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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의 남북조 외교와 요서경략설(요서경유설) 평가A+최고예요
    백제(百濟)의 남북조 외교(南北朝 外交)와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목차(目次)1. 서론2. 본론ㄱ. 對中外交의 시작ㄴ. 南北朝 외교ㄷ. 遼西經略說3. 결론※참고자료※레포트 요약백제의 외교에 관해서는 일본과의 외교에 대한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백제는 일본도 중요하지만 중국이 더욱 중요하다. 그 이유는 중국과 외교를 통해 그들의 선진 문물을 수입할 수 있었고 그들로부터 봉책을 받아 국제적으로 지위를 확보했기 때문이다.백제가 언제부터 중국과 관계를 맺었던 것은 완전히 확실하지 않으나 고대국가로서 완성단계에서 중국과 외교를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 레포트의 주된 내용은 백제의 남북조 외교와 요서경략설에 관한 것으로 백제가 맺었던 남북조 국가들은 북조인 북위?북제?북주가 있으며, 남조인 송?제?양?진이 있다.백제의 남북조 외교의 목적은 조공과 봉책에 있으며 백제의 주된 외교 대상이었던 남조는 대체적으로 백제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맺어진 관계이다. 하지만, 남북조 시대 말기에서부터는 백제는 남조말고도 북조에도 외교를 남조와 비슷하게 함으로서 두 왕조로부터 조공을하고 책봉을 받았다.요서경략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쟁 중이며 이 기록에 대한 기사는 남조 사서에서만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문제가 있다. 또한, 요서경략설에 대한 기사는 정확한 연대를 알 수가 없어 시기적으로 언제 백제가 요서를 경략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백제가 분명히 요서와 관련된 사건이 있기에 남조 사서에라도 백제가 요서를 경략했다는 기사가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생각된다.1. 서론백제(百濟)는 북방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해 온 부여계(夫餘系)의 일파이다.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세운 것으로 마한(馬韓)의 백제국(伯濟國))으로 시작하였다. 소국으로 시작한 백제는 주변 소국과 외교관계를 맺었지만 점차 세력을 키워 중국과 일본으로 뻗쳐나갔다. 우리가 주로 알고 있는 백제의 외교국가는 일본으로 중국과 백제의 외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중국은 백제와의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국가 추측한다. 하지만, 『晉書』에 의하면 마한이 분명히 일관되게 조공하였을 것이다. 이를 국명을 달리하는 백제가 조공한 것으로 해석하기는 힘들다. 쌍방의 분명한 상대의 인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조공의 특성에 의해서라도 이 때 조공한 것은 『晉書』의 기록대로 마한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三國史記』에 나타나 온조왕代 백제에 의해 멸망된 마한과는 대상이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 『三國史記』의 마한은 초기 백제와 인접하였던 차령, 금강 이북의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서 마한 54개국의 일부로서 파악된다. 그리고 『晉書』에 290년까지 나타나는 마한은 초기의 백제에 멸망되지 않고 있던 잔여의 마한세력으로서 이들의 역사 활동에 대한 기록이 바로 『晉書』의 마한으로 판단된다.)그러므로 『晉書』에서 이러한 마한의 역사활동이 사라지고 백제가 근초고왕 때 진나라와 공식적인 관계를 갖게 된 것은 마한의 잔여세력이 상존하고 있을 때는 이들에 의한 대중관계가 아직 계속되었다. 하지만, 백제가 근초고왕代에 이르러 이들의 세력을 정치적으로 복속함으로서 명실상부한 고대 국가의 백제로 발전하면서 대외적으로 백제란 국명으로 마한에 대신하여 진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게된 것이다. 근초고왕은 중국의 진나라와 통교함으로서 동북아시아의 일익을 담당하기 시작했던 것이다.ㄴ. 남북조 외교(南北朝 外交)백제는 ‘백제’라는 국가명으로 중국 왕조와 공식적인 외교수립은 근초고왕부터이다. 공식적으로 맺기 전에 고이왕대(古爾王代)에는 이미 마한의 이름으로 대중외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 왕조와 교섭을 하였다.백제의 대중외교은 주로 남조(南朝)와의 외교를 중심으로 조공과 봉책 관계로 이루어져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상호의 외교적 행위이었다. 백제의 진과의 외교관계의 빈도는 동시대의 고구려(高句麗)보다 많은 것으로, 백제의 남조 편중 외교의 성격을 알 수 있다.백제의 전성기를 연 근초고왕代는 삼국사이에 완충지대가 사라지고 삼국의 정립이 본격화 된 시기로 초반에 있어서의 과 이루어지기 시작한 백제의 대중관계는 진?송의 남조와의 관계로 일관되었다. 그러나 개로왕代에 이르면 이러한 외교 노선이 변화하여 북조인 북위(北魏))와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하여 위기감이 백제는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고구려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하여 개로왕은 북위와 연결함으로서 대응해보려는 의도였다. 백제는 개로왕 18년(472)에 북위의 효문제(孝文帝))에게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사마(司馬) 장무(張茂)를 파견하여 원병을 청하는 장문의 국서를 보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북위와의 조공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백제가 북위에게 청병을 요청한 사실을 알게 된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은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인다.장수왕의 남진으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은 함락되어 문주왕(文周王)은 475년 금강(錦江)유역의 웅진(雄鎭)으로 천도하였다. 고구려의 침입으로 갑자기 웅진으로 천도하였기 때문에 백제는 한성에 두었던 정치?경제?문화의 기반을 모두 잃게 되었다. 또한, 백제의 위축은 국제정세에 그대로 반영되어 웅진초기의 대중외교는 소원해지게 되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3월에 사신을 송에 보내어 조공하려했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아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라고 하여 문주왕은 송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자국책을 전개하였으나 고구려의 제해권 장악으로 통교를 못하였으며 삼근왕代(三斤王代))에 이르기까지 송과의 교섭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웅진으로 천도한 후 본격적으로 대중외교가 시작된 때는 동성왕(東城王)?무령왕(武寧王)代에 이르러서이다. 두 왕은 주로 남조의 제(齊))?양(梁))과의 외교이다.백제는 남제와의 초기 교섭에 있어 고구려 수군의 방해로 교섭이 원활하지 못하였으나 관제정비와 신진귀족층과의 결합을 하는 대내적 안정을 기반으로 탐라(耽羅)를 복속시키고 신라와의 결혼동맹 등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국력을 회복하고 서해남부사단 항로를 개척한 뒤 남제(南齊)와의 외교를 활발히 하였다. 양나라에 알렸고 이에 양나라의 고조는 무령왕을 봉책하였다.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更爲强國’으로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고구려로 인해 약해졌던 국력을 회복한 것으로 당시 백제의 중흥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양나라에서도 백제의 중흥을 인정하고 무령왕에게 ‘寧東大將軍’의 봉책을 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백제는 고구려에 의하여 한성을 잃고 웅진 천도를 단행한 후의 정국 불안이나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무령왕릉의 불굴에서 육조(六朝)시대 남조의 전축분(塼築墳), 즉 벽돌무덤을 본 딴 묘제는 물론 양나라의 석수(石獸)를 변형하여 만든 연도(羨道)와 부장품(副葬品) 중에 보이는 육조시대의 백자(白磁)접시, 녹유도기(綠釉陶器) 등은 무령왕과 남조의 양나라의 교섭이 활발히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백제 문화의 융성과 남조계 문화가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동성왕과 무령왕의 발전을 배경으로 성왕은 538년에 웅진에서 사비(泗?)로 천도하였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고쳐 중흥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신라와 동맹하여 한강회복을 진력하는 한편 남조와의 외교관계를 활발히 전개하였다.성왕의 양나라와 외교는 고구려를 의식한 정치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관계로서의 역할도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梁書』에서 “中大通六年,大同七年,累遣使獻方物;?請涅盤等經義、毛詩博士,?工匠、?師等,??給之。”로 “중대통6년 대동7년에 여러 번 사신이 와서 조공하고 ‘열반’ 등 경의와 ‘모시’와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기술자와 화가 등을 청하였다.”를 통해 백제의 성왕은 단순한 물자의 수입뿐만 아니라 유불 양도의 경전과 그에 따르는 전문가를 영입하고자 한 것은 주목된다.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威德王))代에 이르러 백제의 대중외교는 남조 편중외교를 지양(止揚)하고 북조와도 외교관계를 전개하였다. 이는 성왕代에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회복하였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백제는 신라와의 동맹이 결렬되었다. 이를 보복하기 위해 성왕은 군사를 일으켰으나 관산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梁書』에는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라고 적혀있고 이는 ‘그 나라(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시기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진평 두 군의 땅을 점거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라 하여 백제의 요서진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宋書』에는 백제의 진출지역이 진평군이라 하고 『梁書』에서는 백제군이라 하였지만 고구려의 요동진출에 대응하여 백제가 요서를 공략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우선 『宋書』을 보면 대중관계기사는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요서경략 기사는 26자에 불과하다. 『宋書』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고구려를 상대하는 백제가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백제는 요서지방을 영유했으며 이곳이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는 내용이다. 『宋書』에 기록된 내용은 주로 백제의 대중외교자료에 의존하여 편찬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宋書』에 처음으로 기록된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한 기록 또한 『宋書』가 편찬되는 5세기 후반경의 백제의 대중관계에서 비롯된 외교적 사실의 반영일 가능성이 높다.『宋書』 다음으로 『梁書』는 남북조시대에 편찬되지 못하고 당(唐)나라代에 편찬되었다. 『梁書』는 『宋書』와 달리 백제의 원류, 요서영유, 대중관계, 제도, 언어 등에 관하여 여러 가지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내용은 대부분이 이전 사서들의 내용을 답습한 부분이 많으며 동이(東夷), 부상국(扶桑國)) 등의 내용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문화에 대한 내용은 다양하게 전하여지고 있지만 이들의 내용은 대중관계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동시대적이라고 하기 힘들다. 또한, 요서경략 기록도 대체적으로 『宋書』를 답습한 것으로 보이지만 치소를 요서 진평이군(遼書 晉平二郡 )으로 표현하고 있다.「梁職貢圖」에서 백제의 사신도와 함께 백제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내용은 백제의 원류, 요서영유, 대중관계, 문화관.
    인문/어학| 2011.04.27| 12페이지| 1,000원| 조회(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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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중앙박물관레포트-한국의 공예(금속공예와 도자기공예) 평가A+최고예요
    한국의 공예금속공예와 도자기공예목차1. 서론2. 본론1) 신석기의 공예2) 청동기의 공예3) 금속공예와 제작기법4) 고구려의 공예5) 백제ㄱ. 백제의 금속공예ㄴ. 무령왕릉ㄷ. 백제금동대향로6) 신라ㄱ. 신라의 공예ㄴ. 금관ㄷ. 꾸미개7) 가야의 공예8) 고려ㄱ. 고려의 도자기 공예ㄴ. 비색청자ㄷ. 상감청자9) 조선ㄱ. 조선의 도자기 공예ㄴ. 분청사기ㄷ. 백자3. 끝으로1. 서론국립중앙박물관은 1945년 9월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인수 개편하여 덕수궁 안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다 6.25전쟁이후에 남산 분관, 덕수궁, 경복궁에 여러 번 이전하였다가 2005년에 용산가족공원 내에 새로운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층에는 고고학관과 역사관, 2층에는 미술관1과 기증관, 3층에는 미술관2와 아시아관으로 나뉘어져있다.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물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총체적인 역사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기증관이나 아시아관에서 흥미로운 것들도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하면서 공예를 주로 중점을 두었는데 공예를 택한 이유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우리나라 공예의 섬세함과 아름답기 때문이다.2. 본론1) 신석기 시대의 공예신석기 시대에는 생활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겨 신석기인들은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동물의 뼈나 뿔 등으로 자신의 몸을 꾸몄을 뿐만 아니라, 토기 겉면을 추상적인 무늬로 장식하는 나름대로 예술적 정서를 나타내었다. (그림 1)처럼 신석기 시대(그림 1, 조개 탈)의 공예품은 주로 돌, 흙, 동물의 뿔과 뼈 등을 재료로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러한 공예품들은 단순하지만 의례나 주술의 상징성을 띠고 있어, 신석기인의 예술과 신앙을 이해할 수 있었다.2) 청동기 시대의 공예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금속인 구리가 너무 물러서 실제생활에 이용하는데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구리에 주석을 섞어 만든 합금으로 견고하고 단단한 청동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청동기는 예리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농기구보다는 무공구로 많이 사용되어졌으며 청동기의 소유자는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상징한다.청동기 시대의 공예로는 (그림 2)와 같이 청동으로 만든 제사용 동검과 청동거울, 청동방울이 있으며 옥 장신구 또한 청동기 시대의 공예품이다.(그림 2, 비파형 동검) (그림 3, 대롱옥)옥 장신구에서 옥을 만드는 재료는 천하석(天河石)과 벽옥(碧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대롱옥(그림 3)의 제작 방법은 우선 원석을 일정한 형태로 마름질하고, 이를 고정한 뒤 돌송곳이 달린 활비비를 이용하여 구멍을 뚫는다. 이때 고운 모래가루를 넣으면 구멍이 쉽게 뚫리고 곱은 옥은 갈아서 형태를 만든 다음 구멍을 내고, 마지막으로 정밀하게 숫돌로 다듬어 마무리한다.3) 금속공예와 제작기법삼국시대의 공예에서 가장 발달한 것은 금속공예이다. 금속공예는 금, 은, 동, 철, 주석 등 금속 재료를 사용하여 일상생활이나 종교 의식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한국의 금속공예는 중국 동북 지방 청동기 문화의 영향으로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에는 금과 은을 새로운 재료로 사용하게 되면서, 정교한 세공기술을 바탕으로 세련된 공예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관(冠), 귀걸이, 허리띠 등 무덤에서 출토된 장신구는 당시의 정교한 공예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교의식에 많은 용구들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미술적 가치를 지닌 금속공예기술이 더욱 발달하였다.금속공예품은 열을 가하면 녹고 두드리면 펴지며 잡아당기면 늘어나는 금속의 특성을 이용하여 만들어진다. 금속공예품을 만드는 방법은 형태를 만드는 기법과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으로 나뉜다. 형태를 만드는 기법으로는 주조(鑄造)와 두드림(단조鍛造) 기법이 있다. 주조 기법은 열을 가하여 녹인 쇳물을 거푸집(틀)에 부어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다. 삼국시대에는 크고 정교한 형태의 향로와 불상을 만들 정도로 발전하였다. 두드림 기법은 금속을 두들기고 펴서 형태를 만드는 방법으로 삼국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4) 고구려(高句麗)의 공예고구려는 중국과 북방민접촉이 잦아 교류가 많았는데 이에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하였고 특유의 역동적이며 실용적인 문화를 창출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고분은 지상에 잘 드러나 있어 도굴이 쉽기 때문에 유물이 적어 박물관에서 고구려의 공예를 많이 볼 수 없었지만 내가 고구려의 전시관에 들어가면서 고구려의 유물을 살펴보았는데 내 눈에 확 들어온 것이 있었다.(그림 4, 맞새김무늬 꾸미개)바로 맞새김무늬 꾸미개(그림 4)이다. 그 이유는 비록 꾸미개이지만 내 눈에 가장 들어온 것은 가운데에 있는 삼족오였다. TV사극에서나 보았던 삼족오를 박물관에 있는 유물에서 삼족오를 본 것이 처음이기에 그저 신기했기 때문이다.5. 백제(百濟)의 공예백제의 금속공예는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한성기에는 주로 귀걸이와 목걸이가 제작되었다. 웅진기와 사비기에는 귀걸이, 목걸이, 팔찌, 관꾸미개, 허리띠의 꾸미개와 금속 그릇, 향로 등 여러 종류가 있다. 특히,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꾸미개는 화려한 조형감각이 엿보이고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삼국시대의 최고의 걸작품이다.백제의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武寧王)의 연대를 기록한 묘지(墓誌)와 2,900여 점의 화려하고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무령왕릉은 벽돌무덤으로 중국 남조의 무덤과 닮았으며,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중국, 일본과 관련된 것이어서 백제 문화의 국제성과 개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관꾸미개나 귀걸이, 매장 방법 등은 백제의 고유한 전통과 특색을 지니고 있어 백제가 주체성을 가지고 외부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었다.(그림 5, 무령왕릉에 출토된 백제왕의 금제 관장식)내가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제일 관심있는 것은 백제의 공예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최고의 걸작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盧)이다. 이 대향로는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머리에서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을 정도로 한눈에 반해버렸다.(그림 6, 백제금동대향로)백제금동대향로는 높이 61.8cm, 11.85kg로 다리와 몸체,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고, 꼭대기에는 한 마리의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이 향로는 백제 왕실에 의해 건립된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어 왕실의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뚜껑에는 12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연기가 빠져 나갈 수 있고, 74개의 산봉우리와 17명의 사람, 호랑이와 코끼리 등 각종 동물, 나무, 바위 등이 마치 신기루 속의 세계처럼 묘사되어 있다. 몸체에는 갓 피어나려는 연꽃이 표현되어 있고, 꽃잎과 그 사이 사이에 두 사람과 날개달린 물고기, 새 등 27마리의 동물이 뛰어 놀고 있다. 다리에는 용트림하듯 역동적인 자세의 용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향로는 수중세계의 용과 땅 위의 이상세계를 옮겨 놓은 듯한 뚜껑, 하늘을 상징하는 봉황 등 우주의 삼라만상을 캡슐 속에 담고 있는 듯했다.6. 신라(新羅)의 공예신라의 문화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불교가 대표이다.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금관, 귀걸이 등은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부를 만큼 화려하고 뛰어난 세계적 금공예품이 있다. (그림 7)과 같이 금귀걸이은 신라 공예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그림 7, 신라 금귀걸이)신라 공예의 아름다움은 금귀걸이뿐만 아니라 금관(그림 8)에서도 볼 수 있는데 금관에서 신라의 황금문화와 최고의 금속 공예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금관에는 나무, 사슴뿔 그리고 새 등의 다양한 요소가 담겨져 있는데 나무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것으로 왕을 상징한다. 사슴뿔은 시베리아지역 샤먼이 사용하는 모자에 등장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나무와 사슴뿔모양의 세움장식에는 비취와 열매와 황금잎이 달린 듯 곱은 옥과 날개가 달려있어 신라의(그림 8, 신라 금관)아름다움을 한껏 보여준다. 금관은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들었기 때문에 머리에 쓰고 활동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금관, 허리띠, 관모, 귀걸이, 목걸이, 반지 등을 꾸미개라고 불리는데 신라의 꾸미개는 재질이나 형태가 다양하며 화려하다. 그래서 고대 일본인들은 신라를 ‘눈부신 은의 나라’라고 불렀듯이 신라의 꾸미개는 대부분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다.7. 가야(伽倻)의 공예가야는 변한(弁韓)에서 출발하였고 낙동강 중하류에서 풍부한 철 자원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가야의 공예로는 금동관, 귀걸이, 반지, 목걸이 등으로 있고 금, 은으로 되어있다. 가야의 금동관(그림 9)은 관테와 풀꽃모양(草花形) 세움장식이 있는 형태로서 나뭇가지모양 (樹枝形) 장식의 신라의 금관과는 다르다.(그림 9, 가야 금동관)8. 고려(高麗)의 공예고려의 공예품은 주로 도자기이다. 그 도자기에서 청자, 백자, 철유자(鐵釉磁), 흑유자(黑釉磁) 등이 있는데 그 중 청자는 맑고 갠 푸른 하늘을 생각나게 한다. 청자는 다른 자기보다 많이 제작 되었고 질적으로도 뛰어나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자기라 할 수 있다. 청자는 자기 태토(胎土)에 유약을 입힌 뒤에 가마에 넣어 1,250'C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것이다. 청자는 비색(翡色) 청자(그림 10)와 상감(象嵌)청자로 나눌 수 있다.비색청자는 은은한 녹색으로 비취색 띄어 비색청자라고 부르는데 이 청자는 고려 사람들이 깊은 애정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고, 도자기의 종주국인 송나라 사람들도 중국 청자보다 뛰어나다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비색청자는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전반까지 가장 세련된 색을 띤다. 상감청자(그림 11)는 12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순청자의 아름다운 비색에 더 독창적이고 고려화된 문양과 기법으로 만들어졌다.상감청자는 자기의 바탕흙(胎土)에 무늬를 새기고, 다른 종류의 흙을 메워 넣는 기법으로 장식한 청자이다. 원래 다른 재료로 메워서 꾸미는 기법은 나전칠기(螺鈿漆器)나 금속공예의 입사(入絲)기법에서 볼 수 있는데, 이를 도자기에 응용한 것은 고려 장인의 창의적인 발상을 엿볼 수 있다. 상감기법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이미 있었으며 12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감기법은 세계의 도자기 역사에서 고려가 이룬 뛰어난 업적으로, 비색청자 유약과 더불어 고려청자의 특징이 되다.
    인문/어학| 2011.03.29| 11페이지| 1,000원| 조회(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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