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적당함-거짓말의 발명-영어영문학과 20101236 이다엘‘거짓말의 발명’이란 영화의 가장 큰 모순이자 가장 큰 재미는 과도한 솔직함이다. 서슴치 않는 독설로 난 웃기도 했지만 ‘이게 거짓말이 발명되기 전의 모습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거짓말을 안 한다고 굳이 남에게 ‘뚱뚱하다’, ‘해고될 것이다.’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영화에서 거짓말이 발명되기 전에도 거짓말이란 존재했다. 이렇게 사람에게 독설을 퍼붓는데 웃는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것이고 이것 또한 거짓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마크가 거짓말이란 것을 알았을 때 애나는 거짓말이란 것을 몰랐을 때 말이다. 애나는 자신의 마음에 거짓이었다. 마음은 마크를 향하지만 단지 외모 때문에 브레드와 결혼하려 한다. 자신은 마크를 사랑하는데 말이다. 이것도 거짓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서 이 영화는 과도한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라는 점이 이 의문점을 감싸줄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제목이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이 큰 모순으로 인해 큰 재미를 선사하고 영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주인공 마크는 아주 미미한 거짓을 갖고 살긴 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과도한 솔직함을 가져서 거짓말이란 건 절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크가 말하는 모든 것은 진실처럼 받아 들여졌고, 이 거짓말이란 것은 사람들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과하면 독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크의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불러일으켰고, 또 그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았다. 마크는 그 부담감에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였고, 마크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거짓말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거짓에 놀아나고 있었다.
ⅰ) 러시아=술=보드카러시아의 지나친 보드카사랑이 결국 세계 술 소비량 1위라는 달갑지 않은 명예를 안겨주었다. 1995년을 기준으로 러시아인의 1인당 술 소비량은 유럽 전체에서 1위였다. 그 1위가 어느 정도냐 하면, 2위를 차지한 프랑스의 3.5리터보다 무려 4배 이상 많은 14.9리터인데, 더 심각한 것은 러시아인의 술은 알코올 도수 40도인 보드카라는 점이다. 술 소비량 1위의 술의 대부분이 보드카인 셈이다. 이러한 음주문화로 인해 러시아인의 건강도 크게 위협받고 있다. 러시아 내 알코올 중독자는 인구의 7분의 1인 2000만 명을 넘어서면서, 매달 1000명 이상이 숨지고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은 1998년 남성 61.3세, 여성 72.9세로 유럽 평균보다 7세 정도 낮다.레닌이 소련사회를 자본주의로 후퇴시키는 것은 바로 보드카 라고 했을 정도로 러시아의 과음(過飮) 전통은 유명하다. 지난 1972년 소련의 술 판매고는 119억 2천만 루블로 그 해의 공식 국방예산과 맞먹는 액수였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대대적인 금주 운동을 펼쳤지만 이렇다 할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ⅱ) 보드카의 제조법과 특징??보드카(Vodka)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술이다. 러시아어로 물 이란 뜻의 보다(Voda)가 그 어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호밀을 원료로 하는 보드카는 스틸 용기로 발효시킨 다음, 이를 알코올 85%까지 증류시키고 여기다 물을 부어 알코올 도수를 40% 정도로 낮춘 것이다. 이 때 자작나무 숯으로 불순물을 없애 주면 무색, 무취, 무미라는 보드카 고유의 특성을 지니게 되는데 이를 크리스탈 클리어(Crystal Clear) 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는 연속 증류기를 이용해 만든 95%의 알코올을 물로 희석, 농도 40~50%로 조절한 다음 다시 목탄으로 여과한다. 목탄은 냄새와 색깔을 흡착시키는 성질이 강하여 잡다한 맛과 냄새를 완전히 제거한다. 마시는 법에 있어서도 혀를 사용하지 않고 목으로 단숨에 넘긴다. 그러면 목과 가슴과 배가 금세 타는 듯 뜨거워지면 취기가 오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전통주 보드카의 특징이다.ⅲ) 러시아인의 보드카 사랑프랑스 사상가 바슐라르는 술을 타는 물 이라고 했다. 우리말에서도 불타는 듯한 화끈한 물 이라는 의미의 수불 [水火] 에서 수울 로, 다시 술 로 변화했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러시아어에도 술을 뜨거운 물(gorjachaja voda) 이라고 한다. 이 뜨거운 물을 마시면 매섭고 긴 한파도,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의 고통도 모두 잊어버릴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술은 러시아인들의 삶의 동반자이자 포기할 수 없는 마취제이다.보드카가 사랑 받는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인들이 이 술의 신비한 힘 또는 효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열악한 의료시설밖에 없었던 시기에 보드카는 마취제의 역할을 하였으며, 약으로도 쓰였다. 배가 아프면 보드카에 소금을 타서 마시고, 감기에 걸리면 후추를 타서 마시고, 신체적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보드카를 마시고 마늘이나 양파를 먹고 증기목욕을 하러 가기도 한다. 또한 보드카는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삶의 질곡을 잊게 해주는 좋은 친구인 것이다.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는 술의 과학적 접근을 발견한 것을 볼 수 있다. 영하 43도의 추위에 앵글을 따라 흐르던 보드카의 수분은 앵글에 붙고 순도 100%에 가까운 알코올만 마시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근래에는 말하는 보드카 뚜껑이 나와 러시아 주당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드미트리 주린 이라는 러시아 발명가가 개발한 이 뚜껑에는 배터리와 타이머, 음성합성 마이크로칩 등이 내장돼 있어, 병마개를 열 때마다 건배 를 외치는 소리가 나오며 또 술자리 중간 중간에 웃음소리, 술 따르는 소리 등 각종 효과음이 터져 나와 분위기를 북돋운다. 심지어 마개를 여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술에 취한 듯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이처럼 보드카사랑은 차르 시대와 소비에트 시대 영웅들의 동상이 가득 찬 러시아의 마을과 도시 구석구석에 국민주 보드카를 기리는 동상이 건립될 정도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유명한 조각가 에른스트 네이츠베스트니는 최근 야로슬라블 지역 당국으로부터 모스크바 동북쪽 300㎞ 지점에 위치한 우글리치 중심 가에 보드카에 관한 동상을 세워달라고 위촉받았다고 한다.??ⅳ) 주류 소비 형태의 변화????최근 들어 보드카의 종주국 러시아에서도 주류 소비패턴에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다. 우선 포도주 소비량이 급격히 늘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인들의 음주습관이 유럽 취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풀이했다.게다가 러시아 애주가들의 입은 점점 고급화되고 있다. 수입산 포도주 가운데 프랑스 등 유럽의 고가 포도주 소비는 늘고 있는 반면, 이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불가리아, 헝가리 등 동유럽산 포도주의 수입은 크게 줄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경제성장 및 생활수준 향상과도 관련이 있지만 유럽적 전통을 지향하려는 러시아인들의 잠재의식이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발레는 원래 프랑스 부르봉왕조 하에서 크게 발전했는데, 그래서 발레라는 말도 이탈리아의 발레로란 말이 프랑스에 전해짐으로서 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러시아에 발레가 들어 온 것은 18세기초 새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되고 표트르 대제의 지휘아래 서유럽 문화를 받아들일 때였다.?사실 1673년 알렉세이 황제를 위해 독일 무용단이 러시아에서 공연을 했는데, 이것이 러시아에 발레가 최초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발레가 러시아에 들어 온 것은 1734년 안나 여제가 프랑스 무용수를 초청해 귀족학교에서 가르치게 한 이후이다.?1738년 러시아 최초의 발레 학교가 세워졌고, 1756년 예카테리나 2세는 발레 부문 제국 극장을 세웠다. 1773년에는 페테르부르크에 볼쇼이 극장이 들어섰으며, 1779년 제국 극장에 발레 학교가 설립되었다.?이렇게 발레가 러시아에 도입된 후 상당기간 동안 러시아는 유럽식 발레를 모방하면서 성장했다. 18세기에 이르러 이반 발리베르흐 발레 감독이 명성을 얻으면서 페테르부르크 스타일의 발레를 만들었는데 '실 베르테르', '로미오 줄리엣'등 많은 작품을 내놓으면서 활약했다.?그의 뒤를 이어 디들로는 낭만주의적 경향의 발레를 만들었는데, 그의 발레의 화두는 판토마임이었다. 디들로를 통해 러시아 발레의 마임의 기초가 다져지게 되었다.?19세기 중반 외국에서 많은 무용수들이 러시아로 건너왔는데, 그중 프랑스 태생 프티파가 러시아로 귀화하면서 러시아 발레는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 발레 마스터인 레프 이바노프와 '지젤', '잠자는?숲속의 미녀','호두까기 인형'등을을 비롯한 수많은 서양 명작을 개작하여 무대에 ?올리며 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를 발전 시켜 나갔다.?또한 그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와도 다른 독특한 러시아식 발레의 무용기법을 창안해 내어 러시아발레를 한단계 성숙시켰다.?1903년 프티파가 은퇴한 후 페테르부르크 발레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포킨은 발레의 표현성과, 예술의 조화, 사실성에 주목했는데, 안나 파블로바, 타마라 카르사비나, 바츨라프 니진스키등 뛰어난 무용수와 더불어 아주 유명해졌다.??러시아 발레가 유럽에 알려진 것은 1909년 다길레프가 이크는 발레뤼스(러시아 무용단)에 의해서였다. 다길레프의 발레뤼스는 현대 발레사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러시아 예술이 유럽에 소개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의 발레는 천재적인 안무, 예술적인 무대, 칼사비나와 파블로바 그리고 니진스키 같은 탁월한 무용수들에 의해 뒷받침 되어 많은 유럽 관객들의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1917년 10월 혁명과 더불어 러시아가 사회주의의 길을 걸으면서 러시아 발레는 위기에 놓였다. 볼쉐비키들은 예술인들을 부르조아로 분류하고 그들의 사상성을 의심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이르러 사회주의 정권은 문화유산의 계승을 선언하고 러시아 정신의 총화인 발레 예술을 인정하기 시작했다..?1924년 현실적인 주제를 다룬 '붉은 양귀비'가 성공하면서 서서히 발레의 부흥이 시작되었다. 이무렵 아그피나 바가노바가 등장하면서 러시아 발레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바가노바는 독특한 교수법으로 페테르부르크 무용수들을 가르쳤는데, 이러한 바가노바 교수법은 러시아 발레의 기본이 되어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스탈린 시대에 바가노바 교수버이 확립되면서 러시아 발레의 토대가 굳혀졌지만, 1930년대는 사회주의 이념을 다룬 발레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 19세기 이전의 러시아 음악러시아 사람은 음악적이고 태고적부터 특수한 민속음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그 민요에는 조바꿈의 변화가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하모니도 풍부하여, 다른 민족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것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민요가 발달한 원인 중의 하나는 13세기경에 몽고의 군대가 러시아에 침입비잔틴 성가에서 성장한 교회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무반주 합창 성가는 러시아 국민들에게 친근감을 갖게 함으로써 민요를 발달시킬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1672년에는 피오르트 황제의 개화 정책에 의해 서양의 모든 문화가 벋아들여지게 되었다.러시아의 음악은 마침내 서양화 되어 맹목적인 모방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이탈리아의 음악을 환영했으며, 이탈리아에의 유학은 물론 그 나라 음악가들을 대단히 존경했다.이탈리아풍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음악을 즐기는 것을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풍의 오페라에 열중했던 것이다.17세기에 접어들면서 러시아 음악은 이전의 단선율 음악의 중심에서 벗어나 3화음 중심의 다성음악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가지게 되면서 러시아 민족 음악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세기 음악(국민주의 음악)*국민주의음악이란?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민족들만이 향유한 특징 있는 음악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국민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흔히 이것을 민족음악과 같이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민족의식을 명확히 하는 예술음악, 즉 국민주의적 음악을 말하는 때도 있다.19세기 자본주의 융성기의 민족 국가 형성의 움직임에 관련된 것을 국민주의라 부르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해방의 독립운동에관련된 것을 민족주의 등으로 구분하는 것 같다.그런데 모든 민족마다 특성을 달리하는 음악은 예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나, 극민주의 또는 민족주의라 할 때는 한 개의 예술사조로서 의식적으로 취급되고 주장할 때 비로소 그같은 이름으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민족주의 움직임이 처음으로 일어난 나라가 러시아인데 나폴레옹을 최초로 격파하고는 유럽의 대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서구문화와 대립하며 슬라브 민족의 우월감을 과시하였다.각 나라들도 세계 제국의 꿈이 사라지자 독립을 서둘렀고 사회 전반에는 민족의식이 팽배해졌다.이후로 독일 음악 중심에서 이탈하여 자기 나라의 민족음악을 연구하여 국민음악을 수립하는데 노력하였고 오페라에 있어서도 향토적인 옛 건설과 민화를 자기 나라 말로써 그 나라의 정취가 풍기는 가락으로 작곡하였고, 성악과 기악에 있어서도 자기 나라의 고유한 민요와 민속 무곡, 혹은 그 같은 무드의 정취를 넣어 예술화하기에 이른다.러시아의 음악계에서19세기 중반 이후의 시기는 훌륭한 작곡가들과 대작들이 대거 등장한 화려한 시기였다.이 시기에는 또한 음악 비평과 음악 이론이 활발하게 대두되었고 수준 높은 음악 연주회가 자주 열려 일반 음악 애호가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민족주의 작곡가들은 러시아의 국가의 전기나 역사 또는 전설등을 오페라나 교향시의 기초로 삼았고 작품 속에서 민족적 선율을 강하게 부각시켰다.이러한 음악양식을 추구했던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자로는 글린카와 5인조그룹이라는 5명의 작곡가들인데 그들은 외래 음악과 러시아 전통음악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그들이 사용한 음악요소들은 주로1)민요나 민속, 춤곡 2)러시아 정교 교회음악 3)장,단 체계에서 벗어난 음계 4)언어와 연관된 박절 5)주기에서 벗어난 리듬 6)성악곡이나 표제음악? 에서 이용한 민족적 소재였다.♣ 러시아의 국민악파 작곡가들1804------------------------1857 글린카1813-----------------------------1869 다르고미시스키1833---------------------------------- 1887 보로딘1835----------------------------------------------------1918 큐이1837-----------------------------------------------1910 발라키레프1839-----------------------------1881 무소르그스키1844-----------------------------------------1908 림스키코르샤코프* 미카엘 이바노비치 글린카(Micjael Ivanovich Glinka)먼저 러시아의 음악이 유럽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던 것은 글린카에 의해서였다.'러시아 고전 음악의 창시자', '러시아 국민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국민악파 작곡자들과 차이코프스키 등의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글린카는 민족 문화에 근거를 둔 새로운 음악 언어를 만들어 내었다.그의 작곡기법에 있어서 전래적이고 임중적인 요소는 러시아 작곡가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유년시절부터 숙부가 소유한 농노 관현악단을 통해 자연스럽게 음악적 소양을 키우고 페테르부르크 기숙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웠던 글린카는 이탈리아, 독일에서도 음악 공부를 하게 되었다.?? 진보적 지식인들과 친분을 맺었던 글린카는 진보 사상도 키워 나갔다.그는 지금까지의 러시아 작곡자들에게 결핍되어 있던 유럽 음악 문화와 인식과 지적, 과학적 파악을 하였다.그러므로 글린카는 이 연구과정을 통하여 러시아 민족음악이 아직 발굴되지 않은 무한한 에너지를 간직한 참다운 음악적 관계를 맺어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재인데, 그것은 절대 국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음악도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이 말은 음악에 있어서 국민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과의 결합이 글린카의 사상으로 성숙되어 간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이탈리아에서 음악고부를 한 그가 러시아에 돌아와 만든 곡은 오페라 이었다.이반 수사닌은 17세기 초 러시아의 혼란기에 침입한 폴란드군을 눈이 쌓인 숲속으로 유인해 진멸시키고 전사한 농민의 영웅이다.글린카는 이 작품속에서 수사닌의 행위르 통해 민중의 애국심과 진실한 성격을 잘 드러냈다.러시아 민요의 선율이 많이 사용된 이 작품은 러시아 민족 음악의 효시로 평가받는다.황실의 요구로 으로 개면된 이 오페라는 1836년 페테르부르크 대극장에서 초연되었다.그러나 이탈리아풍의 아리아를 즐겨하던 귀족들은 "글린카는 요리집의 노래를 극장으로 가져왔다."고 비난하였지만 대다수의 청중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그 이후 글린카는 푸슈킨의 서사시 를 소재로 오페라를 작곡하였다.러시아의 민요뿐만 아니라, 그루지아, 터키, 아라비아, 핀란드의 음악적 선율이 덤겨있는 이 작품은 처음으로 모든 가사가 러시아어로 쓰여졌다.이후 글린카는 를 작곡하였는데 이것은 러시아 교향곡의 기초로 인정받고 있다.이 작품 이외에 글린카는 스페인 여행중에 작곡한 , 과 같은 가곡을 남겼다.그의 창조 활동의 기반은 "음악을 창조하는 것은 국민이며, 작곡가는 그것을 편곡할 뿐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처럼 직접 국민의 소리와 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국민 대중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그는 러시아와 모든 나라의 민요, 무곡 등에서 배웠고, 민중에서 친근감을 주는 진실성에 찬 주제를 창조했다.* 다르고미시스키(Alekander Serguievitch Dargomyzsky)글린카와 함께 러시아 음악의 창시자이자 선구자인 다르로므이쉬키는 사상 문제와 사회적 요구에 관심을 기울여 사회적 주요 주제를 음악의 선율로 담아내었으며, 극적이고 풍자적인 음악 장르를 발달시켰다.그는 민요의 선율과 민중의 언어를 화용하여 억양적 사실주의의 원칙을 작품 속에서 실현하였다.러시아의 억양과 악센트를 살려 최대한 정확한 표현으로 음악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점은 그의 주요한 음악적 특징이다.그의 대표작 는 러시아 만담을 소재로 하여 만든 오페라로 주인공들의 복잡한 심리와 선명한 민족성을 함축하고 있다.극적 구성, 희극적 요소, 강한 러시아의 억양들이 이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이 작품은 1856년 초연에서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지만, 1865년의 재연에서 진보적 인텔리겐치아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이 작품 이외에도 그는 모차르트의 의 줄거리를 모방한 를 작곡하였고 푸슈킨의 작품을 가사로 한 가곡도 많이 남겼다.♣ 그외의 작곡자 (국민악파이외에)* 차이코프스키5인조가 한창 활약하던 때, 지나치게 섬세한 신경을 가진 차이코프스키로서는 5인조 음악이 좀 거필고 촌스럽게 여겨져 다소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5인조는 그를 '서유럽의 아류'정도로 보았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단순한 서구의 아류는 아니었다.그가 서구의 전통적인 고도의 작곡기법을 타득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면 세계는역시 러시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러시아 민요를 직접 차용하지는 않았다 해도 밑바닥에 깔린정감, 풍부한 선율이나 관현악의 어둡고 차분한 울림은 바로 러시아 음악의 특색이었다. 때문에 그가 국내에서 뿐 아니라 전세계의 사랑을 받는 것 같다.차이코프스키에는 5인조에게 부족했던 특성 즉, 감미롭고 극도로 관능적인 선율의 샘이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 일본 등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있다. 그래서 이 한국이란 나라는 더욱 강하고 큰 나라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서 난 통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우선 통일을 하게 되면 경제적으로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 국방비는 절반 이상까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분단된 상태에서 휴전선 주변 최전방의 군인들도 많다. 그리고 휴전이기 때문에 전쟁의 위험에 놓여있는 건 사실이기 때문에 국방비에 돈을 안들일 수가 없다. 그리고 북한엔 많은 광물들이 있고 남한엔 기술력이 있다. 이것들이 합쳐져 정말 큰 이익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민이 자유를 가지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해 법적으로 사상의 부자유를 가져왔다. 통일이 되면 그 부자유가 극복되면서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또 통일로 국제관계 속 우리나라의 정치적 자주권을 길러 줄 것이다. 아까 말했듯이 우리나라는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있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의 간섭 하에 있다. 그만큼 국제관계 속 우리나라의 목소리는 작다. 통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힘을 길러줘 국제관계에서 더 큰 목소리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거다. 그 강대국들이 우리나라의 통일을 방해하는 것도 이것 때문일 것이다.마지막으로 남북한 주민의 인권을 위해서 통일은 필요하다. 현재 북한의 주민들은 의식주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 그리고 남한의 이산가족과 실향민들의 자유로운 이동도 방해받고 있어 부자유를 안겨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