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알아야 할 우리전쟁사를 읽고단번: 2043이름: 김정환이 책 ‘한국인이 알아야 할 우리전쟁사’ 라는 책은 과거 고구려 시대부터 가장 최근 6.25 전쟁 까지 우리나라의 전쟁사를 간단하지만 자세하고 당시의 우리 나라의 상황을 잘 담아놓은 책이다. 전쟁시에 우리나라 시민이나 군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의미로 전쟁을 받아들였으며 어떻게 나라를 지켰는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책으로 배울때에는 그저 어떠한 전쟁이 있었으며 어떤 장군이 나라를 지켰는지만 배웠다면 이 책을 읽음으로써 그런 것 보다는 그 전쟁이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 전쟁이 후대에 어떤 의미 있는 전쟁이 되었는지 또 어떠한 전략을로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그래서 이 책은 앞으로 소대장으로 야전에 나갈 예비 군인으로써 좋은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의미는 여러 가지 지만 가장 크게 다가왔던 것은 우리 조상들이 지금까지 정말 어렵게 그리고 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이 나라를 지켜왔다는 것이다. 그동안 잘 몰랐지만 어떤 나라가 무슨 이유로 우리나라를 침략하게 되었으며, 우리 조상들은 누가 어떻게 그 침략을 격퇴시켰는지, 혹은 막아내지 못하여 어떠한 치욕을 겪었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역사속의 중요한 전쟁 이야기를 시대순으로 잘 정리해놓았다.이 책을 읽다보면 전쟁 상황이 때로는 너무 생생해서 이 전쟁에 만약 내가 참가했었더라면 저렇게 조상들처럼 잘 할 수 있었을까? 저 길고 긴 전쟁이라고 저런 멋진 장군과 함께라면 나도 승리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런 저런 느낌이 많이 든다. 그리고 정말 온 백성이 하나가 되어 100만 대군을 물리친 짜릿한 전쟁사를 읽을때는 나도 저 전쟁에 참가하여 우리 소대원을 이끌고 저 승리의 희열을 느끼고 싶다.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읽고단번: 2043이름: 김정환이 책을 일고 나서 나는 일단 이 책을 쓴 스티븐 코비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고 어떻게 하면 이다지도 훌륭한 생각과 사상을 정리할 수 있고 집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경외감마저 들어 다른 책들을 읽었을때 와의 느낌은 사뭇 달랐고 책에서 성스러움 마저 느끼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해 오고 있는 원칙과 양심을 지키고 정의롭고 착하게 선한 마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인지하게 되면서 현재까지 내 삶에 그래도 나는 양심적인 사람이구나 이러휴게 살아온 것이 맞는것이구나라는 안도감과 약간의 자부심이 들게해주는 책이었다.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은 무엇일까? 제목만으로는 성공하기 위해서 돈은 많이 벌기위해서 쓰여진 책같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보다 많고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내용이 이 책안에 많이 들어 있다.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자기 계발서의 내용도 결국은 이 책에서 나온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의 품성은 근본적으로 습관의 복합체이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이라는 씨앗을 뿌리면 행동이라는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도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얻게되며, 또 습관이라는 씨앗을 뿌리게 되면 성품을 얻게 해준다. 그리고 그 성품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어 준다. 즉, 다시 말해 좋은 생각 좋은 습관을 통해 우리는 좋은 성품을 얻어야한다는 것이다.그리고 둘째로 진정한 성공이란 물질을 소유하는 데 있는것이 아니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최근에 내 생활에서 가장 많이 느끼고 있고 후보생 생활에 있어서 나에게 제일 중요한 말 같았다.그리고 셋째, 많은 가정이 건전한 원칙이 안니 위기, 기분, 응급 처치, 일시적인 만족을 위해 생활하고 있다. 따라서 집안에 스트레스와 어려운 일이 생길때마다 가족들은 여러 가지 증후를 가정에서 보이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은 가정에서 치유되어야 하며 이는 가족끼리 공유된 비전과 가치관으로 해결될 수 있다. 따라서 가족사명서를 함께써보라고 권고하고 있다.
제 4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단번: 2043이름: 김정환주제 1. 진정한 자유와 무제한적 방종에 대해 구분하여 토의하고, 자유와 평등의 상호관계에 대해 토의하라.자유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또는 그러한 상태를 말한다. 방종은 제멋대로 행동하여 거리낌이 없음을 뜻한다. 자유와 방종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라는 점이 비슷한 것 같으나 엄연한 차이가 있다. 자유는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도덕적 규범이나 사회적 가치 등 우리가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기준들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무절제한 자유까지 인정하지는 않는다. 즉, 자유는 책임이 따른다는 점에서 방종과 다르다. 만일 자유가 도가 지나쳐 타인이나 주위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하는 행동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방종이라고 할 수 있다. 방종은 이기주의의 발로이자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상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로운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자 정말 이기적인 발상이다. 나의 자유도 소중하다면 타자의 자유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자유와 평등은 정의로운 사회,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전제되는 두 이념이면서도, 그 어느 하나만이 일방적으로 절대화되는 경우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진다. 더 나아가 그럴 경우 진정한 자유, 진정한 평등 자체가 불가능해진다.자유와 평등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상호 보완하면서 민주주의를 끌고 나가는 요소로서, 이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는 성립되기 어렵다.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란 각 개인이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자신의 욕구에 따라 삶의 조건들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만일 이러한 자유가 제한되면 보람 있는 삶을 실현할 가능성은 그만큼 위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모든 개인과 집단이 자신들의 욕구 실현만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 실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갈등과 충돌만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나아가 각자가 무제한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사회에서는 상호간의 다툼 때문에 실제로는 욕구를 실현하기도 어렵게 되고 만다. 따라서 민주주의 아래에서의 자유 경쟁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제약은 사회 구성원, 다시 말해 모든 개인이나 집단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결코 선별적이거나 차별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가 상호 보완적인 하나의 자유이듯이 자유는 평등의 조건이요 평등은 자유의 조건이다. 갑의 자유를 을의 자유와 평등하게 하기 위하여 이를 제한하면 이 제한된 부분이 을의 자유를 성취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된다는 뜻에서 평등은 자유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평등을 위해서 모든 사람의 자유를 박탈한다면 평등의 의미는 상실되고 만다. 평등이란 결국 자유를 향유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에 평등은 곧 평등한 자유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자유와 평등은 양자 택일할 수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자유가 있을 뿐이다.주제 2. 자유민주주의와 체제의 우월성을 현 북한체제와 비교하여 토의하라6.25전쟁 이후 남북한의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적 대립체제가 지속돼온 지도 어느덧 40주년이 넘는다. 분단 이후 미국의 원조를 받은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남한, 그리고 중국과 소련의 원조를 받은 공산주의체제의 북한은 아직도 대립중이다.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대사회에서 우월성을 갖는 자유민주주의체제이다. 어떠한 국가이던 국민이 주인이다. 그러나 북한의 공산주의체제는 자유민주주의체제와는 반대로 인간의 가치보다 물질적 가치를 중요시한다. 또한 지구촌공동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배타적이고 편협하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인색해지게 되고, 국민을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려는 도구로 사용해, 자유와 행복은 박탈된다. 그리고 개인의 욕구충족과 자아실현이 불가능하여 삶의 질적 향상을 꾀하지 못해 결국 창조적 지성 또한 계속 둔화돼간다.
제 3과 대한민국 건국과 전통성단번: 2043이름: 김정환주제 1. 단독정부수립이 불가피했던 이유에 대해 토의하고, 농지개혁이 주는 역사적 의의에 대해 토의하라.우리 나라에서 단독정부수립이 불가피했던 이유는 나라를 최대한 빨리 안정화 시키기 위함이었다. 휴전이 확정됐던 1953년 즈음에는 이미 북한은 김정일 중심의 정부가 수립되기 시작하였고 우리 나라는 내부에서 남북한이 통합해서 정부를 수립해야한다는 김구와 김규식의 정통파와 남한 정부를 따로 수립해야한다는 이승만파가 나누어 대립을 하고 있어 정부를 수립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북한이 정부를 빨리 수립하고 무력으로 우리 나라를 통합하려 공격을 하게 된다면 피해를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는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단독정부를 수립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북한의 위협과 북한의 통합 정부 수립의 반대에 어쩔 수 없이 남한에서의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우리 정부 수립이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은 주체적인 정부 수립이 아니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북한을 오히려 주체적인 정부로 인지해야한다는 의견을 내는 일부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 나라의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며 우리 나라의 보호 아래 사는 사람이라면 말이 안 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광복 직후 자원 부족과 산업 기반 시설의 취약으로 인한 경제의 위축, 해외 동포의 귀환, 북쪽 주민의 남하로 인해 실업자가 증가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라 미군정으로 인해 과도한 화폐가 발생하여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고 곡물 자유 시장 정책으로 인해 지주와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쌀값이 폭등하여 미곡 수매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광복 이전부터의 문제이지만 국민 대다수가 소작농인 경제의 구조적 모순으로 토지 개혁의 문제 또한 대두되었다.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해 농지 개혁이 실시되었다. 1949년 농지 개혁법 공포 후 유상 매상, 유상 분배의 원칙에 의해 조선 총독부와 일본인 소유 토지를 몰수하고 모든 토지를 경작 농민에게 분배하였다. 미군정의 토지 문제 역시 일본인 소유의 토지를 몰수하고 미군정 소유로 귀속,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신한공사로 개편, 관리하며 귀속 농지를 농민들에게 유상으로 매각하였다.농지 개혁은 지주 중심의 토지 소유를 농민 중심의 토지 소유로 바꾸어 농민의 급격한 좌경화를 방지하고 공산화를 방지하는 것을 의의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유상 분배로 인한 부담으로 대부분의 농민들은 땅을 되팔고 다시 소작농이 되었고, 유상 매수를 위해 발생한 지가 증권의 현금화의 곤란으로 인해 중소 지주층이 산업 자본가로 변신이 곤란해지는 등 문제점이 발생했다. 또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소유 토지는 몰수 하지 않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주제 2.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정치적, 국제적, 문화적 관점에서 토의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킨 모범사례에 대해 토의하라.우리나라의 역사적 전통성은 지금부터 90년전인 1919년 임시정부의 헌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는 점을 명기하고, 종교, 언론, 출판, 결사, 거주,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육, 납세, 병역의 의무를 포함시킨 자유민주주의 헌법으로 오늘날에도 계승되고 있다.그러나 북한은 3.1운돌을 ‘자본가 이익을 대변하는 부르주아들의 계급투쟁’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민족운동이 아닌 계급투쟁사의 입장에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김일성에 의한 항일무장투쟁사 위주로만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한다.이처럼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거족적인 운동으로 평가받는 3.1운동에 대한 남과 북의 각기 다른 규정도 민족사의 정통성을 구분 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두 번째로 우리나라의 국제적 정통성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12월 제3차 유엔총회에서 압도적 지지로 ‘유일합법정부’로 인정받음을 통해 알 수 있다.이와 달리 북한은 범세계적 기구의 감시에 의한 공명선거의 객관적 인정 없이 소련의 사주를 받아 탄생하였다. 북한은 1948년 9월 9일 민주선거의 기본인 비밀선거가 아닌 흑백투표라는 공개선거로 수립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
주제2. 유구한 우리의 역사단번: 2043이름: 김정환최근에 나는 벚꽃을 보러 경복궁에 다녀왔다. 경복궁에 먼저 들어섰을 때의 느낌은 웅장하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에도 와봤던 것 같긴 하였지만 경복궁이 그렇게 넓고 웅장한 곳이었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보았던 왕께서 머물렀던 침실이나 회의를 하는 곳, 그리고 연회장이나 정원등... 어느 하나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물건이 없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책자와 함께 구석구석 돌아보던 중에 드디어 벚꽃을 만났다. 원래 벚꽃을 구경하러 간 것이기에 인터넷 블로그에서 벚꽃이 이쁘다고 하여 찾아갔기에 반가웠다. 하지만 순간 내가 너무 부끄러워 졌다. 왜냐하면 과거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해주신 얘기가 생각 나서였다. 무슨 얘기냐 하면 원래 경복궁에는 벚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거기에 심어져 있는 것인가? 누가 거기다 그것을 심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벚꽃이 상징인 나라...바로 일본인 것이다. 과거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때의 일이다. 그때 일본은 우리나라를 일본화 시키기 위하여 가장 먼저 우리나라 다운 것들 즉, 우리나라의 전통과 관련된 것들을 막고 자신의 나라를 우리에게 각인 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벚꽃을 심는 등의 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경복궁을 돌아보다 보면 어느 하나 구조가 어색한 것이 없는데 가끔 건물이 없어 어색하다거나 길 중간 중간에 벚꽃이 대충 심어져 있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런 벚꽃을 보려고 경복궁에 방문하다니 정말 창피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벚꽃 구경을 마냥 좋다고 다닐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을 창피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가르쳤던 그 역사 선생님이 해주신 얘기가 또 있다. 우리나라는 단군 때부터 지금까지 어느 역사 사적을 뒤져봐도 단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는 그리고 함부로 그렇게 역사를 평할 수 없는 숭고한 나라이다고... 그렇다 우리 나라를 역사적으로 완전한 민족적으로 자랑스러워 할 만한 나라인 것이다.지금부터 우리나라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한국의 역사는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토기는 기원전 8000년 무렵의 것이며, 기원전 6000년 이전에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1500년 무렵에 청동기 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유사를 비롯한 다른 고려 중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 왕국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 후,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에 멸망하여 여러 나라들로 나뉘었다.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삼국시대를 맞아 고구려, 백제, 신라가 원삼국시대의 여러 국가들을 정복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들 세 국가는 경제와 군사 면에서 서로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강력하였고, 특히 고구려는 대규모의 군사 행동을 하곤 하였다. 신라의 힘은 점진적으로 커져서 결국 676년에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첫 통일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한편 전직 고구려 장군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뒤를 이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발해를 건국하였다.신라가 9세기 후반에 국력이 쇠퇴하자,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고, 왕건이 건국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종식되었다. 비슷한 시기, 926년 발해가 거란족에게 멸망한 이후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다.고려 시대에는 고대보다 법률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과거제가 소개되었으며, 불교가 번성하였다. 993-1019년 동안 고려는 거란과 전쟁을 벌여서 거란을 격퇴하였다. 1238년 몽골이 침입하였고 30년에 가까운 전쟁 끝에 양측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 후 공민왕의 자주 개혁이 있기 전까지 원의 간섭을 받았는데, 이 시기 성리학이 한국에 전래되었다.1392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 이후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세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 한글이 창제되고 측우기, 앙부일구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도 이루어졌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지만, 수군을 이끈 이순신 장군의 노력과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을 비롯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난 덕분에 결국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1620년대와 1630년대에 걸쳐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붕당 정치가 변질되고 그 폐단이 심화되면서, 노론과 남인 위주의 일단 전제화 경향이 두드러졌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서민은 점차 경제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생산력도 증가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영조, 정조 시대에 다시 중흥하였다. 이때 실학이 융성하였고, 천주교가 일부 남인에 의해 학문의 일부로서 전래되었다. 그리고 양명학이 전래되었으며 천문학과 의학, 농업과 상업 분야에서의 기술적 성과가 산업 발전을 촉진하였다. 한편으로는 양반층이 증가하고 농민의 분화가 이루어지는 등 반상제의 신분제가 동요하였다. 세도 정치 시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홍경래의 난, 임술 농민 봉기 등은 조선의 신분제 사회가 갖고 있던 문제점과 지방 관리의 학정이 결합하여 일어난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판소리, 탈춤, 한글 소설, 서민 음악이 유행하였고, 생활 도예가 공예의 중심이 되었다.19세기에 들어 조선에는 같은 외세의 접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위기 속에 흥선 대원군은 철저한 봉쇄 정책으로 일시적으로 접근을 막았으나, 이후 주위의 열강들과 무력 분쟁을 겪는 등 제국주의와 맞서게 되었다. 1870년대 초반에 일본은 조선에 무력으로 압력을 행사하면서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청나라와 충돌하였고,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하였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과 요동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삼국간섭에 의해 잠시 물러섰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암살되었다.[7]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 (1897-1910)으로 국호를 새롭게 정하였고,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부당한 요구와 간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한국의 곳곳에서는 의병들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