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을 읽고햄릿을 읽으며 셰익스피어라는 작가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을 하게 되었다. 햄릿은 오델로 ,리어왕, 멕베스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이다. 말 그대로 마지막은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내며 끝이 난다. 하지만 그 여운은 해피엔딩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덴마크 왕인 햄릿의 아버지는 자신의 동생 클로디어스에 의해 독살당한다. 그리고 그 왕은 유령으로 햄릿친구 앞에 나타난다. 그 사실을 들은 햄릿은 그 유령을 만나고 싶어한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인 그는 그 유령이 정말 자신의 아버지 유령인지 확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유령에게 아버지가 독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분노한다. 거기다 그의 어머니 마저 자신의 남편의 동생과 다시 결혼을 하여 그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에 매우 힘들어 한다. 그는 연극을 통해 독살 장면을 재연하여 왕의 부부앞에서 연극을 선보인다. 클로디어스는 연극을 보고 매우 당황하고 불편해하며 그 모습을 보고 햄릿은 다시 한 번 진실을 확인하게 된다. 연극으로 인해 햄릿은 왕의 미움을 받게 된다.내용만 보자면 매우 충격적인 내용인 것 같다. 동생이 형을 죽이고 형의 부인을 갖는다는 모티브 자체가 생각하기 어렵고 비극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생각이 되었다. 생각하기 어려운 주제를 생각해 낸 셰익스피어의 독창성에 감탄하게 되었고 어떻게 보면 막장으로 흘러갈 수 있던 내용을 현존하는 글 중 단연 손에 꼽힐 정도의 글로 이끌어 낸 그의 능력이 감동스럽기도 하였다.햄릿에게는 오필리아라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햄릿이 왕비와 대화하는 것을 엿듣던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를 클로디어스인 줄 알고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햄릿은 영국으로 추방되게 되며, 오필리아 역시 실연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미쳐 물에 빠져 죽게 된다. 그 소식을 들은 오필리아의 오빠 레어티즈는 분노하고 햄릿에게 복수를 하려 한다.셰익스피어가 쓴 햄릿이란 소설 안에서 햄릿은 피해자이며, 슬픈 운명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오필리아나 레어티즈 남매도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햄릿을 가해자로 인식하고 햄릿이 극악무도한 사람이 아닐까 싶기도 하였다. 특히 레어티즈는 햄릿으로 인해 자신의 가족들이 모두 세상을 떳는데 그 원망이야 하늘을 찌르도록 높았을 것 같다. 클로디어스는 영국에서 겨우 돌아온 햄릿을 레어티즈를 이용해 죽이려 한다. 레어티즈의 칼에 독을 발라놓고 독주를 가져다 놓으며 레어티즈와 햄릿을 펜싱시합을 시킨다. 레어티즈의 칼에 맞은 햄릿은 치명상을 입지만 그 칼로 클로어디스를 찔러 죽인다. 하지만 그 과정속에서 그의 어머니 거트루드는 독주를 마시고 죽고, 햄릿도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사실을 밝혀줄 것을 부탁하며 숨을 거둔다.
어린 아이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아마 대부분 천진난만함, 어리광, 순수함을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물어도 떠오를 수 있는 대답이다. 나도 물론이고, 시인인 William Wordsworth도 마찬가지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거기까지 생각하는 것이 끝이다. 하지만 워즈워드는 어린 아이라는 소재 하나로 영생 그리고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워즈워스는 1815년 한 편지에서 이 시의 집필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시는 전적으로 어린 시절의 두 가지 추억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마비된 감각의 객체에 내재된 광채고, 또 하나는 죽음의 법칙에 도착된 병이라고 했다. 유년의 기억을 소중한 삶의 원천, 그리고 시를 쓸 수 있는 소재로 까지 발전시킨 워즈워드에게 어린 시절은 자연과 인간이 합일을 이루며 자연의 찬란함을 볼 수 있는 ‘비전’을 가졌던 시기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는 ‘전생' 혹은 ‘영혼불멸’에 대한 행복한 기억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인간은 그 기억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성년의 낙담을 조금이나마 줄여주고 다시끔 삶을 지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즉, 전생에 대한 기억이 있던 유년을 기억함으로써 영혼불멸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사실 내가 이 시를 읽었을 때는 영혼불멸 이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도 안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시를 읽으며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 그리워졌고 그 때의 추억이 생각났으며 행복해 졌다. 그리고 그 행복한 기분을 유지한 채 친구와 어린 시절에 어떻게 놀았었는지,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 재밌게 수다를 떨었다. 분명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단지 과거의 행복한 추억만으로도 현재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워즈워드는 어린 시절에는 전생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고 하였는데, 요즘 나의 관심사가 전생이라 더 호기심이 갔다. 가끔씩 나는 친구들에게 물어볼 때가 있다. "넌 전생을 믿어?" 난 감성적인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도 아니다, 우스갯소리를 해보자면, 중학생 때 했던 적성 평가에서 현실주의도 아니고 초현실주의가 나왔다. 그리고 공상성은 2%라고 나오기도 했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나는 너무 현실주의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고 그래서 도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따라 전생에 대해 궁금해 졌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물어보곤 하는데 친구들은 대부분 "그런 건 왜 물어봐?" 라는 반응이었다. 전생의 삶이 현재에도 영향을 끼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중이었는데, 전생의 기억을 어린아이는 어렴풋이 가지고 있다는 워즈워드의 의견을 알고 나니 왠지 모를 동질감이 들기도 하였다.워즈워드는 시에서 '아이는 모든 인간의 조상이다'라고 표현했는데, 처음엔 아이러니했다. 아이가 나오기 위해선 분명 그 부모가 있어야하고, 그 부모에겐 조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조상이라니? 하지만 시를 읽다보니 이해가 되었다. 워즈워드는 아이를 최상의 존재로 본 것이다. 커 가면 커갈수록 사람은 순수성을 잃어간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순수함에 가득 차 있다. 그러한 점에서 아이는 최상의 존재인 것이다. 나도 성인이 된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나 스스로가 타락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느낄 때마다 무섭기도 하다. 내가 정말로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이 되어있을 때 나에게 순수함 이라는게 있을까? 남들과는 다른 어른이 되고 싶은데, 나도 결국 그저 그런 현대사회에 찌들어버린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더욱 더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다. 힘들면 힘들수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 땐 너무 행복했는데, 지금처럼 고민 없이 지냈는데... 고등학교 때 했던 고민이 내 인생의 최대 고민인줄 알았고, 그 당시의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느낄 때도 있었는데 그거 다 행복에 겨운 고민이었다는 것도 느낀다. 그 땐 힘든 것은 한 때이고 항상 즐거웠던 나였고, 웃고 다녔던 나였기 때문이다. 확실히 시간이 갈 수록 웃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그 땐 뭐가 그렇게 다 좋았는지 웃음이 떠나갈 일이 없었다. 지금은 찡그릴 일은 없지만 웃을 일은 없는지 거울 속에 나를 보면 입 꼬리가 항상 평행선이다. 아무 표정 없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인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당연해지고 있었는데, 이 시를 읽으면서 다시끔 나의 유년시절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던 기억, 부모님과 나들이 갔던 기억, 인형 하나에 행복해하던 기억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