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길을 탐색하며, 을 보고은 이라는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두 작품의 줄거리는 유사하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의 유태인 학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두 작품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거세된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유태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유태인 거주 구역인 게토에 사는 주인공은 우연히 베차니카 전방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이 대치하고 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된다. 이로 인해 주인공은 자신에게 라디오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게 되고, 거짓말을 이어가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과 그 와중에 한 명씩 죽어가는 유태인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곧 들킬 것 같은 긴장 속에서 주인공은 위태로운 거짓말을 이어나간다. 자신의 거짓말이 희망 없이 살아가던 유태인들에게 ‘살아갈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이지만 두 작품을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영화는 대중성을 확보하고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부담감이 소설보다 크기 때문에, 소설보다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스토리를 개작한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의 분량이 상당한 편이기에 영화로 각색되기 위해 몇몇 이야기가 생략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형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세부적인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소설의 독특한 묘미였던 결말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을지 궁금했었는데, 이러한 결말 처리 방식 또한 원작과 영화 사이의 큰 차이점 중 하나이다.첫 번째로, 영화는 소설에서 역점을 두었던 “유머”를 영상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소설에서는 나오지도 않았던 “유머만이 우릴 지탱해줬지”라는 직접적인 대사를 내보낸다. 간간히 흐르는 우스꽝스러운 배경 음악이나 등장인물들의 재치 있는 대사는 유태인 사태를 ‘유머’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려 한 유레크 베커의 의도를 충분히 잘 살렸다. 솔직히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유레크 베커가 ‘유머’라는 색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다는 사실을 크게 눈치 채지 못했을 뿐더러, 딱히 역점을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유머’가 수많은 유태인 이야기들과의 결정적인 차별점인 것을 고려한다면 영화의 이러한 강조는 긍정적인 효과를 준 것이었다고 하겠다.두 번째로,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공주의 이야기’가 영화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구름을 가지지 못하여 병에 걸리게 된 공주가 솜을 구름으로 믿고 병에서 나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짧지만 상당히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작품 전체의 상징을 한 눈에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화가 이 부분을 생략한 점이 아쉽다.세 번째로, 소설에서는 거짓말이 전해 준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많이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보다 거짓말로 인한 파급이 더 부각된 느낌이다.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함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는 두 작품의 차이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소설과는 달리 영화에서 주인공은 저항단체의 우두머리가 되는 지경에 이른다. 소설에서는 의사인 키르쉬바움 교수가 하르트로프를 치료해야 하는 국면에 처하게 되자 그곳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음독자살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가 하르트로프와 대면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하르트로프는 라디오 소지자를 알려주는 조건으로 키르쉬바움 교수에게 유리한 조건을 걸지만, 교수는 하르트로프 앞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한다.마지막으로, 결말 부분의 처리가 확연히 다르다. 위와 연결되는 이야기인데, 사령부는 라디오를 가져오지 않으면 인질 10명을 사살하겠다는 공고를 내건다. 이때에 주인공은 코발스키에게 라디오는 사실 없다는 고백을 한다. 영화에서 나온 코발스키의 대사인 “그것 때문에 독일인이 게토를 뒤지고 있군. 존재하지도 않는 라디오 때문에.”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리나와 코발스키의 옹호는, 극적인 효과가 관객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편파적인 판단을 유보시키기 위해 뒤늦게 수습을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