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Harry Potter)와저자 조앤 롤링(J.K.Lolling)목차1. 해리포터 소개2. 조앤 롤링 소개3. 해리포터 부가 컨텐츠4. 인기 있는 이유5. 해리포터 명소6. 영국 사회에 끼친 영향7. 마치며※ 참고문헌1. 해리포터(Harry Potter)1997년 처음 출간되어 2007년 총 7권으로 완간된 ‘해리포터’시리즈는 지금까지 67개의 언어로 번역되며 4억 5천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해리포터는 영화와 책을 합쳐 최종적으로 74억달러 (한화로 약 7조 8000억원) 이상의 수입을 거두고 있는 대단히 인기 있는 작품이자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주인공 해리포터는 볼드모트의 살인 저주 ‘아바다 케다브라’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자 볼드모트의 몰락을 이끈 인물이다. 살인 저주 과정에서 얻게 된 상처가 해리의 이마에 ‘번개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것은 해리만의 표식으로 남게 된다. 마법세계에서 유명한 부부였던 포터 부부의 아들인 해리는 단정하지 않은 검정색 머리카락 등 많은 부분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고 어머니의 매력적인 초록색 눈도 물려받았다. 동그란 안경 역시 해리 포터의 특징적인 외모이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 헤르미온느 그레인저, 론 위즐리와 함께 마법사들의 학교 ‘호그와트’에 입학한다. 해리는 자신이 마법사이기를 알기 전에는 자신을 평균 이하의 아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마법 세계에서는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입학할 때부터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그는 마법세계 호그와트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들 중심에 있으며 볼드모트와 그를 신봉하는 어둠을 먹는 자에 맞서 마법세계를 지켜내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마법세계를 위해 스스로 희생하려고 하였으나 호크룩스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볼드모트를 죽이며 마법세계에 평화를 가져온다.헤르미온느 그레인져는 머글 태생의 마법사로 호그와트 입학 전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여 마법 지식이 풍부했고 똑똑하며 마법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어떤 말을 해도 똑소리나게 잘 했고 시험치기를 자신을 천대하는 친척집에 맡겨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해리는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온갖 멸시와 모욕을 견디며 계단 밑 벽장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열한 번째 생일날에 ‘호그와트’라는 영국 최고의 마법학교에 입학하면서 엄청난 모험이 시작된다.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12살이 된 해리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에서 첫 해를 보낸 후 더즐리 가족 집에서 힘겨운 여름방학을 맞이한다. 호그와트로 돌아가는 날이 되었을 때 집요정 도비가 나타나 경고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학교로 돌아간다. 하지만 학교에서 학생들의 죽음이 이어지자 해리가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톰 리들의 소름끼치는 일기장 등이 발견되면서 정신없는 소동 속, 해리의 친구 론과 헤르미온느만이 해리의 결백을 확신하고 그를 돕는다. 결국 일기장은 볼드모트의 소유였고 해리는 이를 파괴한다.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더즐리 가족의 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던 해리는 자신의 부모님을 욕하는 더즐리 가족에게 화가 나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오게 된다. 해리는 호그와트에서 쫒겨난 것을 염려하며 리키 콜드런으로 향하였고 그곳에서 마법부 장관 퍼지를 만나 아즈카반이라는 무시무시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악명 높은 죄수 시리우스 블랙이 탈옥해 해리를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해리는 시리우스 블랙이 자기 부모님의 친구였지만 그들을 배신한 것으로 알았지만 론의 애완동물 쥐인 스캐버스가 피터 패티그루였던 것을 알고 진짜 배신자를 찾게 된다. 시리우스 블랙은 해리의 대부였고 그를 보살펴 준다.해리포터와 불의 잔 1년에 한 번 열리는 트위리저드 대회에서는 여러 마법학교의 대표가 나가 자신의 기량을 펼치게 되어 있는데 해리는 나이가 자격 미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로 선택된다. 다른학교 대표 3명과 더불어 최고의 마법사를 가리는 시합에 돌입한다. 인어들에게 사로잡힌 인질을 구출하고 스핑크스와 지혜의 대결을 벌이면서 시합을 성공적으로 치른 해리는 마침내 우승컵을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우승컵에 토끼가 홍역에 걸려 집에 누워 있는데, 동물 친구들이 병문안을 온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조앤은 동생에게 들려준 그 이야기를 곧 연필로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녀의 생애 첫 작품이었다. 그리고 열 살 무렵엔 두 번째 작품인 「일곱 개의 저주받은 다이아몬드」라는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그녀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끊임없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특히 C.S. 루이스의 『나니아 나라 이야기』와 제인 오스틴의 『에마 Emma』를 즐겨 읽었다. 고전과 신화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던 대학 시절에 조앤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조앤 롤링은 액세터(Exeter)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게 된다. 이는 장래에 비서나 통역사로서 직장을 구하기 쉬우리라고 판단한 부모의 견해를 존중한 선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녀는 부모의 희망대로 국제사면위원회에서 비서라는 안정된 직장 일을 얻게 되었지만, 창조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던 조앤에게 비서 업무는 도무지 맞지 않았다. 일을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엔 온통 이야기 구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일을 잘 감당했을 리 없고 결국 해고되었다. 그 후 조앤 롤링은 맨체스터 상공회의소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런던의 집에서 맨체스터로 기차 통근을 하던 시절, 그녀는 기차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다듬거나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혼자만의 즐거움을 누려 나가곤 했다. 『해리 포터』는 이 기차 안에서 탄생했다.1990년 6월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가던 도중, 조앤은 기계장치에 문제가 생겨 기차가 4시간가량 지체할 것이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 차창 밖으로 풀을 뜯고 있던 홀스타인 얼룩소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해리에 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머릿속에는 마법학교에 입학하라는 통지서를 받을 때까지 자신이 마법사인지 몰랐던 소년에 관한 이야기가 그려졌다. 조앤은 눈을 감고 해리에 대한 상상을 계속해 나갔다. 기차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 중의 한 명인 크리스토퍼 리틀(Christopher Little)에게서 독점 계약을 원하는 답장이 왔다. 이후 리틀은 원고를 영국의 여러 출판사들에 보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 이 원고는 약 열두 개의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한 뒤에야 비로소 블룸스베리(Bloomsbury)에서 간행될 수 있었다. 출간 조건은 불과 1,500파운드였다. 원고의 저자는 'J.K. Rowling'으로 변해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남성 작가의 글을 읽지만 남자아이들은 여성 작가의 글을 읽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리틀이 제안한 것이었다. 1997년 6월, 드디어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출간되었다. 블룸스베리는 성공을 확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은 하드백과 문고판으로 동시에 출간되었는데, 하드백의 1쇄가 500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한 출판사(Scholastic)에서 10만 달러를 지불하고 이 책의 미국 판권을 얻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1쇄에서 무려 5만 부를 인쇄했다. 미국의 출판업자는 현자(Philosopher)를 마법사(Sorcerer)로 바꾸었다. 'Philosopher'라는 단어가 미국 아이들에게 너무 무거우리란 우려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자의 돌' 대신에, 미국판의 제목에 따라 '마법사의 돌'로 번역되었다.『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발행 직후부터 열광적인 인기를 누린 것은 아니었다. 1997년 이 책이 출간된 직후 런던의 한 서점에서 롤링이 첫 낭송회를 열었을 때 참여한 독자는 단 둘뿐이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일본이나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 모두 이 책의 번역, 출간에 소극적이었으며, 우리나라 출판사에서도 원작 출판 후 2년이 지나서야 출간하였다. 마법사를 다룬 이야기가 우리 정서에 잘 맞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그러나 많은 사람의 예상을 깨고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평판을 얻기 시작했다. 그 인기는 급기야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며, 마침내는 거대한 눈사태로 발전하였다. 출간된 후 4년 동안에 21개의 상을 수상한 이 것은 소비자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이야기 속의 새로운 마법세계를 누구나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해준다.또한 소설 속의 주요 캐릭터들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무명의 배우들을 통하여 그들이 곧 해리, 론, 헤르미온느로 계속 출연하도록 하였다. 시리즈마다 성장해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우리와 같이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배우들을 통해 친밀함을 만들어 내는 데 크게 작용한다. 이것은 영화가 해리의 성장담을 일상과 맞닿은 친숙한 마법세계에서 펼쳐나가는 원작의 특성을 살렸다. 어린 배우들을 시리즈마다 연속적으로 캐스팅하여 생물학적 성장과 영화 속 캐릭터의 성장을 일치시킴으로써 강화한 것이다.조앤 롤링은 소설에서 다양하고 보편적인 모티프를 창조적으로 통합하였지만, 표면적으로는 영국의 생활양식과 문화양식들을 계속해서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영국적’ 특성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기업 ‘위너브라더스 사’가 영화를 제작하였지만 조앤 롤링과의 영화화 계약에서 영국적 요소를 철저히 살려둘 것을 목 박았었다. 그래서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과 인물들은 대부분 ‘영국적인 요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영국의 촬영지에서 영국의 배우들이 연기하고 영국식의 영어를 사용하며, 영국의 예절과 명절을 그대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수도인 런던의 모습이 등장하고 영국을 대표하는 2층 버스, 국회의사당, 템즈 강 등이 매 시리즈마다 등장하여 영화 속에서도 보편성 속에서도 전통적이고 교육과 민주주의 등의 이념의 발생지라는 영국의 이미지 역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영국이 가지고 있는 교육과 민주주의 등의 전통적 이미지를 차용하고 할리우드 영화와 차별화된 이미지를 갖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게임(Game)게임 는 영화의 시각적 그래픽으로 구현된 이미지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처음 발매된 게임들은 상호 작용성을 통한 게이머의 즉각적 반응을 만들어 내기 위해 다소 단순화된 그래픽을 사용하였으나, 컴퓨터 기술이 발달하고 소비자들의 컴퓨터 하드웨있다.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DMZ 역사공원 활용방안물음표와 느낌표 사이. 그 거리는 아주 가까우면서도 먼 거리이다. 하나의 의문과 궁금증이 느낌표에 도달하기 까지는 아주 멀고도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어느 순간 번뜩이는 생각을 통해 느낌표에 도달하는 시간을 아주 짧게 변화시킬 수 있다. 물음표 ‘?’(Question mark)를 바로 오른쪽 방향(←)에서 바라보면 느낌표 ‘!’로 보인다는 사실은 신기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간단한 생각이 우리의 분단과 현실에 있어 가장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분단과 평화. 상반되면서도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 같은 이 두 글자는 물음표와 느낌표처럼 대한민국의 깊숙이 자리매김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아래에서, 우리의 꼬리표처럼 남아있는 이 단어를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되며, 통일 국가를 향해서 언제나 정직하게 나아가야 한다. 느낌표로 상징되는 평화와 통일로 방향을 돌려야 하며 그것은 가장 북한과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는 DMZ의 활용 방안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고 있는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는 기다란 분단의 띠를 이루고 있으며, 분단의 높은 장변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비무장지대의 안팎에는 수많은 남북한의 병력이 삼엄하게 대치하고 있고 수많은 초소와 방어진지, 지뢰 등 각종 군사적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민간인의 출입은 전면 통제되어 있고, 남북한 간의 인적, 물적 왕래 또한 차단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비무장지대가 중무장의 지대로 변화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이 때문에 비무장지대는 지난 반세기 동안의 정전체제 하에서 남북대결 및 분단고통의 상징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된 후에도 비무장지대가 계속해서 중무장된 군사적 대결과 충돌의 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비무장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북한간에 공고한 평화가 조성되기는커녕 항시라도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촉발할 위험이 상존하게 된다. 비무장지대에서의 작은 충돌이 어느 일방의 오해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제2의 한국동란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한반도 평화체제 하에서 비무장지대는 군비통제의 가장 중요한 실천대상지역으로 등장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무장지대에서의 진정한 평화조성을 위해서는 비무장지대가 단순히 비무장화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비무장지대가 평화적 이용을 통해 실질적인 평화를 만들어 가는 공간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이 같은 점에 비추어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은 평화를 유지 증진하며 통일을 준비하는 평화조성 사업이 될 뿐 아니라, 남북한 간의 정치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실천과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비무장지대가 평화적으로 활용된다면 상징적 의미 외에도 남·북한간의 화해와 긴장완화, 그리고 평화통일의 여건을 조성하는 실질적 효과를 거양할 수 있다. 이것은 남북한 모두에게 경제적인 측면 뿐 아니라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곳의 개발 및 성장잠재력을 활용한다면 남북한에게 공히 경제적 이들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특히 비무장지대 내의 관광자원을 개발하여 국내 또는 외국 관광객을 유치할 경우 지역주민의 소득증대에 많은 기여를 할 것이다. 또한 평화적 활용이 본격화될 경우 상호 대치하고 있는 군대와 요새가 점차 후방으로 철수 또는 철거될 것임으로, 그에 따른 완충지대의 확장을 통해 군사적 긴장 완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무장지대가 교류 협력의 거점으로 부상하여 자연스럽게 경제, 사회, 문화교류를 촉진시킬 경우 이 지역을 거점으로 남북한 통합(민족공동체 형성)의 시험대로 활용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은 상호 반목과 대립의 남북관계를 본격적으로 화해 협력의 관계로 진입케 하는 시초가 될 수 있고, 한민족의 단일불가분성과 통일 의지, 그리고 무력행사 포기의사를 국제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며, 남북한 주민간의 이질화 방지를 통한 민족의 단일성 확보, 민족 공동체 의식 제고를 기대할 수 있다.구체적인 평화적 이용방안에는 생태계를 공동 조사하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이 있겠지만 이번 주제가 역사 공원인 만큼 역사 공원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역사공원이란 [historic park, 歷史公園]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 등의 보전, 활용을 도모하면서 필요한 수경(修景) 시설이나 편익 시설 등을 정비하여 사람들의 이용을 목적으로 해서 설치되는 도시 공원으로서 평화적 활용방안으로 제일 손 꼽히는 방법이 역사 공원의 형태이다. 역사 공원이라고 해서 ‘역사’에만 초점을 맞추어 박물관이나 전시관만 만들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고 체험하면서 역사를 익힐 수 있는 편익시설 등도 갖추어야만 한다.우리는 우선 남북한간의 합의를 통해 역사공원이 들어설 평화구역을 추진해야 한다. 평화구역의 비무장지대 내 남한 측 지구를 먼저 개발하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선 개발된 남한 측 지구를 제한적인 대 북한 및 대외 개방지역으로 활용하고 여기에 남북한 주민의 인적 교류 및 물자의 교역장소를 마련해야 한다. 평화구역은 통일의 상징으로서 민족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 할 수 있는 다양한 시설을 유치해야 할 것이다.첫째, 남북한간 인적·물적 교류의 창구를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이산가족 만남의 광장, 이산가족상봉 편의시설, 이산가족 정착마을, 남북 상품교역장 또는 남북 경제 교류센터, 통관시설, 경제교류관련 남북한의 관할기관, 물자유통시설, 평화공단’ 등을 유치 조성할 수 있다. 둘째, 민족화합과 민족 고유전통 문화의 계승·창달을 위한 문화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통일광장, 공동경기장 등 체육시설, 공동 집회소, 전시 공연장 및 영화관, 민족박물관, 역사박물관, 야외민속박물관을 건설한다. 셋째, 세계 각지의 한민족이 교류하는 거점공간으로도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한민족교류센터의 설치는 이를 위한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넷째, 남북한간에 학술교류 및 공동연구를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남북한간 학술 및 예술교류를 촉진하기 위한 공동회의장을 설치하고, 비무장지대 생태계연구소, 첨단과학연구소, 민족사회복지연구소 등 연구시설을 설치할 수 있다. 다섯째, 남북한의 청소년들이 자유로이 만나 화합을 이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공동기숙사, 전시공연시설 등 각종 문화 활동시설, 실험실습장, 청소년 수련장, 야영캠프장, 유스호스텔 등을 설치한다. 여섯째, 평화구역은 통일과정 및 통일 이후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모범구역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남북연합의 기구들, 특히 공동사무처를 포함하여 남북회담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시설을 설치한다. 일곱째, 중·장기적으로는 국가간 우호와 선린 증진을 위한 세계평화지역으로도 활용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세계대학, 유엔환경계획 및 유엔개발계획 등 국제기구, 평화기념당 및 국제평화공원, 국제평화기구 등의 시설 설치를 고려할 수 있다.
격동의 시대, 한 남자의 인생이야기영화 감상문영화 ‘인생’은 장예모 감독의 영화로 배우 공리와 게유가 출연한다. 공리의 영화를 본 것이 이번이 네 번째 정도 되는데, 공리와 장예모 감독이 한 영화만 벌써 세 편째이다. 한국에서도 감독과 배우가 계속해서 여러 작품을 함계하면 ‘~누구 사단’ 이라는 애칭도 붙게 되는데, 공리는 ‘장예모 사단’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장예모 감독과 호흡이 잘 맞고 공리가 장예모감독이 원하는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내기 때문이다. 또 매번 공리의 연기에 항상 감탄하면서 영화를 봤었는데,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은 연기력으로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인생’의 줄거리는 제목에도 나오듯이 한 남자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후우꿰이(富貴)(게유 역)’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예쁜 아내(공리 역)와 딸, 그리고 뱃속의 아들까지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박의 수렁에 빠져들어 아내에게 소홀하며 재산만 탕진하고 있었고, 결국 아내는 도박에 빠진 남편을 원망하며 집을 떠나게 된다. 재산을 모두 탕진하여 집마저 다른 집주인에게 넘어가게 되자 그 충격으로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몸져 눕게된다. 정신을 차린 후우꿰이는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도박을 하지 않으며, 작은 집에서 발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런 소식을 듣고 아내는 다시 돌아오게 된다. 돈이 없는 후우꿰이는 자신의 집을 도박으로 가로챈 남자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하지만 남자는 돈을 빌려주지 않고 '그림자 인형극'(파중피영) 세트를 빌려준다. 후우꿰이는 특기를 살려 그림자 인형극단을 만들어서 전국을 다니며 돈벌이를 다니다가 '춘생'이라는 사람과 중국 군인들에게 끌려가 부역을 하기도 하고 중국공산당 군대에 포로로 잡혀 그곳에서 그림자인형극을 군인들에게 공연을 하며 지내게 된다. 몇년이 지난 후에야 아내에게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1950년대가 되자 공산당혁명이 성공하였고, 공산당은 전체마을 주민들을 동원해서 군대에 보낼 쇠를 만드는 작업을 시켰다. 후우꿰이의 아들도 이곳에 동원되여 피곤에 지쳐 학교를 가지 않고 누워있자 그가 직접 나서 학교에 보내게 되는데 위원장의 실수로 차에 깔려 죽어 주검으로 돌아온다. 이에 후우꿰이는 자책을 하고, 위원장이 함께 같이 부역생활을 하던 ‘춘생’이란것을 알고 더 괴로워한다. 세월은 다시 흘러 1960년대 문화혁명기. 딸은 젊은 노동자에게 시집보내고 임신한 딸이 출산이 임박하게 된다. 하지만 문화혁명으로 인해 당시 모든 권위 있는 의사들은 ‘반동학술분자’로 규정되어 감옥으로 가있는 상태였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 학생 의사들이 후우꿰이의 딸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도 못했고 딸은 죽게 된다. 다시 세월이 흘러 딸이 낳은 아들이 부부에게 큰 웃음과 희망이 되고 아들과 딸의 죽음이 자신때문이라는 후우꿰이를 아내는 다 지난일, 과거의 일이라며 토닥인다. 그리고 손주에게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며 끝이 난다.
문화의 영혼이 담겨있는 도자기(CHINA)-중국 청화자기를 중심으로목차Ⅰ. 들어가며Ⅱ. 청화자기Ⅲ. 元代 청화자기Ⅳ. 明代 청화자기Ⅴ. 靑代 청화자기Ⅵ. 나오며※ 참고문헌Ⅰ. 들어가며도자기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 불, 공기 등과 같은 것으로 자연과 인간의 의식주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특히 동양에서 그릇은 음양오행의 모든 이치가 포함되어 있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제작 기술을 가지고 있던 나라가 바로 중국이었으며, 18세기 말 유럽에서 신기술에 의한 고강도 채색자기가 나오기 전까지 기술적으로 중국 도자기에 도전할 수 있는 그릇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비하고 신기로운 중국의 도자기를 ‘CHINA’라고 불렀으며 이는 중국 국가명이 되었다.Ⅱ. 청화자기그 중에서도 본고에서는 중국의 ‘청화자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해보고자 한다. 중국의 도자기 가운데 생산량이 가장 많고 널리 사용되며 대표적인 기물은 청화자기이다. 청화자기는 결백하고 흠이 없는 배체와 영롱하고 투명한 유색과 그윽하고 아름다운 청화 및 다양하고 화려한 장식문양으로 이우어진 예술품이다. 역사적으로 광요자기와 민요자기로 길을 나누어 각자의 멋을 지닌 채 발전해왔다.청화자기의 태동을 살펴보자면 송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960년, 조광윤이 송나라를 개국한 이래로 경제가 매우 발달하였다. 상업이 발달하니 상업적으로 인기가 높던 수공업품 생산에서도 효율적인 관리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수공업품들이 송 시기에 들어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수공업품이 도자기였다. 송 시대에 들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정신적 유희를 즐기는 사대부 집단이 늘어나면서 도자기 예술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도시 문화가 발달하면서 요식업, 특히 차 문화가 발달했고 이에 따라 그릇 소비도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여러 고객의 심미안과 수요를 충족시키는 도자기가 다양하게 생산되었는데,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청민요와 유사해졌다. 즉 시장 원리에 따라 가변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 후기의 도자기 산업 관리는 이처럼 관요 개념 없이 전체적으로 민요화했다는 것이 특징이다.-코발트원대에 들어 징더전의 백자 생산량은 한 층 많아졌다. 전통적으로 흰색을 숭상하는 몽골인들이 백자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한 남송 말부터 원 초기에 일반 자석에 고령토를 배하바는 이원배합법을 사용해 흙의 질을 높이자, 대형 기물을 비롯해 종이처럼 얇은 성형도 가능해졌다. 지배층의 취향 변화와 기술 발전은 백자 생산을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1300℃에서도 견디는 안료에는 철, 동, 코발트가 있다. 나머지 채색 안료는 높은 온도에서 견디지 못한다. 이중 도자기 장식에 맨 처음 철을 사용한 이유는 철이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은 잘못 구우면 검게 타는 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대안으로 사용한 것이 바로 코발트다. 코발트 장식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 언제쯤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출토된 기물을 바탕으로 하면 1340년 이전에는 성숙된 청화자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추측 단서가 되었다. 코발트는 안정성과 빛깔이 가장 좋으며 온도가 높을수록 청색 빛깔이 화려하게 살아난다는 장점이 있다. 이처럼 가장 좋은 회화 재료인 코발트가 가장 늦게 도자기 장식에 도입된 이유는 코발트의 생산지가 서아시아였기 때문이다. 중국 내에서도 일부 생산되기는 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질과 색이 탁했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했다. 반면 이슬람 지역에서 수입한 코발트 안료는 색이 짙고 아름다워 회화 장식 재료로 일품이었다. 14세기 중반에 등장한 청화자기로 징던전은 이후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도자기요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원 청화자기의 특징원 청화자기의 장식 방법은 크게 주 문양과 보조 문양으로 나뉜다. 기물 가운데 주 문양을 배치하고 그 주위로 보조 문양을 그려 넣는 것이 기본 방식이다. 그러나 단지 주 문양과 보조 문양만으로는 원 청화의 특징이라 하기 힘들다. 원여전히 주변 국가에서 구하고 싶어 하는 물건이었지만, 돈을 주어도 쉽게 사기 힘든 사치품이 되어버렸다. 송-원대와 달리 같은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외교 관계상 국가의 지위가 일정 수준까지 올라가야 가능한 일이었으며, 원하는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밀무역이라는 비공식 경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도자기 구입 비용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다.중국 중심 세계관이 물씬 풍기는 조공 무역은 결국 대등한 교역을 원하는 상대국들로부터 불만을 샀고, 이로 인해 발생한 전란으로 차름 한계에 부딪쳤다. 그러나 강력한 황제중심주의를 표방하던 명이 조공 무역을 포기하는 것은 자존심 문제를 넘어 체제 유지를 위한 정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이었기에 절대 쉽게 개방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조공 무역이 무너지면 자연히 상인층이 증가하고 사회가 복잡해서 명이 우너하는 농경 중심 국가를 유지할 수 없었다.그러나 명 정부도 흐름을 막아내진 못했다. 융경제에 이르러 명 정부는 중국인이 해외로 나가 무역하는 것을 승인했고, 마카오, 필리핀 등지에 일본인과 서양인들이 중국 상품, 특히 도자기를 교역 할 수 있는 시장이 열렸다. 그러다 만력 시기가 지나 청화자기가 대거 수출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02년부터 1683년 사이에 수입한 중국 도자기가 무려 6000만 점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중앙 정부에서 무역량을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초에 관요 제도가 무너지면서 중국 도자기 시장의 최고 고객이던 황실이 사라지긴 했지만, 수출이 활발해지자 도자기 산업은 외국 시장에 맞추어 청까지 전성기를 이어갔다.-영락 선덕 시대 청화자기명 태조 홍무제 시기부터 징더전에는 어자국(御瓷局)이 설치되어 황실에 필요한 도자기를 충당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청화자기는 양이 적었고 이전에 비해 오히려 유리홍이라 불리는 동(銅) 안료 장식 자기가 많이 생산되었다. 이는 당시 청화 안료의 주성분인 서아시아의 코발트 수입이 막혔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한다. 영락에 중국 내 코발트로 이용해 만든 청화를 평등청이라 부른다. 색감은 선덕에 비해 옅은 대신, 발색이 깨끗하고 묘사가 섬세하다는 장점을 보였다. 이처럼 성화 시대 이후 도자기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중국산 코발트는 이후 청화자기를 더욱 널리 보급시키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자기 장식은 용, 봉황, 해수, 화조, 송, 죽, 매 등 이전부터 계속되던 양식뿐만 아니라 범어, 팔보, 동자 등이 주 문양으로 등장하는 것이 특이하다. 성화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그림 양식이 이전과 달리 상당히 섬세해지며 명암 처리도 능숙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분수기법이 등장하면서 함께 이루어진 기술적 진보였다. 청화를 바르는 붓이 발달하면서 나타나는 기법이었다. 이전 붓은 안료를 충분히 흡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 붓을 댄 부위는 청화 빛이 진하나 갈수록 연해졌다. 그럴 때마다 다시 청화를 묻혀 그림을 그리는데 이렇 되면 결국 전체적으로 짙고 옅음이 교차해 얼룩덜룩해지는 현상이 생겼다. 반면 물기를 많이 흡수하는 큰 붓이 발달하면서 한 번에 안료를 충분히 머금을 수 있게 되자, 이를 이용해 동일한 색채로도 농담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 기법과 그 결과는 한층 수묵화 기법에 가까워졌다.[분수기법] 당시에 쓰인 분수기법은 그림의 테두리를 우선 짙은 청화로 그린 뒤, 물로 농담을 조절 해 옅은 색으로 안쪽을 채워 넣는 방식이었다. 단번에 색감을 채워 넣으므로 붓의 흔적이 남지 않아 더욱 깔끔하고 선명했다. 그러나 성화시대까지는 기술이 완전하지 않아 여전히 청화 부분이 짙게 뭉치거나 테두리선이 너무 옅어서 안을 메운 색과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히우 성화 시대에 등장한 분수기법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청화 농담 기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점차 세밀한 회화 기술이 발전하면서 태토와 유약도 진보했다. 특히 성화 시대의 관요는 유약 층이 윤택하고 투명해 청화 장식이 물가에 낀 듯 아스라한 느낌을 주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기법 등장으로 후대에는 성화 시대 관요를 선덕과 더불어 명 시대 최고충하기도 했다. 이처럼 관요 생산이 증가하면서 민요까지 관요 제작에 참가하게 된 것을 관탑민소(官搭民燒)라 한다. 당시 민요의 질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으며 관요와 합동함으로써 발전 속도에도 더욱 가속이 붙기 시작했음을 말하는 것이다.청화는 회청을 사용했으며 청화의 자색이 더욱 짙어지면서 발색이 화려해졌다. 여전히 석자청을 배합해 사용했는데, 석자청을 두 가지 비율로 달리 배합해 진한 색과 옅은 색을 구분한 뒤 진한 색은 장식의 테두리를 그릴 때, 옅은 색은 테두리 안을 칠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만큼 배합 기술도 발전한 것이다. 유약은 투명하며 태토 역시 정제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주요 장식으로는 용, 봉황, 꽃 등 기존 문양뿐 아니라 어린이, 신선, 팔궤, 양, 학 사슴 등이 이전에 비해 자주 등장했다. 이는 도교에 빠져든 가정제의 취향에 따라 새로운 장식을 구성한 듯 하다.-만력 시대 청화자기만력 시기는 관요 대량 생산과 더불어 민요 생산으로 명대 중 청화자기를 가장 많이 제작한 시기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관요의 질과 기형은 훨씬 격이 떨어졌다. 무절제한 생산 때문에 마창토(馬倉土)라 불리는 고급 흙이 고갈되었으며, 새로 질 좋은 원료를 찾는 동안 흙의 질은 계속해서 저하되었다. 청화 장식에는 회청료가 만력 중기 이후부터 사라지고 중국 저장성에서 생산되는 절료 및 석자청을 사용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전반기에는 자색이 짙은 남색 자기가 생산되지만, 후반기에는 회색이 많이 보이거나 발색이 어두워졌다.기형도 무척 다양하나 형태가 일그러지거나 크기와 모양이 일정치 않아 규정 없이 생산된 듯 보이는 관요도 눈에 띈다. 유교 국가에서 기준이 되어야 할 관요 자기가 이러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은 국정 체제가 혼란스럽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력 당시 관요는 더 이상 유교 체제의 기준이 되는 기물로써의 역할이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상업 흐름에 따라 운영되는 민요는 눈부시게 발전했다.만력시대가 되자 중국 청화자기는 중국 내 시장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직접다.
WAR IS OVER-존 레논(John Lennon)의 사상가적 면모를 중심으로목차1. 들어가며2. 존 레논의 생애3. 존 레논의 사상4. 나가며1. 들어가며존 레논(John Lennon, 1940.10.9.~1980.12.8.), 그는 서구 60년대의 가장 뚜렷한 ‘현상’이었던 비틀스의 주역이자, 대중음악사에 존재하는 수많은 뮤지션 중 한사람이었다. 또한 ‘오노 요코’라는 한 여자의 남편이었으며, 정치 사회적 제반 문제를 강도 높은 톤으로 노래하고, 한때는 일선 투쟁에까지 가담한 ‘투사’였다. 이 외에도 「'In His Own Life」라는 에세이로 베스트셀러 톱을 기록하며 소설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영화 출연자로서, 전시회나 다큐멘터리 디렉터로서의 재능을 보여준 다재다능한 남자였다. 이번 글에서는 존 레논의 비틀즈 탈퇴 이후 성립되는 반전운동가로서의 모습과 그의 사상적 면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2. 존 레논의 생애존 레논은 2차 세계대전이 극치에 달하던 1940년 10월 9일 영국의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줄리아는 존 레논이 17세 되던 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평생을 ‘마더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될 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환경은 존 레논에게 남들과는 많이 다른 성격을 형성해 주게 되는데 레논은 “부모님이 없었기에 좌절도 했지만, 부모님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남보다 빨리 터득했다.” 라며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하기보다는 반항적인 태도를 길러갔다.쿼리뱅크 고등학교에 다니던 1957년, 존 레논은 자신을 리더로 한 쿼리맨 밴드를 만들었다. 그 후 그들은 이름을 비틀스로 바꾼 후 데뷔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비틀스는 1960년대 내내 대중음악과 청년 문화를 주도하면서 시대를 대변했다.비틀스 해체 후 존 레논은 성공적인 음악활동 이외에 신 좌파운동과 민권운동 등에 깊이 참여하는 등 행동하는 뮤지션으로의 삶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그는 5년만의 재기앨범을 발표한 1980년 12월 8 일, 한 광적인 팬의 총을 맞고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살인 동기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3. 존 레논의 사상적 경향①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무종교주의비틀스 시절을 계기로 1960년대 후반 존 레논에게 대중음악은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 인기 창출의 수단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꿰뚫고 그 인식을 전달하는 미디어로 파악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3인칭 대중 소설 쓰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고 사회적 사고를 전달하는 1인칭 다큐멘터리를 쓰기 시작했다. 1968년 그는 '혁명(Revolution)'이란 제목의 노래를 싱글로 발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곡은 존 레논의 사실주의적, 정치적인 노래쓰기의 신호탄을 올렸다.“혁명을 원한다고들 하지. 그래, 우리 모두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지…. 그러나 당신들이 파괴에 관하여 얘기할 때 나를 제외시키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요. 헌법을 개정할 거라고들 하죠. 예, 우리는 머리를 변화시키길 바라죠.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들 하죠. 대신 정신 상태를 해방시켜야 할 거예요. 모택동의 사진을 들고 나선다면 여하튼 누구와도 성과를 얻지 못할 겁니다.”미국과 영국 전역에 민주화 투쟁, 반전 운동으로 시위와 집회가 들끓기 시작하던 그 당시 존 레논은 과격한 행동주의 노선에 앞서 '정신 개조'와 '의식혁명'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의 풍조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의식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얘기다. 그 무렵 존 레논은 자신이 양친 없이 이모 밑에서 자란 불우한 유년기를 비롯하여, 자신이 겪게 된 불행의 근본적 원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있다고 자각한 상태였다.이러한 존재 규명을 토대로 그는 비틀스 해산 후 자신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1971년도 음반 의 수록곡 '어머니(Mother)'에서 존 레논은 '어머니 가지 말아요, 아버지 돌아오세요.'라고 광기서린 듯 절규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토해 내고는 곧바로 '노동 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이란 곡에서는 전투 의지를 다지는 현재의 변모된 자신을 펼쳐 보인다.존 레논은 무차별로 법, 종교, 도덕 등 자본주의의 이념적 베일을 들추어 그 실체를 통렬히 고발하면서 개량과 개혁을 넘어서는 혁명을 부르짖는다. 의식 혁명의 단계를 뛰어넘어 이제는 실천과 투쟁의 시점으로 진입해야함을 느낀다. 노래로써 그가 내세운 테마는 '사랑과 평화'(Love and Peace)로 포장되었다.특히, 와 곧이어 공개된 은 그의 사상이 압축된 노래이자 뉴레프트들의 찬송가처럼 여겨지며 큰 인기를 끌었다.② 휴머니즘존 레논의 노래는 그 이념성, 급진성, 그리고 묘사의 대담성으로 인해 방송 금지라는 억압이 유달리 자주 가해졌다. 심지어 '어머니' 같은 곡은 너무 광기를 띠고 있다는 이유로 발표 당시 일부 방송국에서 금지 지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 이후 존 레논의 이미지는 크게 바뀌고 있었다. 이 무렵 내놓은 음반 나 에서 나타나듯 투사적 대열에서 극단적 퇴각을 시사, 민주화 투쟁에 지친 모습을 군데군데 노출시키고 음악적 주장은 자취를 감춘 채 공허한 사랑타령을 해대기도 한다. 그의 새 모습은 '바퀴를 바라보며(Watching the Wheels)'라는 곡에는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난 그저 여기 앉아 바퀴가 굴러가는 것만을 응시할 테야. 난 정말 그것이 굴러가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워. 더 이상 회전목마는 타지 않을 테야. 굴러가도록 내버려둘 거야.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내게 질문하지. 난 문제는 전연 없고 해결만이 있다고 말하지. 그러면 그들은 마치 내가 이성을 잃었다는 듯 고개를 젓지. 난 서두를 것 없다고 말하지. 난 단지 여기 앉아 시간을 즐길 뿐이야.'그 전과는 달리 참으로 많이 변절된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이 두 앨범은 부인 요코와 별거중일 때 출반되어 절망과 공허감이 상당 부분 작용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의 급진성에 매료된 팬들에게는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존 레논 자신은 자본주의사회의 부르주아로 살아가지만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급선회 한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른바 같이 ‘투사’의 길을 걷던 이들이 변절하는 되먹지않은 허위의식에 배신감을 느낀 것도 부분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사회개혁은 사회주의처럼 다 부시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인간적인 것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가정을 돌아보게 된다. 물론 이론적으로 완벽하다 할 수 없는 피상적인 이데올로기이지만, 가장 추악할 수도 있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인 인간을 사랑 하자는 그의 목소리는 소중한 것이다.5. 결론존 레논, 그는 결코 완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너무 많은 문제점을 지닌 채 살다 간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존 레논의 훌륭함은 그가 결코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적당한 타협과 응석을 용납하지 않는 완고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완고함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서가 아니라 순진함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의 관념과 신념이 세상의 상식이란 것에 대해 회의했다는 점, 즉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자세에 입각한 성실한 완고함이었다. 짓궂은 언행이나 상식을 벗어난 행동도, 그 자신이 말하는 편집광적 증세도, 모두 이 소박한 자기갈등 속에서 파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