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진*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
검색어 입력폼
  • 한국의 독점자본과 미국의 대남 신식민지적 정책의 광주민중항쟁 필연적 귀결 연구
    미국정치 소논문한국의 독점자본과 미국의 대남 신식민지적 정책의광주민중항쟁 필연적 귀결 연구Ⅰ. 문제제기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이하 광주)의 유산 속에서 현대를 살고 있다. 군부독재에 맞서 투쟁한 피 끓는 5월의 현장은, 80년 이후 다수 운동권을 탄생시킴과 동시에 씻을 수 없는 원죄 의식을 안겨주었다. 매캐한 최루탄을 마시고 독재에 항거한 마침내, 87년 6.29선언 이후 형식적이나마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98년 군사 독재에 저항하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광주는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그러나 광주에 대한 왜곡도 만만치 않다. 광주에 간첩이 들어왔다고 이상한 소리 하는 우익들의 공세는 귀담아들을 가치가 없으므로 다루지 않겠다. 여기서 다루려는 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등 자유주의자들의 왜곡이다.현대에 들어와서 모든 학문이 세분되었다. 요즈음에 학자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자신의 분야 외에는 문외한인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옛 전인(全人)교육을 표방하던 시대에는 모든 학문과 예술을 동시에 배웠고, 학문 간 유기적 이해가 가능했다. 그러한 이해를 통해 학문을 집대성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맑스다. 우리는 맑스를 경제학자, 철학자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만, 맑스야말로 철저히 과학자였다. 우리가 흔히 경제학 저서 중 가장 많이 팔렸다고 말하는 자본론은 다윈의 진화론과 뉴턴의 방법론이 녹아들어 있다. 이런 인식을 토대로, 내가 자본론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서문에 쓰인 문구다. 우리는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어 있다고 보기 십상이나 정치와 경제만큼 긴밀한 연관을 가진 학문도 없다.자유주의자들의 왜곡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은 단순히 광주를 독재에 항거한 것으로만 기억한다. 노동자, 농민, 학생, 쁘띠 부르주아가 주도하여 독재에 항거한 것은 사실이나 그 이면에 깔린 독점자본과 미국의 매판 자본가들의 노동자민중 착취에 그 원인이 있다는 사실은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명백히 왜곡이다. 그들에재산 처리가 가장 화두였다. 그러나 남한에 주둔해있던 미국의 입장에서 농지개혁은 공산주의와 급진적 민족주의에 대항할 보루를 구축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따라서 농지개혁은 겉으로 민주주의를 가장한 채, 반혁명의 과제와 사유재산권 원칙을 보호하는 범위에서 진행되었다. 끊임없는 충돌 끝에 남한에서는 단독정부 수립 후 1950년 3월에서야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 6.25전쟁 발발 직전에 시행되었다. 이는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농민보다는 지주들에게 유리한 개혁이었다. 왜냐하면 해방 당시 전체 인구 77%가 농민이었고 그중에서 85%가 토지가 없는 소작농이면서 미미하게 있는 빈곤한 농민이었기 때문이다.매판 자본) 양성도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일본인 재산을 미군정이 귀속시킨 이후에 귀속재산의 재건 운동 관리인을 선정하는 데에 미군과 한민당, 이승만이 개입하여 그들에게 밀착한 매판 인사만 선정했기 때문이다. 47년 이후 미군 고문관의 재량 하에 이뤄진 적산) 불하도 친미 인사에게 거의 무상에 가까운 가격을 처리했다. 결과적으로 미군은 민족 자립 경제 토대 구축이나 민중 복리에 힘을 쓴 것이 아닌 남한을 계속 자신의 관리 아래로 두기 위한 친미적 자본가 계급을 양성한 시도를 계속해왔다고 볼 수 있다.당시에 양성된 자본가 계급은 귀속재산 불하)에 따른 미국의 증여와 원조 때문에 급성장했는데, 그러나 미국의 원조는 일부 구호 원조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물자이건 자금이건 그것을 구매하려는 사람으로서는 무상이 아니었다. 52년에 체결된 마이어 협정에서는 한미 합동 경제 위원회에서 원조 물자의 무상 분배 혹은 유상 판매 여부를 결정한다고 되어 있다. 또한 판매용 원조에 관해선 “설비 및 물자를 위원회가 건의하는 가격으로 판매하되 가능한 한 판매 대금을 징수한다.”고 돼 있고, 판매 대금-이 대금이 대충자금이다.-의 사용은 미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기업 설비에 필요한 자금이나 원료의 구입을 원조 자금이나 원조 물자에 직접 의존하는 경향과 그 %5.2%3.9%1.9%4.8%∴ 한국 은행, 한국의 국민 소득(1973)이러한 위기에 대응해 3백 산업(제분, 제당, 면방직)을 중심으로 독점 자본은 중소기업 통폐합, 수출 지향 등의 전략을 채택하지만 이도 한계를 가졌고, 3백 공업의 가동률은 점점 떨어졌다. 그리고 가동률의 저하와 독점 자본의 이윤율도 급속히 하락했다. 이러한 경제 위기는 원조 경제 자체의 모순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은 원조 경제의 재생산 과정에서 누적된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리고 이에 파생되는 국내 유효 수요 부족과 시설 및 원료를 미국 원조 자금에 의존하여 이들을 도입하는데 따르는 가격 조건상의 불합리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요인에 의하여 한국의 독점 자본은 미국의 원조에 의한 소비재 생산에서 더 이상 이윤을 충분히 실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고 독점 자본은 이러한 벽을 돌파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모색한다. 그것은 다른 공업 부문에 진출하는 것, 기존 부문 제품의 수출 증대이다. 이승만과 장면 정권은 이러한 자본 축적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고 5.16을 통해 등장한 군사 정권은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 독점 자본의 요구를 실현해 가기 시작한다.Ⅴ. 70년대 국가독점자본주의앞서 언급대로, 미국은 일본에도 원조를 떠넘겼다. 그리하여 65년 반민족적 한일 회담의 조속 타결됐고 일본에서 차관이 도입되었다. 외자 도입은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서 자본 축적을 용이하게 하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고 이후 월남 특수, 수출 증대 현상이 결합되면서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수출은 목표액을 초과 달성할 만큼 증대되었으나 수입 역시 많이 늘어났다. 63년 3억 6,700만 달러에서 70년에는 6억 2,250만 달러, 71년에는 8억 4,500만 달러로 급속히 증가하였다. 결국 대외 채무만 누적되었다. 이후 68년 경제 위기가 미국에 불어 닥친 후 그에 따른 외자 조달, 선진 각국의 보호 무역 등으로 수출 곤란이 일어났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차관 기업’ 부실화 여론이 일정부의 적극적 지원 정책으로 중화학 공업의 투자가 늘어 철강, 조선, 기계, 전자, 화학, 비철금속 등 6개 분야가 전략 업종으로 선정돼 생산과 수출에서 이 분야가 중요한 지위를 점하게 된다. 그러나 빠른 성장의 이면엔 노동자들의 착취가 급속히 강화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광범한 잠재적 과잉 인구를 안고 있는 농촌 인구를 도시에 끌어냄으로써 주위에 과잉 인구의 압력을 유지해 저임금을 유지했으며 노동 시간 또한 극단적으로 늘었다. 노동 소득 분배율 면에선 70년 46.6%였던 것이 80년에는 30.0%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자본가의 노동자 수탈이 더욱 가속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 재편은 노동자들에겐 더욱 재앙이었다.중화학 공업의 형성과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 대자본 중심의 고도 축적 과정은 70년대 말에 이르러 구조적 모순을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79년 2차 오일쇼크와 그에 이은 세게 공황의 도래로 위기가 더욱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여파로 중화학 공업 형성의 축을 이룬 조립 금속 및 기계 장비 부문의 생산 감소는 현저했다. 공장 가동률이 40~60%에 불과했고 급기야 80년에는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2차 오일쇼크에 따른 경제 위기는 국가의 특혜적 지원을 조건으로 한 재벌 대기업 중심의 자본 축적이라는 구조적 특질과 결합함으로써 더 역풍이 거셌는데, 국가 지원에 따라 과잉 설비 투자를 하고 난 후 협소한 국내 시장을 벗어나 해외 수출에 집중하다 보니, 세계적 공황이 밀어닥치면 독점자본이 허우적거리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리고 이는 한국 자본주의 위기에 그치지 않고 체제까지 흔들어 놓았다. 79년 YH무역 농성사건, 부마항쟁 등 기층 민중들의 저항이 거세게 밀려왔고 유신 체제의 상징인 박정희 정권이 몰락했다.80년대 이후 독점 자본은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더욱 강력한 노동 착취를 통해 구조적 모순을 다시 해결해 나가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축적 체제를 다시 재편성하기에 이른다.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미국의 경제 변화에주장은 85년 수십 명의 대학생이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난 뒤 나온 주장과 일맥상통하다. 물론 85년에는 단순히 광주뿐만 아니라 한반도 핵문제에 대한 공개질의를 미국행정부에 제시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로 대중에게 전달된 반핵의 메시지라는 주장도 있다. (이삼성, 광주민중봉기와 미국의 역할) 이러한 행동들은 단순히 학살을 지시한 전두환 일당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제까지의 남한 민중과 미국 간의 첨예한 대립과 모순 구조에서 문드러지고 또 문드러졌던, 그리고 은폐됐던 한미 관계의 본질이 자각되어 실천적으로 표출된 사건들이었다.문부식은 광주학살을 미국이 ‘묵인’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독재정치의 후원자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랬을까. 이는 미국의 비밀문서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1997년 9월에 비밀 해제된 문서(12월 12일자)에는 12.12 쿠데타에서 전두환은 이미 쿠데타 사실을 미국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참모 중 하나인 닉 플랫이 상관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안보담당보좌관에게 보낸 문건에 의하면, ‘글라이스틴 대사와의 전화 통화에 의하면, 반란자들(Insurgents)은 (한국)군부 내의 인사를 교체하는 선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한정시키기로 동의한 것 같음.’,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를 조심스러워하고는 있지만 한국의 상황은 군사 쿠데타로 볼 수 있음. 강경파로 알려진 전두환의 손에 권력이 쥐어져 있는 것만은 분명함.’ 이라고 적혀 있다.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 이미 미국은 전두환의 거사와 요구 내용까지 알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전두환은 거사 직전에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관에게 자신의 계획과 목적도 밝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12.12 쿠데타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또 광주민중항쟁의 앞서 전두환은 여러 도시의 소요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 미군 사령관에게 통지했다.(advised)“한국군이 우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아래 병력 이동을 미군 사령관에게 통”
    사회과학| 2012.12.12| 9페이지| 2,000원| 조회(86)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08일 수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1:08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