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문화와 철학,그리고 우리의 미래2010101655김혜연현재 문화의 문제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필자는 현대 세계가 거의 서양문화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 서양의 각국은 원래 서양문화의 영역이니 말할 나위가 없고, 동양의 각국을 말하자면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운용한 나라는 그 민족, 국가가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고 서양문화를 수용하지 않은 나라는 서양문화의 강한 힘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정신적 측면, 사회적 측면 물질적 측면을 막론하고 현재 우리의 생활이 거의 서양문화로 가득 차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현대는 서양문화의 절대적 승리, 절대적 정복의 상황에 있다고.그렇다면 미래에 우리의 동서 문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될까?필자는 미래의 문화에 대해 현재의 상황의 방향을 보고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짚어본다.현재의 서양문화가 두드러지는 변화를 보이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변화를 세 측면으로 나눠 미래의 문화에 대한 제시를 시도한다. 그는 변화의 세 측면을 사실, 견해, 태도로 나눈다.먼저 첫 번째 측면인 사실의 측면이란 바로 경제현상을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접하는 현재의 사실은 경제현상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사실의 변화는 매우 중요하다. 경제현상에 기반을 둔 사실의 변화 이후에는 문화가 변화가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제 형태는 과거의 매우 합리적이었던 소비본위의 중세의 경제체제를 무너뜨리고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된 원인으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기계의 발명, 분업, 자유경쟁이 그것이다. 기계는 서양인들의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여 자연을 정복하려하는 욕구와 이지적이고 분석적인 두뇌로부터 탄생한 과학의 결합으로 발명되었다. 즉 기계가 나타난 것은 바로 서양인의 인생 태도에 의해 고스란히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인간의 힘으로 돌아가던 기계들이 현대로 올수록 자기 스스로 중심에 서기 시작했다. 이전의 소자본, 가족적, 수공업적이었던 경제는 이제는 모두 기계적, 공장적, 대자본적으로화를 야기한 또 하나의 계기로 분업이 있다. 애덤스미스의 분업론에 힘입어 작업은 나눠졌고 이는 매우 효율적이며 공장의 규모와 자본의 집중도를 높였다. 그리고 자유경쟁은 간섭하고 보호하는 태도로부터 해방을 야기하며 인간의 이기심을 옳고 그에 따른 행위를 좋은 것으로 보았다. 더욱이 자유경쟁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도록 만들었고 이는 경제의 발전을 더욱더 촉진시켰다.오늘 날의 경제모습은 불합리한 경제 현상이다. 사회성원은 철저하게 자본가와 노동자, 두 계급으로 나뉘었다. 빈부격차라는 불합리와 더불어 이 두 계급의 관계에 있어서 불합리는 말할 것도 없다. 겉보기에 이 두 계급의 관계는 자유계약에 따른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본가가 완전히 노동자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권리의 치우침에 대한 불합리 말고도 개인의 영리추구에 의한 생산과잉은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도 부족과 결핍을 야기하는 모순된 불합리를 보여준다. 이러한 생산본위, 개인본위의 경제를 사회본위, 소비본위로의 변혁요구가 솟아났고 이러한 변혁 요구에 의한 전환의 맹아가 바로 사회주의이다.현재의 경제 형태는 하나같이 대형기계를 사용하는데, 사람이 기계를 아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기계가 사람을 부리는 형국이 되었다. 또한 분업에 의해 생산에서도 성취의 기쁨이 없어서 전혀 흥미가 없고 참으로 무미건조하다. 이러한 현재에서는 즐거움이 바로 고통이다. 급히 찾으려 하므로 즐거움의 대부분이 자극적이고 감각적이므로 참담하다. 그리고 가족의 해체를 통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가정의 즐거움이 상실되었다. 현재에 있어서 우리는 결국 직각에 따라 살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 형태의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 참으로 불가피 하다.현재의 경제가 앞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개혁될지는 말할 수 없지만,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반드시 합리적인 것으로 귀착되어 사회본위, 분배 본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이런 경제의 변혁은 문화의 변화와도 결부된다. 인류는 태초부터 생존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태도로부터 경제 경쟁이 생겨났고 외부환경을 개조하여 만족을 추구하고, 밖에서 구하고 안에서 찾지 않으며, 남에게서 구하고 자기 자신에서 구하지 않게 되는 행태가 만연하게 됐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인류는 사람과 물질 문제의 시대를 넘어 사람과 사람 문제의 시대로 넘어 왔다. 이때에는 앞서 말한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태도는 사람 사이에서는 사용 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초기에는 물질을 대하는 강압적 태도로 사람을 대함으로써 질서와 치안을 유지해왔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고 금방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경제 개혁에 의한 개조된 사회에서는 인류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진정한 합의가 있어야함을 깨닫고 마음의 화합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양인의 태도에서 중국인의 태도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다음으로 두 번째 측면인 견해의 변화 혹은 과학의 변화에 대해 논해보자. 단지 사실만 변화하고 학술사상은 변화하지 않는다면, 문화의 변화가 필요하더라도 사람들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사실이 변화할 때 학술사상도 동시에 크게 변화하고 진보하여, 사실의 문제에 대처하고 문화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할 수 있게 하였다. 학술사상의 변화를 우리는 견해의 변화 혹은 과학의 변화와, 태도의 변화 혹은 철학의 변화라는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견해의 변화란 심리학의 변화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인간 심리에 대한 서양인의 견해는 의식적인 측면만을 중시하고 무의식적인 측면을 홀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의식적인 심리를 전체 심리로 보는 견해가 나타났고 이에 따라 갖가지 다른 견해가 생겨났다. 의식적인 면은 단지 심리의 표층일 뿐이고 그 배후에 숨어있는 무의식의 부분에 대한 중요성을 망각한데서 오는 실수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정(靜)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서술하여 연구가 거의 개인의 정지된 정신상태에 국한되어 늘 주지주의에 기울었다. 그러나 사회심리 저술들에서의 저술들의 착오에 대한 패러다임의 등장과 되었다. 또 정(靜)의 관점이 동(動)의 관점으로 바뀌어, 정지 상태에 착안하던 것에서 행위와 활동에 착안하게 되고, 개인의 자기반성에서 대중을 관찰하는 것으로 연구의 방식이 변화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전의 견해가 모두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이전의 견해는 모두 사람의 생활이 의식적이고 지식의 작용이 중심이 되어 전적으로 선택과 계산에 의해 나아가게 되며 결국 이익을 추구하고 손해를 피하며, 고통을 제거하고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그와 같이 자의적으로 가정한 원리가 완전히 뒤집혔다. 지적인 작용의 위상은 단지 도구이고 부차적인 것에 그쳤고 선택과 계산이란 단지 스스로를 위한 수산에 불과한 것이고 이해를 타산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행동을 좌우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렇듯 의식적인 측면에서 다른 측면으로의 전환은 서양인들이 공자의 문을 조금 엿보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생활이 본래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충동을 억제하지 않게 된다면, 미리 조절하여 충동을 좋고 합치되고 병폐가 없고 위험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는 일종의 화려하고 고요한 심리를 기르는 데서 벗어나지 않는데, 이러한 화락하고 활발한 생활이 바로 ‘인(仁)의 생활’이고 공자의 생활이다.이밖에 또 다른 견해의 변화가 있는데, 바로 상호부조를 통한 생존 방식 즉, 사회적 본능에 대한 이해이다. 종래에는 이점에 유의하지 않아서 모두 상호경쟁하며 상호경쟁이 자연계의 법칙이고 , 상호 경쟁을 통해 생존을 도모하고, 진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오해는 동물계를 단지 약육강식의 세계로 보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적자생존의 진화를 사회완성의 진화로 달리 보면서 희생적 적성을 발견하고 타인을 고려하는 정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 완성의 진화에서는 개체가 다른 사람을 고려해야 하므로 자싱을 버리고 남을 위하는 감정을 중시하게 된다. 따라서 정서의 능력에 대한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러한 감정을 통제하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중 최고로 변화에 대해 논해보자. 서양의 철학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철학에 비춰볼 때 그 위세, 기풍, 방향 등에서 그야말로 완전히 방향을 바꾸었다. 이전에는 절대를 연구하였으나, 현재는 상대를 연구한다. 이전에는 지식을 중시하였으나 현재는 정서와 의지를 중시하고 이전에는 이지를 사용하려 하였으나, 현재는 직각을 따른다. 이전에는 정적이었으나 현재는 동적이고 이전에는 지식적이었으나, 현재는 행위적이다. 이전에는 외적으로 고찰하였으나, 현재는 시선을 자신과 생명에로 돌이켰다. 간단히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외적 시선을 안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동양인은 종래에 그들처럼 외적, 정적, 이지적으로 관찰하지 않았고 행위적이고 정서와 의지를 중시하고 직각을 숭상하는 기풍이었다. 이 때문에 서양철학계의 새로운 풍조는 동양적인 색채다. 더욱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적인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직 과도기 단계라 크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더욱 나아가면 공통성이 뚜렷해질 것이다. 서양인들은 자기를 위하고 앞을 지향하는 태도를 지녀 정신면에서 사람과 자연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졌고 나중에는 심각하게 분리 되어버렸다. 이지적이고 분석적인 두뇌로 우주의 모든 것을 그 범주로 끌어들여 물질로 환원시켰으며, 자연을 단지 부서진 조각들이 쌓인 죽은 물건으로 보고 인간 자신도 자연계 내의 조각난 합성물로 보아, 심오하고 신비로운 정신을 많이 퇴색시켰다. 이때 구원의 빛으로 떠오른 움직임이 바로 생철학이다. 생철학의 방법이 바로 직각이고 현재의 세계는 직각이 이지를 대체하려 하므로, 서양적 태도의 전환은 생철학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상 세 측면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미래의 문화가 어떤 식으로 변화할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필자는 비합리적인 현재의 상황은 어떻게 해서든 변화될 것이며, 그 변화는 동양적인 문화를 본받고 회귀하는 쪽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그 동양적이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적인 것이다. 사실 일반인들의 논의는 세계의 미래 문화는 동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