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수혈거부에 대한 의료인들의 적절한 대응은 무엇인가기독교계의 한 이단종파인 여호와의 증인은 종교적 신념의 근거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수혈을 부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본질적 근본과 비판을 통해 이 종교를 가진 간호대상자를 어떻게 수혈에 대한 간호를 해야 하는지, 생명의료윤리적 고찰을 통해 논평해보려 한다.1.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수혈에 관한 인식성경(창 9:3,4; 레 17:14; 행 15:28,29)에서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교훈을 확대 해석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입이나 혈관을 통해서 몸에 피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법에 위배된다며 '수혈 거부법'이란 율법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피가 없어 죽어가는 신도들에게 죽어도 다시 부활될 테니 안심하고 수혈을 거부하라고 강요함으로써 안타깝게도 수많은 신도들은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또한 이 수혈거부협회는 환자가 무의식 상태에서는 수혈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점알 알고 전 세계 신도들에게 '수혈거부카드'를 발급해 주어 대리인이 거부할 수 있도록 항상 이 카드를 휴대할 것을 지시하면서 완전한 공개자살체제를 세워놓고 있다.2.그들이 '수혈은 부정적이다' 라고 하는 성경을 근거로 한 율법의 증거창조주께서는 먼 옛날에 피에 관해 언급하시면서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것이니라" 하고 선언하셨다. 그분은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라" 고 덧붙이시고 나서, 살인을 죄로 규정하셨다. (창세 9:3-6)"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레위 17:10, 11)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사냥꾼이 동물을 잡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찌니라 ...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 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레위 17:13, 14.)과학자들은 이제 유대인 율법의 법전이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 예를 들면, 율법은 백성에게 진 밖에서 변을 보고 땅에 묻을 것과 질병을 일으킬 위험성이 높은 고기를 먹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레위 11:4-8, 13; 17:15; 신명 23:12, 13)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으라 너는 피를 먹지 말라 네가 이같이 여호와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면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누리리라." (신명12:23-25; 15:23; 레위 7:26, 27;)3.병원에서 수혈거부로 인한 결과 사례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30대 주부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자신이 믿는 종교교리를 고집하는 남편의 수혈거부로 숨졌다. 수원시 A병원에 따르면 지난 22일 오후 6시 50분께 용인시 기흥구 모 아파트 앞 도로에서 주부 J(36)씨가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과속으로 달리던 21t 트럭에 치었다. A병원으로 옮겨진 J씨는 당장 폐와 복부에 찬 피를 빼내고 수혈을 받아야 할 정도로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A병원은 남편에게 부인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수혈을 하겠다고 했으나, 남편에게선 "우리는 교리에 따라 수혈을 받을 수 없다"는 이상한 답변이 돌아왔다. 남편의 고집으로 J씨는 결국 수혈을 받지 못했고, 이날 오후 8시40분께 사망했다.-경인일보 2007.5.25-4.병원에서 수혈을 거부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수혈을 한 뒤 소송시 판례의사의 치료행위는 신체의 완전성 등을 침해하는 상해행위의 구성요건에는 해당되나, 위법성 조각사유가 된다. 그것은, 의사의 치료행위가 형법이 추구하는 '생명의 절대적 보호 원칙'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의도가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므로 위법성이 조각되는 것이다. 근래에 들면서 이런 상해죄의 있어서 의사의 치료행위의 위법성 조각이 '피해자의 승낙'에 의해 조각되는 것이라는 견해가 강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판례로, 의사가 환자에게 병에 있어서의 설명의무를 다 하지 않고, 치료행위를 했을 시, 의사의 치료행위에 대한 위법성조각은 부정되었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때, 의사의 수혈행위는 분명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것이기는 하지만, 의사의 의무, 또한 행위자체에도 사회통념상 용인되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 역시도 위법성 조각이 되어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었다.5.종교윤리로서 수혈거부에 대한 견해와 대책특정 종교의 수혈거부는 보편적 생명가치를 무너뜨리는 반사회적인 행위라는 주장이다. 서울대 종교학과 김종서 교수는 “미국에서도 미성년자의 경우 생명이 위험한 상황일 때는 종교의 자유를 제한 받는 다”며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서 수혈을 거부하는 것은 종교적 자유에 해당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안락사 반대의견 레포트안락사에 반대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것이 언급되지 아니 할 수가 없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지극히도 안타까운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위배된다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락사에 대한 반대 입장에 서서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 생명의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정작 그 생명의 소중함을 인간 중심적 사고에 국한시키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다.생명에 대한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안락사 외에도 개고기에 대한 찬반 논란이 있다. 개는 인간과 친근하기 때문에 함부로 생명을 앗아서는 안 되는 종이라 말하고, 그 외 소, 돼지, 닭 등은 평소에 고기로서 이용되어 왔기 때문에 그 생명의 가치를 인간을 위한 고기로‘써’ 전락시킨다.안락사, 개고기 논쟁, 두 가지 모두 보면 굉장히 이질적인 사고관 같아 보이지만, 참으로 일괄되게 공통된 사항이 있다. 그 죽음의 반대에는 인간중심적 사고가 스며 있는 것이다. 사람도, 개도, 그 생명을 함부로 앗아가서 안 되는 까닭은, 사람과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가 풀 한포기 맘대로 뽑을 수 있는 것도, 모기에 대한 극도의 분노를 느끼는 까닭도, 바퀴벌레를 싫어하는 까닭도 그것이 사람과 가깝지 않기 때문이다. 죽어도 괜찮은 것과, 죽어서 안 되는 것의 기준에 인간이 있는 것이다.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라져 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모든 종류의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 서로에게 너무나도 큰 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삶의 연장이 무의미해졌을 때, 당사자의 삶에 대한 희망이 존재하지 않을 때, 또한 그 상태에 대한 어떤 정신적 질환이 관여하지 않을 때, 병의 진행과정에 따라서만 자연스럽게 시행되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한 사람의 죽음이 안타까울지라도, 그 곳에 들어가는 의료비라던가, 보호자의 사회적 생산력 소모를 돌려, 더 많은 생명을 위한 곳에 더 관심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생명에 대해 더 큰 희망을 높일 수 있을테고, 자연의 섭리에도 조금 더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의 말뚝'스러져 가는 이들을 위한 사모곡.'‘격동 50년’,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살아온 시절을 그렇게 알고 또한 느끼고 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격동이라는 표현이 더 없이 잘 어울릴만큼 대한민국처럼 짧은 세월동안 급변한 사회는 많지 않을 거다. 1945년 해방으로부터, 80년대까지 20여년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하여 산업화를 이룩하였고, 동시에 80년대의 518운동 및 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룩한 역사는 전세계적으로 봐도 이례적인 것이였다. 그러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부모님들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있는 것일가?젊은 세대가 보기에는, 특히나 이제 20대가 되어 대학에 들어와 이제 막 사회에 입문한 학생들이 그들의 윗세대를 이해할 수 없는 건, 이집트 상형문자에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라고 써있는 것처럼 오랜 세월동안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꾸짖어 온 것과 별반 다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대학생의 생활을 우리 스스로가 유치원생에게 가르쳐줄 때,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 ‘너도 커보면 다 알게 될 거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듯이, 이 세상이 어떠한 곳인지 갓 입문한 우리에게 설명하기에는 말로는 부족할 수 밖에 부분이 있는거고, 바로 그러한 부분이 기성세대의 가르침을 잔소리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지금의 이 세대가 기성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겪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자식을 낳고 길러보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고는하지만, 공감과 이해를 위하여 시간이 지나기만 기다리고 있기에는 이제는 조금씩 일선에서 물러나고 있는 기성세대에게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같은 시간과, 같은 사회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우리가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윗세대에서도 젊은층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다른 노력이 필요하다고는 하소연 할 수도 있겠지만, 나이 서른이 ‘이립(而立)’이라고 이미 뜻이 굳은 채 오랜 세월을 지내온 그들과 아직은 어느 방향으로든 달라질 수 있는 우리와는 다른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새로운 세대는 구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사회에 순응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것이다.그렇지만 ‘겪어보면 알게 될거다’ 라는 부분을 이해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결국 우리가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겪어보던가,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방법이 최선이 될 것이다.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작가로서의 박완서씨의 작품이 나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은 깨달음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1931년에 태어나 이제는 할머니라 부를 수 있는 나이가 된 그녀의 작품에는 해방전의 구시대적 산물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산업화의 물결까 격동의 50년이 묻어있었다. 무엇보다 1인칭 화자를 중심으로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소설이라기보다 하나의 자서전처럼 읽혀지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다. 결국 그 이야기들은 격정적인 시대를 살아 온 우리 부모세대의 단편과도 같이 느껴졌다.시골에 살던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가부장적인 구시대의 산물을 버리고 혼자서 어린 자녀들을 키워나가기 위하여 거대한 말뚝과도 같은 집념과 의지, 열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이제는 신여성이 되어버린 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말뚝’ 이라는 소설 속에서도 그 느낌과 색은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주된 내용은 화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화자는 바로 우리네 어머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우리의 윗세대가 비참하던 산업화 이전의 시기를 극복해 나가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피땀어린 노력이 있었는가, 따스한 밥 한 끼를 위하여 겪어야 했던 고통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스스로가 먼저 이해하고자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를 잘 모른다’ 라고 불만만을 토로하고, 안정적이고 무난한 삶에 대한 비이성적이리라 느껴질만큼 집착하며 보수적인 생활을 고수하는 모습에 대해 비판적인 사고만을 품었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게 느껴질만큼, 책을 통하여 우리 부모세대의 모습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무관하지는 않게 스스로가 그것을 겪어보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프랑스대혁명의 배경17세기, 100년간의 베르사유궁전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들과 대조적으로 궁 밖에서는 국민이 굶주리고 있었다. 루이15세는 7년전쟁에서 패하고 영국과 북아메리카와 전쟁을 벌인다. 이때 프랑스의 재정이 바닥나게 되었다. 이런 시국에 패스트 같은 질병이 줄어들게 되면서 인구의 수는 늘었기 때문에 굶주리는 사람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 전쟁에 지고 나서 루이15세가 사망하게 되었고 갑작스럽게 루이카페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가 루이 16세이다. 이 시기 계몽사상이 발전하여 중세의 전통적·권위적 사상을 철저히 비판하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합리적·과학적 인식에 의한 이성의 개발로 인류의 보편적 진보를 꾀하려 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농민계층은 귀족계층의 특권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또한 평등과 주권에 관해 갈망했다. 그리고 이는 프랑스대혁명의 배경이 되었다.프랑스 대혁명의 발전과정루이16세는 영국에 원한을 품고 미국독립전쟁에 금화를 원조하였다. 그 금액은 프랑스 국민 700백만명에게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궁전에서 화려한 치장으로 프랑스로부터 빚을 지게 되었다. 이것이 프랑스 국고의 파산의 원인이 되었고 백성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추수 후 프랑스의 주식인 밀가루(빵)의 부족상태가 되었다. 이에도 불구하고 왕실은 계속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이에 비판하여 로베스 피에르가 신문에 비판의 글을 올렸다. 그는 루이16세가 즉위하고 파리에 온 첫날 루이르그랑 학교에 방문 시 환영사를 한 인물이었다.루이16세는 그 후 금융개혁을 시도하였지만, 백성들에게만 과중한 세금을 물게 되었고 경제는 파탄났다. 그리고 이때에 맞춰 프랑스에 90년만의 혹한이 왔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빵값이 폭등하게 되었고 백성들의 굶주림이 왕에 대한 분노가 되었다.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루이는 어쩔 수 없이 자크 네케르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정부의 임무는 모든 국민에게 빵을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자크 네케르는 전국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는 175년 만에 이루어졌다. 삼부회에서 평민대표로 로베스피에르가 참여하였고, 성직자와 귀족들도 세금을 낼 것을 요구하였다. 6주간 삼부회의 진행이 되었지만 그들의 요구는 무시당했고 옆방의 테니스코트에서 새로운 의회(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그 해 7월 초 3만명의 왕의 군대가 파리에 배치되자 국민의회는 자위수단으로 민병대를 결성하고 파리병기고를 습격해 총을 탈취하게 되었다. 이 사건 후 루이는 네케르를 파면하였고 이 사건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민중들은 삼색기(현 프랑스 국기)로 서로를 확인하며 전제정치의 상징인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였다. 국민들은 습격에 성공하였고 바스티유감옥을 허물었다. 이 사건으로 국민의회가 힘입어 인권선언문을 만들었다. 인권선언문에서 계급제도는 철폐되었고 국가의 권리는 국민에게 있다고 하였다. 이 선언으로 인해 언론의 자유,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가 이루어져 과격신문 '인민의 벗' 이 장 폴 마라에 의해 창간되었다. 그는 매우 과격한 인물이었고 왕실에 불만이 많았다. 그 감정을 신문에 싣고 국민을 선동하여 피를 부르게 하였다. 국민들은 왕궁 앞에서 시위를 하였고 이에 루이16세가 인권선언문에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분노는 가시지 않았고 생선가게 여인들이 베르사유궁전으로 들어와 왕비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왕비는 몸을 피했고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되었다. 왕과 왕비는 파리로 돌아왔고 죄수의 입장이 되었다. 국민의회는 새로운 민주주의와 헌법을 제정하였다. 프랑스는 입헌군주제로 바뀌어서 왕은 의회와 권력을 나누고 왕과 성직자는 권력을 점점 잃어갔다. 이에 루이는 다시 권력을 되찾기 위해 외국과 손을 잡아야 된다고 생각해 국경지대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패하였고 국민은 왕에게 완전히 신뢰를 잃게 되었다.
메멘토 [Memento]시험종료 10분 전, 아직 풀지 못 한 문제가 남아있다. 이것이 답인 것 같다가도, 잠시만 바꿔 생각해도 저것이 답인 것만 같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머릿속이 간지럽기만 하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오래 전 헤어진 친구를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정작 그 친구의 이름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머릿 속에 떠오르는 가득한 이미지들을 잡고 있어도, 쉽사리 기억이 잡히질 않는다. 누군가는 짧은 시간을 공부하더라도 많은 걸 기억하여 좋은 성적을 받는다. 또 누군가는 단지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그 이름과 얼굴, 그 사람의 특성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 ‘내 머리는 나빠서’, ‘내 머릿 속의 지우개’를 탓하기 전에 도대체 기억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여기서 잠깐 기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고 가자. 기억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에 따라 꺼내어 활용하는 인지적 능력이다. 외부자극을 받아들여 ‘등록’하고 이를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한 경우 ‘인출’하는 세 단계를 거친다. 이러한 기억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머릿속에 저장되는지는 Ebbinghaus 망각곡선을 통하여 설명 된다. 이것에 따르면, 우리가 받아들인 정보는 머릿속에서 단기기억으로 저장되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는데, 그 감소하는 정도가 기억의 반복, 회상에 따라 점점 완화되게 되어 종국에는 장기기억으로 넘어가 우리의 머릿 속에 오랫동안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장기기억이 저장되는 곳이 우리 뇌의 해마라 불리는 곳이다.영화 속에서 주인공 레너드는 단기기억상실 환자이다. 그 중에서도 특정 시점 이후의 일을 기억하지 못 하는 전향적기억상실 환자이다. 바쁘게 살다보니 지난 주말에 뭐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고 가물거리는 나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기억력과는 이미 비교 대상의 범주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경악스러울 그의 기억력은 단지 5분 뿐이다. 아침에 신고가려고 챙겨둔 양말을 밥 먹고 나서 어디에 뒀는지 가물거리는 건 차라리 행복하다 느껴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사실 단기기억에 장애가 있는 환자 스스로가 기억장애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설정이 약간은 의심스러울 수 있지만, 얼핏보면 마치 우리와 같은, 그래서 동정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주인공 레너드가 비현실적인 인물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우리 머릿속에서 장기기억을 담당하는 곳은 해마이고, 그 곳이 외상이나 수술 그리고 가장 흔한 경우로는 알코올 섭취와 같은 어떠한 이유로든 손상이 가해지게 된다면, Ebbinhaus의 망각곡선을 보며 열심히 반복한다 하더라도 저장소는 이미 망가져버렸기에 레너드와 같이 단기기억만이 남는 것 뿐이다. 실제로 간질환자의 치료를 위해 행해진 뇌수술에서 해마가 손상되어 자신이 약을 먹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는 환자도 있었고, 조금 더 일상적으로 가깝게 설명한다면, 과다한 알코올 섭취로 인해 해마 부분의 통제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단기기억만이 남게 되어, 다음날 아침 섬뜩하기 짝이 없는 필름이 끊어지는 현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우리는 우리의 안타까운 기억력을 보조하기 위하여, 아이러니하게도 IT 건망증을 불러일으킨 핸드폰 메모를 주로 사용한다. 우리보다 더욱 안타까운 기억력의 레너드 역시 기억력 보완을 위하여 우리보다 더욱 절실한 방법을 이용한다. 폴라로이드 카메라, 문신, 그리고 수 없이 많은 메모들을 이용하여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기억력을 보완하고자 하지만, 결국 그에게 남는 것은 기억의 조작일 뿐이다. 운명과도 같이 조작된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레너드를 보며, 누군가는 동정의 시선을 보냈겠지만, 어떻게 보면 그 동정의 시선은 비현실속의 영화 주인공이 아닌, 현실속의 우리들에게 먼저 보내져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이 진실이라 여기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믿을만한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정보를 오감을 통하여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게 받아들인 정보 중 필요하다 여겨지는 것들을 통합하고 조합하여 기억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 아무런 조작이 없이 순수하게 사실만이 저장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 시작점의 작은 조작이 나비효과와 같이 우리의 기억을 사실이 아닌 착각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1991년, 로프터스 교수의 거짓기억심기 실험이 있었다. 그 실험에서 피실험자는 어린 시절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는 가짜 경험에 대해 듣게 되고 그에 대해 자세한 부분을 기억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물론 처음에 피실험자는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로 거짓기억을 만들어내게 되고 마치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완벽하게 떠올리게 된다. 전혀 있지도 않은 일을 마치 겪은 일처럼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우리의 뇌가 착각에 취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어떠한 것을 믿게 되면 그 믿음에 위배되는 것들을 보지 않기 위해 자신의 안목을 굉장히 좁힌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되면서 착각이 시작되는 것이고, 그 틀 속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거짓기억 속에 빠져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되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이렇게 착각과 거짓기억 속에 빠져 사는 것에 대하여는 일상생활에서도 느낄 수 있다. 시험을 보는 도중. 잘못 적어진 답에 대해 지속된 검토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것이 정답이라 믿고 있다가 틀리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그 답이 일종의 거짓기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