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 제 명 :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세종 어제설과 친제설 논의목 차Ⅰ. 서론 ---------------------------------------------- 1Ⅱ. 본론 ---------------------------------------------- 11. 훈민정음 어제설 ------------------------------------------- 2(1) 옛글자 모방설 ------------------------------------------ 2(2) 학자 협찬설 -------------------------------------------- 32. 훈민정음 친제설 ------------------------------------------- 4(1) 창제 당년의 기록 ---------------------------------------- 4(2) 비밀리에 창제된 훈민정음 --------------------------------- 5(3) 뛰어난 언어학자 세종 ------------------------------------- 7Ⅲ. 결론 ------------------------------------------ 9참고문헌Ⅰ. 서론얼마 전 564번째로 맞는 한글 날에 방송매체에서는 특별방송이 편성되고 기념행사를 가지는 모습을 방영하였다. 또한 학교나 유관 단체에서는 백일장이나 관련 행사를 가져 한글날의 의미를 기렸다.하지만 정작 한글인 훈민정음을 누가 얼마나 고심하여 만들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적은 것 같다. 훈민정음 창제자는 세종대왕이라고 하는 단순 대답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이정명의 소설 뿌리 깊은 나무에서처럼 세종과 그를 도운 학자들이 그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을 것이란 추측이 더해질 뿐이다.이에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세종대왕 친제설과 비친제설, 즉 어제설에 대한 논문을 찾아보고 그에 따른 논거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친제설과 어제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된 김기문(훈민정음 친제론, 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구소,其字體依梵字爲之)20세기 초엽 주시경의「대한 국어 문법」(1906)에 와서는 협찬설 쪽으로 무게가 실린다.문 : 세종대왕께서 국문을 어떻게 만드셨느뇨.답 : 세종대왕께서 각국이 다 글자를 만들어 각각 그 나라말을 기록하되 우리나라는 말을 기록하는 글이 없음을 근심하사 금중에 국문청을 설립하고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등을 명하사 고전(古篆)과 범자(梵字)를 의방하여 국문을 친히 만드사 이름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시고 이십팔년 병인에 중외에 반포하시니 무슨 말이든지 기록 못할 소리가 없고……최근에 와서는 이 협찬설과 함께 친제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이에 명제설과 협찬설을 합쳐 어제설이라 하고, 친제설과의 비교 논거를 찾아보고자 한다.1. 훈민정음 어제설훈민정음에 대한 어제설은 주로 옛글자(신지글자, 가림다문) 모방과 주요 공헌자 신숙주에 관한 연구가 주를 이룬다. 리홍매(1997), 중국조선어문, “훈민정음 친제설과 비친제설”, pp.29(1) 옛글자 모방설신지글자에 대한 논의는 훈민정음 창제 이전부터 고유글자가 있었다는 주장에서 시작된다.삼선기에서 고 하였고 리맥의 태백일사에서는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단군 때에 신지전서가 있었는데 그것은 태백산과 흑룡강, 청구(조선), 구려 등의 지역들에서 널리 썼다.나아가 훈민정음과 신지글자와의 관련성에 대해 세종실록 25년 12월조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이달에 임금이 언문 28자를 만들었다.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본 땄다.정린지의 훈민정음(해례) 서문에서도 고 쓰고 있다.훈민정음 창제의 중요한 표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소위 신지글자로부터 훈민정음에 이르는 그 중간 단계인 가림다문에 대한 기록 또한 찾아볼 수 있다.1363년 행촌 리암이 가람다문으로 표기된 단군세기를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가람다의 38자 전문을 예시해 놓았다. 거기에 기록된 가람다를 살펴보면 훈민정음 28자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훈민정음 반포 77년 후에 지은 태백일사에서 단군세기를 많이 인용한 것을시 학자들의 협찬설에 대해 외국 학자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선 일본의 河野六郞(1989)에 다음과 같은 서술이 보인다.이 한글에 대해서는 年代와 作者가 자못 분명히 알려져 있다. 이 文字는 李朝 第四代의 王 世宗이 親히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원체 世宗 임금은 李朝 第一의 名君으로 業績도 많고 敎養도 풍부한 英才였지만, 政務 多忙한 國王이 새 文字를 그 理念에서 具體的인 完成까지 전부 혼자서 해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世宗 임금의 側近에는 集賢殿이라는 젊은 學者들을 여럿 모아놓은 機關이 있었고 그중에는 申叔舟 같은 秀才가 있어서, 아마도 임금을 도와서 새 文字의 創造에 관한 大事業에 참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미국 학자의 최근 저술에도 협찬설이 보인다. 미국 Burling(1992)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인용한 부분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In the fifteenth centrury, King Sejong of Korea appointed a committee to assist him in designing a new script that would be well suited to the country's language, and usable by ordinary people. The committee did its work brilliantly, and produced the script that is known today as Hangul. It is unique among the world's writing system, in combining aspects of featural, phonemic and syllabic representation.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제설에 대한 문학적 고찰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할 수 있다.2. 훈민정음 친제설훈민정음 친제설에 대한 근거로는 창제 당년의 기록에서 '친히‘라는 말의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창제과정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세종의 뛰어난 언어학적 능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라면 당대에 편찬된 모든 책과 과학 기기도 같은 표현을 써야 옳다. 그러나 ‘친제’라는 표현을 사용한 예는 훈민정음 밖에 없다. 이는 훈민정음을 세종이 직접 홀로 만들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한편 정인지의 「訓民正音」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癸亥年 겨울에 우리 殿下께서 正音 28字를 創制하시고 간략하게 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하여 訓民正音이라 하셨다.……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殿下께서는 하늘이 내신 聖人으로 制度施爲가 百王을 超越하시어 正音을 지으심도 祖述한 바 없이 自然에서 이루신 것이라 참으로 지극한 理致가 있지 아니한 곳이 없으니 人爲의 사사로움으로 된 것이 아니다. 대지 東方에 나라가 있음이 오래지 않음이 아니나 開物成務의 큰 智慧는 대개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음인저. (癸亥冬 我殿下 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恭惟我殿下 天縱之聖 制度施爲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 而非人爲之私也)심지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의 상소 세종실록(권103, 26년 2월)에도 친제에 대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臣들이 엎드려 뵈옵건대 諺文 制作은 대단히 神妙하와 創物運智가 千古에 나오나……(臣等伏觀 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 出千古)무엇보다 세종 자신의 말이 친제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될 것이다. 우선 「훈민정음」의 어제서에서 “내 이를 위하여 불쌍히 여겨 새로 28字를 만드노니”(矛爲此憫然 親制二十八字)라 한 것을 들 수 있다. 세종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면 이런 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2) 비밀리에 창제된 훈민정음이처럼 문헌 기록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정황적 근거에서도 훈민정음 친제설에 무게를 둘 수 있다. 즉 훈민정음이 비밀리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세종 단독으로 훈민정음 창제 작업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훈민정음 창제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세종 25年(1443)말의 일이었다. 이 사실은 세종실록 (권102, 25년 12월)에 기록되어 있고 「훈민정음」(세종 2한 사실을 공격한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만약 諺文을 부득이 創制하셔야 될 일이라 해도 이는 風俗을 바꾸는 큰 일이라, 마땅히 宰相으로부터 百僚에 이르기까지 相議하여야 하고 國民이 모두 옳다고 해도 오히려 미리 생각하고 다시 거듭 생각하여 歷代 帝王에게 質問하여도 어그러지지 않고 中國과 상고하여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百世에 聖人을 기다리어 써 의혹될 바가 없은 연후에야 可히 행하실 일이옵니다. (曰 諺文不得已而爲之 此變易風俗之大者 當矛及宰相下至百僚 國民皆曰可 猶先甲先庚更加三思 質諸帝王而不悖 考諸中國而無愧 百世以俟聖人而不惑 然後乃可行也)세종은 왜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훈민정음 공표에 반대했던 최만리의 상소문에 잘 나타나 있다.최만리의 상소문을 요약하자면 첫째는 새 문자를 만들어 단독으로 쓴다는 말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면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화의 문자인 한자를 대신하여 훈민정음을 쓰면 스스로 오랑캐가 된다는 논리, 셋째는 설총의 이두로써 가능한 일을 굳이 훈민정음으로 대체할 필요가 없다는 것, 넷째는 창제취지 중 하나로 훈민정음 보급이 억울한 사람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가 옳지 않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 내용의 골자는 ‘사대’와 ‘권위’였다.당시 대개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을 삶의 지표로 삼고, 동시에 대국인 중국을 섬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원칙을 국가를 유지시키는 철칙으로 여겼으며, 이러한 철칙은 그들의 권력을 지키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또한 그들의 내면엔 학자 또는 선비로서 갖는 권위주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적어도 문자는 자기들만이 아는 것이고 학문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사고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학문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유학과 한자였다. 그들에게 평민은 그저 이두 정도나 알고 있는 무식쟁이였고, 천민은 그것조차도 모르는 짐승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런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 자부심의 밑천이 한자였다. 그들 양반들은 사실 문자와 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