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과학(A Study on the Relation of the Religion and Science)Ⅰ. 들어가는 말Ⅱ. 과학과 종교- 갈등의 역사1. 유신론과 무신론2. 과학발전과 종교권위의 손상1)첫 번째 손상: 지구의 상실2)두 번째 손상: 인간의 상실3. 생명윤리: 인간 복제를 둘러싼 갈등Ⅲ. 과학과 종교- 미묘한 결합의 역사1. 종교개혁: 근대 과학의 시작2. 과학과 종교의 경계에 선 학자들Ⅳ. 종교와 과학의 공존을 위하여< 목 차 >Ⅰ. 들어가는 말종교와 과학, 이 둘의 결합이 흥미로운 이유는 우리가 이들을 대립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옳다면 과학이 틀린 것이고, 과학이 옳다면 종교가 틀린 것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와 과학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는 삶을 완성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종교와 과학이 난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에 직면한 가운데, 양자 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종교와 과학이 각기 다른 영역을 지니며 따라서 갈등의 원인은 이들의 영역을 바르게 구분하지 않는 것에서 기인한다는 관점과 진리의 체계임을 상정하는 종교와 과학은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역사 비평학자들의 관점과 같이 종교와 과학이 다루는 영역이 서로 다르다는 입장에서 이들을 조망한다면, 이들은 대립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한 인간의 삶에 공존할 수 있다. 종교는 스스로 전제하는 ‘신의 권위’를 판단 준거로 하여 실재하는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 존재의 당위성을 확인하려 하는 반면에 과학은 객관적인 관찰을 바탕으로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종교는 당위적인 확인을, 과학은 사실적인 설명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즉 종교는 ‘왜’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며 과학은 ‘어떻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좇는다. ‘왜’라는 당위적 물음과 ‘어떻게자로 이해했고, 이때 자연은 이미 정의된 상태에서 인식되었던 것이다. 대지의 좋은 것들은 신의 은총의 선물 같았고 심지어 폭풍우나 홍수, 지진이나 가뭄과 기근 같은 나쁜 것들도 신의 역사로 비춰졌다.) 성직자들에게, 그리고 종교인으로서 중세의 사람들에게 세계의 모든 현상의 뒤에는 언제나 인격자로서의 신이 존재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신의 존재를 검증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에서는 신은 우리 인간에게 ‘절대로 알려지지 않는 것(Schlechthinunerkennbares)')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은 분명히 존재하며, 인간은 그것의 실재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결코 신을 확인할 수 없지만 그의 실재를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는 종교적 입장에 대한 회의적 의문은 과학에 의하여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갈릴레이 이후, 검증 가능한 사실만을 진리의 대상으로 상정하게 된 과학은 세계를 ’탈신비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은 보편적 진리의 표현 수단으로서 모든 사회에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과학의 영역에서 탐구 대상인 물질세계는 더 이상 인격성을 함축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인격적인 신의 관념을 배제하고도 충분히 세계의 현상에 대한 설명이 가능했다. 그리고 경험적인 근거를 진리의 필요조건으로서 제시하는 과학이 보기에는, 어떤 대상을 확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실재를 믿으라고 하는 종교의 주장은 악독스러운 모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면 신의 실재 역시 진리로 인정될 수 없다는 과학적 입장과 과학이 주장하는 신의 부재 역시 검증할 수 없다는 종교적 입장 사이의 첨예한 대립은 계속되어 왔다. 이미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의 유신론에 대한 비판은 지동설, 진화론 등의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 더욱 거세어졌다. 그리고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시대적 패러다임이 이전함에 따라 근세로 접어들면서 신은 심지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유신론과 무신론를 전개하도록 한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내용들이 종교와 과학 간의 갈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만 다루는 이유는 프로이트가 말한 인간에 대한 세 번째 모욕이란 영혼의 문제로서 아직 미결의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1) 첫 번째 손상 : 지구의 상실종교 아래서 눌려 지내던 과학이 급상승 커브를 그리며 종교를 앞질러가는 과정에서 과학이 종교와 크게 충돌한 첫 번째 사건이란 바로 코페르니쿠스혁명이다. 코페르니쿠스혁명은 코페르니쿠스에 의하여 점화되고 갈릴레오에 의하여 극화된 후 뉴턴에 의하여 완결되었다.) 종교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중세에는 성경의 내용에 기초하여 지구가 우주의 중심으로 되어 있으며 하늘의 움직임에 의하여 낮과 밤이 생긴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이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프톨레-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전면적으로 반대되는 지동설을 제기하였는데, 그의 주장에 확신을 주었던 것은 바로 1543년, 저자인 코페르니쿠스 사후에 출간된「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libri Ⅵ)」라는 책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탐구한 결과,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임을 밝혀냈다.17세기의 종교인들에게 갈릴레이의 생각이 적대적으로 보이게 된 것은 중세 신학이 종교와 과학을 명쾌하게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동설을 인정하게 되면 교회와 세상을 하나의 논리로 연결하여 신 중심의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함에 따라 유지되고 있는 기독교의 권위가 실추될 것이라 여겼다. 이처럼 천동설이 그토록 오랜 기간 진리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논리적인 이유보다는 기독교의 막강한 권력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당시 갈릴레이는 진리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끝내는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파면 당한 갈릴레이는 이후 임종에 이르기까지 9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의견 충돌은 매우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는 1960년대 유전공학에 대해 비판적 주장을 전개했던 폴 램지(paul Ramsey)와 칼 라너(Karl Rahner)와 유전공학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찬성한 멀러(Muller)와 플래처(j. Fletcher)등에 의해 진행되었던 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램지는 유전자 조작 기술은 인간 실존에서 질병과 죽음을 제거함으로써 창조주에게 도전하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시도)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수단과 과정에 목적을 두는 윤리이다. 이후 유전공학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은 리처드 매코믹(Richard McCormick) 등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다. 이들의 관점은 종교적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의 비판적인 논의는 주로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인간 복제의 기술의 결과물인 복제 인간이 내포하고 있는 몇 가지 윤리 신학적 문제가 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복제 인간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감히 이를 침범하려 한다는 점이다. 생명은 임의적이거나 우연적이 것이 아니다. 오직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로 이루어진 것이며 하느님께만 유보된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생명이 오직 하느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으로부터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이 발생하는 것이기에, 인간이 생명에 관한 기술을 사용하려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존엄성까지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인간 복제의 기술에는 또한 인간 생명의 시작을 어디로 보느냐에 대한 문제가 함께 걸려 있다. 인간 복제 기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인간 배아는 필연적으로 소모품으로 전락하게 되고 마는데, 인간 배아를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면 이는 윤리적인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는 인간의 영혼이 단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주입된다는 연속적인 영혼 주입 이론과 영혼이 한순간에 즉각적으로 주어진다는 입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생명의 시작이 임신의 순간이라는 점을 견지하고 있다. 즉 기독교는 생obert K. Merton)은 종교개혁이 근대 과학혁명에 영향을 주었음을 주장하였다. 소위 ‘머턴 테제’로 알려진 과학과 청교도의 관련에 대한 주장은 1960-70년대에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막스 베버가 청교도주의를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경제 윤리의 원동력으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머턴은 초월적인 차원과 일상생활에서의 인간의 활동 사이에 가교적 역할을 담당한 청교도주의는 새로운 과학을 전개시키는 데 하나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고 주장한다. 당시의 신흥세력으로 부각된 부르주아들 그리고 상인들이 청교도의 대부분을 점했으며 그들의 청교도적인 정서가 바로 새로운 과학에 호의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과학과 기술이 자신들의 힘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적극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또한 진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 일어나는 신흥계급의 눈에는 무엇보다도 기존세력과 사회구조가 그야말로 진부하여 그들의 활발한 사회참여에 한낱 장애물로만 보였던 것이다.)청교도주의는 인위적인 교회로부터의 교리보다 직접적인 신과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이는 자연의 대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정해진 교리 안에서의 해석에서 벗어나 대상을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경험적인 근거를 통해 이해하는 과학적 사고에 영향을 주었다. 교회가 지도권을 지니고 있던 시대에는 신의 말이 판단의 준거로 되었지만, 근세는 그것으로부터 이성의 자율적 법칙에로 이전)하였던 것이다. 또한 학문을 배워 자신의 지식으로 만드는 배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청교도주의적인 태도는 탐구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짐으로써 과학혁명의 하나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이 16세기의 종교개혁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부인하기는 어렵다. 르네상스와 함께 종교개혁을 겪으면서 인간의 사고 기제가 변화하였고 결국 시대적 패러다임이 구원의 종교에서 창조의 종교로 이전한 것이다. 그리고 패러다임의 이행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청교도주의의 새로운 )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의 비교부제 : 상호 이해를 위한 숙의의 시간Ⅰ. 동양과 서양의 구분은 타당한가.우리는 철학적 범주에서 뿐 아니라 경제와 문화, 정치 등 실생활의 영역을 포함한 여러 부분에서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고는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구분이 타당한 것인가. 동양의 철학이 보다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면, 이로부터 서양과의 철학적인 경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모순이 아닌가? 그리고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는 구체적인 기준은 무엇인가. 다양한 의문점이 떠오른다.사실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구체적인 기준에 대하여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는 이론은 거의 全無하다. 그 지리적인 경계가 러시아, 혹은 터키라거나,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게 된 기원이 서양에서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에 있다는 등의 주장들은 실증적인 근거로서 수용하기 힘들다. 그러나 世界化가 계속되고 있는 지금, 그것의 타당성을 논외로 하더라도 동양과 서양이라는 개념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다. 한편 동양과 서양이 여러 분야에서 나타내는 차이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 즉, 특정한 사회적 행위들은 특정한 世界觀을 가져오고, 그 世界觀은 특정한 사고 과정을 유발시키며. 그 사고 과정은 역으로 원래의 사회적 행위들과 世界觀을 다시 강화시킨다).한편, 한국은 동양에 속한 국가로서 수세기 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근대 이후 중국과 멀어져 서양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이 가지고 있었던 동양의 철학적 색채는 근대화의 처음부터 위기에 있었다. 서양에 의한 근대화는 다른 문화와 철학에 대한 寬容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 세기에 걸치는 시간동안 한국 사회에 흐르고 있던 철학적 색채가 손바닥 뒤집듯 간단하게 변할 리 없었다. 따라서 근대 이후 한국 사회의 발전은 그 이면에 동양적 世界觀과 서양적 世界觀 사이의 긴장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긴장과 갈등은 어떤 單一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갈등의 뿌리는 과 자율성에 의하여 自我를 정의하게 된다.그러나 동양에서 ‘나’는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주변 환경과 함께 고려되는 과정에서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서양에서는 자율성을 지닌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自我’를 중요시 하는 반면, 동양에서는 집단 안에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自我’를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정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에서조차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存在가 아니라 누군가의 자녀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부모, 혹은 삼촌이나 조카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관계에 따라 다르게 부여받게 되는 정체성은 그 범위가 넓어질수록 더욱 다양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동양의 철학은 시시각각 變化하는 환경(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서의 도(道)를 탐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는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나’의 역할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이와 같이 自我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호칭의 사용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서양에서는 주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自我의 특수성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누군가를 부를 때 그의 직책이나 역할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김대리, 가서 커피 좀 뽑아오지.’와 같은 식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동양의 경향은 개인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측면보다는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인간의 自我에 대하여, 전체를 근거로 이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그렇다면 自我에 대한 定義의 차이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自我에 대한 定義를 둘러싸고 동양과 서양이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개인과 전체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를 정의하는 데 공동체를 중시하는 동양의 관점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서양의 관점은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自我를 공동체에서의 역할을 근거로 타자와의 관계에 따라 변문에 이러한 갈등의 해결점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다시 말하면 어떤 담론의 과정에서는 개인주의적 태도의 妥當性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집단의 문제와 직접 맞닥뜨렸을 때에는 이를 비난하는 태도로 돌아서는 일이 다반사다. 예를 들면 평소에는 集團에 拘束되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에 대하여 ‘4차원’등의 단어들을 통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집단에 그러한 性向을 지닌 사람이 있으면 다시 집단에 구속시키려하거나 따돌리는 태도를 보이는 것과 같다. 이는 親함의 정도에 따라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개인주의적 사고와 집단주의적 사고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한국에서 집단주의로 인한 갈등이 가장 심한 곳 중 하나는 바로 국회이다. 얼마 전 우리학교에서 한국정당학회 주최로 열린 공동추계학술대회에 참관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발표된 어떤 논문으로부터 99%이상의 국회의원들이 政黨의 뜻에 따라 개인의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논쟁적인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개인의 所信이나 신념보다는 자신이 속한 政黨의 路線에 따라 찬성, 혹은 반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회의원이 ‘政黨’이라는 협소한 범위의 집단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國民의 권리를 이용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국회에서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國民들이 투표를 통해 권리를 이양해주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國民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지, 권력을 위해 다투는 결사체인 政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政黨이 제시한 路線에 거의 맹목적으로 따르는 의원들이 늘어난 이유는 투표방식이 電磁化되어 각 의원들이 어떤 결정을 했는지 알아볼 수 있게 되었고, 개인의 선택에 대한 집단의 압박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정치적 문제들이 다수 政黨의 논리대로 진행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조건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계의 유일한 存在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서양은 理性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하고, 理性에 따라 행위 하는 것, 즉 ‘합리적’으로 행위 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理性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대상이 행복인지, 도덕법칙인지, 혹은 神인지에 대한 문제를 논외로 한 채,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성의 합리성은 시장에서의 사적인 利益을 추구하는 행위로 이해되었다. 합리적 인간이 추구하는 대상이 사적인 利益이라는 생각은 맨드빌을 지나 아담스미스에 의해 이론화되었다. 그들은 시장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사적인 ‘이익’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아담스미스의 친구이자 철학가인 흄의 이론은 인간이란 자기이익을 위해 행위 해야 한다는 윤리적 이기주의의 始發點이 되었다. 이후 물질과 경제의 영역이 더욱 확대되면서 인간은 결국 자기이익을 위해 행위하고, 또한 그래야 한다는 이기주의자들의 주장이 서양철학의 전반을 주도하게 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서양철학의 사고는 인간을 ‘理性’이라는 단일한 측면에서 조명함으로써 다각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한계가 있다.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양상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인간적인 것으로 고려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서양철학에서는 오히려 경향성과 경험을 배제한 영역에서 인간성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인간의 본질로서 理性을 강조하게 된 理由는 또한 도덕철학의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칸트는 도덕법칙의 속성으로 보편성과 필연성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보편성이란 그것이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고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법칙의 보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법칙의 적용 대상을 추상화하여 定義내리는 단계가 필수적이다. 예를 들면 ‘팬티만 입고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라는 규칙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조氏, 윤氏, 김氏, 이氏 라는 개별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상정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느 날 갑자기 남氏가 출현했을 때 법칙의 적용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개별적인 요소들을 넘어 ‘인간’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 요朱子에 의하면 최고의 善함을 지닌 太極으로부터 存在理由를 가지는 모든 宇宙萬物의 본성은 善하다. 인간은 善한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善한 本性인 仁은 인간뿐만 아니라 宇宙萬物에 발휘하여야 함을 피력하고 있다. 이는 도덕성을 발휘하는 대상을 인간이라는 종의 범주에 제한시키고 있는 서양철학의 이론과 대비되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2) 이익을 위한 국가인가, 仁義를 위한 국가인가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 행위의 목적에 대하여 서양에서는 理性에 기초한 自己利益으로, 동양에서는 도덕성에 기초한 仁義禮智의 발휘로 보고 있다. 그런데 경제적 영역의 중요성이 極大化된 현대 사회에서는 동양의 사고가 보다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의 도덕철학에서 의미하는 自己利益이라는 것이 단기적인 쾌락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행복에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의 이론과 같이 인간 행위의 목적으로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자기이익’을 상정하는 철학적 흐름이 서양에는 분명히 存在한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고 전 세계의 사회에 영향을 주었다.인간 행위의 목적을 그 個人 자신의 利益으로 보는 이기주의적 관점이 극단적으로 발전할 때, 타인은 오직 이익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만을 지니게 된다. 人間關係에서 정서는 메마르고 그것은 정신적 유대가 아닌 물질적인 계산을 토대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을 상대로 한 각종 범죄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살인과 상해, 사기, 납치 등 거의 모든 범죄는 행위의 목적이 오직 ‘自己利益’일 때, 그리고 타인들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지할 때 발생한다. 만일 그들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대상을 도덕성을 발휘해야 할 대상으로서 인식하였다면, 범죄란 결코 存在할 수 없었을 것이다.인간 행위의 목적이 利益인가 仁의 발휘인가에 대한 갈등이 존재하는 가운데, 그렇다면 국가의 목적은 과연 ‘이익’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도덕성, 즉 仁의 矣)’
논문 주제 : 집단열광의 경험한국 사회의 집단과 집단화-전통, 그리고 현재의 관점에서-목차Ⅰ. 집단, 개인을 넘어선 주체 - 1-Ⅱ. 집단화의 전통적 요소들 : 집단중심 문화와 한(恨) -2-1. 집단화 과정에서 작용하는 집단중심 문화의 두 차원1) 목적, 그 자체로서 추구되는 집단 -2-2) 집단,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를 끼다 -4-2. 집단화의 전통적 요소로서의 한(恨)1) 집단을 이루는 불변의 요소 : 민족과 경험 -5-2) 집단화의 민족성 : 억압의 역사와 한(恨) -6-Ⅲ. 그리고 변화 - 21세기 집단과 집단화의 특성들1. 집단, 여성성이 주도하다 : 공감, 소통, 그리고 촛불 -8-2. 집단, 쾌락을 추구하다 -9-3. 개인, 스스로에게 주목하다 -10-Ⅳ. 집단을 넘어서 : 개인과 집단의상생을 위하여 -12-Ⅴ. 참고 문헌 -15-Ⅰ. 집단, 개인을 넘어선 주체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다운 행위란 모든 의지와 욕망이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즉 본능적인 욕망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필요성과 당위성을 이성으로 판단한 후에 행동하는 것이 인간다운 행동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여타의 존재들과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성 행위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판단 아래 행해져야 한다. 이처럼 '인간다움'에 대한 탐구에서 욕을 제외하려는 시도는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욕망이란 모든 동물적 존재가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지니는 우월성을 설명하기에 적절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그렇다면 욕망이란 언제나 이성에 의해 감시받아야만 하는 죄수인가?이성중심주의는 개인이 이성을 사용하는 주체라는 점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로 귀결된다.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세 가지 차원의 가치를 자유와 자유의지, 이성과 진보, 평등과 존엄성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먼저 ‘자유와 자유의지’의 가치에서는 개인을 자유의 ‘보유자’로 파악하는 입장이 나오고 ‘이성과 진보’의 가치는 개인을 ’이성의 주 심판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모르는 것이 없는 ‘단기’ 척척 박사들이 등장한다. 평소에도 축구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도 잇지만 월드컵 기간에는 국민 모두가 ‘축구 박사’가 된다.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경기는 물론이요, 경기 이후의 각종 기사와 해설 야담까지 섭렵하고 난 다음날이면 하루 내내 대화의 주제는 월드컵이다. 굳이 경기를 보지 않아도 귀만 잘 열고 있으면 그 주요 내용을 알 수 있을 정도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어디 월드컵뿐인가. 국민의 공통된 관심사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한 개인들의 노력은 끊임이 없었다. 2008년의 촛불집회가 그랬고 피겨 선수 김연아의 경기가 그랬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향은 정치나 스포츠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통신 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그것의 폭발적인 수요에 있었다. ‘유행’이라는 집단적 흐름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기 위한 개인적 노력들이 모여 거대한 수요를 창출해냈던 것이다. 정치, 스포츠, 통신에서부터 패션, 음식, 유머에 이르기까지 삶의 양식 전반에 걸쳐 시시각각 발생하고 있는 유행과, 그러한 ‘유행’에 대한 강력한 이끌림은 집단을 향한 강렬한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이처럼 집단으로 귀속되고자 하는 남다른 의지는 한국 사회가 집단주의 문화를 토대로 형성되었다는 데 있다.집단주의 문화는 사회성과 가족 통합, 내집단 성원들과 갖는 연계성과 상호의존성, 내집단에 대한 관심과 배려 및 헌신을 강조한다. 이러한 문화적 토대 위에 형성된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아 형성도 집단의 영향을 받게 된다. 개인을 타인이나 집단과 연계하여 상호의존적인 관점에 따라 파악하기 때문에, 타자로부터의 영향뿐만 아니라 자신이 타자에게 주는 영향 또한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집단에서는 상호의존적이며 타자와의 조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개인의 행동은 집단에 대한 고려에 의해 규제된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욕구나 욕망의 추구는 타자와의 서의 응원은 ‘붉은 악마’라는 집단의 이름으로 열광하였던 최근의 예이다. 같은 붉은 색의 옷을 입고, 함께 소리 지르며 감정을 공유하면서도, 그 모든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된다. 평소에는 제재와 억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행동들이 용인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러한 행동들이 ‘집단의 이름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며, 바로 그 집단이라는 것이 사회 구성원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인 개인일 때 억압되어만 하는 욕망들이 때로는 집단의 차원에서 실현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는 개인이 집단에 강렬한 열망을 지니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다시 말하면 한국인의 집단주의적인 문화는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의 조화를 위해 개별적인 욕망의 분출을 스스로 억제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익명화된 개인은 규제의 대상이 아니다. 그 스스로가 집단이 되기 때문이다. ‘집단’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폭발적인 감정의 분출을 통하여, 비로소 본능을 억압하는 족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집단주의적 사회에서 개인은 어떤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에, 다시 ‘열광’하는 집단으로의 귀속을 욕구하게 되는 것이다. 욕망의 분출이 용인되는 ‘열광’하는 집단의 구성원이 되고자하는 강력한 의지는 집단주의적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2. 집단화의 전통적 요소로서의 한(恨)1) 집단을 이루는 불변의 요소 : 민족과 경험개인이 집단화되는 과정은 동일한 하나의 이상을 자신의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상정하고, 그렇게 형성된 자아 속에서 구성원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나르시시즘적 과정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시의 과정을 통해 어떤 하나의 집단이 구성될 때, 각각의 구성원들이 지닌 이질성은 집단의 동질성에 의해 압도된다. 그런데 이때 가장 강력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민족’에 근거하고 있는 동질성이다. 민족은 종교나 사상, 문화 등의 경계를 함축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혈연적 요소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의 공유로 단결된 ‘민족’의 이상향은 근대적 흐름에 따라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드러나게 된다. 국가라는 구체적인 경계의 상실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명확한 경계가 없는 민족이라는 집단은 구성원 간의 감정의 공유를 통해 현현한 실체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즉. 근대의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는 보편화된 한의 정서를 공유하고 강한 국가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상정함으로써 현실에서 구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919년의 3?1 운동은 한의 정서가 축적의 시기를 넘어 분출하게 된 시발점이었다는 점, 그리고 한의 분출을 통해 집단으로서의 민족이 가시적인 실체로 구현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동일한 이상을 향한 열망은 곧 구성원과의 동일시에서 나아가 집단에 대한 일체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이러한 집단화를 촉진하는 매개적 역할을 하는 이상적 개념으로서 20세기 초반에는 ‘해방’이, 1960년대 이후에는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자주적인 독립과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 현대의 한국인이 집단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억압’이라는 기제가 여전히 ‘한(恨)’이라는 공통의 정서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개념은 한일병합과 일제 강점기라는 이라는 공통를 거쳐 성장하다가 분단 이후 권위주의 정권에 접어들면서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지만 ‘억압에 대한 분노’로 축적된 ‘한’은 현대에도 유효하게 작용하여 1960년대의 4·19를 거쳐 1987년의 6월로 이어졌다. 제국주의는 민족이라는 무형적 공동체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고, 해방 이후의 권위주의 정권은 식민 지배를 받으며 보편화된 민족적 정서로서의 한(恨)의 폭발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한국은 여전히 ‘억압’에 분노하며 공감하고, 집단화된다.환경과 상황 그리고 사건은 그 당시의 사회적 암시를 반영한다. 이런 것들은 상당한 세력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세력은 한 국민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민족적 암시에 비제한다는 점에서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 구분된다. 1980년대의 집단화가 주동세력과 일반 민중 사이의 '수직적인' 소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2008년의 촛불은 모든 개인들의 감정적인 공유를 바탕으로 쌍방향적인 소통이 이루어졌다. 촛불집회가 ‘문화제’와 ‘축제’의 성격을 띠게 된 것도 이처럼 '공감'과 '소통' 등 여성적인 특성들이 강조된 결과다.) 또한 집회 현장의 분위기를 담은 사진과 집회에 참여한 개인적인 경험의 내용이 담긴 인터넷의 그 수많은 글의 공급과 수요는 ‘공감’의 기제에 의해 창출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집단 형성의 과정에서부터 형성된 집단이 ‘열광’이라는 격정적인 정서를 표현하기까지, 구성원들이 발휘하는 ‘공감’의 능력은 중심적인 기제로서 작용하고 있다.2. 집단, 쾌락을 추구하다해방을 위한 민족운동에서부터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구성원들은 뚜렷하게 제시되는 집단적 목표를 위해 결집되었다. 20세기의 집단화된 개인들이 집단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심지어는 자기희생적인 행동까지 보여주었다면, 21세기의 그들은 쾌락주의적인 성향을 강하게 나타낸다. 개인적 차원의 쾌락을 경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집단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집단주의 문화의 기반 위에서 집단으로 귀속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는 여전히 유효하며, 공통의 정서에 근거하여 응집된 집단이 보여주는 타자에 대한 배타성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21세기의 집단은 근대 이후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족성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20세기의 그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집단은 보다 쾌락적인 욕망을 추구한다.한국 사회의 집단화가 쾌락주의적 요소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한 시기는 2002년의 월드컵이다. 당시의 열광적인 거리 응원은 개인들이 정치적인 분노가 아닌 '쾌락적인' 욕망을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첫 번째 사건이었다. 불과 십여 년 전, 월드컵과 같은 국제적 축제였던 88올림픽이 '국가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개인의 단결을 요구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분명히 다른문이다.
1. Brave New World1)작품소개2)작가소개-올더스 헉슬리2.줄거리3.감상1)아아, 멋진 신세계여!2)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 인간적 가치의 신봉자, 존3)사회부적응자, 혹은 영웅. 그리고 우정1. Brave New World1)작품소개1932년 발표작.『멋진 신세계』는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이 모두 인공적으로 제조되는 미래사회를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20세기에 쓰여진 미래소설 가운데 가장 현실감 있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기계문명의 발달과 과학의 진보가 전체주의 사상과 밀착될 때 어떤 인간적인 비극이 초래될 수 있는가를 희화적으로 묘사하고, 기술의 과도한 발전이 가져올 위험을 경고하는 반유토피아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 진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작가의 주장은 그의 역사관과 문명관의 핵심을 이루면서 오늘날 우리가 현실로 느끼는 현대문명의 심각한 위기를 공감하게 할 것이다.)2)작가소개_ 올더스 헉슬리(A.L. Huxley, 1894-1963)저명한 생물학자 토마스 헨리 헉슬리의 손자이며 서리주 고달밍 출생으로 이튼 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였다. 재치와 풍자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무궁무진한 지적 정보까지도 동시에 전해주는 천재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역사, 철학, 종교 등 다방면에 관심을 보였고, D. H. 로렌스와도 친교가 있었다. 1921년 「크롬 옐로우」, 1928년 「연애대위법」을 발표하였고 1936년 작품인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는 평화운동을 추구하는 작가 자신을 그렸다. 3차 세계대전을 가상한 가공소설 「원숭이와 본질」(1949)은 자유를 추구하는 인물이 제3세계로 도피하게 되는 행로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암시했다. 「멋진 신세계」는 1932년도 작품으로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이 모두 인공적으로 제조되는 미래사회를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20세기에 쓰여진 미래소설 가운데 가장 현실감 있는 작품으로 손꼽힌다.)2. 줄거리때는 포드 기원 632년. 급속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은 은 갈등을 겪는다.그러던 중 소마에 의존하여 살아가던 존의 어머니 린다가 죽고, 그녀의 죽음을 보고 비웃는 아이들을 본 존은 문명에 의해 개인의 육체는 물론 의식까지 철저하게 지배당하는 사회를 저주하고, 문명세계의 사람들에게 ‘자유’를 전파하고자 소동을 일으킨다. 헬름홀쯔 역시 존과 함께 소마를 버리는 소동을 일으키고, 결국 현장에 있었던 마르크스까지 이들 셋은 통제자 무스타파 몬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계통치자들 중 한명으로 문명사회속에서 발생하는 인간 존엄성이나 인간적 가치 타락의 문제를 잘 알고 있지만 이는 사회 전체의 이익(행복)을 위해 어쩔수 없다는 무스타파몬드와 약간의 불행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는 존의 대화가 이루어진다.결국 헬름홀쯔와 마르크스는 그들처럼 ‘특이한’존재들이 있는 ‘섬’으로 보내지고, 존은 이제 문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존은 도시 외곽으로 나가 문명의 힘을 빌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살고자 하지만, 스스로 시련을 겪으며 내적인 성장을 이룩하고자 하는 그를 문명인들은 비행택시를 타고 찾아와 구경하며 비웃는다. 계속되는 문명인들의 간섭에 내몰린 그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3. 감상1) 아아, 멋진 신세계여!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상상하는 미래는 인간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면에서 과학이 이룩하는 발달을 주된 것으로 삼고 있다. 즉, 인간의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과학이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해서 과학이 이용되며, 그 과정에서 과학이 인간 개개인에게 전부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이루어진다. 사회의 안정과 통일을 위해서 필요한 인간들이 필요한 만큼만 생산되고, ‘가정’이라는 개념은 이제 인간 역사에서 추악하고 더러운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효용성을 중요시하는 그들은 하나의 난자에서 많게는 90여 명의 태아를 생산해내고, 수많은 쌍둥이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개성’이란 ‘안정’을 위협하는 개념으로 인식된다. 사회 방법은 교묘하고도 효과적이어서, 소수의 권력자가 과학을 독점하고 사회가 이를 암묵적으로 허용한다면 우리들도 빠른 시간 내에 소설 속 문명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지도 모른다.나는 여기서, 미래 세계의 문명인들의 삶 속에서 노동의 목표이자 행복의 원천인 ‘소마(SOMA)’라는 상상의 묘약에 주목하고 싶다. 문명인들이 생활에서 안정과 쾌락을 얻는 방법은 소마 외에도 자유로운 성 관계와 감촉영화, 전자 골프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소마는 노동의 대가이며 그것을 보용하는 것은 미덕으로 여겨진다. 소마는 복용했을 때 엄청난 쾌락과 행복감을 안겨주는 약물로 문명인들은 어떤 불행이나 시련을 만났을 때 소마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아니, ‘극복’했다는 말 보다는 도망친다는 말이 더 맞지 않나 싶다. 안정과 질서에 길들여진 문명인들은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시련이나 고통을 인내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일상 속에서 고민거리가 생기는 것은 흔하지 않을뿐더러, 소설 속의 레니나와 같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소마에 의존하고 마는 문명인들은 정신적 성숙을 이룩할 기회를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제거해버리는 데 주력했던 지난 몇 세기 동안의 과학이 인간 의식 속에 이룩한 결과인 것이다. 이제 인간들은 조금의 불편함도, 아주 조금의 불안함도 소마가 없이는 이겨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눈물을 찍어내며 레니나는 옥상을 가로질러 승강기를 향해 걸어갔다. 27층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그녀는 소마 병을 꺼냈다. 1그램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리라고 그녀는 판단했는데, 그녀가 처한 역경은 1그램 이상을 필요로 했다… )…“문명국가들에서는 김을 매 주지 않더라도 아가씨들을 가질 수 있고, 쏘아대는 파리떼나 모기들도 없어요.”통제자가 말했다. “우린 그런 것들을 모두 몇 세기 전에 제거했습니다.”…)소마는 문명인들에게 그들이 처한 불행과 불안을 견딜 수 있는 쾌락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년의 도덕적 훈련 없이도 타인에게 관용을 생략)“당신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나요. 아시겠지만- 어떤 즐거움들은 고통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기쁨이 생겨납니다…생략…그러니까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마룻바닥을 쓸기라도 하겠어요.”“하지만 우린 진공 소제기들이 있어요.”어리벙벙해진 레니나가 말했다.)이 부분에서, 존은 레니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시련을 겪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강하고 절박한지를 보여주고자 하는데 문명인 레니나는 그런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서로가 원하는 상대는 물론이고 더 많은 이성과의 동침을 권장하는 사회 분위기에 익숙한 레니나는 존이 그녀를 놀린다고 생각한다. 존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레니나는 그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자 하고, 그런 그녀에게서 존은 어린 시절 원시 인디언들의 사회로부터 질타의 대상이었던 어머니 린다와 그 어머니로 인해 평생 외톨이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떠올린다. 존의 사랑은 결국 증오로 변하고, 이는 결국 마지막의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스스로 고통을 겪고 그를 인내함으로써 내면적 성숙을 이루고자 하는 존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조금의 불안한 감정이나 공포를 느낄 때마다 ‘소마’라는 묘약을 복용함으로써 그런 감정들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미래 사회의 문명인들은 시련이나 갈등을 만났을 때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힘을 빌려 찰나의 고통마저 피해버린다. 자아를 찾기 위해 고뇌하고 사색하는 일 역시 이미 그 인생의 목적이 설정되어 있는 문명인들에겐 생소한 일이다. 눈부시게 발달한 물질문명 속에서 살고 있지만 너무나도 무지한 문명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존을 사랑하면서도 그를 이해할 수없는 레니나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를 공포심마저 들었다.야만인 존과 문명인 레니나의 갈등은 곧 현대사회와 작가가 말하는 미래사회의 갈등이다. 현재 우리가 중시하는 가치들과, 머지않은 미래에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으로 인해 변해갈 가치들이 충돌하는 장면마다 작가의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있다.…〈멋진 신세계〉에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입니다.”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생략)“…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 무스타파 몬드가 어깨를 추스렸다.“좋을 대로 해요.” 그가 말했다.)존은 결국 문명에 속하거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대신,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취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적극적으로 보이지만, 문명으로부터 ‘도망’쳤다는 점에서 분명 소극적이다. 또한 존은 문명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는데, 그러나 이것은 소설에서 설정한 미래 사회의 모습을 봤을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태아 때부터 반복되어온 학습으로 형성된 문명인들의 무지함과 단순함은 어떤 후천적인 영향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우수한 헬름홀쯔나 열등하게 태어난 마르크스와 같은 돌연변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야만인 존은 분명 문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지만 그는 결국 문명의 힘에 굴복하고 만다. 문명은 끝까지 그를 쫓아와 괴롭히고 괴로워하던 그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고 만다. 그런 결말에 대해 작가는 10여 년 후에 쓴 이 소설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만일 지금 이 소설을 다시 쓴다면 나는 ‘야만인’에게 세 번째 선택권을 제공할 것이다. 이상향적인 세계와 원시적인 세계라는 갈등의 두 뿔 사이에는 정신적으로 건전한 세계라는 가능성이-‘보호지역’의 경계선 내부에서 살아가는 ‘멋진 신세계’로부터의 망명자들과 난민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이미 현실화한 가능성이 존재할 터이다…과학과 기술은 마치 인간이 거기에 적응하고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나 마찬가지로 마치 인간을 위해서 마련된 것처럼 쓰일 것이다…)즉, 인간들이 과학에 의해 길들여지고 거기에 종속되는 미래, 혹은 현재와 같은 세계가 아니라, 그것들이 본래의 목적대로 인간을 위해 사용되는 세계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 존에게 단 두 가지만의 선택권을 주었던 것을, 그 정도의 자유의지만을 부여했던 것을 최대의 결점으로 꼽았다. 정신적으로만다.
여운형부제 : 정치가 여운형에 대한 고찰을 통해 알아보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의 자세1.왜 여운형인가-본문의 주제 인물로 여운형을 설정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그가 중도세력에 속하기 때문만은 아니다.2.사건을 통해 알아보는 여운형의 사상들-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의 정치적 행보들을 뒤쫓아 그의 사상과 그가 추구했던 민족의 모델이 어떠하였는지 알아본다.1)건국준비위원회(1)건준 창설의 배경과 이유-여운형이 건준을 창설하게 된 배경과 이유를 통해 그것의 정당성을 알아본다.(2)건국준비위원회의 성격-조직단계에서 여운형이 중심적 역할을 했던 건준의 성격을 통해 여운형이 이룩하고자 했던 한반도의 모델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알아볼 수 있다.(3)건준의 결말과 그 원인-실패한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건준. 그 원인을 알아봄으로써 여운형의 이상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본다.2)조선인민공화국-건준의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은 그러나 조직단계에서부터 여운형이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는 자세이 알아보지 않도록 한다.3)조선인민당-여운형이 조직한 최초의 정당인 인민당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그의 사상적 측면이 보다 확고해졌음을 알 수 있다.(1)조선인민당 창당의 배경-범민족적인 단체를 조직하기를 소망하던 그가 정당을 창당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2)인민당의 성격과 노선-건준과 마찬가지로 조직단계에서 여운형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민당의 초기 노선은 곧 여운형의 입장을 대변한다.4)신탁통치와 여운형-반탁의 물결 속에서 소신 있게 신탁의 가능성을 주장한 여운형. 신탁통치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그는 결코 매국노도, 변절자도 아니었으며 민족을 위한 실리적 선택을 할 줄 아는 진정한 정치인이었다.3.여운형의 사상적 기초-여운형이 조화와 포용의 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사상적 기초는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본다.1)평화란 무엇인가.-평화에 대한 여운형의 정의는?2)동양평화론과 민족자결주의-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피력한 여운형. 세계의 질서 속에초점을 맞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먼저 그와 관련된 정치적 단체로 크게 세 가지를 볼 것이다.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와 인민공화국, 그리고 인민당이 바로 그것이다. 건준은 해방이후 여운형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단체로서, 적어도 그 조직 단계에서는 여운형의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여운형과 관련된 정치적 단체로 조선인민공화국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여운형이 수동적인 존재로서 참여한 단체이므로 깊이 알아보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운형이 생애 처음으로 조직한 정당인 인민당은 그것이 곧 여운형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이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인민당은 건준과 마찬가지로 조선공산당에 의해 잠식되어 여운형이 그 주권을 상실하고 만다. 그가 조직한 정치적 단체들에는 그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그의 이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이렇게 정치적 단체를 통해 그의 사상을 알아본 뒤에는, 1945년 당시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사항과 그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여운형이 취한 선택과 그 의미를 알아볼 것이다. 지금부터 그의 선택과 행보들을 뒤쫓아보면서 그가 이룩하고자했던 한반도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되짚어보았으면 한다.1)건국준비위원회(1)건준 창설의 배경과 이유-엔도오 총감과의 만남. 그리고 해방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드디어 35년동안 자행되었던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 사실이 민중에게 퍼져 광복의 기쁨을 만끽한 것은 그 다음날인 16일 이후였다. 그러나 여운형은 이미 일본 천황의 투항 방송이 있기 하루 전인 14일, 조선총독부의 제 2인자인 엔도오 류사꾸 정무총감으로부터 '17일 오후 2시까지는 소련군이 서울에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천황의 투항 방송 이후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막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여운형은 엔도오 총감의 부탁을 받아들여 치안 유지와 함께 건국 준비 활동을 하게 될 건준을 조직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여운형이 일제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던 것이 아니냐는 여운형이 지향했던 단체와 그의 사상에 대해 단적으로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되므로 부득이하게 인용을 하도록 한다.통일이 하루바삐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낙원은 노동자, 자본가, 민주당, 공산당 등 각계각파가 모여서 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처음으로 될 것입니다...창씨개명을 안하였느냐고 묻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공원을 꾸미는데 사꾸라도 심고 소나무도 심고 무궁화도 심고 산도 만들고 못도 만들고 해야 좋은 공원이 될 것이지 전부 사꾸라만 심는다면 잘 될 것입니까........이와 같이 조선도 각 정당이 존재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국가의 건설 발전에 조화를 하지 않고 그것을 저지시킨다고 하면 안될 것임으로 오늘날 같아서는 무엇보다도 통일전선을 꾸며 대동단결 완전자주독립에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그가 말하는 이상적인 한반도는 하나의 사상으로면 채색된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의 사상들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상적 경계를 구분짓기보다는 완전한 독립과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업 아래 모두와 조화를 이루고자 했던 것이 바로 여운형의 사상이었다. 또한 그는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건준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우익지사를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점에서 여운형은 건준이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총망라하는 거족적인 단체가 되길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건준의 결말과 그 원인우리는 여운형이 건준을 통하여 진보적 세력만의 단결만이 아니라 자본가, 공산당, 민주당을 총망라하는 모든 세력의 대동단결을 목표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운형의 주도로 설립된 건국준비위원회는 파벌 간의 싸움을 거듭하면서 결국 그의 손을 떠났고, 처음에 내걸었던 이상적인 목표의 실현에서 점차 멀어져 결국 9월 4일, 본래의 목적을 잃은 채 좌익 세력 중심으로 개편되고 만다. 결국 건국준비위원회가 실패한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들은 무엇이었을까.-충칭 임시정부의 문제위에서이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공산당과의 협동은 불가결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의 바람대로 좌익과 우익의 경계를 허물고 양자가 타협해나가기에는 한반도는 이미 그 흑백논리가 팽배한 상황이었다.2)조선인민공화국건준이 개편된지 이틀만에 조선인민공화국의 창립을 발표한 것은 여운형의 의도가 아니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창립을 발표하면서 개최한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여운형의 첫 인사말이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인물만이 비상한 일을 할 수 있다...'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여운형이 이 대회에 대한 사전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수동적이었다는 것이 증명된다.)조선인민공화국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조선공산당은 이 문제로 미군정과 대립했을 뿐 아니라 공산당의 옹호세력으로 등장한 소련군의 반대에 부딪쳤고 자신들이 포섭하려던 해외 독립운동가들과도 대립하게 되었다. 또한 인민공화국의 설립으로 인하여 건준과 각 지방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지방의회가 붕괴되었다.인민공화국 설립에 수동적이었으나 결국 그들을 옹호한 여운형은 해방정국에서 실패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서 인민공화국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 이유는, 여러 문헌들을 참고했을 때, 인민공화국은 여운형의 주도로 조직된 단체가 아니었으며 여기서 그의 융화주의적인 사상적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민공화국 문제로 인해 건맹이나 건준과 같은 범민족적 단체를 조직하던 여운형은 자기 나름의 조직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게 된다.3)조선인민당(1)조선인민당 창당의 배경1945년 11월 12일 경운동 천도교 회당에서 인민당을 창당하였다. 이는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만든 정당이었는데, 해방이후 정당이 아니라 범민족적단체를 조직하고자했던 그가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게 된 배경은 위에서 언급한 건준이나 인민공화국을 둘러싼 문제들과 무관하지 않다.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그는 정치적 선언을 위해서는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운 인민당은 조선공산 뒤를 따랐으나,여운형 본인은 당의 노선과 다른 입장을 취했다. 여운형은 탁치라는 용어의 해석문제를 제기했고 신탁통치가 실시된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세를 취했다. 여운형은 강대국에 의해 민족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통찰을 가지고 미?소 공동위원회의 개최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으며, 그와 같은 맥락에서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해나갔던 것이다. 이하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기술하지 않는 이유는 비록 그것이 여운형의 주도로 전개되었으나 그의 죽음 이후는 여기에서 논할 가치가 없으며, 좌우합작운동에서 보여지는 그의 사상적인 면모들은 이미 앞에서 다룬 내용들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미소공위에 대한 긍정적인 여운형의 태도를 몇몇 정치 세력들은 비난하였으나,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와 비슷한 입장에 처했던 오스트리아는, 강대국에 의한 신탁통치와 함께 임시정부의 수립을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유혈 사태 없이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였다. 조금 더 많은 국내의 정치인들이 여운형과 같은 신중함을 보였더라면, 한반도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3.여운형의 사상적 기초앞에서 우리는 여운형의 정치적 행보들과, 그를 통해서 그의 정치사상적 태도를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여운형의 정치적 선택들의 기초가 되었던 그의 사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평화에 대해 여운형이 내린 정의로부터 그의 ‘평화’라는 개념에 대한 넓은 식견과 그것이 상당이 진보적이었음을 살펴보도록 한다. 또한 그의 유명한 일본에서의 연설들에서 내세운 ‘동양평화론’이 무엇인지, 그리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그가 어떻게 해석하였는지 알아보도록 한다.1) 평화란 무엇인가.1919년 11월, 여운형이 내린 평화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평화의 진수는 융화로서 모든 투쟁,시기, 분노, 원한 등 부정적인 것을 시처 버리고, 새가 짹짹거리고 꽃이 피고 낮이 포근하여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기상을 말함이지 결코 사해(死海)와 같이 다만 고요하고 평온함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