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읽고나를 비롯해 예술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각은 위로 고정되어 있다. 예술은 난해하고 복잡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고집하며 고뇌하는 예술가의 모습은 대부분 평범 그 자체를 거부한다. 에 등장하는 석담이나 고죽, 그리고 이문열 작가도 그렇다. 소설 전반부에 심어놓은 한자나, 예가 먼저인가, 도가 먼저인가 하는 논쟁은 불교나 예술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예술이란 무엇인가?”참 어려운 질문이다. 작가는 스스로 이 질문을 던지며 작품을 통해 답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작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스승과 제자의 갈등을 통해 그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고죽은 열 살의 나이로 숙부의 손에 끌려 석담 선생에게 맡겨진다. 석담은 이름 있는 서예가였다. 그런데 석담은 고죽에게 줄곧 쌀쌀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이상하게도 고죽을 제자로 삼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처음 내 눈에 비쳐진 석담은 내면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도를 앞세우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고죽의 대성을 예감하고 경계하는 것 같았다.어쨌든 둘은 사제 관계를 맺게 되고 그들의 갈등은 시작된다. 예보다 도를 더 우선시하는 석담은 도보다 예를 주장하는 고죽의 작품 세계를 못마땅해 하는데, 고죽은 서예가 다른 무엇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세계를 추구해 간다. 고죽은 죽음에 임박하여 결단하는데, 바로 자신의 작품에서 금시조를 발견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모두 불태운다.거부한 고죽의 전적들이 한꺼번에 타 없어지고 있는 그때 어떤 사람에게는 고죽 일생의 예술이 타고 있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처절한 진실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고죽의 삶 자체가 타는 듯도 보였다. 드물게는 불타는 서화더미가 그대로 그만한 고액권 더미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순간 부끄러웠다. 나에게는 고액권 더미로 보였다는 것이다.인상 깊은 것은 고죽이 죽음을 맞기 직전에 불꽃에서 금시조의 비상을 보게 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때 고죽은 보았다. 그 불길 속에서 홀연히 솟아오르는 한 마리의 거대한 금시조를. 찬란한 금빛 날개와 그 험한 비상을.’작가는 결국 고죽의 편에 선 것 같다. 옛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추구해 나가는 것 자체가 진정한 예술정신이라 말하는 것 같았다.
가도 가도 천 리라는 고흥반도. 이곳 야트막한 구릉마다 펼쳐진 마늘밭에서 마늘쫑을 뽑으며 한숨을 내쉬던 여자 아이가 있었다. 바닷물이 밀려나간 차진 개펄에서 바지락을 캐며 가난의 설움을 삼키던 아이의 희망은 하루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마늘냄새, 개펄냄새를 이리저리 싣고 다니는 바람조차 싫었던 아이… 아이러니하게도 우울한 공간이었던 이곳은 25년이 흐른 지금, 내 마음의 쉼터가 되었다. 도시생활에 지쳐가는 나에게 피곤하고 힘들 때 달려가 쉬고 싶은 정신적 쉼터 같은 곳. 이곳은 순수했던 ‘나’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주인공에게도 무진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였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회상하게 하는 즐겁지만은 않은, 줏대 없고 나약한 모습 그대로 한 며칠 숨 쉬고 살다가게 해주는 그런 곳이었다. 한편으로는 힘들 때 쉴 수 있고 재충전 할 수 있는 정신적인 쉼터 같은 곳이기도 했다.무진에서 만난 하 선생은 무진을 벗어나고 싶어 했던 주인공의 젊은 모습과 같았다. 하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 하 선생에게 사랑을 느끼는 주인공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정욕에 불과해 보였다.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는 안개, 무진의 안개에 가려진 게 아닐까. 하 선생과 관계를 맺고 돌아온 주인공은 잠이 들 때까지 소주를 마셨다. 그는 이유를 집어낼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그것은 불안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예측했던 것 같다. 돈 많은 과부를 만나 살고 있는 현실을 택할 것이라는 것을. 비겁한 도망자라는 것을.이 문장은 주인공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마무리하는 듯 했다. 역시 아내의 전보는 주인공이 무진에 와서 한 모든 행동과 사고를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다. 그는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었다는 것을, 세월에 의하여 마음 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타협한다.주인공은 서울로 향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 선생의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도와주지 못하고 책임지지 못한 자신에 대한 수치심 같았다. 또한 자기 과시적이며 출세와 성공에만 관심 있는 속물이라 여겼던 세무서장 조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옛날의 순수했던 모습을 현실에 끌어다 놓기 원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생각과 행동의 경계선이 허물어지며 결국 그는 자신의 실체를 마주대해야 했다.
매일 아침 빼곡한 지하철에 몸을 싣고 또다시 일터로 향하는 바쁜 직장인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언제나 똑같이 돌아가는 일상을 벗어던지고 탈출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발목을 잡는다. 나 역시 이런 직장인 중 하나다. 내면의 욕구를 억누르고 있는 나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탈주의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이다. 이 때문인지, 윤대녕의 의 첫 느낌은 마치 운명의 억압에 짓눌린 답답함이 밀려왔는데, 나중에는 현실의 문을 박차고 내면의 꿈을 찾아 떠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역마살'이 낀 사람은 무언가에 묶여있기 싫어하며 자유로움을 좋아한다. 그런데 옛날에 사주를 보는 사람들은 역마살이 있으면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고생한다며, 사주에 역마가 많아서 집 떠나 고생할 팔자라며 겁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에서 말하는 역마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주, 나아가 자아실현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사실 이 소설을 처음 대할 때 괴상한 물고기를 건져 올린 것 같았다. 어느 날 주인공이 말의 부름을 받질 않나, 경복궁과 경복궁 역 승강 보도에서 본 말의 모습에 과도하게 집착하질 않나, TV 속에서 김벌레가 음향효과의 하나로 말발굽 소리를 내자 그것에 이상한 이끌림을 느끼지 않나, 검은 말이 “자!! 이제!! 가자!!”라며 백부를 부르는 장면은 기괴함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곧 되물림으로 내려온 역마살이 조부와 백부, 아버지와 주인공의 내면의 세계에 잠재되어 있던 욕망이란 관점에서 바라보니 기괴함이 아닌 운명의 순응에 거부하는 몸부림과도 같았다.어느 날 조부의 뒤를 따라 온 말 한 마리. 조부는 그 말의 실체를 찾기 위해 마경이란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이를 통해 주인공에게 역마는 운명적으로 심겨진 것 같다. 백부는 이 말을 타고 떠났다. 사범학교를 나와 좌익 활동을 하던 백부는 수란이라는 딸 하나를 데리고 귀향했다. 다시 돌아온 백부는 무엇을 깨우쳤는지, 고향에 안주했다. 그런데 이 백부가 외치는 “해탈! 초월! 개벽!”의 의미는 사실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을 읽고에 실린 작가의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1985년 서울 태평로 어느 돌계단 아래에서 의미 없이 한 곳을 바라보는 작가의 모습이다. 이 사진 한 컷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았다.을 읽은 후, 예전에 방영한 ‘TV 문학관’ 프로가 떠올랐다. 아마 작품 전체에 흐르는 대화체 영향이 큰 듯하다. 대화체와 행동 중심의 보여주기 문체를 통해 독자가 바로 옆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하는 효과를 갖게 하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이 작품 역시 TV 문학관 프로에서 영상으로 옮겨졌더랬다. 한국인이라면 꼭 읽어야 될 주옥같은 한국 근대문학의 걸작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이 작품이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가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6, 70년대 산업화, 도시화로 인하여 경제가 발달하고 사람들은 풍족한 생활을 하기 위해 더욱더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산업화, 도시화의 과정에서 농민들은 농토와 집을 잃고 도시의 일용 노동자 생활을 하며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다. 이런 양면적인 모습은 문장 속에서도 드러나 있었다.‘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오는 아침 햇빛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이 소설은 고향을 잃고 떠도는 떠돌이들의 착잡한 심정을 리얼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등장인물 중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던 영달과 정씨는 같은 처지 같으면서도 달랐다. 갈 데가 마땅치 않는 영달과는 달리 정씨는 고향인 삼포가 있었다. 이들은 감천으로 행선을 바꾸어 가던 중 술집에서 도망한 백화를 만나게 된다.이 세 명은 각기 서로 판이하게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집과 돌아 가야할 고향을 잃어버리고 떠돈다는 것이다.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를 떠돌던 세 영혼들이 각자 고향을 찾아 눈 덮인 설원을 걷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척박해 보이는 인생들 같지만 시종일관 농담과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들이 떠도는 슬픈 길 위에는 그들의 웃음이 있었고 이별의 아픔만큼의 만남의 행복도 있었다. 또한 뒷주머니에 꼬깃꼬깃 감춰놓은 비상금을 털어 기차표와 빵과 찐 달걀을 백화의 손에 쥐어 주는 우정과 사랑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이 이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 같다.
아내의 투병을 보며 병원 복도 한켠에서 눈물을 삼키는 남자,마지막 여행을 떠나며 죽음을 앞둔 아내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하는 남자…….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런 가슴 시린 장면을 보며 눈물 콧물을 빼던 기억이 난다.그러나…… 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내가 생각했던 사랑의 이상은 현실과 충돌하며 상실감마저 들게 했다. 아내의 죽음을 맞은 남편인가 의심이 들만큼 너무도 담담하고 냉정한 시선이 의아한 동시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엉덩이 살이 모두 말라버려서 골반뼈 위로 헐렁한 피부가 늘어져 매트리스 위에서 접혔다...’ 뼈와 가죽뿐인 아내의 몸을 바라보는 남편에게는 슬픔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긴병에 효자 없다고 하지만, 겨우 2년이지 않은가. 부부란 잔잔한 강은 물론, 시련의 파도도 함께 헤쳐 가야하는 존재 아니던가. 더 이상 아내나 남편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 현실인가,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이 단편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남편이 볼세라 조심조심 읽어 내려갔다. 오감을 자극하는 적나라한 묘사 덕분이다. 특히 아내가 죽은 날 비뇨기과를 찾아 억지로 소변을 짜내는 장면은 마치 남탕을 훔쳐보는 기분마저 들게 했다.그런데 냉혈인간처럼 보이던 주인공에게서 혈온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장례식장에서 아내를 빼닮은 딸을 보며 느끼는 헤어날 수 없는 심정을, 아내의 죽음을 전해 듣는 순간 터질 듯한 방광의 무게에 짓눌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던 그 무거움과 같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의 고통은 단지 전립선염이 아닌 삶의 무게에 짓눌려 답답했던 내면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아닐까.그는 아내의 죽음과 함께 조금씩 소변을 짜내듯 쓰라리고 건조했던 자신의 삶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지켜봐오던 여직원 추은주에 대해 희미하고도 선명한 푸른 정맥까지 너무도 섬세한 묘사로 그리고 있다. 시들어가는 나무와 같은 아내와 생기로 충만한 추은주의 모습은 극과 극을 이루며, 동시에 그는 편지를 쓰듯 그녀에 대한 풍부한 감성을 드러낸다. 이런 섬세한 감성이 있었기에 화장품 회사의 상무로 일취월장할 수 있었을 거다.아내를 화장한 주인공은 달라졌다. 추은주의 퇴직 소식을 접하지만 이전처럼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거나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녀의 사직서를 처리한 그는 퇴근길에 비뇨기과에 들러서 소변을 빼내고 아내의 분신과도 같던 개 ‘보리’를 안락사 시킨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쉽게 결정하지 못하던 여름광고 이미지를 확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