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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반 일리치 (illich)의 낭만주의,탈학교론,에피메테우스,교육이론
    이반 일리치 (illich)목차서론 - 1. 생애 (시대적 배경)본론 - 2. 낭만주의란?3. 탈학교론- 탈학교이론의 배경4. 일리치의 교육이론1. 교육목적- 에피메테우스적 인간-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으로의 회복- 사회관: 공생의 사회- 종교적 비전2. 교육 방법(탈학교 화)- 탈학교화의 과정- 네트워크 학습- 교육 전문가5. 탈학교화를 위한 전망결론 - 6. 맺음말- 단점- 장점- 결론1. 생애1926년 9월 4일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태어남1941년 비엔나의 학교에서 쫓겨남1941년 나치의 인종법 시행에 따른 유태인 박해를 피해 이탈리아 피렌체로 건너감1951년 자크 마리텡의 영향을 받아 신학학사를 받음1951년 오스트리아의 찰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얻음 (Arnold Toynbee에 대한 논문을 썼다.)1956~ 1960년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을 지냄라틴 아메리카에서 활약하는 사제들을 위한 집중훈련센터를 창설1961년 멕시코의 퀘르나바카에 국제문화형성센터 CIF를 창설함.1964~1976년 기술사회에서의 제도적 선택에 관한 세미나를 주재하여 지식인들과 토론함.(지식인= 라틴아메리카의 학생, 유럽과 미국에서 온 많은 성직자)1967년 CIF가 CIDOC(국제문화자료센터)로 개편됨1968년 바티칸에 의해 종교재판에 가까운 심문을 받음1969년 정치적인 부도덕의 이유로 사제직을 떠남. 하지만 신앙을 버리진 않음1970년 [학교없는 사회] 저술1976년 4월 CIDOC 폐쇄되고 일리치는 서독으로 감.2002년 12월 2일 독일 브레멘 자택에서 76세에 암으로 사망2. 낭만주의란?낭만주의는 인간의 이성적 측면보다는 정서적이고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다. 낭만주의에서는 전통적인 주지주의 교육의 이념에서 인간을 육체와 정신으로 구분하는 것을 거부하고 어린이의 선한 본성과 잠재력을 자연에 따라 개발, 성장시키기보다는 학습자를 타율화시키며 사실을 배제한 추상화된 교육, 권위주의적인 교육, 주입식교육, 형식주의교육 등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eimer와 Illich와 함께 ‘탈학교론’을 주장한다. Reimer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외시키고 있는 교육재정의 문제와, 국가의 이념을 가르치고 높은 공교육 수준에 도달할수록 통치하고 지배하는 법을 습득하게 함으로써 국가에 봉사하는 자질을 길들이는 학교교육에 대해서 비판한다. 이러한 교육개혁자들에 의해서 선진국에 의해 강요 추진되어왔던 식민지적 근대화와 발전의 물결에 대한 자각과 비판이 시작된 것이다.한편 미국식의 교육이론과 경제발전이론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게 되는데, 1961년 멕시코의 쿠에르나카바에 설립된 국제문화자료센터는 이러한 비판의 중심지로 등장한다. 국제문화자료센터는 일리치가 1961년 봄에 당초 선교사 양성을 위한 센터로서 멕시코의 쿠에르나카바에 설립한 것으로서, 전 세계에서 모인 학생들이 다양한 주제에 관하여 연구 및 강의를 하는 어학연수가 이뤄졌던 곳이다. 이곳은 “누구나 가르치는 자이면서 배우는 자로 순환제 강의를 개설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국제문화조사센터는 현대자본주의 문명의 문제를 연구하는 곳이 되었고, 동시에 교육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세미나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특히 국제문화조사센터에 참여하는 중심 인물들로부터 탈학교자들이 구성되기에 이른다.학교교육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 탈학교론의 전개는 CIDOC에서의 자료집 출판과 세미나를 통해 나타난다. 탈학교론에 관한 온의의 시작은 1960년의 Paul Goodman의 (Growing up Absurb)로부터 시작되어, 학교교육의 대안을 위한 정기회합을 가져오는 동안에 Illich와 Reimer는 탈학교에 대한 공동연구를 통해서 1971년에 Illich는 (Descooling Sosiety)를 발표하였다.4. 일리치의 교육이론1. 교육목적-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일리치가 탈학교사회에서 지향하는 인간의 이미지는 에피메테우스적 인간(Epimethean Man)으로 상징된다. 이러한 신화를 근거로 한 인류의 원시시대는 희망의 시대였다. 고대 그리스인은 이 희망을 기대(e구들은 인간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조작하고 있다고 밝히고, 이 도구들에 의해 두 번째 분수령을 넘어선 성장에 대해 ‘한계’를 설정하고 ‘균형’을 갖춘 ‘공생의 사회’에로의 정치적 전환을 시도하는 것만이 현재 인류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일리치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1. 두 번째 분수령과 도구의 구조일리치는 두가지 변화와 단계를 설정하여 현대사회의 위기를 노하고 있다. 즉 일리치는 처음 단계에는 새로운 지식이 문제의 해결에 적용되며 과학적 측정이 새로운 효율성을 낳으나, 그 다음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이룩된 진보가 오히려 사회의 착취를 위한 합리적 근거로써 사용되게 된다고 보고 현대사회의 과학적 준거에 따라 조직된 중요사회기관 특히 의료제도, 학교, 사회, 복지사업, 교통, 심지어는 도시공학까지도 이 수자의 단계 즉 ‘두번째 분수령’을 넘어섰다고 주장한다.의료제도를 예로 들어볼 때, 인류가 무당이나 한의사를 토해서가 아니라 의과대학을 졸업한 자격증 있는 의사에게서 효과적 치료를 받게 된 1913년 일리치는 현대의학사의 첫 번째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 이 첫 번째 분수령 이후 계속된 의학의 진보는 2차대전 이후, 의학의 치료자체가 새로운 종류의 질병을 유발함으로써 제2의 전환점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문화된 의학이 건강에 가장 중요한 위협요소로 변질되었으며, 일반인의 치료가능성을 배제하는 의료서비스의 독점 및 값비싼 예방요법과 치료는 일부 개인들의 특권이 되는 관료적 의학이 전세계의 퍼져 나아가게 된 것이다.이러한 시점에서 일리치는 제3의 전환을 요구한다. 제3의 전환의 가능성을 의사 아닌 일반인이 치료하는 중국의 ‘맨발의 의사’에게서 일리치는 보았는데, 그것은 일반인의 치료가 의학의 독점되거나 상품으로 전락되는 것을 곤란하게 하며 동시에 ‘탈직업화’의 가능성을 낳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의료제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도 이미 좋은 교육수단이 아니며, 자동차도 이미 훌륭한 수송수단이 아니며, 조립의 일관작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교회만이 발달의 완전한 의미를 우리에게 계시할 수 있다.”는 것이 일리치의 입장이다. 발달을 그리스도안의 신앙에 적용함은, 인간성의 발달이 하나님 왕국의 실현을 향하여 나아감을 계시한다는 것을 심리학적 개인의 인격의 발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제관계 속에서의 인간의 자율성, 존엄성, 자유, 평등 등의 신장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성의 발달이 하나님왕국의 실현을 계시한다는 일리치의 기본적 입장이 일리치로 하여금 현존하는 바 교회의 많은 양상들을 급진적 방법으로 문제삼게 하며, 동시에 이 확신 때문에 사람이 새로운 교회, 새로운 세계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자신하게 한다.일리치의 교회비평은 교회의 구조 자체에 대한 비평과 교회의 대외적 선교정책에 대한 비평으로 나누어진다.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 일리치는 제도로서의 교회를 비판하다. 교회의 대규모 관료적 조직과 일리치는 제도로서의 교회를 비판한다. 교회의 대규모 관료적 조직과 봉사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하나의 대리계급을 마련하여 진정한 종교로 발전하기 위해 본질적인 얼굴과 얼굴의 만남을 막아버린다. 지나치게 직업화된 목사직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유순하고 복종적이 되도록 함으로써 해를 끼친다. 교회정책은 사회에서의 다른 제도들 특히 정치제도와의 제휴를 통하여 현재사회의 계급구조를 유지시킴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평등을 막는다. 후자의 경우에 대한 일리치의 비판은 서구 산업국가 특히 미국의 발전도상국 특히 Latin America에 대한 선교운동에 대해 가해지는데, 그 이유는 선교가 결국은 미국의 생활 수준과 기대를 이식하여 서구의 이데올로기에 라틴 아메리카를 묶어두기 위한 운동의 일부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교회가 그 나라의 현존 계급구조를 유지하는데 한 짝이 되어, 필요한 혁명적 변화를 훼방놓기에 이르기 때문이다.예언자의 교회비평에 뒤이어, 일리치가 예견하는 미래의 교회는 더 가족적인 형태의 교회이다. 즉 교회는 공동작업을 추구일리치는 자신의 탈학교화는 법률의 힘을 입어야만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력증명서에 의한 차별 내지는 자격박탈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게 되므로 자격과 이력과의 결속을 단절하기 위해 개인의 학력 조사를 금지하도록 법률로 제정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일리치가 제안하고 있는 훌륭한 교육제도는 정규 의무교육기간을 감축시키는 대신에 교육 연한을 필요에 따라 20년에서 30년에 걸쳐 분산시키는 것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데서 기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일리히는 학습을 주로 학교 밖에서 이루어진다고 보고 인간과 환경 사이에 새로운 양식의 교육적 관계를 만드는 일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러한 새 양식의 교육적 관계를 키워 나가기 위해서 성장에 대한 태도, 학습에 효율적인 도구, 그리고 일상생활에 있어서 결과 구조가 동시에 바뀌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생각에 입각해서 일리히는 바람직한 교육제도가 가져야 할 세 가지 목적을 다음과 같이 시사하고 있다.첫째, 누구든지 학습하려고 생각만 하면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어서도 그것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나 교재를 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일(provide all), 둘째, 자신이 아는 일을 타인과 더불어 나누어 가지고자 하는 어떤 사람에게나 그 지식을 그로부터 배우려는 다른 사람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일(empower all), 셋째, 공중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걸 위한 기회를 부여해 주는 일(furnish all), 그리고 이와 같은 제도 하에서는 교육에 대한 헌법상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학습의 기회 및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타인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수단을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보전하기 위한 기회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를 위하여 탈학교화를 위한 교육개혁은 다음과 같은 몇 개의 목표를 가져야 한다.① 현재는 개인이나 제도가 사물이 갖는 교육적 가치를 컨트롤하고 있으나 .
    교육학| 2011.02.07| 20페이지| 2,500원| 조회(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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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별 교육자 인물 요약
    소크라테스- 대화법, 산파술 : 무지의 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법플라톤- 이데아를 추구, 철인 국가가 목표- 교육을 추구하는 본질적 목적 : 인간의 정신적 주체인 영혼을 가능한 한 선하게 양육하는 것- 영혼의 3단계 기개, 욕망, 이성 ->교육을 통해 변화시키고 선의 이데아 실현아리스토텔레스- 이데아보다 현실을 더 중요하게 여김- 가능태와 현실태로 세계를 바라봄*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기준의, 관점의 차이-플라톤:관념(Idealism)>인간이 인가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최선 조건이, 이데아가 필요-아리스토텔레스:실재(Realism)>질료와 형상으로 인간은 이루어져 있다-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둘다 당시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중세에 영향을 준다.: 플라톤>중세 전기 교부철학(어거스틴), 아리스토텔레스>중세 후기 스콜라철학(아퀴나스)어거스틴- 플라톤 + 기독교- 변화와 생성은 피조물이다, 일으킨 자는 하나님 조물주이다. 만약 피조물이 자신의 위치에서변화하여 조물주로 올라갈려는 것은 악이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 = 하나님의 생각, 단 플라톤은 창조이전에 이데아가 존재하지만 기독교는 무 -> 유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한다.- 진정란 진리로 도달하는 방법첫 번째, 감각적 사물에게 감각을 지니고 나아갈 때 감각적 지식을 획득한다. - 불확실하다두 번째, 이미지, 형상(이데아, 본질) - 불확실하다(시간이 지나면 이미지가 변한다)세 번째, 자기자신을 초월한 상태에서 인식한다. 도달한다. 자기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이 비춰주시는 광명으로 진리(하나님)를 본다.- 어거스틴은 이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극단 어거스틴 학파들은 이성을 무시하고오직 하나님의 신앙만 필요하다고 보고 신앙주의로 치우친다.- 신앙주의 : 신학, 철학은 필요없다. 오직 아멘!!오직 신앙, 신비주로 치우칠 수 있다.토마스- 기독교 +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스승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아리스토를 접하게 함)- 이성과 신앙 모두 신 존재가 증명 가능하다. -> 이성 또한 하나님이 준 것- 철학(이성)과 신앙을 상호인정 -> 이성이 도구로 신앙에게 도움을 줌(도미니크-학문위주 + 프란체스코-청빈과 설교 = 신학대전)- 실체(있는 것) = 질료와 형성정신적 존재(마음) : 존재 + 본질- 교육 : 교사(작동 O, 완성 X)는 보조자 역할만 할 뿐 저절로 교육이 이루어진다.교육은 이미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에라스무스- 우신예찬- 아동교육- 사랑에 기초한 교육- “후마니타스”(humanitas)와 “피에타스”(pietas)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전자는 근본적으로 고전적인 개념이고, 후자는 그리스도교적 개념이다.루터compulsory ed.(의무교육), family(가정교육), catechism(교리교육)- 의무적 교육 제안 -> 100년뒤 실현- 아우구스티누스 파에 입문 -> 이성으로 초월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조명 없이는 안된다.- 멘토 : 요한 슈터 피츄- 교수로 추천 -> 공부 중 회심 -> 면죄부에 의문 -> 95개조 반박문으로 토론을 품음 ->뜻과는 달리 토론이 아닌 개혁이 됨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비교에라스무스루터인간이해와 교육이성 중심칭의론교육의 필요성‘인간됨’을 위한 필수 조건기능적 실천적인 차원교육의 가능성과한계성-잠재적 능력인 이성을 개발-인간을 완성에 이르도록 교육→교육의 한계 X- 세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에게의봉사를 위해서 교육이 필요→ 교육의 한계가 존재코페니쿠스- 코페니쿠스, 우주관의 변화 -> 신학관 변화- 지구중심(교황중심) -> 태양중심(세상중심)갈릴레이- 코페니쿠스의 지동설 주장 -> 종교 재판 (지동설 부인하지만 외형상 부정임)뉴튼- 만유인력의 법칙 = 중력의 법칙- 수학적 과학적 접근, 누구도 부정 못함코메니우스- 범지학(Pansophia), 모라비안(유럽의 유대인)의 주교- 교육의 목적 : 지식, 덕, 경건- 보편적 지식 -> 영적의 병 치유가능 -> 하나님이 기뻐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 하나님 : 창조자-절대적인 완전성, 구속자-모든 사람과 사물의 중심, 지혜-자연을 창조
    교육학| 2011.02.07| 4페이지| 1,000원| 조회(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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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hiteHead의 교육과정
    WhiteHead의 교육과정적게 가르치는 것이 많이 가르치는 것이다.화이트 헤드의「교육의 목적」이라는 책을 읽어 보았다.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는 교육의 지적 측면에 관한 것이다. 하나의 중심적 사고가 여러 장들의 내용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예증되고 있다. 그 중심적 사고란 간단히 말하면, “학생들은 활기찬 삶을 살아간다. 교육의 목적은 그러한 학생들의 자기 능력 개발을 복돋아주고 이끌어주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전제로부터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결과로 교사들 또한 생명력 있는 사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죽은 지식에 반대하는, 달리 말하면 생기 없는 관념에 반대하는 항의라고 할 수 있다. 이 핵심적인 내용은 간단히 말해 학생들은 활기차고, 계속 그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그 학생들은 가르칠 교사 또한 활기차야 하고, 학생에게 전수해줘야 할 지식도 활기찬 지식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최종적으로 학생의 자기 능력 개발에 도움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화이트헤드에게 교육이란 '지식 활용의 방법을 체득케 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비판받아야 할 교사의 유형은 활용되지 않은 채 사장되는 유의 지식을 대량으로 주입시켜 자시 만족에 도취하는 현학적 인간이라고 보았다. 이는 정보 범람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교육 종사들에게 던지는 엄중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교육이라는 것을 한자 그대로 가르치고, 기른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동양적인 교육에는 인간의 전인화가 목적으로, 사회구성원 또는 인간으로써의 완성된 인격체를 만들어 가기 위해 필수조건인 것에 반해 화이트헤드의 교육은 중요한 지식을 활용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충분조건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화이트헤드는 교육의 요체로서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그 첫째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며, 둘째로는 "가르쳐야 할 것은 철저히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가. 그것은 사색 올바르게 가고 있는 것일까? 무작정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주입식 교육을 통해 지식을 우리나라 학생들 머릿속에 넣고 있다. 모든 게 수학능력시험이라는 대입시험 하나에 포커스가 맞춰 짜여져 있는 교육과정들이다. 과연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교육은 무엇이고, 교과는 무엇이며, 지식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문득 지난 주 토요일 날, TV에서 보았던 ‘위대한 유산 74434’라는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위대한 유산 74434’라는 프로그램의 이름은 우리 민족의 얼과 역사가 담긴 문화재이지만 현재 조사된 해외에 나가있는 우리의 문화재가 74434건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 날의 내용은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역사 왜곡에 대한 것이었다. 동북공정의 실질적인 목적은 중국의 전략지역인 동북지역, 특히 고구려·발해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 한반도가 통일되었을 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영토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있다. 특히 고조선·고구려·발해 등은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 속한 지방정권이며, 북한과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왜곡하고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MC를 보던 정형돈씨가 말하기를 “대입시험에 꼭 나오는 영어는 우리나라 말도 아니면서 교육과정에 필수이고,수능시험에서 점차 비중이 낮아지면서 선택과목으로 바뀐 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이면서도 역사를 올바로 알지 않고, 대학교를 간다는 게 안타깝다"라는 말이 참 가슴에 남았다. 물론 현재 영어가 필요 없거나 사회생활을 하기위해 쓸모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태어나면 자신의 부모에 대해 알고, 가족에 대해 알듯이 국가라는 구성원으로써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의 뿌리와 말인 국사와 국어를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처럼 화이트헤드의 두 번째 주장인 가르쳐야 할 것은 철저히 가르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화이트헤드는 단편적인 지식은 교양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단지 박식에 그치는 사람은 이 지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들을 철학의 깊이와 예술의 높이로까지 이끌어줄 것이다. 이 말이 참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지식만 갖추고, 인격의 밑바탕이 되는 교양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책의 제목은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일대기를 가지고 쓴 글인데, 반기문 사무총장은 정말 공부만 하였다. 음악, 체육과 같은 예체능 교과는 바닥이지만 다른 교과는 최우수였던 전영적인 공부벌레였다. 그러던 그가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으로써 오스트리아 대사로 있던 시절, 오스트리아 문화를 함께 즐기기 위해 춤을 배웠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오스트리아로 왔는데 이들의 문화를 함께 즐기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외교관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어 공부밖에 모르던 그도 춤을 배웠다는 것이다. 전문 지식은 그 사람의 머리일지 모르지만, 교양은 그 사람의 몸이라고 생각한다. 박식하다고 하여, 남을 무시하고, 그 나라나 그 사람의 개성, 문화 등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는가. 교양과 저문 지식을 갖춘 이야 말로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그 다음으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지적 개발은 자기 능력 개발이며, 이는 대체로 열여섯 살에서 서른 살에 걸쳐 일어난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사고력을 훈육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생기 없는 관념'인데, 이는 활용되지도 않고 검증되지도 않으며, 참신한 연관성으로 결합되지도 않은 채 단지 머릿속에 주입시키기만 한 관념을 말한다. 생기 없는 관념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해롭다. "가장 좋은 것의 부패는 가장 나쁜 것이다". 지적 활력이 넘치던 짧은 기간을 제외한다면 과거의 교육은 근본적으로 생기 없는 관념으로 오염되어 왔다. 일찍이 위대한 것을 향해 인간성을 각성케 한 모든 지적 혁명은 언제나 생기 없는 관념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와도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어교과서를 펴서, 읽고, 칠판에 몇 자 긁적이고, 학생들은 “네.” 또는 “맞습니다.”라고 말할 뿐이고, 묵묵히 노트정리만 할 뿐이었다. “아니오”, “잘못된 것 같습니다.”라는 말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주입식 교육에 따른 교사와 학생들의 태도이다. 교사는 시험문제에 나오기 때문에 자기 혼자서만 떠들 뿐이고, 학생들은 그러한 수업에 지루함을 느낄 뿐이다. 전혀 생기 있지도 않고, 지식 자체 또한 학생들의 흥미나 관심을 배제한 생기 없는 지식일 뿐이다. 이렇게 학생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교육 제도가 제멋대로 만들어낸 생기 없는 관념으로, 특히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사춘기 시절, 한 인격체를 새삼스럽게 구속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결국 화이트헤드의 두 가지 교육상의 기본 원칙, 그 첫째는 "너무 많은 과목을 가르치지 말라" 라는 것이며, 둘째는 "가르쳐야 할 것은 철저하게 가르치라"라는 것을 통해 교육제도에서 이러한 생기 없는 관념을 예방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너무 많은 교과 내용에서 극히 적은 부분만을 가르친다면 그 결과는 생명력 넘치는 섬광으로 계발되지 못한, 연관성 없는 관념들을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데 그치는 것이 된다. 어린이 교육에서 가르쳐야 할 관념은 되도록 줄이고 중요한 것만 골라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그 목적을 위해서 교육은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 그 교과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교사나 학자들이야 그 교과의 깊이를 알고, 교과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쌓고 있겠지만, 어린이와 학생들은 그 과목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과를 배운다. 즉 교육을 양으로 승부할 것이냐, 질로 승부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화이트헤드는 질로 승부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교육과정의 교과들이 학생들에게 생기 넘치는 교과라고 할지라도 너무 많고, 수박 겉핥기처럼 배운다면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을뿐더러 겉멋만 잔뜩 치장한 지식과 같은 셈이다. 학문이라는 것은 단계가 있고, 깊이선형 교육과정과 비슷한데 그 교과나 학문의 주춧돌을 세워서 가르쳐야 할 것은 철저하게 가르쳐야 온전히 습득될 수 있으며, 나아가 더 높은 학문이나 연관된 다른 학문을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교사가 학생의 머릿속에 주입하는 세부적인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학생이 학교를 마친 후의 삶에서 정확히 그것을 다시 만나게 될 기회란 무한히 작은 것이다. 설사 그런 경우가 생긴다 하더라도, 십중팔구 그 학생은 그 교사가 가르친 것을 이미 잊어버리고 있을 것이다. 정말 유용한 훈련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소수의 일반적인 원리이다. 그 원리들 속에는 그것이 다양한 구체적 세목들에 적용되는 방식에 관한 완벽한 근거가 갖추어져 있다. 교육을 마친 후의 실제적 삶에서 사람들은 교사가 가르친 세부사항들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공통감각에 의해서, 눈앞의 상황에 원리를 적용하는 방법을 기억한다. 교과서를 잃어버리고, 강의노트를 불태우고, 시험에 대비해서 암기했던 세세한 기억들을 다 잊어버릴 때까지, 우리의 학습은 우리에게 무용지물이다. 세부적인 내용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치 해와 달처럼 명백한 사실로 우리의 기억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다가 우리에게 요청되는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 책이나 뒤져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것이다.우리가 배운 것을 생활 속에 적용시켜 보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했는데, 이는 어떤 외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도구적 기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창조적 반응, 즉 어떤 관념을 다른 관념이나 다른 경험에,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의 삶의 주요 관심사와 연결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활용’은 하나의 기술이다. 어떻게 하느냐를 일러줄 수 있는 명석한 공식 같은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생을 직접 가르치고 학생의 심성을 예민하게 해줄 수 있고, 정보를 주어 지적 작업의 기능을 계발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해와 활용의 기술을 이런 방식으로 주입시키지는 못한다. 이 양자는.
    교육학| 2011.02.06| 5페이지| 1,000원| 조회(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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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거스틴의 생애,어거스틴의 교육,어거스틴의 사상,어거스틴의 종교
    Ⅰ. 서론중세철학의 대표철학자를 생각한다면 중세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어거스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단순한 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철학자로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세철학의 선두주자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기독교 저술가들의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일어났던 교부시대의 가장 위대한 저자는 역시 어거스틴이다. 하지만 어거스틴에 대한 대부분 사람들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성자나 기독교의 위대한 공헌자까지만 이다. 그가 어떠한 삶과 어떤 사상을 가지고 중세철학을 대표하는지는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 발제를 통해 그가 살아갔던 시대적배경과 생애를 통해서 시대적 배경과 그의 생애가 그의 사상을 어떻게 형성시켰는지, 또한 그의 사상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간단하게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할 것이다.Ⅱ. 본론A. 시대적 배경1. 로마 제국의 위기와 몰락어거스틴이 태어난 지 1년 후 흉노족들은 몽고 벌판에서부터 서쪽으로 역사적인 대이동을 시작했다. 이 사납고도 전투적인 몽고족의 움직임은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그로부터 50년 후에는 비스고트족으로 하여금 로마를 향하게 하였다. 흉노족이 유럽 쪽으로 서진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여러 종족들을 공략하게 되자 튜톤족은 로마 제국의 황제인 발렌스에게 로마 제국으로 피하여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었고 그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허락은 로마인들에게 칸내 이후부터 제6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그 전예를 찾아볼 수 없었을 만큼의 크나큰 재난 즉, 반역을 몰고 왔다. 로마가 하드리아노플에서 패전한 이후부터는 비스코트족과 오스트로고트족 그리고 일부의 흉노족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모든 발칸 지역을 침략해 들어갔다.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는 어떻게 해서든지 야만족을 물리치고 자신의 통치 영역을 넓힘과 동시에 로마 제국의 법과 질서를 회복시키려 햇다. 하지만 세기가 바뀌면서 비스코트족의 지도자였던 알라릭이 이태리를 침략해 들어가자 어렵게 유지되어 오던 평화마저 깨지고 말았다. 알라릭은 제국이 무너지자 교역마저 끊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거리에는 무법자들이 활보하고 다녔고 바다에는 해적들이 들끓었다. 이태리는 이렇다할만한 산업이나 어느 정도 규모가 잡힌 농업마저도 없이 자꾸만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기근과 빈곤이 증가하자 정부 자금으로도 시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가 없었다. 결국 이러한 야만족의 침략과 배고픔으로 인하여 로마 시민 중 백만명 이상이 로마를 떠났고 로마에는 30만명 밖에 남지 않았다.3. 교육고전적인 전통에 따라 학생들은 12살까지 읽기와 쓰기 그리고 셈하기를 배웠다. 16세기까지는 중학교 과정으로 수사학과 문법 그리고 시를 배웠다. 20세기까지는 고등학교 과정으로 같은 내용을 4년간 더 배웠다. 이러한 교육제도는 로마제국 어느 곳에서나 시행되고 있었다. 학교는 모두 국립이었다. 교육은 용기를 갖게 해주었고, 예술은 높은 식견을 가져다주었다.4. 종교어거스틴이 기독교로 개종한지 7년 후인 394년,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공식적으로 모든 형태의 이교 사상을 금했다. 이것은 예전과 같은 자유와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14년동안이나 싸움을 걸어오던 이교사상과의 싸움을 끝내게 했다. 그라티안 황제는 어거스틴의 스승이요 밀란의 감독이었던 암부로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380년에 로마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이도록 규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국의 여러 곳에는 수백 개의 이교도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마다 소수의 이교신자들이 남아 있었다. 이 칙령이 발표된 지 2년 후인 382년에 황제는 또 다른 법령을 발표 하여 이교 신전의 문을 닫게 하였고,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추방세를 물렸다. 이교도 유게니우스는 이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초후의 저항을 했으나 데오도시우스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칙령이 백성들을 종교적으로 하나 되게 하지는 못했다. 이교도들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종교 행위에 대해 사실상 로마인들이 패배한 것이라고 계속 비난을 하고 있었다.5. 신플라톤주의어거스틴이 태어나기 100여년 전 암모니우사망391 히포에 도착해서 수도원을 세움. 사제로 임직 받음.395 발레리우스를 계승해서 감독으로 안수받음.396 힙포의 주교로 임명됨397 「고백록」398 카르타고 4차 교회회의 참석399 「성삼」400-412 도나투스파 논쟁411 펠라기우스 주교들의 회동과 논전412 펠라기우스파 논쟁 개시413-427 「신국」414-417 「요한복음 논고」418 「시편강해」418-419 「아리우스 이단 논박」421-423 「믿음과 희망과 사랑」426 후계자로서 사제 에라클리우스를 지명428-429 「은총과 의지」, 「재론고」429 반달족 아프리카 상륙. 전화에 싸임430 8월28일 반달족이 힙포를 포위한 가운데 별세C. 어거스틴의 생애1. 소년시절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은 354년 11월 13일 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그는 후에 라틴 교부의 제1인자가 되었지만 그는 로마인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이었다. 그는 라틴어로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을 배웠고, 모국어인 콥트어도 말할 수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파트리시우스이며, 어머니는 모니카이다. 아버지는 이교도로서의 생애를 보냈고,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아버지는 육신을, 어머니는 영을 대표로 한 영육간의 싸움이 아들 어거스틴에서 일어났다.그는 여섯 살 때 고향 타가스테에 있는 초등학교에 들었다. 당시의 초등학교의 교육은 엄격하였기 때문에 종종 교사의 체벌 때문에 괴로움을 받아 그 체벌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학생으로서 반드시 착실한 학생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으므로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그러나 나태한 소년 시절은 곧 공학에 대한 열심히 변하였다. 특히 그는 버질에 대해서 많은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호머의 그리스어에는 물러났다. 그는 수사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나타냈다. 그래서 수사학을 더욱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 14세 때인 367년 타가스테로부터 그다지 말지 않은 마다우라로 갔다.17살이 되었을 때, 1년간은 고향인 타가스테에서 보냈다. 이때부터 방종한지만, 그가 그 권유에 따른 것은 카르타고의 학생은 규율이 없고 난폭한 데 반해, 로마의 학생은 규율이 바르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한 후 얼마 안 있어 병이 들었다. 그는 마니교도의 극진한 간호를 받아 점차 회복되었지만 마니교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은 증가될 뿐이었다. 그동안에 그는 다시 키케로에 흥미를 느껴 사상적으로는 눈에 띄게 회의적으로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예상했던 것과 같은 선량한 학생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불쾌해 있었을 때 북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수사학의 교사로서 초빙되었다. 밀라노는 당시 로마에 뒤떨어지지 않는 중요한 도시로 황제의 궁전도 있었다. 밀라노에서 그는 암브로시우스를 알게 되었다. 당시 암브로시우스는 밀라노의 주교였다. 밀라노에가서 얼마 안있어 어머니 모니카가 그의 동생을 데리고 아프리카로부터 왔다. 모니카도 또한 암브로시우스의 가르침을 받았다.밀라노에서의 어거스틴의 생활은 여전히 번민하는 생활이었다. 즉 정신적인 욕구와 함께, 물질적 세속적 명성에 대한 욕망, 아버지로부터 유전되었다고 생각되는 성적인 욕망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밀라노에서 그의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것에 비해서 결혼생활은 그렇지 못하였다. 거의 생활은 풍요롭지 못했다. 어머니와 동생과 처자까지 있어서 생활 부담은 수입에 비해 컸다. 이와 같은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그의 내연의 처를 정식 아내로 하는 것은 그의 사회적 지위가 허용하지 않았다. 모니카는 아들에게 떳떳한 결혼을 하도록 권했다. 어거스틴은 북받치는 슬픔을 참으면서 10년 동안 같이 지내오던 여인을 아프리카로 떠나 보냈다. 하지만 아들은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어머니가 소개한 신부의 법정 결혼연령을 기다리지 못하고 또 다른 여인과 관계를 가졌다.이 때 어거스틴은 프로티누스의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신플라톤주의와의 접촉은 그를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는 이 철학 속에서 물질 현상을 정신적인 용어로 설명하는 방법을 찾았을 뿐 아니라 악의 문제를 마니교의 이원론적인 방법이 3년에 거의 모든 아프리카의 감독들이 힙포에 모였을 때, 그는 신앙 및 교리에 대한 설교를 했다. 그리하여 그이 명성은 크게 올라갔다. 394년 그의 벗 아리피우스가 타가스테의 감독이 되었다. 396년 힙포의 감독 벨레리우스가 사망했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그 뒤를 이어 힙포의 감독이 되었다.5. 감독시절386년의 회심 이후 그는 마음의 안정을 곧 얻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때 이후 충실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생활이 개시되어 시종일관 교회를 위해서 봉사했다. 그동안 그는 마니교, 펠라기우스파, 도나투스파와 논쟁하고 정통적 기독교를 확립하고, 거짓 없이 자신의 과실을 고백하여 약한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고, 로마가 오올인의 침입을 받아 인심이 흉융하자 「신국론」이란 저서로 사람들을 가르쳤다.426년 「신국론」이 완성되었을 때, 그는 주교로서의 시무를 그의 벗 헤라클리우스에게 위탁하고 그를 자기의 후계자로서 사람들에게 인식시켰다. 동시에 힙포 이외의 각지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호소에 답하려고 했다. 그는 이해부터 386년 이후 저술한 그의 저술93권 중에 논했던 오류와 부적당한 문구를 정정하여 「재론」이란 2권의 저술로서 발표했다. 이어 제3권을 낼 예정이었으나 이것을 끝낼 수 없었다.429년 5월 약 8천명의 반달족이 누미디아로 침입해 왔다. 힙포도 14개월 동안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어거스틴은 이 포위 기간 중인 430년 8월29일에 77세로 사망했다.D. 어거스틴의 사상1. 위계질서에 따라 정돈된 세계어거스틴은 세계를 위계질서에 따라 정돈된 것으로 보는데, 이는 플라톤의 사상이 가장 잘 적용된 것이다. 질서의 원리는 내재하는 가치의 원리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더 좋거나 더 가치가 있을수록 그것은 위계질서상 더 높은 위치에 있다. 신은 정점에 위치해 있고, 물체들은 아주 낮은 위치에 있으며 인간의 영혼은 그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선한 사람의 영혼은 악한 사람의 영혼보다 더 높이 위치한다. 선한 천사들은 신 아래 있으나, 선한 사람의 영혼 위에 있다. 그러나 악
    교육학| 2011.02.07| 10페이지| 1,500원| 조회(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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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라스무스 & 루터
    개요*서론 시대적 배경*본론1.르네상스의 교육과 인문주의의 교육1-1 르네상스의 교육1-2 인문주의의 교육2. 에라스무스2-1 에라스무스의 생애1) 홀란드, 에라스무스의 탄생2) 파리3) 영국: 엔키리디온4) 이탈리아: 우신예찬5) 다시 영국으로6) 신약성서7) 루터와의 인연 그리고 바젤로8) 프리아부르크 그리고 삶의 마감2-2 에라스무스의 교육사상1) 일반교육사상2) 아동교육사상3) 사랑에 기초한 교육사상4) 에라스무스의 일반적 교육3. 에라스무스 그를 기억하며4. 종교개혁4-1 종교개혁이 교육에 미친 영향5. 루터5-1 루터의 생애5-2 루터의 인간관과 교육사상5-3 신교의 교육활동5-4 교육사적 의의6. 최종결론*서론 -시대적 배경중세 봉건사회는 14세기경부터 교회 중심의 세계관이 무너지면서 해체되기 시작하였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문예부흥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제국의 심장부로서 고대 로마의 문화와 관습들이 남아있었고, 도시생활의 전통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당시 사회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유럽 사회가 변하였고 교황의 권위 떨어졌으며 교회의 세력 또한 약화되었다. 또한 이탈리아 반도에서 수공업과 해상 운송업이 발달하여 상인들이 부를 축적함으로써 자유 시민계급이 발생하였고 그 세력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아래 도시의 자유 분위기는 현세에서의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자신의 이성을 신뢰하는 합리적 사고방식을 나타내는 원동력이 되었고 이는 결국 르네상스 운동으로 이어져 르네상스 시대의 개막의 배경이 되었다.서구 근세의 시작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후부터이나 혹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처음 발견한 1492년 10월 12일부터라고 주장하는 사가들이 있다. 그러나 교육사에서는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나 15세기부터 서구의 근세가 시작되었다고 본다.*본론1.르네상스의 교육과 인문주의의 교육1-1 르네상스의 교육이탈리아 중심으로 일어난 개인적 인문주의로 개인주의 자John Colet)을 포함하여, 윌리암 그로신(Willian Grocyn), 윌리암 래티머(William Latimer), 토머스 리나커(Thomas Linacre),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이 이러한 부류에 속하게 된다. 이들은 에라스무스와는 달리 귀족의 후손들이었고, 부유한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은 에라스무스에게 희랍어 통달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해 줌으로써 그의 학문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을 부여해 주었고, 신플라톤주이라는 사상에 영역에 있어서도 그에게 영향을 끼쳤다.이 시기에 에라스무스는 「엔키리디온」(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는데, 이 책은 프로그램적 성격을 갖고 있고, 에라스무스가 전 생애를 통하여 반복하게 될 그러한 주제들이 개략적으로 제시되어 있다.4) 이탈리아: 우신예찬이탈리아 평원에 도착하여 일행은 먼저 투린(Rurin)으로 갔는데, 이 곳에서 에라스무스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한 동안을 로마에서 보냈다. 그의 명성은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대 여섯 명의 박식한 추기경들에 의해 존경받는 동료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교황 율리우스의 조카인 리아리오(Riario)와 박식한 그리마니(Grimani)는 물론 장차의 교황 레오 10세와도 친해질 수 있었고, 이러한 접촉 때문에 에라스무스는 항상 억누를 수 없는 향수를 가지고 로마를 회상하곤 했다. 그렇지만 교황의 측근 그룹에게서조차 그는 단순한 용어가 아닌 “이교주의”(paganism)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 달갑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를 가장 격분시킨 것은 그리스도교 도시를 정복하기 위하여 교황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는 광경이었다.에라스무스는 작별을 고하기 위해 그리마니 추기경을 방문했다. 이탈리아에서의 삼년은 에라스무스에게 라틴 잠언들의 얄팍한 모음집으로부터 고대 세계의 웅대한 파노라마로의 「격언집」의 확장, 에세이를 위한 본문으로서 일부 잠언들을 사용하는 것, 희랍어에 대한 엄청he Freedom of the Christian Man)에서 루터는 선행이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의도로 행해여진다면 “저주받을 죄”라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에라스무슨 De Libero Aribitrio 즉 「자유 의지론」 이라는 제목의 책자에서 이러한 주장들을 반박하였다. 루터는 De servo Arbitrio, 즉 「노예의지론」에서 에라스무스가 교황의 지위나, 면죄부, 연옥 등과 같은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 논쟁하지 않고 그들간 차이의 핵심적 문제로 다가간 것에 감사한다고 했지만 이내 곧 적대적인 모습을 취했다. 사실 인간의 자유보다는 하나님의 전능성이 진정한 주제였다.에라스무스는 인간이 항상 죄인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여기시기에 실상 의롭지 않으면서도 의롭다라 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이 구원을 이루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하나님과 협동하는 것이다. 이 협동이라는 단어는 루터에게는 저주받을 단어였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은 구원에 관해 하나님과 협동할 수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따른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과 도덕관념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절대 권능을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두 사람간의 차이는 신학상의 것이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저적인 은혜의 행위를 통해 죄를 용서 받는 데 있었다. 한편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구원은 인간의 응답을 요청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었다. 그러나 실상 차이는 신학적인 것 이상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가톨릭교회와 제국의 정죄를 받은 후에는 잠잠하여 하나님의 손으로 행하시는 옹호를 기다려야지, 당파를 만들어 그리스도교 세계의 평화를 뒤흔들지는 말았어야 했다고 여겼다.8) 프리아부르크 그리고 삶의 마감그는 프라이부르크로 갔다. 그곳에서 에라스무스는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전적으로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는 차라리 한 번의 도끼날이나 한 번의 장작더미 불꽃을 견디기만 하면 되는 순교자들을 부러워인적으로 가정 교사를 두는 것보다는 학교가 더 나으며, 각 학급은 아이들 숫자가 다섯을 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생은 아이들에 대해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어야 하며, 아이들의 개별적 능력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교육 프로그램은 최종적 직업에 대한 안목으로 차별을 두고 실시해서는 안 되지만 개별적 차이들은 대단히 중요하다.그는 잠자리에 들 때는 아이들에게 기도를 하도록 , 옆의 친구들에게 화를 내지 않도록. 친구들을 생각함에 있어서 고나대하도록, 그리고 좋은 책을 읽다가 잠이 들도록 조언하고 있다. 교육에 관한 위의 충고들은 당연히 부모들과 그리고 특별히 선생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는 「소년들은 위한 예절 교본」(Manual of Etiquette for Boys)라고 불릴 수도 있는 책을 쓸 정도로 교회건, 학교건, 어떤 곳에서든지 예절 문제를 위하여 신경썼다.공부의 실제적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에라스무스는 언어의 규칙들을 암기하는 것보다는 폭넓은 독서를 더 신뢰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이란 학생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그들로부터 끌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은 먼저 지식과 옛 시대의 지혜에 몰두하여야 한다. 단지 그런 연후에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학생은 일반적으로 이것을 처음에는 말을 모방함으로써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가르치는 사람이 언어를 올바르게 구사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이 때 에라스무스의 대화체 양식은 때때로 라틴어 회화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3. 에라스무스 그를 기억하며그는 「대화록」,「격언집」,「서신작성법」,「우신예찬」,「필립에게 드리는 찬사」,「그리스도인 군주의 교육」,「평화의 불평」, 제롬, 신약성서 등 많은 글들을 편찬해냈다. 고전 작가들의 번역과 편집 또한 그의 업적 중의 하나이다.그는 중용의 사람이었다. 한결같이 평화를 원했고,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인문학자답게 인간과 하나님의 조화를 추구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그는 개혁자가 아아니라, 개혁자들은 이해하는 신앙을 강조하면서 신앙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하는 신앙의 내용을 교육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기독교교육과 일반교육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독교교육에서 취급되는 교육의 내용만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2)교육방법의 변화중세까지의 거의 지배적이었던 교육의 방법은 ‘외우기’였다. 인문주의 역시인간의 정신능력을 중시하면서 이를 연습을 통하여 강화시키는 것에 큰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 ‘외우기’방법을 더 강하하였다. 그러나 학습자의 입장에서는 심히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주장에 반기를 든 것이 바로 개혁자들이다. 그들은 외우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단순히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지를 비판하면서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묻고 대답하는 방법’이다. 개혁자들은 학습내용의 바른 이해를 중시하여 이 이해를 위한 방법으로 묻고 대답하는 방법을 중시하였다.이로써 개혁자들은 기존에 줄 사용되었던 교육방법인 ‘읽어주기’. ‘외우기’에서 ‘설명하기’방법을 추가하였다. 이들의 질문법은 설명과 바른 이해를 위한 질문이었다.종교개혁자들이 이처럼 바른 이해아 해석을 중시하고, 이를 방법에 적용한 것은 그들의 이해하는 신앙, 말씀 중심의 신학이라는 기본적인 입장을 방법의 영역에서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5. 루터5-1 루터의 생애개혁자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동부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가레트 루터사이에서 일곱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스의 직업은 광부였는데 처음에 루터가 겨우 8살일 때에, 한스는 돈을 빌려, 어느 구리 광산회사의 소유주들 가운데 일원이 되었다. 20년 후에는 6개의 광구와 2개의 제련소들의 주식을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녀가 8명이나 되는 가족은 경제적으로는 별 어려움이 없었으며, 루터의 경우도 대학까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루터는 14세까지 만스펠드에 있는 학교에 다녔으며, 그 후 마그데부르크에 다.
    교육학| 2011.02.07| 21페이지| 2,500원| 조회(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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