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엘베시우스는 “부모의 사랑은 내려갈 뿐이고 올라오는 법이 없다. 즉 사랑이란 내리사랑이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능가한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만큼 부모님의 사랑은 무한하고 따뜻하고 한없이 넓고 깊다고 여태까지 배워왔다. 실제로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나는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행복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인정하는 데도 불구하고 ?역참지기?에 나오는 두냐의 아버지 브이린의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았다.?역참지기?의 이야기는 화자가 역참에서 역참지기인 브이린과 그의 딸 두냐를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화자는 역참을 떠난 몇 년 후에 아름다운 두냐가 선물해준 황홀한 키스를 잊을 수가 없어서 다시 찾게 되는데 그 때는 이미 두냐는 역참에 없었고 폭싹 늙어버린 브이린만 있었다. 화자는 그곳에서 술을 마시며 브이린에게 두냐의 사건을 듣게 된다. 그 사건은 몇 년 전 역참에 기병 대위인 민스키가 방문하면서 전개된다. 민스키는 아프다는 핑계로 며칠 동안 역참에 머물렀고 떠나는 날 두냐를 교회에 데려다준다고 마차에 태웠다. 그렇게 마차를 타고 떠난 두냐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민스키를 따라 떠난 것이다. 브이린은 불쌍한 두냐를 구하기 위해 민스키를 찾아가지만 그 곳에서 본 것은 불쌍한 두냐가 아니라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운 두냐였다. 브이린은 두냐를 데려오기는 커녕 민스키에게 모욕만 당한 채 돌아왔다. 그 사건을 듣고 떠난 화자가 몇 년 뒤에 다시 역참에 왔을 때 브이린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화자는 브이린의 무덤으로 안내해준 소년에게 두냐가 마차를 타고 아이들 세 명과 함께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이 이야기의 초반에 역참에 붙어있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 관한 사진이 나온다.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이 별다른 뜻 없이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이 이야기 속에 넣은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24절까지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이야기’는 이러하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 성경 구절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탕자의 아버지는 너무나도 인자하고 자식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물질적인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 떠나보낸 자식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아들을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돈을 다 탕진하고 온 아들에게 비난과 욕설 대신 사랑으로 품어주고 다시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듯이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이 시대의 모든 자식들이 바라는 아버지 상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반면 브이린은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와 다르게 자신을 버린 두냐를 몹시도 원망했다. 딸을 이해할 마음의 여유는 물론이고 딸을 아름답게 꾸며줄 물질적 능력도 없었다. 두냐는 분명히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고 심지어는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까지 했다. 두냐는 사랑받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존재이고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아버지인 자신이 가장 잘 알면서도 자신을 버린 두냐는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한 것 같다. 또 두냐가 행복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두냐가 행복해서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더 자기 최면을 거는 듯도 같다. 브이린이 자신을 이렇게 버린 두냐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지독히 원망하며 행복한 두냐를 부인한 이유를 추측해보면 아마도 브이린은 역참에서 두냐와 둘이서 살던 그 시절이 꽤나 즐겁고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두냐도 자신처럼 그렇게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떠남으로서 두냐는 그 생활에 만족하지 못함을 느꼈을 것이고 두냐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서 민스키가 해주었던 것처럼 두냐를 보살펴줄 능력이 없는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딸이 행복한 모습을 보고 기품 있고 위엄 있게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을 빌어주었다면 남은 생애가 그렇게까지 고달프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자식의 행복을 빌어주어야 할 부모로서의 위치를 가진 브이린이 딸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에 휩싸인 모습은 너무나도 나약하게 느껴졌다.그렇다고 해서 브이린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탕자의 아버지의 태도가 더 이해할 수 없고 그 행동에 공감할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브이린의 모습이 탕자 아버지의 모습보다 더 요즘 부모님들의 모습과 더 가깝기 때문이지 않을까? 어린 시절 읽었던 책과 주위의 다양한 매체에 의해서 인식되어버린 부모님의 모습은 한없이 인자하고, 희생적이고, 자식들을 향한 마음이 넓고 깊다. 의식 중에 뿌리 깊이 박힌 완벽하다 할 수 있는 부모님의 모습 때문에 현실에서의 부모님의 실수가 자식들에게 더 큰 상처로 다가오는 것 같다. 브이린이 원래의, 현실의 아버지의 모습인 것이다. 소설의 전반부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의 아버지는 현실이 아닌 것이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비유하기 위해 적혔듯이 ‘돌아온 탕자 이야기’의 아버지는 온전한 존재를 뜻하는 ‘신’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자식인 나와 마찬가지로 실수할 수밖에 없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작게는 분을 못 이겨 감정이 가득 담긴 체벌을 자식에게 가하고, 크게는 삶이 고달파서 자식을 지우거나 버리기 까지 하는 것 또한 부모님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