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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희제
    강희제-조나단 스펜서가 지은 「강희제」는 역사 속의 황제로서 강희제를 조망하기보다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강희제를 바라보고 있다. 특히 시점을 1인칭으로 잡아서 강희제의 일기를 보는듯한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1인칭 시점이기 때문에 더욱 강희제의 인간적인 면모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그의 내면세계를 바로 옆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책은 대략 8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으로 ‘강희제의 치세’가 있고, 그 다음 본론으로 1장~6장까지 6부분이 있다. 마지막에는 부록으로 강희제가 직접 보낸 편지와 그의 유조가 나온다. 사실 책의 첫 부분인 ‘강희제의 치세’만 읽어도 책이 어떤 내용인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서론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작가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파멜라 크로슬리가 지은 「The Manchus」에서는 황제로서 강희제가 무엇을 했는지, 정치적 사건 위주로 그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는 「강희제」에 나오는 강희제의 인간적인 면과 사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또한 「The Manchus」에 나오는 강희제의 업적을 살펴보고, 「강희제」를 통해 알게 된 그의 성격이나 가치관으로 강희제의 정치적 행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보는 시도를 할 것이다. 우선 「강희제」의 내용을 간략하게 알아본다.1장에서는 강희제가 사냥하는 이야기와 갈단을 정벌하는 원정 이야기가 나온다. 강희제는 사냥을 굉장히 좋아한 듯하다. 또한 그는 사냥을 훈련의 일종으로 생각하였다. 말 타기와 활 솜씨, 조직력을 시험해보는 간접적인 수단으로 이용했다. 사냥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나갈 때에는 실전처럼 막사를 치고 행군을 하였다. 동시에 여기서는 병사와 백성, 말을 생각하는 강희제의 자비로운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강희제는 1696년에 본인이 직접 갈단을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다. 강희제는 갈단 원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마침내 갈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기뻐하였다.2장 다스림에서는 황제의 거대한 권력에 대한 강희제의 고찰이 엿보인다. 강희제는 자신이 쥐고 있는 권력의 무게를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생명을 소중히 여겨서 죄를 지었다고 해서 섣불리 죽이지 않았다. 사형도 통치의 한 가지 방법인 만큼 죄를 지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하고 사형을 사용하였다. 이 장에서는 관료에 대한 강희제의 입장도 알 수 있다. 지방관(순무)이나 파당에 대한 강희제의 철학을 알 수 있었다. 강희제는 인(仁)에 입각한 정치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3장에서는 강희제의 개방적이면서도 엄격한 성격을 알 수 있다. 강희제는 배우는 것을 좋아했고 실증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했다. 그는 서양의 문물과 기술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가 없었다. 받아들일 만한 것은 받아들이고 제국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것에는 엄격하게 반대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 점은 예수회 선교사 문제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강희제는 종교에 대해서 다양성을 존중했는데 기독교에서 강압적인 입장을 표하자 그에 반대하였다.4장은 강희제와 관료들의 건강에 관한 내용이다. 강희제는 장수한 황제이다. 그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불로장생의 비방 같은 미신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관료들도 함께 늙어갔고 강희제는 그런 관료들에게 많은 신경을 써주었다. 또 할머니께도 각별한 관심을 쏟는 효성스러운 모습도 보여준다.5장에서는 강희제가 황자들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가 나온다. 강희제의 첫 황태자는 둘째아들 인렁이었다. 인렁은 어릴 적부터 강희제가 손수 키웠는데도 불구하고 사고도 많이 치고 정신병적 증세를 보인다. 파당과 엮인 여러 일을 겪고 강희제는 인렁을 폐위시키고 다시 복귀시킨다. 인렁뿐만 아니라 다른 아들들 때문에도 강희제는 마음고생을 많이 한다. 결국 인렁을 폐위시킨 후에는 넷째 인전을 황태자로 봉한다.마지막장에서는 강희제가 죽기 훨씬 전부터 준비해온 유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더불어 황제의 크나큰 노고를 언급하며 편안한 죽음을 원하고 있다.부록으로는 강희제가 태감 구원싱에게 보낸 편지와 강희제가 죽고 난 후 발표된 유조가 있다. 구원싱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강희제의 일상이 세세하게 적혀 있다. 강희제는 편지를 통해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 가족의 안부를 묻기도 한다. 그리고 강희제의 유조는 그 전에 기록된 상유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후대에 남은 관료와 새 황제가 전대의 황제를 생각하며 발표한 것이라서 그런지 조금 더 다듬어진 느낌이다.「강희제」에 나오는 강희제의 가치관과 성품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 강희제는 백성과 관료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이는 사냥과 다스림, 장수 편에서 잘 알 수 있다. 강희제는 사냥을 나가면서 사냥 도중에 백성이 다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원정 중에도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각별히 노력한다. 다스림 편에서는 특히 그러한 가치관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강희제는 지방관을 부임시키면서 쓸데없는 격식을 차리지 말고 일을 잘해서 백성에게 진심으로 사랑받기를 권한다. 강희제는 백성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이 백성에게 잘 전해지는 것을 방해하는 부패의 무리들을 싫어했다. 강희제는 부패한 관리를 확실히 싫어했지만 자신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능력 있는 관리들은 소중히 여겼다. 장수 편에서는 관료들에 대한 강희제의 마음이 드러난다. 황제는 그들의 나이를 고려하여 편안하게 업무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몸이 불편하면 약을 내리거나 태의를 보내서 도와주었다.강희제는 또 상당히 개방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강희제와 서양과의 관계를 보면 이 역시 쉽게 알 수 있다. 강희제는 우선 편견을 배제하고 의견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의견을 다 들어본 후에 이성적으로 사고하여 문제가 있다면 받아들이지 않고 효율적이라 판단하면 수용하였다. 이에 대한 예를 든다면 불로장생의 미신에 관한 그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강희제는 그런 떠돌아다니는 비방이라도 다 들어본 후에 이성적으로 반박하고 믿지 않았다. 강희제의 수용적인 면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종교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 잘 보인다. 그가 각 민족마다 종교의 자유와 문화를 인정해야 한다며 강압적인 종교에 대해 비판한 점은 매우 인상 깊었다.책을 읽으면서 강희제의 통치 스타일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중요시 여겼지만 무엇보다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삼번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진압이 잘 끝난 후에도 왜 미리 난을 예방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사형 제도도 예방의 측면에서 사용했다.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백성의 도덕성이 높아지고, 범죄가 줄어들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진다는 생각이 있은 후에야 사형을 실제로 집행하였다. 사형을 신중하게 집행한 것은 정치적인 목적도 있지만 강희제의 성격에도 기인한다. 강희제는 사람을 쉽사리 해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강희제의 사적인 부분으로 넘어가면 상당히 흥미로웠다. 내가 17~18세기 중국의 경제적 상황은 잘 몰라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강희제는 황제치고는 상당히 소박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말린 참외를 황실에 선물로 보내는 장면이었다. 그 당시에 참외가 귀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국의 황제라는 사람이 말린 참외가 맛있다며 집에 보내면서, 심지어 어떻게 먹는지 방법까지 써서 보내주는 모습이 상당히 재밌었다. 또한 그런 정성이 보기에 좋았다. 그는 가족에게도 충실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특히 할머니의 병간호를 하느라 할 일도 많은 사람이 며칠씩 밤을 새는 장면은 감동 그 자체였다. 다만 아들들에 대해서는 훗날 황제가 될 후보였기 때문에 자상한 모습보다는 엄격한 모습이 더 많이 보였다. 그래도 아들들이 속을 썩여서 고생하는 모습이 황제보다는 아버지의 느낌이 많이 났다.스펜서가 얘기하는 강희제는 크로슬리의 책에서 나오는 강희제와 초점이 다르다. 아마 이는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스펜서는 강희제 개인을 대상으로 인간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반면, 크로슬리는 만주족 전체의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황제로서 강희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작가가 본 강희제의 모습에서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The Manchus」에 나오는 강희제를 간단하게 살펴본다.「The Manchus」에서 강희제는 제국을 발전시킨 황제로 묘사된다.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후, 섭정의 반란 기도를 겪으며 남들을 의심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황제는 어릴 적 천연두를 앓고도 살아남은 후 강인한 체력과 지성, 통찰력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만주족의 한화에 대해 우려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한족의 문화에 대한 거부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강희제의 개방성 때문일 것이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관대했던 황제가 한족의 문화에 대해서만 배타적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즉위 당시 전쟁과 반란으로 불안한 재정과 인구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강희제는 삼번의 난과 갈단의 반란을 겪었다. 여기서 황제는 자신의 독재 체제에 대항하는 존재라면 누구에게나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특히 제국의 발전에 대해서는 강희제의 개인적인 자질이 큰 영향을 미쳤다.
    독후감/창작| 2011.11.11| 4페이지| 1,000원| 조회(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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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건제란 무엇인가
    봉건제의 의미와西周의 봉건제---------서론봉건제(封建制, feudalism)는 무엇인가? 봉건제는 그 의미를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봉건제라는 개념이 봉건사회로 추정되는 시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데다가, 전형적인 봉건사회라고 할 수 있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feudalism이라는 어휘는 서양에서 먼저 만들어져서 연구가 되었던 개념이기 때문에 그 개념의 구현이 서양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구가 거듭되며 세계 역사의 많은 사회들에 그 개념이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봉건제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해졌다. 봉건제는 하나의 특정한 통치제도를 기술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여러 제도에 관한 일반적 범주를 기술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봉건제에 접근하였다. 학자들은 경제, 정치, 사회 등 다양한 관점에서 봉건제를 바라보고 어떤 사회가 봉건제 사회인지 연구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특히 역사에서 봉건제가 무엇인지, 정치적인 해석에 집중하여 논의해보도록 하겠다.이 글의 또 다른 주제는 바로 서주(西周)의 봉건제에 관한 것이다. 봉건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중국 역사에서도 봉건제를 찾아냈다. 서주가 봉건제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서주의 봉건제는 어떤 양상을 보이는지 논의해 볼 것이다. 더불어 비교적 봉건제의 전형으로 불릴 수 있는 유럽과 일본의 봉건제와 서주의 봉건제를 비교하여 서주에서 나타난 봉건제에 대해서 알아보겠다.본론역사에서 봉건제는 무엇인가?봉건제라는 개념이 처음 쓰이게 된 것은 17세기 서양에서였다. 그 당시 봉건제는 종신의 주군에 대한 군사적 봉사제도와 이러한 군사적 봉사에 대한 보수로써 지급된 토지의 보유에 관한 법적 제도를 의미하였다. 여기서 토지를 지급한다는 것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이나 용익권과 같이 토지에 속한 많은 권리들 중의 일부를 일시적으로, 조건부로 지급하는 것을 말했다. 봉건제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법제사적 해석이라고 하는데 이는 봉건제의 개념이 확대되어 가면서 편협함이 지적되었용하기 위해서는 좀 더 포괄적인 정의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봉건제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이다. 여기서는 봉건제를 왕정이나 공화정과 같은 통치 방식의 하나로 생각한다. 봉건제의 통치 방식에 주목하는 이 관점에서는 경제적 측면이나 군사적 측면보다도 지방 분권이라는 정치 구조를 봉건제의 핵심요소로 파악한다. 봉건제에서 일어나는 지방 분권의 구조는 주군과 종신의 사적 계약 관계를 기초로 한다. 정치적 권력은 주군의 사유물로써 배분이 가능한 것이다. 주군은 종신의 충성과 군사적 봉사를 대가로 토지(봉토)와 토지에 소속된 권리들을 하사한다. 그러면 종신은 주군에게 받은 토지를 다스리며 그 토지의 주민에 대해서 왕의 권리를 행사한다. 자신이 받은 토지의 주민에 대한 종신의 권력은 지역마다 양상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행정·사법·군사적 권력을 모두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주군과 종신의 사적 계약과 군사적 봉사에 대한 토지 부여, 이 두 가지 요소가 봉건제의 핵심인 것이다.봉건제에는 위에서 서술한 두 가지 요소 외에도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이를테면 영주와 농민의 관계라든가, 경제적 생산 양식, 사회 계층의 구성 같이 세계 여러 사례에서 어느 정도 보편성을 보이는 특징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들을 봉건제의 전형으로 확립할 수는 없으며 그저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사례들로 인식해야 한다. 특정 지역만의 특징으로 봉건제를 정의할 경우 봉건제의 적용 범위가 심하게 축소되기 때문이다.유럽의 봉건제유럽은 봉건제에 대해서 가장 처음 논의가 시작된 곳이다. 그만큼 유럽의 봉건제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되어 있다. 여기서는 유럽 봉건제의 생성 과정과 정치적 측면, 경제적 측면과 진행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겠다.유럽의 봉건제는 6세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했다. 프랑크와 롬바르드 시대부터 많은 자유민이 더 강하고 부유한 이에게 군사적 봉사를 바치고 생계를 보장받는 방법을 택했다. 이러한 행동을 ‘탁신’이라고 불렀는데 지위가 높은 자들은 탁신한 사람 중에 충성스러운 자들을 골라 그 유대를 . 이 계약은 본래 최초의 계약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효력을 가졌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계약은 세습되었다.종신은 주군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쳤다. 그들은 주군에게 군사적 봉사, 금전적 조력, 정치적·사법적 조언을 해야 했다. 주군은 그 대가로 종신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 봉이라고 알려진 경제적 급부를 통해 종신의 생계를 보장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종신은 자신이 받은 봉을 자신의 종신에게 다시 봉하는 재분봉도 일어나게 된다. 토지에 기초하여 종속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주군과 종신, 종신의 종신 사이의 관계는 유럽 안에서도 그 양상이 매우 다양했다.유럽 봉건사회의 경제는 잘 알려졌다시피 장원을 기초로 한 자급자족 농경제 사회이다. 외부에서는 바이킹의 침략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간의 교역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자유민이었던 소농들은 자신의 토지를 영주에게 바치고 영주에게 자신과 후손을 맡겼다. 이들은 영주에게서 다시 부과조와 부역이 딸린 토지로 땅을 돌려받아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다.봉건제 초기에는 한 명의 종신이 한 명의 주군에게만 충성을 바쳤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봉의 세습과 양도가 자유로워지고, 복수의 계약이 가능해지자 주군과 종신의 관계가 복잡해졌다. 그러나 주군과 종신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적인 기초가 없었기 때문에 권력의 파편화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인신적 유대의 의미가 퇴색하고 경제적 교환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경제적 변화에서 시작된 전 사회적인 변화는 파편화된 권력을 다시 왕에게 집중시키고 유럽에서 봉건제는 그렇게 사라졌다.일본의 봉건제일본에서는 강력한 천황제 정부가 힘을 잃기 시작하면서 권력의 파편화가 나타났다. 애초에 진정한 관료 층이 결여된 관계로 권력은 귀족들이 사유화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장원이 증가하였다. 11세기에 이르러 행정질서가 심각하게 무너지고 지방 장원의 영주들은 방어와 공격을 위해 신흥 무인 귀족인 사무라이들을 사적으로 끌어 모았다. 무력의 사유화되면서 국내 사정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결국 12세기 앙 정부인 아시카가 바쿠후로 교체되고 봉건화가 더욱 이루어진다.지방의 행정은 슈고의 군사적 통치체제로 바뀌었다. 슈고들은 지토들을 흡수하고 독자적인 요역을 부과하며 점차 자립적인 지방 영주로 성장해갔다. 슈고는 자신이 직접 봉토를 소유하거나 종신들에게 분급하기도 하면서 군사적 봉사와 조건부 토지소유의 직접적 결합에 의한 주종 관계, 지교 제도가 발달하게 된다. 또 귀족계급에서의 장자상속은 지방에서의 봉건 질서를 더욱 강화했다.15세기 오닌의 난으로 아시카가 바쿠후가 붕괴하면서 실질적인 중앙권력은 해체되었다. 무정부 상태에서 지방에선 종신들이 슈고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전쟁이 탄생시킨 새로운 전국 시대에 힘 있는 무사들은 자신의 공국을 건설하고 봉건영지로 조직하여 통치했다. 봉건화는 완전히 진행되어 이제 영지 안의 모든 무사들은 영주의 종신이 되었다.일본의 봉건제는 중앙 정부가 바뀌는 것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바쿠후가 멸망하면서 종말을 맞이한다.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일본은 봉건제 사회에서 갑작스럽게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간다.서주(西周)의 봉건제중국에서 봉건제 사회를 꼽으라면 서주가 가장 대표적이다. 지금부터 서주의 봉건제가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논하기에 앞서 서주시대는 워낙 오래전의 역사라 확실하고 자세한 사료가 부족하여 그 봉건제의 발전상에 대해서 세세하게 논하기가 힘듦을 밝힌다.위에서 논의한 봉건제의 기본적 요소, 주군과 종신의 사적 계약과 토지의 부여는 서주 이전에도 나타나고 있다. 주나라 이전의 상나라에서도 그와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상나라에서는 독립적이지만 상나라에 의존하는 영지 소유자들에 대하여 일정한 의무를 요구했다. 그것들은 보통 군사적 업무, 공납, 부역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주나라 이전에 이미 주군과 종신의 계약이 나타남을 추측해 볼 수 있다.주족은 본래 중원의 민족이 아니다. 이들은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가 기원전 12~11세기에 동쪽을 정벌했다. 이들은 상나라를 넘어서 더 수 없는 토지를 나눠주고 다스리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토지를 받은 이들은 제후(諸侯)라 불렸다. 또한 이들이 받은 토지는 국(國)이라고 한다. 각 국에서 제후들은 장자상속제를 통해 지위를 세습하였다. 제후들은 주의 종묘에서 거행된 서임의식을 통해서 국에 대한 점유권을 인정받았다. 제후들은 이 의식에서 왕 앞에 엎드려 훈계를 받은 후 옥홀과 봉 수여의 조건이 적힌 서판을 받았다. 이 의식은 제후가 바뀔 때마다 상속자에게 반복되었다. 제후는 자신의 국 안에서 모든 권리를 행사하였다. 관료를 직접 임명하고 세금도 스스로 부과했으며 독자적인 군대를 유지했다. 또 개인적인 재판권을 행사하였다.주나라의 봉건제가 다른 봉건제에 비해 독특한 점은 국가의 시스템이 거대한 대가족 제도와 결합하였다는 점이다. 종신과 주군의 관계도 추상적인 의무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가문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조상 숭배라는 공통의 의식을 공유했다. 여기서 토지신이 등장한다. 지배자의 계급에 따라 그 지배자는 제사 지낼 수 있는 토지신의 서열이 달랐다. 지방의 마을을 관장하는 신, 각 봉토를 관장하는 신, 전 왕국을 관장하는 최고의 신이 있어 왕만이 최고 신에 대해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또한 천(天)신에 대해서도 같은 권리가 인정되어 오직 주의 왕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늘의 명령을 받을 수 있었다.또한 가족 제도에서 확장된 사상으로 효(孝)사상이 있다. 주나라의 봉건 시스템은 가족 제도의 확장인 만큼, 가족 내부에서 위계와 서열을 중시하는 효사상이 국가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왕은 아버지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왕과 제후, 제후와 경대부들 사이에서는 가족적 위계서열처럼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봉양할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사상이 충(忠)과도 연결되는 것이다.주나라의 봉건제는 기원전 8세기경에 야만족의 침입에 의해 수도를 옮기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는 아마 주나라가 주군의 국가로써 자신의 종신들을 지킬 힘이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일일 것이다. 이렇게 약.
    인문/어학| 2011.11.11| 6페이지| 1,500원| 조회(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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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둘기 요약그는 자신의 삶에 죽음 이외에는 자신의 내적인 균형을 깨뜨리거나 외적인 일상의 질서를 뒤섞어놓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함. 그런 일들을 혐오하기까지. 그런 사건 중 하나는 1942년 여름 낚시를 갔다 왔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어머니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까지 사라진다. 얼떨결에 누이와 함께 전쟁 동안 떠돌고 숨어 지내게 된다.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친척에게 의탁하여 농부로 살아간다. 그는 군대에 의무 복무도 착실히 한다. 그가 54년 친척집으로 돌아왔을 때, 누이가 안 보인다. 누이는 이민을 갔다고 했다. 그는 친척의 권유로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결혼한 지 4개월 만에 아이를 낳고, 장사꾼이랑 눈 맞아서 도망간다. 그래서 조나단은 사람들은 절대로 믿을 수 없고, 그들을 멀리해야만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그는 사람들의 비웃음이나 시선이 싫어서 돈을 모아 파리로 떠난다. 그는 코딱지만한 방을 얻었다. 비록 화장실을 공동으로 쓰지만 그는 삶의 고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누구도 자신을 쫓아낼 수 없는, 완벽한 자신만의 공간을 찾게 된 것이다. 그는 이 방에서 비슷한 일과로 수십 년을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수십 년을 관리한 끝에 그의 방은 불안한 세상의 안전한 섬과 같은 도피처와 의지처가 되었다. 그는 그 방을 마치 애인과 같이 생각했다. 그는 월세를 내는 것을 넘어서 완전히 그 방을 소유하기 위해 방을 사기로 결심하고 계약을 맺는다. 그런데 84년 여름의 어느 금요일 비둘기 한 마리가 이 상황을 모두 깨놓는다. 그는 아침에 화장실을 갈 때에도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을 싫어한다. 25년 전에 그런 일이 한 번 있었는데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그는 나가기 전에 누가 있나 귀를 기울인 후 조심스럽게 나간다. 이 날 아침도 귀를 기울인 후 나가고 있는데 비둘기가 복도에 있는 것이다. 너무나 끔찍스럽게 생긴 그 비둘기는 조나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죽을 만큼 놀랐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얼어버렸다. 그러다가 비둘기가 잠시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보고 조나단은 공포로 몸서리를 쳤다. 머리카락까지 빳빳하게 서버릴 정도로 놀란 조나단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고 자물쇠를 잠그고 침대에 주저앉는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심장은 쿵쾅거리고, 이마는 차가워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그는 순간 심장병이나 뇌졸중에 걸릴 것을 염려한다. 그래서 그는 침대에 누워서 어깨까지 담요를 덮고 심장의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차츰 안정이 되어가자 그는 정상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대신 머리속에는 공포의 사념들이 떠다닌다. “너는 이제 끝장이야”, “비둘기 한 마리한테 방에 갇히다니, 네 인생은 실패한 거야. 넌 그 새를 죽여야 해, 그러나 죽이지 못하지. 넌 뜨거운 피가 흐르는 큰 비둘기는 죽이지 못해. 차라리 총으로 사람을 쏘는 것이 편하겠지. 그러나 비둘기는 달라. 그걸 쏘는 것은 야만적이고 불법행위야. 넌 비둘기를 쏴서 감옥에 갈 수도 있어. 그래서 넌 저걸 죽이지 못하지. 그러나 넌 비둘기와 같이 살 수도 없어. 비둘기는 혼란과 무질서의 대명사가 될 거야. 집을 더럽히겠지. 사람을 할퀴고. 또 저것이 번식을 하면 온 복도가 비둘기 떼로 가득 찰거야. 그 비둘기 떼는 너를 포위해서 방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오게 할거야. 넌 굶주려 죽겠지. 아니면 네 배설물로 질식하던가. 넌 창 밖으로 몸을 던질거야. 그런 길에 쭉 뻗어 버리겠지. 넌 겁이 너무 많아서 뛰어 내리지도 못해. 넌 사람들이 사다리를 가져와서 구해줄 때까지 도와달라고 소리나 칠거야. 그러면 사람들이 널 비웃겠지. 비둘기 한 마리에 겁먹은 늙은 노엘이라고. 널 정신 병원에 보내 버릴거야. 넌 희망이 없어. 넌 망했어” 따위의 생각들이다. 그는 유년시절 이외에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기도를 올렸다. 그냥 구해 달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화장실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오줌은 마렵고. 그래서 그는 방 안의 세면대에 오줌을 눴다. 그는 자신의 인격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소름이 돋았다. 이건 너무나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는 오늘 나간다고 해도 그 이후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는 호텔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호텔로 가기 위해 거대한 가방에 짐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그는 허탈감으로 눈물이 맺혔다. 수십 년의 인생이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나갈 준비를 하고 그는 비둘기가 혹시 몸에 닿을까봐 겨울옷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탈출을 감행했다. 복도에는 비둘기의 똥도 있었다. 그는 메슥거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꼈다. 그의 시야에 똥은 한 두 점이 아니라 온 복도가 시푸르뎅뎅했다. 그러나 똥이 한 점이었으면 도망쳤겠지만 혐오스러운 모습이 보편화된 점에서 그는 용기를 갖고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비둘기를 보았다. 그리고 못 본 것처럼 행동하기로 하고 조심스럽게 지나간다. 똥 사이로 가방을 끌며, 우산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너무 흥분해서 열쇠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새가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더욱 큰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가방을 움켜쥐고 달음박질을 쳤다. 우산이 벽을 긁으면서 다 찢어졌다. 층계에 다다라 뒤를 돌아보자, 비둘기가 자신의 방 바로 앞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시는 그 방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는 이제야 부끄러운 것이 느껴져 겨울옷들을 벗기 시작했다. 그는 가정부를 만나면 뭐라고 변명할지 걱정을 했다. 그는 가정부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가정부는 유독 그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 같았다. 그는 부인의 시선이 짜증났다. 부인이 평소에 하는 인사마저 야유로 들렸다. 그는 분노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부인에게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는 분노를 표현하려다가 겨우 비둘기가 복도를 더럽혔다고 토로했다. 그는 주택규정을 들먹이는 자신을 우습게 생각했다. 부인은 비둘기를 쫓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은 마치 자신보고 그 비둘기를 쫓으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자신은 바쁘니까 그 복도를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부인은 분명히 아무런 해결을 해놓지 않을 것 같았다.그는 평소처럼 출근해서 원래의 일과를 수행했다. 그는 경비원이 스핑크스 같다고 생각했다. 경비원은 사실 아무 쓸모가 없었지만 그가 있음으로 인해 강도에게 하나의 장벽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는 경비원과 스핑크스가 상징적인 면에서 동일하다고 생각하며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수십 년을 버틸 힘과 인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오늘은 몇 분이 흐르기도 전에 발에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는 무게를 이 발로 저 발로 실어보다가 조금 이으니 허벅지와 옆구리와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한참 후에는 이마가 근질거렸다.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의 이마는 땀에 흠뻑 젖었다. 그는 온몸이 간지러웠다. 그는 긴장을 풀기 위해 꿈틀거렸다. 그의 정신은 매우 산만했다. 시선을 한 곳에 집중시키지 못했다. 대기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투명한 막이 시야를 가리는 듯 했다. 그는 눈이 안 좋아진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뢰델 씨의 승용차가 들어오는 것을 놓쳤다. 경적이 몇 번이나 울려서야 그는 그것을 지각하고 정신없이 뛰어가 문을 열고 경례를 했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부들부들 떨며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경비원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점심시간에 그는 호텔로 가서 방을 구했다. 그는 벤치에 앉아 빵과 우유를 먹었다. 좀 떨어진 벤치에서는 거지가 빵과 훈제된 정어리와 술을 먹고 있었다. 그 거지는 30년 전에 분노와 질투를 느꼈었다. 거지는 일도 안 하면서 동정과 적선에 빌붙어서 태평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거지에게서는 자신감과 자기만족이 보였고 자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60년대 중반 그는 거지가 길 한가운데에서 똥 싸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을 보고 고는 비참하고 메스껍고,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그는 그 일 이후로 거지가 부럽지 않았다. 그건 인간의 생활이 아니었다. 그것만큼 수치스러운 것은 없었다. 그는 공동 변소를 사용할 수 있단 것에서 인간적인 자유를 느꼈고, 마음속 깊은 만족을 느꼈다. 그 일 이후로 그는 은행 문 앞을 더욱 열심히 지켰다. 앞으로는 어느 무엇도 그를 흔들리게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제 거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조나단은 본래 점심시간에는 집으로 가서 따뜻한 음식을 요리해서 먹었다. 벤치에 앉아서 빵과 우유를 먹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거지는 식사를 다 하고 포도주를 크게 먹은 후 트림을 하고는 바로 벤치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의 주위에 참새와 비둘기가 돌아다녀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평안하게 잠을 잤다. 거지를 쳐다보자 그는 이상한 불안감이 생겨났다. 조나단은 거지와는 달리 평생을 착실하게 욕심도 안 내고 거의 금욕주의자로 살고, 깨끗하고, 신뢰도 있고, 예의도 잘 지키며 살아왔고, 빚도 져 본 일이 없고, 남에게 폐를 끼친 적도 없는데, 평생 바란 것이라고는 자신만의 평안한 공간뿐인데, 오늘 인생의 계획이 망했다. 정신은 혼미하여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기껏 빵과 우유를 먹고 있었다. 그는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였다. 갑자기 빈털터리가 되어 거지처럼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해졌다. 그는 오늘 뢰델 씨의 차를 놓친 것으로 인해 해고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고당한 후에는 호텔비와 술로 돈을 탕진하고 결국 거지가 되어 길에서 똥을 싸게 될 것을 상상했다. 그는 입이 바짝 말랐다. 그는 식사를 다하고 일어나 회사로 가는데, 쓰레기를 그대로 두고 온 것이 생각나 벤치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벤치에 옷이 걸려서 바지가 찢어졌다. 그는 순간 아드레날린의 힘으로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쓰레기를 아무데나 던져버리고는 구멍을 가리고 재단사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는 재단사에게 가서 옷을 고쳐달라고 했다. 그러나 옷을 고치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는 비틀거렸다. 그는 바지를 테이프로 기우고 직장으로 갔다.
    독후감/창작| 2011.11.11| 4페이지| 1,000원| 조회(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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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생들의 거주형태와 수입수준에 따른 소비행태와 소비가치
    대학생들의 거주형태와 수입수준에 따른 소비행태와 소비가치 : 고려대 저학년을 대상으로--차례-1.서론1)연구주제2)연구목적3)개념의 정의(1)수입수준(2)거주형태(3)소비가치2.본론1)연구방법2)연구결과(1)표본의 특성(2)수입수준과 거주형태에 따른 소비행태A.수입과 소비생활 비용의 상관관계B.거주형태와 수입수준에 따른 소비생활의 장소의 차이(3)거주형태와 수입수준에 따른 소비가치의 차이A.식생활 가치B.여가생활 가치C.의생활 가치(4)거주형태와 수입수준의 상호작용 여부3.결론부록설문지1.서론1)연구주제월 수입별, 거주형태별로 실제 소비행태와 소비가치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2)연구목적대학생들의 거주형태와 수입수준이 소비가치와 소비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거주 형태의 경우, 기대되는 식비 지출에 따라 부모님과 동거, 기숙사·하숙, 자취·형제자매 동거로 나눈다. 식비의 지출 정도는 다른 소비생활의 비용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거주형태에 따라 여가생활과 의생활에서도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이를 확인해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수입수준은 소비생활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소비생활과 소비가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예상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바에 기초하여 거주형태와 수입수준이 서로 상호작용을 줄 것이라 예상하였다. 이가 단순히 추측이 아닌 실제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본 연구를 실시하였다.연구 질문 1.수입수준과 거주형태에 따라 소비형태가 다를 것인가?연구 질문 2.수입수준과 거주형태에 따라 소비가치가 다를 것인가?3)개념의 정의(1)수입수준수입은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는 용돈과 본인이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직접 번 돈을 합한 것이다. 그리고 이 수입을 기초로 수입수준을 3 차원으로 분류하였다. 수입수준의 분류는 표본을 수입에 따라 정렬한 후 하위 30%를 저수입 집단, 중위 40%는 중수입 집단, 상위 30%는 고수입집단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분류하는 과정 도중에 중수입 집단에 포함되는 50만원을 받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아서 실제 분류는 조가 클 것으로 예상하고, 부모님과 집에서 함께 사는 집단, 기숙사나 하숙에서 사는 집단, 혼자 혹은 형제자매와 자취하는 집단으로 나누었다.(3)소비가치소비가치란 각 소비생활의 영역에서 사람들이 주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이다.2.본론1)연구방법본 연구를 위하여 설문조사 방법을 사용하였다. 모집단은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의 1,2학년 학생이다. 모집단을 대상으로 100개의 표본을 수집하였다. 표본은 성비를 동등하게 맞추어 임의로 표집하였다. 설문지는 총 15문항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응답자의 기본 특성에 관한 문항 4개와 응답자의 소비생활과 가치에 대해서 묻는 11개의 문항으로 구성되어있다. 척도의 경우, 실제 소비 지출 사항은 비율척도가 사용 될 것이고 나머지 사항들은 등간척도가 사용될 것이다. 설문은 11월 18일부터 11월 22일까지 진행하였다. 설문장소는 서관, 교양관, 정경관, 홍보관, 과학도서관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설문조사 결과 설문지 1부를 분실하여 총 99부의 설문지가 수집되었다.2)연구결과(1)표본의 특성수집된 표본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변인빈도(%)합계성별남자49(49.5%)99(100%)여자50(50.5%)학년1학년63(63.6%)99(100%)2학년36(36.4%)거주형태부모님과 동거58(58.6%)99(100%)기숙사, 하숙29(29.3%)자취12(12.1%)수입수준저수입29(29.3%)99(100%)중수입47(47.5%)고수입23(23.2%)(2)수입수준과 거주형태에 따른 소비행태A.수입과 소비생활 비용의 상관관계총 수입과 식생활비의 상관분석 결과, .552의 상관이 있다고 드러났으며 유의확률은 .000으로 유의수준(.05)보다 낮아서 유의미한 것으로 드러났다(N=99). 총 수입과 여가비의 상관분석 결과, .617의 상관이 있다고 드러났으며 유의확률은 .000으로 유의수준(.05)보다 낮아서 유의미한 것으로 드러났다(N=99). 총 수입과 의류비의 상관분석 결과, .579의 상관이 있다고 드러났으며 유의확률은 .000으로 유의수준(.05)른 소비생활의 장소의 차이거주형태와 수입수준에 따라 사람들의 식사나 쇼핑하는 장소가 다른지를 알아보기 위해 카이스퀘어 분석을 실시했다.백화점대형마트개인상점인터넷합계저수입5(18%)9(32%)5(18%)9(32%)28(100%)중수입9(19%)4(8.5%)22(47%)12(25.5%)47(100%)고수입8(36%)2(9%)6(27.5%)6(27.5%)22(100%)합계22(23%)15(15.5%)33(34%)27(27.5%)97(100%)집편의점5천원미만의식당5천원이상의 식당합계저수입8(28.5%)1(3.5%)16(57%)3(11%)28(100%)중수입5(10.5%)3(6.5%)27(57%)12(26%)47(100%)고수입1(4.5%)1(4.5%)10(43.5%)11(47.5%)23(100%)합계14(14%)5(5%)53(54%)26(27%)98(100%)수입수준에 따른 쇼핑장소의 차이는 x²값 14.429, 자유도 6, 유의도 0.025로 유의마한 결과를 보였다. 수입수준이 높은 집단에서는 백화점에서 소비하는 비중이 늘어나는 반면, 대형마트에서 소비하는 비중이 줄어들었다. 이는 경제력의 효과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수입수준에 따라 선호하는 식사장소의 차이는 x²값 13.547에 자유도 6에 유의도 0.03으로 유의미하였다. 수입수준이 높은 집단은 식사가격이 5천원이 넘는 비싼 식당에서 식사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반면 집에서 식사하는 비중이 매우 적었다. 저수입 집단은 싼 식당과 집에서 많이 식사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소비 형태이다.거주형태와 쇼핑장소의 카이스퀘어 검증 결과, x²값 5.466에 자유도 6, 유의도 .486으로서 통계학적으로 유의하지 않다, 즉, 거주형태에 따라 쇼핑장소에 차이가 있지는 않는다. 거주형태와 선호하는 식사장소에서도 x²값 7.601에 자유도 6, 유의도 0.269로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다. 거주형태가 다르다고 해서 식사장소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3)거주형태와 소득수준에 따른 소비가치의 차이소비가치는 두며, 여가 생활에서는 스트레스 해소, 친목 도모, 자기 발전, 비용, 접근성에 가치를 둘 것이다. 그리고 의생활에서는 디자인, 내구성, 비용, 트렌드, 기능성, 품질 등에 가치를 둘 것이다. 이 때 각 소비활동에서 어떠한 가치를 중시할 것인지에 대해 수입수준별로 그리고 거주형태별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수입수준이 높을수록 가격에는 가치를 덜 부여할 것이고, 가격에 제한을 받지 않는 만큼 다른 질적인 항목에 더 가치를 부여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분석 결과, 거주형태에 따른 소비가치에 대해서 모두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결과보고에는 수입수준에 따른 가치의 차이에 대해서만 언급한다.A.식생활 가치집단표본평균표준편차등분산성 가정F통계값유의확률맛저수입294.971.45채택4.1040.019중수입475.511.47고수입236.040.87합계995.471.39분위기저수입292.761.68채택3.3750.038중수입473.451.39고수입233.831.58합계993.331.56가격저수입296.101.01기각중수입476.060.96고수입235.171.43합계995.871.15음식량저수입284.821.37채택5.9550.910중수입474.791.38고수입234.651.5합계984.771.46건강저수입293.860.80채택0.0950.924중수입473.810.84고수입233.701.02합계993.800.94접근성저수입285.111.22채택0.8760.420중수입475.061.10고수입235.480.99합계985.171.12위의 표는 수입수준에 따른 식생활 가치의 차이를 분석한 결과이다. 일원분산분석 결과 맛 항목과 분위기 항목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찾을 수 있었다. 맛에 대한 가치에서는 수입수준이 높을수록 평균점수가 높아졌다. 그러나 사후분석 결과에서는 저수입 집단과 중수입 집단, 중수입 집단과 고수입 집단 간의 차이는 유의미하지 않았다. 저수입 집단과 고수입 집단 간의 차이에 대해서만 유의확률 0.02로 유의미한 결과를 보였다. 분위이는 사후분석 결과 유의미한 것으로 드러났다.수입수준(I)수입수준(J)평균차(I-J)유의확률저수입중수입-0.5450.238고수입-1.0780.020중수입고수입-0.5330.306수입수준(I)수입수준(J)평균차(I-J)유의확률저수입중수입-0.6880.168고수입-1.0670.048중수입고수입-0.3790.623이러한 결과는 수입수준이 높을수록 가격의 제한 없이 질적인 항목에 대한 가치부여가 높을 것이라는 가설을 확인해주는 것이다.가격 항목에서는 평균적으로는 차이가 드러났으나 등분산성 가정이 기각되어 세 집단 간의 평균 차이를 비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았다. 또 다른 가치 항목들, 음식량·건강·접근성에서는 유의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B.여가생활 가치수입수준에 따른 여가생활 가치의 일원분산분석 결과, 여가생활 가치의 모든 항목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C.의생활 가치수입수준에 따른 의생활 가치의 일원분산분석 결과, 의류가격 항목에 대해서만 유의미한 결과가 발견되었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집단표본평균표준편차등분산성 가정F통계값유의확률저수입296.310.806채택7.9640.001중수입476.020.847고수입235.351.027합계995.950.941그리고 이러한 결과에 대한 사후분석을 실시한 결과,수입수준(I)수입수준(J)평균차(I-J)유의확률저수입중수입0.2890.384고수입0.9630.001중수입고수입0.6730.013결과는 저수입 집단과 중수입 집단 간의 차이는 유의하지 않았지만, 고수입 집단과는 두 집단 모두 유의미한 차이를 보였다. 즉, 고수입 집단은 의류 가격에 다른 집단에 비해 확실히 적게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수입수준이 높은 집단은 가격에 가치를 낮게 부여할 것이라는 연구자들의 가설에 부합하는 것이었다.(4)거주형태와 수입수준의 상호작용 여부거주형태와 수입수준의 상호작용이 소비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서 이원분산분석을 실시하였다. 분석 결과, 유의미한 차이를 드러낸 항목은 식생활의 분위기 항목뿐이었다. 수입수없었다.
    인문/어학| 2011.11.11| 8페이지| 1,500원| 조회(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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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단의 시대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요약본---1장. 총력전의 시대1914년 이전의 근대에서는 대다수의 열강이 참여하는 광범하고 장기적인 전쟁이 없었다. 비교적 평화적인 시대가 1914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바뀐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소수의 중립국을 제외하고 전 유럽과 미국, 일본이 전쟁에 참여하였고, 전 세계의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더욱 세계적인 규모로 확장되어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전쟁에 휘말리고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 사망자도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수천만 명에 이르는 천문학적 수치를 기록한다.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20세기 전쟁들은 대규모, 대량살상의 특성을 띤다.1차대전은 러시아·프랑스·영국의 삼국동맹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의 유럽적인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삼국동맹은 전쟁이 지속되면서 미국과 일본이 참여하며 세력이 더욱 커진다. 독일은 유럽의 한 가운데에서 동·서 양쪽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독일은 서부에서 프랑스와 영국을 맞아 싸웠는데 이 지역의 전선은 전쟁의 상당 기간 동안 교착상태에 머물며 계속 인명을 소비한다. 대량의 인명피해자는 서유럽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 전쟁 혐오자와 전후극우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독일의 동부에서는 전쟁이 유동적이었다. 독일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는 어느 정도 승기를 잡고 밀어붙이고 있었다. 전쟁의 향방은 서부전선에 달려있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독일은 경제력에 큰 타격을 입게 되고 그에 따라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미국에 공격을 가하고 미국이 참전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전쟁은 곧 끝나고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모든 책임을 지게 된다. 하지만 승전국들조차 심각한 타격을 입어 체제에 위협을 받아야만 했다. 이에 참전국들은 베르사유조약을 맺어 세계전쟁을 방지하고자 하지만 부질없는 노력이었다.1차대전 이후 세계적 경제공황과 불만의 누적으로 결국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침략을 시작한 것이다. 이 삼국은 단기전을 예상하고 전쟁에 셰비키가 10월에 다시 혁명을 일으킨다. 수많은 국민의 지지를 토대로 어렵지 않게 임시 정부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혁명 직후 볼셰비키는 백(白)군과의 내전으로 접어든다. 적(赤)군은 중앙집권화된 공산당 조직과 농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내전에 승리하고 체제를 굳건히 한다.소비에트는 내전 이후 아시아, 남미, 유럽 등지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각국에 소비에트가 생기고, 공산당 지도자들이 혁명을 주도하였다. 특히 독일에서 황제를 갈아치운 혁명은 볼셰비키의 세계 혁명에 대한 희망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독일 혁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했고 서쪽으로 사회주의의 확산에 실패하면서 러시아는 동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중국 공산당은 러시아의 희망을 다시 조금이나마 살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서쪽에서의 실패로 코민테른은 분열하고 결국 혁명가들은 각국에 분열되어 소수파로 존재하게 된다.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점차 세계혁명을 위한 기구로서 힘을 잃어갔다. 대신에 소련의 국가적인 이해관계 하에 종속되기 시작했고 결국은 완전히 소련의 하위 기구로 전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타국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 지원했는데 이는 애초에 소련이라는 국가의 탄생 목표가 기본적으로 세계로의 혁명 확산이기 때문이었다.공산당이 세계혁명을 주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레닌주의에 있다. 레닌은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되고 결정에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당 조직을 만들어냈는데 이러한 직업적 혁명가 집단이 민중들에게 꽤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실제 대중이 원하는 바를 잘 포착하지 못하여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례도 있었다. 스페인에서 인민전선 정부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나, 테헤란의 혁명은 공산당이 원한 것처럼 조직적인 혁명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전후 20세기 혁명들은 조직적이고 계획된 혁명이라기보다는 군사적 쿠데타나 농촌 무장투쟁의 결과들이었다.빨치산, 즉 무장 게릴라전은 사회혁명가들에게 20세기 중반 이후에나 혁명의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1차 대전까지는 게릴라전을 혁명의 투쟁 수지 않고 세계경제의 안정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공황의 다른 원인으로 세계경제의 지속적인 팽창에 대해 수요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미국에서조차 심각했다. 급속하게 증가하는 생산성을 수요가 따라잡지 못해 과잉생산과 투기가 만연했고 그 결과는 폭락으로 이어졌다.1932년 이후에는 최악의 불황이 끝나가는 조짐을 보였다. 일본이나 스웨덴에서는 생산고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고, 독일과 영국도 조금씩 경기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세계경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미국의 회복이 늦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30년대 후반에도 소규모의 경기폭락을 경험하고 공업의 회복이 더디게 된다.대공황으로 국민들은 정부와 경제학자들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정부는 불황을 타개하지 못했고 케인스를 제외한 기존의 경제학자들은 불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계경제는 마르크스가 예측한 대로 자본의 집중을 보이며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회의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30년대 말의 경제현실은 자유주의로부터 멀어지고 결국 시장, 정부, 국제적 기구로 구성되는 삼원체제로 접어들었다. 정치 또한 변화를 면치 못했다. 유럽과 일본은 극우 세력이 집권했고 북유럽은 사회민주당이 우세를 보였다. 남미에서는 10개국이 군사 쿠데타를 겪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자멸의 분위기에 더불어 히틀러가 독일 공산당을 분해하며 세력이 극도로 취약해졌다. 북미 대륙에서는 정부가 경제에 관여하는 좌파적 정권이 들어섰다. 또 대공황은 식민지세계에 강렬한 타격을 주어 반제국주의 운동을 증가시켰다. 대공황 이후의 정치체제를 요약하면 세계는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뉘었는데, 공산주의와 개혁된 자본주의, 파시즘으로 볼 수 있다. 구식의 자유주의는 종결되었다. 특히 파시즘이 빠른 경제회복을 보이며 세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등장했다.4장. 자유주의의 몰락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후퇴를 의심할 수 없었던 자유주의가 전간기 파시즘의 등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이 끝날 무렵만 하더라도 소련을 제외한 거의 들은 나치즘의 군제를 모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미 국가들은 파시즘처럼 노동계급이나 운동을 탄압하지는 않았다.파시즘이건 파시즘이 아니건, 자유주의는 우파적 움직임으로 인해 확실히 쇠퇴하고 있었다. 전간기의 위기는 사회와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이 문제를 해결할 대안은 강제와 폭력밖에 보이질 않았다. 민주주의가 효율성을 발휘하고 존립을 가능케하는 조건으로 합의와 정통성, 인민의 양립가능성, 행정의 독립, 부와 번영 같은 특징이 있는데, 전간기에는 이러한 조건들이 보장되질 않았다. 정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잘 작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파시즘이나 급진적 우파의 강력한 통제력은 권력을 장악하고 대중의 지지를 받기에 충분한 장점이었다.5장.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파시즘은 전 세계의 파시즘이 아닌 체제에게는 공동의 적이었다. 심지어 미국과 소련이 동맹을 맺을 정도로 국제적인 연합세력을 구축하게 만든다. 독일의 기본적인 국제관계는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졌으나 히틀러가 모든 체제를 적으로 규정하고 팽창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독일과 타협하고자 했던 체제들도 적으로 돌리게 된다. 전쟁은 크게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을 찬성하는 쪽과 그러한 혁명에 반대하는 파시즘 세력의 대립, 즉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조약을 파기하고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뒤 전쟁에 돌입하고, 이탈리아와 일본도 각각 침략을 개시한다. 전쟁은 유럽적 전쟁에서 곧 미국과 아시아를 포괄하는 세계대전으로 확장된다.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선 국제적인 반파쇼동맹과 실질적인 저항책, 그러한 저항을 실천할 정부가 필요했다. 반파쇼동맹은 어렵지 않았으나 실질적인 저항의 움직임에 대해서 영국과 프랑스가 주저하게 된다. 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 역시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이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도 전쟁의 부담과 공포를 물리치고 군사적 행동에 나서게 된다.스페인 내전은 세계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지만 곧 벌어질 유럽 전쟁의 축소판과 같았다. 스페인 내 디자인 계열로 흡수되었다. 다다이즘은 세계대전과 그것을 낳은 사회에 대한 허무주의적 항의로 구체화되었다. 다다이즘은 주류 예술에 물의를 빚는 것을 즐겼다. 초현실주의도 이 점에서 다다이즘과 비슷하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소극적인 항의 이상의 것이었고, 형식에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을 인정하는 점이 다다이즘과 다르다. 초현실주의는 프랑스, 스페인, 동유럽, 남미의 문학가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카메라 예술의 발전에도 기여했다.전위예술은 점차 범위를 넓혀서 기성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예술계와 사회에 큰 반향이었지만 점차 일상생활로 녹아든 것이다. 또한 전위예술은 다른 예술보다 훨씬 극적으로 정치화되었다. 유럽의 고급문화는 파리와 모스크바-베를린 추축이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과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독일과 소련의 전위예술은 사라졌다. 전위예술로 가장 크게 인정받는 영화와 재즈는 주로 신세계에서 나왔다.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예술계를 관통하는 주류는 모더니즘이었다. 모더니즘은 문학, 회화, 영화, 건축 등 모든 예술 분야에 영향을 주어 그 흔적을 남겼다. 공예 측면에 모더니티의 영향은 바우하우스로 대변된다.세계대전과 세계혁명은 비정치적이었던 전위예술운동을 정치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을 위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다다이즘은 혁명의 편이었고 중부 유럽에서는 공산당 쪽을 지지했다. 특히 중부 유럽의 전위예술은 묵시록과 비극을 통해 서구 엘리트 문화가 무너질 운명이라는 것을 표현했다.비서방세계에, 심지어 미국에까지 전위예술은 아직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비서방세계의 예술가들 대부분에게 기본적인 문제는 모더니즘이 아니라 모더니티였다. 그들에게는 자기 나라 민중의 당대현실을 발견하고 현실을 민중에게 제시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20세기의 새로운 예술로는 르포르타주와 카메라 예술이 있다.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세계의 상황을 보다 상세하게 전할 수 있었다. 기술의 혁신은 영화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된다.
    독후감/창작| 2011.11.11| 10페이지| 1,500원| 조회(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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