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정한 실존을 향하여지금까지 보아왔던 실존에 대한 분석, 이제부터 그 분석에서 보다 확장된 방식을 살펴보기로 하자. 실존에 대한 분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현존재를 전체적인 면에서 보려고 하는 방식이며 두 번째는 진정한 현존재에 관해서 탐구하는 방식이 있다. 전자는 일상적 현존재에 관한 것으로써 외부로부터 주어진 틀에 의해 형성된 현존재에 대한 분석 방식인데 초기 하이데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며, 후자는 죽음과 양심이라는 두 가지에 눈을 돌림으로 초기의 한계를 넘어서서 실존을 설명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실존에 관하여 다루어 보기로 한다.1) 죽음불안은 비본래적 존재를 본래적 존재)로 이행하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 역할을 한다. 불안은 인간이 존재하고, 존재해야만 하는 세계 내에 던져져 있는 현존으로서의 인간의 전(全)상황이며 인간 자신을 개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분 상태를 말한다. 이 불안은 우리들의 실존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고,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이 책임이란 우리가 그것을 깊게 느끼면 느낄수록, 자기 만족의 모든 흔적을 파괴해 버려야만 하는 그러한 책임이다). 이 불안은 현존재의 유한성을 개시해 주는데, 이 유한성의 가장 분명한 징표는 죽음이다.하이데거에 있어서 죽음은 실존의 완결이 아니라 하나의 한계를 설정하게 해주는 것이다. 죽음은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를 무로부터 구별시켜준다. 이 죽음은 현존재가 세계 내에서 존재하기를 중지할 때 그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식으로 무로부터 구별된다는 것은 분명히 무)의 바깥에 있다는 것, 말하자면 실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 실존의 한계를 자각하게 되었을 그 때는, 이것이야 말로 자신의 고유한 실존이라는 것도 인지하기 때문이다.모든 실존은 죽음에로 향하는 존재, 종언에 직면하여 있는 실존으로 볼 수 있다. 죽음이라는 잘박한 종언 이전에 생의 위기와 그 책임을 인지하고, 종언에 대한 자각으로 형성되고 통일된 실존인 것이다. 죽음을 중심으로 생의 가능성들이 조직되어야만 하는 통일점인 것이다.2) 양심현존재가 자신을 개시하는 양태중의 하나로서의 양심은 현존재를 그 진정성에서 보도록 해준다. 하이데거는 일상적인 양심과 실존으로 향하는 양심을 구분한다. 일상적 양심은 사회의 소리이며 세인들이 체택한 관습들을 반영한 의미라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양심은 본래적 존재로 이행하게 해 주는 의미를 갖는다. 양심)은 현존으로 하여금 죽음에로 인도하는 존재를 떠맡도록, 또한 현존을 죽음에로 단호하게 기투하도록 요구한다.6. 시간성과 역사성실존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두 양식이 있는데 이는 시간성과 역사성이다.1) 시간성: 현재, 과거, 미래라는 세 개의 차원을 가진 시간성의 개념, 이것은 관심의 삼중구조--가능성(미래에 대한 기투)과, 사실성(과거의 인수) 그리고 타락)(현재에 대한 관심)--와 일치한다.현존재는 단순히 “지금”에 한정되지 않는다. 기투함으로써, 그는 언제나 이미 있었던 존재다. 그는 하나의 지금으로부터 다른 지금에로 전이함으로써 현존재는 시간을 취하고 갖는다. 즉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서 취하게 된다. 분명히 시간성의 차원들이 가장 완전하게 통일되고, 참된 자기성이 획득되어지는 것은 진정한 실존 속에서이다. 책임성에서 자신의 사실적인 유죄를 떠맡아 양심에 응답함으로써, 과거를 자기 것으로 전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현재의 상황에서 진정한 결단성에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미래와 과거의 양자를 전용함으로써다. 진정한 현존재는 “과거의 진행 가운데서 현재화하는 미래의 통일을 개진하는 것이며, 이것을 우리는 ?시간성?이라고 일컫는다.2) 역사성: 역사적 연구의 주체는 단 한 번 생기 하는 것이나, 그것 위에 부동(浮動)하는 보편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현존하고 있는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이 어떤 초시간적인 양식의 무색성으로 곡해된다면 이 가능성 그 자체는 반복)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진정한 역사적 방식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오직 사실적이고 진정한 역사성에 의해서만, 거기 있었던 것에 대한 역사가 결정적인 운명으로서 어떤 방식-반복 가운데서 가능성의 힘이 우리들의 사실적인 실존의 핵심에로 침투하게 되는 그러한 방식-가운데 개시되어진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미래의 성격에 있어서의 실존에로 향하는 방식인 것이다.7. 존재의 의미1929년 프라이브르그 대학에서의 취임 강연 때 했었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존재의 의미를 알아가 보도록하자.부정의 일반적인 관념은 현존재가 바로 자신의 존재 가운데서 가지는 ‘무’와의 구체적인 조우(우연히 만남)로부터 도출된다.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무’의 기본적인 의미와 부정의 논리적인 관념에 관한 실존론적 기초는, 바로 죽음에로 향하는 존재가 갖는 무성과의 이러한 조우인 것이다.무는 파악되어지지 않고 현시된다. 무는 존재자와 나란히 혹은 존재자에 첨가되어 현시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어떤 의미에서는 무가 존재자의 한 부분인 양 존재자 속에서 존재자를 통해 현시된다. 분명히 모든 유한적이고 규정적인 존재자들은 단지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한에서만 존재하고 있다. 순수한 무차별적 존재만이 실제로 순수한 무로부터 구별될 수 없다. 이것은 현존재로 하여금 존재자로서 존재자에게 대면시킨다고 말할 수 있는 무의 무화작용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것이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서 있는 것은, 오직 무의 배경에 항거해서인 것이다. 무가 주는 이 같은 좌절에 대해 우리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라는 경이에 주목한다. 하이데거는 고대의 명제 ‘무로부터 무가 생긴다’를 ‘무로부터 모든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생긴다.’로 수정한다.이러한 강연에서 그는 계산적 사유와 원초적 사유를 구분한다. 계산적 사유는 테크놀로지 시대의 전형적인 사유이고, 원초적 사유는 본질적 사유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복적 사유와 비교를 한다. 진정한 역사적 가능성에로 침투하고, 그것의 개시를 우리의 현 시간에 현재화하는 사유를 일컬어 ‘반복적 사유’를 숙지한다고 말한다. 원초적 사유는 이보다 더 직접적인 것처럼 말한다. 원초적 사유는 사유하는 사람 속에 존재가 생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사유에서는 존재가 기선을 잡는다. 단편성은 극복되고, 존재의 진리와 비은폐성이 보존된다. 하이데거는 이 같은 원초적인 사유의 상사물을 시작(詩作)이나 종교적으로 열렬한 신봉자의 감사함 속에서 본다.시작과 원초적 사유와의 차이는 상상을 환기시키는 작업과 개념적인 구조를 탐구하는 차이다. 양자는 모두 언어와 관계되는데, 철학자의 사유는 언어를 통해 존재와 만나게 된다. 언어는 마치 자연이나 그 현상처럼 존재를 에워싸고 있는 어떤 부분이다. 그 차이란 단지 자연, 즉 인간의 외계에 있는 이 힘이 인간을 유지하고, 추진하고, 격동케 하는 데 반해, 존재는 그 자신 존재자인 인간이 자신을 떠맡아야 할 힘으로 자신 속에 군림한다는 차이가 있다.일상적 세계-내-존재는 존재자와 존재 망각에 자기 자신을 몰두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하지만 진정한 세계-내-존재는 불안과 양심이 숨김없이 말하게 해주는 상황 속에서 흘낏 보는 정도이다. 보다 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예술가, 시인, 철학자, 혹은 신비가나 예언자에게서이다. 그들은 대중에서 고립된 사람들인 것이다.
서 론1789년 7월 14일 당시의 프랑스 혁명은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에서부터 시작된다. 많은 책에서 이러한 부분을 언급하였고 프랑스 혁명의 의의에 대하여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을 통해 전개된 혁명의 진행에서 파리를 제외한 여러 지방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관하여는 간단한 요약만 남긴 채 넘어가 버렸다. 나는 이러한 점이 궁금했다. 과연 프랑스 혁명에서 말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정신이 혁명 당시의 민중에게는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왜 역사서에서는 이러한 점들을 간단히 다루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었다. 이러한 의문을 묻는 과정 속에서 나는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혁명이라 일컫는 프랑스 혁명은 과연 혁명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바스티유의 점령을 기점으로 해서 퍼져가는 농민들의 반란에 대하여 서술해 보겠다. 나로서는 당시의 혁명이 가장 큰 전환점인데다가 혁명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789년을 전후로 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혁명은 내게 실망만 남겨 주었다.본 론7월 14일 혁명 당시의 상황혁명의 시작은 루이 16세가 등용한 칼론느에 의해서 표면적으로 드러났다. 왕실 재정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는 면세의 특권을 침해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을 정식으로 제안한 인물이 바로 루이가 등용한 칼론느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을 제시하자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또한 그 동안 루이 16세의 정책에 대하여 반발심을 가졌던지라 이를 계기로 귀족층은 칼론느의 정책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나섰다. 그리고 삼부회 소집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삼부회 소집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를 알지 못하였다. 단지 이 삼부회 소집을 통해 왕실의 재정 위기를 이용하여 과거에 상실했던 정치 권력을 회복하고, 절대 왕권을 제약하여 귀족 정치를 실시하려는 목적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루이 16세는 이러한 제안을 피동적인 태도로 승인하였다.삼부회 소집은 어떠한 명을 시작하고, 평민이 이를 성취하였다.”는 샤토브리앙의 말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귀족의 반항으로 시민 혁명으로의 길이 열리게 된 계기가 된 것이었다. 귀족들은 당시의 평민들의 상태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삼부회 소집은 귀족들의 불평등적 선출로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해 제 3 신분은 불만을 표하게 된다. 그래서 600명의 제 3신분의 의결권을 주장하게 되고 루이 16세는 이를 허락하게 된다. 물론 루이는 이러한 허락이 어떠한 과정으로 이어질지 알지 못한 체 단지 귀족들을 반대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승인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귀족 대표들은 이를 거부하고 나선다. 제 3 신분의 대표자들은 이에 저항하여 국민의회를 조직하고 테니스 코트 장에서 서약을 하게 된다. 즉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시도였던 것이다. 국왕 루이는 귀족과 함께 남은 성직자 대표들이 국민의회에 참여할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루이는 뜻하지 않는 이러한 사태를 힘으로 제압하려 한다. 즉 국민의회에 참여하도록 권고하고서 군대를 불러들인 것이다.하지만 제 3 신분이 이러한 소문을 듣게 되는데, 3신분들은 소문을 통한 공포로 바스티유 감옥을 탈환하게 된다. 하지만 이 혁명의 주체는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들의 주체로 혁명이 진행 된 것이다. )군대의 집결 소문이 들리자 부르주아지들은 자신이 거느린 사원들을-은행, 주식 중개인등- 모두 군대로 보냈으며 정부의 군대에 맞서도록 재정적 투자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군대와 마찰을 갖게 되고 끝내 정부의 군대는 제 3 신분의 군대에 의해 제지된다. 당시의 희생자 수는 약 1백명 정도가 된다. 군대의 항복은 제 3 신분에 의한 처벌로 이어지게 된다. 평민들은 그 동안 귀족들이 처벌했던 방식으로 처벌을 강행하게 되는데, 사지 찢어 죽이기, 고문, 수레에 메달아 끌기, 화형, 교수형, 그리고 온갖 방면의 잡다한 처형들이 바로 그 처벌들이다. )이렇게 해서 국민의회가 실권을 잡게 되고 왕과 귀족들은 단지 그들의 지위만을 가지게 될 어났을까? 나의 관심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과연 그들에게도 혁명의 의식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을까? 그들에게 바스티유 감옥의 탈환은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였을까?지방에서는 파리의 상황에 대하여 항상 보고를 받고 있었으며 이렇게 보고 받은 자료를 인쇄하여 부르주아지들이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평민층들도 이를 알게 되었다. 때문에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의 소식은 그들에게 승리의 함성을 잇게 하였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듣지 아니하고 바로 봉기에 앞선 도시들도 있었다(이로 보건대 그들의 봉기는 이념적 성격과는 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계속 서술해 가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지방의 제 3 신분들은 상임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민군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성들을 점령해 가기도 했다. 그래서 귀족 세력을 숙청해 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질서는 사라져 갔다. 하지만 농민들은 이성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봉기는 그들이 받는 억압에 대한 반동적 의미가 더 강했던 것이다. )우선 그들에게 가장 크게 부가되었던 짐은 세금이었다. 당시의 재정 상황은 대략 이러했다.“18세기를 통하여 물가가 65%, 지대가 98% 오른 데 반하여, 임금은 22%밖에 상승하지 않아 서민의 생활, 특히 도시 민중의 생활은 어려웠다. 게다가 1788년의 농사는 흉작이 되었고 1789년 봄에는 경제 위기의 현상이 나타나고 파리와 농촌에서는 작은 소요 사건이 일어났다.”)서민들의 생활은 궁핍했다. 아니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짐들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있어서 바스티유 점령 사건은 그들의 손에 있던 농기구를 무기로 만들었으며 지방 도처에서 반란으로 잇게 했던 것이다. 특히 바스티유 점령 후, 지방 농민들은 파리에서의 소식을 고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려 5개월 동안 소식이 없었고, 게다가 농민들의 생활은 더더욱 궁핍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이제 혁명 전후의 부르주아지들의 생활을 살펴보도록 하자.부르주아지들은 어떠한 생활을 했을까?부르주아지들은 상인이나 제조업자, 은행가 법률가 등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풍족한 자본이 있었고 그 자본으로 귀족의 자리를 사는 등-법복귀족- 풍요로움을 누려왔다. 하지만 보통의 부르주아지들은 정치 참여에서 배제되었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혁명의 전개가 급속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평민과 부르주아지들은 같은 신분이었으니 부르주아지의 정치 참여는 곧 제 3 신분의 정치 참여로 알았을 것이기에 평민들은 부르주아지들과 일부분 일체감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부르주아지들은 또 다른 계급임을 이 혁명을 통해 그들은 알게 된 것이다. 실제로 혁명 이후 평민들은 단지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귀족에서 부르주아지들에게로.농민의 반란은 7월 20일 일 드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방방곡곡으로 급속히 번져 마침내는 왕국의 가장 먼 끝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반란이 급속하게 번진 이유는 유언비어에 의한 과장 때문이었다. 도둑 떼가 작물을 베어 넘기고, 도시로 진격하고 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이 돌았던 것이다. 이러한 ‘대공포’는 농민의 봉기를 더 확산케 만들었다. 이러한 농민의 봉기들이 이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쉽게도 평민들은 너무나 순진하였다는 것이 이러한 사건의 전개를 통해 드러날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농민들이 부담해야 했던 세금에 대하여 알아보자.장원 영주는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는 재산을 관리하고 곡물과 가축을 팔아 생활하지 않고 수없이 많은 세금, 면역세, 사용료를 받아 살아갔다. 18세기 중에 이르러 전반적인 귀족의 재등장과 관련하여 흔히 ‘봉건적 반동’이라 부르는 현상이 일어났다. 장원 영주들은 상승하는 생활비에 당면하고 전반적인 물질의 진보 때문에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사용되지 않던 옛날의 세금을 부활 시켰다. 토지 임대와 소작 계약도 또한 농민들에게 더 불리하게 되었다.)이러한 지방민의 가중되는 세금은 반란으로 상임 위원회와 국민군에 의해 저지되었는데, 이러한 조직의 배경은 부르주아지들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혁명이후 자신들이 귀족의 영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거기에서 나오는 봉건적 조세를 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반란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은 그들에게 매우 큰 걱정거리로 전해졌던 것이다. 평민들에게는 정말이지 혁명이라 불릴 수 없는 것이다. 앙샹레짐의 몰락이 근대로 이어지면서 현 자본주의의 형태를 만들어 주었지만 근본적인 사회 변혁은 어려웠다고 생각된다. 부르주아지들도 자손에 의해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그들은 상임 위원회와 국민 군을 조직해 지방에 파견하고 그 반란을 저지 시켰다. 수백 명을 죽였으며 포로로 잡았다. 또한 그 포로 중에서 수십 명을 처형 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저지를 통해 농민들을 안정시키지는 못했다. 재미있게도 당시의 지방 반란을 안정시킨 것은 웅변술이었다.평민층은 자신들이 싸우는, 자신들의 반란을 그 웅변술에 넘기고 말았던 것이다. 브르따뉴 대의원 드 강 드끄랑갈이 농촌 사람의 슬픔에 대하여 말한 내용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신사 여러분, 공정해 집시다. 우리의 염치뿐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 자체에 대한 모독인 그 고문서들을 여기에 가져오게 합시다. 짐 나르는 짐승처럼 사람에게 쟁기를 지라고 요구함으로써 인류에게 굴욕을 안겨 주는 그 고문서들을 가져오게 합시다. 쾌락을 사랑하는 영주들의 잠을 개구리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연못가를 두드리면서 밤을 새우라고 인간에게 강요하는 고문서들을 가져오게 합시다. 신사 여러분, 이 계몽된 세기에, 이 수치스러운 양피지들을 조국의 제단에 희생으로 바치기 위해 그것을 태울 장자더미를 만들어 거기 불을 지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누가 있겠습니까? 신사 여러분, 일체의 봉건적 조세를 임의로 상환할 수 있는 금납제로 대치할 때까지, 그리고 그 미세한 흔적조차 인민의 정당한 불평의 원인이 되는 봉건적 조세가 여러분이 공포하게 될 법률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여러분은 광란의 ”)
1.칼빈의 생애(성격)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 사람의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그 사람의 성장과정과 성격, 한 사람의 생애를 고찰해 보는 일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칼빈의 생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1536년까지 그는 편력하는 학도였고, 1536년부터 1564년까지 제네바를 거점으로하여 그의 광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개혁파 세력의 신학체계를 형성하였다. 그는 1509년 북부 프랑스의 피칼디의 노아이욘에서 태어났다. 칼빈은 대학에 가기 전에 받을 수 있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으며 대학에 가서는 휴머니즘과 법률을 연구하고 공부하였다. 이러한 교육적 기반이 칼빈이 종교개혁자로서 기독교의 신학체계를 형성하는 밑 바탕이 되었다.칼빈은 1533년 연말 어느 때 회심을 하고 종교개혁의 사상을 받아 들인다. 칼빈의 회심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찾아 볼 수 없지만 그가 공공연히 개신교를 지지하기 전에 얼마동안복음주의적 입장을 알고 있었으며 루터나 쯔빙글리의 영향을 받고 회심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1536년 봄 그는 바젤에서 그의 최대의 저작인 『기독교 강요』를 완성하였다. 26세의 나이로 완성한 『기독교 강요』는 단지 여섯 장(chapter)뿐이었다. 이것이 계속 보안되어 1559년최종판을 낼 당시에는 4부 80장으로 신학의 대 논문으로 출판되게 되었다.종교 개혁가로서 칼빈은 한 가지 포고를 통과 시켰는데 이 것은 성찬식은 일정한 때에지킬 것, 어린이를 위한 신앙 문답을 준비할 것, 회중이 찬송가를 부르기를 인정할 것, 엄중한 규율하에 있는 자라도 제명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포고한 것이다. 또한 “교회 조례”를 발포하여 효과적인 조직을 이룩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국가에게 더욱 엄중한 벌을 가하게 하였다.칼빈은 1564년 결국 많은 병들과 건강의 악화로 죽게 되었다.칼빈은 제네바와 구라파의 사건들 와중에서 방해받지 않는 평범한 생활을 결코 경험 할 수 없었다. 날마다 부딪히는 것은 수고스러운 것들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자고 노는 동안에도 그는 읽고 쓰고 기도했다. 그는 후에는 한번도 왕성한 건강을 즐겨 보지 못했다. 그는 자기 힘의 한계까지 일 하기 위해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칼빈이 성급하고 격렬한 기질을 가진 불관용적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칼빈이 이러한 태도를 보였던 것은 사적인 원수가아니라 복음의 대적들이었던 것을 볼 때에 칼빈을 불관용적인 사람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잘 못 일 수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절대적인 믿음의 소유자 였으며 미적감각도 뛰어났으며 삶을 즐길 줄 도 알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부인하면서 진심으로 하나님 뜻을 붙잡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금욕적인 생활과 자신에 아주엄격하였다.한번도 성직에 임한 적이 없는 메마르고 온건한 학자이며 우수한 설교가였던 그가 현대사회의 영적 발달에 주었던 영향이란 그 약한 육체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2.역사적 중요성칼빈은 루터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자신을 루터의 계승자로 인식하고 있었다.그는 기독교의 진정한 교리와 교회의 개혁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너무나 잘 표현했기 때문에 후일 많은 사람들은 그의 제자와 모방자가 되는 것에 만족했다.『기독교 강요』는 4C에 걸쳐 개혁교회들의 필수적 신학 교과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것은 역사가들에게는 종교개혁의 사상을 이해하는 가장 훌륭한 열쇠요 신학자들에게는 여전히기운을 돋구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만일 칼빈의 영구적인 영향력이 없었더라면 위그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없었으며, 영국의 청교도 주의를 형성시킬 수 없었을 테고, 뉴잉글랜드특성의 기반도 이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모든 나라에서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인들의 권리에 간섭하려는 세속권력의 시도에 대항해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었다. 복음적 신앙에 대한 그의 왕성하고 짜임새 있는 확증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그 반대 세력으로부터 보호했다.만일 칼빈의 영향이 없었다면 사실상 서양의 역사는 몰라 볼 정도로 달라졌을 것이다.칼빈주의는 온전히 분명치 않은 방법으로 서양의 정치,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3. 예정정의 : 도덕적 이성적 합리적 피조물인), 천사와 마귀,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포함한다. 작정에 창조, 예정, 섭리,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1) 예정의 대상예정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택자의 구원이다. 또 죄인에 대한 심판으로 그의 공의를 나타낸다. 그냥 공의가 아니라 죄에 대한 공의이다. 이 앞에 타락이 전제 되어있다. 왜냐하면 구원에로 혹은 멸망에로의 일이니까 죄가 전제되어 있다. 이성적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으로서 죄를 전제하고 이루어진 작정이다. 그래서 일부를 은혜로 천국에 이르도록 하시고 일부는 공의가 이루어지도록 작정하셨다.2) 예정의 두 부분① 선 택 : 선택이란 인류 중 얼마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선택에는 죄가 전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일부는 죄에서 은혜 입혀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일부는 죄과대로 내버리시므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케 되어 은혜를 찬양하고 공의의 도가 성취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만인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이스라엘의 선택, 특별한 직무와 특별한 봉사를 위한 인물의 선택, 개개인의 선택은 다 구원과 봉사에로 선택하셨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봉사에 더 강조가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의 작정 때문이다. 그런데 신약에서 개개인의 선택은 개인의 구원과 봉사에로 선택되었다.② 유 기 : 유기란 하나님의 은혜의 특별한 작정 속에서 어떤 사람을 간과하시고 그들의 죄과를 따라 벌하시려는 영원한 목적이다. 죄에 대한 그의 공의가 바로 집행되게 하시려고 일부를 은혜 베푸심에서 간과하심이 유기이다. 그러므로 유기는 구원의 은총을 베푸심에 있어 어떤 사람을 간과하시고 그들의 죄를 따라 그들에게 벌하시려는 이중적인 목적이 있다.선택과 유기에는 죄가 전제되어 있어 일부를 지나가시고 죄에 따라 공의의 심판을 집행하신다.예정교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불공평의 책임을 지게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그릇된 견해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할 권리가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구원치 않으셨다해도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4. 작정경륜이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의 지성과 의지로 미리 생각하고 계획하고 작정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전 의식적 작업을 말한다. 그리고 작정은 경륜 중에서 생각하고 의논되고 고안된 것 중에 실현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명령형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작정이다. 따라서경륜은 - 총괄적인 것작정은 - 구체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확실하게 실현될 것을 위해 명령 형태로 결정되고 작정된 것을 말한다.모든 것이 즉 창조, 구속, 섭리된 것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계획되고 작정되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작정이다. 작정되지 않은 것이 발생된 것은 없다. 우연적 발생은 없다. 창조 작정도 그 창조의 내용과 그 전개 등을 다 미리 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할 모든 일들을 미리 정하시는 그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영원하신 목적이다.하나님의 작정은 여러 가지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으나 실질상은 단일한 작정이다. 작정의 실제적인 내용은 일체의 가능한 사물에 대하여 가지시는 무한한 지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발생할 사건들만을 그의 작정에서 구체화 하신다.그러면 작정과 타락은 어떤 관계인가? 타락이 경륜에 내포되어 타락의 주변환경이 제공되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서 발생하는 것은 없다. 죄가 경륜에 포함되면 죄의 과격성이 약화된다.그러나 타락을 작정하셨다기 보다는 허락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허락적 작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동인으로서가 아니라 허락하신 것이다. 허락을 작정하신 것은 타락을 통해 자기의 영광과 더 깊은 본성을 계시하기 위해서이다. 타락이 경륜안에 들어 있어도 책임은 인간이 진다.베르쿠버(Berkouwer)에 의하면 죄는 생소하다. 논리적으로 설명 안되고 인과적으로도 해명할 수 없다. 죄를 하나님에게서, 창조에서 도출다. 모든 일에 죄는 생소하며 논리적으로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창조의 완전성에서 타락을 도출해 낼 수 없다고 한다.이것은 하나님의 책임 문제를 해결하는데 좋은 방안이기는 하나 하나님을 방관자로 만드는 것이다. 순전히 역사상에서 모든 일이 생겼다고 하는 것을 타락후 선택설이라 하며, 이 설은 타락을 전제하고 선택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기독교의 하나님은 로마교회의 하나님과 다르다. 로마교회는 하나님이 존재의 근원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다. 존재 일반이 그 배후에 서 있다. 모든 개별자들은 존재에 동참하는 등급에 따라 존재가 서 있는 서열이 정해진다. 존재에 많이 동참해 있는 것은 신에 가까이 가 있다. 왜냐하면 존재에 많이 충만해 있으니까 그렇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정점으로 하고 위계적으로 선다. 신과 인간이 동참하니까, 신이 궁극적이고 인간이 의존적이지 않고, 다 정도의 차이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로마교회 신학의 배경이다.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신이 존재의 근원이며 원천이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서 존재를 부여 받았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로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시간의 경과를 지켜보시므로 아시는 것이 아니다.5. 신적 작정의 특징경륜과 작정은 하나님의 존재에서 유래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존재만큼 영원하다. 창조는 시간에서 이루어 졌어도 창조에 대한 경륜은 영원하다. 영원에서 창조가 이루어질 때 시간이 형성되었다. 그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다. 창조가 진행 될 때 물질계가 출현하면서 시간이 함께 출현하였다. 그 이전에는 영원이다. 모든 경륜과 작정은 영원하고 불변적이다.6. 작정교리에 대한 반대설작정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역사하는 것을 말하는데 인간의 구원이 중요한 요소이며 작정 수행의 첫 번째 과정이 창조이다. 그러므로 작정은 창조보다 먼저이다. 그런데 재래 신학에 의하면 타락에 있어서하나님은 먼 원인이고 직접적인 원인으로 인간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계이다.
보고서지속 가능한 운동에 관한 논의목 차1. 내용 요약1) 겉도는 말, 헛도는 삶2) 저자란 무엇인가?3) 텍스트의 역사성과 당파성4) 문화읽기는 왜 어려운가?5) 예비지식인의 책읽기 반성6) 삶을 이야기하는 교실7) 책에 대한 나의 소견2. 지속 가능한 운동에 관한 논의1) 서론2) 본론3) 결론1. 내용 요약1) 1장 겉도는 말, 헛도는 삶.먼저 저자는 자신이 왜 ‘삶 읽기’에 집착하는지 밝힌다. 그것은 인류가 그 동안 살아 남은 중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자기 성찰과 자기 진단, 즉 삶 읽기가 그 이유라고 밝힌다. 그리고 자기성찰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우리’에 대해 ‘뿌리가 뽑힌 상태’로 비유함으로 우리 자신을 제대로 성찰하고 규정할 말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규정을 내린다. 그런 후 이제 ‘책읽기’와 연관시킨다. 즉 삶읽기와 글읽기는 깊은 관련이 있기에 그 삶 읽기의 한 방법론으로 책읽기를 말한다. 그리고 그 책읽기의 목적을 또한 밝힌다. 그것은 개인적인 삶 읽기와 연관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우리의 책읽기가 그 동안 삶 읽기와 분리되어 있다는 문제점에서 출발하여 이제 책읽기와 삶 읽기가 서로 상관이 있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도를 한다.그에 앞서 저자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왜 삶과 책읽기가 서로 분리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은 우리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와 사상들이 무도 서구 중심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문화상대주의’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설명한다. 즉 이 개념은 서양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서양과 우리는 엄연히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 속 깊이 제국주의의 결과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의 인식체계마저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그는 질문을 던진다. ‘왜 지식인인가?’ 그는 이론에 대한 논의를 하는 사람으로서 지식인을 정의하고 그 지식인이 만들어 내는 이론이 현실을 보다 잘 보게 2장 저자란 무엇인가?그는 기존의 소설의 범주를 크게 깨뜨리고 있는 이인성의 와 이라는 책을 선택하여 학생들의 책읽기와 경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책읽기 전반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여기서 저자는 매우 중요한 것을 밝힌다. 그것은 ‘틀’이다. 우리가 가진 기존의 ‘틀’을 깨는 이 책을 통해 불안한 생각들을 갖는 학생들의 글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이 그 틀에 매이는 편인지, 아니면 깨뜨리는 편인지를 밝히고 자신의 삶 읽기와 책읽기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는 점을 밝혀준다.여기서 우리는 ‘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틀은 우리의 교육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보편 타당한 진리는 책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는 하나의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틀은 이인성의 책을 통해 깨어지는데 저자는 ‘동화’를 끌어들여 어린아이 때부터 길들어진 틀이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가 가졌던 기존의 ‘틀’은 저자에 대한 우월성이4다. 하지만 저자-이 책의-는 이인성의 소설을 통해 ‘저자’가 보편 타당한 진리를 간직하지 못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즉 우리의 전제된 틀을 부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독자 역시 피동적 책읽기가 아닌 능동적 책읽기가 이루어져야 함을 밝힌다.3) 3장 텍스트의 역사성과 당파성동화의 원본과 현재의 동화는 다르다?. 저자는 동화의 원본을 밝힘으로서, 어린아이의 생각의 틀을 만들었던 동화의 원본을 밝힘으로서, 동화가 역사적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생가그이 틀은 성장한 우리가 책을 읽으며 갖는 틀과 큰 차이가 없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그 동안 믿었던 것들, 그것에 대한 맹신, 시대성을 동반한 동화가 현재 우리에게 동심의 세계를 주장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현실과 분리를 일으킨다. 따라서 독자는 글을 주체적으로 읽어야만 한다. 책에 대한 맹신으로 읽어서는 안되는 것이다.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가진 고정 관념을 설명한다. 첫째로 “동화는 꿈을 심어주는 ’꿈 같은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과에 대략의 느낌으로만 받아들였으며 이 글을 통해 저자가 밝히는 바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이론에서 명료한 대안까지를 기대하는 의존 심리와 글의 논리성과 객관성에 대한 논란이 푸코에 대한 학생들의 토론과 쪽글 애용에 주제였다. 여전히 역사성을 바탕에 둔 상대주의보다는 절대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규범적인 사고가 개방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강하게 억제하고 있음을 여기에서 보게 된다.’라는 표현을 통해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문화 읽기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문화 읽기란 상대주의적 입장을 전제로 한다. 모든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한다는 획일주의적인 문화 결정론이나 문화는 가시적인 체제, 즉 토대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극단적 유물론의 입장을 벗어나지 않고서 삶을 읽어낼 수 없다.’.이러한 시도는 학생들이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이론에 대한 태도를 밝히려는데 있다. 그래서 학생들이 하나의 이론에 대한 맹신을 버릴 것과 주체적 책 읽기를 다시금 주장한다. 간접적으로.5) 5장 예비지식인의 책 읽기 반성.학생들이 밝히는 글의 특징을 일반화 한다. “ 1)교과서 외 책 읽기가 거의 불가능한 교육체제에 순응한 교과서적 책 읽기, 2) 대학 서클에서 새로운 책 읽기를 시작하면서 맛보게 되는 매력과 저항들, 그리고 3) 여전히 자기 삶을 회피하고 ‘공부거리’로 책을 읽는 버릇으로 유형화 해 볼 수 있다.”또한 시험을 위한 책 읽기의 특성으로 1) 이론과 현실이 분리되는 책 읽기의 전형, 2) 암기력에 바탕을 둔 기계적인 사고를 하게 될 뿐 다른 식의 사고, 곧 비유적인 사고라든가 독창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들은 커다란 틀 안에서 개념과 기준이 먼저 주어져야만 머리를 굴린다. 3) 입시 위주의 교육과 병행하여 이들이 받는 이데올로기 교육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삶이 담기지 않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벽한 체계를 갖춘 책’이 아니면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권위주의적 목소리를 자신에게 필요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가는 작업은 비판적 성찰을 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이 종말론적 시대에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가능성‘을 확보해 가는 것과 직결된 행위이기도 하다.’6) 6장 삶을 이야기하는 교실그 동안 우리의 사회의 모습을 살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어떻게 책을 읽으며 어떻게 삶을 읽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명료한 답을 볼 수 없었다. 문제점을 드러내었지만 그 대체 방안으로 말하는 책 읽기의 방법은 이 책의 양에 비해 너무도 부족하고 구체적이지가 않는다. 이 책이 말하는 바 삶 읽기와 책 읽기의 만남, 그리고 현실 속에서 그것을 가로 막는 장애들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그러한 장애들을 가져온 인식의 체계, 즉 틀은 그렇게 부정적 역할만 했는가? 우리의 ‘틀’을 일반화하는 작업에서 사상되어진 측면은 무엇인가? 저자는 일반화, 보편타당한 것에 대한 추구가 우리의 인식의 ‘틀’로서 자리를 잡는다는 비판을 했다. 그리고 그 동안 사상되어진 삶에 다시 눈을 돌릴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저자 자신 역시 하나의 큰 오류를 범한 듯 싶다. 우리의 교육을 일반화함으로서 사상된 것에 눈을 돌리지 아니한 면을 말이다.7) 책에 대한 나의 소견비판이 비판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비판을 통한 해결 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읽고 느낀 것은 비판 속에서 해결되어진 내용들이 너무도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성격상, 그리고 우리의 사회가 그러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우리는 회의 속에 이 사회를 살아 갈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끝없이 물고 물리는 질문들은 내게 해답 없는 의문만을 남긴다.책 읽는 방식에 대한 나의 방법론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너무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고 이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평소에 책을 읽으며 가졌었던 나의 태도를 정리해 본다.책을 접할 때는 객관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나와 책과의 거리를 우선 둔다. 그리능동적 태도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이상으로 책에 대한 내용 정리와 나의 책읽기 방법들을 소개했다. 이제는 “지속 가능한 운동에 관한 논의”라는 주제로 이 책의 내용과 더불어 나의 조그만 소견을 말하고자 한다.2. 지속 가능한 운동에 관한 논의.1) 서론우리의 인식의 ‘틀’은 텍스트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전제되어 왔었다. 이로 인하여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은 새로운 이론을 접하게 되고 그 이론에 대한 맹신적인 태도들이 드러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소위 학생운동이다.( ‘지속 가능한 운동에 관한 논의’ 중에서 나는 ‘운동’이라는 부분을 학생운동이라는 부분으로 한정하였다. 그리고 사회운동에 까지 넓혀 연결하여 보았다.)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이에 대한 답으로서 나는 ‘이상’이라고 답하고 싶다. 사람들은 그 ‘이상’에 의해 살아가고 그의 삶의 형태들이 그 ‘이상’에 의해 변하여 간다. 하지만 사람들이 갖는 ‘이상’이 모두에게 적용되어 그 이상이 실현되는 사회가 현재의 사회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말한 ‘이상’에 대한 성격 때문이다.2) 본론‘꿈’과 ‘이상’은 서로 다르다. 우선 사전적인 의미를 본다면, “꿈은 실현시키고자 하는 바람”이라고 정의되어 있으며 “이상은 각자의 그 지식, 경험의 범위 안에서 최고라고 생각되는 상태”라고 정의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나의 이론을 펴기 위해 ‘꿈’과 ‘이상’에 대해 다른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우선 꿈은 ‘객관적 현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바람’이라 정의하고 이상은 ‘객관적 현실이 토대가 되어 실현 가능성이 높은 바람’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사람들은 꿈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꿈은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이 결여된 바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교육의 ‘틀’이 만들어낸 하나의 잘못된 현상이다. 보편화되고 일반화된 바른 사회에 대한 바램과 .
{허무주의는 한마디로 삶에 대한 확실한 태도의 결여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생의 목적이 상실됨으로 인해 나타나는 삶의 무의미를 말한다. 이러한 허무주의가 어떻게 서구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배경으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1) 서구사회가 이제는 더 이상 삶에 아무런 의미도 제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삶의 고통을 치룰 만한 어떤 가치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제도화한 모든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자신에게 가치있는 제도는 없기 때문이다.2) 모든 사람들이 용납하는 방식의 가치를 만들 수 없다는 인식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가치추구는 모두가 다르기 때문이다.그리고 우리 사회의 특이한 현상은 이 허무주의가 권력과 연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과, 어떠한 붕괴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경제나 기술의 철벽같은 구조적 틀을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 책임기독교는 허무주의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1) 절대적 초월 : 하나님을 절대적 타자로서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 세상 밖으로 철거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오직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할 뿐이다. 인간의 가치나 효용성, 존경이나 복종의 모든 지표나 소행들을 무가치하게 만들었다.2) 비신성화 :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에게 의미를 주기 위해 신성한 것을 고안했 지만 기독교는 그 신성화를 철저히 파괴했다. 문제는 파 괴한 기독교(기독교는 종교가 아니기에)가 그렇다할 종교 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인간은 이러한 신성화 속에서 도덕을 만들어 냈는데 비신성화는 곧 도덕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의 진 리는 하나님의 계명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을 절대적 타자로서 만들었으며, 인간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자연--곧 자신들이 신성화했지만 기독교가 이를 비신성화 함으로 인하여-- 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즉 자연은 단지 유용하다는 것 외 에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3) 죄 : 기독교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인간의 죄인 됨에대하여 강하게 강조하였다. 즉 인간은 어떠한 진, 선, 미 도 행할 수 없는 존재로서 오직 악만을 행하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하나님은 은혜가 있다. 기독교 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결여시킴으로 인하여 오직 악만을 행하는 인간, 하나님은 절대적 타자의 위치를 각 각 갖게 한다. 여기에 대한 현상으로 첫째, 죄인인 인간 에게 가차없이 멸망을 선포하는 것과, 둘째 기독교의 세 속화이다(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관을 갖게되고, 인간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전혀 바랄 수 없다는 확신 가운데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다).2. 모순 -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는가?기독교 신앙은 철저한 반허무주의이다.1) 창조를 통해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것과 창조주와는 사랑의 관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어떠한 결정 에도 하나님은 방해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허무주의와 반대)2) 역사는 의미를 부여받는다. 즉 역사가 의미를 내재적인방법으로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수용한다는 사실 에 기인한다. (역사는 반복, 끊임없는 전진, 피할 수 없는 엔트로피, 사회주의를 향한 불가피한 전진, 등의 해석을 거부한다.)3) 궁극적 작업 : 인간성의 계속적인 실현(하나님은 이 실현을 보장하시면서 그 안간성을 용납하시고 구원하시며 다시 취하시는)에 궁극적 작업이 있다.(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인간의 책임이다를 거부)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약속과 성취, 소망과 실현의 상호작용, 우리는 어떤 구체적 사황에서 하나님의 한정되고 세부적인 약속아래 있는 점이다. 이러한 과정을, 즉 변증법적 과정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은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오는 계명, 명령, 간섭(구속적이지도 최후의 것도 아닌)과 인간의 주도적 행위 사이의 결합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