현실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의 독립이었다. 물론 일제만큼 타도되어야 할 대상이 낡은 조선의 봉건체제였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것은 조선의 자주적인 독립이었다. 그러나 이광수는 이후 그의 민족개조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선인의 타락함에만 집중하여 논리가 잘못된 길로 흐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조선 쇠퇴의 원인을 민족성의 타락으로 보았고 또 그러한 민족성 개조의 모델을 일본으로 선정하였는데, 이것이 결국에는 조선인이 일본인과 하나되어 조선인임을 포기하는 것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조선인이 신교육을 받고 문명화되었다면 조선의 현실이 변화하였을까? 문명화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 이광수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당시 조선이 낡은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육을 받고 발전되어야 했던 것은 맞지만, 무작정 일본 또는 서양을 따라서 문명화된다고 해서, 즉 물질적으로 발전한다고 해서 조선인이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타협적 민족주의가 현실성이 떨어지고 결국에는 친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광수의 생각이 더욱 공감이 되지 않았다. 특히 당시 조선인이 처한 열악한 현실과 달리, 소설 속에서 그려진 신교육의 전파로 문명화되어 희망차게 발전하는 조선의 모습은 더욱 공감하기 어려웠다. 일본이 조선 땅에서 존재하고, 조선이 식민지로 존재하고 있는 한 조선인에게 완전하게 평화롭고 발전된 사회는 불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어디까지나 조선은 착취하고 수탈해야 할, 일본 본국을 위해 존재해야 할 땅이었고 그것은 조선의 발전과는 관련이 없었다. 조선의 발전은 오직 일본의 수탈에 필요한 정도면 충분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광수의 주장처럼 자주적인 독립 없이 과연 신문명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민중들이 행복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 원작과 영화의 차이비교 - 영화 ‘트로이’를 보고 >- 들어가며예전부터 영화나 드라마, 뮤지컬, 그림 등 문화 콘텐츠 산업에서는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 전설, 문학작품 등이 중요한 소재가 되어왔다.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 문학작품 등은 제작자에게 좋은 영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경우라면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당겨 수익을 창출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작 모티브가 있는 콘텐츠의 경우, 원작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데 초점을 맞추기도 하지만 이는 극히 제한적이다. 보통 그보다는 제작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내용이 각색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심지어 원작과 소재만 같을 뿐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용이 묘사되기도 한다. 그동안 나는 이런 원작 모티브가 있는 콘텐츠를 볼 때, 원작과의 유사성이나 원작의 충실한 재현에 큰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그저 그 콘텐츠를 통해 흥미를 얻는 것에만 중심을 두곤 했었다. 그러나 최근에 드라마 ‘기황후’ 등으로 인해서 역사적 소재를 가지고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고, 또 이번 과제를 준비하게 되면서 역사적 소재로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그 탐구의 대상이 될 영화로는 2004년에 개봉한 볼프강 페터젠 감독의 ‘트로이’를 선택하였다. 영화 ‘트로이’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를 모티브로 하여 트로이전쟁에 대해서 그려낸 영화이다. 할리우드의 유명배우 브래드 피트, 에릭 바나, 올랜도 볼룸 등이 출현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도 흥행하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이, 원작 모티브가 있음에도 원작의 요소들이 영화에서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어 비판을 받는 영화 중 하나이다.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과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호메로스가 생존했다면 소송을 낼만한 엉성한 개작(改作)’이라고 평가할 만큼 원작과는 다른 부분이 있어 크게 비판을 받았다. 그렇다면 트로이 전쟁에 대한 실제 원작‘일리아드’와 ‘오디세이’만이 관련된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이 신화적 색채가 강해서 그동안 신화에 불과한 이야기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1870년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지를 발굴함으로서 이 신화는 허구가 아닌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신화의 내용을 보면,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는 도중 여기에 초대받지 못했던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앙심을 품게 된다. 이에 에리스는 식장에 나타나 ‘가장 아름다운 여인께’라는 글씨가 새겨진 황금사과를 놓고 사라지고, 이 사과를 두고 아프로디테와 아테나, 헤라가 서로 다툼을 벌이게 된다. 결국 트로이의 둘째왕자였던 파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결정하게 되었고, 이후 파리스는 자신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에게 황금사과를 바쳤다.이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바다 건너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였다. 아프로디테의 약속대로 파리스와 헬레네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트로이로 도피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 내에서는 연합군이 결성되고 헬레네를 되찾는다는 목적 하에 트로이로 쳐들어오게 된다.그리스 연합군의 가장 용맹한 장수는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킬레스였다. 아킬레스는 반신반인으로, 태어나자마자 스틱스 강물에 담가져 절대로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테티스가 잡고 있었던 발뒤꿈치에는 강물이 묻지 않아 그의 유일한 약점이 되었다.그리스와 트로이의 잔혹한 전쟁은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전염병이 도는 등 병사들이 크게 고통 받았다. 그러던 중 그리스연합군의 총 사령관 아가멤논과 아킬레스 사이에 브리세이스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고, 자존심이 상한 아킬레스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킬레스가 아끼던 파트로클로스를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가 살해하자, 아킬레스는 다시 전쟁에 참여하여 헥토르를 죽인다. 아킬레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 뒤에 묶고 몰아, 오디세우스의 지략으로 트로이 목마를 만들게 되고 이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어떻게 묘사되었는가? (원작과 영화의 차이점)앞에서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원작과 영화가 묘사한 모습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시간과 비용의 제약, 관객의 흥미 등을 이유로 어느 정도 내용의 변화는 당연히 있을 수 밖 에 없다. 실제 트로이전쟁은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루어졌는데 이를 단 3시간이라는 상영시간 안에 담기에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영화 ‘트로이’는 많은 사건들이 실제와는 다르게 묘사되었는데, 특히나 인물 개개인의 행적과 성격들이 다르게 묘사되었고 죽음의 순서 등도 많이 바뀌었다.먼저 영화에서는 신화와 달리 신들의 역할이 매우 미미하다. 원작에서는 신이 사건에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로 등장한다. 신들의 다툼으로 인해 파리스의 선택이 이루어지고, 아프로디테의 약속으로 인해 파리스와 헬레네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신화와는 달리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 황금사과 등 신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모두 생략되었고 대신에 트로이의 두 왕자가 스파르타 왕과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 방문한 것을 사건의 시작으로 그리고 있다. 또 상영시간의 제한 등으로 실제로는 1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전쟁이 일어났지만, 영화에서는 매우 짧은 기간으로 묘사되어있다.본래 신화와 달리 성격묘사가 크게 바뀐 인물이 있었는데,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다. 실제로 신화에서 그는 너그럽고 인자한 왕으로 등장하는데, 영화에서는 탐욕스럽고 악랄하며 그리스 전역을 통일하려는 정복에 욕심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가 되어있다. 이러한 성격묘사를 통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원인도 헬레네를 되찾아온다는 원작의 내용과는 달리, 그것을 빌미로 한 아가멤논의 트로이 정복욕심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의 최후도 실제와는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데, 영화에서는 후에 브리세이스가 그를 죽이는 것처럼 나왔으나 실제로는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내오스가 헬레네를 용서하여 함께 스파르타로 되돌아온다는 사실도 정반대로 묘사되어 있다.이렇게 그리스연합군의 인물들이 부정적으로 묘사된 데에 반해, 트로이의 첫째 왕자이자 가장 유명한 장수였던 헥토르는 영화 속에서 굉장히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라를 목숨보다 사랑하는 용맹한 장수이며, 가정과 여자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멋진 용사의 모습으로 나온다. 또 파리스가 헬레네를 데리고 와서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끝까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 원작에서는 파리스의 행위를 질책하며 힐난하는 모습이 나오는 등, 영화와는 정반대의 모습이 보인다.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묘사된 주인공은 아킬레스이다. 감독은 아킬레스를 이용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는데, 영화에서 그를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존재이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 많은 고뇌를 하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그는 영원히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욕망, 전쟁의 잔혹함, 죽음의 고통, 평화 등에 대해 늘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아킬레스가 단순히 전투에 능한 용맹한 전사만은 아니었음을 부각한다. 이런 그의 모습에 대한 설득력을 얻기 위해 브리세이스라는 여인의 역할도 원작과는 달리 크게 부각되었다. 실제 원작에서 브리세이스는 그 역할이 미미했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주변국을 제압할 때 아킬레스가 취한 여인이었는데, 이를 두고 아가멤논과 아킬레스가 갈등을 일으키는 장면 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브리세이스를 아킬레스가 사랑하는 여인으로 묘사하여, 이를 통해서 아킬레스의 인간적이고 고뇌하는 모습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또 그를 우상화하기 위해 왜곡한 장면이 있는데, 바로 헥트로의 시신을 프라이모스 왕에게 돌려주는 장면이다. 영화에서 아킬레스는 프리아모스 왕의 용기에 감격하여 시신을 되돌려주었다고 묘사하였으나, 실제로는 많은 몸값을 받고 나서야 시신을 돌려주었다.이외에도 영화에서는 아킬레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그의 전쟁참여를 권장하는 것처럼 나왔지만 실제로는심지에 위치한 무역의 중심지이자 청동을 제조하는데 필요한 주석이 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트로이보다 그리스가 더욱 강대하고 군사력이 있는 나라로 묘사된 점이 사실과는 다르다.- 왜 이렇게 묘사되었는가? (제작자의 의도)원작의 신화적 요소들이나 몇몇 중요한 사건들이 생략된 점, 인물들의 성격이 극명하게 바뀐 점 등은 영화 속에서 이야기의 설득력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몇몇 변화된 부분은 감독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변화시킨 듯이 보이는데 이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일단 이를 위해 최대한 감독의 관련 인터뷰 등을 찾아 평소 성향 등을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원하는 자료를 얻을 수 없어서 그저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감독의 의도를 중심으로 보려고 한다.먼저 감독은 아가멤논을 통해 인간의 헛된 욕망을 보여주고 이에 대해 비판하고 자 한 것 같다. 실제로는 매우 인자한 왕이었던 아가멤논을 포악하고 괴팍하며 정복에 미친 사람처럼 묘사하였는데, 사실 그가 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파리스와 헬레네가 트로이로 도망친 것이 그 원인이다. 상식적으로 트로이에 잘못이 있음에도 트로이를 지키려는 그들의 모습은 정의롭고 선하게 표현한 반면, 전쟁을 일으킨 아가멤논은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이 인상 깊었다. 영화 내내 아킬레스는 아가멤논을 끔찍이도 싫어하는데 “전쟁에 의해서 젊은이들의 목숨을 바쳐 얻은 전리품은 여우같은 왕이 가져가고 병사들은 얼굴도 모르는 왕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아마도 감독은 이런 모습을 통해서 헛된 욕심에 관한 인간의 어리석음과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 같다.그리고 감독은 인간의 내면에 대해 고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처음과 끝부분에는 오디세우스의 내레이션이 나오는데, 여기서 영웅으로서 역사에 이름이 남겨지는 것에 대해서 강조하여 메시지를 던져준다. 또 극 중에서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스가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임에도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한다. 이다.
『제국의 시선 : 일본의 자유주의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와 조선문제』 서평목차1. 들어가며2. 『제국의 시선』의 내용정리① 기독교와 에비나 단조② 『신진(新人)』에 드러난 요시노의 조선관③ 민본주의와 제국주의④ “조선문제”와 식민지정책 비판⑤ 요시노 사상의 본질 - 3.1운동과 자치식민지체제3. 『제국의 시선』을 읽고 나서1. 들어가며처음 인물에 대한 조사와 서평 과제를 받았을 때, 인물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다. 수업을 들으면서 어떤 인물에 대해 그의 사상적 배경과 행동을 탐구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내 스스로 조사하려고 하니 알고 있는 일본의 인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막막함을 느끼며 인물 선정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중 우연히 한 책을 통해 요시노 사쿠조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책의 목차에서 저자는 요시노를 “근대일본의 양심, 따뜻한 용기를 지닌 인도주의자”라고 소개하고 있었는데, 이는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동안 수업에서 주로 다루었던 제국주의적 시각이 강한 인물들과는 달리, 일본인 임에도 한국 현대사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요시노 사쿠조를 과제의 대상 인물로 선정하고 자료 조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자료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요시노에 대한 학계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상이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어떤 자료에서는 그를 제국주의의 비판자로서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지식인으로 평가하는 반면, 다른 자료에서는 민본주의의 그늘 아래서 대륙 ‘경영’을 꿈꾼 아시아주의자, 현실주의적 동화론자, 자유주의 식민론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한 인물을 평가할 때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평가를 하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이토록 극단적으로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었다.이에 이번 서평 과제에서는 요시노에 대해서 서술한 책들 중에서, 한상일의 『제국의 시선』이라는 책을 다루려고 한다. 사실 국내에서 출간된 책들 중 온전히 요시노 사쿠조에 대해서만 다루 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파악한 요시노의 사상 형성에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 요인은 기독교와 그의 스승 에비나 단조이다.요시노는 고등학교 시절인 1898년 21세의 청년으로서 침례교회에서 침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신한 후 평생을 독실한 평신도로 살았다. 기독교는 그의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정치 및 사회사상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는데, 그는 기독교를 통해서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재무장하고 자기수양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기독교 정신을 “사회개조운동을 이끄는 가장 근본의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통해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신념을 형성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상에는 비분강개할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러나 결국 인간 사회의 앞날은 밝고 끝에는 항상 정이 넘쳐흐를 것”이라는 그의 말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와 같은 요시노의 낙관적인 인간관과 도덕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관이 그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사상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요시노가 낙관적인 인간관으로 인해 사회적 갈등을 통해서 나타나는 정의롭지 못한 것, 냉혹함, 부패 등과 같은 인간의 어두운 측면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저자는 이러한 사상적 한계가 요시노의 조선식민지통치 비판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하였는데,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그의 이중적인 태도가 이 때문이라고 파악하였다. 뒤에서 살펴볼 요시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은 식민지 지배라는 현상 자체를 다루지 못하고, 단지 정책의 도덕적이고 인도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어 있는 한계가 있다.다음으로 저자가 파악한 요시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그의 스승인 에비나 단조의 가르침이다. 에비나 단조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1900년 7월에 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종합잡지인 『신진(新人)』을 창간하여 많은 지식인을 양성했던 인물이다. 에비나는 기독적인 종교지와는 달리 종교, 사상, 교육, 철학, 문예 등의 다양한 주제를 포함하여 일본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잡지이다. 『신진』은 20세기의 새시대를 맞아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가기 위한 사상의 기수를 지향하면서 창간되었는데, 에비나의 영향으로 기본적으로 일본의 대제국 건설을 꿈꾸었으며, 이를 위해 강력한 국권팽창과 기독교의 적극적인 동참을 주장하는 논조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신진』은 ‘조선문제’의 해결과 관련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진』에 발표된 사설과 평론들을 통해 이를 잘 알 수 있다. 『신진』은 창간된 이후 “조선문제”와 관련된 연이은 사설들을 발표하며 “일한합동”과 “일한합병”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이러한 사설의 기본 논조는 요약하자면 “첫째는 조선은 문명에 크게 뒤졌고 조선인은 독립의 열의도 없고 자치의 능력도 결핍된 타락한 민족으로 전락했다는 것, 둘째는 일본은 동문동종인 조선인의 고통과 아픔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 셋째는 개명한 일본은 조선을 문명화시키고 개혁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인을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켜 일본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저자는 이처럼 팽창 지향적이고 동화주의적인 논조를 형성하고 있었던 『신진』의 기본적인 논리구조와 사상이 당시 요시노가 가지고 있었던 조선관과 동일하다고 평가한다. 요시노가 『신진』의 활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었으며, 주요 편집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였고 더구나 러일전쟁을 전후하여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신진』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갔기 때문이다.특히 저자는 1904년 요시노가 『신진』을 통해 러시아와의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특히 러시아와의 전쟁이 단순히 정부의 전쟁이 아니라 국민의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러시아의 만주진출이 일본의 국익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임을 강조하여 만주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였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 당시 요시노는 더 나아가 만주뿐만 아니라 조선에에 대해서는 “인민의 의사에 의한 지배”를 보편적 가치로 제시하였던 것과는 달리, 대외적으로는 “인민의 의사에 반하는 지배”인 제국주의를 지향했다는 것을 설명하며 이러한 이중성을 비판한다. 즉, 요시노 역시 당시 다른 지식인들처럼 “안으로는 민본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앞서 러일전쟁을 지지하였던 요시노의 팽창관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민족의 생존을 위한 제국주의적 진출은 국제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에 일본은 국민을 위한 제국주의적 팽창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대내외적으로 상이하게 다른 요시노의 이중적인 태도를, 요시노가 중국의 5.4운동과 만주사변에 대해 남긴 사설들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한다.요시노는 일본이 중국에 제시한 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등, 중국이 일본의 상공업에 필요한 자원의 공급처이자 상품의 시장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본의 경제적 생명이 결국 중국의 자원과 시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1919년에 일어난 중국의 5.4운동을 목격하면서, 중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반일운동과 일화 배척운동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이 적극 노력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일본이 중국에서 가지는 이권을 포기하거나 희생하지는 않되, 현재의 일본의 중국정책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요시노의 태도는 이후 이어진 만주사변에서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그는 만주점령을 위한 일본의 군사 행동은 본질적으로는 민족생존을 위한 것이므로 타당하다고 보았다. 다만, 만주에서 취한 군사행동이 “조금 빨랐고 또한 조금 지나친 점이 있다”면서 만주사변에 대한 국민의 여론과 이룰 다루는 언론, 정당의 태도에 있어서 부적절한 점이 있었다고 비판하였다. 즉, 요시노는 5.4운동이나 만주사변을 겉으로는 비판하는 듯 했으나 본질적으로는 “민족생존”을 위하여 중국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더욱 확대하고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중전반에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원인으로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과 권위주의적이고 형식적인 관료적 식민통치, 그리고 헌병 중심의 강압적 통치제도가 있음을 역설한다.다음으로 요시노는 「만한을 시찰하고」를 통해서 기존의 인식을 버리고 당시 일본식민주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동화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요시노는 “물질적 향상과 정신적 진보의 개발”이라는 조선통치의 근본방침이 원만하게 그리고 충분히 관철되지 않는 원인은 총독부가 실시하는 ‘무단적’ 동화정책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국제정세의 변화, 조선인의 저항의 본질, 일본인의 통치능력 등을 면밀히 분석하여 동화정책이 불가함에 대한 여러 이유를 제시하였다. 먼저 요시노는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정치사를 통해 보았을 때, 한 민족이 또 다른 민족을 동화시킨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고 힘든 일임을 역설하였다. 그는 “동화라는 것은 그동안 식민정책을 실시해온 모든 나라가 최종의 목표로 삼아온 이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특히 역사적 경험이 짧은 일본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고 설명한다. 또 요시노는 조선민족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부동화성에 대해서 언급하며, 동화정책의 불가함을 설명한다. 즉 그는 조선인이 하나의 전통을 지닌 민족이라고 인정하면서, “조선인이 일본의 통치를 일본 측이 생각하는 만큼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정도의 문제에 따라서는 일본인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단지 일본의 통치를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는 어쩔 수 없다. 조선인이 아무리 무기력하더라도 어찌 되었든 오랜 기간 독립국이었고, 실로 독립의 문명을 지닌 하나의 독립민족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한국 강점 이후 ‘조선은 일본이다’라고 보는 풍조가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에, 조선인을 문명을 지닌 하나의 민족으로 바라봤다는 점에서 보다 진보적인 시각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저자는 이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