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역사가 숨쉬는 곳을 다녀와서#1. 경기전을 선택하게 된 이유전주대에 입학하고 난 뒤 1학년 때 이후로 경기전에 온 적이 없었다. 내가 전주대학교에 07년에 왔지만 정작 전주의 유적지나 문화재에 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기에 처음에 이 과제를 매우 어렵게 생각했었다. 전주에 유적지라고 부를 만한 것이 무엇이 있나 할 정도로 나는 전주에 무관심해 있었던 것이다.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미술관이나 전주국제영화재 문화재를 선택해야만 했는데 차를 타고 객사를 가던 중, 오른쪽으로 우연히 고개를 돌렸을 때 '경기전'을 보았다. 풍남문을 지나 중앙시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경기전을 보았을 때 나는 처음 경기전을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더 깔끔하고 넓어진 태조로를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렇게 가까운 곳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이럴 때 쓰는 말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와 같이 수업을 듣는 형과 동생은 경기전을 찾게 되었다.#2. 경기전은우선 경기전에 대한 사전 지식을 알아보면경기전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豊南洞)에 있는 조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으로서 사적 제339호이다.경기전은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태종 10년(1410년)에 창건하였다. 경역은 태조의 영정 보물 931)을 봉안한 경기전과 그의 22대조이며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肇慶廟)로 나뉜다. 이곳에 봉안한 영정은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으로 아산과 묘향산, 적상산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전란이 끝난 후 전주 사고의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유일하게 보존되어진 것이며 현존하는 것은 1614년(광해군6)에 중건한 것이다. 또 1771년(영조 47)에는 조경묘를 세워 이한 부부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경기전 정전은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 및 갑석(甲石)으로 이루어진 춤 높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多包系) 형식의 맞배집이다. 그 전면에 바로 붙여 춤이 약간 낮은 기단을 정전 기단과 접속시켜 앞으로 돌출시키고 그 위에 첨각(添閣)을 두어 마치 능침(陵寢)의 장자각(丁字閣)과 같은 평면을 하였다. 이 첨각 기단의 동 서 남면에는 각 1개씩 계단을 두어 벽돌을 깐 보도와 연결하였다.이곳에 남아 있는 경기전 조경묘 도형의 그림을 보면 지금은 없어진 부속건물들과 별전이 있고, 서남쪽에 전사청(典祀廳) 동재 서재 수복방 제기고 등과 북동쪽에는 별전과 조산(造山)을 만드는 등 광범위한 것이었다. 현재 보관되고 있는 영정은 고종9년(1872년)에 새로 모사한 것이며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931호로 지정된 것이다. 경내에는 전주이씨 시조와 시조비의 위패가 모셔진 조경묘가 있으며 전주사고(조선왕조실록보관소)와 예종대왕태실비가 있다.이제 경기전의 내부를 살펴보도록 하자.홍살문을 지나 걸어 들어가면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모셔진 본전에 닿게 된다. 본전에는 태조의 영정과 함께 어진(御眞)을 옮기거나 봉안할 때 사용했던 신연(神輦)과 향정(香亭), 고관의 행차시 사용하던 가교(駕轎) 그리고 옥교(玉轎) 등을 볼 수 있다. 전을 나와 왼편으로 돌아가면 전주사고(全州史庫)이다. 시원하면서도 울창한 대나무 숲과 넓은 정원이 잘 어울리는 이곳에는 마당 한 가운데에 '조선왕조실록 보전 기념비'와 석등이 있다. 그리고 한 귀퉁이로 조금 치우쳐 있는 건물이 바로 전주사고이다. 전주 사고를 보는 순간 지난 수업시간에 보았던 역사 스페셜이 생각났다. 조선왕조실록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조상님들의 노력과 역사 속에서 떳떳할 수 있었던 그 올곧은 선비 정신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전주사고는 춘추관과 충주사고 그리고 성주사고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세종21년(1449)에 설치되었다. 선조25년(1592)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와 실록은 모두 소실되었고 전주사고의 실록은 안의, 손홍록 등 이 지역의 선비들이 내장산으로 옮겨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실록각이 소실된 것을 1991년에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또 하나의 문을 넘어서면 예종대왕 태실(胎室)과 비(碑)가 나타난다. 원래는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있던 것을 이곳 경기전 경내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리고 뒤편으로 걸어가면 조경묘(지방유형문화제 제16호)이다.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 공과 시조비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영조47년(1771)에 창건되었다. 현재는 이곳의 문이 잠겨있어 안을 볼 수는 없다.#3. 조선왕조의 창시자 태조 이성계경기전은 조선 왕조의 창시자인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의건국자로 이름은 성계, 호는 송헌이다. 화령부(和寧府: 함경도 영흥)출생으로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정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고,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하였으며,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났다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 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크게 활약함으로써 점차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 (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잡아 죽였으며,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으며,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을 주살하였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끝내 회군을 단행하였다.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됨으로써 정치적 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 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高麗)'라 칭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를 것임을 선언하였으나,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우선, 명나라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 1393년(태조 2)3월 15일부터 새 국호를 쓰기로 하였다. 다음에는 새 수도의 건설이 필요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王師) 무학(無學:自超)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후에 세자책립문제로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방원(芳遠: 신의왕후 소생)의 불만은 대단하였다.1398년 태조의 와병 중에 방원은 세자인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남은(南誾)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병을 동원, 그들을 살해하였으며, 곧이어 방석, 방번(芳蕃)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방원의 요청에 의하여 방과(芳果)로 결정하였다. 태조는 방석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은 데 대해서 몹시 상심하였다. 그는 곧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종 2)에 방원이 세자로 책립, 곧 이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은 대단히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逍遙山)과 함주(咸州:지금의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특히, 함주에 있었을 때에 태종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差使)를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조의 태종에 대한 증오심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태종 2)12월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佛道)에 정진하였다. 덕안전(德安殿)을 새로 지어 정사(精舍)로 삼고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1408년 5월 24일 창덕궁(昌德宮) 별전(別殿)에서 죽었다. 시호는 지인계운성문 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 神武大王)이고,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며, 능은 건원릉(健元陵: 현재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인창리)이다.#4. 전주 이씨의 뿌리를 찾아전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 때 사공을 지낸 이한이다. 태조 이성계는 시조로부터 21대손이다. 그러나 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 이전의 사적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전주 이씨의 분파는 122파로써 거의가 왕자대군(적자)과 왕자군(서자)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수 있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이안사의 상계에서 갈라진 파, 안사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태조의 후손분파는(고종이전까지) 일반적으로 99파(25대군, 74군)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미혼으로 죽었거나 후사가 없는 대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조선의 왕권은 전주이씨인 왕족을 주축으로 하고 왕대비, 왕비, 왕세자비의 동성친과 이성친,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 유지되어왔다. 오늘날 전주이씨의 후예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측에서는 대략 20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100여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가 으뜸이고 광령대군파, 덕천군파, 밀성군파, 양녕대군파 등이다. 이 가문 출신으로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비롯하여 전 국회의장인 이기붕, 전 국무총리 이범석 등이 있으며 현재 한나라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도 전주 이씨를 빛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