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통해 본 부모의 마음Linda Pastan의 To a Daughter Leaving Home과 Ybor Winters의 At the San Francisco Airport두 시는 크게 딸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과 딸을 보내는 장소, 시의 마지막 부분에 의해 같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두 시는 여러 요소에 의하여 전체적으로 다른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Pastan 의 To a Daughter Leaving Home에서 어머니로 생각되는 화자는 딸의 홀로서기에 놀라움과 뿌듯함을 나타낸다. 그녀는 딸이 두 발 자전거를 자신의 도움 없이도 타게 되었을 때를 회상하며 자신의 심정을 과거에 빗대어 표현한다. 보호자인 자신의 손을 벗어나 어른에 도달해 가는 딸의 모습에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지만(my own mouth rounding/ in surprise….)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감정을 드러낸다(while you grew/ smaller, more breakable/ with distance). 아이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는 그 중도의 단계에 선 딸로 인해 화자의 심정 또한 걱정과 기쁨이 교차되고 있는 것이다. 딸에 대한 감정을 다채롭게 드러낸 To a Daughter Leaving Home의 화자에 비해 At the San Francisco Airport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화자는 좀 더 차분한 자세로, 자신을 떠나는 딸을 지켜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다룬 To a Daughter Leaving Home의 화자에 비해 감정을 가라 앉히고 딸과 자신의 모습에 대해 정리하며 아버지 나름의 작별 인사를 건넨다. 자신은 모든 것이 분명한 밝은 곳에(the light) 있고 딸은 이제 앞을 알 수 없는 밤(night)으로 나아가기 위해 있다. 화자는 자신은 과거라고 지칭하며 어느새 어른이 된 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Pastan의 시만큼 감정이 분명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딸의 모습에 대한 놀라움이 잔잔한 수면에 던져진 돌이 파문을 일으키듯 조용히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2연에서 여전히 작거나 작아 보이는 딸이 자신처럼 의연하고 진지하게(And you are here beside me, small./ Containted and fragile, and intent) 있는 것에 자신과는 다른 당당한 딸의 모습을 뿌듯이 여긴다. 또한 딸의 앞길을 위한 충고어린 마음도 잊지 않는다(The knowledge of what must be done,/ The passion to acquire the skill/ To face that which you dare not shun).두 화자가 이별을 맞는 장소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Pastan의 시에서는 제목으로 보아 화자는 가정(home)에서 딸을 배웅하고 있다. 가정과 집을 동일선상에 두고 본다면 home은 이제껏 딸을 보호할 수 있었던 shelter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딸에 대한 걱정과 보호하고픈 마음이 담긴 모성애가 반영된 공간이라 본다. 그에 비해 Winters의 경우 화자가 딸을 배웅하는 장소는 샌프란시스코 국제 공항의 터미널로 본문에 정확히 나와 있다. 터미널은 화자가 정의하듯 빛으로 인해 모든 것이 분명한 과거의 공간이며 불분명한 어둠의 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지이자 완충지이다.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마지막 연의 뉘앙스nuance 차이이다. Pastan의 시의 마지막 부분은 딸의 떠나는 모습을 보며, 딸의 흩날리는 머리가 마치 손수건을 흔들며 이별을 고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the hair flapping/ behind you like a/ handkerchief waving/ goodbye). 이 이별은 단순히 몸이 멀어져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딸의 마음이 성장함에 따라 정신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이별이므로 아쉬움이 더욱 깊다고 볼 수 있다. Winters의 시의 경우에는 다시 터미널이라는 장소를 인지하며(This is the terminal, the break.) 딸의 떠나야 하는 운명과 자신의 남아야 하는 운명에 대해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the break이란 단어는 앞서 말했던 휴식처로써의 터미널이라는 공간과 Hesse의 소설에서 나오는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는 구절을 떠올리게 하여 딸을 응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두 시는 어른이 되기 위한 딸들의 통과 의례를 지켜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딸들에게 있어 이 통과 의례는 자신을 보호해 주던 울타리와 가족을 떠나 부모와 같이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존재가 없는 채로 살을 맞부딪히고 온전히 하나의 인간으로 사회에 서기 위한 성인식인이다. Ybor Winters의 At the San Francisco Airport와 Linda Pastan 의 To a Daughter Leaving Home에서 이를 보는 부모의 마음은 개개인에 따라 그 받아들이는 방법과 떠나 보내는 방법에 차이가 있지만 딸이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뿌듯함과 사회로 나가는 것에 대한 걱정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점에서 큰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페미니즘 : 거식증에 대하여현대의 사례비교 사회의 인식거식증은 여성만의 질병으로 고착되어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현대에는 남성 거식증환자도 찾아볼 수 있으며 세태의 몸만들기 열풍도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거식증의 이유와 다를 것이 없다. 남성들도 여성의 이상적인 신체상에 부합하기 위해 근육을 키우고 몸을 만드는 것이다. 페미니즘에서 여성들이 남성의 이상적 여성상이 되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거식증에 걸리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이는 상장된 여성 인권의 표출로 볼 수도 있으며 페미니즘의 이론이 합당하다면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의 미적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함을 알 수 있다.남성만이 아름답고 날씬한 여성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 스스로도 날씬하고 아름다워지길 원한다. 각종 대중매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연예인을 대하는 남녀의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TV와 같은 영상매체에서 연예인을 마주할 경우 남자는 칭찬 일색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성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여성의 경우는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여성을 칭찬하거나 환호하기보다는 동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단순한 동경에서 그치지 않고 TV속의 연예인들과 같이 아름다운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자 다이어트를 실행하고 심한 경우에는 거식증과 같은 질병까지 겪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종전의 미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같은 여성이라도 스스럼없이 비하하기까지 한다. 앞서 언급한 현대적 미적 기준을 놓고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에는 거침없이 비하하며 충족시킨 사람에 대해서는 동경하고 그들처럼 되기 원하는 이러한 행동들은 여성들 자신이 자발적으로 행한 일이지 남성들의 직접적인 강요에 의해 일어난 것은 아니다.그러나 자발적으로 아름다운 육체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조차도 남성들이 원하는 여성상이 여성들의 심리와 사회적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들이 단순히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에 희생되고 있는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들을 옭아매는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이렇게 다이어트가 일상화 되는 요즘, 여성들이 다이어트를 하는 이유는 크게 건강과 미용의 이유로 갈린다. 이 중 미용을 목적으로 한 다이어트의 단면을 펼쳐 보았을 때 미용의 이유 또한 크게 두 가지로 갈라진다. 자기만족을 위한 것과 타자의 만족을 위한 것이 그 둘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미용을 목적으로 하는 다이어트, 심하게는 거식증에 대해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으로의 변화를 꾀하는 일로 보며 부정적으로 여기기도 한다. 미용을 목적으로 다이어트와 거식증에는 물론 남성의 시선을 의식한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만큼 자기만족을 위하여 음식을 거부하는 여성도 많다. 그러나 자기만족을 위해 체중을 감량하는 여성들이 생각하는 자기만족이 이미 남성주의적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논의는 끝없이 진행될 것이다.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작은 얼굴과 마르고 늘씬한 몸매로 대표되는 현대의 여성상이 이미 남성들의 미적 기준에 의해 형성되어 있는 것이라면 진정한 여성미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본래의 여성미란 오랜 세월 사회적 권력자인 남성들의 주입에 의하여 그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남성들의 이상적 여성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혹여 남성들이 현재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여성상이 본래 여성미이며 여성들이 날씬해지길 원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여성미에 대한 추구일 수도 있지 않을까.]과거의 경우 거식증은 생명유지의 기초단위인 음식을 포기할 정도로 굳은 의지를 가진 자기주장이었다. 현대에까지 이러한 관점을 유지시킨 페미니스트들은 거식증이 가부장적 사회 체제에 대한 저항적 행위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다소 현실을 곡해시킬 수 있는 것은 앞서 밝혀 왔듯이 거식증이 생기는 이유가 모두 가부장적 사회 체제와 인식 때문에 발현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애초에 거식증이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생각한다면 거식증이 ‘가부장적 사회 체제 권력’ 만의 저항이 아닌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 중 하나’인 가부장적 사회 체제에 대한 저항‘도’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거식증의 근본을 가부장적 사회 체제 만으로 결부 짓는 것은 위험하고 협소한 시선일 수밖에 없다.말 그대로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력을 옹호하고 지지하며 궁극적으로 여성 해방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자칫하면 여성들‘만’의 권력과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는 페미니즘 본래의 기치에 반하는 것이며 오히려 역차별과 같은 더 큰 차별을 낳을 수 있다. 여성의 권리를 복권시키는 데에도 페미니즘에 상당한 의의가 있지만 나아가서 양성 평등의 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참된 목표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페미니즘 적 시선에 치우친 편협한 사고를 탈피하여 보다 넓은 사회 전반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할 것이다.
Why Do We Have to Study English?When we were high school students, we learned English for Korean SAT. We had seen a lot of advertisements of private educational institutes and spent long time studying English in these institutes. Some parents said that if you begin going to university, you can do what you want. Now we are university students but we have to study to get a job. We learn TOEIC and TOFLE for increasing score. And we will suffer same situation even found a job. Many people cannot be relived of studying English that only care about career and score. This is the current situation of Korea’s English education. There are other reasons why we have to study English exclusive of getting a job. And these reasons will motivate you.Without doubt, among the major world languages that include English, French, Spanish, Chinese, Russian and Arabic, English is the most widely spoken. International language needs fairness, reasonableness and expressiveness. Actually there are some international languages such as Volapük, Esperanto, Ido, Interingua, Occidental and Novial, but these languages aren’t used by people. Even among these international languages, Esperanto is used by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The number of Esperanto user is less than the world’s population. So in now days, Esperanto is treated maniac language not international language. In case of Chinese, it is used by thirteen hundreds million of people. But Chinese have no fairness for other countries people. Because Chinese hard to study with other countries people who don’t know absolutely Chinese character. But in case of English, many language of the world adopt Alphabet to express their language as French, Spanish and German. So a large number of people are used to studying English.Almost information in the world is written by English. For instance, here is the site named by RISS that means Research Information Sharing Service. When I searched for ‘James Joyce’, there are just three hundreds of reports in the country. But when I search in foreign country field, research result shows as many as a thousand reports. And also Google that is market reader of research engine always shows that the number of reports written by English is more than the number of reports written by Korean and other languages. If you search ‘vacation’ in Google, You can get ten million research results. But you can get the double of results when you search in English speaking world sector. Even UN’s reports were written by English too. So if you can read English, you can get and contact a great amount of information more easily.Every language do, English shows up the culture of England and America and exist cultural background. You know what it say, “Know your enemy and know yourself, and you will never be defeated.” Exactly U.S.A and England isn’t our enemy but competition. So we have to learn English in order to know them and their culture. For instance, in the movie ‘Madagascar’, there are some interesting sentences related to culture. In the earlier part of the movie, one monkey gave penguin the finger. And other monkey said ‘I should wash your hands out with soap.’ It is parody used by parents and adults when a child uses obscene language. It is not used these days. Alex the lion was coached by his uncle who have trick. And when Alex suffered the rite of passage, his uncle said ‘Good Luck!’. But Alex said where he is from they said ‘Break a leg’. In New York, ‘Brake a leg’ means ‘Good Luck.’ And this expression has started in the theatrical world. It is worry that something bad would happen to people who listened ‘Good Luck.’ So using from opposite expression people can feel relax. And when penguins pretend an automobile accident fraud ring, the driver who was tricked by penguins said ‘I will give him the kiss of life.’ That is spoken language that means mouth-to-mouth resuscitation. Aside from these sentences, you can hear lot of cultural expression only used in English speaking world when we see a movie and talk in English. You will find attractive these cultural expressions.Other reasons why we have to study English will be exists excepting as I suggest. We don’t have to be bound just one purpose like founding a job and getting good score. We just spent amount of time for studying English But there is no reason sometimes. This meaningless labor of study is exhausting us. But if you find the purpose why you have to study English, you can get more fun while studying English. Find your own reason why you have to study English. It will be motivate your English studying.
구보는 방황해야만 한다.구보는 방황 해야만 하는가? 소설 에서, 구보는 발 가는대로 하루를 떠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무기력한 지식인을 대표하는 구보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구보는 아내도 없고 일도 없는 스물여섯의 소설가이다. 그는 프리랜서와 같은 모습으로 간간히 소설을 써내며 집에 있기 싫어한다. 요즈음의 말로 하면 백수를 순화한 말인 ‘취업준비생’인 것이다. 자신의 무기력함이 부끄러워 노모에게 인사조차 할 수 없는 그의 낙은 그저 카페에서 벗과 차 한 잔을 하거나 거리를 횡행하는 일 정도이다. 거리를 거니는 구보는 자꾸만 밀려오는 고독 탓에 벗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벗을 만나고 카페를 방문하여 약속을 만들어 보아도 그는 고독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가 만나는 벗과 카페 여급들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벗과의 대화에서 구보는 그 차이를 깨닫는다. ‘이제 어디로 가?’ ‘집으로 가지.’ 구보가 방황하는 까닭은 그 집에 제 생활이 없는 까닭인 것이다.그렇다면 구보에게 있어 생활이란 무엇인가. 구보는 글 쓰는 사람이다. 때문에 글 쓰는 것이 그의 생활이라 하겠다. 그러나 쉽게 그 생활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머니로 대표되는 사회의 대중적인 기호(嗜好)는 ‘안정’적인 월급쟁이이다. 구보는 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안정’에 자꾸만 제 ‘안정적인 생활’을 방해당하는 것이다. 자신의 안정적인 생활을 또 다른 안정을 위해 방해당하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안정적인 직장과 며느리를 바라는 어머니와의 충돌은 곧 구보 개인과 사회의 충돌을 의미한다. 글 쓰는 사람은 의례 보통의 직장 관에 위협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는 서정 시인이 황금광이 되는 시대이다. 글 쓰는 생활에 안주하기에는 너무도 박한 사회인 것이다.구보는 거리를 방황하며 다른 생활은 없을까 하고 혼란해한다. 연애와 밥을 차려주는 집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사원 팔십 전의 회중시계를 얻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고민한다. 벗과 여급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구보는 생활이 있었던 과거로 빠져든다. 생활이 없는 현재에서 회피하여 과거에서 도피처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의 과거에는 분명히 여인과 벗으로 인해 생동했던 때가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생활을 가지고 있는 전당폿집 둘째아들을 보며 그들을 질투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가 찾은 생활은 글 쓰는 일이다. 글 쓰는 일이란 모든 글 쓰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쓰는 것이다. 집에서 눈치를 보지 않으려면 돈이 되는 글을 써야만 한다. 수익성이 있는 글을 쓰는 것은 사회의 기호와 소설가 구보의 타협점이다. 즉 어머니의 작은 소망을 만족케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보는 돈을 위해 글을 쓰는 일에 줄곧 불만을 품어왔다. 구보는 경성 거리에서의 방황을 통하여 다른 이들의 생활이 자신에게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신이 줄곧 원하는 삶을 살기로, 자신의 생활을 가지기로 다짐한다.
이상 전집을 읽고이상은 참 이상한 시인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상의 시를 배운 일이 있다. 자꾸 고등학교 수업 때의 일을 거론하는 것은 판에 박힌 일일지 모르나 대부분의 시인에 대한 첫 인상은 그 때에 형성된 것은 언어 선생님과 문제집에 의한 일이었다. 처음 보는 라는 시는 설명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독특한 시였다. 개인적으로 찾아본 는 그에 대한 이해를 돕기 보다는 난해함을 더 키울 뿐이었다. 처음 이상의 시를 읽으며 가장 의아한 점은 언어 선생님이 왜 그토록 그를 찬양하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언어 선생님은 그가 아주 위대한 작가라며 그를 옹호했다. 그 때에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정신 나간 작자이거나 말장난을 아주 잘하는 사람일거라고 했었다. 후에 대학에 올라와서도 그를 다시 접하게 되었지만 그 전, 고3 겨울방학에 친구와 이상의 시를 같이 읽었던 일이 있다. 친구는 재수를 준비하는 중이었지만 수능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기에 도서관에서 종종 같은 책을 읽고 얘기하곤 했다. 그의 시 을 읽고 울었을 때 친구가 말없이 안아줬던 것을 기억한다. 다른 어떤 시보다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이상이 가족과 가정에 대해 쓴 시들이다. 그의 난해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축적이고 설계적인 시들은 내 눈을 끌지 못했다. 시에 숫자를 쓰는 일이 꼭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생각의 가정 예술적이고 정확한 전달을 시라고 한다면 그 안에서 수는 무엇을 연상케 할 수 있을까. 수비학부터 수학에 이르기까지 수가 표현하는 상징은 너무나도 많다. 시에서 수를 쓰는 일이란 시에 있어서 좋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수와 같이 다양한 상징성을 지녀 다방면으로 해석케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심상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일까 의문이 들게 한다. 어찌됐든, 이상의 시는 수를 쓰는 것 외에도 기발한 발상을 사용하고 있다. 가정과 아내에 대한 시 과 등에는 아내에 대한 아련한 감정이 들어 있다. 능력 없는 남자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은 기분이 썩 좋진 않지만 이상으로 하여금 좋은 시를 쓰게 했단 생각이 든다. 맞춤법 보다는 읽히는 대로 띄어 써진 문장은 졸렬한 남자의 중얼거림을 보는 듯하다. 스스로 아내를 고생케 함을 알면서도 그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심지어는 자조와 혐오로 회피하려고만 하는 모습은 누구의 롤 모델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세상에 자신의 일기장이 발각될 줄 모르는 사람의 일기 같다. 마치 자신만을 독자로 둔 듯 한 이 난해하고 비소통적인 시들은 오히려 언어와 단어를 뛰어넘은 소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의 시들을 읽다보면 주제와 연관 없이 떠오르는 것이 난해한 표현들이다. 주제의 범위가 크지 않음에도 이상의 시를 읽는 데에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것은 이런 집착증적인 표현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 는 쉼이 없는 풍만한 묘사가 돋보이는 시이다. 한 여자가 절에 들어가는 과정은 백석의 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백석이 정갈하게 대리석을 깎아내 남아야 할 것만을 남긴다면 이상은 정신 상태의 콜라주와 같다. 온갖 감정을 끌어들여 범벅해 놓은 이 콜라주는 모든 시시콜콜한 감정과 정신의 조각이 들린 도가니와 같다. 이상의 표현은 자신의 그 모든 감정, 즉 부정하고 싶은 작은 자신의 조각마저도 글로 옮겨 놓은 이 노골적인 일기장과 같은 것이다. 나는 이런 무지막지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감당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멀리서 맡는 냄새조차도 좋은 것이란 생각에 자꾸만 시를 읽고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느끼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