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열망이 들끓던 곳 - 제중원‘사람을 구하는 집‘이라는 의미의 제중원.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으로 의료사나 종교사의 범주에서만 조명되던 이 곳. 저자는 제중원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던 조선의 근대화 프로젝트의 중심 기관으로 생각했다.저자 김상태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근현대사를 연구했다.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05년부터 의학사를 연구했다. 갑신정변 이후부터 갑오농민전쟁 이전 9년 동안 구한말 고종의 근대화와 외세들의 외교 활동을 제중원이라는 기관을 통해 설명하려 하고 있다.고종은 문호 개방 이후 국가 차원의 개화 프로젝트를 세우고 그 실천에 나섰다. 고종과 조선 정부가 내세운 정치철학은 ‘동도서기’였다. 정치체제, 사회질서, 사상 등 인간사회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학은 우리의 전통을 고수하되 산업, 과학 기술 등 실용적인 분야는 서양의 근대 문물을 수용해 부국강병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근대화 프로젝트 중 하나가 바로 의료 근대화였다. 백성들에게 퍼지는 전염병을 예방하고, 전통 의학만으로 부족했던 외과술을 보완하기위해 서양의학은 꼭 필요한 기술이었고 그에 따라 제중원이 설립되었다.알렌은 제중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의료 선교사인 그는 갑신정변 당시 부상을 입었던 민영익을 살림으로 인해 서양 의술의 우수성을 입증했고 그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그에게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을 제안했다. 알렌은 초대 제중원 의사로 많은 진료를 했고 후에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미국과 조선의 외교 관계를 지속시켰다.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은 새로운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넓히면서 미국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미국이 조선에 대해 갖고 있던 본질적인 태도는 무관심이었다. 미국이 동아시아 진출에 관심이 있었지만 최종 목적지는 청나라였고, 중간 기착지로 적합한 것은 일본이었다. 조선에는 자국의 선박을 보호요청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은 미국 상품을 사기에도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상업상의 이익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조선인 미국과 달랐다 국방의 보호를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려는 청나라의 입김이 있었고 고종과 개화파 관료들은 미국이 진정한 우방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미국은 태평양 건너 아주 먼 나라인데다가 영토도 크고 무엇보다도 미국 제독 슈펠츠가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임을 부정했기 때문이었다.고종과 개화파 관료들이 미국을 흠모하고 미국을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종교 문제만은 걸림돌이었다. 사회질서와 미풍양속을 어지럽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 역시 조선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소문을 들어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은 꺼려했다. 이런상황에서 고종이 북장로회 소속의 알렌에게 병원 설립을 제안한 것으로 보아 제중원은 고종의 근대화 의지를 보여주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창덕궁 후원 답사기아침부터 출발해서 열한시 반쯤 창덕궁에 도착했다. 돈화문 옆에 입장권을 사는 곳에서 후원 특별관람 시간표가 있었고 열두시에 안내를 시작하는 후원관람권을 사서 돈화문으로 들어갔다. 처음 갈 때부터 후원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바로 후원부터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안내책자를 보고서야 알았지만 돈화문으로 들어가니 바로 오른쪽 45도 쯤에 다리가 하나 있었고 그 다리를 지나 쭉 들어갔다. 후원입장을 위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잘 모르겠어서 기념품과 차를 파는 곳에 물어보니 길을 따라 더 올라가라고 알려주셨다. 가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줄을 길게 서있는 걸 보아 후원입구라는 것을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입장권을 확인하고 걸어서 올라가니 후원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다. 궁궐관람도우미 분이 비원인지 후원인지 헷갈려하는 관람객에게 이름의 의미를 설명해주셨다. 창덕궁 후원은 특별히 붙여진 이름이 없어 후원, 내원, 금원 등으로 불렸는데 구한말에 후원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비원을 두었고 이 비원이라는 명칭이 일반인에게 종종 불리고 있다고 하셨다. 후원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설명을 하고 더 들어가는데 바닥부터가 흙길 이어서 궁궐이라는 느낌보다는 산책 온 것 같은 느낌이었고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아서 동네 뒷산에 올라온 기분이었다. 맨 처음보이는 곳은 공사 중이라서 가려져 있고 그 사진만 천막에 붙어있었던 부용정 이었다. 부용지의 동그란 가운데 섬은 천원지방의 사상에서 유래한 모양이라고 하셨다. 부용정은 네모난 모양이었는데 측면에서 볼 때와 정면에서 볼 때 방의 개수가 달라서 신기했다. 도우미분이 정조가 신하들과 시를 짓게 하여 즉석에서 짓지 못하면 건너편에 있는 사정기비각에 귀향을 보내 배를 치워버렸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자리에서 직접 보니 참 재미있었다. 부용지 뒤로는 언덕 위에 건물이 보였는데 2층을 주합루, 1층을 규장각이라고 한다 하였다. 그 입구인 어수문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는 뜻으로 정조의 철학이 담겨있다. 어수문 옆에는 작은 문이 양옆으로 있었는데 이는 신하들이 다니는 길이라고 한다. 규장각과 주합루는 왕들의 영정, 책 등이 있는 곳이라 하여 겸손해지라는 의미로 신하는 작은 문으로 다니고 왕만이 어수문으로 다녔다고 한다. 어수문은 크게 되어있는 반면 신하들이 다니는 문이라고는 하나 그 옆의 문은 문이라고 할 수 없이 그냥 구멍만 뚫어 만들어 논 것 같았다. 그 옆에는 영화당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문과 무과의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고 한다.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였다. 영화당 까지 설명을 해주시고 잠깐 휴식 시간을 가졌다. 처음 시작 할 때부터 도우미 분께서 말을 덜덜덜 떨면서 하셨다. 긴장해서 그러시는 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따뜻한 커피한잔 드렸는데 감사하다하시면서 영화당 앞의 해시계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셨다. 다시 모여서 조금 더 들어가다 옆을 보니 돌로만 된 불로문이라는 곳이 있었다. 전부 그 문을 통해 늙지 않기를 바라면서 내딛었다. 오른쪽에는 작은 정자가, 왼쪽으로는 단청도 없는 소박한 건물이 보였다. 그 소박한 건물에서 효명세자가 공부를 하였다는데 정조를 존경한 효명세자가 왕권정치를 하였던 정조를 배우고자 그 곳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존덕정 일원으로 들어갔는데 육각형의 지붕이 있는 존덕정의 안쪽을 통해 지붕을 보니 용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나무판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글 이 써져 있었는데 이는 세상의 모든 개울들이 달을 받지만 그 달은 하나라는 뜻으로 그 달은 정조를 의미한다고 도우미분께서 알려주셨다. 왕권강화를 위한 정조의 뜻이 느껴졌다. 더 깊이 들어갔더니 옥류천이라는 곳이 나왔다. 큰 돌이 있었고 물이 고여 있었다. 이곳에서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시 한편을 즉석에서 만들어 내는 것을 놀이로 한다니 그 당시에 선비들의 대단함을 느꼈다. 책자지도를 보고 위치를 파악 해보려고 하니 길을 잘 알 수 없었고 도우미분만 따라와서 위치는 파악하지 못하고 헤맸다. 그 뒤로는 언덕을 올라가서 주합루가 있는 뒤쪽이라는 곳으로 갔는데 그 곳이 신 선원전이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