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문요약여말선초의 민본 사상과 명분론2010005030불어불문학과이 예슬민본사상과 명분론은 여말선초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의 전 기간을 통하여 유교적 정치 이념의 핵심적인 내용이다.고려말기 사회의 근저에는 지주와 전호농민의 계급적 대립이 놓여 있었다. 지주계급은 대부분 지배신분에 속하는 자들로서, 그들은 자신의 소유지에 전호농민들을 긴박시켜 이들 농민들로부터 생산물을 수탈하였다. 고려 말기 농민층의 분화는 양인 농민 가운데서 상당한 부분을 소토지 소유 농민에서 무전 농민으로 전락시켜 갔다. 이들 무전 농민은 결국 지주의 소유 토지 속에 존호 농민으로 흡수되었다. 노비 전호를 사용한 농장제 지주 경영의 중대와 양인 전호를 사용한 병작제 지주 경영의 발달은 고려 말기에 심각한 사회 문제로 까지 발전하였다. 노비전호와 양인 전호는 양자 모두 피지배 신분으로서 지주에게 인격적으로 예속되어 있으며, 그를 통해 생산물을 수탈당하는 것은 동일하였다. 이러한 전호 농민의 관계는 적대적인 계급의 대립의 관계를 형성한다. 고려말기에 지배 신분 계급과 피지배 신분 계급의 대립관계가 정치 사회적인 문제로 된 것은 전주와 전객 농민 사이의 대립이었다. 전주 전객제는 수조권적 토지 지배를 매개로 하였다. 이미 고려 전기의 전시과 제도에 의하여 법적제도로 확립 되었고,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제도인 지주 전화제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우리나라의 중세적 토지제도의 기본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정세에 의하여 수조권적 토지 지배의 시간적 공간적 제한이 무너지면서 수조지의 세습과 집중 현상이 보편화 되었다. 전주는 양인 신분인 전객 농민이 국가에 대하여 부담하였던 공부와 역역까지 수탈하였다. 전주에 의한 가혹한 수탈은, 경우에 따라서는 전객 농민의 토지 소유를 포기하도록 하며, 나아가서는 양인으로서의 신분까지 포기하도록 하였다. 전주의 정치적 권력이 수탈과 지배를 더욱 용이하게 하였다. 후에 전객 농민은 자신의 거주지를 떠남으로써 국가의 수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려 말기에 소유권적 토지 지배를 근거로 한 지주, 전호제는 그 지주 계급 내부에 다양한 정치, 사회적 계층을 포함하고 있었다. 지배 신분 계급에 의한 수탈의 강화는 오히려 소농 경영을 파탄 시켰다. 소토지 소유 농민이 무전 농민으로 전락하며, 양인 신분의 농민이 노비로 전락하였다. 많은 수의 농민들이 토지소유와 거주지를 포기하고 떠나 유민으로 전락해갔으며 그들은 특권 귀족층의 사적인 지배와 수탈 속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유민의 증가와 그들의 사민으로의 전환은 동시에 국가의 재정을 악화시키고, 국가 권력을 약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이기도 하였다.고려 후기의 향호층은 당시의 생산력 발달에 적극적으로 기여, 혹은 편승하면서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고, 그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적인 지위의 상승을 도모하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를 통해 관료로 성장하였고, 이러한 관료들이 결집하여 형성안 정치 세력이 곧 신흥유신이었다. 신흥 유신 역시 농민층과는 신분계급적으로 대립되는 정치 세력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으며, 신흥유신에 의하여 향호층의 성장이 억제되는 조치가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신흥 유신은 한편으로는 향호층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인정하였으나,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는 향호층의 입장을 적극적으로는 수용하지 않았다. 조선초기 왕권개혁으로 인해 집권 세력이 된 신흥유신은 향호층 내부의 신분적 분열을 이용하면서 향호층의 자치적인 성향을 억제하고, 그들을 집권적 정치 체제에 의한 지방 통치의 말단 행정 요원의 위치에 고정시키는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하였다.여말선초의 법제 개혁의 목표는 부와 권력의 재분배였다. 여말 선초에 부국 강병과 민본의 이념에 의해 설명 되던 현실의 정치 과정이란, 앞서 말한바와 같이, 토지제도를 비롯한 일련의 법적 제도에 대한 개혁 과정이었으며, 그 개혁의 본질적 성격은 지배 신분 계극 내부에서의 부와 권력을 재분배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개혁은 한편으로는 국가의 물질적 기반을 증대시키는 조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소농 경영의 안정에 일정하게 기여하기도 하였다. 부국 강병과 민본의 이념은 실제 개혁의 이러한 성격에 입각하여 나름대로의 현실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부국 강병을 위한 개념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국 강병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부국 강병이라는 국가적 이익과 '민'으로 표현되는 국가 주민의 이익이 무조건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닐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서로 배치되기도 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부국 강병의 이념이 국가의 이익을 표방한데 반하여, 그 이념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는 민생의 안정을 포방하였다. 부국 강병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비판적 이념으로서 제시된 것이 민본 사상이었다.특권 귀족층의 사적인 권력 행사, 사적인 경제 기반을 박탈 축소하는 조치는 집권적 정치 체제의 확립 강화와 함께 민생의 안정에도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민본 사상은 집권적 정치 체제를 통한 지배 신분 계급의 국가 주민에 대한 지배와 수탈을 합리화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는 부국 강병의 이념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부국 강병의 이념이 국가적 이익을 강조하는데 반하여, 민본의 이념은 국가 주민에 대한 온정적 배려를 강조하는 차이밖에 없었다. '민본적'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의 통치가 국가 주민에 대하여 일정한 정도의 온정적 배려를 수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여말 선초의 민본 사상은 지배 신분 계급에 의한 국가적 통치를 당연한 전제로 하고, 그 통치가 국가 주민에 대한 온정적 배려를 수반하는 것이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 국가적 통치에서 베풀어지는 온정적 배려는 법률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통치자층의 도덕적 자질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었다. 민본사상은 인정의 이념, 군자에 의한 통치라는 이념과 함께 하나의 이념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념체계에 의하여 국가적 통치의 신분 계급적 성격은 보다 용이하게 은폐, 왜곡될 수 있었다.여말선초의 정치 이념은 민본 사상과 함께 명분론이 그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 명분론은 이 시기의 가족 관계, 정치 사회적 인간 관계, 그리고 국제 관계의 성격을 설명하는 광범위한 이념 체계였다.명분론에서 군신관계는 부자 관계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였으며, 군신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충의 규범은 효와 함께 이 시기의 모든 도덕적 규범에 우선하는 것이며, 또한 절대적인 것이었다. 부자의 관계가 恩의 성격을 기본으로 하는데 반해, 군신의 관계는 義의 성격을 기본으로 하는 인간관계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부자와 군신의 관계는 두 가지 인간관계가 동일한 성격의 인간 관계라는 점을 더욱 강조한다. 여말선초의 군신지분의 사회 의식, 혹은 군신 관계에서 인정되는 신하의 상대적 자율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반드시 설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역성 혁명론이 있다. 역셩 혁명론은 신왕조의 개창을 합리화 하는 정치 이념으로서 중요한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는 군신간의 명분론과 모순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그 명분론이 신하의 주체적 행위로서 군주의 교체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군신지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군주와 신하, 즉 통치자 집단 내부의 인간관계이다. 그러나 역셩 형명론은 통치자 집단과 '민' 즉 피치자 집단 사이의 관계를 문제로 삼는다.
아동발달과 부모교육 - 발달이론(피아제, 프로이드, 에릭슨 이론 中1개 + 기타이론 1개)2010005030ooo에릭슨(Erikson)의 이론에릭슨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어가는데 초점을 맞추어 인간의 발달을 전 생애적 발달로 보고, 각 단계마다 아동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에릭슨은 자아의 발달에 따른 건전한 정체감 형성을 강조하였다.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8단계(1)제1단계 : 신뢰감 대 불신감[출생~1세(12개월)] - 프로이드의 구강기에 해당신뢰감 : 건강한 성격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유아는 어머니와의 신체적?심리적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발달하게 된다. 또한 양육자의 애정적이고 반응적인 돌봄을 통해 유아는 세상에 대한 신뢰감을 형성하고 발달시켜 발달의 기초틀을 형성할 수 있다. 신뢰감을 형성하려면 영아의 신체적 욕구에 대 해 일관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머니가 일관성 있게 보살피면 기본적 신뢰감이 형성되나 일관성이 없으면 불신감을 갖게 된다. 아동은 어머니와의 신뢰감을 통해 사회적 신뢰감도 형성할 수 있다.(2)제2단계 : 자율성 대 수치심 및 회의감[2~3세] - 프로이드의 항문기에 해당이 시기의 아동들은 자신들의 행동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어 유아는 의도적 행동을 통해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때 부모가 아동의 자율적 의지를 적절히 격려해주면 아동은 자신감을 발휘하여 자율성을 발달시킨다. 반면, 부모가 아동의 실수를 비난하게 되면 아동은 수치감을 갖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부모가 아이를 너무 과잉보호하게 되면 아이는 스스로 환경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해 자신의 능력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 된다. 특히 대소변 훈련은 아동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에 대한 독립심을 키워줌으로써 아동의 자율성 발달에 기초가 된다.(3)제3단계 : 주도성 대 죄책감(죄의식)[4~5세] - 프로이드의 남근기에 해당이 단계 아동들이 언어를 획득하고 개념들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신체적 움직임이 많아지면서 더욱 많은 것을 행할 수 있으며 자신의 활동에 대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는 주도성이 발달하게 된다. 이 시기는 인지지능이 발달함으로써 호기심이 가장 많을 때 이다. 따라서 부모의 역할이 아동의 주도성 발달에 중요하다. 그리고 아동의 주도적 행동이 바람직하지 못할 때 부모에게로부터 제재를 받을수 있는데 부모의 제재가 일관적이지 못하거나 따뜻함이 결여되어 있으면 아동은 주도적 행동에 자신감을 잃을 뿐 아니라 죄책감이 발달하게 된다. (3단계에는 아동의 사회적 활동범위가 넓혀져 능동적이고 목적 지향적이고 책임감있는 행동들이 요구된다.)(4)제4단계 : 근면성 대 열등감[6~11세, 아동기] - 프로이드의 잠복기에 해당아동이 초등학교에서 주어진 학습을 수행하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과제 완수로부터의 즐거움을 느낀다면 아동은 건전한 근면성을 개발하는 반면, 계속적인 실수를 하게 되거나 성취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자신감과 근면성이 개발되지 않고 열등감을 느낀다. 또한 부모나 교사의 건설적이고 교훈적인 칭찬이나 강화는 근면성을 길러준다. 그러나 어른들이 아동을 친구와 비교한다든지, 조롱하거나 비난하고 거부적인 태도를 보이면 아동들을 부적합감이나 열등의식을 발달시킨다. 에릭슨은 이 단계에 아동의 잠재적 능력이 개발되어 키워지지 않는다면 아동의 능력은 영원히 잠재될 수 있고, 근면성은 이후의 학교생활이나 학업성취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5)제5단계 : 정체감 대 정체감 혼돈[12~18세, 청소년기] - 프로이드의 성기기초반에 해당이 시기의 청소년은 급격한 신체변화와 사회적 요구에 당황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에 해답을 얻지 못하여 고민, 갈등, 방황이 길어지게 되면 정체감의 혼돈이 일어난다. 정체감 혼돈의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청소년들은 성인기에 부정적이며 미성숙한 인성특성을 가지게 된다.(6)제6단계 : 친밀감 대 고립감[19~35세, 성인초기]이 단계에서는 부모로부터 독립을 성취하여 직업을 선택하고 배우자를 찾으면서 성숙하고 책임있는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한다. 또한 우정 혹은 성적결합의 형태로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수립한다. 타인과 친밀감을 발달시키지 못할 경우는 고립감의 위기를 갖는다. 친밀한 관계 수립에 실패한 개인은 고립감을 가지고 타인과의 접촉을 회피하거나 자신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사람에게 거부적이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7)제7단계 : 생산성 대 침체감[36~50세, 중년기] -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이 과제이다.이 시기에는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사회적 전통을 전수시키며, 가치관을 배양시켜 전달하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하게되어 생산성을 획득한다. 또한 직업적인 성취나 자기분야, 업적에서 생산성을 획득할 수 있고, 사회봉사활동으로 생산성을 발휘할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물질적?신체적 안녕에만 치중하게 되면 타인에 대한 관대함이 결여되고 인생에 보람을 느끼지 못해 따분함과 공허감을 많이 느낀다.(8)제8단계 : 자아 통합감 대 절망감[노년기]노년기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보람이 있었고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오랜 삶을 통해 노련한 지혜를 획득하게 되면 자아통합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신체적인 노쇠와 은퇴, 주변인물의 사망 등이 일어나는 인생말기이므로 무력감을 많이 느끼는 시기이며, 무력감과 후회는 절망감으로 이어진다.게젤(Gessell)의 성숙이론성숙이론은 발달이 유전적으로 규정되어 있어, 유전이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성숙이론 에서는 아동의 발달이 환경이나 경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생물학적 시간표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게젤이 아동의 신체행동을 관찰한 결과, 아동의 신경계가 충분히 성숙되어 준비가 완료된 후에야 앉고 걷기를 할 수 있음을 발견하여 준비도의 개념을 강조하였다.( * 유기체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6개월 된 아동은 그가 받은 경험이나 훈련의 양과는 상관없이 신체적?신경학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아 결코 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게젤의 성숙이론은 조기교육의 열풍으로 수많은 아동들이 어린나이에 어른들의 통제를 받고 서둘러 교육을 받는 현상을 비추어 볼 때 성인들에게 아동 스스로가 성장할 기회를 주고 기다리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준다.
프랑스 민족의 구성유럽에서도 프랑스는 일찍부터 인간이 정착한 곳으로, 네안데르탈인보다 10만 년을 앞선다. 구석기시대인은 주로 수렵생활을 하였으며, 구릉의 주변과 동굴 속에서 생활하였다. 도르도뉴는 현재 빈민지역이지만 당시 인간의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들 동굴에 남아 있는 벽화는 짐승과 수렵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삼림이 늘어나고, 자유로운 수렵장인 초원이 줄어듬에 따라 인간들의 생활도 에서 으로 바뀌게 되었다.그후 농업과 상업이 시작되어 지중해 서부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프랑스로 이주해 오게 되었다. 지중해인이라고 불리는데 작은 키, 마른 몸에 긴얼굴, 머리털과 눈은 검다. 또 서아시아로부터 서진(西進)하여 황토지대를 따라 농업을 하던 사람들이 알프스인들인데 이들은 단두(短頭)가 특징이다. 북방인이라고 불리는 인종은 러시아 스텝지역에 살고 있던 수렵민으로 이들 역시 황토지대의 서쪽에 주로 수렵에 종사하였다. 켈트인도 이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로마시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로 이주해 왔다. 그들은 키가 크고 머리털은 블론드이며 푸른눈에 장두(長頭)형이다. 이들 각 인종들이 프랑스에서 혼합되었으며, 특히 파리분지는 인종혼합의 중심지였다.인종의 혼합은 고대, 중세를 통하여 계속되었다. 로마시대 및 그 이후에도 많은 침입자가 있었으며, 인종혼합을 거듭하여 지금의 프랑스인이 형성 되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인종적 특성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도 있다.피레네 서부지방의 바스크인은 스페인 바스크인의 일부이며 바스크어를 사용한다. 노르망디인은 브리튼어를 사용하는 켈트계 주민이다. 이들은 프랑스의 소수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프랑스인들은 키가 유달리 고르지 못한데, 그 이유는 인종 혼혈이 심하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중앙에 자리잡은 프랑스엔 북구, 중구, 남구 등에 있는 각종 인종들이 밀고 밀리고 올라가고 내려오는 바람에 다른 어느 유럽 나라들보다 혼혈이 심하다.프랑스에 혼혈이 심한 이유는 프랑스 대륙이 유럽의중앙에 위치하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는 이야기죠. (그러니 백년씩이나 전쟁을 계속하지;;;)쉽게 말하면 영국군은 영국에 붙은 동맹 연합군이고 프랑스군은 프랑스에 붙은 동맹 연합군이라는 이야기죠.서로 단합이 잘 안되었습니다. 왜냐면 같은 군대 내에서도 출신 도시에 따라 병사들, 지휘관들 사이에서 알력이 심하고 서로 자기 군대의 병력은 아끼고 남이 대신 싸워주기를 바랬으니까요. 오히려 전쟁 이후에 자기 도시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 있도록 다른 도시 출신의 군대가 공격을 받고 큰 손실을 입으면 쾌재를 부르기도 했습니다.이래서야 훨씬 더 우수한 무기(석궁)를 보유한 영국과 제대로 전쟁이 될 리가 없죠. 매번 패주합니다.그런데 거기에 대고 잔다르크가 "프랑스 국민"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 병사들을 단합시켜 버리고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던(하지만 국민이라는 개념으로 통합되지는 않았던) 영국군을 축출해버립니다. 그때부터 국민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깨닫고 각 국가는 주민들에게 국민이라는 개념을 주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최근 유럽은 EU라는 개념을 들고 와서 "하나의 유럽"이라는, "국민"보다 큰 규모의 개념을 성립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또 민족이라는 개념은...사실 서구에서도 100년이 채 안 되었죠.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 윌슨 대통령이 들고나온 민족자결주의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왜 들고 나왔는가...사람이 하는 행동에는 절대로 완벽하게 이타적인 행동이 없다는 걸 주지하시고 조금만 생각해보시면 됩니다.(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역시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일종의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미국은 2차대전 직전까지는 그저 그런 나라였죠. 제국주의 열강 -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 비해 보잘 것 없었습니다.그러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매우 강성해졌는데,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기존의 열강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다시 기어오를 것 으로 대체되었다.㈂ 파리의 생활은 이미 한가히 소요하는 시간을 거의 허용치 않고 있다.㈃ TV와 교통의 가속화와 통신수단의 발달의 결과로 프랑스인의 시야는 넓어졌고 이제는 지구촌의 리듬으로 살고 있다.㈄ 1980년대에 다시 나타났던 개인주의가 오늘날에는 집단의 연대성으로 바뀌었다.㈅ 창조성의 이름으로 발명의 정신이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전근대 시기 민족의 중요성근대주의자들은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중세시대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대체로 부인한다. 그것을 18세기 말 이후 근대의 산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근대 시기에 민족이나 민족주의 비슷한 것이 있더라도 그 의미를 매우 과소평가한다.따라서 근대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전근대 시기에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긴요하다. 만약 단 몇 개의 민족이나 민족주의만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근대주의적 해석의 기초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전근대 민족이나 민족주의의 존재는 비유럽지역의 민족과 민족주의를 설명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민족의 존재를 서양만이 아니라 인류사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비유럽지역의 민족주의도 서양으로부터의 수입 이데올로기라는 딱지를 떼고 어느 정도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할 가능성을 갖는다. 즉 19세기 말이나 20세기에 서양에서 받아들였으므로 그 민족들은 인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전근대 시기에 민족이나 민족감정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1960, 70년대만 해도 민족주의 연구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생각되던 한스 콘에게서 비롯했다. 그가 1944년에 낸 에서 중세 시대에는 종교적, 정치적 보편주의 때문에 민족의식이 발전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세인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생활했으므로 기껏해야 지역 공동체의 감각만을 느꼈다는 것이다.그도 중세 말에 민족적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후대에 민족주의가 발전하기 위한 첫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그 이상은 아니 로마를 기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주장한 데 대해 프랑스인들은 문화의 중심지가 이미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졌다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15세기에는 프랑스내의 오키탄어나 브레타뉴어, 바스크어, 플랑드르어 등 다른 언어에 대한 불어의 지위 상승과 결합하며 민족문화라는 생각도 등장했다.15세기 후반의 Robert Gaguin이라는 사람의 글을 보면 당시의 민족적 정체성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프랑스(France)를 조국(Patria)이라고 부르며 조국에 대한 사랑, 프랑스의 영광과 명예가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다고 말한다. 또 프랑스의 영토, 역사, 민족성과 관련해 열렬한 민족감정을 토로하고 있다.이런 것들을 보면 1500년이면 프랑스지역에도 잉글랜드보다는 못해도 민족적 정체성이 분명히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것은 아직은 좁은 엘리트 집단에 한한 것으로 생각된다.여기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만을 다룬 것은 두 민족의 규모나 후대에 미친 영향력 때문이다. 그러나 해스팅스(A.Hastings)같은 학자는 서유럽 대부분의 주된 민족들이 15세기까지는 성립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들과 근대의 민족들과의 관계는 너무 밀접해서 그 상관관계는 결코 우연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의 출현에 더 중요한 시기는 18세기까지의 근대 초 시기이다.백년 전쟁백년 전쟁(百年戰爭)은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으로 프랑스를 전장으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계속되었다. 명분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였고, 실제 원인은 영토 문제였다. 백년전쟁은 1360년의 브레티니-칼레 조약의 체결까지를 제1기, 1415년의 아쟁쿠르 전투 또는 1420년의 트루아 조약의 전과 후를 제2기·제3기로 나눈다.원인영국은 1066년 노르만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서는 영국 왕의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왕보다 더 많은 지경이었다.진흙탕을 거치면서 기병의 특유한 충격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장궁대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이때 영국군이 동원한 장궁은 그 이전에 석궁에 비해서 훨씬 사거리 및 위력이 더 강한 것이었다. 이 장궁은 본래 웨일스 지방의 사냥꾼들이 사용하던 것이었으나 영국 왕실은 그 위력을 알아보고 전쟁에 동원한 것이다. 프랑스군은 이를 몰랐다. 영국군은 크레시 전투에 승리한 그 여세를 몰아 칼레 시(市)로 진격하여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칼레시민들은 완강하게 계속 저항하였으나, 1347년 마침내 영국군에게 항복하였다(칼레 포위전). 칼레지구가 영국령으로 확정되었다. 에드워드의 전략은 앙주-플랜태저넷 왕가의 옛 대륙 영토 전 지역의 회복을 겨냥한 것이었다.그 뒤 양국에 페스트가 유행한 데다 재정사정도 악화되어 한때 전쟁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355년 흑태자는 다시 남프랑스를 침입하였다. 1350년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장 2세가 즉위하였으나, 1356년 흑태자는 장 2세가 인솔한 프랑스군을 푸아티에 전투에서 격파하고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처럼 전쟁 초기에 거둔 영국군의 일방적 승리는, 독립적 자영 농민을 주력으로 한 보병의 장궁대 전법이 프랑스의 봉건 기사군의 전법에 비해 우수하였기 때문이었다.1359년 다시 공격을 시작한 에드워드에게 프랑스는 화의를 청하였다. 1360년 샤르트르 근교 브레티니에서 프랑스 왕가의 대표단과 협의하고 뒤에 칼레에서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프랑스왕 장 2세(재위 1350년 ~ 1364년)의 서명을 얻어 발효한 휴전 조약이 브레티니-칼레 조약이다. 브레티니-칼레 조약은 푸아티에를 비롯하여 옛 앙주왕령의 영국 왕실로 귀속을 규정한 다음 제12조에서 프랑스왕은 그 여러 영토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 영국왕은 특히 《프랑스 왕관과 왕국의 이름 및 권리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할 것을 규정하였다. 이것은 애초부터 영국 왕은 프랑스 왕관보다 영토를 더 중요시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전쟁의 참
-보고서 쓰기2011 SBS 창사특집 “최후의 바다, 태평양”- 3부 낙원의 조건 (방송일시 : 2011년 11월 27일 (일) 밤 11시 ) -● 기획의도우리에겐 낙원으로 그려지는 태평양의 섬..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천년의 시간을 보낸 원주민들은 삶의 전통과 지혜, 섬과 더불어 사는 작은 풍요의 행복을 얻었다.그러나, 태평양 원주민들이 만들어 낸 지속가능한 풍요는 위협받고 있다.서구화, 세계화의 물결은 태평양 구석구석의 작은 섬까지 변화시키고 있다.작은 섬에 살고 있는 태평양 원주민들의 모습은 지구라는 섬에 살고 있는 인류의 축소판!태평양 원주민들이 온몸으로 전하는 삶의 지혜는 무엇일까?● 주요내용1) 솔로몬 제도의 산타카탈리나(Santa Catalina)섬▶ 시간이 멈춘 작은 섬, 오와리키▶ 국내 최초 공개! 천년을 이어온 워고시아(Wagosia) 축제▶ ‘피카피카’ ; 거미줄과 연으로 물고기를 잡는 독특한 낚시법!2) 투발루의 푸나푸티섬(Funafuti)섬▶ 가라앉는 땅 투발루의 숨겨진 진실, 쓰레기 섬아름다운 옥색 바다가 펼쳐진 투발루, 8개의 산호초 섬들로 이뤄진 투발루의 첫인상은 태평양의 조용한 낙원. 그러나 투발루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2001년 국토 포기를 선언한 위기의 섬나라로 유명하다. 길이 12km의 작은 섬 투발루의 끝자락에는 난지도 같은 쓰레기장이 있었다. 현재 쓰레기 더미가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투발루의 본섬, 푸나푸티의 10%를 차지하고 있고, 그 면적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쓰레기가 쌓여간다면 주민들이 살 땅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3) 미크로네시아의 얍(Yap)섬▶ 세계에서 가장 큰 돈, 라이(Rai)얍 섬의 Rai(돌돈)은 세상에서 가장 큰 돈이다. 겉보기엔 둥그런 돌의 가운데 구멍을 낸 동전 모양인 이 돌돈은 현재도 마을의 분쟁을 해결하는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그들은 왜 돌돈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돌 때문에 목숨을 걸고 항해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풍요가 남긴 유산, 스톤 머니에 담긴 태평양의 정신태평양 사람들이 추구했던 풍요는 단순한 물질적 풍요가 아닌 그 이상이었다. 가장 투박하고 비효율적인 돌돈을 통해, 태평양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풍요’의 이야기를 소개한다.감상 & 느낀점몇 일 전에 무심코 TV를 틀었는데 태평양에 대한 다큐가 나오고 있었다. 푸른빛의 바다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계속 이 다큐를 보게 되었다. 다큐를 한참 보다보니 문득 환경수업과제에 대하여 생각이 났다. 그래서 더욱더 집중하여 보았다. 우선 정말 푸른빛의 아름다운 바다가 자꾸 떠오른다. 정말 맑고 깨끗한, 나의 꿈속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바다였다. 태평양에 있는 산타카탈리나섬 사람들을 소개하는 형식이었는데, 거기의 사람들은 너무 행복해보였다. 1000년의 역사속에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려하고, 낚시하나를 할 때에도 천천히 잡힐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모습이 ‘빨리빨리’만을 추구하는 현대 생활과 너무 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축제를 하는데 축제는 다름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병을 물리치기위한 축제였다. 사람들의 소망이 거대하지 않고 소박한데에 그치는 그런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그곳의 사람들은 코코넛열매 하나에도 기뻐하고 모두 나누어 먹으며, 아이들은 뛰어놀고, 마을사람들 모두가 어울려 생계를 꾸리고 소통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정말 지금 내가 사는 곳, 여기에서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그런 일이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은 보기 힘들어졌으며, 모두들 꿈이 돈과 관련되어있고, 행복보다는 부가 우선시되어있고, 이웃과는 소통조차 되지 않는, 나는 그런 삭막한 곳에 살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물론 지금 생활이 빠르고 편리하기는 하지만 나도 부와 명예가 아닌 행복이 우선시되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자꾸 들고있다.
(사례1)신용카드 할인혜택에 대한 피해모 통신판매업체에서 고객 50만명 돌파기념으로 화장품이 당첨되었다고 전화하면서 모 클럽에 가입을 하게 되면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 한참 후에 다른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4만원씩 12개월만 내고 회원으로 가입하면 핸드폰 요금 30% 감면, ㅇㅇㅇ 빌리지 무료숙박권, 동남아시아 무료숙박권 등을 보내 주고, 돈은 나중에 다시 환불해 준다고 설명했다.이상하게 여겨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하니까 한 달은 무료니까 가입만 하고 사용을 안 해도 되며 사용을 안할 경우에는 이용료 부담 없이 아무때나 원할 때 해지가 가능하다며 일단은 카드번호를 불러 달라고 요청하였다.무료라는 말에 솔깃하여 카드번호를 불러 주면서 카드번호는 왜 필요한지를 물었더니 신용이 좋아야 회원으로 가입할수 있기에 신용상태를 조회해 보기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이후 매달 4만원씩 신용카드로 빠져 나갔다.해결전화로 기념 이벤트 등에 당첨되었다고 하면서 일정한 금액의 회비를 신용카드 할부로 결제하면 엄청난 할인혜택을 드린다고 선전하는 ‘회원제 서비스’ 업체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물론 선전했던 서비스는 대부분 형편 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따라서, 이러한 유형의 전화를 받으실 경우에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신용카드 번호를 절대로 알려줘서는 안됩니다. 실물카드가 없더라도 방문판매나 통신판매업자들을 위한 ‘수기전표특약’이라는 규정에 따라 신용카드번호만으로 결제를 요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혹시라도 알려줬을 경우에는 카드사에 문의한 후 결제가 되었다면 가능한 한 빨리 내용증명을 카드사에 발송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한편, 신용카드 전표도 신중히 관리하거나 확실하게 폐기해야 합니다.전표를 함부로 방치할 경우, 신용카드 번호와 유효기간만으로도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 물건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례2)복제카드 부정사용에 따른 책임유무신 청 인 : 홍길동피신청인 : 을은행□ 2007.6.6. 신청인 홍길동은, 피신청인 **동 지점에서 신용카드를 발급받음□ 2010.11.28. 홍길동, **동 소재 업소에서 이용료 지불을 위해 종업원에게 신용카드를 교부하고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현금인출 심부름을 시킴? **동 종업원은 인근 슈퍼에 설치된 ** 자동화기기에서 현금 200,000원을 인출하고, 미리 준비한 복제기를 이용하여 신청인의 카드정보를 복제한 후, 비밀번호를 기재함□ 2011.2.13. 업소 종업원은 신청인의 신용카드 정보를 복제한 카드로 ***은행 **지점 자동화기기에서 현금서비스 1,000,000원을 받아 인출* 수사기관 확인결과, 업소에서 서비스비용을 현금결제시 할인해 준다고 하여 고객이 종업원에게 현금인출 심부름을 시키면 종업원이 현금인출 심부름 도중에 미리 준비한 복제기로 카드마그네틱 정보를 복제하고 비밀번호를 기록 해놓은 다음,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복제카드로 예금 또는 현금서비스를 받아 이를 인출하였고, 본건을 포함하여 ***건의 동일범죄가 발생된 것으로 조사됨신청인 홍길동은 본건 사고는 복제카드에 의해 부당하게 발생한 것이고 신청인은 이와 무관하므로 피신청인이 이를 보상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피신청인 을 은행의 주장은 본건 사고는 신청인이 타인에게 신용카드를 건네주고 비밀번호를 알려주어 발생한 사고이므로 카드 회원약관 제3조, 제21조 등에 의해 보상이 불가하다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였다.해결□ 여신전문금융업법, 전자금융거래법 및 본건 약관에 의하면 신용카드의 위조나 변조로 인하여 발생한 사고로 인하여 이용자에게 손해가 발생한 경우 원칙적으로 금융기관인 피신청인이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여신전문금융업법 제16조 제6항, 동법 시행령 제6조의 10, 피신청인 개인회원약관 제21조 및 전자금융거래법 제9조 제2항, 동법 시행령 제8조, 피신청인 전자금융거래약관 제20조 등에 의하면, 신용카드의 대여나 양도, 비밀번호의 누설 등 그 위조? 변조에 대한 이용자의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 손실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자에게 부담토록 하여 금융기관의 면책을 규정하고 있는 바, 신용카드는 원래 타인의 수중에 넘어가면 쉽게 부정사용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카드회원은 현금과 같은 정도의 주의를 기울여 카드를 보관하여야 할 책임이 있고, 현금서비스등에 있어서는 비밀번호가 그 부정사용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므로 카드회원은 그 설정 및 관리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고(서울중앙지법 2004.6.18. 선고 2003나52790판결, 피신청인 신용카드 개인회원 약관 제3조, 제12조, 제22조 참조) 신청인은 본건 카드를 교부하고 비밀번호를 알려줌에 있어 카드가 복제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나, 적어도 본건 카드가 제3자에 의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 할 것으로 본건의 경우, 신청인이 업소 종업원에게 홍길동의 카드를 교부하고 비밀번호까지 알려주는 등 본건 카드의 이용·관리 및 비밀번호 유출에 고의 내지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보이며, 달리 본건 현금서비스 부당이용에 대한 피신청인의 과실을 찾기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피신청인의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판단됨. 그렇다면 신청인의 청구는 이유 없어 이를 기각함과제를 하고 난 후...지금 나는 겨우 대학교 2학년이고, 아직까지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신용카드를 맡기지 않으신다. 그래서 나는 나와 신용카드랑은 거리가 아주 멀다고 생각하여 이런 피해사례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고 피해 사례는 어떤것이 있는지 또 대처방안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심지어는 최근에 발생했던 카드사에서 수수료를 인하하는 대신 혜택을 줄인다고 했던 일도 신문 기사로는 몇 번 보았지만 제대로 관심있게 보게 된 계기는 이번 과제 때문이었다. 신용카드의 수수료로 이렇게 가게 주인들이 카드결제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앞으로 신용카드를 사용하게 될 사람으로서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 체크카드만 이용하고 있는 상황인데 카드뒤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분실시 보상이 안된다는 말에 바로 서명부터 하였다. 어짜피 학생이고 통장에 잔액도 없어서 체크카드 분실해도 많은 피해는 없겠지만 이런 것 하나하나가 피해를 당했을때 보상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또한, 절대 내 카드를 타인에게 양도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냥 내 소유의 카드이면 다른사람이 빌려갔을때 그 사람이 내 카드를 빌려가서 쓴 돈을 갚지 못하면 그 사람에게 책임이 물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카드를 빌려준 나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에 가장 놀랬다. 사람들은 항상 돈관계로인해 사람을 잃기도하고 얻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말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도 요즘 세상은 정말 돈밖에 모르는 세상이기 때문에 함부로 빌려주면 안되는 것 같다. 카드라는 것이 그냥 물건을 현금없이도 살 수 있는 수단으로만 알았는데 신용이라는 문제와 이렇게 많은 법이 있는것에 또 한번 놀랬다. 이런 과제를 하고 수업을 통해 신용카드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알게 됨으로 인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나는 직장을 갖기 전 까지는 체크카드를 이용하며 나의 용돈에 맞는 소비 생활을 할 것이며, 나중에 직장을 갖은 후에야 나에게 맞는 서비스의 카드를 이용하며 카드를 단순히 물건을 사는 수단이 아닌 정말 나의 신용과 관련있는 그런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며 올바른 소비생활을 하도록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