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진보싸가지 유무는 개인적 차이지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다. 하지만 타인에게 자기 의견을 설득해야 하는 사람에게 싸가지는 중대한 문제다. 정치인과 종교인이 대표적이다. 호감이 중요하다. 사실, 인품과 인간적 매력은 삶의 도구가 아니라 지향이어야 한다. 감정은 이성보다 더 이성적이며 정치적이다. 효과도 훨씬 크다. 싸가지는 그 자체로 정치학이라는 얘기다.싸가지. 원래 강원, 전남 지역 방언으로 최근에는 “내 사랑 싸가지”처럼 변화가 있지만(1장), 이 표현만큼 책의 내용과 부합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이 과정은 말이 발산하는 감정과 인식의 상호 작용을 보여준다. 싸가지는 인성, 품성, 태도를 뜻하지만 그 이상의 미세하고 복합적인 어감이 몸 전체로 퍼지는 인지력이 있다.강준만은 한국 사회의 콤플렉스에 대해 수백 권의 책을 썼다. 그는 서구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론’을 만들어온, 지식 생산 패러다임을 바꾼 탈식민주의자다. 찬반을 떠나 한국 사회를 파악하고 성찰하는 작업에서 그에게 빚지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는 현실 정치에 거부감이 큰 20%의 유권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진보 세력에 대한 문제제기다. 이 책에서 상정하는 진보의 범주는 현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이다. 부제대로, 정권 교체를 염두에 둔 논리다. 책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 왜 더 ‘나쁜’ 여당의 싸가지는 문제 삼지 않는가, 그리고 여야 모두 도덕보다는 정치적 입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진보의 ‘이성 중독증’(91쪽)이라고 정확히 진단한다.여야 문제가 아니더라도 강자와 약자, 중심과 주변 사이에 일반적인 법칙이 있다. 집권당에 비해 야당은 자원이 없다. 강자의 자원이 세속적인 것, 이를테면 돈과 미디어, 폭력(공권력)이라면, 약자는 보이는 자원만으로는 승부가 어렵다. 약자의 유일한 자원은 약자라는 위치 자체에서 나오는 도덕과 논리(언어)다.피아간의 장단점을 아는 것은 싸움의 기본이다. 이를 무시하고 권력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원을 욕망하면, 그들과 다를 바 없거나 더 못한 집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때문에 여당의 부패나 비도덕보다 야당의 경우가 더 비판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다’. 자원의 성격에 따라 사회적 평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권력과 도덕, 양자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진보를 자칭하든 간주되든, 정치의식이 인격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헌신했다, 옳다는 독선이 인간성을 망칠 수도 있다.누가 ‘진정한’ 진보이고 보수인지, 이들 중 누가 더 도덕적인지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윤리는 각자의 위치와 이슈에 따라 다르게 요구된다. 저자의 인용대로 “우리는 모두 이중개념주의자”이며 “명사수가 되기 위해 이성애자일 필요는 없다.”(104~105쪽) 다만, 타인에게 ‘옮음’을 설득하려는 이들은 “정치는 참혹한 것과 불쾌한 것 중에서 선택하는 것”(132쪽)이고, 인간은 가치보다는 감정에 더 영향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성과 감정의 분리와 위계는 서구 철학의 낡은 산물이다.강준만 교수가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으로 ‘싸가지 있는 정치’를 제시했다. 상대편을 존중하는 마음과 자세의 터전 위에 서야만 민심을 제대로 읽는 눈이 트여 집권이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집권 후에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집권 후의 성공까지 거론한 이유는, ‘싸가지 문제’가 선거는 물론 평소의 정치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좋은 정책과 이념이라도, 싸가지 없게 행한다면 유권자들은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강준만 교수는 진보의 ‘이성 중독증’을 지적한다. 이성 중심의 정치관이 싸가지 문제를 사소하게 보는 데에 일조했다는 것이다.진보의 싸가지 문제란, ‘무례함, 도덕적 우월감, 언행 불일치’ 등이다. 예컨대,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행위, 담론에만 집중한 나머지 예의를 벗어난 표현,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는 태도, 왜 진보를 좋아하지 않고 보수에 표를 찍냐고 호통치는 듯한 자세, 의견이 맞지 않으면 동료에게도 상처를 주고야 마는 행위, 번드르하게 말해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입장을 바꾸는 태도 등이다.정치와 선거는 20퍼센트의 유권자가 결정하는 싸움이다. 유권자 100퍼센트 중 보수와 진보의 고정 지지층이 각 30퍼센트라고 가정해보자. 이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꿈쩍 않는 요지부동 세력이다. 나머지 40퍼센트 중 20퍼센트는 아예 투표를 하지 않는 세력이다. 결국 남은 20퍼센트의 유권자가 당락을 결정짓는다. 이들은 정치인들의 의사 표출 방식, 즉 ‘태도’에 큰 관심을 갖는다. 여기서 싸가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진보 진영에선 독설과 욕설을 앞세운 카타르시스 효과를 노린 담론만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 흐름에서 벗어나면 대뜸 날아오는 질문이 “박근혜 정부를 좋아하시나 보네요” 따위의 것이다. 진보의 언어는 모욕과 쌍욕인가? 이기고 싶다면서도 사실상 패배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바꾸고 싶다면서도 바꾸지 않게 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 이들이 진보 진영의 주류로 행세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감정에 무능하다 함은 진보에 감정 표현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감정의 포로가 되어 유권자들의 감정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둔감해 무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보수는 대중에게 감정으로 접근한다. 싸가지 있게 굴려고 애를 쓴다. 여자를 꾀는 바람둥이처럼 계산하고 기획한다. 이에 비해 진보는 “네가 어떻게 날 안 좋아할 수 있어?”라고 호통치는 형식이다.
존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를 읽고오늘날 우리는 너무나도 자유롭게 언론 출판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 자유는 불과 20~30 여 년 전 만 해도 많은 제약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때 행해진 언론 탄압에서 언론은 하나의 정권 유지의 도구일 뿐이었다. 국민의 알 권리와 국가의 안전 어떠한 것도 보장 받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나라에서 독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그 지배자는 반드시 커뮤니케이션에 능해야 한다. 나쁘게 말해보자면 언론 조작 또는 언론 탄압과 같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언론의 사회적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나라를 포함한 사람들의 의식 형성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 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 당시의 언론의 통제는 시대적인 상황에서 위배해서는 안 되는 권력을 따라 유용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한 정보의 유통 방해로 시작했을지언정 인간의 권리 침해와 발전의 방해를 가져오기도 했다. 때문에 과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정말 많은 곳에도 그러하게도 당연하게도 수 없이 이루어져 왔다.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그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아레오파지티카는 단순히 출판의 문을 열어달라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존 밀턴은 가톨릭이라는 국가체제 내에서 자유의 범위와 그 기능에 대해 고찰했다. 그 고찰의 결과로 나타난 자유는 공개시장과 자율조절의 원리로 가시화 된 것들도 있다. 또한 자유로운 공개시장과 자율조절의 개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물론 일체의 사상을 자유공개시장에 방임하기에 이른 것인지 아니면 일정한 제한과 규제가 가해져야 하는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언론자유의 말살이 언론자유의 허용보다 발전을 막을 여지를 가져왔다는 것은 증명되어 왔다. 민주주의가 최선이 아닐지도 모르긴 하지만 독재보다 나은 것과 비슷하다고 볼 때, 자유의 허용이 더 괜찮은 것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레오파지티카가 가진 한계가 있다면 , 밀턴의 자유는 우리가 말하는 절대적, 보편적 개념의 자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의 가톨릭 세력의 횡포는 이미 수위를 넘어섰고, 이런 상황에서의 종교개혁이란 가톨릭의 억압과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즉, 존 밀턴에게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이고 시대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의 진리 추구를 위한 자유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그 자유의 대상자도 한계가 될 수 있다. 모든 대중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 및 학자들에 국한 되어 있다고도 말한다. 쉽게 말해 '로마 카톨릭'은 제외 된 것이다.'아레오파지티카 ' 자체는 매우 다양한 측면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을 말해주는 역사적 관점, 과거의 연설문의 통해 뛰어난 설득적 기법도 볼 수 있다. 또 종교적 측면에서 억압을 받으면서 자유에 대해 고찰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기타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해 주었다는 점에서 존 밀턴의 연설문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언론사회가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언론 자유의 중요성’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이후 현대 사회까지 언론의 자유를 이어 오게 해준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존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는 현 언론자유의 핵심적인 개념인 '사상의 공개시장'과 '사상 간의 자율조정과정'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책으로 언론학에 있어 고전 중의 고전으로 뽑힌다. 모든 사상이 시장처럼 경쟁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 가장 옳은 진리가 승리하게 된다는 그의 책의 요점은 언론자유라는 이념에 근본적이고도 강력한 이론적인 배경을 부여함으로써 현 시대에 누리고 있는 표현의 자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아레오파지티카에서 존 밀턴의 주장한 의견이 이후에 학자들에 의해 시대착오적으로 각색되어 그 의미가 원래 의도보다 더 진보적으로 해석된 경향이 있다고 할지라도 존 밀턴의 저술의 가치는 폄훼될 수 없다.특히 사상의 자유시장의 개념과 자율조정과정이라는 그의 아이디어는 다른 어떤 반론도 침묵시킬 만큼 강력하다. 그는 검열에 찬성하는 근본적인 입장의 핵심인 ‘출판물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존재 한다’는 인식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이 단순히 나쁜 출판물을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시장의 조정과정에 맡기자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전혀 다른 차원으로 문제를 전이시켜 강력한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특히 자유방임주의 경제관과 일맥상통하는 그의 이러한 생각은 양 극단의 애매모호한 중간지점을 결정해야 가장 옳다는 식의 논의, 즉 언제나 중간자적인 입장만이 옳다는 식의 논의와 달리 하나의 극단으로 치닫는다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내재적인 자율조정, 음성적인 피드백으로 인해 가장 옳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모든 과정적인 문제에 있어 가장 손쉽고 통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성을 기반으로 한 진리의 발견이라는 아이디어는 표현의 자유가 왜 무엇보다 먼저 수호되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가장 간결하고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하지만 그의 이러한 강력한 주장 속에서는 분명 그 내재적인 논리적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바로 존 밀턴의 주장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전제들이 그 당시 상황에 의존한, 그럴 것 같다고 받아들여질 만한 생각들에 기반을 둔 것이거나 또는 너무나 이상적인 생각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존 밀턴의 주장들을 잘 파고들어가다 보면 그 주장들을 떠받드는 대부분의 주장들이 어떤 사실보다는 성경적인 근원론과 너무나 이상적으로 단순화된 현실인식과 이성의 힘, 진리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점은 그의 핵심개념인 사상의 자유시장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허가제의 한계를 지적하는 두 번째 근거에서 그는 이성의 절대적인 분별능력을 악한 지식과 진리를 구분하는 근본적인 원동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부분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성격적인 메타포를 사용하는데 그에 따르면 그는 인간의 자연법, 즉 근본적으로 옳은 자연 내재적인 법칙은 아담의 추방 이후에 붕괴되었다. 이상적인 세계의 붕괴, 더 이상 신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도덕적인 나신의 모습으로 세상으로 튕겨져 나가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처럼 인간은 그 추방가운데에서도 하나의 가능성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유일한 신의 속성인 이성이 된다. 이러한 이성은 원초적인 이상세계가 붕괴된 세계에서 신의 속성을 구현하는 제 2의 자연법의 시대를 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