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및 수학(연구)계획서①모 집 단 위석사?박사 과정②희 망 전 공 분 야미학과③성 명한 글④수 험 번 호※ 기재하지 말 것한 문⑤주 민 등 록 번 호영 문⑥학 력년 월 일 대학교학부?학과, 전공 졸업(예정)년 월 일 대학교(대학원)학부?학과, 전공 졸업(예정)⑦연 락 처(자택전화)(H.P)E-MAIL자기소개서⑧경력(대학생활 또는 직장활동 상황)저는 4년간 서양 철학을 전공하고, 영문학을 복수전공하면서 꾸준히 미술학과 전공 수업을 찾아 들었습니다. 먼저 철학을 전공함으로써 논리적 사고 훈련을 함과 동시에 철학사적 흐름, 각 철학자들의 논의와 쟁점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3학년 때부터 영문학을 복수전공하면서 영어로 텍스트를 읽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고, 시에서부터 소설, 희곡에 이르기까지 문학 작품을 많이 접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미술학부 전공 수업을 들으며 미술사는 물론 미술 비평, 현대 미술 등의 이론 수업을 들었고, 3, 4학년 때에는 ‘드로잉’ 실기 수업을 들으며 누드 크로키, 초상화 등을 직접 그려보고 표현하며 ‘아름다움의 표현’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학과 내에서는 1학년 때부터 ‘예술 철학회’ 라는 소모임을 통해 예술을 사랑하는 철학과 내의 학생들과 미술, 영화, 음악, 문학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고 관심이 있는 예술 분야를 함께 배우고 토론하며 공부했습니다.⑨지원동기 및장래계획개인적으로 저는 사립 고등학교에서 화가를 초청해 수업을 듣는 미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때 미학을 전공하셨던 화가 미술 선생님의 수업은 1년간 ‘어렵고 졸린 수업’으로 유명했지만, 저는 이 수업을 통해 처음으로 미학과 철학적 물음들에 눈을 떴습니다. 그 당시 저는 철학과 미술, 미학 등을 접해 본 적이 없는 학생이었고, 처음 느낀 흥미와 즐거움을 좇아 철학과에 입학해 미술학과 수업과 병행하며 마음껏 공부했습니다. 그리하여 1년간의 휴학을 마치고 3학년 때부터 미학과로 대학원에 진학할 것을 결심했고, 영어에 친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영문학 복수전공을 시작했습니다.그동안 공부해 온 철학적 기반, 문학적 소양, 예술적 감수성 등을 통해 미학을 마음껏 공부하고 싶고, 역사나 아직 접하지 못한 외국어 등 인문학 공부를 깊이 있게 하고 싶습니다.자기소개서⑩성격의 장단점 및 특기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진득하게 노력하여 성취해 내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전공인 철학을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는 하나의 ‘철학적 물음’이 생기면 혼자 논리를 세워 보고 여러 가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따져 보며 자기 생각을 만들어 가는 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장점은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 ‘편견’이나 ‘자기 고집’을 가지지 않고 공부하려는 열린 자세라고 생각합니다.제 단점은 지나친 완벽주의인데 때로는 이것 때문에 전체적인 시각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더욱 노력하여 ‘집착’이 아닌 ‘집중’과 ‘깊이’가 되도록 고쳐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⑪상 벌 사 항2009년 1학기 전과목 A+, 학점 4.5점2006-2학기, 2007-2학기, 2010-1학기 - 우수 장학 및 강좌별 장학2009-2학기, 2010-2학기 - 전공(학과) 수석장학2010-2학기 총장장학(과대표)2010년 9월 토익 740점2008/7/30 ~ 2008/08/08 제 22회 세계철학자대회 자원봉사단(WCP)(사)한국철학회 행사진행보조 봉사활동 25시간2011년 2월 우등졸업(수석)⑫기 타( 특 기 사 항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이고 명료하게 쓰는 글쓰기에 자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철학과에 오면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연습을 자연스레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또한 철학과 교수님과 1년 이상 지속해 오고 있는 철학 스터디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스터디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써 오고 발표하거나 토론함에 따라 학기 중에는 물론 방학에도 꾸준히 철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글쓰기를 해 왔습니다. 정해진 커리큘럼에 맞춰 수업을 따라 가야 하는 공부와 달리 자신이 배우고 싶은 철학 주제를 자유롭게 골라 공부하며 마음껏 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학점을 걱정하며 ‘답안’에 맞추어 쓸 필요 없이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전개하는 글에 자신감도 점점 생기고 글을 쓰는 것 또한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수학?연구계획서⑬석사?박사 진학시 희망 연구분야 및 연구계획미적 판단의 보편화 가능성 - 칸트 미학을 중심으로저는 학부 때부터 작품의 ‘공감共感’ 가능성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추상 미술을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을 생각했을 때 현대 미술이 대중들에게 ‘동일한 미적 판단에 의한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스웰의 모델(발신자 -약호화 -전언 - 해독 - 수신자)에서부터 헤겔 미학의 문제에까지 시도한 공감의 문제는 오히려 계속해서 한계와 난점만을 낳게 되었고, ‘자신의 자유로운 이성을 발견하고 실현함으로써 진정한 미의 쾌快를 느끼는 정신의 단계’라는 헤겔에 연관한 다소 이상적인 가능성만을 남기고 끝내게 되었습니다.이후 접하게 된 칸트 미학에 있어 그의 ‘무관심성’에 대한 설명이나 ‘미적 태도론’의 기본 구조 등이 개인적으로 제가 미적 판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학부 때 실제로 누드 크로키나 초상화를 그려보면서까지 시도했던 예술가의 표현의 문제나 감상자로서의 미적 판단의 문제를 칸트의 미학을 통해 대학원 진학 이후 계속 고민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현대 미술의 특성을 생각했을 때 칸트 미학을 통해 보편화 가능성을 찾는 것에 난점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칸트 미학만이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개념들과 이론들 자체가 가진 희망 또한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가다머의 칸트 미학 비판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비판에 대한 대안, 혹은 비판의 수용 등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학부 때에 이은 문제를 긍정적으로 이어가고 싶습니다.⑭학부, 대학원 이수 전공과목 중 관심과목학부 때 들었던 전공과목 중에서는 인식론과 심리철학 그리고 윤리학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철학을 전공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들었던 ‘인식론’은 그 학기에 있어 저에게 전적인 관심을 갖게 한 흥미로운 수업이었습니다. 인식론은 인식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는가에 따라 나누어지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배우고 스스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정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발표하는 수업이었습니다. 커피가 든 종이컵을 보고 ‘이 컵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어떠한 방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와 같은 일상에서 시작되는 우리의 지식에 관한 문제를 다양하게 접근하며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문제와 관련한 심리철학 역시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는 수업이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사실상 마음이 몸과 구별되는 실체라는 ‘심신 이원론’은 여러 반박에 의해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고 교수님께서는 말씀하셨지만 저를 비롯한 수업의 몇몇 학생들이 수업 때 접한 수많은 입장과 논의에도 불구하고 ‘명증明證’에 바탕을 둔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기말고사 시험에도 역시 마음의 실체를 두 시간에 걸쳐 열심히 적고 후에 교수님께 불려가기도 했던 수업입니다. 마지막으로 윤리학은 인간의 생활에 있어 바람직한 상태란 무엇인지, 또한 선악의 기준이나 행위의 법칙을 어떻게 정립 하는가 등의 문제였는데 스스로의 입장을 정리하는 데에 결국 도덕이 자기이익의 문제라는 ‘심리적 이기주의’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 묘한 결과로 학기를 마친 수업이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드러나는블랑쉬의 내면에 관한 연구지도교수 :ㅇㅇㅇ 교수님oo대학교 철학과2*************年 11月목 차Ⅰ. 서론Ⅱ. 본론1. 테네시 윌리엄스의 생애와 작품 세계1-1. 테네시 윌리엄스의 생애1-2. 테네시 윌리엄스의 생애와 그의 작품 성향의 상관관계1-3. 테네시 윌리엄스와 블랑쉬 드보아 : ‘나는 블랑쉬 드보아이다.’2. 블랑쉬의 내면에 관한 정신분석학적인 해석2-1. 정신결정론과 대상관계 이론2-2. 블랑쉬의 트라우마(trauma)와 억압(repression)2-3. 블랑쉬의 남성 편력 - 히스테리성 성격장애2-4. 블랑쉬의 환상(幻想, fantasy)3. 블랑쉬의 대상관계3-1. 스텔라Stella3-2. 스탠리Stanley3-3. 미치MitchⅢ. 결론? 참고문헌A streetcar Named Desire, Tennessee Williams 저, Sparknotes테네시 윌리엄스 , 로저 박실, 김성균 옮김 , 현대미학사테네시 윌리엄스 삶과 작품 세계 , 이현식 저 , 건국대학교출판부정신분석에로의 초대, 이무석, 이유성에 관한 세 편의 해석, 지그문트 프로이트 저, 열린책들파괴란 무엇인가, 에리히 프롬, 기린원Ⅰ. 서론미국의 여러 극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던 중 나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강한 표출이 매우 원시적인 색채로 드러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주인공 블랑쉬에게 계속 눈길이 가는 것은 역시나 그녀의 불안하고 충동적인 행동과 모습에서였다. 나는 이러한 다층적인 블랑쉬의 심리 상태가 매우 흥미로웠고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생애를 살펴보다 그의 많은 심적 상태가 블랑쉬 드보아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생애를 참고하여 주인공 블랑쉬 드보아의 충동적이고도 신경증적인 그녀의 모습에 대한 내적 동기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쇼(Irwin Shaw), 해롤드 클러만(Harold Clurman) 등 미국 연극을 주도하고 있던 연출가와 작가들로 구성된 심사 위원들의 눈을 끌게 되고 100불의 상금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2차 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약한 심장 때문에 군대에 가지 못했던 윌리엄스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엘리베이터 보이, 전신 기사, 웨이터, 계산원, 극장 안내원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1945년의 ‘유리 동물원’의 뉴욕 공연 성공 이후 윌리엄스는 이 작품에 내재한 주요 주제와 인물들을 더 발전시킨 형태로 표현하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1947년에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게 되었고 이 극은 그에게 퓰리처상과 극비평가 협회 상을 안겨 주었다. 윌리엄스의 극작 경력은 1945년과 1947년의 성공, 1951년의 ‘장미 문신’(The Rose Tattoo),와 1953년의 ‘카미노 레알’(Camino Real), 1955년의 ‘뜨거운 양철 위의 고양이’(Cat on a Hot Tin Roof),의 성공과 두 번째 퓰리쳐 상 수상, 그리고 1957년의 ‘지난 여름 갑자기’(Suddenly Last Summer), 1959년의 ‘청춘의 달콤한 새’(Sweet Bird of Youth), 1961년의 ‘이구아나의 밤’(The Night of Iguana)에 이르기까지 거의 2년 간격으로 성공을 거두며 1961년까지 계속된다. 그의 극작의 전성기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의 거의 15년간에 집중되어있다.1963년에 동성애 관계를 가졌던 프랭크 멀로가 사망한 이후로 윌리엄스는 우울과 침체에 빠져 긴 공백기를 보냈고 마약과 술에 탐닉하며 겨우 버티어 나갔다. 그는 1969년에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보려고 했지만 그 해 말에 그의 일생에서 두 번째의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었고 세인트 루이스의 정신 병동에서 3개월을 지내야만 했다. 그는 1983년 2월 25일 엘리제라는 이름의 작은 호텔에서 플라스틱 병마개가 목에 걸려 질식사한다.)1-2. 테네시 윌리엄스와 블랑쉬 드보아 : ‘나는 블랑쉬 드보아이다.’테네시 윌리엄스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등장하는 주인공 블랑쉬에 대하여 ‘나는 블랑쉬 드보아이다.’라고 말하였다. 굉장히 인상적인 이 말은 앞서 그의 생애와 작품 성향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았듯이 그의 동성애적인 성향, 피해망상증, 불안, 예민한 감수성 모두가 블랑쉬 드보아라는 인물에 집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전적 요소가 작품에 반영되는 것은 어느 작가에게나 해당되는 공통적 현상이겠으나 윌리엄스의 경우에는 특히 현저하다. 그의 작품은 삶의 고뇌와 화해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다시 빚어내려는 노력의 결과였으며 그는 자신의 모든 극의 주인공이었다. 그리하여 윌리엄스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쾌락적인 기질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청교도 기질이라는 상반된 특성을 극의 주인공에게 투사하였고, 이러한 그의 이중적인 특성을 무엇보다도 잘 나타내는 인물은 바로 블랑쉬 드보아였다. 겉으로 귀족적이고 고결한 삶을 유지하는 척 하면서 내면에 문란한 성적 충동을 품고 있는 그녀는 윌리엄스 자신의 서로 상반되는 이중적 자아의 특성을 극적 인물을 통해 표현하게 된다.내가 보기에 블랑쉬 드보아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적 문제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자전적 요소만이 아니다. 물론 그의 선천적인 예민한 감수성과 동성애적인 성향 등 여러 가지의 특성이 반영된 것은 틀림없으나 그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누나 로즈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이라 생각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남매는 서로에게 의지했었고 후에 누나 로즈가 겪은 고통과 부적응은 윌리엄스에게 두고두고 죄책감이 되었다고 그는 서술했다. 정신분열증 판정을 받은 누나에게서 볼 수 있었던 불안한 눈빛, 초조함, 긴장 등을 통해 테네시 윌리엄스는 자신의 예민한 감수성 속에 강한 인상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혹자는 윌리엄스의 누나 로즈가 뇌엽절제 수술을 받은 후의 아무 근심 없는 식물인간의 존재를 ‘스텔라’에 투사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대학에 가 있는 동안 누나의 수술이 끝날 때까지도파티에서 울리고 있던 폴카 음악(polka music)이 울린다. 블랑쉬는 그녀의 트라우마로 인해 생긴 불안을 억압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정신분석학적인 개념인 억압(抑壓, repression)은 불안에 대한 1차적 방어기제이다. 가장 흔히 쓰는 방어기제로 의식에서 용납하기 힘든 생각, 욕망, 충동들을 무의식 속으로 눌러 넣어버리는 것이다. 억압을 통해서 자아는 위협적인 충동, 감정, 소원, 상상, 기억 등이 의식되는 것을 막아 준다. 특히 죄의식, 창피 또는 자존심의 손상을 일으키는 경험들은 고통스러운 불안을 일으키므로 특히 억압의 대상이 된다. 억압에는 정신 에너지가 사용된다. 억압으로 불안을 방어하려고 하다가 실패하면 투사(projection), 상징화(symbolization) 등의 다른 방어기제가 동원되며, 그 결과로 신경증이나 정신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블랑쉬는 그녀의 남편의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죄의식이 고통스러운 불안을 일으켜 이를 억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불안을 방어하려 했던 그녀의 방어기제는 실패하게 되고 이제 또 다른 방어기제, 즉 상징화(symbolization)를 통해 그녀의 신경증이 나타날 때마다 머릿속에 폴카 음악(polka music)이 울리는 증상을 겪게 된다.2-3. 블랑쉬의 남성 편력 - 히스테리성 성격장애블랑쉬의 내면을 살펴보는 데에 있어서 무엇보다 그녀가 극 속에서 보이는 남성 편력에 대해 깊이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상 영어 선생이자 교육받은 중산층 여성이 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퇴출당하고, 수많은 낯선 남자들과 플라밍고 호텔에서 만나는 그녀의 모습은 예민하고 약한 마음을 가진 그녀의 심성과는 다른 별개의 특성일까 아니면 여전히 그녀의 불안한 심적 상태에 관련된 정신적 문제의 것일까?먼저 다음은 프로이트가 그의 저작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서 서술한 신경증 환자들의 성 본능에 관한 글을 살펴보자.히스테리의 소인(素因)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신의 점진적인 성숙의 결과나 혹은 그의 삶을 둘러싼 성격 장애’로 설명될 수 있다. 그녀의 남성 편력은 스탠리의 성적 욕망과는 완전히 다르다. 스탠리는 그가 만나는 여성들을 철저히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그 관계에서 요구되는 것 또한 성관계뿐이다. 그러나 블랑쉬는 그녀가 남성들과 맺는 관계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한다. 그녀가 가진 사회적인 페르소나, 어두운 곳에서 보이지 않으려 하는 나이든 여자의 얼굴, 불안함 등이 관계 속에서 가치를 찾게 하고 다시금 그녀를 생기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극 중 마지막 대사에도 나타나는데,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늙은 의사에게 팔을 끼며 다음의 대사를 읊는다.Blanche : Whoever you are - I have always depended on the kindness of strangers.그녀가 남성들에게 바랐던 것은 그가 누구이든 간에 그녀를 의지하게 하는 친절함, 애정, 안정이었다. 그녀가 성적 욕망에 대한 대비적인 태도를 가졌던 것은 프로이트의 설명대로 ‘과장된 성적 갈망’, 그리고 ‘성욕에 대한 지나친 혐오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설명되는 히스테리의 특성으로 설명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를 규정하는 데에 있어 스탠리가 그녀를 ‘위선적(hypocritical)’이라 비난했던 것도, 그리고 그녀의 모순된 행동들도 결국에 그녀가 원했던 것은 타인의 애정과 관심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모두 모순되고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관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2-4. 블랑쉬의 환상(幻想, fantasy)섬세하고 약한 심성을 가진 인간은 차갑고 낯선 환경에서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불나방의 모습처럼 덧없는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아웃사이더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특성은 인생의 사실들을 직면하기를 꺼린다는 것인데, 그들 대부분은 환상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가상의 현실은 잔혹한 실제 현실을 보상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며 블랑쉬 또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빛이 싫어서 등에다 갓을 씌운다. 다.
M. Butterfly나는 한 번도 자막 없이 외국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완벽함에 대한 강박증으로 언어로 표현된 모든 것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내가 그것을 ‘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믿었다. 그래서 이번에 이 영화를 보는 데에 있어 처음에 나는 매우 당황했다. 주인공의 이름, 시대적 배경,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바로 영화를 본다는 것이 내게는 약간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모든 대사를 알아듣기에는 한계가 잇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최대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시각적인 메시지, 그리고 내가 들을 수 있는 가장 확고한 흐름을 잡기로 하고 영화를 보았다.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사실 주인공들의 이름을 몰랐다. 프랑스의 외교관 이름이 갈리마드였다는 것도, 그가 사랑했던 중국인 남성이 송 릴링이었다는 것도 영화가 끝나갈 때까지 몰랐다. 단지 한 남자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butterfly'라고 애절하게 부른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다. 사실 내가 보기에 그들 사이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 들어가는 많은 것들을 생략했거나 혹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갈리마드가 송 릴링에게 다가가는 과정은 내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송 릴링이 동양 여자라는 점을 존중하면서 (비록 그가 결국 여자가 아님이 드러났을 지라도) 옷을 벗지 않는 행동을 받아들인다. ‘Butterfly’라 불리는 송 릴링은 갈리마드에게 있어 환상 속의 여인이다. 그가 남성이며 스파이이고, 아이를 갖지도 않았다는 사실,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그를 사랑하긴 했던 것인지에 대한 것도 갈리마드는 끝까지 알지 못한다. 이 영화가 실화였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어떻게 자신이 사랑했던 상대방이 남자였다는 사실도 모를 수 있는지,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를 수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보지도 않고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지 등등. 그러나 갈리마드에게 어떤 일련의 ‘과정’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사랑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 병원에서 임신판정이라 내린 그 종이 한 장이 무엇을 증명할 것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과정’을 생략하는 대신 ‘믿음’을 가져온다. 그리고 과정의 의심과 증명과 추궁 대신 그는 믿음을 전제한 사람으로 송 릴링을 받아들인다. 그에게 송 릴링은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한 마리의 나비이자 어느 순간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는 연약한 무엇이었다. 실제로 갈리마드는 송 릴링과 성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던 순간에는 늘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자신의 손에 느껴지는 누군가의 몸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내 앞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옷으로 가려진 무언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끝까지 구별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갈리마드가 정보 유출죄로 잡혀가고 자살 직전 경극을 하는 모습은 매우 애잔하다.그가 송 릴링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내내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끔 영화를 보거나 역사 속의 사건들을 보면 누군가의 마음을 이용하여 정보를 빼내고 파멸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참으로 인간의 장난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눈앞의 음식이나 물건을 덥석 집지도 않는다. 눈앞에 먹이가 보이면 일단 물고 보는 본성 속의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경험에 의해 무언가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눈앞의 것들에 조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지능적인 인간은 누군가를 믿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내심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다 자신과 같은 인간을 만나는 순간 의심과 추긍 대신 전적인 믿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이용하는 수법은 전적으로 인간들 속에서만 행해지고 있는 것이며 가장 파멸적이고 비극적이다.그것은 정말 비극적이다. 갈리마드는 자신이 처음 중국 경극을 보던 때를 떠올리며 수용소 안에서 그것을 재현한다. 이제는 자신이 송 릴링이 되어, 남성인 자신이 얼굴에 직접 화장을 하며 송 릴링이 느꼈을 감정을 스스로 느껴 본다. 그것이 송 릴링을 용서하는 과정인지, 그를 그리워하며 떠올리는 모습인지, 또는 자신의 비극적인 과거를 재현해내며 곱씹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확실히 비극적이다. 어떤 과정이었든 이제는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자신의 사랑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결과라는 것이 자신에게 의미하는 바를 알아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송 릴링이 되어 죽기로 결심한다. 화장을 한 그의 얼굴은 자신이 사랑했던 ‘butterfly'의 얼굴이며, 결국엔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에 칼을 대며 자신을 죽임과 동시에 자신이 사랑했던 환상 속의 여인(이제는 남성임을 알아버림)을 죽이기로 한다. 송 릴링에게 어떤 원망도 복수도 하지 못한 채 소극적이며 상징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갈리마드의 모습은 비극적이다.
‘죽음의 밥상’을 읽고피터 싱어, 짐 메이슨 지음지난 학기 ‘윤리학’ 강의를 들었던 나는 피터 싱어라는 실천 윤리학자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관심을 가졌었다. 피터 싱어의 책 몇 권을 읽은 이후로 가장 좋아하는 회를 입에도 대지 못하고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기에 교수님께서 저렇게 고개를 내저으시는 것인가 궁금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올해 안에 읽을 도서 목록에 피터 싱어의 책 몇 권을 적어 두고 바쁜 일정 속에서 조금씩 그것을 잊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 핵심교양 수업의 중간고사 대체 리포트 도서 목록에 피터 싱어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기꺼이 그의 책을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사실 내가 제일 처음 읽고 싶었던 책은 ‘동물 해방’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기도 했고, 이전에도 추천 도서로 소개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죽음의 밥상’을 택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최근 저작일 뿐만 아니라 수업 시간에 본 ‘미트릭스’가 내게 매우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실 태어나서 내 밥상에 올라오는 고기, 채소, 생선 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금 우리가 먹는 쌀은 농부들이 힘들게 땀 흘려 농사지은 것’이라는 것 정도는 어릴 때부터 밥을 남기지 않고 먹기 위해 익히 들어왔고 나 역시 그 정도는 가볍게 생각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돼지고기 반찬이 내 밥상 위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 내가 가장 자주 해 먹곤 하는 계란 반찬 등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내 식탁 위에 오르는 것인지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던 나에게 있어 추석 전에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미트릭스’는 나에게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비록 만화로 표현한 이 짧은 애니메이션 만화가 모든 고기 유통의 과정을 노골적으로 상세하게 보여주진 않았을 지라도, 나는 여기에 확실히 어떤 ‘문제의식’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바로 이와 관련하여 상세히 음식의 여정을 다룬 피터 싱어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은 확실히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 단지 ‘이것’ 때문에 이 책이 충격적이었다고 하기에는 내가 당연하게 전제하고 살아갔던 모든 생활에 대한 충격이었고, 그 ‘누군가가’ 잘못했다는 것을 지적하기에는 그 ‘누군가’가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이 책을 읽어 나가는 데에 있어 처음 1장을 읽는 동안은 메스껍고 거북스러운 기분이 심하게 들어 읽는 도중에 책을 며칠 놓아야만 했다. 확실히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며 느낄 수 있는 것은 과연 이 모든 충격적인 생산 과정을 알면서도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광고에 나오는 그 깔끔한 이미지, 식료품 가게 위에 올라와 있는 산뜻한 포장, 그것을 선전하는 대형 마트의 이미지 마케팅 들을 통해 나는 맹목적으로 음식을 사먹었고 그것이 몸에 좋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려 분당 90마리 씩 도살되는 닭들의 모습과, 그 과정에서 제대로 기절하지 않아 살아있는 채로 끓는 물에 들어가는 닭의 모습을 상상하는 동안 나는 심한 헛구역질을 느꼈다. 사실 그러한 과정을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생산 라인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그런 고통에 몸부림치며 배설물을 튀기고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을 ‘피하느라 애 먹는다’ 말하고, 죽은 닭을 휘두르며 장난을 친다는 사람들의 증언은 슬프게 느껴진다.여기서 나는 심각한 문제의식에 빠졌다. 처음에는 단지 ‘아, 음식의 생산 과정이 생각보다 더럽고 잔혹하구나. 어떻게 해야 이제 좀 더 깨끗하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돼지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 바닥에 코를 부딪치고 우리에 갇혀 평생 빛 한 번 보지 못한다고 하는 묘사, 송아지를 낳자마자 헤어지며 어미 소가 슬프게 우는 장면에 대한 묘사 등을 읽으면서 나는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생물들에게 이기적인 지배력을 행하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건은 단순히 더럽고, 참혹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깨끗하지가 못하다’는 ‘사실(fact)'을 알려주는 것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도대체 왜 컨베이어 벨트의 생산 라인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닭의 가랑이를 벌리고 튀는 배설물을 피하며 억지로 인공 수정을 하기 위해 수탉의 정자를 주입하는 동안 ’도대체 우리가 왜, 이러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것인지 나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하여, 적은 돈을 투자하여 큰 생산물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도 자연스레 ‘생각보다 내가 먹는 음식이 불결할 수도 있겠네. 어떻게 해야 그럼 더 깨끗한 음식을 구입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나의 모습 역시 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지도 모른다. 단지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나아가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심각한 문제를 낳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 이러한 비윤리적인 음식을 우리인간이 다시 먹고, 이제 그 결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몸의 이상을 호소하고 있다.오늘도 나를 친구를 만나 음식을 먹으며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3개월 전부터 하루에 11시간씩 고된 일을 하는 직업을 가진 내 친구는 일이 바빠지면서 인스턴트 짜장,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즉석식품, 햄, 라면 등으로 늘 끼니를 때우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3개월 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이 잔뜩 부어 있었고 피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빨갛게 일어나 있었다. 내 친구는 내게 음식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면서 이제부터는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아예 바꾸려고 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요새 ‘클린(Clean)’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 나를 만든다’는 말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나 역시도 요새 읽고 있는 ‘죽음의 밥상’ 의 내용에 대해 말하며 우리가 쉽게 먹고 살아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보기 시작했다는 말을 했다. 현대 사회에 들어 잘못된 가공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음식에 대해 사례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 성격이 매우 괴팍하고 회사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달간 채식위주의 좋은 식단의 밥을 제공한 이후 놀랄 정도로 성격이 개선되었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만을 한 달간 먹는 실험을 통해 인간 몸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실험 결과들은 확실히 우리가 만든 잘못된 음식들이 우리에게 더 큰 재앙이 되어 돌아오게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수업시간에 배웠던 불교의 상호연기설을 믿는다. 이 말은 곧 아까 내 친구가 말한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 나를 만든다’ 는 말에까지 연결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을 파괴하는 음식을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피터싱어의 파격적인 말에 담긴 파괴의 대상은 첫째 우리 인간을, 둘째로는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우리의 자연을 가리킨다. 즉 앞서 내 친구의 이야기를 제시했듯 우리가 비윤리적이고 잔혹한 생산과정을 그치지 않고 음식을 만들어 낸다 할지라도 이러한 음식을 먹고 또 다시 몸의 이상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다. 자신이 그런 음식을 만들어두고도 ‘나만 안 먹으면 되지 뭐’ 라고 생각하기에는, 이미 우리는 너무도 많은 비윤리적인 생산과정을 거친 음식들에 노출되어 있음을 피터싱어의 책을 통해 살펴보았다. 둘째로, 우리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 지구에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동식물과의 공생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호기심이 많고 정이 많다고 하는 돼지를 잡아 평생 움직이지도 못하는 우리에 가두고, 평생 젖을 많은 나오게 하기 위하여 강제 임신시켜 소의 수명을 반도 못되게 만드는 데에 우리는 어떤 자격을 가지고 이를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키우는 가축이나 동물을 가족처럼 대했다고 한다. 특히 소를 키우는 데에는 서로의 감정과 느낌까지 교감하게 된다고 하는데 나 역시 예전에 본 영화 ‘워낭소리’를 잊지 못한다. 우리와 의사소통 할 수는 없어도 동생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눈물을 흘리고, 울음소리를 낸다. 그러나 언제부터 우리 인간이 지구상의 우리와 같은 많은 생명체들의 수명과 삶과 환경을 결정 내리는 ‘신’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죽어 이 ‘물고기’가 된다면, 내가 다시 태어나 이 ‘돼지’의 삶을 산다면 어떨까 라고 단 한번만 모두가 생각한다면, 아마 모두들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잠시 책을 덮고 이제 나는 윤리학 시간에 배웠던 피터 싱어의 주장과 교수님의 말씀, 그리고 이번 학기 ‘생명 과학과 불교 윤리’ 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차차 떠올려 보았다. 특히 내가 이번 학기에 인상 깊게 보기 시작했던 ‘불교 윤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불교의 기본 관점은 중도(中道)이다. 이는 현대 과학의 생명관을 이루는 유기체(organism)론에 연관되는데, 구성요소들의 상호 작용을 단순한 집합이 아닌 무수한 상호 작용의 네트워크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본질은 상호 의존성이 되며 앞서 말한 불교의 연기적 생명관 역시 중도적 사유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나는 내가 가진 문제의식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돼지와 닭 등의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 모두가 서로 상호 의존성을 가지며 서로를 이루는 하나의 네트워크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체를 배타시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한 행위에는 반드시 과보가 있다고 하는 ‘업설’, 모든 생명들은 다 불성을 가진다는 불성 사상과 탈 인간 중심주의, 마지막으로 맹목적 본능의 삶에서 공존의 삶을 꾀하는 대승 불교의 윤리 모두가 내게 전체로서의 하나의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에 대한 잔잔한 깨달음이 나의 마음을 깨치며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공감共感’의 획득에 대한 가능성과 그 유의미성OO대학교 철학과2*************年 12月목 차Ⅰ. 서론Ⅱ. 본론1. 공감의 창출1-1. ‘보는 것’과 ‘아는 것’1-2. 공감의 획득 과정2. 공감의 획득에 대한 가능성2-1.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2-2. 칸딘스키의 그림과 교향곡2-3. 헤겔의 예술론과 현대 미술3. 공감의 획득에 대한 유의미성3-1. ‘취향’을 통한 공감과 ‘적응’을 통한 공감3-2. 이우환의 ‘점으로부터’와 보들레르Ⅲ. 결론※ 참고문헌문화철학이란 무엇인가, 랄프 콘너스만, 북코리아어떻게 볼 것인가, 존 버거, 현대미학사미학 오디세이 2, 진중권, 휴머니스트헤겔의 미학강의 2,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저, 은행나무미학의 기초와 그 이론의 변천, 강대석, 서광사Ⅰ. 서론이우환 ‘점으로부터’? Charles-Pierre Baudelaire : 처음의 당혹감과 ‘적응’의 힘든 과정은 결국에는 ‘공감’의 획득을 통해 보상 받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서 관람자는 ‘새로운 상상의 거대한 세계’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위의 그림은 200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20억원에 육박하는 높은 가격에 낙찰된 이우환 화백의 작품이다. 나는 처음에 이우환 화백에 대해 전혀 모른 채로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선으로부터’(64.8X52.7cm,1976년작)를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그의 작품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그의 작품을 더 알아보기 위하여 조사하던 도중 그가 현재 국제무대에서 동서미술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그림에 매료된 나의 느낌이 나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이며 더욱이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는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뉴스를 통해 ‘이우환’이라는 작가에 대해, 그리고 그 작품들의 시세에 대해 먼저 알고 그림을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림을 보고 그의 작품을 알아 본 것이다. 나는 어떠한 문화, 혹은 예술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타인과 나중에도 이미지 창조자의 특정 시각은 기록의 한 부분으로서 인정되었다. 이미지란 ‘X가 Y를 이러이러한 식으로 보았다’라는 기록이 되었다. 결국 ‘보는 것’은 ‘아는 것’에 선행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아는 만큼 보인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고급 예술로 인식되는 미술 역시 자신의 교육 수준에 따라 보이는 것은 아닐까?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술관을 자주 방문하지 않는다. 아래 도표는 미술에 대한 흥미도와 교육수준과의 관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교육 수준에 따른 박물관 방문자의 국가별 비율 : 교육 수준별 미술박물관 방문자의 비율분 류그리스 폴란드 프랑스 네덜란드무 학0.02 0.12 0.15 -초등교육0.30 1.50 0.45 0.50중등교육10.5 10.4 10 20고등교육11.5 11.7 12.5 17.3자료 : Pierre Bourdieu and Alain Darbel, L'Amour de I' Art, Editions de Minuit, Paris 1969, Appendix 5, table 4대다수의 사람들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유물들로 가득 찬 곳으로 여기고 있다. 그 유품이나 작품들을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엄청난 부의 신비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걸작 진품들은 부자들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결국 우리는 공감共感에 대한 가능성을 살펴보는 데에 있어 출발부터 난해함을 마주하게 된다.1-2. 공감의 획득 과정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나라의 미술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미술 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며 특히 현대에 들어서는 작품의 가치에 따라 값을 매겨 미술 경매 시장이 활성화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경매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소위 교육받은 사람들이거나 시세 높은 작품을 구매하기 위한 상위층들임에는 불구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들 사이에 가치에 대한 어떠한 기준이 있으며 그것이 또한 특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미술 작품을 감상자가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공감의 스 꽃들 그리고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들판을 그렸다. 내가 보기에 정신병원에 체류하면서 이러한 명작을 그려내었던 그가 작품을 그리는 데에 있어 어떠한 ‘약호’와 ‘전언’을 의도하여 그림을 그렸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물론 그의 그림에는 자신만이 가진 세상에 대한 시각, 색채에 대한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후에 우리는 그의 전언과 약호를 다른 화가들과 구별해 내고 알아차리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예술가의 ‘약호’와 ‘전언’을 교육받고 그것을 정확히 해독함으로써 예술적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도식과는 달리 고흐는 감상자의 해독과 비평에 상관하지 않고 독창적인 자신의 작품을 내놓았다. 거기에는 우리가 이해해야 할 기호도 없고,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도 없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을 해독하는 데에 있어 고흐가 살았던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인정하지 않았고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사랑한다. 창작자가 수용자의 해독과 비평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작품을 생산하고 수용자 역시 창작자의 어떤 전언과 약호를 이해하지 않아도 예술적 소통의 가능성은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둘째로 예술 작품은 단순한 의도와 기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미술 작품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현대 마르셸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만 생각해 보더라도 이제 미술이 단순한 대상의 재현을 파괴하면서 하나의 상징성을 가지게 된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발명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완벽한 재현이 가능해지면서 회화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게 되었고 현대 미술은 예술적 소통에의 새로운 코드(code)를 창조한다. 뒤샹은 하나의 변기를 예술 작품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관습’이라는 ‘코드’를 창조했고, 명명하기만 하면 모든 게 예술이 된다는 예술의 본질을 지적했다. 바로 여기에서 다시금 우리가 앞서 제시한 ‘전언’과 ‘약호’의 문제가 다시 등극하며 역시 예술의 본질은 작품과 수용자를 거쳐 ‘코드’라는 지점예술의 개념에 대한 헤겔의 견해이다. 일반적인 예술의 개념과 연관해서 헤겔은 첫째, 예술 작품은 자연적인 산물이 아니고 인간의 활동을 통해서 나타난다. 둘째, 예술 작품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인간의 감성에 맞도록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추출되었다. 셋째, 예술 작품은 그 자체 속에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규정에서 헤겔은 인간의 활동이 일정한 내용과 관계되는 정신적인 활동이므로 예술 작품의 근원을 내용에서 간파하려 한다. 헤겔의 예술관은 계몽주의 예술관뿐만 아니라 동시에 '질풍노도'적 예술관에도 반대한다. 두 번째 규정에서 헤겔은 계몽주의 미학에서 시작하여 칸트에 이르는 미학 입장을 암시하고 비판하는 것 같다. 칸트에 있어서는 이해관계를 떠난 취미 판단이 핵심을 이루는데 반하여 헤겔은 욕구라는 현상 자체를 배제하지 않는다. 세 번째 규정에서 헤겔의 의도는 예술의 독자성이란 무의미하며 예술이 예술 외의 어떤 목적을 통일적으로 내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칸트의 미학에서 취미 판단이 선과 결부되지 않고 엄격하게 분리되는 데에 대한 반대로 할 수 있다. 헤겔 미학의 방대한 예술 체계가 그의 철학처럼 변증법적 발전이라는 3단계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으며 시는 철학과 유사성을 갖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는 예술미의 규정에서도 드러나듯이 헤겔에게서 예술은 구체적인 정신, 즉 자유를 실현하는 감각적이고 개별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의 미적 가치는 보편적 개별성, 자유롭고 참된 총체성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데 이는 근원적으로 총체적인 주체의 반성적 자기관계를 통한 변증법적 통일을 보여준다. 헤겔은 규제적이고 도구적인 합리성에 기초하는 근대 시민사회의 영역으로부터 상실된 포괄적이고 자유로운 이성을 예술에서 발견한 것이다. 요컨대 예술은 주체의 외화와 자기 자신에로의 회귀라는 반성적 자기 관계를 통한 자기 의식적 활동의 산물이며 이러한 행위와 그 작품을 통해 자신의 자유로운 이성을 실현한다. 따라의 모든 국민들이 고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그의 작품을 보여줬을 때 정말 훌륭하다고 평가할 사람이 지금의 대중들의 수만큼 많을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명화들의 경우에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고흐의 해바라기 같은 그림을 생각했을 때 대체적으로 작품에 그려진 대상이 현실의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작품을 가리키며 ‘이것은 여인이다’, ‘이것은 해바라기이다’라고 설명했을 때 많은 대중들이 자신이 아는 ‘여인’과 ‘해바라기’의 모습과 비교하며 대체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들이 호소력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곧 사람들은 작품을 보면서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아름답게 재현하였다’는 느낌을 받는 작품을 훌륭하다고 평가한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개인마다 다양하며 그 이유도 다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기준이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미적 가치의 기준에서 따져 보았을 때 모두 훌륭한 상대적인 기준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작품이 좋다는 것에 대한 많은 의견이 일치되면 그 작품은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결국 예술가가 ‘약호’나 ‘전언’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 혹은 대체로 현실의 대상을 모방하거나 재현한 작품일 경우에 감상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 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에 있어 공통적으로 ‘좋다’는 의견이 많은 사람에게 나올 경우에 이것은 작품에 대한 ‘공감共感’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으나, 동시에 예술적 소통의 의미로서의 ‘공감’이 될 수는 없다. 이는 ‘좋다’는 느낌에 대한 공감이지 예술적 감感에 대한 공감은 아닌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헤겔이 말하는 철학적 고찰의 대상이 되는 예술을 이해하는 감상자의 정신적 단계가 요구되는 문제에까지 나아가자면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해진다. 어찌되었든 훌륭한 작품에 ‘공감’을 표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자유로운 이성을 발견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