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다른 대부분의 나라들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의 근현대를 살펴보면 굉장히 역동적인 시간을 지나왔다. 그리고 그 시간의 중심 중 하나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지배의 시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그 시기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이미 그 시기는 확고하게 우리 역사 가운데 속한 것이라 할 것이다.그리고 격동의 한국 근현대를 시작된 중심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는 사람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 한국에서는 워낙,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지내던 시기가 악몽이자 치욕의 시기로 뿌리 박혀 있기에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라는 인물이 일본의 총리로 조선을 지배하였다는 역할 그 이상으로, 안중근이란 독립투사를 높이기 위한 장치로 이용되면서 더더욱 그렇게 되었다. 물론, 현재 한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으로 일본에서는 안중근을 살인자로만 여기는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다시없을 악역의 인물이지만, 그만큼 그의 능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서 이토 히로부미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어느 한 방향으로만 치우쳐서도 안 될 것이다.이 후,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그리고 안중근 사건에 대한 다른 시각과 의견들을 알아가면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이토 히로부미1) 생애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9월, 일본 야마구치현의 구마게(熊毛)군 쓰카니(束荷) 마을에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미일화친조약이 맺어지는 1854년 그의 아버지가 이토 나오에몬(伊藤直右衛門)의 양자가 되면서 진정한 이토 히로부미가 태어나게 되었다. 1859년에는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1863년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1864년,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외국과 충돌하게 됨을 알고 이노우에와 함께 귀국을 하게 된다. 또한 통역으로서 시모노세키에서의 영국과의 강화회담을 돕게 된다. 1867토벌을 논의하게 된다. 1868년 1월 3일, 근대 일본의 시작을 나타낼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후 메이지 신정부의 외국사무담당관이 된다. 이후로 미국과 프랑스, 영국을 다니면서 외교 활동을 하고 1882년에는 헌법 조사연구를 위하여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1885년 일본에 내각제를 창설하고 그 곳의 초대 내각총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1888년 헌법 제정에 집중하기 위해 내각총리를 사임하고 1년 뒤인 1889년 헌법을 공포하게 된다. 이후 제 4차까지 이어지는 내각의 총리로 역임하면서 대외적으로 러시아, 청, 그리고 조선을 넘나들면서 전 세계적으로 외교 활동의 중심에 서서 일본이 세계에 올라서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영일동맹은 물론, 가장 중요한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에서도 이토 히로부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히로부미는 한국통감이 되어 통감부에서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1909년 6월 한국통감을 사임한 후 10월 14일에 만주로 여행을 떠나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당하면서 그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게 된다.2) 활동이토 히로부미는 대내외적으로 일본 근대의 중심에 서있었다. 메이지 유신의 한복판에 서있었으며, 천왕을 중심으로 한 유신 체제를 만들어낸 것도, 근데 일본 헌법의 완성도 그의 역할이 컸다. 또한 영일조약을 체결하는 것에도 중심 역할을 해낸 것이 그였다. 또한 헌법의 완성을 위해서 행했던 구미헌법조사의 기간 동안 근대 일본의 교육 시스템을 확립하기도 하는 등 일본 근대 역사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다.ㄱ. 일본 근대 교육의 확립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헌법을 만들기 위해서 구미를 돌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슈타인과의 만남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슈타인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국가발전을 최고도로 올리기 위해서 필요한 국가와 개인의 정신일체는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강의를 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강의 이후, 그와 의견을 동조하는 모리 아리노리와 함께 지금의 한국에까지 남치하게 되었다.ㄴ. 일본 헌법의 제정1881년, 일본은 자유민권운동이 최전성기에 다른 시기였다.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이토에게는 서구화, 근대화와 함께 자유민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바람을 함께 해소하여 국민적 통합을 이루어야했다. 그런 과정의 일환으로 서양 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고자 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서양 열강이 일본을 문명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토의 정부는 서구화에 더욱 열을 가했다. 그러나 계속적인 불만세력들의 민주적 요구에 대처하기 위해서 입헌제의 도입을 결정하고 1882년부터 헌법제정의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구미헌법조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찰 끝에 그는 프러시아 헌법이 가장 알맞다고 판단, 독일식 헌법을 준비하였다. 1885년에 내각 제도를 도입하면서 스스로 최초의 내각 총리가 되었고 1886년부터는 헌법 초안을 작성, 1888년엔 헌법을 심의할 추밀원을 신설, 추밀원의 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1889년 2월,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의 헌법을 제정하고, 내각제를 완성하는데 있어서 이토 히로부미는 그 중심에서 큰 역할을 해왔다.ㄷ. 대(對)한국정책일본의 최고 각료가 된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큰 문제가 있었다. 그 것은 ‘겁쟁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신중한 그의 일처리에 불만을 가진 각료들과 정부의 부국강병정책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공황 상태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 그리고 헌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충족되지 못한 국민들의 불만) 등을 국내에서 터지지 않게 해소해야만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때마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좋은 실마리가 나타났다. 그 것은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이었다. 조선정부가 동학당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는 전문을 접하고 이토 내각은 조선을 둘러싼 청일 양국의 세력균형이 깨지게 된다는 것을 내각 내의 다른 세력들과 국민들에게 강조하면서 파병을 주장하였다. 결국 대본영을 세우고 조선에 진출하여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가지게 되었다에 대한 열망이 커져갔다. 하지만 이토의 입장에서는 일본 내의 막힌 정국을 푸는 것 이상의 진출은 단순히 서양 열강의 견제만 늘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륙으로의 진출 대신 청나라와의 강화 조약)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일본 국내에서도 만족하는 결과였다.이 후로 조선 내에서는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조선은 일본이 아닌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의 확립을 달성했고, 이 후 조선은 일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동안 신중론을 주장하며 온건파의 측에 있던 이토는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승리하자 강경하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이토는 조선정부를 강하게 압박하였으며, 조약의 체결 후에도 직접 통감의 총독이 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하지만 그 이후에도 일본 내에서 조선과의 합병을 주장하는 정치가들과는 달리 이토는 합병이 아닌 조선은 일본 내에서 역량을 키워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합병도, 독립도 아닌 미묘한 주장을 하게 된다.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삼는 것 이상으로 그들의 영토로 차지하게 된다면 서양 열강들의 보다 강한 견제를 받을 것은 확실한 사항이었으며 이를 꺼려한 이토는 합병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실질적으로는 항일운동을 철저하게 막고, 조선 내에서 일본의 통치를 확고히 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외부적으로 들어난 태도는 일본 내에서는 유화론으로 받아드려져 그에 대한 불만이 점점 쌓여만 갔고 결국 그는 1909년에 통감직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으로 복귀하게 된다.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평가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평가 중 가장 주를 이루는 것은 그가 철저한 실리주의자였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 근대의 대격동기에 태어나 역사의 중심에 서있던 그는 근대 일본의 설립자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완성에 있어서도 그는 큰 역할을 하였다.메이지 유신 시기 존왕양이 운동을 펼치고, 천왕을 중심에 앉힘으로확립시켰고, 그를 통해서 일본 내의 반막부 세력은 물론, 국민들의 마음까지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었다.근대화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그는 어디까지나 이익을 보고 움직였다. 일본이 서양 열강과 불평등조약을 맺었지만, 그는 최대한 빨리 서구화와 근대화를 마침으로써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고자 하였고, 그 계획으로 사절단들을 구성하여 서구로 적극 파견하였으며 자신 또한 사절단에 스스로 참가하기도 하였다.또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동시에 근대화의 장치로 헌법을 제정하며 내각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도 하였으며, 국민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근대적 교육 시스템을 적극 도입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나아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서는 보다 효율적으로, 그리고 서양 열강의 견제를 덜 받는 쪽인 문화통치를 택하여 점차 흡수해나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합병이 늦춰졌으나, 안중근 의거로 인한 그의 죽음으로 인해 일본의 조선 합병이 이토의 계획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청일전쟁 이후 전비로 든 돈보다 더 많은 배상금을 받아냄은 물론, 조선 진출을 향한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하였다.하지만 그의 철저히 일본의 이익을 추구한 정책들로 인해 중국을 포함해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보다는 중국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부정적이다. 안중근 의거 후 중국인들은 대부분 안중근의 행동을 칭송하였고, 중국의 지식인층도 다른 중국인들이 덩달아 행동하는 것을 우려했지만, 안중근의 행동에 대해서는 굉장한 일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당시 한국에서는 그의 행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친일파들의 경우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경우, 안중근 의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지만, 미주 한인들의 경우에는 의거를 통해서 독립 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를 기대했다.) 러시아의 경우, 자신들의 영토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즉시 자신들었다.)
들어가며TV를 켜면 나오는 각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 그 많은 프로그램들을 오가며 큰 인기를 누리며, 최고의 진행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강호동씨죠. 또한 최근 K-1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최홍만 선수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전혀 상반된, 하지만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이 둘 모두 비록 활약한 시기는 다르지만 씨름판에서 큰 활약을 펼쳤던 씨름 선수라는 점이지요. 사실 요즘은 많이 인식이 적어졌지만, 알고 보면 씨름판에서 얻은 인기는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가졌죠. 한동안 개그 프로 같은 곳에 나와서 덩치와 다르게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던 박광현씨도 그렇고, 이봉걸씨와 이만기씨는 이름만 말해도 아직도 “아! 그 사람들?” 하면서 반응할 분들이 꽤 있으실 겁니다.명절 때나 되어야 겨우 TV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씨름 경기지요. 그나마도 씨름 경기를 하고 있으면 잠깐 보다가 금방 채널을 돌리는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씨름은 재미없어서 안 본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죠. 최홍만 선수도 씨름을 그만 둔 이유 중 하나가 인기가 없어졌다는 이유도 있었죠. 젊은 사람들은 씨름이 재미없고 지루하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씨름이 정말로 재미가 없어서 그런 걸까요. 제 생각에는 씨름이 정말로 재미없어서 그렇다기 보다는 인식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그렇지 않나 합니다. 확실히 요즘 인기 있는 K-1이나 프라이드 같은 이종 격투기와도 같은 피가 터지도록 치고 받고 싸우는 그런 재미는 없죠. 아주 격하에서 말하면 모래판 위에서 다 벗고 상대를 넘어뜨리면 이기는 게임이니깐 말이죠.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보면 그 속에 담겨진 재미를 아실 수 있을 겁니다.씨름의 역사오늘 날 알려진 씨름의 역사는 꽤 길지만, 프로 씨름으로 창건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잘 알려진 고구려 각저총에 있는 씨름 벽화지요. 두 남자가 웃통을 벗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지금의 씨름 시기부터를 씨름의 역사라고 본다면 적어도 1,500년 이상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 삼국 시대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사료에 기록된 치우희의 경우, 치우가 고조선의 지도자였던 단군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상고시대부터 이미 있었고 신채호 선생이 쓰신 조선 상고사에 기록되어 있는 씰흠이라는 것에서 지금의 씨름이 유래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씨름의 역사는 가히 반만년에 달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씨름의 기록이 역사서에 처음 나타난 것이 고려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씨름이라는 것 자체가 그 때도 서민들의 놀이였기 때문에 기록이 많지는 않았지만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시대에 가장 먼저 씨름이 역사의 앞에 등장한건 바로 무신들의 난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고려 의종 때 문신들을 총애한 의종이, 문신들과의 유희 중에 오병수박희라는 일종의 씨름의 원형격인 경기를 펼치고 거기에 참여한 늙은 대장군에게 문신 한뢰가 무례하게 굴고, 이것이 무신들이 난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되었죠. 여기서 등장하는 오병수박희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씨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 때 이후로는 역사적인 의미를 크게 갖는 기록은 물론, 제대로 언급되는 것 자체가 적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 이후로는 이제 200년 정도 흐른 뒤에 충숙왕 때에야 언급됩니다. 충숙왕이 중요한 업무는 다 신하들에게 맡기고 궁중에서 씨름을 하며 예의가 없었다고 하기도 하고, 용사들에게 씨름을 시켰다는 이야기, 씨름을 구경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비록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놀았다는 건 문제가 있지만,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왕이 궁내에서 직접 씨름을 하고 씨름을 구경했을까요. 씨름은 이미 충분히 놀이로써 퍼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조선시대로 넘어오면 사서보다 더 많이 씨름이 등장하는 곳이 바로 그림입니다. 조선시대의 그림 중,풍속도 중에도 씨름을 주제로 한 풍속도가 있고 혜산 유숙의 대쾌도란 그림에서는 택견과 씨름이 한 장면에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씨름에 대한 언급이 주로 풍속화를 통해서만 이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나 유학을 신봉하던 조선시대의 양반들에게 씨름은 그다지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평민들 사이에서는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특히 각 풍속도에 그려진 관중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유쾌하고 흥미진진해 하는 표정이라는 점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다 씨름판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을 보아 씨름은 군중들이 다함께 즐기는 기분 좋은 경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이런 조선시대 평민들의 씨름에 대한 인기는 구전을 통해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짤막하게 그 이야기를 하자면, 17세기 중엽 청이 쳐들어오고 결국 인조가 항복을 했을 때 청에서는 볼모로 당시 왕자였던 효종을 인지로 잡아서 청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때 효종을 수행한 사람이 김해 출신의 김여준이란 무관이었습니다. 청은 끌고 가는 도중에 조선인들의 의지를 꺾기 위해 청에서 이름난 씨름꾼 우거를 내세웠습니다. 우거가 어땠냐면은 근골이 장대하고 완력이 뛰어난 데다가 용모까지 험악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덩치에 험악한 얼굴을 지닌 장사니 왠만한 사람은 기가 죽었을 테지요. 하지만 이대로 기가 죽었다는 이야기로 끝나면 얘기가 나온 의미가 없겠지요. 우거보다 왜소한 김여준이었지만 우거와 청 사람들의 태도에 분노하고 있었기에 우거와 승부를 겨루게 됐습니다. 어떻게 한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유술로 우거를 넘기고 씨름 기술로 마무리하여 우거가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큰 부상을 입혔다고 합니다. 이 후로는 청나라 사람들도 김여준을 피해다녔다고 합니다. 통쾌한 일 아닐까요. 후에 효종보다 먼저 귀국한 김여준은 외세에 굴복한 관료들과 함께 정치를 하고 싶은 맘이 없다면서 농사만 짓다 죽었다고 합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효종은 김여준을 기리기 위해 달 밝은 밤엔 그를 추모하는 시회를 가졌다고는 현재의 전국체육대회의 전신인 조선종합경기대회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등 스포츠계에서의 위상도 높아집니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 정책으로 인한 민족 말살책의 하나로 씨름 역시 탄압받기 시작합니다. 씨름이 민족 정기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자 조선 총독부에서 씨름을 하지 못하게 하고, 언론을 탄압하지만, 그래도 씨름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 없자 일본의 스모로 대체하는 등, 계속 방해를 합니다. 이 후로 계속 씨름이 탄압을 받고, 또 태평양전쟁의 혼란과 한국전쟁 등의 혼란으로 인해 1959년 제1회 전국장사씨름대회가 열리기 전까진 공식적인 씨름대회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씨름이 정식으로 프로 선언을 하고 출범한 것은 1981년이었고 이것이 현재의 씨름의 모습을 갖춰오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씨름의 종류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씨름은 왼씨름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크게 왼씨름, 오른씨름(바른씨름), 띠씨름으로 크게 세 종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씨름이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각 도마다 특색이 다르고 조금씩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방식이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각 도마다 다르면 통합적인 경기를 치룰 때 지장이 있지요. 그래서 1961년 전국체육대회 때 각 도별로 경기 방식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왼씨름으로 통일한 것이 지금의 일반적인 씨름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된 겁니다. 왼씨름과 오른씨름의 구별은 샅바를 어느 쪽에 매냐에 따라 다른데 샅바를 오른쪽 다리에 끼고 왼손으로 다리샅바를 오른손으로 허리샅바를 잡는 것이 왼씨름, 그 반대 방법이 오른씨름이라고 합니다. 띠씨름은 말 그대로 허리에 띠를 하나 매고 그것을 잡고 하는 씨름을 말합니다.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씨름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각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서울의 경우에는 왼씨름과 오른씨름이 모두 통용되었지만 그래도 왼어깨 씨름이 주로 이뤄졌다고 하고, 왼씨름을 바씨름이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김홍도의 풍속도 ‘씨름’에 나오는 형태도흥겨운 농악으로 신명 풀이를 한다고 합니다. 충청도 전체를 하나로 하고, 함께 즐기는 축제의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충청도 지방은 특이하게도 띠씨름이 이뤄졌습니다. 호남 지방 역시 칠월 칠석에 시작해서 9월에 이르러서야 끝난다고 합니다. 충청도와 다른 건 경기 전의 악기 연주가 조금 더 다양했다는 점과, 왼씨름과 바른씨름이 통용되었기에 경기 방식은 추첨을 통해서 결정했다고 합니다. 평안도 지방은 된샅바 걸이와 망걸이라는 특별한 방식을 사용했는데 간단하게 설명들이면 다른 지역에 비해서 훨씬 샅바를 빡빡하게 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황해도 지역의 경우에는 씨름 경기 후에 우승자에게 기묘한 탈을 씌워준다고 합니다. 또한 양반을 풍자하는 놀이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평민들의 스트레스 방출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죠. 함경도의 경우 샅바를 느슨하게 해서 씨름을 한다고 합니다. 평안도의 경우 샅바를 빡빡하게 매서 체력이 약한 사람이 불리한 방법인데 느슨하게 매면 기술이 다양하게 되고 힘의 제약을 덜 받지만 키 차이가 날 때는 한 편이 불리하게 된답니다.외국의 씨름들우리나라의 씨름과 마찬가지로 맨몸을 활용한 경기는 외국에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레슬링의 경우도 우리와 같은 맥락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른 나라의 것들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건 일본의 스모죠. 겉모습만 보면 우리의 씨름과 가장 비슷하게 생겼지요. 모래판 위에서 덩치 큰 두 선수가 샅바만 매고 마주한다는 것은 우리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경기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죠. 씨름의 경우 상대와 직접 몸을 붙이고 넘어뜨리는 방식이지만, 스모의 경우 힘과 체중으로 상대를 밀어내서 경기장 밖으로 내보는 것이 주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가끔 일본의 스모와 우리의 씨름을 비교해서 어디가 더 강한가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다른 곳에서 이미 나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일본보다 오히려 우리 씨름과 비슷한 형태의 것을니다.
論錢弊凡産於地(범산어지), 益於民曰財(익어민왈재).무릇 땅에서 생산되어 백성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재물이라고 한다.財莫大於衣食(재막대어의식), 其次器用藥物之類(기차기용약물지류), 外此無所用之也(외차무소용지야).재물 중엔 의복과 음식보다 더 중한 것이 없고, 그다음은 기명과 약품 등이며, 이외에는 별로 소용될 거의 없다.天下至廣(천하지광), 而産財各異(이산재각이),천하가 지극히 넓어서 생산되는 재물이 고장마다 각각 다르므로,其勢不能不轉移流通(기세불능불전이류통), 此錢所以作(차전소이작).형편상 지역마다 서로 유통하여 무역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돈을 만들게 된 것이다.錢無用之器(전무용지기), 特權而宜之(특권이의지), 欲財之盡乎用也(욕재지진호용야).돈 자체는 쓸데없는 물건이지만 알맞게 조절하여 적용하려고 만든 것이다.睹歷代因革辨論各明(도역대인혁변론각명), 廢之則有濕束薄絹之患(폐지즉유습속박견지환), 行之則有重利逐末之(행지즉유중리축말지).그러나 역대를 살펴보면, 돈을 사용한 때도 있고 폐지한 때도 있어 환히 알 수 있는데, 폐지하면 곡식을 말리지 않고 비단을 엷게 짜는 폐단이 있으며, 사용하면 이익을 중하게 여겨 상공업에만 종사하는 폐단이 있다.二者皆可惡(이자개가악), 惡之而不可兩廢(악지이불가양폐).두 가지가 모두 나쁘긴 하지만 나쁘다고 해서 두 가지를 모두 폐지할 수는 없다.則甚者可去(즉심자가거), 輕者可存(경자가존).그러면 폐단이 심한 것을 없애고 심하지 않은 것을 남겨 두는 것이 좋다.苟其可存(구기가존), 弊又不足惡也(폐우불족악야).진실로 남겨 두는 것이 좋다면 폐단을 굳이 싫어할 것이 없다.若執末流之弊(약집말류지폐), 而咎用法之意(이구용법지의), 是不足以知體要矣(시불족이지체요의).만약 말류의 폐단만을 가지고 법을 만든 본의를 나무란다면, 이는 대체를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夫水火生民之不可闕(부수화생민지불가궐), 其弊也有焚溺敎死之酷(기폐야유분닉교사지혹),물과 불은 백성들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폐단을 말하면, 불에 타죽고 물에 빠져 죽는 수 없는 것은 마치 물이나 불과 같고, 돈처럼 없애면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錢之用(전지용), 不外於轉移(불외어전이), 而粟布猶可以錢移(이속포유가이전이).돈을 사용하는 것은 물자를 서로 교환하는데 벗어나지 않으나 곡식과 포백은 그것만 가지고도 교환할 수 있다.寒不衣飢不食而農(한불의기불식이농), 則病焉(즉병언),추워도 입지 못하고 굶주려도 먹지 못하게 되면, 농사에 방해가 된다.故與其?行而農受其?(고여기병행이농수기려), 寧一去而專乎本務也(녕일거이전호본무야).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를 겸행하여 농사에 해를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가지를 버리고 전적으로 근본만 힘쓰는 것이 낫다.我國地方狹小(아국지방협소), 作京處中(작경처중), 其入貢道里(기입공도리), 過千里者幾稀(과천리자기희).우리나라는 지역이 좁은데다 서울이 중앙에 있으므로 조공을 바치는 이정의 거리가 천리를 넘는 곳이 거의 없다.三面環海(삼면환해), 水道交於內(수도교어내), 轉移之難(전이지난,), 異於中華(이어중화),삼면이 바다를 둘러싸였고 물질이 내륙지방까지 교착되어 물자를 운반하는 어려움이 중국과 다르고,行旅負擔(행려부담), 足以達乎邊裔(족이달호변예), 則又不必資於輕貨也(즉우불필자어경화야).행인들도 등에 지고 어깨에 메고서 변방까지 충분히 이를 수 있으니, 반드시 가벼운 화폐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今錢之行(금전지행), ?四十年(재사십년),지금 돈을 사용한 지가 겨우 40년밖에 되지 않았다.夫行之前(부행지전), 其損如何(기손여하), 旣行之後(기행지후), 其益如何(기익여하).사용하기 이전의 손해는 어느 정도였으며, 사용한 이후의 이익은 어느 정도였는가.以言乎民産(이언호민산), 則日竭(즉일갈), 以言乎人風則日偸(이언호인풍즉일투), 以言乎國儲(이언호국저), 則日?(즉일궤), 其利與害(기이여해), ?已見矣(개이견의).백성의 재산으로써 말하면 날마다 없어졌고, 인민의 풍습으로써 말하면 날마다 각박해졌으며, 나라의 저축으로써 말하면 날마다 줄어들었으니, 그 이익되고 해되는 것을 대강 알 수 있다.獨其便於徵斂(독기焉(이지자용언),백성들이란 성품으로 말하면 지극히 미련하나 지혜 있는 자가 이용하고,以位則至賤(이위즉지천), 而貴者賴焉(이귀자뢰언),지위로 말하면 지극히 비천하나 고귀한 자가 힘입으며,以力則至小(이력즉지소), 而大者資焉.(이대자자언).힘으로 말하면 지극히 미약하나 강대한 자가 자본으로 한다.故利國不外於利民(고이국불외어이민), 論治而不先民者末矣(논치이불선민자말의).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유익하게 하려면 백성들을 이롭게 해 주는 데 불과하다. 만일 정치를 말하면서 백성을 우선하지 않는 사람은 말류에 해당한다.其爲生也(기위생야), 所處非宮觀之盛也(소처비궁관지성야), 所食非水陸之珍也(소식비수륙지진야),그들의 생활하는 것을 보면 거처한 곳이 궁궐처럼 좋은 집도 아니고 먹는 것은 수륙의 진미도 아니며,所被服非羅穀錦綺之麗也(소피복비라곡금기지려야), 所乘載非車乘之便安也(소승재비차승지편안야), 所服用器物(소복용기물), 非金珠犀玉之遠方稀貴也(비금주서옥지원방희귀야).입는 것은 비단처럼 화려한 옷도 아니고 타고 다니는 것은 수레처럼 편안한 것도 아니며, 사용하는 그릇은 먼 지방에서 가져온 귀중한 금주나 서옥도 아니다.用力不離於一頃(용력불리어일경), 運智無出於百里(운지무출어백리),힘쓰는 것은 1경의 농토에 불과하고 지혜를 내는 것은 백리에 벗어나지 않는다.安其土(안기토), 利其食(이기식), 樂其所爲業(락기소위업),그 토지를 편안히 여기고 그 토지에서 생산된 곡식을 먹으며 그곳에서 사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살아가는데,而國以之基焉(이국이지기언), 使其無錢(사기무전), 損何足言哉(손하족언재).국가에서는 그것으로써 기본을 삼으니, 가령 그들에게 돈이 없다 하더라도 무엇이 손해되겠는가.使斯民終歲勤動(사사민종세근동), 生穀有限(생곡유한),이 백성들로 하여금 1년 내내 부지런히 곡식을 생산하게 한다 하더라도 수확량은 한정되어 있는데而其應乎人(이기응호인), 則多在錢不易(즉다재전불이), 則將無以需也(즉장무이수야).남들과 상대할 때에는 돈을 사용하는 데가 많으니, 돈과 바꾸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且歲부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상인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이 농민들은 더욱 가난하게 되는 것이다.明君制民之産(명군제민지산), 必敎之儉(필교지검),현명한 임금은 백성에게 재산을 고르게 나눠 주고는 반드시 검소한 것을 가르친다.儉之反則奢(검지반즉사), 奢不去(사불거), 則儉無由興(즉검무유흥),검소한 것의 반대는 사치하는 것이니, 사치를 없애지 않으면 검소한 풍속이 일어날 수 없다.去之之道(거지지도), 非家禁而戶儉(비가금이호검), 卽立法使之然也(즉입법사지연야).사치한 것을 없애는 방법은 집집마다 금지하고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법을 만들어서 자연히 그렇게 되게 하여야 한다.苟欲奢也(구욕사야), 莫便於錢(막편어전), 則知無錢之不得已用儉矣(즉지무전지불득이용검의),진실로 사치하려면 돈보다 편리한 것이 없으니, 돈이 없으면 부득이 검소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儉而成俗(검이성속), ?將餘粟(균장여속), 不然亦必有帶?行市(불연역필유대강행시), 而歸於靡矣(이귀어미의).검소한 풍속이 이루어지면 창고에 남은 곡식이 있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돈꿰미를 허리에 두르고 시장에 나가 다 없애고 말 것이다.然則錢之?農(연즉전지려농), 殆不可以指陳矣(태불가이지진의).그러니 돈이 농민들에게 끼치는 피해를 이루 다 지적해서 말할 수 없다.凡術損於農(범술손어농), 則必益於商(즉필익어상), 惟錢不然(유전불연).모든 일은 농민들에게 손해가 되면 반드시 상인들에게는 유익한 법인데, 돈만은 그렇지 않다.錢之夫行(전지부행), 四方之物價各異(사방지물가각이), 故利在於能運(고이재어능운),돈이 사용되기 전에는 사방의 물가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이익이 운반하는데 있고,若粟若布(약속약포), 籌數不可以盡?(주수불가이진핵), 故利在於能察(고이재어능찰),곡식과 포백 같은 것은 계산하여도 다 조사하여 밝힐 수 없기 때문에 이익이 잘 살피는 것에 있었는데,今之(금지), 則遠邇爭?於晷刻(즉원이쟁무어귀각),지금은 멀고 가까운 지방이 시각을 다투고,婦孺談卜於毫芒(부유담복어호망), 利無所隱(이으키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익에 대한 인식이 퍼지면 풍속이 나빠진다.故利在於山澤(고이재어산택), 則俗其盡出也(즉속기진출야),그러므로 산택에 있는 이익은 전부 뽑아내려고 하지만利在於人(이재어인), 則不俗其盡?也(즉불속기진핵야).사람에게 있는 이익은 전부 조사하여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俗其盡出(속기진출), 莫如務農(막여무농),이익을 다 뽑아내려고 한다면 농사를 힘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不俗其盡?(불속기진핵), 亦莫如抑末(역막여억말),이익을 다 조사하여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익을 억제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錢乃導之以末者也(전내도지이말자야).돈이란 바로 이익으로 인도하는 것이다.是以閭巷童昏(시이여항동혼), 髮猶夫燥而動手移足(발유부조이동수이족), 輒謀營求(첩모영구),이렇기 때문에 동리에 머리털도 아직 마르지 않고 손발을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어린아이들도 영리를 꾀하고貴遊總角(귀유총각), 身居軒堂(신거헌당), 而廛市低仰(이전시저앙), 迷者取譏(미자취기),귀한 집 총각들도 몸은 높은 당헌에 있지만, 시장의 높고 낮은 물가를 모르는 사람은 조롱을 받는다.故咫尺之地(고지척지지), 圭撮之間(규촬지간), 莫非利慾之鬧場(막비이욕지료장), 而民風遂大變矣(이민풍수대변의).이 때문에 지척의 땅 한줌의 사이에도 이욕을 다투는 장소가 아닌 곳이 없어 백성의 풍속이 마침내 크게 변하게 되었다.加之人不安業(가지인불안업), 恒産屢絶(항산루절), 盜賊日以繁(도적일이번), 邦賦歲以縮(방부세이축), 孰不曰錢使之至於此極乎(숙불왈전사지지어차극호).더구나 사람들이 직업을 편안히 여기지 않아 살림이 여러 번 파산되어 도적이 날마다 번성하고 국가의 수입이 해마다 줄어드니, 돈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錢之所以爲寶何哉(전지소이위보하재).돈이 보배가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其有金銀珠貝之質之可貴歟(기유금은주패지질지가귀여), 有綾羅錦繡之文之可美歟(유능라금수지문지가미여).금은주패처럼 물질이 귀한 것인가. 비단처럼 무늬가 아름다운 것인가.銅錫生於民(동석생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