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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리비우스의 생애와 사상
    폴리비우스(Polybios, BC 204~BC 125 ?)Ⅰ.생애폴리비우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카디아(Arcadia)의 메갈로폴리스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리코르타스는 유력한 지주 정치가이자 지배층의 일원이었다. 덕분에 폴리비우스는 군사와 정치에 심층적으로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폴리비우스는 그의 아버지인 리코르타스가 지도자로 있었던 아카이아 동맹의 기병대장 이었기 때문에 제 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하지만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패한 직후 인질로서 로마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는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Aemilius Paullus)의 저택에 있다가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피키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와의 친분으로 그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로마의 고위층과 친분을 맺고, 스키피오 가문의 후원으로 지중해 여러 도시를 돌아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며, 카르타고의 멸망도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로 귀국을 허락받을 때까지 16년간 로마에서 살았으며, 로마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그는 작품을 구상하고 그 일부를 썼다. 기원전 150년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친 로마적 경향으로 인해 동향인들로부터 배반자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Ⅱ 폴리비우스의 정치사상1)정체순환론폴리비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열거하는 단순 정체인 이상적인 군주정(君主政), 귀족정(貴族政), 민주정(民主政), 그리고 여기서 각기 변질 타락된 정체들인 참주정(僭主政), 과두정(寡頭政), 중우정(衆愚政)의 6개 정체에 정체 순환의 출발점으로서 원시 군주정을 더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정치사회는 홍수, 역병, 흉작이나 이와 유사한 다른 원인들 때문에 인종이 파멸해 모든 지식과 사회 제도가 소멸된 후 생존자들이 서로 모여 다른 사람을 통치할 수 있는 지배자를 뽑고, 이때 지배자의 통치는 힘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원시 군주정 이라고 불러야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족과 사회관계가 발전하여 군주정의 아이디어가 생긴다. 또 선과 정의, 의무의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지도력이 가장 강력한 인물이 그의 권위를 그러한 도덕적 개념으로 바꾸게 될 때 바꾸어 말하면 이성이 잔인함이나 힘보다 강하게 될 때 군주는 왕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왕의 후손들은 인민보다는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생각을 품게되어 감정이 폭력 행사로 나타나게 되고 참주정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 다음 단계는 고귀한 자들과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들 ,그리고 가장 용기 있는 자들이 폭군이 되어버린 참주를 추방하고 귀족정을 수립한다.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들 자손 또한 불행을 경험해 보지 않아 결국 이익추구 아니면 술, 방탕 등에 빠져 귀족정은 과두적인 과두정으로 변질된다. 마침내 인민이 봉기하여 그들을 몰아내고 민주정을 수립한다. 그러나 또다시 제1,2 세대가 지나감에 따라 자유와 평등은 진부한 것이 되어 더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뇌물을 뿌림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선동 정치가가 출현, 민중은 그들을 용납하므로 인해 부패 하게 되고 중우정이 된다. 모든 것은 폭력의 지배로 돌아가게 되고 ,권력욕, 인민의 타락, 뇌물 증가로 인한 폭력, 학살, 약탈의 지배가 도래하여 결국 완전한 야만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야만 상태의 유일한 구원자는 힘있는 군주이다. 이렇게 해서 순환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2) 혼합정체론폴리비우스에 있어 역사를 움직이는 큰 힘은 정치적 면에 집중되어 있다. 폴리비우스는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나 정체는 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역사를 정치체제의 변화로 대변되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폴리비우스가 정치권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려 했던 것은 사회의 핵심을 정치적 집단으로 파악하고 국가의 기원이나 정체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인 데서도 드러난다. 정체순환론에서 보이는 그가 생각한 정치체제의 본질은 권력의 배분과 주로 관련되며 사회경제적 문제를 거의 개입시키지 않은 것이었다. 로마의 번영에 대해서도 그는 정체순환론의 입장에서 바라보았는데, 로마 역시 형성, 성장, 전성, 그리고 언젠가 뒤따를 것이 확실한 더 나쁜 상태로의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 말하며, “만일 이와 같은 원리들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특정한 정체에 이런 일 또는 저런 일이 일어나게 될 시기 추정에 대해서는 실수를 범할지 모르나 그가 만일 적대감이나 질투심을 가지 않고 공저하게 판단한다면 그 정체의 성장이나 쇠퇴의 단계에 관해서나 또는 그것이 앞으로 변화해 갈 형태에 대해서는 실수를 범하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또한 그의 혼합정체론을 살펴보면,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은 좋은 형태이지만, 이러한 정체들은 세월이 흐르게 되면 각각 사악한 형태인 참주정, 과두정, 폭도정치로 변해가지 않을 수가 없다.' 라고 했다. 폴리비우스는 로마의 국제가 군주정과 귀족정과 민주정이 합쳐진 뛰어난 정체라고 분석하면서 이 세계가 균형을 이루어 몰락하려는 경향을 상호 막아 준다고 생각했다.
    인문/어학| 2012.10.30| 2페이지| 1,000원| 조회(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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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부모를 읽고
    ‘대한민국 부모’를 읽고윤리교육과20082614김 윤 기대한민국 부모라는 제목을 봤을 때에는 그냥 부모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서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책 속에는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입시제도를 비판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 책의 독자는 대한민국의 부모님들과 사범대생이라면 꼭 읽어보아야 할 만한 책 이다. 교사를 꿈꾸는 대한민국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아니 그 보다 더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 책의 서문에서는 아이로부터 부모들이 독립한다면 책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통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독립한다는 말을 쓰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문장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읽어나가면서 처음에 썼던 말이 이해가 되었다. 과도한 교육에 대한 부모의 집착이 아이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이. 결국, 이러한 부모님의 압박은 아이를 병들게 하고 가정 전체를 병들게 만들게 한다. 또한, 이러한 억압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은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일탈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게 되어 우리나라의 청소년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하지만, 나도 고등학생인 동생에게 만날 때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로 안부 인사를 하는 내가 떠올랐다. 이 책에 나오는 이상한 부모들과 내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소위 말하는 ‘꼰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도 역시 물들어 버린 것 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게 되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나에게 커다란 의미가 되었다.씁쓸하게도 읽어가면서 우리 부모님이 생각났다. 부정하고 싶지만 나의 부모님도 공부로 모든 말을 결론짓는다. 나는 이 책을 부모님께 선물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빨리 나와 동생으로부터 독립시켜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말이다.부모님의 공부에 대한 집착이 부모님만의 잘못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과도한 경쟁을 만들어 냈고 부모님들은 자신들보다 잘 사는 자식들을 만들기 위해 이 경쟁에 뛰어든 것뿐일 것이다. 물론 동기는 좋았으나 이러한 경쟁 속에서 아이들 스스로는 행복하지 않다는 점이다. 동기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지만 결과는 아이들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머니들의 자격 등급은 자녀의 대학등급과 같다고 한다. 부담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부담감 속에서 어머니들은 강요하고 억압하고 있고 부담감은 아이들에게 전달되고 마치 부모자식관계가 채무관계처럼 되었다는 것 이다.나는 시골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뉴스에서나 들어본 고액과외를 받거나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 장애는 겪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했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명문대에 입학한 아이들은 행복할까? 지금의 나보다 행복하다고 그 아이들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학벌을 중요시 하는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살아갈수록 그들이 행복할지 모른다.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한 대다수의 아이들은 낙오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까?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위해서는 학벌중시의 풍토를 없애야 할 뿐 아니라 직업의 계층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위 계층의 직업을 얻기 위해 우리들은 끊임없이 경쟁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책에서는 아이들에게 노동의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노동 그 자체로서 가치를 깨닫도록 하여 직업의 계층을 사라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요즘 아이들은 ‘개가 부럽다’라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학생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인간이 개를 부러워한다는 말을 할까하고 씁쓸했다. 공부를 잘하려면 마음의 병을 한두 가지 쯤 얻어도 된다는 식의 부모님의 생각이 정상이라고 보이는 사회, 이것이 건강한 사회인지 의문이 든다. 집에서도 계속되는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 집은 기숙학원이 아닌 안식처이며 부모님은 감시자가 아닌 치유자가 되어야하는데 이상하게 변화되었다.아이들은 대학에 입학만 하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고등학생인 남동생도 그러한 생각을 한다. 이러한 것을 보면 대학생인 나는 말해주고 싶다.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 동안 대학교를 다니면서 많은 학생들이 휴학을 하거나 자퇴하는 모습을 꽤 많이 보았다. 대부분의 이유는 학교를 왜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말과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또한 고등학교 때 성적에 맞추어 들어온 학교이기 때문에 뚜렷한 목표나 학문에 대한 관심으로 이 과를 지원한 것은 아니다. 대학을 누구나 가니까 가는 것이다. 우라나라의 교육은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찾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 나가는데 도우미 역할을 초, 중, 고에서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인문/어학| 2012.10.30| 2페이지| 1,000원| 조회(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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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워크아웃요약 및 서평
    Ⅰ. 사회주의 거울에 비친 북한1. 소련 공산주의는 어떻게 사라졌나1917년 공산혁명 당시에도 공산당이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지식인들도 공산당 정권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그 이유는 1930년대는 소련 교육제도가 폭발적인 성장을 보인 시대로 당시 젊은 지식인들은 대게 노동자 아니면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교유그이 기회를 준 체제에 충성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식인들은 스탈린의 숙청과 농민들의 기아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불가피한 희생으로 보았다.공산주의에 대한 믿음 점차 사라져1950년대에 들어와서 소련 사람들의 의식은 바뀌었다. 해외로 파병되었다가 돌아온 수백만의 소련 사람들은 자본주의 국가의 생활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직접 보았고 해외의 정보도 소련의 생활수준이 비교적 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1950년대 말의 비(非) 스탈린주의 정책은 공산주의 이념의 마지막 부흥을 가져왔다. 1960년대 성인이 된 소련 사람들은 젊었을 때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으나 세월이 갈수록 소련체제에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이 들은 1980년대에 들어와 공산주의 붕괴를 위한 개혁 운동을 시작하였다.소련사회에서는 계급적 차이는 심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습까지 이어지게 되었다.2. 그 많던 공산주의자들 어디로 갔나수십 년 동안 공산주의 사상에 충성을 맹세를 하곤 했던 2천만 명에 달했던 소련 공산당원 중에는 오히려 공산주의의 몰락을 환영한 사람들이 많았다.1950년대에 들어와 공산당에 입당하는 것은 정치이념과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공산주의 사상보다는 초강대국이 된 소련의 국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소련 체제를 지지했다. 당원만 중요직을 역임하는 체제하에 공산당 입당은 주로 출세의 길을 열어 주는 하나의 ‘기회’에 불과했다. 이들은 1980년대 말 공산당 체제가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공산주의 사상을 헌옷처럼 벗어버렸다.1991년 이후의 러시아 공. 1953년에 이승엽 사건이나 1955년 박헌영 재판이 대표적이다.1950년대 초 소련의 압력이나 영향 때문에 신흥 공산권 국가들은 거의 모두 이러한 재판을 진행하였는데, 실권을 잡은 독재자들은 정치적 경쟁자들을 미국간첩이나 반소 파괴 분자로 몰아 숙청했다.이러한 재판극은 동유럽에서도 모스크바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라 실시됐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서 파견된 고문단에 의해 계획되었다는 사실이 새로운 공개 자료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미국의 ‘쓸모 있는 바보’ 래티모어물론 1천만 명이 넘는 소련 정치범 중 ‘재판극’을 받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정치범 딱지가 붙은 사람들은 10~15분 동안의 비공개 재판을 거쳐 장기수나 사형을 언도받았다.소련 당국자들은 소련에 수용소가 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1944년 여름 소련 정부는 미국 조사단의 북방 시베리아에 위치한 수용소 방문까지 허락했다. 물론 사전에 미국 조사단에게 보여줄 것을 공연처럼 준비했고, 어떤 경우에는 수감자들을 경찰관으로 바꾸기까지 했다.게다가 당시 미국 조사단 단장은 래티모어 교수 였는데 그는 대표적인 쓸모 있는 바보, 즉 친공 지식인이었다. 래티모어 같은 사람은 수용소의 실태를 노출할 뜻이 전혀 없었다. 또한 당시에 소련의 동맹국가로서 나치독일과 싸우는 미국 정부는 소련의 이 같은 사실이 노출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래티모어의 거짓 선전은 결국 미국의 자칭 ‘진보’의 이익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략에 필요한 것이었다.북한은 스탈린 제도보다 뒷걸음북한의 정치범 통제제도는 세월이 갈수록 소련과 달라졌다. 1950년대 말 이후 북한 정권은 법적인 격식을 갖추려 하지 않았다.소련 체제를 만든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민주운동 출신 지식인들이었다. 하지만 북한을 만든 사람들은 마오쩌둥의 혁명주의에 물든 연안 출신이거나 만주 유격대 투쟁 시절 폭력을 자연스럽게 접한 빨치산 출신들이었다.6. 모스크바의 부엌과 자유 그리고 북한의 시민사회구소련과 북한은 단순하게 말하면 공산국가다. 과거 북한의 공산주의는 소련에서 강아의 대한반도 정책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995년 쯤부터 러시아는 북한과 외교관계를 개선하였는데, 여러 경우에 북한 정권의 입장을 지지해왔다. 그렇게 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을 반대한는 것이 국내적으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인데, 잘 알다시피 북한은 전 세계적으로 반미사상이 강한 국가라는 사정과 관련이 있다.최근 신흥 친북세력이 등장하고 있다.11. 북 선전물, 러시아 지식인들의 최고 웃음거리1945년까지 소련은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련 사람들의 북한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소련 사람 대부분은 북한이 ‘미제의 침략’을 받았다는 선전을 그대로 믿었다.북 우상화 선전물, 소련 사람들 유머용으로1960년대 들어와 소련 국민, 특히 소련 지식인들은 스탈린 시대를 악몽처럼 기억했다. 그래서 스탈린주의 정책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마오쩌둥의 중국이나, 김일성의 북한은 아무런 공감을 얻지 못했다.당시 소련 사람들은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선전물을 기묘한 눈길로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스스로 북한이 국제적으로 망신거리가 되기 위해 선전한 꼴이었다.러시아 대북 관점, 실용주의 우선소련 해체 이후 9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의 대북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실망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북한 민주화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우려가 별로 없고 연해주에서 숨어 사는 탈북자들을 독재의 희생자라고 보기보다는 불법체류자, 불법입국자로 보며, 그들의 송환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12. 동유럽 붕괴, 북한과 무엇이 다른가북한 사람들은 여전히 김 부자 체제에서 살고 있다. 1991년의 북한을 현재의 북한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크다.자유의 확대와 시민사회의 싹북한은 절대적 통제가 체현된 사회이다. 반면, 소련은 1940년대 말에도 농민이 아닌 도시 주민들은 국내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고 외국 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라디오도 일반 가게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1960년대에는 사회적 자유의 공간이 더제는 남한 사회에서 북한을 보는 눈이다. 남한도 중국과 러시아처럼 북한과의 관계에서 무관심을 볼 수 있다.북한 정권의 지속성은 남한 주민들의 단기적인 이익을 대표하고 있다. 북한 체제 붕괴는 수많은 난민과 사회 혼란을 초래할 수 있고, 붕괴 후 북한 경제 복구는 너무 어렵고 비싼 과제이기 때문이다. 또 결정적인 위기에 직면한 북한 정권이 전쟁도 할 수 있다는 위협이 없지 않다.북한의 약자를 방기하는 한국의 좌파민주노동당으로 대표하는 남한의 자칭‘진보세력’ 일부는 북한 체제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남한에서는 1980년대의 반미친북 민족주의가 아주 심해서 좌파에 이러한 유산이 남아있다. 20년 전 북한의 노동당 통일전선부에서 제작한 거짓말을 믿었던 사람들은 지금은 의식을 좀 바꿨지만 북한의 실제가 평양의 선전과 어느 정도로 거리가 먼지 아직도 잘 모른다.한국 좌파들은 스스로를 약자들의 보호자로 묘사하지만 북한의 약자는 전혀 보호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3. ‘탈김 시대’ 좌파가 할 일은20여 년 후의 북한이 어떻게 될까 고민하면 두 개의 시나리오가 가능해 보인다. 하나는 북한에서 친 중 개발독재 정부의 탄생이며, 또 하나는 체제 붕괴가 초래할 대한민국으로 흡수통일이다.좌우파가 함께 장기적인 목표를 성취해야 한다.탈 김정일 시대에 좌파도 할 일 있을 것북한 복구사업에서 좌파 세력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다양하겠지만 북한에서 노동 운동을 진행하는 것만큼 중요한 사명도 없을 것이다.북한 체제가 무너진 다음 중국과 경쟁하기 어려워진 남한의 중소기업을 비롯한 외국기업은 북한에 진출하여 북한 노동자들을 ‘값싼 임금’으로 고용할 것이다. 이러한 투자 덕분에 수많은 주민들의 생활이 좋아지고 북한 지역의 경제가 활발해질 것이기 때문이다.시간이 지나면 북한 노동자들은 불만을 느끼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불만은 도덕적인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입장에서도 위협요인으로 볼 수 있다. 남한보다 어려운 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남한 한 정부는 핵무기를 군사 억제수단으로 보기도 하고, 해외에서 더 많은 양보를 얻기 위한 협상카드로 보기도 한다.1990년대 말까지는 협상카드 역할이 보다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994년 10월에 북한 측은 핵 활동 동결이라는 대가로 원조를 약속한 제네바기본합의문을 체결했다.그러나 2000년 북한의 사정은 매우 달랐다. 북한은 중국에서도 남한에서도 원조를 받았다. 중국과 남한은 북핵 개발을 결코 환영하지 않지만 평양 정권의 붕괴 그리고 이 붕괴가 초래할 불안정을 핵보다 더 큰 위협으로 느꼈다.북한은 핵 포기로 잃을 것이 늘었다첫째, 평양은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미국의 공격을 두려워하게 되면서 절대적 억제 수단인 핵무기의 전략적 가치가 커졌다.둘째, 핵무기를 포기하면 앞으로 국제사회에 압력을 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셋째, 핵실험을 국내적으로 체제 유지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북한은 충분한 원조와 보상을 받을 경우에 핵 개발의 동결에 합의할 가능성이 높다. 억제 수단이나 정치적 압력 수단으로 쓰기 위한 핵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에 몇 개만 숨기고 있어도 충분하다. 따라서 북한 입장에서는 더 많은 핵무기를 생산할 필요가 없으니 연구 시설을 동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생산한 무기는 그대로 보유할 것이다.6자회담이 할 수 있는 역할포스트 김 시대가 언제 어떻게 올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시대가 올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한국인 직면한 여러 도전과 문제를 미리 살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과 기구를 준비해야 한다.이러한 기구가 6자회담이 될 잠재력이 있다고 보인다. 6자회담의 참가국 명단에는 남한을 비롯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한반도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들이 모두 포함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6자회담은 북핵뿐 아니라 모든 북한 관계 문제들을 토론할 포럼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이다.6. 중국과의 영토논쟁에서 취할 한국의 합리적 외교1990년대 초부터 남한에서 ‘백두산은 우리 땅’ ‘간도는 우리 한다.
    독후감/창작| 2012.05.07| 28페이지| 2,000원| 조회(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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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표축제
    Hi Seoul 페스티벌서울에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300여개의 다양한 축제가 각 구, 동에서 계절 마다 열리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축제들은 서울 전체를 대표하고 시민들이 공동체 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축제로는 한계성이 있다. 이러한 지적에 따라 1994년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해 각계 각 층의 시민, 전문가, 학계의 의견을 수렴해 한양 천도일인 10월28일을 ‘서울 시민의 날’로 정하기로 하여 시민들의 긍지와 애착, 시민들의 일체감을 꾀하는 축제를 만들었다.제1?2회 시민의 날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인해 간단한 기념식만 가졌고, 1998년 제5회 행사 때 각계 시민 대표 40명으로 시민의 날 행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이후 2002년까지 시민자율축제로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진정한 ‘축제성’을 담보해내지 못한다는 지적속에 ‘2002월드컵’은 새로운 시민축제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월드컵 기간 동안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모여 공동체를 몸소 체험하는 진정한 시민 축제를 만끽할 수 있었다.이를 계기로 ‘서울 시민의 날’을 하나의 축제로 승화시키고 계절적으로도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5월로 옮겨 시민이 주인이 되고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하이서울페스티벌’을 만들고 나아가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으로 개발함으로써 서울을 찾는 내외국인은 물론 축제를 통해 서울을 찾고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문화브랜드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연도별 축제목적2011년에는 봄을 부르는 몸짓, 봄짓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한강을 중심으로 서울전역에서 서울시민을 물론 국내외 관광객들과 함께 몸짓으로 소통하는 국제적 넌버벌(비언어극) 공연예술축제로 개최되었다.문제점하지만, 상징성 확보에 따른 프로그램 구성 및 연계성 강화, 홍보미흡, 자원봉사자 운영시스템 부족, 잡상인, 쓰레기, 소음, 교통정체 문제 해결, 비상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 미흡 등의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서울드럼페스티벌서울드럼페스티벌은 1999년 이래 올해로 13회째를 맞이하고 있다. 서울의 문화 정체성 및 역사성, 국제성을 널리 알리고, 전 세계 타악 공연팀의 예술성과 전문성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도록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축제이다. 1999년 새천년맞이 전야제로 처음 개최된 이래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기념사업으로, 2001년 한국 방문의 해 공식행사로, 2002년 월드컵 전야제로, 2003년 동양과 서양의 소리를 한데 모은 대규모 문화예술 축제로 개최되었다.경희궁, 서울광장, 한강시민공원, 서울숲 등 서울의 주요명소에서 야외행사를 원칙으로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배경 삼아 국내와 해외 정상의 타악공연팀을 초청하여 펼쳐지는 국제타악예술축제이다. 모태에서 느껴온 어머니의 심장박동 같은 북소리, 인류의 공통악기인 북을 매개로 세계인이 언어와 인종, 국경을 벽을 넘어 인류가 하나로 소통하는 비언어공연(Non-Verbal Performance)이다. 슬로건은 '두드리고(Bit It), 즐기고(Enjoy It), 느끼는(Fell It)'이다.국내뿐만 아니라 호주, 일본, 중국, 멕시코, 브라질 등에서 선정된 세계 정상급 타악팀 18개 팀이 참가해 타악 고유의 신명을 뿜어낼 예정이며, 관객들이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는 타악예술의 고유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2009년 하이서울페스티벌에 이어 서울대표축제로 지정되었으며, 고정 프로그램인 메인공연과 부대행사를 탈피하여 2007년 이후 타악아트마켓 운영과 실내 기획공연을 주요프로그램으로 도입하고 창작타악 경연, 타악연주퍼레이드, 타악 창작곡 경연, 타악프로모션 컨퍼런스 등을 격년으로 개최하면서 음악예술과 음악산업을 접목하고 있다.서울 북 페스티벌서울특별시에서 '책의 날'을 기념하고 시민들의 독서 의욕을 고취시키고 독서문화 확산을 위해 기획되었다. 시민참여형 축제로서 제1회는 2008년 10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 동안 경희궁에서 '서울에 책이 산다'라는 주제로 열렸다. 행사장은 '책 읽는 거리'와 '책놀이 공원' 그리고 '북 클래식 카페'로 조성하였다.대한민국에서 유일한 공공기관 주최로‘궁궐’에서 열리고 서울 소재의 이색 도서관과 다양한 출판사가 참여하고, 다양한 이벤트와 전시, 저자와의 만남, 책 읽는 덕수궁의 분위기를 살리는 다채로운 공연 등이 펼쳐진다.'책 읽는 거리'에서는 서울 시민이 읽은 책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을 가지고 오면 행사장에 비치된 신간도서나 다른 방문객이 가지고 온 추천도서와 교환하는 '북 크로싱(책 나눔)', 국내외 각 분야별 도서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책의 향연', 서울 시내 주요 도서관에서 진행되는 '우리 동네 우리 도서관', 서울에 관련된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고 배우는 '책 읽는 서울'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책놀이 공원'에서는 초청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기념사진도 촬영하는 '저자와의 대화'를 비롯하여 유명 작가의 서재를 재현하여 들여다보는 '아름다운 서재', '책 읽어주는 시장님', '인형극장', '엄마가 읽어주는 무릎동화', '골든벨 퀴즈대회'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북 클래식 카페'에서는 '생활 속의 책 강연회'와 '클래식 라이브 공연', '책나무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주목할 만한 코너로는 특별전시 `길따라 책따라`가 있다. 서울을 주제로 한 그림과 사진이 담긴 3권의 책을 선정, 이를 미로로 제작해 관람객들이 미로를 통과하면서 재미와 함께 서울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책과 전통놀이를 체험할 수 있는 세계문화전과 이색적인 도서관을 구경할 수 있는 도서관전도 눈여겨볼 만 하다.서울북페스티벌의 특징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궁에서 자유롭게 다양한 책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행사기간 동안 1000여 권의 다양한 도서가 구비된 덕수궁 도서관 `궁애서(宮愛書)`가 덕수궁 석조전 앞 회랑에서 상시 운영된다.유명 작가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저자와의 만남`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김진명 작가, `덕혜옹주`의 권비영 작가를 비롯해 `너에게 묻는다`의 안도현 시인,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의 정호승 시인, `개미제국의 발견`의 최재천 교수 등을 만날 수 있다.이외에도 `행복한 1등 독서의 기적`의 김흥식 서해문집 대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의 권기봉 작가, `쏭내관과 함께하는 궁궐기행`의 송용진 작가 등이 이번 만남 프로그램에 참여한다.어린이들을 위한 체험프로그램도 다양하다. `매직 버블 체험` `외규장각의궤 탁본체험`과 `팝업북 만들기` `3D 입체공작 퍼즐`, 참가자들 모습을 익살스러운 캐릭터로 그려주는 `캐리커처 체험`, 낙엽을 이용한 `나만의 책갈피 만들기` 등이 준비돼 있다.서울 문화의 밤서울특별시에서 서울 시민과 국내외 관광객들로 하여금 서울의 야간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마련한 축제로 2008년부터 시작되었다.
    사회과학| 2012.05.07| 4페이지| 1,000원| 조회(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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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민족주의 적용
    민족주의의 한국적 적용1. 머리말: 한국에서 민족의식이 언제부터 싹트기 시작했는가에 대하여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삼국시대로부터 라고 한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민족의식이 유달리 강했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통일이나 고려의 건국이 민족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데에 대하여도 큰 이론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의식의 상태를 벗어나 민족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길게 잡아 백여 년 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구왕정의 해체와 붕괴 과정에서 시작되었으며 외세에 대한 반(反)침략적이고 항쟁적인 성격을 갖고 출발하였다.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의 도입은 세계사적 맥락에서 파악함이 옳을 듯하다. 20세기가 지나가면서, 공산권의 붕괴와 더불어 '민족'의 세계에는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공산주의를 택한 동독을 자본주의를 택한 서독이 통일한 독일에서는 민족통일의 기운이 샘솟았고 유럽공동체에서 드러나듯이 민족 국가적 통합의 노력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반면에 러시아와 유고슬라비아로 대변되는 기존 공산권에서는 민족분리의 몸부림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적 통합과 공산주의적 분리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더욱 힘을 얻기 시작하는 자본주의적 흡입력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동질화가, 그리고 가난한 곳에서는 분열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찰 스틸리(Charles tilly)의 말은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변화의 한 부분인지는 몰라도 현재의 한국에서는 민족 혹은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인다.그렇다면 과연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일반화 된 정의로는 “민족의 생활·전통·문화를 보전하여 국민국가를 형성하고, 국가의 성립 후에는 그 독립성 통일성을 유지·발전시킬 것을 추구하는 사상원리·정책 및 운동”이라고 나타내고 있다.즉 하나의 국가형성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국가의 유지 발전 형태가 나라와 시대에 따라 다르므로 내셔널리창하였다는 점에서 ‘3?1운동’을, 해방 이후에는 외세와 군정을 반대하고 통일국가 건설을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반탁운동’을 설정하여 전자를 저항적 민족주의, 후자를 건국 민족주의로 명명하고 있다. 또한 해방 이전에는 대외주체성과 대내평등성의 발로라는 면에서 ‘동학’으로, 해방 이후에는 국가차원의 근대화를 수행하였다는 면에서 ‘5?16군사쿠데타’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와 같은 한국 민족주의 기원 설정 논의와 그 내용으로부터 민족주의 구성의 필수요소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몇 가지 내용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① 민족정체성의 인식과 민족자존의 고양② 반제?반봉건의 민중주의 출현③ 국민주권의식의 정치운동화④ 자주독립의지와 운동력⑤ 근대화 의지그런데 다음과 같은 논의들에서 한국민족주의의 기원을 한국 현대사의 총체적인 흐름에 바탕을 두고 민족주의의 탄생과 특징적 경향들을 분석했다기보다는 먼저 서구사회에서 출발된 민족주의의 일반론적 전개과정에 대한 서구민족주의 이론의 연구결과를 가정적으로 생각해놓고 특정시점의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한국 민족주의의 특징적 성격과 논리구조가 현대사 자체를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었다거나 문제를 야기 시켜 왔다는 과학적 설명을 가능케 하는 이론체계를 제공하는 데는 다소 미흡한 면이 있다.3. 민족주의의 한국적 적용에 영향을 끼친 이론들(1) 불교의 호국사상: 한국민족주의 이론의 형성의 기원을 고대 시기 원효의 불교사상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좋은 정치는 불교적 이상사회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불교의 평등주의와 스스로의 결정을 존중하는 자유주의는 좋은 정치를 위한 이상이며 이는 또한 한국 민족주의의 중심사상이라 하겠다.불교는 경제활동을 장려하면서 근면과 저축 및 협동의 원리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한국 민족주의의 정치사상으로서 반봉건?반외세의 국민주의 이념으로 자유 평등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반제국주의?반외세의 국가주의 이념도 포함하고 있다.(2) 실학의 정치사상: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은 기존의상: 독립운동사상으로서 만해의 불교사상을 역시 한국의 민족주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은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주장했고,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였다. 이렇게 볼 때 만해 독립사상의 중심은 민족주의의 근본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실천이념으로 정의와 인도의 사상을 둘 수 있겠다.만해의 구국운동은 불교 유신을 통한 불교의 대중화로 국민의식을 일깨우는 것과 또한 실질적인 정치활동을 통해서 구국운동을 계몽해 가는 것이다.(7) 단재의 민족사상:단재 신채호는 자신의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민족주의이념을 이론과 실천의 과정에서, 주도세력으로서의 주체적 인식을 영웅, 국민, 민중 등에서 찾았고 이들이 수행해야 할 역사적 역할에 대해서 크게 주목했다. 또 단재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원리의 정립뿐만 아니라, 서구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민족주의의 이론적 보강을 꾀하는 등 진보적 입장을 취했다. 단재의 민족주의 사상은 국권수호를 위한 애국운동이 지닌 계몽적 한계와 시민적 민족주의가 지닌 시대적 한계를 드러낸 것이지만 망명을 계기로 일제 식민지체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강화되어 이론 면에서 저항적?혁명적 민족주의를, 실천적 독립운동의 면에서는 무력 급진론, 절대독립노선을 추구하였다.(8) 신간회의 정치사상: 3?1운동 이후 새로운 이념으로서 사회주의 사상이 민중운동에 나타나 이 운동으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운동의 양대 산맥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시대적 분위기 속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민족의 독립’이라는 당위적 명제 하에 통합된 것이 신간회였다.신간회의 민족주의 운동 정신은 항일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민중적 민족주의운동으로 볼 수 있으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신간회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민족사적 과제를 사회운동으로 일치시켜 장기적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사상의 이념이 합쳐질 수 있도록 노력한 신간회의 정신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4. 민족주의의 한국적 적용의 이념적 구도: '학을 통해 형성된 한국의 정치사상은 민족의 분단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념적 모티브를 갖게 되는 것이며, 대승적 화합의 논리로 체계화되어 민족의 활로를 개척하여 민족의 평화통일을 주체적으로 접근해 갈 수 있을 것이다.5. 한국민족주의 정치이념의 방향: 동학사상은 한국의 전통사상을 근대적으로 집대성하여 한국적 민족주의와 민족주의이념의 원형을 제시한 사상이기 때문에 동학사상을 중심으로 바람직한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국가 건설을 위해서 주로 정치 사상적 측면에서 대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동학의 인간관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이론적 관계를 보자면 시천주 사상에 의해 인간성은 본래 천주의 바탕을 가지고 있어 선한 것이며 협동적이고 평화적이다. 이러한 동학의 인간관에 입각하여 사람을 하늘과 같이 섬기라는 인내천주의만큼 철저한 자유민주주의는 오늘날 서구사회에서도 없는 것이다. 또한 동학사상에서 근원 하는 민족주의야 날로 민족통합의 이념으로서 동학사상은 자주적 민족혼을 부활하고 민족 대화합의 기초를 마련하는 통일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동학사상은 근대 민족사를 주도하는 정신적 철학적 지주역할을 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동학은 후천 개벽 사상으로 민족적 자각을 토대로 자유민주주의의 정착과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많은 저해요인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하나의 커다란 민족운동을 주도할 운명을 지닌 역사적 시점에 발생한 것이라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6. 한국 민족주의의 전개 과정조선조 말기의 시기부터 현재까지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라는 것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그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한국 민족주의의 전개 과정은 편의상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제1단계: 반외세 지향의 애국 단계제2단계: 외래 사상 주창 단계제3단계: 식민지 체제의 외적 변용 단계제4단계: 강대국 종속의 분열 단계제5단계: 유사 민족주의의 전개 단계제1단계 : 반외세 지향의 애국 단계: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전후한 1890년 전후의 기간민족정신 보다는 개화사상의 유입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였기 때문에 결국 친 서구주의로 전락되는 한계를 갖게 되었다. 서구 문물과 주체적인 민족정신을 접합하기 위한 방안은 그 후 개신 유학자들에 의해 모색되었다. 이들은 실학에 바탕을 두고 서구 근대성을 수용하려 했다. 민족주의의 형성 과정에서 지식인들이 그들의 역사나 전통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고 이를 현실 속에 적용시키려는 실천적인 삶을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도 전통의 재창출과 서구 근대성의 접합이라는 점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보다는 반제국주의적 애국심의 고취, 특히 반일 민족 감정의 표출에 치중함으로써 위기 속에서 민족의식을 일으키는데 더 큰 관심을 두게 되었다. 따라서 일종의 ‘역사적 민족주의’로서의 성격을 보여주게 되었다. 역사적 민족주의는 당장 식민지화로 전락되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여겨졌으며 그만큼 민족 투쟁에 있어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은 민족주의의 이론화에 한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제3단계 : 식민지 체제의 외적 변용 단계: 우리 역사 중 가장 치욕스러웠던 일본에 의한 식민지 통치 시대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민족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족적 저항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민족운동은 개신유학자들의 다수가 해외로 망명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지도부 부재 현상으로 민중과의 접합도 그만큼 어려워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는 일본 총독부의 억압적 통치로 사실상 민족운동을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민족운동도 본격적인 투쟁과는 달리 그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난 일종의 외적 변용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즉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민족 투쟁보다는 민중 계몽에 치중하는 이른바 '문화 민족주의'로 변모되었다. (물론, 당시 국내에서는 무력으로 맞서기 어려웠다는 점과 국외에서는 활발한 무력 투쟁이 진행되었음은 인정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 민족주의는 3말았다.
    사회과학| 2012.05.07| 10페이지| 1,000원| 조회(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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