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 ( 송학 )목 차 (Contents) 송학 ( 주자학 ) 등장의 배경 송학이란 ? 주희의 생애 , 저서 주자학의 BASE 이기론 , 성즉리설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 심성론 , 수양론 , 경세론 송학의 적용 조선의 성리학 서원 ( 송의 4 대 서원 , 조선의 서원 ) 유교자본주의 출처송학(宋學)등장의 배경 유교 공자,맹자를 거침 진시황의 분서갱유 한나라 음양오행설 채택 훈고학(오경에 대한 해석) 경학발달 당송변혁기 -한유,이고 훈고학 성격은 그대로 노장 사상과 불교를 비판 예교(禮敎)로서의 역할만 담당하던 유학의 부흥 을 꾀함 위진 남북조 사회혼란 가중으로 불교와 도교가 대중화 당나라 '훈고학' 발달 『五經正義(오경정의)』 사상의 공백화 현상 도교와 불교와 같은 미신이 성행 五經 5대 10국을 거치며 문치주의를 위한 유교의 필요성이 대두 신비주의 + 내세관 적 사상과 학문이 발달 정 치 경제적 실용주의와 사회질서의 윤리성 문제가 학문 연구의 주요 과제로 부각 당대까지 문화적 성격 청산의 필요성을 느낌 송학 등장 유교가 도교나 불교의 세력을 압도하여 다시 그 지배적인 위치를 확립 불교에게서 일부 영향 그러나 이를 비판하여 유학의 사상성 회복 四書 慶曆正學運動. 宋學 ( 송학) 이란 ? 중국 송나라 때에 체계화된 유교 철학 11세기 북송(北宋)의 대표적인 학자 주돈이 ( 周敦頤 )·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 - 주희가 집대성 12세기 남송 ( 南宋 )의 주희(朱熹) 등의 성(姓)을 따서 주정장주학 ( 周程張朱學 ), 또는 그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염락관민학 ( 濂洛關閩學 )이라고도 함. 단적으로 말해서 주희의 주자학(朱子學) 으로 대표된다.주희의 생애 (청소년 ~ 청년기) 남송시대 중국 남부 복건성에서 태어 남 북송시대에 성리학을 집대성- 주자학 자는 원회, 중회 / 호는 회암 14살 때 아버지( 주송 )가 돌아감. 어릴 적부터 학문에 일찍이 심취함, 그러나 다른 종교의 학문 에도 심취 적계 호헌, 백수 유면지 , 병산 유자휘 에게 학문을 배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에 힘씀. 61세에 장주지사 로 부임해 관리의 규율을 바로 잡는데에 힘썼다고 함. 65세시 담주지사 겸 안무사로 부임해 민란을 진정시키고 ‘ 시강 (임금에게 강의하는 관직)’ 이 되었음. 그러나 그 해 11월 내직 을 박탈당함 12월 죽림정사가 준공되어 ‘ 석채 ' 를 행함 경원당화 :주희 반대파들은 그 학문을 ‘위학’이라 하며 주희와 제자들을 무고 중상 한 사건 71세 3월 건양현 고정의 집에서 병사주자의 주요 저서 연평답문 : 주희가 35세 때 저술한 저서로 젊은 시절의 스승 연평 이동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기록한 책 이다. 태극도설해 ( 40세 49세 때 2차례 교정을함 ) :송학의 시조 주돈이의 저술인 태극도설에 대한 주석 및 해설서 , 59세에 완성 소학 : 고대 진,한 시기에 국립대학의 교육지침을 말한것이나 유교의 수기치인 정신을 잘 나타낸 것.(스스로 수양하고 세상을 다스림) 통감강목 :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공자의 ‘춘추필법’을 모방 해 역사적 심판을 내린 역사철학서 주자가례 : 주자가 유가의 예법의 장에 관한 것을 기술한 것.성의 유학의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 이 ‘성의’를 실천하는 자가 바로 성인. - 자신의 뜻을 진실되게 하는 것 격물치지 국가통치 이념으로서 본다면 인사에 관한 시비선악의 밝힘 본래의 의미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 선지후행 먼저 도덕상의 사리를 완전히 알고 행해야 한다는 것. 오륜 학문과 교육의 최종 목적 (백록동 서원에도 그렇게 쓰여있다고 함) -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기본은 공자의 사상 공자의 성선설 을 계승 발전시킴 주자학의 BASE理氣論(이기론) 氣(기) : 기체상의 그 무엇으로 물질적 근원이 되는 것. ‘물’을 만드는 도구 理(이) : 物(물) 혹은 物(물) 끼리의 이치 , '물'을 규정하는 원리, 근거, 법칙 음기 양기 음양의 이기 태동 勿(물) 이 만들어짐. - 이것은 '천지간의 만물'을 뜻함. 이 음기와 양기가 어떻게 배합되느냐에 따라 만물의 상위개념이았다性卽理設 ( 성즉리설 ) 혼탁한 ' 기(氣) ' 로 더럽혀지지 않은 ' 성(性:본연의 성) '이야말로 천리(天理) 라고 주장 하는 설 정이 曰 “ 성은 곧 ‘이’이니, 이른바 ‘이’라고 하는 것이 성이다 . 천하의 ‘이’ 를 그 유래된 바에 근원하면 ‘ 불선 ’은 존재한 적도 없다.” 주희 曰 “ 성은 ‘이’이다 . 심에 있는 것을 성이라 이름하고 모든 사물과 사태에 있는 것을 ‘이’라고 한다. 계승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 공통된 입장 : 이와 기는 서로 섞이지도 떨어지지도 않는다. 주자가 말하기를... 초점의 차이 떨어지지 않는다. 섞이지도 않는다.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이와 기는 하나라는 주장.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만물의 본질적 존재인 이(理)와 만물의 현상적 존재인 기(氣)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 -이론적 근거- 이와 기는 서로 섞이지도 떨어지지도 않는다. 이와 기를 하나로 보아선 안된다 . -이론적 근거- 아직 기가 있지 않지만 이미 이(性) 는 있다. 기는 있지 않지만 성은 오히려 언제나 있다. 그 성이 기 중에 있을 때라도 기는 기이고 성은 성이다. 서로 섞이지 않는다.” - 이와 기는 서로 섞이지도 떨어지지도 않는다. - 즉 '이'는 항상 먼저 존재한다. 주자는 이쪽心性論 ( 심성론 ) 인간의 마음(심,성,정)에 관한 논의 인간 : 도덕적 주체, 도덕 실천의 원동력 도덕적 수양론 : 심이 주체로써 어떻게 육체조건을 극복하여 선을 실현 할 것인가 공자의 4단과 7정 4 단 : 본연지성 7정 : 기질지성 정 심성론 주자 심성론의 핵심 심통성정 - 성 : 4 덕이 포함됨 - 성 차원에서의 이기의 구현 : 본연지성 (본래의 심성) - 기질지성 (후천적 혈기의 성) - 정 : 구체적 마음의 작용 - 정 차원에서의 이기의 구현 : 4단(이) / 7 정(기) 이게 바탕이되어서 ~修養論(수양론) 요약 : 주경함양 (주경- 거경 ) + 격물치지(궁리) = 居敬窮理 ( 거경궁리 ) 하는 것. '지극함'에 이르는 것. 격물의 대상은 어떤 것일까? 천지만물 ◆ 치지 치 : 끝까지 밀고 나간다. 지 : 깨닫는다. 격물치지의 최종 목표 : 사물의 소이연 과 소당연 을 이해하는 것.經世論 ( 경세론 ) 수기치인 : 수신,제가,지국(경세),평천하(치국) - ' 대학 ' 의 가르침 지식의 획득 : 위인지학 위기지학 주자의 사창법 주자학 최종 목표 ' 五倫(오륜) '을 갖추는 것. 즉 이 오륜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봄. 경세치국 격물치지,성의정심 양곡 대여를 통한 빈민구제가 목적 그런데 그 편성 형식에 있어 ' 향약 '의 모습이 일부 들어가 있다.송학의 적용 한계 : 송은 文治主義(문치주의) 에 입각한 황재독제체제 구축 에 주력 행정 효율의 극대화 통치권 강화 및 안정 관료들이 황권에 대한 적절한 견제력과 정치지도력을 상실 멸망의 원인 中 하나 이를 위해 문관이 군대를 지휘케함 경무 중문 문치주의 실현을 위한 학인관료의 필요성 학인관료에 의한 지배 체제 구축은 교육학문 연구의 기풍을 크게 진작시킴. 북송 때 발흥 , 남송 때 유교이념의 폭 넓은 보급 ,정착 내적 지향성과 폐쇄성이 더욱 가중 됨(단점) ●사대부의 실천윤리, 향촌공동체의 사회질서 규정 제국의 장기적 안정에 기여 절대 군주의 정치체제 뒷받침 전투력약화 더 많은 군사력 보충 극심한 재정부담 멸망의 원인 수취량 증가 농민반란(방랍,송강의 난) 고문,고학 부흥운동 ↑ 종교학은 쇠퇴 관리 선발多 용관 ( 冗官 ) 多조선의 성리학-'조식'과 '이황' 남명 曺植(조식) : 실천의 성리학 강조 거경과 행의를 불가분으로 일체화 -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참다운 선 비 후 진 교육이나 또는 백성교화에 큰 영향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겨세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엔가 하노라 - 조 식 - 퇴계 李滉(이황) 난 고기를 보고도 풀어줄 자신이 없다 . 조식과 자신을 빗댄 말 매번 관직을 거절하고 초야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싶지만, 자신은 조식처럼 관직을 거절할 자신이 途說 ( 기발이승일도설 ) 사단과 칠정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정(情)이며 사단도 정인 한 기발(氣發)에 지나지 않는다 사단 : 칠정 中 선한 부분만을 뽑아 말하는 것 4단도 칠정안에 포함된다. - 七情包四端 ( 칠정포사단 ) VS 영상송의 4대 서원(書院)송의 4대 서원(書院) ■ 숭양서원 484년 북위(北魏) 때 불교사원 숭양사 ( 嵩阳寺 ) 로 창건 7세기 당대 이후 서원으로 자리잡기 시작 북송 1035년 인종 때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이름인 숭양서원이 되었다. 유명학자들의 강학소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이 완성된 곳송의 4대 서원(書院) ■ 응천서원 ( 應天書院 ) 북송시기 유명한 학자 범중엄이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전해짐. 유명학자들의 강학소송의 4대 서원(書院) ■ 백록동 서원(=제일서원) 남당 ( 南唐 ) 승원(升元) 연간인 940년 ' 여산국학 ' 이란 이름으로 건립 주희(朱熹)가 지금의 싱쯔현 ( 星子县 , 성자현 )에 부임하였을 시 다시 서원을 중건 이 곳에서 학문을 가르치며 서원의 목표와 규정을 정하 고 조정에 상주해 편액과 황제의 서찰을 받음 서원의 명성이 올라가기 시작 서원 확산의 계기 가 되기도 함.송의 4대 서원(書院) ■ 악록서원 송태조 개보 9년(976)에 건립 ~ 1903년 구학제도가 종료 되던 시기까지 존재 주희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유학을 강의 1988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 신학문 교육 기관화 1959년 후난대학으로 개편조선의 서원조선의 서원 ■ 백운동서원 중종 때(1543) 풍기 군수인 주세붕이 안향 을 기리기 위해 세움-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이황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 으로 사액(賜額) 이후 많은 서원들이 지방에 설치 이황과 제자들은 서원건립에 많은 힘을 썼음.조선의 서원 ■ 도산서원 이황이 도산서당 을 짓고 유생을 가르치며 학덕을 쌓던 곳 1575년(선조 8) 한호(韓濩)의 글씨로 된 사액(賜額)을 받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 숭양서원 ( 崧陽書院 ) 등과 더불어
교육심리Book Review『마시멜로 이야기에 열광하는 불행한 영혼들을 위하여를 읽고....』마시멜로 실험이라는 유명한 실험을 비판하면서 이 책은 시작된다. 나는『마시멜로 이야기』란 책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실험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마시멜로 실험이란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인데 15분만 참으면 마시멜로 한 개를 더 먹을 수 있다는 조건을 내세워 자기 욕망을 참을 수 있는 지를 연구한 실험으로 실험결과를 통해 마시멜로 한 개를 더 얻기 위하여 만족을 지연시킨 아이들이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 비해 나중에 학업성적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실험이다. 이 실험이 결국 말하는 것은 미래의 더 큰 성공을 위해 현재 누릴 수 있는 행복이나 욕망들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사실 나도 이러한 주장 등을 당연하다고 여겨왔고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졸업 한 지 얼마 안 된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혹은 대학 안가는 애들은 좀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고등학교 시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거의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주변에서는 선생님이나 부모님들 모두 무조건적으로 참으라고 했고 속된 말로 1년 동안 죽었다고 치고 공부만하라고 하셨다. 학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는 그럴 수 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특히 내가 고3 때에는 2010 남아공 월드컵이 개최되었기 때문에 봐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했지만 결국 나는 봤다. 그런데 대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쯤 우리 어머니가 어느 분의 아들이 월드컵 때도 그걸 안보고 공부를 해서 카이스트에 입학했더라 라는 말을 내게 해주셨는데 하지만 그 애도 학생이기 전에 우리나라의 한 국민으로서 보면서 응원하고 싶었을 것이고 참기 힘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 입장에선 월드컵보다 카이스트 입학이라는 것이 우선적인 가치이자 성공이였기에 그런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공부했고 결국 카이스트에 입학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꼭 그것이 좋은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 하게 되었다. ‘성공’ 물론 좋은 것이다. 하지만 왜 성공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 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성공해야 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대부분 부, 명예, 권력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부, 명예, 권력을 성공으로 보는 것을 나쁘다고 볼 순 없다.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는 아무래도 이와 같은 성공이 우선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성공을 거두면 무조건 행복이 찾아올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는 데 있다. 또 참으면 무조건 성공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말했듯이 욕구는 제때에 만족시켜 주지 않게 되면 변질된다고 한다. 즉, 욕구를 참게 되면 오히려 그 욕구에 사로잡히게 되고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게 되 새로운 관심거리가 들어올 자리가 없어지게 되므로, 새로운 경험을 하며 성장할 기회조차 놓쳐 버린다고 한다. 이를 통해 봤을 때 성공을 위해서는 경험하며, 성장해야 되는데 오히려 성공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참게 되면 성장하거나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고 하니 욕구를 참는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 책을 통해 인상 깊게 느낀 것이 바로 소유냐 누림이냐 라는 단락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들을 과시하기 위해 소유만 하려고 하지 누리려고 하지 않는다. 소유의 목적이 누림을 위해 있는 것인데, 소유의 목적이 소유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부자들은 골프채를 수집만하지 오히려 그 골프채를 가지고 골프장에 나가 골프를 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렇다. 스마트폰을 쓸 때 남들이 다 쓰는 어플 들은 죄다 깔아놓고 쓰지 않는다. 그렇게 깔아놓으면 있어 보인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쓰지 않는 어플을 깔아 놓고 다닌다. 즉,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소유는 누릴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누리지 않고 놓아 둘 때는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저자의 소유에 대한 생각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우선 앞으로 물질에 대한 욕심을 억제하는데 있어서도 저자의 이 소유에 대한 생각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단지 겉치레를 위한 소유가 아니라 진정한 소유를 누릴 수 있는 미래의 나를 기대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정말 많은 것을 나에게 가르쳐 준 것 같다. 성공이라는 단어는 중요하지만 누림이 없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니며 누리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공이라는 매개가 없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미래의 성공을 위해서는 현재가 중요하며 때에 따라서는 현재의 욕구를 더 우선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동양중세사 Report- 수(隨)나라 고구려를 침공하다,고구려와 수(隨)나라의 전쟁에 대해서 -Round 1 : 고구려와 수나라의 1차 전쟁고구려와 수나라의 1차 전쟁은 598년 고구려 영양왕의 요서지방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영양왕은 말갈의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공했으나 수나라의 영주총관 위충(韋沖)이 이를 격퇴시켰다. 수문제는 이 보고를 받고 대노하여 한왕 양(諒 : 수문제의 넷째아들)과 왕세적(王世績)을 행군원수로 삼아 수륙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도록 명령했다. 영양왕은 말갈병을 동원해 일단 수나라 침공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는 요서지방을 전략 기점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영양왕으로부터 불의의 기습을 받은 수문제는 그야말로 대노하여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30만 대군을 동원했다. 그러나 이미 영양왕은 수나라 대군의 반격을 저지할 또 하나의 대비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곧 장마철이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영양왕의 예측대로 6월경에 공격을 시작한 수나라 대군은 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왕세적이 이끄는 육군은 중국대륙의 관문인 산해관에서 출발해 요하에 이르기도 전에 홍수를 만났다. 보급은 끊기고 그나마 있던 군량미는 떠내려가고, 장마가 몰고 온 습기는 전염병을 만연시켰다. 주라후(周羅喉)가 이끄는 수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평양성을 향해가던 수군은 바다 가운데서 폭풍우을 만나 대부분의 병선을 잃고 말았다. 수문제는 할 수 없이 그해 9월 정벌군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수문제가 철군을 하자 영양왕은 다시 시간을 벌고자 수문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죄인인 체 꾸민다.일단 영양왕의 항복을 받은 수문제는 공식적으로 고구려정벌을 단념한다. 수문제는 영양왕을 다시 고구려왕에 책봉하고 백제의 위덕왕이 자신의 향도가 되겠다며 고구려정벌을 부추기자 고구려가 죄를 빌었고, 짐이 이를 용서했으므로 치지 않겠다 말한다. 영양왕은 수나라의 위협이 사라지자 내부정비를 강화한다. 내부체제를 가다듬은 영한 거의 400여 년 동안 분열되었던 중국대륙을 통일한 자부심으로 거대한 궁궐을 짓기도 했다. 그는 기존의 도읍인 하북성 강릉(江陵)을 서경(西京)이라 명하고 대운하 개통으로 교통이 편리해 진 낙양(洛陽)에 동경(東京)을 설치했다. 수양제에 의한 제2차 고구려 침공은 영양왕이 수나라 입조를 거부한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그러나 입조의 요구는 명분이었을 뿐, 사실 수양제는 고구려가 돌궐과 손잡고 오히려 수나라를 침공해 오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래서 수양제는 먼저 돌궐을 복속시키고 고구려를 정벌 할 계획을 세웠다.영양왕은 수양제의 입조 요구에 반응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전쟁을 택했다. 그리고 은밀히 돌궐과 접촉했다. 당시 돌궐을 이끌고 있던 사람은 계민(啓民)이란 추장이었다. 영양왕은 돌궐과 우호관계를 맺어, 압박해 수나라를 견제하려고 했다. 607년 영양왕은 돌궐의 계민에게 사신을 보낸다. 그런데 하필 이때 수양제가 복속을 표시한 계민의 막사에 행차했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실리를 취하던 계민은 고구려 사신을 미처 숨기지 못하고 함께 수양제를 알현했다. 수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명을 전했으나 영양왕은 수양제의 이 명을 묵살하고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쳤다. 이미 수나라와 전쟁을 각오한 고구려는 일단 남쪽 국경을 튼튼히 하여 협공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영양왕이 끝내 입조를 거부하자 수양제는 611년 2월에 고구려정벌을 공식 발표했다. 수양제의 고구려정벌 명령에 따라 전쟁동원준비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산동반도의 어느 조선소에서는 조선공들이 물 속에 들어가 배를 만드느라 썩어 들어간 살에 구더기가 생기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고 한다. 612년 1월, 모든 정벌군과 군수물자가 북경 부근의 탁군에 모였다. 수양제는 군사와 장군들을 총집결시키고 임유각에 올라 출정식을 거행했다. 육군은 좌익 12군, 우익 12군, 총 24군으로 113만 3800명인데 과장하여 200만이라 하고, 군량미와 병장기 등 보급을 담당하는 부대 수착했다.영양왕은 고구려병사에게 요하에서 일차적으로 적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수나라 대군이 벌떼처럼 강에 달라붙자 강 동쪽 높은 곳에서 고구려 군사가 화살을 비오듯이 퍼부었다. 수나라 군사들은 좀처럼 요하를 건널 수가 없었기에 보다 못한 수양제가 공부상서 우문개(宇文愷)로 하여금 강에 3개의 부교를 만들게 했다. 그런데 수나라 군사가 헤엄을 쳐 이 다리를 동쪽 강가에다 대는데 1장(丈) 남짓 모자랐다. 이 때 고구려군사가 뛰쳐나와 공격하니 수나라군사는 부지기수로 죽고, 할 수 없이 강 서쪽으로 물러났다. 수양제는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부교를 늘려 만들 것을 명하니 2일 만에 완성되었다. 결국 수나라 군사가 요하 도하 작전에 성공하여 벌떼처럼 요동으로 밀려드니, 고구는 1만 명의 군사가 희생되었다. 612년 5월, 고구려 요동성은 수나라 대군에게 겹겹이 포위되었다. 요동성을 지키는 고구려군은 모든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수양제는 요동성을 바라보며 휘하 장군들에게 요동성이 항복해 오거든 이를 무마하여 받아들이고, 군사들이 성안에 난입해 함부로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요동성은 굳세게 저항했다. 고구려군은 적이 공격해 오면 굳게 지키다가 물러가면 소규모 특공대를 보내 적을 괴롭혔다. 거기에다 적절한 기만전술을 사용했다. 즉 적의 공격이 너무 거세 성이 함락될 위기에 몰리면 항복하겠다고 하고, 적장이 물러가 항복을 기다리는 사이 전열을 재정비했다. 수나라군은 고구려의 이런 전술에 지쳤다. 두 달 동안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수양제는 모든 장수들을 소집해 호통을 쳤다. 양제의 으름장에 장수들은 요동성으로 달려들었다. 양제는 요동성 서쪽 몇 십 리 떨어진 곳에 임시궁전을 짓고 공격을 총지휘했다. 그러나 요동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육군이 요동성에서 발목을 잡혀 고전하고 있을 때 산동반도를 출발한 수나라 수군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에 도착했다. 수나라 수군은 좌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지휘했다. 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그 사이 빈 절 속에 숨어 있던 고구려 복병이 기습을 했으며, 이로 인해 승기를 잡은 고구려군은 그를 뒤쫓았다. 이때 대기하고 있던 주법상이 응전해 오므로 고구려군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다시 평양성으로 들어갔다. 내호아는 멀찍이 해포까지 물러나 다시는 공격할 엄두를 못 냈다.수군이 복병전에 걸려 퇴각하고 있을 때 요동성을 포위하고 있던 양제는 작전을 바꿨다. 교착상태에 있는 요동성 공격은 그대로 진행하면서 별동대를 편성해 곧바로 고구려 평양성을 치기로 한 것이다. 즉시 우문술(宇文述), 우중문(宇仲文) 등이 거느리는 총 9군, 30만 5천 명의 별동부대가 편성되고, 그들에게 100일분의 실략과 무기, 화약 등이 지급되었다. 각각의 병사가 짊어지고 압록강까지 가야 할 장비의 총 무게는 3석 이상이 넘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군량을 버리면 극형에 처한다는 장수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요동을 출발할 때 식량의 대부분을 땅에 묻어버렸다. 보급이 뒤따르지 않는 특공작전이었으므로, 그들이 압록강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모두 기근에 시달렸다고 한다. 수나라가 30여만 명의 별동대를 파견했다는 급보를 받은 영양왕은 을지문덕 장군을 평양방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영양왕은 압록강을 1차 저지선으로 삼았다. 그는 강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는 적진의 상황을 알고자, 을지문덕에게 거짓 항복하여 적의 허실을 살피라고 명령했다. 압록강을 건넌 을지문덕은 단번에 수나라군대가 기아에 허덕이는 것을 간파했다. 을지문덕에 별안간 항복을 표시하며 나타나자 우중문 등은 양제의 말대로 그를 사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위무사로 있는 유사룡(劉士龍)이 이미 항복하였는데 그럴 필요가 있느냐며 말렸다. 그 사이 을지문덕은 수나라 진영을 빠져나가 압록강으로 달려갔다. 나중에야 속았음을 깨달은 우중문은 급히 사람을 파견하여 할 말이 있다며 을지문덕을 유인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아군진영으로 돌아왔다.우중문과 우문술은 을지문덕을 놓치고는 내심 불안해 있다가 우문술이 식량이 거의 마침내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까지 진격했다. 우중문 등 수나라 장수들은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멀리 보이는 평양성을 바라보았다. 마치 난공불락의 철옹성 같은 평양성을 보자 허기와 짙은 고립감이 수나라 군영을 덮쳤다. 이때 을지문덕이 우중문을 칭송하는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 이미 싸울 기력을 잃은 수나라 진영에 을지문덕은 그럴 듯한 명분을 마련해준다. 즉 을지문덕은 다시 우문술에게 사자를 보내, 만약 장군이 군사를 돌려 물러가면 고구려왕을 받들고 황제가 있는 곳으로 찾아뵙겠다고 하며 거짓 항복의 뜻을 전한다. 우문술 등은 그것이 거짓인 줄 알지만 평양성이 험고하고 자신의 군대는 지쳤으니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철수시킨다. 수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고구려군대에 총 공격 명령이 떨어진다. 수나라 군사는 고구려의 추격군과 일진일퇴를 벌이며 살수를 건너간다. 이 때 을지문덕의 정예병이 철수하는 수나라군대의 후군을 급습한다. 강에 설치된 부교를 점령한 고구려군이 부교를 끊자 강을 건너던 수나라군사는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Round 3 : 수나라의 2차 침공요동성의 끈질긴 저항과 별동부대의 전멸,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의 패배로 수양제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를 정벌하지 않으면 간신히 복속시킨 돌궐마저 배반할 우려가 있었다. 수양제는 새해가 밝자 제2차 고구려정벌의 조서를 발표했다. 전국의 병사들을 징집하고 군량미와 기타 군수품을 징발해 다시 탁군에 집합시켰다. 수양제는 이번에는 작전에 약간 변화를 주었다. 을지문덕에게 패한 우문술을 다시 기용해 별동대장으로 삼았다. 양제는 우문술 등에게 곧장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으로 직행해, 바다를 건너오는 내호아의 수군과 합세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장수들을 이끌고 예전처럼 요동으로 진격했다. 요동으로 진격한 양제는 여기서도 작전을 바꾸었다. 즉 월등한 군사력으로 요동에 산재한 고구려의 모든 성들을 분산ㆍ공격하여 전선의 다각화를 꾀하려했다. 그러나 고구려 성들은 문을 굳게 닫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섰다.
교육철학 및 교육사Book Review『희망의 교육학을 읽고.....』이번에 북리뷰로 쓴 책은『희망의 교육학』이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인 파울로 프레이리는 현대에는 실용적 담론이 넘쳐나, 꿈과 유토피아가 세상에 널리 퍼진 거짓을 폭로하는 힘을 지닌 교육실천의 본질적인 부분인데도 사람들은 꿈과 유토피아가 현실 생활에 소용이 없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그래서 프레이리는 자신이 ‘희망의 교육학’이라고 명명된 책을 쓰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상해 보일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프레이리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진보적 관점의 교육 실천은 현실의 장막을 걷어내는 모험이 아닐 수 없고, 그것은 늘 진리를 들추어내는 일종의 실험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희망 없음이 구체적 실체가 되어 있음을 무시할 수 없고, 또한 그 희망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경제적, 사회적 원인에 눈감아 버릴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희망은 존재론적 요구이기에 희망 없음은 방향을 잃어버린 희망이며, 따라서 존재론적 요구를 왜곡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의 희망이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며, 희망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으나 희망이 없으면, 투쟁이 약해지고 흔들리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진보적 교육자의 과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확한 정치 분석을 통해서 희망을 위한 기회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은 분노와 사랑으로 쓰여졌다고 이 글의 저자인 프레이리는 말하고 있으며, 또한 묵인과는 혼동하지 말아야 할 관용과 급진주의를 옹호하는 책이라고 한다. 또 분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책이기도 하다. 프레이리는 이 책에서 자신이 직접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피교육자로 대변되는 민중의 교육에 대한 세계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나누었던 토론, 대학 강좌, 세미나들과 자신의 책인《페다고지》의 탄생과정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 책의 출판 이후 받았던 프레이리 자신에 대한 비판이나《페다고지》의 내용에 대한 비판, 또는 그것들에 대한 옹호에 대해 반성하거나 대답해주거나 그들을 다시 비판하는 내용, 또는 자신의 이론을 다시 거론함으로써 보충 또는 확장하는 듯한 내용 등을 자신이 경험했던 여러 가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독자들에게《페다고지》를 조금 더 이해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작가의 의도와 목적이 보이는 책이다.이 책의 1장은『내 고통의 고고학』의 이름을 가졌다. 여기서 프레이리는 브라질 북동부 지역의 바스코 다가마라는 도시에서 열렸던 한 세미나를 기록해 놓았는데, 연설을 하는 과정에서 민중을 교육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저질렀던 큰 실수에 대한 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민중과의 연설에서 청중의 언어와 어법에 가까이 다가가려 애쓰지 않고 자신의 언어와 어법을 고수한 것과 수많은 청중의 찌든 현실을 망각한 것이 자신의 실수라고 말하고 있다. 원래 브라질 북동부 지역은 식민지 시절에는 고무 생산으로 경제력이 가장 높은 도시였다. 그러나 프레이리가 이 강연을 하던 시기에는 하층계급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며 지금도 나를 가르치는 사상가와 교사, 그리고 그 날 밤의 그 노동자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나의 깨우침은 불가능했을 것이며, 자신의 탐구에서 정확성을 추구하도록 해준 과학적 엄격함이 없었다면, 자신이 상식의 중요성이나 그 속에 잠재한 값진 지식의 중요성을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봤을 때 프레이리는 상당히 반성을 많이 하는 교육자였으며 자신의 이러한 교육자로서의 반성적 태도를 강조하는 듯 했다. 또한 노동자나 직공이 자신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에 대한 계획, 즉 ‘직감’을 먼저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 분명히 인간의 노고에 속하는 것과 같으며, 이것이 바로 민주적 민중 교육, 즉 희망의 교육학이 해야 할 일이라 하며 희망의 교육학에서는 민중계급에게 권위적이거나 분파주의적인 어려운 표현 양식이 아닌, 민중 자신의 언어를 개발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는 민중 교육의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를 언어가 시민의식을 창조하는 지름길이라 본 것이라 생각된다.2장인『《페다고지》의 탄생』에 대해 살펴보면《페다고지》를 자신의 삶에서 어떤 ‘순간’을 표현한 중요한 계기인 동시에, 자신이 그 책에서 진술한 내용과 일치하는 삶을 보여줄 것을 자신에게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이 장에서는 가르친다는 것이 교사가 수동적이고 온순한 학생들에게 교육 내용의 윤곽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또 피교육자가 지닌 지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영원히 피교육자의 지식주변에만 머문다는 의미가 아니며, 기존의 경험적 지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봤을 때 저자는 올바른 교사의 지침으로 능동적이며 피교육자의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는 교사를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삼은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피교육자를 교육시키기 위한 실천 또한 그것이 권위주의적인 것이든 민주적인 것이든 언제나 지향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지향성이 피교육자의 창조적인 탐구 능력을 방해하는 순간, 교사의 지향성은 조작과 권위주의로 탈바꿈하고 말게 되며, 이러한 조작과 권위주의는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칭하는 오류를 낳게 된다.3장은『진보적인 교육자의 의무』에 대해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규율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규율은 교사가 학생에게 강요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학생이 만들고 학생이 스스로 받아들어야지 진정한 규율이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 또한 맞는 말인게 학생이 규율은 학생이 지키려고 있는 것이지 교사가 지키려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학생이 스스로 지킬 수 있게끔 만들고 그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지도를 잘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바로 진보적인 교육자의 의무라 할 수 있다. 또 피교육자가 확신을 갖도록 고무하는 일도 진보적인 교육자의 의무이다. 하지만 피교육자가 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식으로든 진실을 숨기고 정보를 차단하고 원칙을 강요하고 그들을 체벌하는 짓만큼은 결코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천재는 없다」를 읽고.....「천재는 없다」를 읽고.....물론 이번 북리뷰 선정도서들이 자기개발서가 주로 선정 되어 있지만 나는 이 책이 다른 북리뷰 선정도서와는 달리 저자가 직접 공부를 하며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기 때문에 북리뷰 선정도서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책의 내용을 보면 저자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저자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준비하셨으며 이러한 것이 저자가 성장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저자는 호기심이 아주 많았다. 특히 글자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는데 할아버지는 저자와 함께 지내면서 나들이도 자주 가고 버스 안에서 창밖의 목욕탕 굴뚝에 커다랗게 쓰인 ‘목욕탕’이라는 글자를 통해 문자를 학습 시켜 주셨다. 할아버지는 저자를 위해 교육열정을 가지고 계셨으며 저자는 자신의 모르거나 궁금한 모든 것에 대해 자주 물었는데 할아버지는 귀찮은 기색 없이 저자가 질문하는 모든 것을 다 대답해주셨다. 유년시절에 할아버지로 부터 이러한 교육을 받은 것만으로도 저자가 앞으로 스스로 공부를 잘 해나갈 수 있는 기초를 닦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을 깨우친 후부터 저자는 책읽기에 빠졌는데 저자는 책을 통해 왕성한 호기심과 지식욕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한층 더 상승시켰다. 저자는 책을 너무 좋아해 유치원생 때 만화백과사전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으며 그 책을 수십 번 반복해서 읽기까지에 이르는데 이를 통해 어렸을 때에 독서습관을 잘 형성하는 것이 나중에 공부하는 데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 저자는 제대로 놀면서 동시에 공부하는 것을 행하였는데 컴퓨터 게임을 해도 인문사회학과 결부된 삼국지와 같은 게임을 하게 된다. 저자는 ‘삼국지’게임에 흥미가 생기자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이로 인해 「만화 삼국지」를 시작하여 정본 「삼국지」를 독파하기 시작한다. 단지 즐기기 위해 컴퓨터게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한 번 더 관심을 가지고 삼국지와 관련된 책을 읽는 저자의 모습을 보면서 노는 것과 공부하는 것이 하나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자는 실력이 있는 사람도 운이 따르는 사람도 아니면서 시험을 많이 봤다. 각종 컴퓨터 자격시험을 비롯해서 심지어는 사법고시에 변리사 시험까지 도전하였는데 누가 시킨 것도,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시험에 계속 도전했던 것은 저자 자신을 객관적으로 검증해 보고 싶고, 검증 받는걸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시험에 대해 어느 때는 도달해야 할 목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시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런 사소한 생각의 차이가 아마 저자를 성공으로 이끌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저자는 검정고시를 통해 중학교를 졸업했는데 그를 위해서 국어, 영어, 수학, 사회과목들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였다. 저자는 영어 같은 경우에 특히 부모님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실력을 키웠으며 수학 같은 경우는 기초가 없으면 힘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자의 어머니께서 잘 아는 선생님께 부탁하여 특별지도를 받았다. 사회과목 같은 경우에는 평소에 책을 많이 읽어 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검정고시에 합격 한 후 저자는 과학고에 입학을 하려고 하였으나 실제 과학고 입학과는 무관한 과목인 미술 점수에 걸러 과학고에는 입학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학고에 갈 수 없다고 해서 학교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고 특목고인 K고 또한 알아보았으나 자신이 좋아하는 컴퓨터와 신문읽기 등을 할 수 없어 포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찾은 학교가 대진전자공업고등학교 였는데 이 학교는 저자의 조건과 학교의 조건이 흔쾌히 맞아 떨어지는 곳이었다. 결국 저자는 망설임 없이 대진전자공고 전자계산기과를 선택하게 된다. 저자의 고등학교 생활은 전반적으로 즐겁고 활기에 넘쳤으며 학교에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저자는 필요하다면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주문 하나쯤 갖는 것도 좋은 것 같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건 사실 공감이 되는 내용이다. 이러한 주문이 자신의 의지를 북돋을 수도 있으며 다시 한 번 자신의 목표를 인식시켜 주기 때문이다. 저자가 본격적인 대입 수능 준비에 들어간 것은 고등학교 2학년 7월부터였다. 수능준비를 몇몇 동기들과 함께 시작 한 저자는 공부는 궁극적으로 한자 하는 것이지만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함께 움직이면, 오가는 시간도 즐겁고 힘들 때 서로를 격려하면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기도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수능공부 방법을 보면 수학은 오답노트를 만들어서 틀린 것들을 오려붙여 정리하였으며 신유형의 문제를 많이 접하려고 노력했다. 국어는 ‘많이 읽는다’라는 전제 하에 다양한 책을 통해 많은 지문을 접해 보고 데이터베이스가 쌓으면서 국어 실력을 늘려 나갔으며 영어는 문장을 외움으로써 문장 구조와 더불어 단어의 여러 가지 적용과 해석 방법을 동시에 터득함으로써 공부하였다. 사회탐구 같은 경우는 원래 저자가 흥미가 있던 분야라서 사실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으나 막상 공부를 시작하자 ‘입시의 벽은 과연 높다’라는 걸 느끼게 된다. 저자는 중압감이 클수록 풀고 조이는 긴장 조절을 잘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 또한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공부를 잊고 신나게 놀았으며 친구들과 함께 다니면서 서로 격려하기도 했다. 여름에 들어서면서 저자는 공부의 패턴을 조금 바꾸었는데 주중에 수리탐구의 과목들을 하고 주말에 국어 영어 수학을 보충하는 식이었다. 저자는 국어와 같은 경우 다양한 형태의 문제들을 많이 접해 봄과 동시에 책을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며 수학은 오답노트를 꾸준히 만들어 나갔고, 영어는 공부 방법을 특별히 바꾸지 않고 지문 전체를 적극적으로 웅얼거리고 소리치며 읽고 외워 머릿속에 확실하게 넣어두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3학년 말 모의고사에서 저자는 397.5점을 받게 된다. 저자는 이후 서울대 법학과 수시에 떨어지게 된다. 저자는 실패는 빨리 잊어버릴수록 좋다고 생각했기에 그러기 위해서 비디오를 빌려보게 되는데 저자의 어머니는 저자가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은 인정해주시지를 않으셨다. 하지만 저자는 실패의 충격에서 가능한 빨리 벗어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이 부분에 있어 저자와 저자 어머니의 차이가 생기기 된다. 저자는 실패가 사람을 좌절하게도 하지만 목표를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되기도 한다고 책에서 말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 또한 법대에 가려고 했지만 떨어진 후 자신이 정말 법대를 가려고 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수시를 기점으로 저자는 원점에 서서 다시 생각해보는데 저자는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삶과 공부가 유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시 합격을 목표로 한 법 공부는 저자와 맞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저자는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에 지원하게 되고 합격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대학 입학 후 저자는 대학 생활에서의 목표를 세우는데 “내 사람을 얻겠다”라는 목표를 세운다. 이 목표의 의미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통해 나 자신을 키워나가겠다는 소박한 의미의 목표였다. 저자는 2학년이 되면서 컴퓨터 공학부에 부전공을 신청하게 된다. 하지만 매주 나오는 프로젝트 숙제며 네 번에 걸친 퀴즈 등, 따라가기가 벅찰 때도 많았다. 몸은 망가지고 정신은 피곤하였지만 육체적 정신적 극한에 도전해보고, 그것을 저자 자신 스스로 기획하고 이끌어가는 능력을 기른다는 점에서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저자는 2학년 6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수능 강사를 모집하는 광고에 지원하게 되는데 얼마 후 강사로 확정 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저자는 자신식의 강의안으로 강의 한 후 많은 호응을 얻었으나 이런 식의 강의를 계속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공부하기 위해 인터넷 강의를 듣는 수험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무지 입시 지도와는 거리가 멀 것 같았던 저자가 수능 강의를 하는 것처럼, 인생은 어느 곳에 어떤 기회를 숨겨두고 있는지 모른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자신에겐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 해야 할 공부도 많고 수양도 더 쌓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길을 걷게 되든 나는 “사람이 되고 사람을 만드는” 삶을 추구할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며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