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체육과 민속 스포츠 문화과목명 :학 과 :학 번 :이 름 :교수명 :제출일 :목 차제Ⅰ장 조선시대의 사회와 교육···‥‥‥‥‥…‥11.조선시대의 사회2.조선시대의 교육제Ⅱ장 조선시대의 무예체육···‥‥‥‥‥…‥‥41.무예교육2.체육으로서의 무예와 건강법제Ⅲ장 조선시대의 민속 스포츠와 오락··………91.귀족 사회의 유희와 민속 스포츠2.민중 사회의 유희와 민속 스포츠제Ⅳ장 조선시대의 체육사상···‥‥‥‥‥‥…‥141.숭문천무와 문무겸전의 대립2.학사사상 : 심신수련으로서의 활쏘기3.유학자의 체육관제Ⅴ장 마치면서‥·‥‥‥‥‥‥‥‥‥‥‥‥…16제Ⅵ장 참고문헌‥‥·‥‥‥‥‥‥‥‥‥‥‥…17조선시대의 사회와 교육1. 조선시대의 사회고려 시대는 무인정권이 붕괴된 이후 소위 신흥사대부 세력이 성장했으나 권문세족으로 인한 폐해가 증가하였다. 중국의 원과 명의 세력 교체기에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귀족들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을 즈음 왜구의 토벌로 공을 세운 최영, 이성계 등의 무장세력은 지방 중소 지주층의 지지를 받아 독자적인 군벌을 형성하였다. 우왕이 친원정책을 펼 때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은 명나라에 대응하여 요동정벌을 명하였으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창끝을 우왕과 최영에게로 겨누어 역성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고, 새로운 왕조 조선시대(1392∼1910)를 열었다.태조 이성계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군제를 개혁하고, 법제를 정비하였으며, 성균관과 향교를 일으켜 유학을 장려했다. 조선의 정치제도는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 한 것이었으나 태종 때 두 차례(1401, 1405)에 걸친 개혁으로 관제가 정비된 이래 전체적인 틀은 500년간 유지되었다.조선은 유교적 관료국가였다. 철저한 유교적 지도 이념을 내세운 사대부들에 의해 사회 전반에 걸쳐 유교적 사상과 관습, 제도가 정착되었고, 양반 사대부가 집권층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신분적 계급사회가 형성 · 유지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세습 양반의 수는 증가하고 관직은 한정되어 신분제는 정치적, 고 있었기 때문에 문관의 등용시험은 양반이 독점한 상태였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전공 영역에 따라 문관 채용을 위한 문과, 무과 채용을 위한 무과, 그리고 기술관 채용을 위한 잡과 등이 있었다.⑴ 문관 채용을 위한 과거문관 채용시험은 초급 문관시험인 소과와 대과의 두 단계로 나뉘었다. 생진과에는 사서 · 오경으로써 시험하는 생원과와 시 · 부 · 표 · 책 등 문장으로 시험하는 진사과가 있었다. 양반의 자제들은 서당에서 한문의 초보를 배운 뒤, 서울에서는 사학에, 지방에서는 향교에 진학하였다. 사학과 향교에서 생진과에 응시하게 되는데, 이들이 지방의 초시에 합격하면 서울에 모여 복시를 치러 최종 합격자를 정하였다. 합격자들은 과에 따라 생원 혹은 진사라고 불렀다. 생원과의 진사가 되면 성균관에 진학했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공부를 마친 뒤 다시 문과, 즉 대과에 응시했다. 문과 시험의 초시와 복시(33명)에서 합격한 자들은 갑, 을, 병 3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공식적인 제도 외에도 양반사회에서는 관학인 사학이나 향교보다 사학이었던 서재가 더 환영을 받아 사실상 과거 준비교육기관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⑵ 무관 채용을 위한 과거무과는 일종의 고등무관시험으로 고려말기에 시행된 이 제도가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다. 무과는 소과, 대과의 구분이 없이 초시(230명), 복시(28명), 전시(28명 갑3, 을5, 병20)의 3단계의 시험이 있었다. 무과 응시자에게는 궁술, 기창, 격구, 조총 등의 무예와 경서, 병서 등의 시험을 부과하였다. 초시는 서울은 훈련원에서, 지방은 각도의 병사에서 치르고, 복시와 전시는 병조와 훈련원에서 관장했으며, 합격자는 선달이라고 불렀다.⑶ 잡과의 교육과 과거기술관 채용을 위한 잡과에는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등 사과가 있었다. 이것은 사역원, 전의감, 형조 등과 같은 관서의 기술관을 채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술학 교육은 위의 해당 관부에서 제각기 맡았다. 그러나 기술 교육은 잡학이라 하여 천시되었으며, 중인의 자제들이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주, 즉 달리기는 일정한 시간 동안 멀리 뛰어가는 능력을 시험하는 과목이었다. “휴대용 물시계인 동호를 사용하여 물이 흘러나와 없어질 때까지 뛴 거리가 270보이면 1주, 260보이면 2주, 250보이면 3주라 하였다. 역은 무거운 물건을 들고 멀리 달리는 능력을 시험하는 과목이었다. 양손에 각각 50근씩 들고 160보를 가면 1력, 130보를 가면 2력, 100보를 가면 3력이라 하였다.” 그 외에도 다양한 무예들이 있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궁술과 격구였다.1) 궁술조선시대의 궁술은 중요한 무예의 하나였으나 체육 · 스포츠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궁술은 무예교육으로서의 궁술과 체육 및 스포츠로서의 궁술로 분류할 수 있다.⑴ 활의 종류조선시대의 활은 전쟁용, 수렵용, 연습용 등이 있었으며, 종류로 정량궁(길이 5촌 5척의 큰 활), )예궁, 철궁, )철태궁, )동개활, )각궁 등 7가지가 있으며, 화살은 철전, 목전, )육량전, )편전, )세전 등 다양했다.⑵ 체육 및 무예 교육적 궁술동서양을 막론하고 궁술은 군사 훈련, 즉 무예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총포의 발달로 그 기능은 약화되고 점차 스포츠의 성격을 띠고 발달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궁술은 교육활동의 한 수단으로서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았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육예, 즉 예 · 악 · 사 · 어 · 서 · 수를 배웠는데, 그 중 사는 활쏘기였고, 어는 말 타기 혹은 마차 몰기였다. 유학의 유자도 육예에 뛰어난 선비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상당한 수준의 궁술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중국에서는 활쏘기를 통한 인간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학사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학사사상은 고려시대부터 유교의 경전을 통해 널리 퍼지게 된 교육 이념이었다. 조선의 세종 치세에는 중요한 의례의 하나였다. 성균관에서 대사례가 거행되었으며, 성종치세 때부터 사례는 하나의 의식으로 완성되어 강한 교육적 성격을 띠고 정착되었다. 성종8년(1478년)의 기 바깥쪽으로 공을 밀어 당기어 던지는 ‘지피’ 공을공중에서 가격한 후 아래로 드리우는 ‘수양수’ 등의 응용기법도 있었다.? 격구의 경기 형식 : 조선시대의 격구는 현대의 폴로나 중국(당나라)이나 고려 시대의 격구와는 달리 팀 스포츠가 아닌 유형으로 변했다. 고려시대의 격구는 양측에 두 개의 구문이 설치되어 두 팀이 겨루는 팀 스포츠 형태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 그러한 형식은 사라지고 습과와 무과의 시험과목 형태로 조재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격구는 출마표에서 치구표까지 달리며, 비이, 활흉, 방미 등과 같은 기법과 자세를 보여 평가를 받는유형이었다.3) 수박희수박희는 고려시대로부터 계승되어져 왔다. 조선 초기 개국과 함께 무예가 중시되면서 수박희는 선군종목이 되었다. 또한 왕의 탄신일에 종친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수박희를 시키고 상품을 하사하여 무인들의 사기를 북돋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박희는 조선 말기에 들어 전국에 민속경기로 보급되어 스포츠의 성격을 띠고 발달되었다.4) 조선시대 건강법⑴ 도인 체조한국에서 도인이란 용어가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이다. 이 용어는 《고려사》 제 132권 신돈 전에 잘 나타난다. 그리고 조선시대 허준의 《동의보감》 에도 도인법에 대한 다양한 기록이 있다. “도인은 정신통일, 목 돌리기, 마찰, 침 삼키기, 다리의 굴신 동작으로 구성된 치료보다는 예방을 위한 보건 체조의 기능을 한 인위적 운동이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질병에 대한 치료의 문제와 건강에 관하여 큰 관심을 가졌으며, 대유학자였던 이황은 도가 계열의 의서인 《활인심방》을 구하여 도인을 실시하였다. 그 외 허균 등 조선 유학자들도 다양한 유형의 도인을 행하였는데, 《보양지》, 《활인심방》 등과 같은 저술에는 다음과 같은 도인의 내용이 보인다.? 정신 집중법■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고 앉아.■ 악고하고 조용히 정신을 모아라.■ 36번 고치하라.……? 혀를 놀려 침을 삼키고 화기를 돌게 하는 법■ 혀를 저어 물이 솟게 한다.■ 침을 입 가득히 채운다.■ 한 입을 세 번에 대군이나 종친들은 목패에 칠을 한 녹패가, 내응방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붉은 주패가 교부되었다. 방응에 이용되는 매의 종류로는 부리와 발톱이 하얀해청을 비롯하여 송골, 토골 등이 있었으며, 좋은 매는 중국에 조공을 할 때 진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4) 투호고려왕조를 거쳐 조선왕조에 들어 투호는 궁중 오락으로 매우 성행하였다. 태종, 세조, 성종, 중종 등 조선시대의 왕들은 투호를 즐겼으며, 특히 중종은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에 투호를 준비하기도 했다. 투호는 교육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았다. 성종은 “투호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치심에 중요한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투호가 정신적 수련을 위해 중요하게 취급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투호의 교육적 가치에 대한 언급은 중국의 투호 이론서인 사마광의 《투호신격》 에도 잘 나타난다.투호에 임할 때나 화살을 던질 때 성은 태연하여 잔망스럽지 않고 구도 공손하게 하며, 지는 중정에 있게 한다. 비록 오랜 동안은 그렇게 할 수 없다하더라도 익혀야 할 것이니 어찌 치심의 도가 아니라 하겠는가.사마광은 그의 저서를 통해 투호가 마음을 다스리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에도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보아 조선시대에 투호가 성행한 것은 투호를 통해 인격 수양을 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퇴계 이ㅤㅘㅇ 선생의 투호와 관련된 기록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퇴계의 일록에는 투호신중이란 기록이 나타난다. 여기서 신중이란 던진 화살이 신기할 정도로 정확히 호 속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퇴계 선생은 투호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을 통하여 생생하고 의미 있는 체험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퇴계는 투호를 부드러움과 엄함, 오만하지 않음, 승부의 초연함, 남자로서의 태도 등 군자로서의 모든 덕목을 함양할 수 있는 경쟁적 활동으로 인식했다. 이진수박사는 퇴계의 투호에 대한 인식을 탐구한 뒤 다음과 같이 정리해 두고 있다.⑴ 덕으로서의 스포츠투호는 각종 행사에서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하있었다.
고려시대의 체육과 민속 스포츠문화과목명 :학 과 :학 번 :이 름 :교수명 :제출일 :목 차제Ⅰ장 고려시대의 사회와 교육‥‥‥‥‥‥11.고려시대의 사회2.고려시대의 교육제Ⅱ장 고려시대의 무예체육‥‥‥‥‥‥‥31.국학과 향학의 무예체육2.무신정권과 무예의 발달3.무예체육제Ⅲ장 고려시대의 민속 스포츠와 오락……51.귀족 사회의 민속 스포츠와 오락2.서민 사회의 민속 스포츠와 오락제Ⅳ장 마치면서‥‥‥‥‥‥‥‥‥‥‥‥‥9제Ⅴ장 참고문헌‥‥‥‥‥‥‥‥‥‥‥‥‥9고려시대의 사회와 교육1. 고려시대의 사회통일신라는 골품제도의 악습으로 인해 대토지 소유자가 증가하면서 중앙권력이 분산되었고, 점차 민심이 이완되자 백제가 흥기하여 후백제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918년 왕건은 태봉을 세웠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뒤 신라(935), 후백제(936)를 멸하여 다시 통일 국가를 세웠다. 고려(918∼1392)는 호족들이 연합하여 구성한 사회였고, 호족들은 중국의 )관료제도를 받아들였으며, 국가적으로 불교와 유교를 동시에 수용했다. 불교는 수신의 도였고, 유교는 치국의 도였다. 국가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여 과거에 승과를 두었으며, 왕실과 귀족들도 불교를 숭상하였다. 고려는 금속활자의 발명, 상감청자와 같은 도자기 기술의 발달, 역사서의 집필 등 독창적인 문화를 창달하였다. 고려의 사회 계급은 상류층인 호족, 군인계급인 중류층, 평민이었던 하류층, 천민과 노예 계급 등으로 구분되어졌다.2. 고려시대의 교육고려초기의 교육제도는 신라의 교육제도를 계승한 것이었으나 6대 성종 치세의 교육 특징은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문치주의 교육과 사학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유교의 정치 이념은 불교의 공덕사상을 배격하고 도덕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에 초점을 맞추었다. 교육기관으로는 관학과 사학이 있었다.1) 관학⑴ 국자감국자감은 성종 11년(992)에 창건되었다. 7재라는 전문 강좌를 두었다. 여택재, 대빙재, 경덕재, 구인재, 복응재, 양정재, 강예재 등이 7재이다. 국3) 시대까지 5대에 걸쳐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던 )해동공자, 최충이 72세(1055년)로 관직을 은퇴한 이후 9재를 짓고 학당을 설립한 것이다. 후일 학원을 최공도라고 하였다. 최공도의 교육성과가 널리 알려지자 유명한 유학자들이 유사한 학원을 개설하게 되었는데, 그 중 유명한 11개 학원을 더하여 12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 국자감과 향교는 부진했고, 학당은 아직 출현하기 전이어서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360년간 존속한 12도는 고려의 중요한 교육기관이었다.⑵ 서당고려의 서당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목종 6년(1003년) 왕의 교서에 천인의 자제들이 책보를 끼고 스승을 따라 배운다는 기록이 보이고, 인종 2년(1124년)에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 에 민간 자제의 미혼자가 무리로 모여 스승에게 경을 배운다는 기록이 보인다. 서당은 민간 사설교육기관으로 마을에서 초보적인 교육을 하던 기관이었다.3) 과거제도고려의 과거에는 제술업, 명경업, 잡업의 세 종류가 있었다. )제술업과 )명경업은 문관의 등용시험이었고, 잡업은 기술관의 등용시험이었다. 제술업은 주로 시, 부, 송, 책, 론 등 문예를 시험하고 명경업은 유교경전, 잡업은 해당 기술 기능의 학문을 시험했다. 고려시대는 명경업보다 주로 제술업이 우대를 받았고, 그 합격자를 진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교를 치국의 도로 삼은 고려시대에 무과는 일찍 설치되지 않았으며, 고려 말 공양왕 때 무과를 설치했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고려시대의 무예 체육1. 국학과 향학의 무예체육고려시대 국학의 7재 중 무학을 공부하는 강예재가 있었다. 그것이 무학이었다는 것 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고려의 교육기관 성격으로 볼 때 무학을 통해 장수를 육성한 것으로 보인다. 정종 5년 6월조에 용감한 인재에게 궁술과 마술을 교습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향학에서도 궁사와 음악을 즐겼다. 그리고 무인의 선발에서 )수박희의 능력은 인재 선발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2. 무신정권과 무예의 발달고려시대의 중 오문전에서 좌우를 둘러보고 군사훈련을 시키기에 오문전이 좋다며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를 하도록 했다.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왕이 무신들의 불평을 짐작하고 이것으로 후하게 상을 주어 그들을 위로하려 한 것 이었다. 그러자 한뢰는 무신의 왕의총애를 받을까 염려하여 시기심을 품었다. 대장군 이소응이 비록 무인이었지만 얼굴이 마르고 힘도 약해 한 사람과 수박을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자 한뢰가 갑자기 나서며 이소응의 뺨을 때려 계단 아래로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군인들에게 “무릇 문관을 쓴 자는 모조리 죽여라” 고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 이래 무인들이 집권하여 약100년 동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무인정권이 수립되자 무신들은 저마다 사병을 두었다. 사병은 문객을 상층으로 하고, 가동을 하층으로 하였으며, 경대승의 )도방에 이르러 조직화되었다. 도방과 아울러 최 씨 무인 정권의 군사적 핵심 집단이었던 )삼별초가 있었다. 이러한 도방과 군대는 무술을 연마하여 봉건적 체제를 유지했고, 그러한 가운데 무예도 발달되었다.3. 무예 체육고려시대의 무예는 주로 삼국시대의 것들이 계승되었다. 고려시대 무예로 취급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수박, 궁술, 마술, 기사, 기창 등을 들 수 있으며, 격구, 방응, 석전 등도 무예 훈련의 성격을 지닌 체육활동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무인정신은 충, 효, 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고려시대는 불교도 성행하였지만 정치 이념이 유교였기 때문에 무사들에게 요구되는 덕목도 유교적 성격이 강했으며, 대표적인 무예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1) 수박“수박은 한 대에 이미 이론적 체계가 서 있었던 격투기로 진대(BC 3) 이미 체계화된 운동경기로 발달되어 있었다. 고려시대 무용총의 수박도는 구도, 내용, 폼, 복장, 기법 등에서 중국의 것과 비슷하다. 한국의 문헌에 수박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사》 이며, 내리던 관사라는 용어는 고려시대에 와서 열사라는 말로 바뀌어 나타난다. 《고려사》 에는 문종 23년(1018년) 왕이 선화문에 나가서 3위 응양군 공신의 자손과 문반 6품 이하의 무술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시험을 쳐서 등급을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종(1009∼1031 재위) 20년(1029년)부터 문관 4품 이상, 60세까지는 교외에 나아가 활쏘기를 하도록 하였으며, 선종 3년(1086년)에는 양경의 무관을 서울에 불러 동정에서 궁사사열을 하고, 12월에는 문관의 경우도 무관과 같이 하게 하였다. 예종(1105∼1122 재위)은 문무 신하와 시종관들에게 활쏘기를 시키고, 잘 쏘는 자에게 상을 주어 궁술을 장려하였다. 선종(1083∼1094 재위)은 8년(1091년)에 사장을 설치하여 모든 군졸이 익히도록 하였으며, 과녁을 맞히는 자에게는 상을 주도록 하였다. 《고려사》 병지의 기록에는 활쏘기의 능력은 관직의 녹봉과 임용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자질로 평가 받았다.궁술의 장려와 인재 등용 정책 등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 양성과 무관치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궁술이 장려도니 것은 국방력의 강화라는 차원과도 연계되어 있었으나 활터를 설치하고 일반인들에게도 공개한 점으로 보아 군사적 목적 외 운동경기의 성격도 지닌 활동으로 보인다.3) 마술마술은 다른 이름으로 무마, 원기, 마상재라고도 한다. 마상재는 말을 타고 여러 가지 자세나 기예를 보여주는 것이며, 유교를 치국의 도로 삼았던 고려시대에도 )6예의 어에 속하는 승마 능력은 군자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고려시대의 마술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마상재와 격구 등과 연계되어 발달되었다.고려 시대의 민속 스포츠와 오락1. 귀족 사회의 민속 스포츠와 오락1) 격구⑴ 격구의 기원원래 격구는 페르시아의 폴로에서 기원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폴로란 말은 티베트어의 풀루에서 왔다고 한다. 격구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이 언제였는지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략 8∼9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한 국가 방위에 총력을 기울이던 시기였고, 격구가 군사훈련을 위한 수단으로 채택된 이후부터 급속히 확산되었던 것이다.둘째, 귀족들의 오락 및 여가 활동이었다. 격구는 왕, 귀족, 무인들의 오락이나 스포츠의 성격을 띠고 발달되었으며, 오락적 특성도 격구의 성행 배경이 된다. 격구는 신기군의 군사훈련을 위해 채택된 이후부터 고려사회에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예종 11년(1116년)의 기록에는 여성도 격구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난다. 중세 말을 소유한 부유한 계급이 기사였듯이 격구에 참여한 계층은 주로 왕족이나 귀족계급이었다. 예컨대 의종(1146∼1170 재위)의 격구 애호 태도는 도를 넘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는 즉위 4년 9월 북원에 격구를 위한 구장을 축조했으며, 11월에는 궁정의 내시들까지도 격구에 참여하라고 명했다. 그 외 명종(1170∼1197), 희종(1204∼1211), 충렬왕(1274∼1308) 등 많은 고려의 왕과 귀족은 격구를 즐겼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최 씨 무인 집권기에는 한층 더 성행하였다. 무인들은 그들의 기량 향상을 위해 격구를 특별히 장려하였다.⑶ 격구의 폐단격구는 약 200보(250m)가 되는 넓은 구정에서 실시되었다. 고려사에 보이는 구정의 규모를 보면 3만 명이 식사를 할 수 있던 곳, 동서로 수백 보로 된 바둑 판 같은 곳, 4백 보 정도의 규모에 둘레가 수리에 달하는 곳이었다. 당시 부녀자들이 격구를 할 정도로 대중화 양상을 보이면서 점차 사치스런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특히 최 씨 무인 정권기에는 격구의 사치성이 극에 달했다. “최이는 격구장을 만들기 위하여 민가 수백채를 점탈하였으며, 이곳에서 습전을 시키고, 습전을 마치면 주식으로 향연을 펼쳤다. 그의 아들 최항도 자기 집에 고관들과 연회를 하면서 격구 구경을 했는데, 당시 )마별초 중에는 금으로 장니를 장식하고, 금으로 만든 꽃잎을 말머리와 꼬리에 꽂은 자도 있었다.” 고 한다. 결국 고려시대의 격구는 무예적 요소와 유희적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발달되었으나 되었다.
American football과목명 :학 과 :학 번 :이 름 :교수명 :제출일 :목 차선정이유, 개요 ……………………………………………………………………………………1미식축구의 역사 ………………………………………·…………………………………………1- 대학미식축구의 탄생- 초기의 발전- 룰의 변천- 1900년대의 발전과정- 2차 대전 후의 미식축구- 현재의 대학 미식축구- 프로팀의 탄생- 최초의 프로팀- NFL의 탄생- 1945년까지의 성장- 전후의 도약- 60년대의 성장기- 90년대 호황기- 우리나라 미식축구 역사볼(Bowl)이란? ………………………………………………………………·……………………9미식축구 경기 시간은? ……………………………………………………………··…………10미식축구 선수의 장비 착용 …………………………………………………………··………12미식축구의 공격 포지션 ………………………………………………………………····……12미식축구의 수비 포지션 …………………………………………………………………····…14득점의 종류는 ? ……………………………………………………………………………··…16경기의 시작은 ? …………………………………………………………………………··……18퍼스트다운(First Down) & 다운(down) ……………………………………………···……19공격방법, 공격권은? …………………………………………………………………···………19포스다운(Fourth down, 4번째 다운) ………………………………………………………21스코어링 드라이브(Scoring drive) ………………………………………………·…………21심판의 명칭과 역할 …………………………………………………………………·…………22경기 용어 총정리 ……………………………………………………………………·…………23마치면서 ………………………………………………………………………………·…………27참고문헌 및 출처 ……………………………………………………………………·…………28선정이유풋볼이란 럭비풋볼(rugby football:럭비), 어 위하여 각 대학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Inter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1910년에는 National Collegiate Athietic Association 으로 바뀜)과 American Intercollegiate Football Rule Committee(현재 )NCAA의 산하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이 조직의 주관 하에 이듬해부터 Hurding, Mass Formation과 같은 위험한 플레이와 작전은 금지되기 시작하였다. 반면 Forward Pass 플레이 같은 넓게 펼쳐지는 경기가 합법화 되었다. 또한 경기 시간도 70분에서 60분으로, 심판의 수도 3명에서 4명으로 변경하였다.1912년에는 양측 골라인 간격을 100야드로 줄였으며 골라인 후방에 10야드 앤드 존을 새로 추가하여 포워드 패스에 의한 캐치도 터치다운으로 인정하였다.공격 시리즈도 4번의 공격에 필수 전진거리를 5야드에서 10야드로 변경하였고(패스 플레이의 합법화에 따른 공격횟수 및 전진거리의 추가), 득점도 터치다운의 경우 6점으로 올렸다.1900년대의 발전과정새로운 룰의 적용에 따라 미식축구 스타일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면 포워드 패스가 없었던 이전의 전형적인 러닝백은 좁은 지역에서 힘과 돌파력을 가지고 밀고 나갔으나, 포워드 패스에 대비한 넓은 지역의 수비 때문에 러닝백은 스피드와 유연성 그리고 순발력을 갖추어서 독주가 많이 나왔으며, 따라서 관중들의 흥미도 더욱 많아졌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선수로는 인디언 출신인 Jim Thrope 를 들 수 있다.1913년에는 노틀댐 대학의 QB Gus Dorais와 End Knute Rockne 의 환상적인 포워드 패스 플레이는 이 대학을 일약 미식축구의 강호로 부각시켰다. 이들은 독자적인 자신들의 패스 플레이를 고안하여 엄청난 연습으로 둘만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냈으며 이후 미식축구에서 패스 플레이가 보편화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이전의 미식축구는 둔탁한 탱크와 저돌적인 보병에 의한franchise)는 100달러이었는데 팀들은 다음과 같다.Canton, Cleveland, Dayton, Akron, Massillon, Rock island 이상 6개 팀은 오하이오 주, Decatur(현 시카고 베어즈의 전신), 시카고(현 아리조나 카디날즈) 이상은 일리노이 주, Hammond, Muncie이상은 인디아나 주, 그리고 뉴욕 주의 Rochester등이다. 따라서 NFL은 Canton을 현 프로팀의 요람으로 인정을 하고 있는데 NFL 명예의 전당에는 Canton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The Pro Football Hall of Fame, dedicated in 1963, is here." 그러나 APFA는 매우 조직이 느슨하여 1921년에 다시 정비를 하여 Joe F. Carr가 회장으로 취임을 하였고, 새로운 팀으로는 콜럼버스, 신시네티, 디트로이트, 버팔로, 그린베이가 가입을 하였고, 동시에 Massillon, Hammond, Muncie는 탈락 되었다. 또한 협회 이름도 오늘의 National Football League(NFL)로 개정이 되었다.그리고 회장인 Carr는 1939년 타계할 때까지 NFL을 이끌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NFL 팀들은 새로운 팀이 생기고 기존의 팀이 없어지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제까지 연고지를 유지하고 있는 팀은 시카고의 베어즈와 그랜베이 팩커즈 뿐이고 시카고 카디널즈는 세인트루이스를 거쳐 애리조나로 연고지는 옮겼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팀이다. 이 당시 베어즈와 캔톤이 NFL의 강팀으로 군림을 하였지만 진정한 NFL 챔피언은 없었다. 서로 간에 경기를 전부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NFL의 전기가 마련된 것은 1925년 일리노이 대학의 하프백으로 스타플레이어인 Red Grange의 시카고 베어즈의 입단이었다. 시카고의 Wrigley Field에서 카디널즈와 벌린 그의 데뷔전에는 그의 플레이를 보려고 무려 36,000명의 입장객이 들어찼으며, 다음 주 뉴욕의 폴로 경기장에서 열린 뉴욕 매년 1월초 로스앤젤레스 교외의 파사테나의 로즈 볼 스타디움에서 대전하며 매년 10만 명 이상의 관중이 운집 하며, TV시청률 또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로즈 볼의 최다 출전 대학은 USC(남캘리포니아대학)과 UCLA(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 분교) 대학이며, 경기 전에 벌어지는 장미 축제는 수백만의 인파가 몰리는 퍼레이드로도 유명하다.2) 코튼 볼(Cotton Bowl)코튼 볼은 1937년 제1회 대회가 열린 이후 올해로도 55회로 접어들고 있다. 코튼 볼 게임은 미국 남부 지역의 최대 축제이고, 이 경기에 출전하는 두 팀은 사우스웨스트 리그의 우승팀과 다른 컨퍼런스 소속의 상위팀을 초청하여 한판의 승부를 가리는데, 이 코튼볼은 텍사스 주의 달라스 시의 코튼 볼 스타디움에서 벌어지며 이 지역의 강팀은 텍사스대학과 노트르담대학이다.3) 슈거 볼(Sugar Bowl)슈거 볼은 1935년 제1회 대회를 개최한 이후 올해로 57년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으며, 이 경기에 대 전하는 두 팀은 사우스웨스트 리그의 우승팀이 다른 지역의 리그 우승팀을 초청하여 한판의 승부를 가린다. 슈거 볼은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의 항구 도시 뉴올리언스에 있는 세계 최대의 실내 경기장인 슈퍼 돔(Super Dome) 경기장에서 벌어진다.4) 오렌지 볼(Orange Bowl)미국 남동부 지방의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 시에서 벌어지는 오렌지 볼 게임은 4대 볼 게임 중 마지막으로 벌어지는 게임이며, 이 게임에서 대전하는 두 팀은 빅 에이트의 우승팀이 타 지역의 유명한 팀을 초청하여 벌이는 한판의 승부로써 이 경기의 승자가 미국에서 최고의 팀이라고 할 정도로 권위가 있는 경기이다.오렌지 볼은 1953년 시작되어 올해로 57회째이며 이 지역의 강팀은 오크라호마대학과 알칸 사스대학이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위에서 말한 4대 볼 게임(Bowl Game) 이외에도 유명한 볼 게임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선 볼(엘파소), 개토 볼 (잭슨 빌), 애플 볼(시애틀), 리버티 볼(멤피스), 블루 , 볼 캐 리어를 태클한다.2) 패스 플레이시에는 스크리미지 라인을 돌파하여 패서에게 접근하여 블로크 시키 거나 색(Sack)시킨다.3) 짧은 패스를 방어해야 될 경우, 자기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리시버 스크리미지 라인으로 수비해야 한다.라인 베커는 러닝 플레이 수비의 2차적인 임무를 수행하거나, 짧은 패스에 대한 1차적인 책임자이다. 라인 베커는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미들 라인 배커, 인사이드 라인 배커, 아웃사이드 라인배커 또는 위크사이드 라인 배커 또는 스트롱사이드 라인 배커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스크리미지 라인으로 공격팀의 1명 이상의 리드 블로커가 나오고 있을 경우 리드 블로커 후방에 위치하고 있는 볼 캐리어에게 직접 접근하지 말고, 먼저 리드 블로커를 저지시켜야만 좌우측에 위치하고 있던 LB들이 볼캐리어를 태클할 수 있게 되고 리드 블로커를 저지시키지 않고 직접 볼 캐리어에게 접근하다가 볼 캐리어를 태클하지 못하거나 공격 라인맨에게 블로크 당하게 되면, 리드 블로커들이 DHB나 다른 LB를 블로킹할 수 있게 되어 볼 캐리어는 더 전진하게 된다. 단 리드 블로크와 볼 캐리어와의 거리나 각도가 좋지 않을 경우 볼 캐리어를 직접 태클하여도 된다. 라인 배커의 일반적인 위치는 수비 라인맨 후방 4-5야드 정도 떨어져 위치하게 되는데, 이 거리는 공격팀의 러닝 백과 라인맨과의 거리가 대등하게 잡은 것이다. 왜냐하면, 공격팀의 볼 캐리어나 리드 블로커들이 자기위치에서 출발하여 스크리미지 라인에 도착되는 시간과 LB가 스크리미지 라인에 도착되는 시간이 같아지도록 하기 위함이고, 만약 라인에서 떨어진 거리가 5야드보다 가깝게 위치하게 되면, 러시 플레이 때 리드 블로커와 마주칠 때 탄력을 붙일 수 있는 거리가 확보되지 않게 되어 힘이 부족하게 되고, 반대 방향의 오프 태클이나 앤드런을 수비하려면 자기 위치에서 후방으로 움직여야 되므로 효과적인 수비를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수비 라인맨이 공격 라인맨이나 리드 블로커에게 뒤로 밀리게 되면, 전방으로의 시야도 가준다.
체육의 개념체육이 다른 학문에 비하여 오랜 세월 동안 개념과 용어가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체육이 단지 여러 가지 능률운동, 스포츠, 미용체조 등과 같은 것이 체육이라고 해석되어 왔다. 처음에 체육이 신체문화로 불리었으며, 음악 및 율동에 맞추어 체조를 통하여 신체를 아름답게 발달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그러나 그 후 체조는 너무 딱딱하고 형식적 이라고 해서 무용 및 여러 스포츠가 영국에서 소개되어 퇴보를 보게 되었다. 아직도 신체문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는 하나 이는 주로 보디빌딩을 의미하게 되었다.한때는 신체훈련이란 용어가 유행되어 주로 신체적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신체문화나 신체훈련 등은 인간의 몸과 마음 중 오직 몸에만 국한시킨 감이 있다. 즉, 신체에 의한 교육으로 간주될 수 있다.그러나 1930년대에 와서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이며 교육학자인 듀이의 영향을 받아 체육학자 귤릭, 우드, 및 허더링턴등에 의해서 신체에 의한 교육은 신체를 통한교육으로 바뀌어져 몸과 마음 전체를 발달시키는 전인교육화가 되었다.체육이란 운동욕구라는 자극에 대하여 신체운동이라는 행동으로 반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성장 즉, 바람직한 인간왕성 또는 전인적 인간을 육성하려는 교육을 의미한다.오늘날 체육의 개념이란 대근육활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건강체는 물론이고 심리를 수반하는 지적인 면, 대인 관계에 있어서의 사회적인 면을 생각하게 되고 원만한 인품 그리고 나아가서 민주적인 하나의 인격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체육을 인간의 신체활동 그 중에서도 대근육활동을 수단으로 하는 신체의 교육인 동시에 신체에 의한 교육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출처 : 생활체육 석춘희 저 - 학문사)스포츠의 개념예술이나 과학, 유희도 여가에서 생긴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여가에 의하여 인간의 정신과 문화는 성장되어 갔다. 따라서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 나라의 국민이 어떻게 여가를 갖게 되며,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고찰하면 그 국민의 문화수준을 알 수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렇듯 중요한 여유시간을 우리는 무사히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이 여가를 바르게 선용하여 국민문화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이 여가활동에는 해방활동, 감상활동, 창조활동, 봉사활동의 4분야가 있으며 이를 통하여 여가를 선용하고 문화수준의 향상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스포츠를 사회적 현상으로서 정확히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스포츠의 조건들을 포함시킬 수 있는 정의가 필요하다. 현재 가장 널리 쓰이는 스포츠의 정의는 스포츠가 제도화되어 있는 규칙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는 인간의 경쟁적 신체활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스포츠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분류해 보는 것은 스포츠 현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첫 번째 분류는 스포츠 활동을 구성하고 있는 신체기능, 전술 및 확률의 구성 비율에 따라 신체기능을 중시하는 스포츠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 분류방법에 따르면 스포츠는 게임이나 놀이에 비하여 확률보다는 신체기능이나 전술에 의존하는 것이 많다.두 번째 분류는 운동 기능의 탁월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하는 육상 및 각종구기 스포츠와 같은 기능 스포츠, 상대방과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투쟁을 통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권투, 검도 등과 같은 투쟁스포츠, 환경이나 상황에 도전하고 극복하려는 수영, 요트 등과 같은 극복 스포츠, 그리고 신체 활동의 구사를 통하여 인간의 이념과 감정을 표출하고 전달하려는 무용, 리듬체조와 같은 율동적 무용체조로 분류하는 것이다.
톨스토이 단편선을 읽고...(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과목명 :학 과 :학 번 :이 름 :교수명 :제출일 :어떠한 종교도 믿지 않는 저도 이 글을 읽고 난 뒤 처음 들었던 느낌은 편안함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믿고 따르면 이 글의 주인공인 마르틴 아브데이치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물론 마르틴 아브데이치도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을 아름답게만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는 창이 하나 딸린 지하의 작은 방에 살고 있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솜씨도 좋았고 좋은 재료를 쓰는 데다 가격도 저렴하며 무엇보다도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항상 일거리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가게를 차리기 전, 주인 밑에서 일할 때 그의 아내가 세 살배기 아들을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것으로 비극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셋방살이를 하며 애지중지 키웠던 아들이 겨우 아버지의 일을 도울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만 병에 걸려 일주일을 꼬박 앓다가 끝내 죽고 마는 일이 생깁니다. 그는 가족을 모두 잃고 나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하느님에게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자기 같은 늙은이의 목숨은 거두지 않고, 하나뿐인 귀여운 아들의 생명을 거둬갔냐며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이 그에게 찾아가 낙담하고 있는 건, 자네가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살려고 하기 때문이며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한다고 꾸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이후 성경을 열심히 읽고 몇 번의 사건을 통해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가 얻은 깨달음을 한마디로 하자면 사랑입니다.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죽고 싶을 정도의 고난도 있을 것이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부정적인 요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선 사랑으로써 모든 것을 바라보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슬픔도 잊게 되고 어떤 시련이 닥쳐도 끄떡없을 것이라는 교훈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요즘 우리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본인의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본인만이 더 나은 삶을 살기위해 주변사람을 헐뜯고 짓밟는 이기적인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 또한 무조건 그렇지 않다고 할수 없으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많이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