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an Melville(1819 ~1891)생애 - Herman Melville(이하 허먼 멜빌)은 1819년 8월 1일 앨란과 마리아 갠세부르트 멜빌 사이의 셋째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그 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할아버지인 토마스 멜빌 소령은 ‘보스턴 티 파티’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외할아버지 피터 갠세부르트 장군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와 친했으며 1777년에 스탠윅스 요새를 방어한 인물이다. 아버지가 어린 멜빌을 다소 발달이 느린 아이로 묘사한 바 있듯이, 멜빌은 성홍열로 인해 쇠약해졌고, 그 병으로 인해 시력도 영구적으로 나빠졌다. 멜빌가(家)는 수입 관련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1830년에 파산했으며, 그 뒤에 가족은 뉴욕주 올버니로 이사갔다. 거기에서 허먼은 올버니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 전에는 뉴욕 맨해튼의 콜롬비아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가 1832년 세상을 떠난 이후, 8명의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 모두는 허드슨 강이 있는 뉴욕주의 랜싱버그로 이사 갔다. 허먼과 그의 형제인 갠세부르트는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그 곳에서 허먼은 1835년까지 있었고, Albany Classical School을 몇 달 동안 다닌 적이 있다.멜빌의 방랑 기질과 가족의 생계를 스스로 도와야겠다는 소망 때문에, 그는 에리 운하에서 측량사 일거리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대신 그의 형이 도움을 주어 리버풀로 가는 뉴욕 여객선의 선실 승무원 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배로 항해하여, 런던까지 갔다가 같은 배로 돌아왔다. 이 때의 경험에 기반을 두어1849년 Redburn: His First Voyage가 출판된다.그 이후 1837년부터 1840년까지 멜빌은 3년간 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성공적인 좋은 한 때를 보냈다.그 후 멜빌의 가슴에 모험 정신을 되살아나게 해준 것은 Richard Henry Dana의 Two Years Before the Mast를 읽게 된 것이었다. 그 책은 1840년 출간되었으며, 그 즉시 인기를 얻었다. 멜빌도 그 시기에 그 책을 접했음이 틀림 없고, 그로 인해 선원이 되는 경험을 하고픈 마음을 키워갔다.1840년, 그는 태평양행 배를 타고 항해하였다. 후에 멜빌은 그의 인생은 이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열 여덟달 간의 여행을 통해 그는 《모비 딕》을 저서하였다. 1842년 7월, 식인종들과 3주의 동거를 통해 그는 그의 첫번째 작품인 《타이피 족》(Typee)를 써낸다. 이는 원주민 여인과의 불륜적인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대표작소설Typee: A Peep at Polynesian Life (1846)Omoo: A Narrative of the South Seas (1847)Mardi: And a Voyage Thither (1849)Redburn: His First Voyage (1849)White-Jacket, or The World in a Man-of-War (1850)Moby-Dick, or The Whale (1851)Pierre: or, The Ambiguities (1852)Isle of the Cross (ca. 1853, since lost)[31]Israel Potter: His Fifty Years of Exile (1856)The Confidence-Man: His Masquerade (1857)Billy Budd, Sailor (An Inside Narrative) (1924)단편The Piazza Tales (1856)작품성향 - 멜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진실의 발견과 그것의 전달 문제이다. 그에게 소설은 무엇보다, 그의 문학론이라고 할 수 있는 에서 말한 그대로, “진실을 말하는 위대한 예술”이다.보고 문학의 성격이 짙은 초기작, 와 에서부터 유고작인 에 이르기까지 멜빌은 거의 강박적으로 “숲 속의 신비한 흰 사슴처럼” 달아나 버리는 삶의 진실을 붙잡아 표현하는 데 매달렸다. 멜빌이 추구하는 진실은 낭만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 감각적 경험을 초월하는 어떤 관념적 실재나 그의 동시대의 초월주의자처럼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잇는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편적이고 항구적이라고 부르는 진실이 실상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에 구속되어 있는 도구적 이데올로기일 수 있음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멜빌은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이 위장된 이데올로기임을 폭로하는 데서 자기 진실을 발견한다. 그가 자신이 찾고자 하는 진실을 “탈색된 진실”(unvarnished truth)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에서 셰익스피어로 만드는 것은 “이따금씩 섬광처럼 발현되는 직관적 진실, 리얼리티의 축 그 자체에 대한 순간적이고 재빠른 투시들”이라고 말한다.이처럼 멜빌에게 진실이란 사물의 감추어졌던 어떤 면모 혹은 사람들이 미처 인식하고 있지 못한 사실의 순간적인 드러남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진실관은 제임스 조이스의 “현현”(epiphany)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세계문학사에서 작가의 의의 - 멜빌은 셰익스피어의 무덤에는 그가 쓴 작품보다 훨씬 더 많은 주석과 해설서가 쌓인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그 자신에게 돌려 마땅하다. 그 동안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여온 그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멜빌 사망 100주기를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아직까지도 가장 중요한 미국 문학 연구서로 읽혀지고 있는 에서 매씨이슨이 에머슨,도로우,호오돈,위트먼과 더불어 19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로 자리매김한 후, 그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확고부동하다. 가령 소설가 업다이크(John Updike)는 당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멜빌의 예리한 비판에 주목하면서 그와 동시에 그의 작가적 재능이 미국의 그 어떤 소설가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멜빌의 평가 연보 - 1920년대 초 멜빌의 부활부터 1940년대까지 멜빌의 연구는 그의 전기와 작품의 자료원을 규명하는 실증주의적 연구에 집중되었다. 1920년대는 위버의 전기에 뒤이어 프리맨의 , 멈포드의 이 잇따라 출판되어 멜빌에 대한 학문적, 대중적 관심의 확산은 이루어지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목차1. 다가오는 유럽2. 유럽을 바라보는 우리,유럽이 바라보는 우리3. 문화의 충돌, FTA4. 유럽통합의 역사,그리고 아시아 통합의 역사?5. 유럽과 한국의 공통적인 위기들이제는 유럽이다-이준필립다가오는 유럽‘이제는 유럽이다.’라는 말은 그전엔 유럽이 아닌 다른 무엇 이었다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제 유럽이라면 과거에는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지향점에는 언제나 우방국 미국이 함께 하고 있었다. ‘서양’이란 말을 듣게 되면 우린 항상 미국을 제일 먼저 떠오른다. 같은 외국인이라도 (동양인을 제쳐두더라도) 유럽인은 생각도 못하고 미국인을 생각한다. 그만큼 미국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외국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유럽이다. 우리는 과거 미국인을 생각한 것처럼 유럽인을 떠오르기를 작가는 권유한다. 이 책은 왜 우리가 유럽을 지향해야 되고 유럽연합으로 통합된 경제체제로 등장한 대규모 경제 시장 유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한 본인도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고 얼마나 많은 오해를 품고 있었는지 상기 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문제이며, 유럽인이 한국인을 보는 시선 또한 마찬가지로 무지하다. 물론 무지한 점이 있다는 사실은 특별한 일도 아니지만 현재 한-EU FTA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만큼 더 이상의 무지는 전혀 이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유럽을 알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며 미국과는 다른 그들을 정확히 파악해야 앞으로 다가올 유럽시장과의 경쟁에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한불상공회의소의 회장으로 있는 이 책의 저자 이준 필립 분도 역시 그 점을 고려해 유럽에 무지한 한국인들을 깨우기 위해 집필을 시작한 듯 하다.20c 전(戰)후의 유럽의 역사는 연합의 역사로 보인다. 유럽에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유구한 세월 속에서 여러 색깔의 독자적인 문화와 개성을 키워왔으며 우리나에 치우지지 않은 두 사람의 천재적인 발상은 유럽이란 개념의 새로운 부활에 큰 기여를 했다. 바로 장 모네와 로버트 슈만이 바로 그들로 그들이 제시한 유럽의 계획과 목표는 참으로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발상이었다. 특히 장 모네의 너그러운 발상은 일본과의 원한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가 제시한 계획과 목표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전범국인 독일이 주변 유럽국가와 특히 프랑스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1870년에서 1945년 사이 독일과 프랑스 간에만 세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독일과 프랑스 양국이, 특히 독일인에 대한 프랑스의 혐오가 얼마나 깊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프랑스인이었던 장 모네는 독일이 제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라는 이유로 제 1차 세계대전이후처럼 전범국가란 이유로 유럽에서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두 번째 목표는 유럽의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두 가지 자원인 석탄과 철강의 공동관리였다. 석탄과 철강은 군수사업에 반드시 필요한 자원으로 전쟁의 야심을 품고 있는 국가에게 이용되는 상황을 차단시키고자 함이었다. 이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일이겠지만 전범국과 전쟁피해국 간의 협약을 통해 표방되는 화해로 느껴 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이러한 협약은 앞으로 유럽의 운명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장 모네는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러한 취지를 기본으로 해서 유럽을 연방 체계로 통합시키려는 것을 세 번째 목표이자 계획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후 모네의 기대대로 유럽은 하나 둘씩 통합된 경제 체계를 가지길 원했고 심지어 정치적인 점에 있어서도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유럽헌법이라는 초국가적인 유럽의 공동 헌법이 도입되고 있다. 유럽은 제 각각이 개성과 고유한 매력을 가진 이색적인 나라들이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하나임을 선언하고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배를 건조해야 할 때가 왔다. 한-EU FTA가 코앞에 다가온 이 시점에서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럽인들은 결코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콧대 높은 그들은 이번 기회로 저급한 아시아인들을 철저히 유린하고 이용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맞서 스스로를 갈고 닦고 다가올 EU와의 무한경쟁에서 승리 할 수 있도록 우리 같은 젊은 학생들이 용기를 가지고 맞서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유럽을 바라보는 우리,유럽이 바라보는 우리우리는 유럽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라면 유럽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과거 흥행했던 헐리우드의 중세시대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 여러 영화들로 소개된대로 각각이 유럽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유럽의 역사를 편협된 시각으로 본 흥미위주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우리 민족은 흔희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유구한 배달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만주에까지 선조들의 발길이 닿았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무훈으로 광활한 국경을 그린 역사들은 참으로 우리나라국민들의 기세를 등등하게 해준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를 단연 우리 민족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듯 착각 속에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유럽을 보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훨씬 이전부터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역사는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실재로 세계의 중심처럼 역동적인 문화를 가져왔고 세계 곳곳에 그들의 영향력은 무서울 정도다. 그들의 문화는 굉장히 두드러져 보이고 독자적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유럽의 역사 속에 엄청나게 높은 파도와 같은 타문화의 충돌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럼으로서 고유의 문화를 지켜나가고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치욕의 역사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과거부터 그렇게 혐오하던 일본의 영향을, 그 후엔 미국의 영향을 심하게 받아왔다. 우리의 문화는 말살되다 시피하여 현존고 어느 것이 외국문화인지 구분하기도 어렵고 구분해야할 필요성조차도 못느끼면서 외국의 문화를 접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은 분명한듯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어떤 흐름을 따르고 있고 그 흐름의 기원은 유럽에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그 흐름을 맹목적으로 따라만 하고 있지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유럽을 막연하게 미국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 모르겠다. 우리가 보기엔 그저 그들은 백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그저 황인종인 것이다.그래서 막연하기는 유럽이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특히 동북아시아는 지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유럽인들과 가정 멀게 느껴지는 대륙이다. 유럽인들은 동북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한 적도 없고, 역사적으로도 특별한 인연을 맺지도 못했다. 미국과 호주, 남미 등과 같은 경우에는 분명 동북아시아처럼 먼 지역이지만 뿌리는 유럽이고 영어나 유럽의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의 경우 유럽과 공유할 수 있는 점이 없다. 유럽인들이 보기에 아시아의 언어, 문화, 문명은 너무나 이질적이고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쉽게 하지 못한다. 단지 막연한 호기심과 매혹과 같은 감정을 느낄 뿐이다. 그만큼 아시아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져 본적도 없기 때문에 포화상태의 유럽시장에 새로운 탈출구가 될꺼란 기대를 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엘도라도와 같은 환상의 나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아마도 유럽인들에겐 아시아는 자신들의 환상과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새로운 개척지이다. 그들에겐 이미 한번 개척의 시대가 있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얼마나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여 그들의 배를 채웠던가. 다가올 시대는 그들에게 제 2의 개척시대가 될 것 같다. 명목은 자유무역협정이지만 그들의 마음속 깊은 저변엔 이번기회로 한몫 챙겨보려는 야만스런 욕심이 깔려있을지도 모를 일이다.문화의 충돌, FTA일본 문명도 중국 문명도 아닌 서구의에 대해선 전혀 무지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럽이나 미국, 서구 문명을 바라만 보고 따라만 했지 그들을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다. 따라서 한-EU 체결 후 몰려올 여파는 도무지 상상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자국의 문화를 그렇게 사랑하고 아낀다고 말할 수 없지만 잠식당하는 우리나라의 문화들만큼은 눈에 선하다.무역 협정이라는 것은 물건만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무역이란 것은 문화,언어 등이 오가는 문화의 거래라고 생각한다. 물론 고유의 문화를 지켜가며 인습같이 바르게 자라지 못한 자국의 문화는 다른 선진국의 좋은 문화를 받아들여 좋게 고쳐나가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위해선 우리나라 국민들의 만반의 이해와 정부의 문화보호정책이 필요하다.하지만 이준 필립의 이 책에는 FTA 타결이후의 우리 경제에 위협이 될 만한 위험요소들에 대해선 간과하고 있다. 유럽을 이렇게 이해하고 다루면 좋다는 식이지 어떤 점이 위험하니까 이렇게 대비해야 한다. 라는 것에 대해선 비중을 두지 않아 아쉬웠다. 어쨌든 FTA로 분명 우리나라는 세계무대로 한발 더 큰 도약을 하게 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피해가 될 산업구조에 대해서는 피해를 최소화 하거나 오히려 이득을 볼 수 있도록 사전에 철저한 해결책을 세워야 한다. 큰 파도가 몰아치는데 마냥 댐을 쌓아 쇠국으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쪽에서도 거대한 파도를 일으켜 파도와 파도가 만나 힘의 균형을 성립시켜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우리의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수용해야 할 것인가?먼저 본인은 수업시간에 거론되었던 지적재산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만큼 남의 것을 쉽게 표절하고 버젓이 사용하는 나라도 없으리라 본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일본의 게임을 그대로 따라 하고는 중국에서 우리나라 것을 표절하는 것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마치지적재산권이란 법이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적용되고 타인에겐 무시되어도 다.
FAT GIRL을 보고...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의 첫경험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여기서 여성과 남성의 첫경험은 남성중심적인, 엄격한 사회적 잣대를 대어볼 때 여성의 성은 상당히 방어적이다. 남성에게 첫경험은 남자로서 거듭나야할 통과의례처럼 받아들여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첫경험을 해야 한다고 믿는 엘레나의 고민과는 달리 남성에게 있어 그 상대는 누가 되든 총각딱지를 때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총각딱지를 땐 이후로 처녀성을 가진 여자는 남성들의 성지가 된다. 바람기 많은 이탈리아 남자도 엘레나의 처녀성을 정복하기 위해 사랑을 가장한 달콤한 말로 그녀의 방어막을 느슨하게 만들고 부드럽고 노련하게 점령한다. 엘레나는 이 남자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망설이지만 오히려 남자는 섹스가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영화를 보는 제 3자의 눈에선 남자의 욕정을 주체 못해 안달인 욕망과 그 위에 놀아나는 엘레나의 바보같이 순수한 고민은 우습기도 하면서 슬프다. 관객의 눈과 함께하는 아나이스의 눈엔 눈물이 맺힌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늑대같은 남자의 속내가 드러나 보이고 첫경험을 소중하게 여기는 언니가 그런 속내도 모르고 처녀성을 내주는 수치심과 슬픔에서 오는 눈물이었으리라. 이런 남녀관계의 현실을 깨달은 듯한 아나시스는 처녀를 원하는 뭇 남성들에게 복수라도 하듯 자신의 첫경험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의 처녀성을 과감히 버림으로써 남성중심의 억압된 성적 정체성에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아나시스의 이러한 결심은 남성들의 처녀성을 성지화하고 숭배하는 심리를 무너뜨린다. 남성들에게 처녀성이 성지화 되는 것은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처녀성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잃었을 때 죄의식을 가질 때이다. 남성들은 그런 소중한 것을 얻어내거나 혹은 빼앗았다는 성취감과 정복감, 그리고 혼외정사를 금기시하는 사회에서 처녀성 강탈이 주는 사회적 일탈에 의해서 만족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 스스로가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날 때 여성의 성적 지위는 남성과 동등하게 된다. 남성은 지금처럼 여성의 처녀성에 흥미를 덜 느끼게 되고 사랑을 가장한 욕망에 속아 억울하게 처녀성을 빼앗긴다거나 하는 일 따위도 없어질 것이다.이러한 변화는 남성의 입장에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 남성이 배우자를 선택하거나 결혼한 여자의 과거 문제는 끊임없이 남성을 괴롭히고 있다. 방탕했던 자신과는 달리 자신의 부인만큼은 순결해야 한다는 생각과 처녀성을 상실한 여성의 정조를 의심하는 사회적 풍토 때문이다. 지나치는 산부인과에 저마다 붙어있는 처녀막 재생술 광고를 보면 이 사회가 여성의 처녀성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고 이내 그러한 현실에 씁쓸해진다. 모든 것은 처녀성에 대한 이중적인 남성들의 집착의 결과다.나 또한 여성의 처녀성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많지 않은 연애 경험을 통해 처녀성에 대한 환상이 남성의 동정만큼이나 현실적이고 그것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허무하고 부질없는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 스스로도 이미 좋아하게 돼버린 이성의 과거에 고통 받는 것도 싫었고 내가 좋아하는 이성 또한 나의 과거로 인해 고통 받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서로가 좋아하는 그 순간 그 자체가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을 느끼게 되었고 이성의 과거도 하나의 소중한 추억으로 함께 공감 할 수 있었다.
알퐁스 도데의 별을 읽고...이루어 질 수 없음을 받아들이기에 더 아름다운 사랑초등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이제는 벌써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알퐁스 도데의 별에 대한 이미지는 달콤한 수면에 취한 듯, 어떠한 황홀한 기분을 떠오르게 한다. 목동의 시골 소년과 같은 순수함으로 홀로 외로이 양들을 돌보며 주인집 아가씨를 동경하는 마음이나 소년과 소녀가 별 아래 어깨를 나란히 순수한 마음으로 별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아련한 모습들이 뇌리에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수업시간에 다시 도데의 별을 접했을 때 역시 그러한 기억들이 여전히 작용을 해서인지 아니면 별이라는 작품 자체의 감성적인 텍스트가 나이를 불문하고 그러한 감흥을 불러 일으켜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또다시 목동의 마음속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 스테파네트 아가씨에 대한 동경과 짝사랑 그리고 아가씨 옆에서 차마 아가씨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진심이 담긴 감동의 말도 내뱉지 못하는 목동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으면 그럴까 측은해졌다.때때로 겨울이면 농장으로 내려가 아름답지만 약간은 차갑고 도도한 주인집 아가씨를 멈칫멈칫 마주치면서 사랑을 키운 목동에게 그녀는 주인과 하인이란 관계의 커다란 장벽으로 막혀있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리라. 자신이 한낱 비루한 하인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이 분에 넘치는 것이리란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비천한 신분이나 처지를 비관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을뿐더러 아가씨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고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때때로 양 무리를 돌보고 들판에 앉아 별을 바라보며 아가씨를 그리워하지만 조바심 내지 않고 차분하고 아련한 마음으로 그녀를 추억한다.긴 시간을 산에서 외로이 홀로 보내는 목동에게 있어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이란 조금도 힘든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인내의 결과로 목동이 그렇게도 기다리고 동경해왔던 아가씨가 찾아 왔을 때도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흥분하지만 실수하지 않는다. 목동은 차고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섣부르게 쏟아 붓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거나 어쩌면 쓸데없는 일이 될 수도 있는 말을 쉽게 내뱉아 버렸다가는 다시는 아가씨를 떳떳하게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이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십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 아가씨와 바람이 풀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숲 위에서 아름답고 환하게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는 낭만적인 순간에서도 담담하게 별들에 대한 신화를 들려줄 뿐 묵묵히 주인집의 하인, 목동으로서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한다.내 마음을 뒤흔든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목동에게 마음껏 감정이입을 하고 있던 차에 자신의 마음을 별들의 이야기에 투사 시켜 이야기할 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서 조금은 사랑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랑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신화가 가지는 독특한 신비로움과 고요한 밤의 낭만, 그리고 목동에 감정이입된 아련한 마음이 빚어내는 한편의 조용하고 감미로운 오카리나 연주가 들려오는 듯했다. 눈을 감아도 텍스트가 주는 선율이 느껴질 만큼 공중에 살짝 붕 뜬 것과 같은 그 기분은 어렸을 적 이 책을 읽었을 때와 같은 황홀한 그 기분과 같은 것이었다.
부인의 정당한 허영심과 비극적인 남편그리고 행복한 결말소설을 읽는 초반부에는 헌신적이고 자신의 삶에 만족할 줄 아는 남편에게 집안사정에 어울리지 않는 몽상만을 꿈꾸고 현실에 불만족스러워하는 마틸드의 예견된 불행이 흔한 교훈이 그러하듯 지나친 허영심이 자초한 비극적인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후반부로 책장을 넘길수록 마틸드의 상황에 대한 인식과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그 상황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틸드에게 동정심이 생겼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가 호화롭고 안락한 삶을 꿈꾸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책의 첫 문장처럼 그녀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하급관리인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것은 운명의 장난이었다는 것에도 다시 한 번 공감했다. 마틸드로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러는 것이 당연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비록 이야기의 결말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녀는 실패했을 뿐 성공한 이야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녀가 화려한 모습으로 무도회에 참석했고 장관이나 다른 고귀한 신분의 남자에게 눈에 띄어 그녀에게 구애를 하게 되었다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질 것이다. 이미 남편이 있는 여인이지만 당시에는 결혼한 부인을 유혹하여 후원과 금전을 대가로 침실로 끌어들이는 일이 흔한 일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마틸드도 그렇게 무도회에서 돋보이고 싶었던 것이 단지 하급관리의 부인으로써 그만한 호화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라고는 이해하기 힘들다. 마틸드는 무도회를 기회로 신분상승을 꾀했다고 짐작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이 문제는 차차하고 남편은 자신의 취미생활에 사용할 돈을 포기할 정도로 부인에게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었고 마틸드도 그런 욕심과 허영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여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추하기 이를 때 없는 여인이 이러한 허영심을 가지는 것은 말 그대로 허황된 꿈일 뿐이지만 아름다운 마틸드의 경우에는 한번 쯤 도전해보고 꿈꿔볼만한 일이다.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실패하였을 뿐 그녀의 지나친 허영심이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한 여인이었음에도 남편의 양해 없이 그러한 신분상승을 홀로 꿈꿨다는 것은 비난 받아야한다. 물론 멍청한 남편은 사랑하는 부인이 무슨 짓을 해도 다 이해할 것이다.오히려 남편의 헌신적인 사랑이 더 비극적이다. 자신의 능력껏 부인이 원하는데로 들어주는 태도는 일개 하급관리인 자신으로선 채워지지 않을 부인의 허영심을 더 부채질한다. 로아젤이 진정으로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 싶었다면 부인이 현실을 직시하게끔 만들고 가난하지만 둘이서 알콩달콩하게 지내는 소박한 삶도 행복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가정의 평화보다도 마틸드라는 여인이 행복하기만을 바랬던 것 같다. 어쩌면 부인의 허영심을 부채질한 것으로 보아 그녀가 무도회에서 특별히 장관에게 눈에 띄어 그녀가 제 2의 삶을 살기를 기원했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그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옆에서 가난에 시름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느니 새로운 도전을 통해 그녀를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말이다. 이 단편의 첫문장처럼 일방적인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로아젤에게 또한 이는 운명의 장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