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과 2007 개정 교육과정~ 2009 개정 교육과정(2012.12) 내용 체계 비교1. 초등학교 역사과 내용 체계학년2007 개정 교육과정2009 개정(2010.05)2009 개정(2011.08)2009개정(2012.07)3학년(사회과 통합)?우리가 살아가는 곳 ?우리 고장의 정체성?고장의 생활 문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동과 의사소통 ?다양한 삶의 모습들(3~4학년 역사 영역)?사람들이 모이는 곳?도시의 발달과 주민 생활?다양한 삶의 모습들?사회 변화와 우리생활동일5학년?하나 된 겨레?다양한 문화가 발전한 고려?유교 전통이 자리 잡은 조선?조선 사회의 새로운 움직임?새로운 문물의 수용과 민족 운동?대한민국의 발전과 오늘의 우리동일(5~6학년)? 우리 역사의 시작과 발전? 세계와 활발하게 교류한 고려? 유교 문화가 발달한 조선? 조선 사회의 새로운 움직임?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 운동? 대한민국의 발전과 오늘의 우리동일2. 중학교(10학년 포함) 역사과 내용 체계학년2007 개정 교육과정2009개정(2009.12)2009개정(2010.05)2009개정(2011.08)7학년?공통교육과정 역사(중학교)근대 이전 ? 문명의 형성과 고조선의 성립? 삼국의 성립과 발전?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고려의 성립과 변천? 조선의 성립과 발전? 조선 사회의 변동? 통일 제국의 등장? 지역 세계의 형성과 발전? 전통 사회의 발전과 변모근대 이후 ?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국권 수호 운동? 민족 운동의 전개? 대한민국의 발전? 산업 사회와 국민 국가의 형성? 아시아?아프리카 세계의 변화와 민족 운동? 현대 세계의 전개8학년?문명의 형성과 고조선의 성립?삼국의 성립과 발전?통일 신라와 발해?고려의 성립과 발전?고려 사회의 변천?조선의 성립과 발전?통일 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다양한 문화권의 형성?교류의 확대와 전통 사회의 발전동일동일9학년?조선 사회의 변동?근대 국가 수립 운동?대한민국의 발전?산업화와 국민 국가의 형성?아시아?아프리카 민족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현대 세계의 전개동일?조선 사회의 변동?근대 국가 수립 운동? 민족 운동의 전개추가?대한민국의 발전동일10학년?우리 역사의 형성과 발전?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구 열강의침략적 접근?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개혁 운동?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 운동의전개?전체주의의 대두와 민족 운동의 발전?냉전 체제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대한민국의 발전과 국제 정세의 변화?세계화와 우리의 미래동일?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전근대사 한 단원 추가됨?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구 열강의 침략적 접근?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 운동의 전개? 전체주의의 대두와 민족 운동의 발전? 냉전체제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대한민국의 발전과 국제 정세의 변화세계화와 우리 미래 단원 삭제선택교육과정(고등학교)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3. 고등학교 역사과 내용체계2007 개정 교육과정(2007.07)2009 개정(2009.12)2009 개정(2011.08)2009 개정(2012.03~2012.12)?원시 사회와 문화?고대 사회와 문화?고려 사회와 문화?조선 전기 사회와 문화?조선 후기 사회와 문화?근대 사회와 문화?현대 사회와 문화과목이 사라짐10학년->선택교육과정?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일제 강점과 민족 운동의 전개?대한민국의 발전과 현대 세계의 변화동일?동아시아 역사의 시작?인구 이동과 문화의 교류?생산력의 발전과 지배층의 교체?국제 질서의 변화와 독자적 전통의 형성?국민 국가의 모색?오늘날의 동아시아
서양현대사 과제아돌프 히틀러,그는 어떠한 인물인가?아돌프 히틀러, 우리는 그를 향해 학살자 혹은 악의 축이라고 일컫는다. 나 또한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들과 매체를 통해 그를 평가한 내용을 들어 왔다. 먼저, 우리는 히틀러를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전체주의에서도 독재정권의 대표자이며 제 2차 세계 대전이라는 큰 무대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당시의 유럽 세계에서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또 유럽 세계를 넘어서 세계 전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히틀러, 그가 어떠한 인물인가에 대해 재조명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 그에 대해 평가를 내려 볼 것이다. 평가를 내리기에 앞서 그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배경에 처해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에 눈을 뜨지 않은 상태의 히틀러의 일생을 살펴보려고 한다.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세관의 하급관리였던 아버지와 그의 3번째 부인(여관종업원)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3세 유년기에 양친이 모두 사망하여 고아가 되어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 이후 실업학교에서 입학하였지만 적응을 하지 못하고 계속된 낙제로 퇴학당하였다. 따라서 그의 꿈이었던 정규 미술학교에 입학이 좌절되었다. 그는 17세 이후 빈에서의 유랑생활과 고아은급으로 연명하였고 보조 노동자로 일하면서 반유태주의자로의 성장하여 독일민족 지상주의에 깊은 신념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히틀러는 유복한 가정환경이 아닌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던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아리아인의 민족적 우월감을 기초로 한 그의 반유대주의는 중소상공업자와 중소농민으로 구성된 독일인 중산계급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과 원한이 왜곡된 형태로 표출된 것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후에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이라는 처참한 결과로 내몰게 되는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그는 1913년 이후 3년간 오공산정권이 성립되었지만 군부가 이를 타도하였다. 그는 군부가 급진화된 공산혁명사상에 철퇴를 가하고 새로운 독일을 보수적 군국주의로 전환하는 작업(강연회 등)에 발탁되어 탁월한 선전 선동술을 발휘하면서 인정받았다.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이론에 반대하는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독일의 11월 혁명과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가장 격렬한 반대자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히틀러의 정치활동을 통해 그가 이루어낸 업적은 무엇이며 어떠한 정책시행으로 비난받는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히틀러는 1919년 3월 뮌헨에서 노동당 창당멤버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고, 1920년, 당의 선전책임자로 발탁되어 25개조 강령(반동적, 제국주의적요소가 강함)을 기초하였다. 당시 히틀러의 목표는 대독일주의, 독일의 새로운 영토 확장 및 식민지획득, 군비의 재 확장, 베르사이유 체제의 타파, 바이마르공화정 타도, 반유태주의 등 이었다. 1920년 여름 NSDAP(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이 창당: Nazis(약칭)되고 1921년 당수로 히틀러가 선출되었다. 그는 사조직으로 Roehm이 주도하던 당집회의 경비대였던 SA를 나찌의 무장대중단체로 발전시켜 퇴역군인, 하급관리, 실업자등 저소득층을 이에 가입시켰다. 이 조직은 군부와 자본가가 재정을 지원함으로서 후기에 커다란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의 라인란트 점령을 계기로 그는 1923년 뮌헨에서 쿠테타를 주도하여 1년여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의 저서 「나의투쟁」은 그 당시 저술되었다. 그는 이 글을 통해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증오심, 독일의 적국에 대한 배신감, 강력한 지도력만이 독일로 하여금 유럽 여러 나라의 협력 체제 내에서 정당한 자리를 회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주장했다.이러한 히틀러의 정치적 성향의 표출은 전쟁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경제적 위협에 직면한 농촌 사람들과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점점 의회에서 많은 자리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나 곧 의회체제가 붕괴되었다. 1933년 1월, 반동 세력들인이로 인해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전체주의 정권으로 나찌의 일당독재체제가 시작된 것이다.이제부터는 그의 독재정권 속에서 현재 비난받고 있는 면을 다뤄볼 것이다. 먼저, 나의 입장은 히틀러를 옹호하기 보다는 비판하는 쪽에 가깝다. 그가 이루어낸 정책시행의 성과들도 분명 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억압과 희생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점에서 그가 비난받고 비판받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로 유대인 박해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나찌는 북유럽인도 포함시켜 소위 아리아 인종만이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류의 진보에 현저한 기여를 한 유일한 인종이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인민의 업적과 정신적 특질은 혈통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종 이론은 단지 합리화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광적인 반유대주의자였기 때문에 나찌는 자신들의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유대인을 박해했다. 1935년에 통과된 일련의 법은 유대인이나 유대계 혈통을 지닌 사람들의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고 유대인과 여타 독일인과의 결혼을 금지시켰다. 유대인들은 외출 시에 다윗의 별을 달도록 강요당했다. 결국 수백만의 유대인이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운동과 같은 극단주의는 어떠한 근거들을 통해서도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희생의 사건은 우리나라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5공화국의 광주민주화운동을 예로 들려고 하는데, 광주민주화운동은 정치적 지역주의에 의해 광주시민들이 희생당한 것을 말한다. 이는 유대인 박해와 같은 맥락의 사례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정치적인 요인으로 억압받고 희생을 치러야 했던 면은 유사하다고 봐서 근거로 든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 박해는 비윤리적?비인도적인 정치적 희생으로 극악무도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두 번째로는 나찌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들 수 있다. 1933년 히틀러는 제네바 군축회담에서 군비평등권을 주장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권은 3월 군비확장 계획안에 따라 징병제를 부활시켜 베르사이유의 결정을 무효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스트레자에 모여 히틀러에 대항하는 스트레자 전선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명목적인 공동전선은 연합국간의 이해관계의 마찰로 곧 파탄에 이르고 말았다. 영국은 소련의 동유럽 등의 팽창을 저지하기위해 실질적으로 독일의 군비확장에 환영하는 유화정책을 유지하였다. 따라서 1935년 6월 영?독 해군협정이 성사되어 독일의 해군력 영국에 비해 35%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정은 베르사이유 체제의 붕괴를 자초한 것이고 독일외교의 대승리였다.나아가 히틀러는 1936년 3월 무쏘리니가 이티오피아를 침략한 틈을 타 1930년 6월 말 프랑스 점령군의 마지막 철수하여 비무장지대로 남아있던 라인란트에 독일 군대를 진주시키고 로카르노의 조약을 파기를 선언하였다. 그는 1935년 5월 2일에 프랑스와 소련이 체결한 5년간의 상호 원조조약이 로카르노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빌미를 잡았다. 사실상 프랑스 의회는 이 조약의 승인문제에 논란이 많았다. 히틀러의 이러한 국제법 위반과 베르사이유 체제를 부인하는 행위로 독일인에게 더욱 그의 인기는 높아만 갔다. 또한 프랑스 정부도 재점령을 위한 군대동원 등 이에 적절한 대응책을 펼치지 못하고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해제하는 데 실패하였다. 전체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대외적 팽창을 영국 및 프랑스가 묵과하는 유화정책이 시작되고 1937년 뮌헨협정에서 그 피크를 이루었다. 히틀러는 독일의 재무장을 기점으로 독일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고 있던 이전의 세력을 되찾을 권리가 있다고 선포함으로써 국민의 수치심과 배신감을 최대한 활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1936년 에스파냐에서 내전이 발발했는데, 히틀러는 군력을 시험코자 군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는 군대와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 최초로 가해진 전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대규모 희생을 예견하였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팽창은 여러 약소국들의 영토 등의 물적 피해와 국민들 모든 문화·정보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선동을 계속했으며 군중집회와 휘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제복을 입은 요원들로 그 절대 권력을 내보이려 했다. 선전기구 밑에는 비밀경찰과 집단수용소를 핵심으로 하는 테러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독일국민의 반유대 감정을 부채질하여 유대인을 공포와 혐오의 상징으로 만들었고 기만적인 선전으로 모든 사회계급의 적으로 내몰았다. 주요 통제기구는 하인리히 히믈러와 그의 선임부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휘하에 통합된 비밀경찰, 보안대 그리고 친위대(SS) 조직들이었다. 반정부 세력은 철저한 폭력에 의해서, 또는 많은 경우 탄압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으로부터 거세되어갔다.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가와 국민의 적으로 몰렸고 종종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이 밀고자가 되기도 하는 잘 짜여진 감시망 때문에 시민들은 표현과 행동을 매우 조심해야만 했다. 정의는 더 이상 목적이 되지 못하고 이른바 국민의 요구와 이익이라고 하는 것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정상적인 사법절차는 무시되고 특별수용소가 세워졌으며, SS는 법을 뛰어넘는 권한을 휘두르며 잔학행위를 저질렀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공산 러시아를 능가하는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무단독재였다.이와 같이 히틀러가 악의 축으로 불리는 근거들을 몇 가지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이러한 억압 정치를 통해 이루어낸 업적은 없었을까? 분명히 그 또한 칭송받을만한 일을 해낸 것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세계 사회는 대공황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독일 역시 이 혼란 속에서 실업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이 실업률 낮추는데 성공했다. 그는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 혜택을 확대하고, 국가 재정을 통한 대규모 건설 계획을 시행함으로써 실업 문제와 씨름했다. 1930년대 말에는 재무장을 위한 상당한 규모의 군비 증강을 통해 독일의 실업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다. 이러한 계획들은 노동 계급만큼이나 공황의 종식을 갈망했던 중간 계급과 상층 계급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소였다.
맹자와 그 시대- 목차 -Ⅰ. 서론Ⅱ. 맹자Ⅲ. 왕도정치사상Ⅳ. 춘추전국시대Ⅴ. 왕도정치와 춘추전국시대Ⅵ. 결론Ⅶ. 참고문헌Ⅰ. 서론춘추 전국 시대에는 여러 제후국들이 경쟁적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함에 따라 능력 있는 인재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리는 인재들이 제각기 독창적인 학술과 사상을 전개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漢 대 이후 일반적으로 제자백가를 유가, 묵가, 법가, 도가, 명가, 병가, 종횡가, 농가, 음양가, 잡가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활동도 단지 사회 정치사상만이 아니라 지리나 농업, 문학 등의 학술 활동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공자(孔子)가 창시하고 맹자(孟子)와 순자(荀子)가 계승한 유가(儒家)는 가족 윤리를 바로 세움으로써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또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교육을 시키고자 하였다. 유가 사상은 다양성과 합리성을 갖추었으므로 그 후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법가(法家)는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군주의 권위를 존중하고 엄격한 法治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상앙(商?)과 한비자(韓非子)는 법과 처벌에 의한 사회 질서 유지를 중시하였다. 진(秦)은 이사(李斯)를 등용하여 法治主義적 개혁을 실행함으로써 중국 통일을 완수하였다. 도가(道家)는 덕치와 법치를 모두 반대하고 자연 상태의 삶을 주장하였다. 이는 후대 중국인의 자연관, 예술과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이러한 제자백가 중에서 맹자는 人本적이고 平和적인 문명을 구축하기 위해 물질주의와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지적 고뇌를 대표하고 있다.) 이 같은 맹자사상은 춘추 전국 시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당시 상황에서 어떤 해결과제를 제시했을까? 그리고 법가사상을 채택하여 중국을 통일한 진은 짧은 통치기간을 거치고 결국 멸망에 이르는데, 유가사상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을까? 이러한 물음을 가지고)이라 하고, 조기(趙岐)의《맹자장구제사(孟子章句題辭)》에는 추인(鄒人)으로 되어 있다. 맹자의 출처에 관해서는 복잡한 설이 많이 나왔으나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면, 맹자의 고국은 노(魯)나라이고, 그가 주로 거처한 곳이 추(鄒)였던 것 같다. 추(鄒)는 지금의 산동성 추평현이다.《맹자장구제사》에도 고 했을 뿐, 부친에 대해서는 소개된 바가 거의 없지만 모친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맹모삼천지교는 맹모 단기고사(斷機故事)와 함께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맹자는 각국을 순방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년에 제자들과《맹자》7편을 지었다고 한다. 이 책은 맹자와 각국의 국왕 및 제자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책인데, 宋 대 이후 주자학이 사상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서(四書)의 하나로 중시되었다.맹자는 시대적 혼란을 극복하려는 공자의 사상을 보다 심화?발전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인간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통해 독창적인 인성론을 이끌어 내었고, 이를 자신의 사상의 기초로 확고하게 세워 놓았다. 맹자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심성을 선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맹자의 이러한 인성론을 성선설(性善說) 혹은 심선설(心善設)이라고 한다. 맹자는 인간이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로 사단四端), 즉 네 가지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 맹자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선의 씨앗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을 잘 길러 나간다면(존양存養) 누구라도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맹자가 인성의 선함을 전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맹자가 말하고자 하는 ‘性善’은 인간이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인간이 인간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자신의 선한 심성을 잘 가꾸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또한 맹자에 의하면 가족과 국가는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실현시키기 위한 사회적 기제이다. 이에 의해서 그의 정치철학으로 주창한 서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다. 만약 군주가 그러한 마음가짐이 없이 힘만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려 든다면(패도정치覇道政治) 그는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고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이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이 가장 가볍다.”고 말함으로써 국가의 통치에 있어 民本主義적 사상을 주창하였다.맹자는 공자가 주창한 仁과 더불어 의(義)를 강조했다. 의란 도덕적인 심성이 충분히 길러져 그것이 실천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맹자에게 있어 이 의란 이(利)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양(梁)의 혜왕(惠王)이 어떻게 해야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느냐고 맹자에게 묻자 맹자는 “어찌 이익(利)만 말씀하십니까? 오직 仁과 義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를 통해 맹자 철학의 주개념으로 仁과 義를 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Ⅲ. 王道政治 사상王道政治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맹자에 의하면 ‘인정(仁政)’이야말로 王道政治의 핵심이다. 仁政이란 불인지심(不忍之心)과 추기급인(推己及人))을 말한다. 즉, 백성들로부터 자발적 복종을 확보하는 정치이다. 맹자는 제나라의 선왕(宣王)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보며 죄 없는 죄인이 죽을 곳에 가는 것 같다며 마음 아파하자,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仁政이라고 말한다.) 또한 맹자는 왕이 좋아하는 것을 백성들과 같이 누리도록 하는 것이 王道政治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이것은 또한 백성들의 생명보호를 최우선 목적으로 삼는 정치로서, '양민과 교화(養民而敎化)'에서 그 기본적인 실천방법을 찾는다. 즉 '인민의 생활보장'(養民)에서 시작하여 '인민의 도덕교육'(敎民)으로 완성을 보고자 한다.)"5묘의 집에 뽕나무를 심으면 50살 먹은 이가 비단 옷을 입을 수 있다. 닭?돼지?개 등을 기르는데 있어서 새끼 낳는 때를 박탈하지 않으면 70살 먹은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다. 100묘의 전답에 농사짓는 철을 박탈하지 않으면 여러 가구가 굶주리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하는 것, 이렇게 하고서도 왕노릇(王道政治)를 이루지 못하는 이는 없다"-양혜왕장구상 7절-또한 德治主義를 바탕으로 한 王道政治는 힘으로 다스리는 법가의 覇道政治와 대립되는 정치철학으로 제왕은 德의 유무에 의하여 天命이 따른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德이 없는 악덕군주는 신하들이 몰아내는 것이 바로 혁명(革命)이며, 이는 民心이 天心을 따라서 행하는 일이라고 하여 후세 왕조교체에 있어서의 선양(禪讓)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Ⅳ. 춘추 전국 시대西周는 기원 전 770년에 이르러 수도를 서방의 호경(鎬京)에서 동족의 낙읍(洛邑)으로 옮겼다. 그 이전시대를 서주라 하고, 서주 이후 秦이 6國을 통일할 때(B.C. 221)까지를 東周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동주시대를 다시 춘추(春秋)와 전국(戰國)시대로 구분한다. 춘추란 말은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하는 노(魯)나라의 연대기인《春秋》에서 유래하고 전국시대의 명칭도 그 시대의 사실을 적은《戰國策》에서 비롯되었다.춘추시대에는 아직 존왕양이의 대의명분이 정치사회를 지배하여 왔고, 이에 따라 周 대의 정치질서인 禮 가 어느 정도 존중되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정치풍토는 臣下가 主君을 멸하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공벌하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경쟁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전국 7응(秦?楚?燕?齊?韓?魏?趙)의 등장이 시작되면서 더욱더 혼란한 사회분위기를 형성되었다.제자백가가 출현하게 된 사회적 배경으로 먼저, 사상의 자유와 지식의 확대를 불러오게 되었다. 춘추 전국 시대에 이르러 주대의 봉건질서가 붕괴되면서 지금까지 관부(官府)나 귀족이 독점하고 있던 학문과 지식은 일반서민에게까지 확대되어 나간 것이다. 또 전국시대 영토국가의 출현과 각국간의 경쟁은 자연히 부국강병을 추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능력있는 학자를 우대하는 풍조가 팽배하게 되었다. 끝으로 각국의 分立이 사상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역사상 정치적 통일시대는 강력한 국가권력이 사상과 학문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사상발달이 이룩되지 못 읍제국가적 통치방식으로는 방대한 국토와 인민을 다스려 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위에 약육강식의 치열한 전개 속에서 국가를 보존하기 위하여 富國强兵을 목표로 하는 변법을 강행해 나갔다. 특히 상앙의 변법으로 秦이 크게 발전하여 끝내 분열된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통일제국으로 나아가게 되었다.Ⅴ. 王道政治와 춘추 전국 시대그 당시 사회분위기는 극도로 혼란했고, 군웅이 할거하여 서로 항쟁했던 시대였으므로 사상을 조정시킬 만한 통제력이 거세되어 버렸다. 이러한 틈을 타서 허다한 사상가들이 가지각색의 주장을 내걸고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설득시키기에 여념이 없었고, 또 도당을 규합해서 사상을 중심으로 한 집단을 형성해서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天下는 이처럼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준으로 온갖 쟁탈을 일삼던 전국시대의 한복판이었다. 지식인들은 합종연횡(合縱連衡)술 등 각종의 책략을 고안하는 데 몰두하지 않으면 양주의 개인주의(爲我), 묵적의 사해동포주의(兼愛)사상에 탐닉하고 있었다.)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맹자는 왕도정치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도덕에 의한 통치를 시행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사회적 규범도 합리적이어야 하고, 도덕적 행위를 방해하는 힘의 횡포도 없어야 하고, 백성들 자신이 도덕정치에 동의하고 자발적으로 안정적인 질서에 참여하여야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통치자 자신의 도덕적으로 각성하고 궁행함으로써 자질이 갖추어질 수 있다. 政命에 의해 백성들을 교화하고 법률에 의해 백성을 강제하려는 것이 法治主義라면 도덕에 의해 백성들을 교화하고 禮에 의해 자연스러운 질서의 회복으로 도모하는 것이 德治이다. 이처럼 통치자의 德에 의해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禮法으로써 백성들을 이끈다면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알아 바른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맹자는 이러한 정치사상을 주장할 때, 그 당시 정치사회적?사상적 경향 모두를 근본적으로 천하의 평화를 위협하는 위험한 사조로 인식했다. 따라서 맹자는 현실극복을 위한 노력으로 스스로 천하를 주유하면서 당대
위정척사(衛政斥邪)운동의 전개양상-목차-Ⅰ. 서론Ⅱ. 시대적 배경Ⅲ. 위정척사사상Ⅳ. 위정척사운동의 전개Ⅴ. 영향?의의Ⅵ. 결론참고문헌Ⅰ. 서론조선 말기 서세동점의 상황에서 자주와 외세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기위해 조선의 지식인들이라 불리는 관료, 유생, 학자, 유학생들은 각자의 사상에 입각해 풀어나기 시작했다. 여러 관료층과 개명 지식인층은 자신의 학문과 사상의 체계를 새롭게 마련하여 여러 활동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움직임으로 개화와 척사운동이 있다. 이 운동은 북학파를 계승하여 자주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근대적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화파와 정학인 성리학을 지키고 다른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격해야한다는 척사파로 세력을 확장했다.척사운동의 전개는 재야에서 1830년대에 처음 척사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1860년대 조선에 대한 외세의 침략이 거세지자, 척화 주전론을 중심으로 통상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뒤이어 1870년대는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를 전후로 개항 반대 운동으로, 1880년대는 개화 정책 반대로 상소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시기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개화 정책 추진으로 인해 척사 운동은 쇠퇴하고 새로운 의병 운동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를 기준으로 위정척사운동은 대체로 다섯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 1791년 신해사옥)을 중심으로 한 신해(辛亥) 위정척사 운동, 제2기. 1866년 병인양요로 인한 병인(丙寅) 위정척사 운동, 제3기. 1876년 조일수호조규와 1881년 신사황책의 병자(丙子) 위정척사 운동, 제4기. 1894년 갑오농민전쟁?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인한 갑오(甲午)?을미(乙未) 위정척사 운동, 제5기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로 일어난 을사(乙巳) 위정척사 운동이다.)이 과정에서 척사운동은 1876년 개항 전후로 하여 그 열기는 가장 거셌다. 이 열기는 1890년대 이후 항일 의병 운동으로 또 한 번 분출하게 된다. 지금 현재사적 상황을 달리하는 민족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위정척사의 의식은 그 민족의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문화의 도전과 전통사회에 대한 이질적인 요소의 침투 등의 상황에 의하여 전통문화나 전통사회가 충격을 받았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정척사사상은 일반적으로 그 민족의 사회적?정치적?문화적인 상황을 이해하여 사상의 성격과 운동의 방향을 바라봐야 올바른 시각을 기를 수 있다.조선의 정통사상은 주자학적 유교주의였으며 동시에 예교의 질서였다. 이와 같이 유교적인 질서에 의하여 고정된 전통사회에 전통적인 지도이념을 부정하고 그 질서를 파괴하는 이단사설(異端邪說))은 배제 또는 배척되어야 할 것이었다. 효를 최고로 여기는 조선사회에서 이질적인 문화, 특히 조상에 대한 제사를 부정하는 천주교의 교리는 유교적 전통 관념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의식에서 서양의 문화에 대한 반발작용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것이 의식화 되었을 때 위정척사의 사상이 형성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위정척사사상은 19세기 중엽부터의 민족의 내재적 모순-세도정치의 척족의 폐해, 봉건사회의 말기현상- 그 자체로 심화 발전될 수 있었다.즉 이단배격에 철저한 주자학을 정통으로 하는 배타적인 양이사상에서 출발한 위정척사사상은 서구열강의 경제적 통상요구에 의한 양화(洋貨)의 충격이 가해진 1860년대는 척화 주전론으로 나타났으며, 1970년대에는 서구열강의 자본주의의 침입과 이를 대행한 일본의 위협적인 개항에서는 척양?척왜의 배외운동으로 전개되어 척사를 기반으로 하는 자강의식으로 나타났다. 그 후 일제의 조선침탈과정에서는 민족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한 구국 항일 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사상적 발전을 하였던 것이다.)이와 같이 조선말의 위기의식에서 형성된 위정척사사상은 그 당시의 대내?외적인 역사적 배경에 의해서 심화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척사사상 형성의 대두인 화서(華西) 이항로의 제자인 면암(勉菴) 최익현은 여러 차례 소를 올리는 등으로 척사사상의 실천자 역할을 담당하였고 후으로는 자본주의 열강의 위협과 도전에 대항하여 자기를 보존하려는 자주적 민족의식이 고조되었는데 이러한 정신을 위정척사사상이라고 한다. 위정척사사상은 주자학으로서 그 중에서도 이단?사학을 배척하면서 전통적 유교질서를 고수하려는 존왕양이적 춘추사상이 핵심을 이루었다. 조선말의 민족주의적 주체의식은 위정척사사상의 역사적 과정에서 성립되었고, 화서 이항로 및 노사(蘆沙) 기정진이 전통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활동을 발전시킨 것이다.조선왕조의 정치적 기본철학으로서 유교적 가치체계가 채택됨에 따라 이와 결부된 지도적 지배계층이 형성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위정척사파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위정척사파라는 새로운 사회계층이 조선왕조의 정치 및 사회의 주요 기능을 담당하게 된 계기를 맞으면서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화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 그리고 이들의 사상을 계승한 면암 최익현 등이다.이러한 위정척사파는 봉건적인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이었기는 하나 근대적 민족자주의식의 성장을 위한 긍정적인 요소를 내재하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들이 가지는 척사사상은 우리 민족의 보존을 위한 역사의식에서 전개된 것이므로 전통문화를 수호하고자 하는 활동의 사상적 연원을 이론적으로 밝히고 있다. 조선말의 민족주의적 주체의식은 위정척사사상의 역사적 과정에서 성립되었고, 화서 이항로 및 노사 기정진이 전통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활동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항로는 애국우국론을 위정척사운동의 이론적 근거로 삼아 천주교를 이단사설로 규정, 극력 반대하여 위정척사운동이 서양세력을 물리치는 근본대책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기정진은 병인양요 때 서양인을 금수로 규정하고 배양의식을 현실적 역사의식으로 구체화하는 한편, 양적 천주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내수외양론(內修外攘論))을 역설하였고, 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을 펴면서 일찍부터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간파하고 이를 이유로 개국을 적극 반대하였다.또한 앞서 소개했던 최는 시궁창에 빠지고 인간들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입니다. 「면암집」지부복궐척의소 丙子年최익현은 왜양일체론을 내세웠는데, 즉 왜와 양이들은 다르지 않고 같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일본과 병자년 개항을 맞게 되면서 개항불가론에 입각하여 더욱 화제로 떠올랐다. 지부복궐척의소의 내용을 보면 왜와 양이들과의 강화를 막자는 호소를 하고 있으며, 만약 강화를 하게 된다면 사학이 조선 내에서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이로 인해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항 반대 상소는 환급되고 최익현은 유배에 처해졌다.이 후 정부에서 척사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더욱 적극적인 개화 정책으로 인해 척사사상은 서서히 쇠퇴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 척사사상은 몇몇의 인물들로 사상적 이론을 내세우는 방법이 아닌 집단적 상소 운동과 국권 회복 운동의 하나인 항일 의병 운동으로 더욱 활발해졌다.Ⅳ. 위정척사운동의 전개1870~80년대의 척사운동은 제3기 병자 위정척사 운동의 시기로써 최익현을 중심으로 한 개항 반대 운동, 이만손 등의 개화정책 반대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최익현은 일본이 서양의 앞잡이로서 깊이 연계되어 있으며 일본인이 양복을 입고 서양 대포를 사용하고 서양 선박을 타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일본과 서양이 한통속이라는 명백한 증거로 제시하였다.그런데 개항 당시까지만 해도 척사운동은 지역성과 당파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81년의 척사운동에 이르면 경기?강원?경상?충청?전라의 5도 유생이 연대하여 반외세의 공동투쟁을 전개하는 등 지역성과 당파성이 많이 극복되었다.) 그 해 척사파 안기영 등이 고종을 폐위하고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을 추대하려던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 결국 척사운동의 위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척사운동이 되살아나게 된 것이 정부가 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한 이만손 중심의 영남 유생들이 올린 만인소였다. 이러한 운동은 서구 문물이 전통 성리학 체제를 무너뜨리고 농촌 경제를 파멸시킴으내각이 성립되고 의병해산조치가 있자, 이후에 있을 의병전쟁의 모습을 띄지 못한 채 서서히 잦아들었다. 무엇보다도 의병운동이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가 그 당시 위정척사파가 사(邪)로 규정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안으로는 동학농민군,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주도 세력, 독립협회, 갑오개혁 내용들, 밖으로는 왜, 서양문물 등 여느 때와는 달리 여러 문제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제4기 갑오?을미 위정척사 운동 시기는 이렇듯 여러 가지 요소들로 인해서 성격이 많이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제5기 을사 위정척사 운동은 위정척사운동의 종착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운동의 양상은 제4기의 성격과 유사하지만 더욱 발전?확대되었다. 1905년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맺은 을사조약으로 인해 을사조약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황성신문에서 장지연이 낸 ‘시일야방성대곡’ 등 각종 사회계층이 나서서 조약을 무효화하자는 내용을 온 국민들에게 알렸다. 유림들도 이어서 조약 반대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최익현은 이러한 상소가 을사조약을 무효화하는데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강회를 열어 의병봉기로의 서약을 하고 창의토적소)를 올렸다.이제 더 이상 의병운동은 지배층 의병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신분계층을 막론하고 의병장이 되어 작은 부대들을 만들어 항일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뜻을 합했다. 그러나 의병운동이 점차 확대되어 가면서 유생, 유림들의 고질적 한계인 봉건적인 문제로 평민출신의 의병장들과 잦은 충돌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두 계층은 화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 결과 정미(丁未)년 의병운동은 의병전쟁적인 성격을 지니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또 중앙의 군인들이 해산된 것이 오히려 반작용하여 의병운동에 강력한 군력을 뒷받침했다. 비록 이 의병운동 또한 많은 아쉬움을 남기며 결국 분산되었지만 전반적인 의병운동 덕분으로 일본의 식민지 건설운동에 큰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었다.Ⅴ. 영향?의의지금까지 위정척사운동에 대해 사상적 측면 및 다.
군가산점 제도, 과연 역차별인가?‘군가산점제 부활’에 대한 토론에서의 나의 역할‘우리 사회의 역차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은 우리 조가 선택한 토론내용에 대한 주제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차별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크고 작은 사례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큰 주제로 ‘역차별’을 두고 소주제로 남녀간, 기업간, 국가간의 역차별 사례 등을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작은 주제들 또한 많은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있는듯 하여 깊이 있고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 그 중에서 하나를 대주제로 삼기로 했다. 그래서 심사숙고하여 고른 주제가 우리 일상생활에서 가깝게 여길 수 있는 ‘군가산점 제도’에 대한 내용을 토론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막상 처음에 ‘군가산점 제도’라는 것을 들었을 때, 가산점이 폐지되었는지 아니면 지금도 시행하고 있는지 조차 잘 몰랐다. 그리고 그 가산점이 주어지는 장소 또한 어떠한 기준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제도에 대해 공부를 하기로 했는데 다행이 많은 자료와 사례가 있어서 이해하기가 쉬웠다. 이 ‘군가산점 제도’는 1999년 폐지된 상황이며 현재 부활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군가산점제’는 남녀 구도로 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토론을 하기 전에도 줄곧 생각했던 것이 이 가산점 제도는 군대를 다녀온 사람과 군대를 다녀오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해서 봐야하는 것이지 남녀차별의 대립적인 측면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군필자는 대부분 신체 건강한 남성이다. 그렇지만 이들도 결국 징병제라는 특수성에 의해서 사회적 약자라는 측면이 없지 않다. 즉, 이 제도가 그들에게 주는 최소한의 보상이라고 여긴다면 고로 역차별이 아닐 수도 있다. 간단하게 이러한 의견을 내세우면서 나는 ‘군가산점 제도 부활’에 대해 찬성의 입장을 대변하기로 했다.그리고 토론 진행 과정에서는 전반적인 정리 및 마무리를 짓는 역할과 서기 역할을 맡아서 팀 과제에 것이므로 신체가 건장하지 않은 남자에 대한 차별이다.4. 군가산점제도는 헌법에 "특별히" 규정된 양성평등 규정에 위반된다.5. 헌법에 보장된 공무담임권이라는 기본권에 "중대한" 제약을 초래한다.6. 제대군인 지원으로 얻는 이익보다 사회적 약자(여성, 장애인)들의 희생으로 인한 피해가 더 크다.7. 공무원채용시험에서 영점 몇 점 차이로 당락이 좌우되는 현실에서 제대군인에게 과목별 만점의 5%, 3% 가산점을 주는 것은 실질적으로 비제대군인을 채용에서 배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8. 헌법의 공무담임권 조항은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선발하도록 하지만, 제대군인의 "신체 건강함"은 공직수행능력과 무관하다.그 후 지난해까지 4차례 부활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논의에만 그쳤었다. 현재 2009년 10월 8일, 국방부와 병무청에서 군복무 가산점 부활을 재추진할 예정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8일 "군 가산점제 폐지 이후 군필자 지원 대책이 미흡해 군 복무에 따른 피해의식이 증가하고, 병역의무 기피 현상이 차단되지 않고 있다"며 "공무원 채용시험 등에 군 복무자 가산점 부여 제도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병무청 관계자도 "병무청이 최근 어깨탈구 수술과 환자 바꿔치기 수법 등을 통한 병역기피 행위에 대한 대책으로 군 가산점 제도 부활을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한나라당 김성회, 주성영 의원이 발의한 병역법 개정안은 병합심사를 거쳐 지난해 12월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했으며, 현재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내용은 병역의무 이수자 중 합격자의 20% 내에서 각 과목 득점의 2.5%에 달하는 가점을 주는 것이다.이로 인해 제대군인 가산점제 부활 논의는 군 의무복무 이행에 대한 동기를 높이고, 제대 후 의무복무 수행에 따른 불이익을 보전해주려는 보상의 문제가 사실상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군복무 가산점 부활의 재추진은 더욱더 뜨거워진 논란이 예상되고 있다. 이 보상으로 인해 혜택을 받거나 불이익을 받는 대상은 누구인지, 그리고 보상방법으로써 군가산점 부여 이외니다. 물론 전자의 여성 차별에 대한 문제에서는 나의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후자인 ‘군가산점제’는 남녀 구도가 아닌 군필자와 군미필자의 혜택 문제로 다가가야 한다.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군가산점 하나 가지고 남성차별이라고 얘기할 수 있냐, 이해하고 양보할 수는 없느냐.’가 있다. 그러나 남녀차별이라는 것으로 ‘군가산점제’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 않는가.이러한 입장을 토대로 국가 의무에 의해 만들어진 공동체인 군필자에 대해 그들이 잃어버린 시간과 사회활동 이후의 직업전선에 대한 보상과 혜택의 측면으로 그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즉, ‘진정한 평등이고 인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의 입장을 서술할 것이다.군가산점제 위헌 판결에 반대하는 나의 입장군가산점 제도는 부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9년 군가산점 위헌 판결 내용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나의 주장을 대변하려고 한다.① 국가에 대한 신성한 의무?위헌판결 내용에서 ‘헌법 제 39조 제1항에서 국방의 의무는 국민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이른바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두고 국방의 의무를 특별한 희생으로 보아 일일이 보상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희생의 차원에서 보면 안 된다. 그러나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군인들은 나라를 위해 뜻 깊은 봉사를 했으나, 자신을 위해서는 보람찬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것에서 봐야할 것이다. 그것도 가장 자아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하는 시기에서 말이다. 또한 취업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시기에 군복무를 위해 공백을 가지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그리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청년들은 군복무를 이행해야 하는 것에 딱히 신성한 의무라 생각지 않는다. 실제로 겪는 그들이 이렇게 느끼고 있다면 무언가 부조리한 모순이 존재한다고 봐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② 양성차별이 아닌 군필자와 군미필자의 문제또한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 중에서 남녀차별을 중요하게 다룬다. 내용을 보 주장하는 바는 신체적인 기준은 당연한 것으로 징병제가 가능하다고 보나, 이 기준에 부적합한 이들은 가산점을 받을 수 있되 군복무 이외의 활동을 통해서라도 국가에 대해 의무를 다하고 취득해야한다고 본다.③ 기회비용에 대한 보상자기계발시간, 사회경험시간 등의 기회비용에 대한 보상이다. 군미필자들은 2년동안 해외로 어학연수, 다양한 알바를 통한 사회경험, 활발한 대외 활동을 통한 인맥의 형성, 종자돈을 기반으로 한 2년의 경제적 활동, 20대 청춘의 특권인 연애, 즐거운 여가, 자기만족 극대화를 위한 소비활동 등 매우 폭넓은 활동이 가능하다. 그에 반해 군복무를 완전히 이행한 이들은 재난 시 일을 하고, 인근 농가에 봉사하며 뼈 빠지게 일하고 하루 일과 중 약간의 자유시간만을 얻는다. 그마저도 수개월 이상 내무반 생활을 해야만 누릴 수 있다. 너무 과장해서 서술한 것이 아니다. 현재 상황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다.내 주장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것이다. 군 가산점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달콤한 상이 아니라 최소한의 대우이다. 모병제인 미국이나 대만에서도 공무원 임용시 가산점이나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젊은 청년을 배려하는 것은 응당 국가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특히 징병제인 우리나라에서 군복무로 인해 청년 가장은 생계 책임을 외면해야 하고 청년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해야 한다. 군 비복무자에 비해 상대적인 기회 박탈을 경험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당락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높은 가산점 비율을 개선한데다 횟수 및 합격자 비율을 제한한 만큼 이제 긍정적으로 검토할 때도 된 것 같다.④ 과거의 군가산점제를 보완한 현재의 군가산점제한나라당 김성회, 주성영 의원이 발의한 병역법 개정안은 병합심사를 거쳐 지난해 12월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했으며, 2009년 10월, 현재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내용은 병역의무 이수자 중 합격자의 20% 내에서 각 과목 득점의 2.5%에 달하는 가점을 주는 것이다. 즉 야 될까?그러나 현재 사기업에서는 군필자들의 군복무에 대해서 경력사항으로 인정하는 곳이 많아졌다. 우리 사회에서는 비제대군인보다 제대군인을 대체로 선호한다. 공기업에서는 입사시험에 대한 공통적인 기준이 꼭 필요하지만 사기업에서는 각 회사의 융통성에 대부분 맡기고 있다. 즉, 현재 사기업에서는 군필자에 대해서 경력사항으로 인정해준다든지 호봉을 올려준다든지 여러 해결책이 존재하고 있다.그리고 또 제기되는 논란 중 하나는 결국은 ‘여성들의 사회진출에 불평등을 조장한다.’라는 것인데 앞서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남녀구도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군가산점제에 대한 혜택이 없는 이들이 여성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면에서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일까? 이들은 입사 이후 취업전선에 뛰어든 남녀를 두고 비교하고 있다. 여성들은 출산으로 인해 휴직이나 휴가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군복무는 필수 의무이지만 출산은 선택 의무이다. 물론 현재 ‘저출산 문제’가 시급하지만 어떠한 대안이 없는 이 시점에 여성들에게만 닦달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다시 문제의 요지로 돌아오면 여성들은 출산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 취업의 전?후 문제이다. 취업이 되기 전과 되고나서의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나의 삶의 일터가 마련되지 않는 상황은 실제 ‘실업률 확대’와도 연결 가능하다. 즉, 굳이 남녀구도로 본다면 그들의 의무에 대한 상대적인 역할과 취업 전?후의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여야 할 문제이다.군가산점제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최선의 대안책은?① 군가산점제 수정?보완군가산점제 10명 중 8명 ‘찬성’=논란을 빚어온 제대군인 군 가산점제 부활에 대해 일반 국민과 병역이행 대기자 모두 찬성한다는 응답이 각각 80.7%와 87.7%로 높게 나왔다. 일반 국민 중 찬성 의견은 남자(84.5%), 그중에서도 젊은 층보다는 40대(88.5%)나 50대(91.4%)에서 더 높게 나왔고, 반대 응답은 여성(23.0%)과 방위·공익·대체근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