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413 이보라현대 사회에서 이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혼의 사유도 다양해 졌고, 노인이 되어서도 황혼 이혼이라 이름을 붙여 각자의 삶을 살아갈 정도로 개인의 대한 자유가 생겨났다. 그래서 남존여비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조선 사회에서는 어떠한 형식의 이혼이 존재했는지 궁금해 졌고,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다.지금의 결혼식에서도 많이 들을 수 있는 ‘한 번 결혼하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이라는 말은 백년해로를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 조선시대에서부터 이어진 말이다. 이러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이혼이 극히 드물었다. 개인의 의사가 무시된 결혼만큼이나 이혼 또한 개인의 의사와 무관했고, 이혼에 대한 합법적인 법률조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도 한 몫 거들었다. 특히 양반들은 아내와 이혼하려면 먼저 왕의 허락을 받아내야 했기 때문에 이혼이라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 이혼이라는 말을 '처를 내쫓는다' 고 표현하거나, 버린다는 의미의 '휴기(休棄)'라고 표현한 것은 남자 쪽 에서 일방적으로 여자를 내쫓는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 준다.조선 시대의 남녀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기본적인 개념을 어릴 때부터 익히면서 생활한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은 양반 자제들에게 존재했던 것이지만 후에 결혼 생활이나 이혼에도 큰 영향을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결혼은 지금처럼 연애결혼이 아니라 집에서 정해준 남·여끼리 결혼을 했다. 항상 여자는 남자에게 예를 지켜야 하고, 뭐든 따라야 했다. 그래서 결혼 생활 중에 불만이나 불편사항이 있어도 여자는 참고 넘어가야 했다.여자는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차별을 받듯이 결혼생활과 이혼에서도 남자와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칠거지악’이라는 가부장적인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칠거지악은 1) 처가 시부모를 잘 모시지 못할 때 2)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할 때 3) 음란하여 낳은 자식에 대한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할 수 없을 때 4) 질투를 심하게 하여 처첩제의 운영을 어렵게 할 때 5) 나쁜 병이 있어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없을 때 6) 말이 많아 대가족제도를 잘 운영하지 못할 때 7) 도둑질을 할 때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칠거지악은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여자를 내쫓을 수 있을 만큼 의미가 모호하고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을 보호하려고 삼불거를 만들어 두었다. 남자는 1) 처가 쫓겨난 후 돌아갈 곳이 없을 때 2) 부모의 3년상을 같이 치른 후일 때 3) 가난할 때 시집와 뒤에 부유하게 되었을 때에는 칠거를 행했어도 내쫓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삼불거가 있어도 나쁜 병에 걸렸거나 간통을 했을 때, 부모에게 불효 했을 때에는 예외로 하였다. 따라서 여성은 조선시대에 이혼의 불안감에 떨며 살아야 했다. 반면, 남자가 이혼당할 수 있는 경우는 처를 팔았을 때, 그리고 장인 장모를 구타하거나, 장모와 간통했을 경우 등에만 한정되었다.하지만, 이러한 제도 또한 양반계층에게만 국한 될 뿐이고 평민들을 보다 쉽게 이혼을 할 수 있었다. 현재에도 존재하는 합의 이혼처럼 서로 합의 하에 이혼하는 할급휴서 또는 사정파의라는 방법이 있었다. 한편 이혼은 아니지만, 소박이라 하여 집안에서 별거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소박은 보통 행실이 나빠서 남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 도 있겠지만, 대체로 부인이 추녀일 경우가 많았다.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한 풍습이 빚어낸 불행인데, 이럴 경우 남편은 부인을 소박 놓고 애첩에 빠져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소박은 생이별이나 사별과 다름없어 소박 맞은 아내들은 평생 뒷방차지 신세가 되어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늙어가야 했다. 그렇지만 이혼 후나, 소박을 맞은 후에는 새벽녘에 성황당에 서있으면 처음 만나는 남성이 그녀를 거두어 살아야 하는 습첩이라는 풍속이 있었다.위에서 본 것과 같이 조선시대에는 이혼이 존재했지만, 현대의 이혼처럼 간단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각자의 의견과 마음 등의 개개인적인 요소를 중요시여기는 지금과는 다르게 왕에 의해 이혼이 결정되기도 하고 여성에게는 권리를 주지 않았다. 이러한 것을 보고 결혼과 이혼이라는 사소한 일에도 조선의 통치이념이었던 유교의 영행을 크게 받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출처:《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한국역사연구회< 판소리는 과연 민중 예술이었나 >현대 시대에는 전통보다는 기계적이고 서양적인 문물이 더욱 발달해 있다. 전통에 대한 관심은 더욱 줄어들고, ‘스타킹’이나 기인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만 전통에 대한 것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보면서 판소리라는 우리의 전통적인 소재를 보고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다.판소리는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한국 전통음악의 형식 중 하나로, 일정한 극적 내용을 광대 혼자 육성과 몸짓의 창극조로 한국 향토의 선율을 토대로 여러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킨 것이다. 판소리는 대체로 전라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서사무가를 개조한 데서 유래하였다. 전라도의 세습무는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계승되고 남편이나 아들은 악공 노릇을 하며 굿을 하는 것을 거들었는데, 이 무리 가운데 판소리를 하는 사람도 나오게 되었다. 소리에 능력이 있으면 소리광대가 되었고, 성대가 나빠서 창을 하는 데 적합하지 않으면 고수가 되었다.판소리 공연은 광대와 고수, 그리고 청중이 같이 한다. 광대가 창을 하는 동안 고수는 장단을 맞춰 준다. 소리꾼이 노래에 해당하는 창을 하면, 광대는 창 사이사이에 창으로 되지 않는 설명조의 이야기인 아니리를 넣거나 한 손에 부채나 손수건을 들고 몸짓으로 이야기의 상황을 표현하는 발림을 넣기도 한다. 청중은 조용히 듣고 있기보다는 추임새를 넣어줘 흥을 돋운다.판소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유진한의 에 실린 이다. 이 춘향가로 인해 ‘당시 선비들의 비난을 받았다.’라는 기록에서 처음에는 지배계층으로부터 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판소리는 세련된 사설과 재미로 정형을 갖추게 된다. 광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 농어촌, 장터 등 어느 곳에도 가게 되고, 차츰 부잣집에도 초청된 후 양반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다. 권삼득이 실제 판소리 광대로 공연하기도 했고, 사설의 수정에 참여 할 정도였다. 그 후 19세기가 지나면서 판소리는 본격적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공간적으로 가까운 충청도 지방과 중부지방까지 발전한다. ‘고송염모일대재’라고 불리우는 명창들의 출신 지역으로 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분적으로도 양반신분에 속한 사람들의 참여가 더욱 활발해졌고, 명창이라고 알려진 광대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또, 궁중으로 불려가 공연을 한 후 벼슬을 받기도 할 정도 였다.판소리의 주류를 이루던 주수용층은 신분적인 위치가 불안정하였다. 경제적인 성공에 비례하는 신분적인 상승을 이루지 못하였고, 신분적인 상승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만족할 만큼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판소리의 소재에서 드러난다. , , , , 등의 판소리에는 인습적인 규범에 대한 반발이 절묘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초기의 소박했던 형태에서 어느 정도 변화하여 세련화 된 것은 수용자들의 요구로 인한 것이었다. 양반층의 참여로 인해 그들의 기호에 맞는 유식한 문구나 윤리도덕을 강조하는 표면적 주제가 사설에 등장하게 되었고, 하층민들의 기호에만 호응하던 데서 상하층 모두의 관심을 반영하게 된다. 신채호에 의해 여창이 등장한 결과 남성에 적합했던 판소리 음악이 여성에게도 적합한 방향으로 변화하였고, 사설에서도 음란하거나 비속한 부분이 제거 되었다. 또한 양반의 참여로 인해 감소되었던 판소리의 본래의 서민적인 발랄함이 더욱 위축되었다. 판소리는 처음에는 서민과 하층민들을 위한 예술이었지만, 양반계급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세련화 되면서 점점 민중예술이 아닌 귀족적 예술로 변모하게 된다.
유 서제가 이 글을 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글을 보게 될 나의 가족, 친구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할 말이 있어 떠나기 전에 마지막 글로 남기려 합니다. 항상 저는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을 거야. 혼자 살아 갈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죠. 물론, 지금으로써는 그 말을 지키지 못했지만 말 이예요. 어쩌면 그래서 이 세상에서 떠나기 싫은지도 모릅니다. 항상 불신하던 관계를 제가 남들보다 행복하고 희망차게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모두 나와 같을까요? 두려움, 공포, 외로움 이 모든 것들이 제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 무슨 걱정인들 있을 까요.저는 70년가량을 살아오면서 많이 행복했고 또, 많이 슬펐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행복했던 기억보다 슬프고 아픈 기억이 더 오래 간다고 하잖아요. 제가 결혼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된 것도 다 이 때문이겠죠.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의 불화로 이혼을 하신 것도 큰 영향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 받고 비참하게 남겨지는 내 자신이 싫었던 것도 이유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 옆에 항상 서있어 주었던 남편 덕에 어린 시절의 그런 고통쯤은 잊고 지낼 수 있었죠. 항상 제 옆에 서있어 주었던 당신한테 정말 고마워요. 신입생이었을 때 저는 또 다시 아픔을 겪어야 했어요. 그 후에는 남자친구라든지, 연애라든지 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사라졌죠. 시간이 좀 더 지나서야 당신이 나타났었죠. 벌써 졸업이구나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고, 취업 걱정도 있었던 저에게 말 이예요. 그때 저의 생각은 당신이 정말 현실인가 하는 정도였어요. 말도 안 되는 경우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당신은 그럴 때마다 저를 안심시키고, 사랑해줬잖아요. 그런 당신이기에 전 평생을 당신과 함께 하자는 마음을 가졌어요. 당신은 항상 저에게 고맙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제가 더 고마워요. 온갖 가식과 가짜 웃음이 넘쳐나는 그 곳에서 저를 구해줘서 말 이예요. 그리고 온갖 사랑을 저에게 주고, 아낌없이 아껴주고 믿음을 줘서요.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그때 당신과의 만남이 저에겐 가장 행운이었어요. 뜬금없이 찾아온 행운이긴 하죠. 평소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저에게 당신이 왔었으니 말 이예요. 그때는 어이가 없고 무슨 상황인가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절로 나오네요. 40년이 조금 넘는 세월동안 항상 제 옆에 같이 있어주었던 당신에게 지금은 왠지 조금 미안해 지내요. 우린 그 긴 세월동안 여행도 많이 다녔고, 추억도 많이 쌓았었죠. 그리고 아픈 시간도 같이 지냈었어요. 부모님의 장례라든가 하는 그런 것 말 이예요. 그런데 또 그런 아픈 시간을 겪게 해서 미안해요. 남자들은 아내가 먼저 죽으면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없어져 금방 따라 죽는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따뜻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어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이미 저보다 많은 세월을 살았지만 당신이 살 수 있는 그날까지 행복하고 즐겁게 살다 와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사랑해요.그리고 나의 장례로 많이 슬퍼할 나의 애기들. 너희들은 정말 바르고 착하게 자라 주었다. 항상 말하지만 엄마가 유년시절, 청소년기에 겪었던 아픔과 고통을 너희에겐 주고 싶지 않았다. 항상 이 세상에는 공부가 우선이고 성적이 우선이라지만, 엄마가 자라면서 배웠던 것처럼 너희에게 강요로 억지로 떠넘기기는 싫었다. 너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야. 언제나 말하듯 다른 부모님은 친구들에게 억지로 공부를 시키고 강요했었다. 하지만 엄마는 오히려 그런 걸 받아보고 싶을 정도였지. 어쩌면 너희도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엄마는 항상 너희가 원하고 하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려 노력했다. 가끔은 너무 하고 싶은 것이 많아 어느 정도는 못하게 막기도 하고, 너무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그때에는 공부를 시키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부가 우선인건 맞다. 하지만 각자의 개성을 살리는 것 또한 중요하단다. 너네도 벌써 아이가 있는 부모들이니 이런 엄마의 마음을 다 이해하겠지. 너희 둘 남매를 보면서 항상 엄마의 상황과 비슷하다 생각했다. 첫째인 오빠를 따라 이 것, 저 것 많이 따라하던 그 상황들이 말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하게도 너희 오빠의 비행은 따라하지 않았지.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둘째 너의 그 의연함과 철든 모습에 너의 오빠도 마음을 다시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못난 엄마의 사랑을 받고 이쁘게 자라주어 너희에겐 고마울 따름이야. 너희는 엄마의 꿈이고 행복이고, 사랑이었다. 너희 아빠와 똑 닮은 모습과 엄마와 똑 닮은 그 행동과 모습들은 너희가 신생아였을 때부터 감사하고 기뻐하던 일이었단다. 너희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살았고 또 남은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겠지만, 힘들고 아픈 일이 있을 때에는 혼자 끙끙거리며 앓지 말고 아버지에게 상담도 하고 같이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너희 배우자에게 의지 하는 것이지. 너희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니. 항상 믿고 사랑하고 아낀다면 행복한 가정이라는 것은 언제든 꾸려 나갈 수 있는 것 같다. 엄마가 경험하고 피부로 다 느껴본 것이니 이건 사실이란다. 의심할 여지도 없어. 너희 부부가 같이 노력하고 의지해 나간다면 어느 부부 부럽지 않게 너네만의 행복한 삶을 꾸리며 살 수 있을 거야. 항상 말하지만, 마지막이 되겠구나. 사랑한다.마지막으로 항상 내 곁을 떠나지 않고 감정을 공유했던 나의 친구들. 한 명, 한 명 다 쓸 순 없겠지만 몇 명이라도 내 말을 전하고 싶어. 먼저, 은진아. 너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옆을 항상 지켜준 고마운 친구야. 그 어린 시절엔 생일이 똑같다는 것이 그렇게 신기했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것도 무뎌져버렸지만 지금에서야 또 다시 그 감정이 생각났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붙어 다니던 우리는 대학교가 떨어지면서 조금은 멀어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연락하고 고민 상담도 하면서 여전히 우리의 관계를 유지해 나갔었잖아. 비록 내가 먼저 가지만 친구라는 그 관계는 깨지는 일이 없겠지? 그리고 나라야. 항상 찬용오빠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 이 나이에도 눈물을 글썽이는 마음 약한 내 친구. 이 글을 보면서 또 다시 울고 있을까봐 걱정 되.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죽는다는 건 슬픈 일이 아니야. 이 세상의 순리일 뿐이야. 그걸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나 때문에 마음 아파 할 모습이 상상되어 지금도 고통스러우니까 말이야. 그리고 지우야. 우린 고등학교 친구가 평생 간다는 그 말들을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엔 믿지 않았었잖아.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면서 어느 정도는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잖아. 그리고 더욱 의지하고 힘이 되어 주는 관계가 되었지. 가정에 문제가 있을 때나 혼자 힘든 일이 있을 때 제일 먼저 연락하는 그런 관계 말이야. 물론 기쁜 일이 있을 때도 항상 곁에 있었지만 말이야. 내가 신입생이 되고, 너는 재수를 준비하던 그 시절에 네가 한 말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어. 넌 힘들었던 그때 “이런 말 할 사람이 너 밖에 없다.”라고 했었지. 그때 난 행복한 사람이었어. 항상 그렇게 날 생각해주는 네가 있어서 난 정말 행복했어. 후에 나이가 들었을 때도 서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을 때도 정말 가족 같은 친구를 두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 였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언제나 함께 했던 일명 29팸. 너네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이름을 거론하긴 힘들지만 고마운 마음은 변하지 않아. 고2 때부터 이어온 우정이 지금까지 이어질 거라곤 난 생각도 못했었어. 사실 몇 명은 중간에 연락이 끊기기도 하고 얼굴을 보기도 힘들지?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항상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도 서로를 이해하는 거겠지? 우리의 인연은 고2부터 시작되었지만, 고3이 돼서야 진정하게 친해졌잖아. 서로 감춰뒀던 가족 얘기도 서로 상담하면서 말이야. 어쩌면 우리는 힘들었던 수험생 시절을 이런 감정을 공유하면서 참고 버틸 수 있었을 거야. 지금 생각해보니 상태가 너희 남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입대했을 때가 생각나네. 그땐 그걸 기념한다고 여행도 가고 그랬었는데 좋은 추억거리가 되었지. 그때 사진을 볼 때마다 항상 미소 짓고 있는 날 발견 하곤 해. 그런 기분 좋은 추억을 남겨 줘서 고마워. 내 친구들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