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美文化/2미국 흑인음악의 소사블루스는 아프리카 전통, 미국의 노예시대부터 이어져온 흑인 노동가(work-songs), 흑인 설교가들의 종교적 열정, 앵글로 색슨의 발라드 등의 종합과 함께 흑인 발라드로 확립되면서 20세기 초에 미국의 남부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블루스는 전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대중음악의 뿌리가 되었다. 1920년대에 처음으로 블루스 음반들이 녹음되고, 점차적으로 미국 북부로까지 퍼져가면서 블루스는 흑인들의 정체성이 되었다. 미시시피의 델타에서 탄생한 블루스의 스타일이 다양해지고, 전자 기타가 도입되면서 어쿠스틱 일변도의 블루스가 사운드의 확장을 맞이하게 되었다.1950-60년대에 미국 대중음악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혁을 겪는다. 물론, 흑인의 블루스가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수퍼스타를 탄생시키며 백인적인 로큰롤로 변형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대중음악의 다양성을 이해하려면 블루스가 퇴조하고 오히려 백인들이 블루스의 전통을 변형시켜간 반면, 흑인들은 "포스트" 블루스(Post-blues) 장르들을 개척해냈다는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흑인들은 백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커피 한잔을 마실 수도 없었고, 버스에서는 뒷좌석에 흑인들의 자리가 분리되어 있었으며, 대부분의 학교와 공직에 접근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단적으로, 공공화장실의 소변기도 흑백이 분리되어 있었다. 세계사적으로도 1950-60년대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된 시기이다. 이는 참을 수 없는 인종차별과 맞물려 미국 흑인들의 저항심을 불러일으켰다. 노예시절에 피안을 꿈꾸게 했던 구약성서가 이제는 저항의 장소를 제공한다. 구약성서의 해방 메시지를 핵심으로 하여 구성된 흑인 교회들이 저항의 중심이 된 것이다.특히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비폭력 저항 운동과 함께, 우선적으로 미국 북부에서 인종분리 정책이 중단되어야 했다. 그러나 남부는 끈질기게 흑인들의 진정한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케네디 형제의 노력과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의 용감한 정치력으로 결국 흑인들의 시민권이 제도적으로 인정되었고, 1960년대 후반에는 인종분리 정책은 결정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투쟁의 결과는 빠르게 나타나지 않았고 흑인들의 고단하고 비참한 삶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엘드리지 클레버(Eldrigde Cleaver)나 말콤 엑스(Malcolm X)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법적 평등을 조롱했고, 사회적 평등, 경제적 평등, 문화적 평등, 그리고 흑인 정체성의 존중을 요구했다. 급기야 1967년에는 극단주의 조직들이 모여 미국을 백인 미국과 흑인 미국의 두 국가로 분리하자고 부르짖었다. 게다가 1963년에는 케네디가 암살되었고, 1965년에는 말콤 엑스, 1968년에는 마틴 루터 킹의 암살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흑인 젊은이들을 폭력으로 이끌었다. 1967년과 1968년은 모든 흑인 게토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피가 흘러넘쳤던 시기이다. 미국의 흑인들과 백인들은 일촉즉발의 순간으로까지 치닫게 되었다.결국 미국은 대범하고도 현명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몇달 내에 많은 법들이 제정됨으로써, 구직과 교육을 위한 평등한 기회가 제공되고, 여러 직업과 공직에 흑인의 할당수가 정해졌다. 인종차별 행위는 불법이 되고 법에 의한 처벌 대상이 되었다. 처음으로 흑인 정치인들이 공직을 맡게 되었다. 로스 엔젤레스, 클레버랜드, 워싱턴에 흑인 시장이 당선되었고, 1970년대에는 남부에서도 (아틀랜타, 버밍엄 시티, 모바일 시티) 마찬가지였다. 몇년 전만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실현된 것이다. 특히, 미디어 쪽으로의 흑인들의 진출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많은 흑인들이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자리를 잡았고, 영화와 드라마에 흑인 주연들이 등장함으로써,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이미지가 가치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혁명적 변화는 흑인들에게 특권적인 예술이자 소통 수단이었던 음악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흑인 세계가 투쟁을 통해 급작스럽게 출현했고, 몇년 사이에 흑인 정체성이 가치 있게 등장한 것이다.1960년 경까지 블루스는 여러 형태로 발전되고 상업화되면서 흑인 대중음악 전체의 뼈대를 이루었었다. 한편, 1950년대에 로큰롤의 유행은 여러 흑인 뮤지션들이 백인 청중에게 인정 받을 기회를 제공해주었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흑인 청중의 버림을 받는 형국이 되었다. 백인들의 감성에 음악적으로 맞춰주는 것을 적절치 않게 본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에는 로큰롤의 아버지로 추앙되는 척 베리(Chuck Berry)는 60년대 초의 많은 흑인 소설가들에 의해 ‘백인들을 즐겁게 해주는 검둥이짓을 하는 놈’으로 비판받았다. 점차적으로, 흑인들이 지녔던 과거의 모든 태도는 바뀌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가장 가난하고 착취당했던 흑인들의 핵심적인 문화적 표현수단이었던 블루스는 더이상 말하기도 듣기도 싫은 과거의 악조건과 결부된 것이다.반면, 교회는 흑인들의 해방 투쟁을 계속해나갔고, 교회의 음악 전통인 가스펠은 더욱 중요해졌다. 이러한 종교 음악을 대중 음악에 접목시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레이 챨스이다. 50년대 말에 레이 챨스는 흑인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헐리우드와 라스 베가스의 고급 카바레들에서 스타가 된 레이 챨스는 곧바로 흑인 청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英美文化/6게르만족의 대이동Ⅰ. 야만인이라는 불명예동양인과 서양인의 역사 기록에는 공통적인 병폐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나 이외’ 의 다른 민족을 ‘야만인’ 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불렀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중국 역사가들이다. 중국 역사가들이다. 중국 역사가들은 문화 중심지 중원에 살지 않는 민족을 보통 ‘만’, ‘이’, ‘융’ 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중화 민족에게 ‘만이’ 라 불린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이들도 중화 민족을 비하하거나 욕할 때 ‘만’ 이라고 불렀다.서양 사람들도 자기네 이외의 민족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서양 역사에서 야만인을 뜻하는 단어 ‘바바리안’ 은 고대 그리스가 대제국을 건설하며 전성기를 누릴 때 생긴 말이다. 당시 그리스인은 자기네 이외의 민족을 모두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세월이 흘러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된 로마인은 로마 가톨릭을 따르지 않는 민족 모두를 ‘야만인’ 취급했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처음으로 개화시킨 야만족은 가리아족이었다. 이후 로마 군대는 ‘미개한 민족을 계몽한다’ 는 신성한 사명감을 갖고 게르만 야만족을 개화시키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게르만 야만족은 자랑스러운 로마인이 될 기회를 저버리고 로마인의 영원한 야만인으로 남았다, 하지만 게르만족도 야만인이라는 불명예를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새로운 야만인이 될 대상을 물색하다가 동쪽에 이웃해 있던 슬라브족에게 이 불명예를 넘겼다.4세기 중반에 이르러 명실상부한 야만인, 즉 훈족이 등장하자 어설픈 유럽 야만족이 일제히 로마 제국으로 몰려들었다. 이 시기 역사를 이해하려면 먼저 게르만 ‘야만족’ 의 발전 역사를 알아야 한다.Ⅱ. 게르만 ‘야만족’ 의 역사게르만족 대이동 역사를 보기에 앞서 ‘게르만’ 이라는 이름의 기원부터 살펴보자. 게르만족이 유럽 대륙에 상륙하기 전까지 유럽의 중심지는 켈트족의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게르만족이 등장하면서 켈트족의 자유와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켈트족의 기반은 나날이 좁족 동쪽에 이웃해 있던 고트족은 2세기 중반부터 게피다이족과 함께 발트 해 남쪽 연안 비스와 강 하구를 떠나 남쪽으로 대이동을 시작했다. 3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트족은 주로 흑해 북부 연안 드네프르 강과 드네스트르 강 사이에 정착했다. 고트족은 3세기 후반에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동쪽 연안의 동고트족과 서쪽 연안의 서고트족으로 갈라졌다. 4세기 이후 고트족은 아조프 해 연안에 있는 헬레니즘 보스포루스 왕국을 비롯해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여러 나라를 멸망시키며 가장 위협적인 게르만 부족으로 떠올랐다. 341년경 기독교 아리우스파의 영향으로 로마 제국과 잦은 마찰을 빚으면서도 공통된 신앙을 바탕으로 적절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었고, 아리우스파 전도사들이 그리스어 자모를 활용해 고트족을 위한 문자(고트어)를 만들어 게르만족 최초의 문자 체계를 갖춘 언어로 기록될 수 있었다. 369년에 로마 황제 발렌스와 서고트 족장이 도나우 강에 띄운 배 위에서 만나 정상 회담을 했다. 양측은 즉시 교전을 중지하는 데 합의하였지만 완전한 휴전은 아니었다.Ⅲ. 양의 탈을 벗어던진 서고트족서고트족은 376년까지 다키아에 살았다. 하지만 376년 서고트족장 프르티게른은 훈족의 공격을 받고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제국으로 이주를 요청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발렌스는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이주를 허락했지만 트라키아 속주 총독은 이들을 착취하고 괴롭혔다. 서고트족은 일부 동고트족과 함께 로마에 반란을 일으켜 발칸 반도의 로마 속주들을 약탈했고 급기야 378년 8월 9일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발렌스의 군대에 대승을 거두고 발렌스를 죽였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고트족과 동맹부족 협정을 맺고 모이시아에 정착시키고 이들을 대거 로마군에 편입시켰다. 왕국으로 발전테오도시우스가 죽은 이후 395년 족장인 25살의 알라리크는 부족을 이끌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고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유린하였다.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알라리크에게 로마군 지휘관의 직책을 부여하여 이들을 무마세는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와 싸우다가 전사하고 서고트 왕국은 갈리아 남부의 영토의 상당부분을 빼앗겼다. 이후 서고트 왕국은 몇 개로 쪼개지고 피레네 산맥 이남으로 밀려났고 511년에는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릭의 섭정 통치를 받기도 했다. 서고트 왕국은 톨레도를 수도로 삼아 셉티마니아와 히스파니아 대부분 지역을 다스리고 711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입할 때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주도적인 왕국으로 지배했다.Ⅳ. 무자비한 파괴, 반달리즘5세기 초, 아마도 훈족의 침입에 밀린 반달족은 서진을 시작하여 로마 제국의 국경으로 밀려들어 왔다. 반달족은 당시 대부분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로 개종해 있었다. 406년, 반달족은 별 어려움없이 도나우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밀려왔고 라인 강 유역의 갈리아 북부에서 이미 로마화 되어있던 프랑크족의 저항을 받았다. 2만 명의 반달족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그해 겨울 라인 강이 얼자, 반달족은 대거 라인 강을 넘었고 갈리아를 남하하면서 황폐화 시키고 아키텐까지 밀려갔다. 409년 반달족은 계속 남진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로 들어갔다. 히스파니아에서 정착한 반달족은 바이킹족처럼 해적으로 변신했고 북아프리카로 진출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반달왕국429년 군데리크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가이세리크는 함대를 조직하여 약 8만명의 반달족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를 침공했다.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 성을 포위하고 14개월에 걸쳐 공성전을 벌였고 결국 함락시켰다. 이때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히포 레기우스 성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는데 아리우스파 이단자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으나 결국 함락되기 직전 성안에서 죽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반달족은 435년 로마와 평화협정을 맺어 동맹을 맺었으나 가이세리크는 곧 동맹을 깨고 439년 카르타고를 수도로 반달왕국을 세웠다. 이후 35년동안 가이세리크의 반달왕국은 대규모 함선을 조직하고 지중해 연안의 로마제국영토를 차례로 침략해 점령하였다. 로마는 그동면서부터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동고트족에게 시칠리아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훈네리크의 아들 힐데리크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가톨릭에 우호적이었고 친-로마 정책을 펴서 비잔티움 제국과 평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533년 겔리메르가 힐데리크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반달왕국과 전쟁을 선포하고 벨리사리우스의 지휘 아래 북아프리카로 쳐들어왔다. 벨리사리우스는 반달군의 저항을 받았지만 결국 카르타고를 함락시키고 534년에는 반달왕국의 두 번째 도시인 히포 레기우스마저 정복했다. 겔리메르는 결국 비잔티움 군에게 항복했고 반달 왕국은 무너졌다. 로마는 다시 이 지역을 지배하고 가톨릭 교회를 부활시켰다. 그로부터 1,500여 년 뒤 순수 혈통을 찾으려는 후손의 노력으로 반달족은 다시 한번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Ⅴ. 가톨릭으로 개종한 첫 번째 게르만족355~358년 사이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라인 강 운송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라인 강 유역에 사는 프랑크족과 협상을 벌였다. 406년에 반달족이 라인 강을 건너 침입했을 때 프랑크족은 로마 제국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 반달족을 막아 냈다. 451년에는 아틸라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다시 로마 장군 아에티우스의 부름을 받고 달려가 로마 연합군에 합류했다. 로마 제국은 프랑크족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덕분에 운명을 486년 까지 연장할 수 있었다. 454년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제국의 방패이자 ‘최후의 로마인’ 아에티우스를 죽이면서 로마 제국은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486년에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가 수아송 독립 군벌과 로마 제국의 장군 시아그리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무너뜨리고 솜 강과 센 강 사이 갈리아 북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496년에 클로비스 1세가 병사 3,000명과 함께 기독교 세례를 받으면서 프랑크족은 정식으로 가톨릭에 귀의했다. 이렇게 해서 프랑크족은 가장 먼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게르만족으로 기록되었다. 프랑크족의 정복 활동은 가톨릭 교황 및 각지 주교의 전폭적마 주둔군의 도움을 받았지만, 후반 150년 동안은 자력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오랜 투쟁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아서 왕 전설은 브리턴족과 앵글로-색슨족 투쟁 역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무릎을 꿇긴 했지만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 브리턴족이 거둔 승리도 적지 않다. 게르만족 대이동 역사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강력히 저항한 사례는 브리턴족이 유일하다. 이 때문에 앵글로-색슨족은 7세기 초까지 완전한 왕국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유럽 역사에서는 켈트계 브리턴족을 난공불락의 요새에 비유하기도 한다.Ⅷ. 동고트족의 영웅 테오도리쿠스454년, 동고트족이 훈족들에게 점령된 지 1년째 되던 해에 튜다미르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오도리쿠스는 튜다미르와 비잔티움 제국 사이의 협정의 결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볼모로 유년기를 보냈다. 테오도리쿠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내며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와 군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레오 1세와 제논의 호의를 얻어 483년 마기스테르 밀리툼이 되고 1년 뒤에는 집정관이 되었다. 이후 이십대 초반을 다른 동고트족과 보냈으며 488년 왕이 되었다. 이 무렵 동고트족은 비잔티움 제국 내에 로마의 포이데라티로 거주하고 있었으나 점점 통제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테오데릭이 왕이 된 이후 황제 제논과 협정을 맺어 테오도리쿠스와 동고트족이 476년 로마를 점령한 오도아케르를 몰아내는 데 협조를 받기로 하고 오도아케르의 왕국을 침략하게 된다. 테오도리쿠스는 488년 군대를 끌고 이탈리아에 도착, 489년 이손조의 전투와 밀라노의 전투와 489년 아다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493년 테오도리쿠스는 라벤나를 점령하고 오도아케르는 항복하나 테오도리쿠스의 손에 살해되었다.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 1세의 여동생 아우도플레다를 왕비로 맞아들여 결혼동맹을 맺었으며, 서고트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왕들과도 동맹을 맺었다. 클로비스 1세는 506년과 523년 테오도리쿠스와 전쟁을 벌였다. 제위기간 대부분동안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형되었다.
[1] These are the names of the sons of Israel who came to Egypt with Jacob, each with his household: [2] Reuben, Simeon, Levi, and Judah, [3] Is`sachar, Zeb`ulun, and Benjamin, [4] Dan and Naph`tali, Gad and Asher. [5] All the offspring of Jacob were seventy persons; Joseph was already in Egypt. [6] Then Joseph died, and all his brothers, and all that generation. [7] But the descendants of Israel were fruitful and increased greatly; they multiplied and grew exceedingly strong; so that the land was filled with them. [8] Now there arose a new king over Egypt, who did not know Joseph. [9] And he said to his people, "Behold, the people of Israel are too many and too
Ⅰ. 그린 투어리즘1. 그린 투어리즘(Green tourism)이란?환경 피해를 최대한 억제하면서 자연을 관찰하고 이해하며 즐기는 여행 방식이나 여행 문화로 정의되며 에코투어리즘, 생태관광, 농업관광, 농촌관광등과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자신의 삶과 지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활동이다.여기서 ‘그린’은 전원(숲)이나 자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공존과 자원의 적정한 이용 등 만물의 상생관계에 대한 인식’이라는 ‘생태철학’과 사회?문화의 지속가능성을 지켜내는 인류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투어리즘’ 역시 단순한 여가활동이 아니다. 다양하고 개성 있는 농촌체험과 사람들 간의 인적 교류를 통해 심신을 회복하는 활동이다. 나아가 도시인은 친환경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삶을 바꾸어가고, 도농교류를 통해 농촌을 살리는 연대활동이다.2. 그린 투어리즘(Green tourism)의 목적?그린투어리즘을 통해 농-산촌의 농산물을 가공-판매하고 특산품 및 각종 관광음식물을 판매하여 농가의 소득기회를 제공, 지역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3. 그린 투어리즘(Green tourism)의 미래를 밝게 해주는 요인들(1) 주5일 근무제의 시행이는 전체 관광-여가 산업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하지만 아직까지는 여가보다 소득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경우가 많다.(2) 관광-여가활동 패턴의 변화과거 대중관광(mass tourism)에서 대안관광, 테마관광, 지속가능한 관광등으로 패턴이 변화하고 있다.(3) 인간 본성에 대한 재인식 교육의 필요현대인들은 서비스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이다. 여기서 잠시나마 탈피하여 직접 채취하고 얻는 성취욕을 얻고자 한다.(4) 웰빙 문화와 농촌의 연관성최근 가장 뜨거운 것이 웰빙 바람이다. 느린 삶을 추구하고, 유기농 음식과 직접 체험을 추구한다.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곳으로 농촌이 각광받고 있다.4. 그린투어리즘 예ㆍ농촌체험마을- 슬로푸드, 녹색농촌, 전통테마, 산촌체험, 어촌체험, 정보마을, 팜스테이 등ㆍ체험농장- 체험목장, 주말농장, 주말과수원, 수확체험장, 문화체험장, 교육농장 등Ⅱ. 체험목장낙농체험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목장방문객이 급증하자 정부와 지자체의 낙농체험목장 지원사업도 잇따르고 있다. 경기도가 전국 지자체 중에서는 처음으로 지난 해 부터 ‘밀크스쿨 지원사업’을 시작하여 올해까지 농도원목장, 모산목장, 진주목장, 와우목장, 아트팜 등 5개 목장을 지원하였다. 농식품부도 올해부터 ‘낙농체험관광사업’을 시작하여 은아목장, 파도목장, 설목장, 농원목장 등 4개 목장을 사업대상자로 선정하였고, 2012년까지 매년 4개 목장씩 총 20개 체험목장을 육성할 계획이다.낙농진흥회는 그동안 혼자만의 힘으로 체험목장 발굴과 지원, 체험프로그램 개발, 낙농체험 대국민 홍보 등을 도맡아 힘겨웠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난 해 부터 정부와 지자체의 체험시설 등 하드웨어(Hardware)에 대한 지원사업이 본격 시작되면서 낙농진흥회는 낙농체험 홍보, 신규 체험목장 육성, 소비자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 개발 등 소프트웨어(Software) 측면에 보다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낙농체험은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된 지 불과 5년 만에 지난 해에는 7개의 체험목장에 2만8천명의 소비자가 방문하였으며, 올해는 체험목장 확대로 약 4만명 이상의 방문이 예상된다. 우유의 생산현장인 목장에서 체험을 통해 우유의 위생ㆍ안전에 대한 믿음을 주면서, 우유의 가치까지 느끼게 하는 낙농체험은 앞으로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Ⅲ. 답사지- 와우목장1. 목장소개1972년 경기도 화성군 와우리에서 시작한 와우목장은 1979년 환경 좋고 전원 농촌지역인 이천시 설성면 금당리로 확장 이전해왔다. 9만여 평의 초원에 각종 꽃과 관상수가 심어져 있으며 300여 두의 젖소와 트렉타, 파종기, 수확기 등 각종 농기계를 구비하고 있다. 2009년에는 HACCP 인증 위생기준의 유가공 공장을 준공해 이스라엘에서 구입한 목장형 유가공 기계를 설치하고 목장에서 나는 고품질 우유로 치즈,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등의 유제품을 생산하는 목장형 유가공 사업을 시작했다. 우유공장은 1층 유가공 공장, 2층 공장 견학실, 3층 체험학습실로 구성되어 있다. 경기도 체험목장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젖소돌보기, 치즈체험, 우유를 이용한 각종 요리, 우유비누 만들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와우목장 인근에는 소나무숲의 노성산 공원 등이 있어 나들이 코스로 부족함이 없다.2. 체험 프로그램ㆍ기본목장체험- 젖짜기, 우유주기, 건초주기, 젖소차타고 목장투어, 아이스크림만들기 등 와우목장 젖소와 함께할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이다.※가격 : 일반 12,000원 / 경로우대 10,000원 / 어린이 12,000원ㆍ치즈체험- 스트링치즈와 피자를 만들어 보고 먹을 수 있는 체험이다.※가격 : 일반 15,000원 / 경로우대 12,000원 / 어린이 15,000원ㆍ기본목장체험+치즈체험- 기본목장체험과 치즈체험을 같이하는 프로그램이다.※가격 : 일반 25,000원 / 경로우대 20,000원 / 어린이 20,000원3. 교통일죽IC - 중부고속도로 35번 고속도로 요금소 - 38번국도 일죽IC 삼거리에서 충주, 장호원방면으로 좌회전 - 329번 지방도(능국삼거리) 좌회전 - 행죽로 여주, 장호원방면으로 우회전 - 문화마을 1길 우회전 - 노성산 1길 우회전 - 와우목장이천종합터미널→ 25번 버스 이용 → 문화마을 앞 버스정류장 하차4. 관광적 분석(소비자 측면)낙농진흥회에서 인증한 ‘와우목장’은 작년 SBS ‘대한민국 쿡’에서 방영하여 알려져서 그런지 달마다 일주일정도 빼고는 거의 예약이 완료된 상태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와우목장을 찾은 것은 지난 8일. 그때도 이미 체험학습이 한창이었다.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어른 6명, 어린이 20명, 총 26명이 체험학습을 하고 있던 목장 안은 시종일관 시끌벅적했다. 체험학습은 오전 프로그램과 오후 프로그램으로 나뉘는데, 오전 프로그램에서는 소 젖짜기, 소 건초주기, 송아지 우유주기, 아이스크림 만들기가 있다. 오후 프로그램에서는 스트링치즈 만들기, 피자 만들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짜여 있었다. 이 중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은 아이스크림 만들기와 송아지 우유주기 체험. 특히 아이스크림 만드는 체험이 더욱 그렇다. 별다른 준비도구 없이,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집에서도 손쉽게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 프로그램은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였다. 모든 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우유의 변화에 주목하여 우유가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보고 신나했다. 또한 자체적으로 와우목장의 이름을 내건 ‘와우목장 요구르트’를 개발했다. 이는 생산하자마자 바로 가공하는 과정을 거쳐 신선함을 보장하는데, 현재는 이천 내에서만 유통되고 있으나 점점 판로를 늘려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신약성경이란 무엇인가?신약성서의 세계신약은 마지막 한 개의 퍼즐과도 같다. 예수님은 그 마지막 한 개의 퍼즐을 채우시고 완성하신다.“신약성경이란 무엇인가?” 의 대 주제의 물음은 “예수,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오늘날도 유대교에서는 이 신약을 부정하고 예수님 또한 부정하고 있다. 유대교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종교들도 이 점을 아예 이해하려고 하지를 않는다. 예수님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논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 답은 신약에 다 나와 있다. 구약에서도 예수님에 대해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통해 예고하셨고, 신약에서 예수님은 직접 자기 정체에 대해 밝히신다. 또한 이것이 신약의 중심내용이라고 본다.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이다.” 라는 사실을 시인했고, 그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도 결국에 가서는 그가 하나님이심이라고 증언을 한다. 처음에는 그저 랍비, 선지자로 생각했었는데 결국은 ‘하나님’ 이라고 고백을 하고 전도의 사역을 맡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나 지금의 사람들에게 이점은 참으로 당황되는 일일 수 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나는 하나님이요, 나는 왕 중의 왕이다!” 라고 말을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을 할까? 두 가지 경우밖에 없을 것이다. 미친 사람이거나, 진짜 하나님이거나.오늘날의 우리도 한번쯤은 심각하게 이 사실들을 놓고 판가름해야 한다. 신약을 통해서 그가 미친 사람인지, 진짜 하나님이신지를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만약 그를 하나님이라고 믿지 못하겠거든 그를 정신병자라고 해야 한다. 절대로 단지 성인 중의 한 사람이거나, 위대한 선생이거나, 위대한 철학자요, 사상가라고 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기를 결코 하나님이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