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희곡 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극의 모든 요건을 갖춘 가장 짜임새 있는 드라마”라는 극찬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비극을 “애련과 공포를 통해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설명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상기시킬 때,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는 비극의 아주 적절한 예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희곡 은 영웅으로서 정점의 행복을 누리던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는 신탁, 즉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라는 ‘진실’을 맞이하게 되고 이로 인해 가장 비참한 나락으로 빠지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불행과 몰락을 함께 경험하며 나약한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함께 슬퍼하고, 언젠가 우리에게도 닥칠지 모를 운명의 철퇴를 두려워하게 된다.이 희곡은 오이디푸스의 몰락을 통해 제한된 시야를 지닌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적인 한계를 드러내며, 온전하게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의 선택이 어떠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와 운명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독자로 하여금 절감하게 한다. 이러한 희곡의 내용은 이 희곡이 쓰여진 당시의 상황과 연관시킬 때,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고대 그리스는 “인간”의 존재가 등장하고 있던 상황이다. 신과 별개의 존재로서 인간의 주체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던 상황에서 쓰여진 이 희곡은 여전히 “신” 앞에서 나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리며, 운명 앞에 순응해야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운명”이라는 신의 뜻을 피하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가 자식을 살해하려 한 행동과,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동침할 운명”이라는 신탁을 피해 양부모님을 피해 그 국가를 떠나간 오이디푸스의 행동들은 결국 “신의 뜻”으로 가는 하나의 길목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인간은 신 앞에 발가벗겨진 존재이며, 알 수 없는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또 하나의 선언으로서 희곡의 의미가 강렬하게 다가왔다.그러나,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격렬한 선언 이후에도 여전히 이 희곡은 우리에게 널리 읽히고 있으며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 있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그 까닭은 꼭 운명이나 신의 존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계획하지 않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일련의 행동들이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경우는 언제나 존재하며 피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살아가며, 비극은 언제나 “뜻밖의”라는 수식을 붙이고 어느샌가 다가온다. 따라서 극 속에서 대리 체험하게 되는 인물의 몰락은 언제나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했던 “애련과 공포의 정서”를 통한 “카타르시스”는 여전히 극 속에 존재한다. 21세기에 사는 나 역시도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순간, 함께 아파하고 그와 함께 몰락했다.
103위 성인의 탄생을 통해 바라보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Ⅰ. 머리말Ⅱ. 103위 시복과정Ⅲ. 103위 성인Ⅳ. 맺음말Ⅰ. 머리말한국사 특강 수업의 과제로 한국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책을 선정하여 읽고 레포트를 작성하는 과제를 받고 “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라는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과제의 대상이 대는 책은 교수님께서 정해주신 몇 가지의 책 중에 선택하는 것도 가능했고, 혹은 그 외에 한국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책 가운데 자신이 관심 있는 책이 있다면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지식은 수업과 관련된 것이 전부였으므로 교수님께서 정해주신 책 목록 가운데에서 책을 선정하게 되었다. 교수님께서 책 목록을 말씀해주시면서 책과 관련된 간략한 설명들을 곁들여 주셨기 때문에 책을 고르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곧바로 도서관으로 향해 “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라는 책을 빌렸다. 내가 “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라는 책을 선택한 이유는 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는 수업 시간에도 다룬 적이 있는 박해시대 천주교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식과 관련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책들이 다루고 있는 생소한 인물들과는 달리 천주교 박해시대의 이야기과 그로 인한 수많은 순교자들에 대한 설명은 중간고사 이전까지의 수업의 중요한 주제였으므로 조금 더 관심이 갔다. 이러한 까닭으로 “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라는 책을 선정하였다.“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는 103위 성인 시성 25주년을 맞아 당시 로마 현장에서 시성을 위한 실무를 담당했던 윤민구 신부가 직접 저술한 책으로 103위 시성식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보고서와 같은 책이다. 책은 다양한 자료들과 함께 시성의 과정에 대해 꼼꼼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103위 성인들 각각에 관하여 모두 다루고 있다. 사실 책을 읽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나는 “103위 성인의 탄생책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에 따라서 103명의 성인들 가운데 책의 저자가 임의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을 일부 선별하여 그들에 대해 다룰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던 것은 “103명의 성인들은 모두 종교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일텐데 이들 가운데 일부를 또 다시 선별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지 않을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염려와 달리 이 책은 “시복의 과정”을 다루는 것과 함께 103위 성인들에 대해 모두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다.Ⅱ. 103위 시복과정한국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래 모진 박해를 받았다.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 전의 박해시대동안 한국천주교는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를 겪으면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우리나라의 103위의 성인들은 모두 이러한 박해시대 순교자들이다. 한국 성인 103위는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때 순교한 79위와 병인박해 때 순교한 24위를 일컫는다. 이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해서 1984년 5월 6일에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주요한 주제이다.수업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듯이 천주교회에서는 종교상의 이유로 죽은 순교자들이나 예수의 가르침대로 산 사람들을 성인품에 올려 후대 신자들이 귀감으로 삼는 데 이를 시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성 전에는 먼저 시복(諡福)을 하게 된다. 신앙의 영웅들에 대해 조사하고 심사하여 공적(公的)으로 공경할 수 있도록 교회가 승인하는 것을 말한다. 시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시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복이 된 복자는 해당 지역의 교회나 수도회 등의 공경을 받는 반면 시성이 된 성인들은 전 세계적으로 공경을 받게 된다.복자가 시성을 받으려면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을 증명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지만 당시 한국 교회는 기적 검증에 대해 철저한 사전준비 없이 시성 수속을 시작했다. 교황청 시성성은 한국 교회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교황청이 한국의 순교성인의 시성과 관련한 문제에서 굉장히 특혜를 준 측면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당시 천주교의 전반적인 상황을 통해 알아보아야 할 문제일테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 그는 당시 시성을 위한 실무를 담당했던 실무 담당자로서 당시의 시성과 관련된 상황의 진행에 대해서 꼼꼼하게 기술할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료를 통해서만 보더라도 1984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해서 이루어진 103위 성인 시성은 여러 측면에서 특혜적인 성격이 보여진다. 천주교회의 까다로운 시성절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순교 성인들에 대해서는 기적 심사를 면해 준 것과 더불어, 로마에서만 이루어져왔던 시성식이 예외적으로 한국 땅에서 이루어진 점, 교황의 방문 1년 전에 성인 시성 절차가 간소화되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한국의 103위 성인의 탄생은 책의 저자를 비롯하여 한국천주교회의 노력과 더불어 로마교황청의 여러 가지 입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진 사건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 저자의 말은 꽤 의미심장하게 들린다.“우리나라 성인들의 시성에 관계된 일을 조금 거들면서 깨달은 점은 이 일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셨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순교자들의 삶이 그랬고, 시성이 이루어지는 과정 또한 그랬다. 하느님께서 원하셨기에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시성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103위 순교자가 성인이 되어 우리에게 온 것이다.”Ⅲ. 103위 성인본 책에서는 103위 성인들의 탄생 과정과 더불어 한국 천주교 성인 103위의 약력을 함께 다루고 있다. 사실 이 책의 주제가 “한국 103위 성인의 탄생”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 대한 논의를 지금까지 길게 설명했지만, 천주교에서 “성인”과 관련된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그 절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인들의 삶을 통해 후대의 귀감을 남기는 것에 있다. 이에 따라 책에 대한 논의를 하는 데 있어서 성인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머리순적이라고 스스로 이야기 한 바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그들에 대한 소개나 설명이 아니라 “독후감(讀後感)”으로써 나에게 특히 인상 깊었던 성인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먼저 103위 성인들을 살펴보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여성”이 굉장히 많았다는 점이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역사적 기록 가운데에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등장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수업 시간에도 초기 여성 신자들이 많았다는 점에 대해 여러 번 다루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많다”는 의미는 다른 역사적인 사건들에 비교했을 때 “많다”는 의미로 이해되었지 절대치로써 이렇게 많은 여성 신자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는 약간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103위 성인 가운데 여성이 많다는 것이 순교자들 가운데 여성이 많았다는 의미로 이어지는지(이 경우에도 남성보다 소수였더라도 여성신자들이 더 열성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초기 천주교 전체에 여성신자가 많았다는 의미로까지 해석이 가능한지에 대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103위 성인 가운데 여성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까닭에 여성 신자들에 대해서 조금 더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고, 그 성인들에 대해 짧게 언급하면서 그들에 대해 살펴보면서 느낀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정정혜는 정하상의 동생이다. 정하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정하상의 집안이 순교자 집안이라는 사실도 들은 바가 있다. 하지만 정하상의 집안에 여성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천주교 신자인 “정정혜”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정정혜는 신유박해 때 다섯 살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풀려났다. 이후 그녀는 성장하여 정하상과 더불어 활발하게 신앙생활을 하였고, 오빠인 정하상이 1839년 천주교 신앙의 당위성을 설명한 『상재상서』를 저술하여 체포되자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또 다른 여성 성인인 권희는 이광헌의 부인이었으며, 이 다른 여성 성인들도 이와비슷하다.그들은 가족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들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생활이 가부장적인 가족관계에 의한 것이고 남성의 종교 활동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남성의 종교 활동이 선행되고, 여성의 종교 활동이 그에 따른 부산물처럼 등장하였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내가 느낀 것은 당시에도 신앙 생활이 가족 단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103위 성인들에 대한 짧막한 기록들을 살펴보고 여성신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오늘날의 종교 활동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가족 단위로 신앙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103위 순교 성인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Ⅳ.맺음말“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는 한국의 103위 성인들의 탄생 과정에 대해 다루는 책이다. 책은 당시 이 일을 담당했던 실무자가 저술한 내용으로 그 어느 책보다 성실하게 그 과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전혀 모르고 있었던 천주교의 “시복”, “시성”과 관련된 내용들을 자세하게 알 수 있었고, 다소 까다롭고 복잡한 천주교의 시성에 대한 절차를 살펴보면서 천주교의 전반적인 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또한, 저자는 시성의 과정에 대해서 담담하게 보고서 형식으로 써내려가고 있지만 그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103위 성인의 탄생”은 어쩐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그 과정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신의 역사하심이 따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한국 천주교사의 역사를 볼 때 박해시대의 순교자들 가운데 일부가 “성인”으로 기록되어 후대의 귀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감동적이었다. 꼭 종교적인 설명을 가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열정은 사람들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103위 성인들에 대한 기록도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들은 자신의 종교를 위해 죽음까지 불사한 사람들이다. “믿음”을다.
ㄷ구개음화의 발생시기Ⅰ. 머리말Ⅱ. 구개음화의 정의와 논의 대상 한정Ⅲ. 구개음화의 발생 시기Ⅳ. 맺음말Ⅰ. 머리말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을 변화하면서 그 시대의 흔적을 담고 있다. 따라서 언어의 변천에 대한 연구는 언어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본 레포트는 대표적인 음운규칙 가운데 하나인 구개음화 현상에 관하여 통시적 관점에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구개음화 현상은 국어의 사용과 더불어 시작된 것은 분명히 아니며, 발음의 경제성을 이유로 국어가 사용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현상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구개음화의 등장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학자들마다 그 의견이 다양하다. 이에 따라 본 레포트는 구개음화의 등장 시기에 학설들을 다루고자 한다. 먼저 논의에 앞서 논의의 대상인 구개음화 현상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한 이후, 구개음화의 발생 시기와 확산 과정에 대한 논의를 기존 학설들을 정리하면서 진행하고자 한다.Ⅱ. 구개음화의 정의와 논의대상 한정구개음화는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구개음이 아닌 음이 구개음으로 바뀌게 되는 음운현상을 말한다. 구개음화에 대한 정의들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표준어 규정 제 17항」에서는 구개음화에 대해서 “받침 ㄷ,ㅌ(ㄾ) 이 조사나 접미사의 모음 'l'와 결합되는 경우에는, [ㅈ,ㅊ]으로 바꾸어서 뒤 음절의 첫소리로 옮겨 발음한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와 비슷하게 「바른말 글사전 제 6항」에서는 “ㄷ, ㅌ 받침 뒤에 종속적 관계를 가진 ‘-이(-)’나 ‘-히-’가 올 적에는, 그 ‘ㄷ, ㅌ’이 ‘ㅈ, ㅊ’으로 소리나더라도 ‘ㄷ, ㅌ’으로 적는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서 볼 때, 국어에서의 구개음화는 흔히 ㅣ[i]나 반모음 ㅣ[y] 앞에서 비구개음인 ㄷ, ㅌ, ㄸ이 각각 구개음 ㅈ, ㅊ, ㅉ으로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구개음화의 구개음화는 표준발음으로 인정되는 /ㄷ ㅌ/뿐만 아니라 다양한 음운현상들을 포괄한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국어학·언어학 용어사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구개음화는, 조음 부위(調音部位)가 동화되는, 역행 부완전 동화(逆行不完全同化) 현상인데, 이에는 필연적 현상(必然的現象)과 수의적 현상(隨意的現象)의 두 가지가 있다. 어휘 형태소의 끝소리 ‘ㄷ, ㅌ’이 [ㅈ, ㅊ]으로 실현되는 것(그리고 ‘ㄴ’이 [?]로, ‘ㄹ’이 [?]로 실현되는 것)은 필연적 현상(표준 발음으로 인정)이며, ‘ㄱ, ㅋ, ㅎ’이 [ㅈ, ㅊ, ㅅ]으로 발음되기도 하는 것은 수의적 현상(비표준 발음)이다.이처럼 구개음화는 넓은 의미에서는 ㄷ구개음화 이외의 것 들이 여러 가지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 허웅은 구개음화 현상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도 하였다.㈀ 음절경계에서 /ㄷ, ㅌ/이 /i, j/를 만나서 /ㅈ, ㅊ/으로 바뀌는 현상㈁ 형태소와 형태소 경계에서 /ㄷ, ㅌ/이 /i, j/를 만나서 /ㅈ, ㅊ/으로 바뀌는 현상.㈂ 15세기에 치조에서 조음되던 /ㅈ, ㅊ/이 근대 국어 이후에 구개의 위치로 이동한 현상.㈃ /ㄱ/구개음화㈄ 15세기에 중립위 근처에서 조음되던 /i, j/가 현재 구개음 자리로 이동한 현상.㈅ ㄴ의 머리소리규칙구개음화는 표준어로 인정되는 ㄷ구개음화를 지칭하는 협의의 것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다양한 음운 현상들을 포괄하는 광의의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구개음화”는 후자의 의미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광의의 구개음화는 앞서 간략하게 살펴본 것과 같이 너무 포괄적이고 그 기준이 모호한 면이 있기 때문에 본 논의를 전개하는 것에 무리가 있다. 따라서 구개음화 현상의 변천을 논의하는 본 레포트는 논지의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협의의 구개음화인 ㄷ구개음화를 중심으로 구개음화의 변천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Ⅲ. 구개음화의 발생 시기구개음화의 시기에 대한 논의는 유희의 언문지에 보이는 증언과 문헌에 나타난 표기를 중심으로 의 고조할아버지가 살던 때에는 디화(知和)와 지화(至和)를 구별하였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를 구개음화의 시기와 관련하여 해석하면 『언문지』를 지을 당시에는 관서지방을 제외하고는 ㄷ구개음화가 있었으나 정동유의 고조할아버지가 살던 때에는 ㄷ구개음화가 없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유희의 『언문지』를 신뢰하여 구개음화의 시기를 추정할 경우, 적어도 17세기 초반이나 중반까지는 한자의 어두음절에서 知와 至가 구별되어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한자음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구개음화에 관한 예가 17세기 말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되어(남광우, 1969:88) 위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는 한자음에 대한 예이기 때문에 이를 고유어에 동일하게 적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따라서 고유어에서의 구개음화는 당시 문헌의 표기용례를 중심으로 그 시기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문헌자료에 나타나는 표기법을 통한 시기의 추정은 학자들이 어떤 문헌자료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구개음화의 발생 시기에 대한 추정은 학자들마다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제 이와 관련하여 각 학자들의 주장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자.1. 15세기설15세기 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인 김동언은 『두시언해 초간본』과 『박통사 초간본』을 분석한 뒤에 '진짓'(두초, 8-50), '쳐두고'(박초, 상 75)와 같은 예를 추출하고 이를 “ㄷ구개음화의 이른 시기 도출형”으로 결론지었다. 이어서 16세기 자료인 『소학언해』의 표기법을 분석한 뒤에 '16세기 말에 올수록 구개음화가 보다 분명한 생성력을 갖기 시작'한 시기로 설정했으며 역표기가 나타난 17세기 후반기를 '발전기'로 18세기 말을 '확립기'로 보고 있다. 이동석 역시 15세기에 본격적인 차원은 아니더라도 ㄷ구개음화 현상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문헌증거들을 제시하였다. 그는 기존에 언급된 ‘진짓’ 외에 ‘치-’, ‘드러 중심으로 전기 근대국어의 음운론을 연구하는 중에 'ㄷ'구개음화는 16세기 말부터 우발적 발단의 소산이란 점과 y앞에 배분되는 ㄷ이 i 앞에 배분되는 ㄷ보다도 먼저 수의적 변이를 일으켜 구개음 ?로 실현되기 시작하였으며, 파찰음이 파열음보다 덜 유표적(marked)이므로 이러한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실현되는 것으로 보았다.3. 17세기설16세기 이후의 문헌자료를 검토하여 구개음화 현상을 통시적 관점에 근거하여 구개음화가 이루어진 시기를 추정한 이명규는, 각 문헌의 분포와 빈도수를 살핀 후에 구개음화가 출현된 시기를 지역별로 나누어서 밝히고 있는데 남부방언 자료에 있어서는 16세기 중엽까지, 중앙방언에서도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밝혀 중부지방에서의 'ㄷ'구개음화는 17세기에 발생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홍윤표 역시 중앙어에서의 ㄷ구개음화는 17세기에 나타난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구개음화의 진행이 비어두 음절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다고 설명하면서 방언에서의 ㄷ구개음화는 15세기부터 시작되어 16세기 말, 또는 17세기에 완성 되었다고 설명하였으나 중앙어에서는 17세기에 ㄷ구개음화가 나타난 것으로 설명했다. 같은 시기를 주장하는 또 다른 학자인 김상돈은 구개음화의 전개를 시기별로 나누어 “구개음화에 있어서 17세기 중반까지는 초기단계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중반까지는 발전단계로, 18세기 후반 이후는 완성단계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4. 18세기설18세기설을 주장한 김주필은 치음의 구개음화에서 후행모음의 혼기에 대하여 제1단계 혼기와 제2단계 혼기를 설정하고, 치음의 구개음화를 모음체계와 관련하여 치음의 구개음화를 실현시킨 i, y에 가장 가까운 '어'나 '으'에서 치음의 구개음화가 발단되었다는 것과 18세기 이전에는 중앙어의 구개음화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또 다른 학자인 안대현은 이전의 연구자들이 근거로 제시한 문헌자료들의 검토를 통해서 이전 18세기 이전에 ㄷ구개음화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표기례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설들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각각의 내용들을 살펴볼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문헌자료의 취사선택 여부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유희의 『언문지』의 내용을 신뢰하는가 여부와 관계가 있다. 이러한 점에 따라 앞선 주장들을 크게 분류하면 구개음화가 17세기말-18세기 이전에 등장하였다는 견해와 그이후에 등장하였다는 견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분류에 따를 때, 학계는 언문지의 내용을 신뢰하는 의견이 다수로 보인다. 구개음화의 시기를 15-16세기로 주장하는 설은 여전히 학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너무 이른 시기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며, 15세기 설의 주장에서 제시하는 증거들 역시 여전히 빈약하다. 또한 15세기 설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진짓’의 경우 한자어의 차용으로 보는 반박이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15세기에 구개음화가 등장하였다는 학설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대체로 학계는 언문지의 내용을 신뢰하며,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구개음화가 나타났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룬다. ㄷ구개음화의 시기를 그 이전으로 소급하여 잡은 학자들 역시 부분적인 구개음화의 등장을 이야기하는 견해들이다. 어떠한 현상의 “등장 시기”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등장”이라는 것은 그 개념 자체가 너무나 모호한 개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오기(誤記)이고 어디부터가 등장(登場)인지의 판단이 쉽지 않다. 학자들 사이의 구개음화의 등장 시기에 대한 논의가 명확한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구개음화의 시기에 대한 논의가 그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등장”의 개념에 대한 명확한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언어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등장”의 개념과는 그 차이를 두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며 사람들 사이에 두루 통용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등장의 시기를 “처음 나타나는 시기”로 보는 것과 달리 언어의 사용에서의 등장 시기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규.
월지의 서천과 지배세력의 변화월지의 서천과 지배세력의 변화장건의 원정 실패와 관련하여제출일전공과목학번담당교수이름Ⅰ. 장건의 서역원정 실패에 대한 문제제기와 가설Ⅱ. 가설 검증Ⅲ. 결론 및 새로운 가설 제시장건의 서역 원정 실패에 대한 문제제기장건의 서역원정이란 흉노 정벌을 꾀하던 한 무제가 월지와의 동맹을 위해 장건을 비롯한 사절단을 파견한 사건이다. 월지국은 본래 흉노보다 강성하여 흉노의 묵특선우가 태자로 있던 시절에는 그를 인질로 잡고 있기도 할 정도였으나 묵특선우의 즉위 이후 월지는 흉노에게 크게 패하여 몰살당하다시피 한 상황이었고, 월지는 흉노에 대한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전해들은 무제가 월지와의 원교근공의 군사적 동맹을 통해 흉노를 제압하기를 계획하였고, 대월지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사절을 파견했다. 이를 위한 사신으로 하급관료였던 장건이 응모하여 합격했고, 그를 비롯한 1백 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단이 월지로 출발했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장건 일행은 흉노에 사로잡혀 오랜 억류 기간을 보냈고 13년의 원정 기간 끝에 한으로 돌아왔다.어렵게 월지에 도착했던 장건 일행은 그들의 목적인 ‘월지와의 동맹’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서쪽으로 이동한 월지, 즉 ‘대월지’와 접촉 하였으나 그들은 새로 이전한 땅에서 풍요롭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흉노에게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월지의 동맹 거절 이유에 대해서는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무제가 월지와의 동맹을 계획한 것은 월지국과 흉노 사이의 깊은 원한 관계에 대해서 전해 듣고 월지가 흉노를 함께 공격할 뜻이 있을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당시에 천자(무제)가 흉노에서 투항해온 사람에게 물어보면 모두가 “흉노는 월지왕을 격파하고 그의 머리뼈로 술 마시는 그릇을 만들었고, 월지는 쫓겨 간 뒤로 항상 흉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으나 함께 흉노를 치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흉노의 투항자들이 전해온 정보는 간접적인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내는 공공연한 것이었으며 월지는 흉노를 가장 공격하고 싶어 하는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월지국이 자신들의 본거지를 옮겨 더 이상 흉노와 경쟁 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흉노에 대한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단칼에 거절하였다는 점은 월지국과 흉노 사이의 관계를 생각할 때 미심쩍다. 장건의 원정 기간이 아무리 길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모두 한 무제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일이며, 한 국가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짧은 기간이다. 즉, 흉노에 대한 월지의 국가적인 원한이 ‘월지의 서천’만으로 해소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 경과한 후였다는 것이다.위의 지도를 보면 월지가 서쪽으로 이동을 하였다고 하지만이러한 생각에 근거하여, ‘월지가 서천 이후 흉노를 공격할 수 없는 지리적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나 위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월지는 서천 하였으나 흉노를 공격할 수 없을 만큼 흉노와 먼 거리에 위치했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월지는 흉노의 세력과 접촉하고 있었다. 또한, ‘월지가 흉노에 쫓겨 서쪽으로 도망한 만큼 그들이 흉노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갖기도 하였으나 월지가 흉노에 쫓겨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서쪽의 대하를 정벌하고 그 땅에 자리잡을 수 있었을 만큼 여전히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월지는 상황적으로 흉노를 공격할 수 없었던 상황이 아니라 복수를 원하지 않았다. 이는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진다. 역사적인 적대 관계가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가에 대한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감정만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 또한, 과거의 다른 역사적 기록들을 보더라도 이런 월지의 행동은 상당히 특이하다. 몇 십년 사이에 국가를 망국의 위기에 이르게 하고 선대 왕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쓰는 흉노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서천 이전의 월지국과 서천 이후의 월지국 사이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했다. 이에 따라 라 그의 자손일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서천 이전의 월지와 서천 이후의 월지의 지배 세력이 달라졌다면, 새로운 지배세력은 흉노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이 직접적으로 굴욕을 맛보았던 이전의 지배세력보다 훨씬 적을 것이며, 한의 동맹 제안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도 훨씬 수월하게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본론앞서 제시한 가설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원한 관계가 형성된 시기와 한의 동맹 제안 시기 사이의 격차가 지나치게 크지 않아야 이러한 가설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즉, 한 무제에게 월지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 시기가 사건의 발생 시기와 큰 차이가 있어 이미 흉노에 대한 월지국의 원한이 많이 사라진 이후라면 필자의 의문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설에 대한 검증 이전에 흉노가 월지를 정벌하고, 그 왕의 두개골을 훼손한 시기와 장건이 월지에 도착하여 한과의 동맹을 제안한 시기 사이의 시간적 격차에 대해 살펴보겠다.선행 연구에 따르면 장건이 월지와의 동맹을 위해 출발한 해는 기원전 139년이거나 기원전 138년이며, 월지에 도착한 해는 기원전 129년, 그리고 귀국한 해는 기원전 126년이다. 그리고 월지국과 흉노 사이의 원한 관계가 나타나는 시기는 원정 후의 장건의 보고를 통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원정 후 장건의 보고에 의하면 흉노의 묵특 선우가 즉위한 후에 월지를 쳐부쉈고, 묵특의 뒤를 이은 노상 선우때 월지 왕을 죽이고 그 머리뼈로 술마시는 그릇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추정에 따라서 장건이 월지에 도착한 기원전 129년과 흉노에 대한 월지의 원한 관계가 형성되는 기원전 170~160년 경 사이에는 40년~30년 정도의 차이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필자가 던진 질문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월지는 중국 전국(戰國)시대에서 한(漢)나라 때까지 중앙아시아 아무다르야강(江) 유역에서 활약한 이란계(系) 또는 투르크계의 민족이다. 월지라는 명칭은 한자로만 전해 내려오며, 그들의 종족적 기원은 확실하게 밝혀지지동호가 강하고 월지도 세력이 왕성하였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상의 시기는 진나라의 시황제 때이며 두 번째 기록은 전한 문제 때, 즉 서기전 176년, 흉노의 묵특선우가 전한의 문제에게 보낸 편지로 선우의 우현왕을 시켜 월지를 토벌하게 하여 월지를 쳐부수고 누란 오손, 호계 및 인접 26개국을 평정하여 모두 흉노에게 병합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후 앞서 살펴보았던 사기 史記 ,?대완열전 大宛列傳?에는 “흉노는 월지왕을 격파하고 그의 머리뼈로 술마시는 그릇을 만들었으며 월지는 쫒겨 온 뒤로 항상 흉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으나 함께 흉노를 치는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마지막으로 월지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서역을 다녀온 후 장건의 보고이다.“대월지는 대완 서쪽 2,3천리 되는 곳에 있으며, 규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남쪽은 대하, 서쪽은 안식, 북쪽은 강거입니다. 정착하지 않고 유목생활을 하며 옮겨 다니는데, 흉노와 그 풍속이 같습니다. 활을 쏘는 군사가 10~20만 가량 됩니다. 이전에는 강성하여 흉노를 업신여겼는데, 묵특이 즉위한 후에 월지를 쳐부수고, 노상 선우 때 와서는 월지 왕을 죽이고 그 머리뼈로 술 마시는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월지는 돈황과 기련산 사이에 있었는데, 흉노에게 패하자 멀리 떠나 대완을 지나서 서쪽으로 대하를 공격하여 그들을 신하로 삼고, 마침내는 규수 북쪽에다 도읍을 세우고 왕정으로 삼았습니다. 떠나지 않고 남은 일부 사람들은 남산과 강족이 거주하던 곳을 지키고 살면서 소월지라고 이름하였습니다.”초기의 월지는 흉노보다 훨씬 강대하여 흉노의 선우 묵특이 태자 시절 월지에 인질로 잡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묵특이 도망하여 아버지 두만을 살해한 후 흉노의 통솔자가 된 뒤 군대를 강화시켜 월지와 동호보다 뛰어난 흉노 부적 연합체를 조직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묵특은 월지를 비롯하여 인접 유목 국가들을 평정하였다. 묵특에 이어 즉위한 노상 선우는 월지 왕을 죽이고 두개골 술잔을 만들었고, 이 시기 월지의 세력만, 감숙의 서부에는 소수의 월지 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서쪽으로 이동한 월지를 ‘대월지’, 감숙 서부의 월지를 ‘소월지’라고 부른다. 한 무제가 동맹 상대로 선택한 것은 대월지였다.이러한 자료에서 필자의 가정과 관련하여 중요한 단서가 발견된다. 기존의 월지는 서천을 하면서 두 개의 월지로 나누어진 것이다. 서쪽으로 이동한 월지인 ‘대월지’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서천 이후의 월지’로 부른 세력이다. 그렇다면, 서천 이전의 월지가 흉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적대감이 서천 이후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즉, 이전의 월지의 지배 세력이 서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그 지역에 남아 ‘소월지’로 불렸다면 지금까지의 의문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근거하여 필자는 ‘소월지’에 대한 기록을 찾기위해 노력하였으나 현재 소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으며,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월지의 지배세력과 관한 기록이 사기의 대완열전에 나와있다.대월지는 왕이 일찍이 흉노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그의 태자를 세워 왕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대하(大夏)를 정복하여 그 땅에 살고 있었는데, 땅은 비옥하고 침략자들도 거의 없어 안락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며, 한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흉노에게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장건은 월지에서 대하로 갔으나 끝내 월지의 대답을 얻지 못하였다.대완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장건이 월지에 동맹을 청했을 당시의 왕은 흉노의 노상선우에게 죽임을 당한 월지왕의 ‘태자’였다.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필자의 추측은 맞지 않다. 그런데 한서 장건전의 기록은 이와 약간 다르다. 한서의 장건전에서는 “그의 부인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立其夫人爲王)"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한서의 기록에 따르더라도 지배 세력이 변화하지는 않았으나 두 사서의 기록에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은 그 기록 자체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따라서 월지가 이동하면서 대월지와 소월지로 나뉘어진 사실다.
역사의 전환점에서 칼을 들다.-『고려사 열전, 정인지 저, 한충희 역, 대구:계명대학교출판부, 2001.Ⅰ. 머리말Ⅱ. 정중부의 생애Ⅲ. 무신정변과 정중부의 역할Ⅳ. 정중부 정권의 정치Ⅴ. 맺음말Ⅵ. 참고문헌Ⅰ.머리말고려 의종 때에 발생한 무신정변은 이의방, 이고,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문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무신정변 이후 한 세기 이상 지속된 무인 정권은 한국사에서 유례없이 무신들을 권력의 핵심으로 이동시켰으며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를 촉진시켰다. 고려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반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무인정권의 시대를 연 무신정변은 정변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정중부의 이름을 따서 ‘정중부의 난’이라고도 한다.정변의 성공이후 성립된 무인정권은 보통 성립기, 확립기, 붕괴기로 구분되는데 정변 1세대가 주축이 되어 무인정권의 기반을 닦은 시기를 ‘성립기’라고 한다. 성립기는 정중부?이의방?이고의 공동 집권, 이의방 정권, 정중부 정권, 경대승 정권, 이의민 정권으로 이어지는데 정중부?이의방?이고의 공동정권과 이의방 정권은 4년 5개월 정도 존속하면서 기존의 문신 중심 질서를 파괴하고 무인 중심 질서를 개척하는 역할을 하였다면, 이의방이 몰락하면서 성립한 정중부 정권은 명종 4년 12월부터 9년 9월까지 4년 10개 정도 존속하면서 무인정권을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올려놓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이에 본 레포트에서는 고려시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인 무신정변의 핵심 세력이자 이의방에 이어 무인 정권기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서면서 무인정권을 안정궤도에 올려놓은 인물인 정중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이를 통해 정중부에 대한 평가를 재고해보고 무신정변의 의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도록 한다.Ⅱ. 정중부의 생애정중부는 예종 1년(1106년)에 태어나 명종 9년(1179년)까지 생존했던 고려 중기의 무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그 부모나 출신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주에서 군적에 올라 사회에서 불만이 점차 쌓여갔다. 정중부와 관련해서 문신 중심의 사회상과 그로인한 당시 무신들의 불만을 예상하게 하는 일화가 있다. 인종 22년(1144년) 섣달 그믐날 궁중에서 귀신을 쫓는 제사인 나례를 벌이던 와중에서 김부식의 아들인 내시 김돈중이 견룡 대정에 있던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다. 이에 정중부가 김돈중을 치고 욕하자 아비 김부식은 왕에게 이를 아뢰 그를 벌하고자 했다. 정중부는 왕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으나 김돈중과 문신들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의종 24년(1170년) 왕의 화평재 행차 때 견룡 우두머리인 산원 이의방과 이고가 정중부에게 반란을 제의하자 정중부가 이에 응해 정변을 계획한다. 이들은 보현원에서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대규모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거사의 성공 이후 정중부는 이의방, 이고 등과 함께 권력을 분할하였다. 그런데 이후 이의방이 이고를 제거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자 정중부는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걱정하였다. 정중부는 사직하고자 하여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에 이의방 형제가 정중부를 직접 찾아 부자관계를 맺어 정중부를 안심시켰다. 이를 볼 때, 무신정변 직후에 정변의 핵심 인물들 중 이의방의 권력이 정중부를 압도했으나 정중부의 권력도 상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후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자 승도들까지 진압군에 동원하였는데 이들의 불만을 느낀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승려 종참 등을 이용하여 이의방과 그 일파를 제거했다. 이의방이 제거되자 자연스럽게 정중부는 무인정권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그는 수상격인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왕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아 70이 넘은 나이에도 관직에서 권력을 누렸다. 정중부는 1178년에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이후 그 아들 정균이 권력을 남용하여 주변의 미움을 샀다. 정중부는 정균과 같이 또 다른 무인인 경대승에 의해 살해되었다.Ⅲ. 무신정변과 정중부의 역할(1)무신정변의 배경앞서 살펴보았듯이 정중부라는 인물을 논할 때 ‘무신정변’을 빼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정중부라는 인물에 대해서 을까? 고려시대 뿐만 아니라 한국사에서 문신과 무신에 대한 구분이 생겨난 이후 문?무의 차별은 항상 있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럼에도 특별하게 이 시기에 무인들이 정변을 일으키게된 것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에대한 학계의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먼저 당시에는 무신들 뿐만 아니라 말단 군인들의 사회경제적 불만도 높았다. 정변의 주모자들이 군인들을 동원하거나 협조를 얻으려면, 군인 세력도 정권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어야 하는데 당시 군인층에게는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이에 대한 군인층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었다. 또한 의종의 향락생활과 실정도 무신정변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왕과 문신의 잦은 유희는 그들을 호위하는 무신들에게 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했으리라는 것이다. 이의방, 이고, 정중부의 정변모의도 왕이 화평재에 행차하였을 때 벌어졌다. 왕과 문신들이 유희를 즐기는 동안 식사조차 하지 못한 무신들의 불만과 박탈감은 정변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또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의종이 방탕한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종대의 시대적 상황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하현강은 의종의 각지에의 행차는 그 왕위의 보존에도 문제가 있던 현실에 대한 불안감의 발로이지 경박 방종한 성격의 탓만은 아니라고 하면서 무신정변은 유교와 비불교사상, 문신세력과 왕실의 대립 갈등, 인종 때 이래 왕권의 실추로 말미암은 무신의 왕권 경시와 같은 시대적 상황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Edward J. Schultz도 문신세력 등의 공격에 의해 정치적으로 고립되고 있던 의종이 내시(內侍)·환관(宦官)을 자신의 정치세력으로 성장시켰으나 이들의 횡포가 무신들을 격분케 한 것이라고 하여 시대적 상황이 정변의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2)정중부의 역할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무신정변에서 정중부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 핵심을 살펴보면 논의가 형성되었다.김당택은 정변 가담집단을 온건집단, 주동집단, 행동집단으로 분류하고 이의방?이고와 더불어 채원을 주동집단의 구성원으로 취급한 반면 정중부를 정변에 소극적으로 가담한 온건집단의 일원으로 취급하였다. 그는 하급 무신이었던 이의방과 이고가 고위 무관이었던 우학유를 내세워서 정변을 일으키려 했으나 우학유가 이를 거절하자 우학유를 대신하여 정중부를 내세웠고,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의 요청에 따라 ‘주병자(主兵者)’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하였다.그러나 정중부를 소극적인 가담집단으로 보아야 한다는 김당택의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가 이의방과 이고가 정변을 계획하고 정중부가 그들의 제안에 응해 정변 모의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것이 그가 소극적 가담자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高麗史」의 내용에서도 정중부가 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정변의 전반을 지휘, 감독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거사의 성공 이후 정중부가 이의방, 이고와 더불어 벽상공신에 책봉되고, 의종이 건축한 관북택?천동택?곽정동택을 이의방, 이고와 함께 분점하는 등 정변의 핵심 세력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을 볼 때 그를 이의방과 이고가 모의한 정변에 소극적으로 가담한 인물로 규정하는 김당택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정중부는 뒤늦게 정변 모의에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고위 무관으로서 다른 무신들을 지휘, 감독하여 정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정변의 성공 이후 그에 걸맞는 권력을 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Ⅳ. 정중부 정권의 정치이의방의 제거 이후 정중부를 중심으로 하여 정균, 송유인, 기탁성, 진준 등의 무인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이의방과 이고 등에 비해 온건한 성향의 인물들이다. 정중부 정권은 기본적으로는 이의방 정권의 정책을 계승하였으나 여러 면에서 온건하였다. 이 시기 왕과 집권세력간의 타협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이런 정책의 영향으로 정중부의 집권 이후 명종의 왕권은 이의방 정권에 비해서 회복되었다.정중부군 오광척?정존실과 낭장 장보가 내시를 띤 것처럼 무관도 내시에 진출하도록 했다. 하지만 양계의 판관을 문관에게 양보하였고, 무산관이 동반무관으로 진출하려는 욕구를 꺾었다는 점에서 무반의 지나친 진출을 억제하고 문신을 포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정중부 정권은 과거를 해마다 실시하여 제술과가 총4회 총123명으로 평상의 수치를 상회하였으며 급제자에게 충분한 대우를 했다. 이것 역시 문신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들을 무인정권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신에 대한 인사정책은 하급무반과 군졸의 불만을 샀고 정권의 붕괴에 하나의 원인이 된다.한편, 정중부 정권은 북과 남의 봉기에 대해 토벌의 강경책을 쓰면서도 회유의 온건책을 펴 성공적으로 진압하였고 이후 죄수의 형량을 경감하는 조치를 취하고 찰방사를 파견하는 등 혼란스러운 민심을 수습하고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기존의 온건노선을 버리고 찰방사를 통해 급진적 개혁정책을 펴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샀고 정권의 몰락을 촉진시켰다.Ⅴ. 맺음말지금까지 정중부의 생애와 무신정변, 그리고 이의방의 제거 이후 성립된 정중부 정권의 정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무신정변은 단순하게 무신들이 문신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신정변은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벌어진 사건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원인이 맞물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던’ 이들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의 인물들은 물러설 곳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칼을 들었고 100년이 넘는 무인정권 시대의 막이 열렸다.그렇다면 무인정권 시기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무인정권으로 인해 고려사가 혼란에 빠지고 쇠퇴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다. 무신 정변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와 발전을 촉진시켰다. 무신정변과 그 이후 지속된 무인정권은 문(文)으로 치우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