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건물에 사람들의 성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대리석 건물의 새하얀 바닥은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진흙발자국으로 시커멓게 뒤덮여갔다. 여기저기서 욕설이 오갔다. 더러는 서로의 멱살을 쥔 채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졌다.탕, 탕!건물의 중앙에는 높은 단이 하나 있었다. 단 위에는 으리으리한 대리석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좌편에는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또 반대편에는 거대한 전나무가 각각 조각되어 있었다. 탁자 너머의 광경은 보이지 않았는데, 단이 너무너무 높은 탓이었다.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가 두어 번 더 들리자 사람들의 소란은 빠르게 진정되어갔다. 사람들은 탁자 너머에 앉아 있는 이를 ‘지혜로운 재판관’이라 불렀다. ‘지혜로운 재판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는데, 특이한 점은 그의 얼굴을 본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탁자 너머에서 자애로운 음성이 들렸다.“진정들 하시오. 여기는 예사 곳이 아니오. 그대들이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말이오. 우선 그대들의 분쟁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겠소.”사람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오오, 현명한 재판관이시여!” 관내의 모든 이들은 탁자 너머의 얼굴 없는 재판관에게 경의를 표하고 달음질하여 중앙 탁자를 중심으로 양 갈래로 나뉘어 섰다. 줄이 정렬되는가 싶더니 곧 왼편에서 검은 코트를 늘어뜨린 한 사람이 나와 재판관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에게 지혜로운 재판관의 도움이 꼭 필요하오. 세상을 어지럽히고 평화롭던 우리를 분쟁하게 만든 못된 자가 있소이다! 지혜로움으로 가득한 당신께 그 악랄한 자의 처분을 맡기오니 부디 명쾌한 판결을 내려 혼란에 빠진 민중들을 구원토록 하시오! 너희는 지금 당장 그 자를 끌고 오너라!”그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 명의 병졸이 비쩍 마른 한 남자를 포박하여 관내에 들어섰다. “저자는 차라투스트라가 아닌가.” 재판관의 음성이 가볍게 떨렸다. 차라투스트라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핼쑥해진 얼굴에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온 것이 그의 형상을 무척이나 피폐하게이 직접 차라투스트라를 기소하다니! 사안은 더없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왕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어 사람들의 주의를 요했다.“저자는 이 나라를 가리켜 새로운 우상이라 했다! 괴물이라 지껄였다, 나라를 부정하고 그곳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주장했다! 이것이 반역이요,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왼편의 사람들이 호응하여 소리쳤다. 왕은 그들에게 다가가 일일이 손을 잡아 주었다. 동시에 병졸들이 왕을 에워싸고 보위했다. 더러 손 내민 사람들은 병졸의 갑옷에 막혀 팔을 꺾어야만 했다. 일련의 ‘의식’을 마친 왕은 역시 검은 코트를 입고 병렬해있던 신하 하나가 가져온 양피지를 급히 펴 들고 거대한 대리석 탁자 가까이에 다가갔다.“국가의 발생은 자연적인 것이다. 국가의 발생은 개인의지의 결과다. 미천한 이들이여, 생각해보라! 역사적으로 국가가 어떻게 탄생하였는가를! 생각해보라, 국가가 개인에게 선사하는 막대한 이익을! 인간이 혼자서 거대한 자연과의 목숨을 건 투쟁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가? 혹독한 추위로부터 지독한 배고픔으로부터, 금수(禽獸)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부터 살아남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가?과거 인간들은 소규모의 집단을 이루어 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고 열매를 따먹으며 힘겹게 살았다. 수렵에 실패하면 굶어죽기도 했지. 인간들의 삶은 그와 같은 불안 속에서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런 짐승 같은 생활을 영위하기에 인간은 너무도 지혜로웠던 것이다. 그들은 작물을 재배하는 법을 터득했다. 땅에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싹이 자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열매를 저장하게 되었다. 생활은 풍족해졌다, 인간은 ‘생존’의 고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어! 힘겨운 과정이었지만 인간은 해낸 것이다.하지만 농사를 짓는 데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혈연, 씨족이라 이름붙이는 그따위 소규모 집단으로는 한 해 한 해 작물을 심고 거두어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통이자 고충이었다. 영리한 인간은 모여 살기 시작했다. 보다 큰 집단 불철주야 고생하는 이 나라와 위정자들에게 최소한의 경의를 표해야 한다! 입이 틀어 막혀진 저 자가 ‘초인’을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 초인? 하, 초인도 국가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가?국가가 사람을 속인 것이 무엇인가? 옳음을 옳다고 인정하고 악함을 악하다 인정하는 것이 국가의 거짓말이란 말인가? 인간의 심성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옳고 그름에 대한 정의를 실현하는 곳이 국가다! 국가는 빈곤한 자들을 향하여 보상을 실시하기도 하며 나라를 위하여 몸을 불사른 청년들을 향하여 그들의 숭고함을 찬양하기도 한다! 보라, 그러한 국가를 벗어나서 개인이란 존재가 홀로 독야청청할 수 있으리라 보는가? 보라, 저 차라투스트라란 자도 나의 백성이 아닌가? 저 자도 나의 신민(臣民)이 아닌가 보란 말이다! 어리석은 자여, 입이 있으면 반박해보라! 그 잘난 듯 떠들던 주둥이를 봉쇄당한 꼴이 우습기만 하구나!”3왕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흥분하여 들고 있던 양피지 조각을 그의 신하들을 향해 집어 던지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연설에 퍽이나 흡족한 모습이었다. 벌겋게 상기된 볼을 문지르며 왕은 왼편의 청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군중 속에 뒤섞인 그의 모습은 다른 이들과 같아 구분되지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지혜로운 재판관’에게로 주목되었다. 이곳은 왕이 갖는 최고의 권위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그만의 집무처였다. 거침없이 쏟아낸 왕의 빠른 언사들을 모조리 기록하기라도 하는 듯 오랜 시간 동안 반응을 보이지 않던 ‘지혜로운 재판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차라투스트라를 변호할 자는 없소이까?”“내가, 내가 그를 변호하겠소.” 오른편에서 한 노인이 굽은 허리를 두들기며 지팡이를 끌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차라투스트라를 변호하겠소. 어찌 보면 불쌍한 차라투스트라는 나의 말을 전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니 말이오. 적어도 국가, 새로운 우상에 대해서만큼은.”“동방에서 왔다는 현자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가 차라투스트라를 보기 위해서 먼 길을 달려왔다고들 하더구나.”“나 있어야만 하네. 불합리하지, 불합리하고말고.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란 말인가? 정작 자신에게 혜택에 돌아오지 않아도 모든 것을 내어주란 말인가? 그렇다면 백성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국가라는 것의 이상은 무엇이지?왕의 등장은 역사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전쟁 수행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더군. 그렇다면 전쟁에 끝난 이후에 왕은 왜 존재하는가? 왜 왕은 스스로를 높이고 다른 이들의 숭배를 받는가? 방금 전 당신이 이곳에서 보여준 의식은 무엇이지? 마치 접신(接神)이라도 하려는 듯 당신의 손을 잡기 위해 미친 듯 손을 뻗던 이들의 행동은 또 무엇이고. 그것이 종교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차라투스트라는 그 점을 알고 있었던 거야.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이 새로운 우상인 국가의 결과가 파시즘이며 나치즘이며 하는 것들, 전체주의이자 군국주의로 귀결된다는 진실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걸세! 그러한 광신도들을 경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억압의 근원이 되어가는 국가를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도대체 차라투스트라를 무슨 죄로 처벌하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하긴, 법이라는 것도 위정자들의 정당한 통치 행위를 뒷받침하는 수단이니까. 차라투스트라를 처벌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군그래.”“차라투스트라의 주장은 가당하오.” 탁자 너머의 음성이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음과 양이 존재하는 법, 국가 역시 개인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반면 그 이면에는 어두운 면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소. 그림자를 비난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오. 누구라도 한번쯤은 해 볼만한 일이 아니겠소. 두 사람이 말했지만 두 의견 모두 옳소. 왕은 흥분하지 마시오. 국가발생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차라투스트라가 아무리 외치고 떠든다고 해서 국가라는 제도가, 그러한 집단이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오. 본인에게 불이익이 된다면 언제고 참고 있지만은 않지. 그들은 언제나 국가에 매여 있지는 않재였습니다. 나 역시 그러했습니다. 나는 신을 쫓아다니며 그로부터 직접적인 가르침을 갈구했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짜라가 ‘그러한 선언’을 당당히 해냄으로서 나 또한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인간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맞습니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존재를 추구합니다. 그렇습니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한낱 재와 같다는 것을, 인간이 만들어낸 유령과 망상에 불과하단 것을 짜라는 선포했습니다! 나는 그래서 짜라를 사랑합니다!인간은 수많은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인간의 모든 상황과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리스 ? 로마의 수없이 많은 신들은 모두 계서화(階序化)되어 있습니다. 최상의 신 제우스, 올림포스의 12주신을 비롯하여 작은 요정 따위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신의 실체를 말해줍니다! 인간들의 ‘계급’적 측면이 신들에게도 그대로 반영된 것입니다. 신 따위, 모두 인간의 ‘정신세계’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또다른 인간 사회의 재현, 그것이 신입니다. 당시 그리스 로마인들은 거대한 신전을 세우고 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그들이 자신들을 헤치지 않기를, 복주기를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겠지만, 심지어 ‘이름을 모르는 신’에게까지 신전을 세울 만큼 사신(事神)행위에 목숨을 걸었겠지만, 보십시오, 지금 올림포스의 12신을 섬기는 이들이 존재합니까? 한낱 신화로 치부하지 않습니까? 헌데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유독 기독교의 신만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 불합리한 상황이 나는 조금도 이해가 되질 않아요.인간 정신의 반영일 뿐입니다. 내세라는 것,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이들은 모르는 세상 아닙니까? 그런데 내세를 위해서 현실을 투자하라고요? 있을지 없을 지도 모를 그곳을 위해? 바보 같은 짓입니다. 현실에서 고립되고 현실에서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는 나약한 자들이 제멋대로 만들어 냈을 뿐입니다. 이 대지 위에서의 욕구불만을 해소하려고요. 그래서 나는 그들을 싫어합니다. 짜라도문이다.
15월 25일, 오월의 싱그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무더움이 온 몸을 감싸 안던 그런 날이었다. 후텁지근한 날씨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너무도 화창한 날이었기에 간송미술관으로 가는 발걸음 역시 무겁지만은 않았다.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퍽이나 많이 걸어야 했다. 변변한 표지판 하나 없어 길을 찾는 것이 불안하기도 했다. 간송미술관의 존재를 알려주는 푯말이라고는 ‘간송미술관 200m'라고(정확한 수치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쇄되어있는 인근 파출소 유리문의 A4용지가 전부였다. 걷는 동안 기름통을 뒤집어 쓴 듯한 비둘기 몇 마리를 볼 수 있었는데, 마치 이곳이 ’성북동‘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오랜만에 홀로 느껴보는 자유로운 산책이었기에 기분은 마냥 좋았다. 미술관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찾았다. 사전에 특별히 찾아본 자료도 없었고 무언가 적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 그 자체를 감상하는 것이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고 조선조 사대부들 역시 그와 같은 마음으로 서화를 즐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얀 미술관 건물도 그와 같은 마음인 모양이었는데, 싱그러운 수목들에 숨어 있는, 심지어 창고 같은 건물이 미술관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미술관’, ‘박물관’이라 했을 때 번쩍거리는 대리석 건물에 익숙해져있었던 내게 간송미술관의 ‘누추한’ 모습은 왠지 모를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2사임당의 여해도(魚蟹圖)에 붙인 우암의 발문. 간송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송시열의 유일한 직접적인 흔적이었다.‘우암 송시열 탄신 400주년 서화전’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전시품 중 송시열의 것은 단 한 점뿐이었다. 더군다나 대다수의 작품들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眞景山水)로 채워져 있었다. 의아했다. 처음 주제가 ‘우암 기념전’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에 벌써 그런 의문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학자로서 정치가로서의 송시열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따라서 몇 점의 문인화 정도는 취미삼아 그렸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였지만, 그의 작품만으로 전시회를 열 수 있을 만큼 상당량이 남아있는지의 여부는 의뭉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우암의 글 단 한점을 전시하고 있을 뿐인 미술관에서는 우암 송시열과 진경산수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단 한 줄의 설명도 부여하고 있지 않았다.어렸을 적 처음 접한 송시열이라는 인물의 모습은 인자한 노정승(老政丞)의 그것이었다. 숙종임금의 두 비(妃)였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관계를 선과 악의 대립구도로 묘사해 놓았던 ‘어린이용’ 역사책을 통해서였다. 그 책에서는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사약을 받게 된 송시열을, 옳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비운의 선비로, 일종의 ‘희생양’으로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이후 역사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우암은 새로운 인물로 다가왔다. 효종의 북벌론을 지지하였으면서도 실상으로 북벌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혹은 북벌을 자파의 기반 확립에 교묘히 이용하였고), 효종이 붕어(崩御)한 뒤에는 그가 서자(庶子)이기에 그의 복상 역시 일반 사대부와 같은 예로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송논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써의 송시열을 조금씩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노론의 영수로써 당쟁의 한복판에 서서 수많은 정적을 만들어냈고 심지어는 왕권을 뛰어넘는 신권을 지향하였다고까지 볼 수 있는 그였기에,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이후에도 논란의 중심에 위치하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오죽하면 어느 작가는 그의 삶을 다룬 책 제목을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라고까지 하였겠는가.그런 우암과 진경산수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미술관 관람을 모두 끝난 뒤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이 좀처럼 좁아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해답은 집에 돌아와 찾아본 간송미술관 관련 뉴스기사를 통해서야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중국의 성리학을 독창적인 조선의 성리학으로 소화해 낸 율곡학파의 3대 수장인 우암의 사상은 중국 그림을 베끼지 않고 조선의 산수를 독자적으로 그린 진경산수화의 뿌리를 이뤘다.”)진경산수가 무엇인가? 본래 진경(眞景)이란 말은 ‘있는 그대로의 경치’를 의미하지만 그중에서도 신선이 살 만한 정도로 아름다운 곳을 가리킨다. 중국 화첩의 진경)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오던 조선의 화원(畵員)들이 17세기 이후에 이르러 우리의 산수 중 빼어난 곳을 진경으로 생각하고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경관을 묘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는 중국산수화풍의 영향 아래 발달하여온 한국미술의 일대 변혁이었다.)우암 송시열은 주자학의 거두이자 중국의 주자학을 독창적인 조선만의 그것으로 계승 ? 발전시킨 인물이었다. 우암의 ‘우리의 것’에 대한 시도는 학문 ? 사상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여타 문화 ? 예술적인 분야에까지 일정한 영향을 미쳤고, ‘우리의 진경’을 그리고자 했던 진경산수 역시 이와 같은 뜻에서 발원해 나온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어떻게 보면 우암과 진경산수 사이에 놓여 있는 연결선은 그리 뚜렷하지는 않아 보이기도 한다. 백 점의 전시작품 중 단 한점만이 우암의 것이라는 사실 역시 그 연결고리를 매끄럽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송자(宋子)라고까지 불렸던 그의 사상 체계가 조선 후기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무작정 그들 사이의 관계가 없다고 단정 짓기도 어려운 일이다. 송시열이 진경산수의 성립에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식의 주장은 조금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진경산수 역시 사회 ? 시대적 배경과 분위기의 산물이라는 점과 우암이 조선 사회에 끼쳤던 막대한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둘 사이의 미세한 연결고리를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 있지 않나 싶다.3창강 조속, 「고매서작」미술관에는 겸재 정선을 필두로 하여 조선조 선비들의 고고함과 멋스러움이 묻어나는 산수와 정물들이 곳곳에서 은은한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동양화’라 하면 먹물을 찍어 이리저리 붓질을 휘갈겨 놓은 사군자(四君子)류의 문인화 정도가 겨우 떠오르던 내게 진경산수의 기풍 위에 실제적인 묘사와 정교한 채색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많은 놀라움을 자아내게 했다.진경산수의 막을 열었다는 조속(趙涑)의 「고매서작古梅瑞鵲」, 즉 늙은 매화나무에 앉아 있는 까치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두 사물의 자연스러운 배치로 인해 편안한 느낌을 실어다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나 붓의 느낌을 살려 몹시도 사실적으로 표현한 까치의 깃털은 오래도록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나무꾼과 어부가 대화하는 모습을 담은 「어초문답漁樵問答圖」에 대한 세 그림도 기억에 남는다. 같은 주제를 담은 그림을 나란히 전시한 의도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했었다. 그 해답 역시 진경산수에 있었다. 중국식 머리모양과 의복 차림의 어부와 초부가 점차 우리문화 속에 우리의 모습과 동질화해가는 부분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주보고 앉아 있는 지자(智者)와 인자(仁者))의 뒤에 산더미 같은 장작을 실은 채 세워져 있는 지게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중국적 고사에 기초한 ‘어초문답’의 이야기를 우리식으로 풀어가려는 겸재의 시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던 것이다.겸재 정선, 「압구정」「금강내산金剛內山」을 비롯, 진경산수의 정신 아래 우리 자연의 모습들이 표현된 겸재 정선의 그림들이 여럿 있어 마음을 기쁘게 했다. 둥글둥글한 글씨체에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겸재 정선의 낙관(落款)이 찍힌 그림들은, 뭐랄까, 어떠한 평온함이 있었다. 특히나 「압구정」이 그러했다. 세조임금이 자신의 ‘장자방’이라고까지 추켜세웠던 한명회가 생각나서 반갑기도 했고, 지금 고층 건물들이 빽빽이 공간을 메우고 있는 서울의 옛 모습이 저러했을 것을 생각하니 신기하기도 했다. 야트막한 언덕 사이에 그 모습을 감춘 듯 서 있는 정자(亭子)와 그 아래 태연자약하게 돌아다니는 배의 모습이 정적이면서도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물론 진경산수는 실경(實景)을 바탕으로 하고는 있지만 여기에 서양화와 같은 틀 잡힌 원근법과 소실점에 의한 구도 따위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실경 그대로에 충실하기도 했지만 실경을 보는 순간 화가가 가졌던 인상을 더 강조하기 때문에 약간의 과장과 변형이 용납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경을 기반으로 한 ‘자유함’이야말로 사대부들이 추구하였던 풍류이자 미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초충도(草蟲圖)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나비며 수박이며 개구리며 하는 것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색감 아래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교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동물(動物)과 부동물(不動物)의 조화라고나 할까, 개구리나 두꺼비, 수박과 같은 식물들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풀벌레들을 찾아 세밀한 묘사를 감상하는 것, 그것들에 대한 화원의 배려를 느껴보는 것 역시 쏠쏠한 재미를 가져다주었다.
1. 서론 : 가면 속으로2. 본론2.1. 가면의 역사와 기능2.2. 영화 매체에 나타난 여러 가면의 모습2.2.1. 가면, 영웅에게 부여한 초월적인 힘의 근원2.2.2. 공포와 악마의 상징, 가면2.2.3. 인간의 익명성, 그 양날의 칼3. 결론 : 또 다른 나의 자화상, 가면1. 서론 : 가면 속으로『오페라의 유령』中팬텀(Phantom)의 가면거대한 샹들리에가 위로 솟구쳐 오르며 웅장한 오르간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오르간의 선율, 음산하고 중후한 느낌을 주는가 하면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샹들리에의 불이 다시 피어오르자 낡은 오페라 하우스는 그 옛날 찬란했던 영광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여기저기 들러붙어 쾌쾌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거미줄이 하나둘씩 걷히고, 무대에는 오랫동안 껴져 있던 횃불이 다시 타오른다. 상반신을 드러낸 여러 조형물들은 황금빛 본연의 색을 다시 회복하고, 오페라 「한니발」의 감미로운 선율을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이곳은 다시금 북적이기 시작한다……. 1919년의 파리 오페라 하우스, 영화 『오페라의 유령』의 첫 장면이다.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지하 미궁에는 자신의 인생을 원망하고 세상을 저주하며 살아가는 한 영혼이 있다. 신들린 듯한 천상의 목소리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천재적인 건축적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사람들을 피해 살아간다. 운둔과 회피의 삶, 그 삶의 중심에 가면이 있다. 검은 눈구멍이 툭 불거진 해골 같은 하얀 마스크는 사람들이 그를 유령이라 믿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가면 속에서, 그는 거칠 것이 없다 ‘유령’으로서 오페라 하우스의 지배인들로부터 급여를 받아내고, 5번 박스 석을 할당받으며, 그가 작곡한 오페라를 상연하기에 이른다. 사람들 앞에서 그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그의 비밀스런 삶은 그대로 종결되어 버린다. 가면을 벗은 그는 더 이상 공포의 유령이 아닌, 흉측한 외모를 타고 태어난 저주받은 사람 본연의 모습으로 쓸쓸이 퇴장하고 마는 것이다.『오페라의 유령』의 주인공 원을 통하여 보았을 때,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면은얼굴에 쓰는 행위를 통해서 사람을 대신하여 표현하는, 어떠한 상징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정리해볼 수 있겠다.고대 사회에서 가면은 주로 어떠한 의식적, 제의적,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가면을 쓴 자는 일시적으로 무서운 힘의 화신이 되어 그것을 흉내내과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으며, 참가자들은 개별성을 뒤로 한 채 집단적 홀림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면은투탕카멘의 황금가면가면 쓴 자를 신과 같은 존재로 격상시키는 매개물이 되었는데, 이는 신변의 안전과 죽음의 극복을 의미했다. 파라오의 시신에 영원함과 완전함의 상징인 순금 가면을 씌워 불멸을 영원한 것이다. ‘파라오의 저주’로 잘 알려진 청년 왕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이 대표적이다.그리스에서는 연극에서 가면으로 신들의 등장을 구현하였다. 인간이 풀 수 없는 존재의 비밀과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운명을 마주하려 하였던 것이다.)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연극에서는 비극적 주인공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영광의 순간과 진실을 알게 된 이후 스스로 눈을 찌르고 장님 거지가 된 순간의 가면이 다르다. 극중 주인공 운명의 극적인 변화를 가면의 교체로 표현한 것이다.연극 『오이디푸스 왕』중세에서는 가면의 착용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기독교의 영향 아래, 가면은 십계명의 계율을 어기는 우상숭배, 즉 이교도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오랜 중세가 끝나고 문예 부흥기였던 르네상스 시대가 찾아오면서 가면은 되살아났지만, 이때의 가면은 고대에 지녔던 진지성을 잃어버리고 사교모임, 연극, 가장 무도회 등에서 귀족들의 유흥을 위한 형태로 애용이 되었다. 특히 카니발 가면은 익명성이라는 가면 고유의 특성 아래 시민과 귀족의 분별을 없애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익명성의 자유 아래 양반의 위선을 꾸짖고 시대의 모순을 풍자하였던 조선시대의 ‘탈춤’과 비슷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현대에 전래된 가면은 고대에 가졌던 초월적인 힘을 거의 상 남성들이 성인으로 인정을 받는 의식에서 조상께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이 때 쓰인 것이 조상신 가면이었다. 청년들은 성인식을 치름과 동시에 비밀 결사의 한 성원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의식에서 선택된 엘리트는 가면의 조각사(彫刻師)로 또는 무도자(舞蹈者)로 육성되곤 하였다.고대에서의 가면은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목적, 특히 종교적인 목적에 의해 사용되었다. 어떠한 초월적인 힘을 상징하여 작은 나를 감추고 보다 강한 나를 제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전에 지녔던 가면의 특성들, 특히 그 신성성은 조금씩 약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대의 가면에도 이런 모습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우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가면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문화 영역에서, 특히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가면을 통해 현대적 가면의 면모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의 내용이 조금 학문적이고 딱딱했다면, 이제부터의 내용은 보다 수월하고 흥미로울 거라고 감히 예고하는 바이다. 가면 속으로 계속해서 여행을 떠나보자.2.2. 영화 매체에 나타난 여러 가면의 모습2.2.1. 가면, 영웅에게 부여한 초월적인 힘의 근원영화 「마스크 Mask」를 기억하는가? 자그마치 12년 전 영화이니(그렇다면 내가 7살 때 영화가 아닌가!) 지금 다시 보면 어떤 생각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던 흥행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리우드 코미디 배우 짐 캐리의 안면 근육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였던 것으로도 기억이 난다.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런 종류의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은행원, 아니 소심하고 직장 상사에게영화 『마스크』의 포스터가면을 쓴 영웅들,위에서부터 배트맨, 스파이더맨, 그리고 조로찍소리 못하는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인 스탠리 입키스(짐 캐리)다. 어느 날 스탠리는 우연히 고대의 유물인 를 손에 넣게 되고, 이 를 착용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새로 얻게 된 초 고담시의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은 범죄가 발생할 때 박쥐 가면을 쓰고 배트맨(Batman)이 되어 나타난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피터 파커 또한 붉은색 가면을 뒤집어쓰고 스파이더맨(Spiderman)이 된다. 검은 안대로 정체를 숨긴 조로(Zorro) 또한 마찬가지다. 가면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가 된다. 관객들은 주위 가장 가까운 사람들(특히나 그들의 연인들에게)에게까지 정체를 숨기며 낮에는 평상인으로 밤에는 영웅으로 위태롭게 생활을 유지해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 그들의 가면을 보면서 아슬아슬한 재미와 대리만족을 느낀다. 영웅의 비밀을 아는 것은 영웅 자신과 관객뿐이라는 생각을 심어 주어 더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영웅에게 가면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면이 그들에게 최고의 은신처를 제공하는 탓에, 초인적인 능력의 영웅들은 언제나 가면과 함께하는 듯하다.2.2.2. 공포와 악마의 상징, 가면영화 『아마데우스』의 포스터.위는 영화에 등장하는 가면,아래는 모차르트의 모습1985년의 영화 『아마데우스』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독살설을 다룬, 꽤나 오래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제 57회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비롯, 6개의 부문을 석권하고 골든 글로브 작품상까지 수상한 명작(名作)이다. 재미있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와 노력파 작곡가 살리에리의 경쟁을 주로 담은 이 영화에 ‘가면’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는 점이다.누군가 문을 막 두드린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죽음과 아내 콘스탄체와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던 차에 오페라마저 연이어 실패하자, 음악적 슬럼프에 빠져 술로 마음을 달래며 폐인처럼 지내는 모차르트의 집에 낯선 불청객 한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무심코 문을 연 모차르트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문 앞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서 계셨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생전 아버지가 가면무도회에서 썼던 ‘가면’이 문 앞에 혹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모습을 보면 가면의 악마적인 상징을 쉽게 알 수 있다. 뿔이 달린 붉은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악마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에 등장하는 다스 몰(오른쪽 사진)의 외모 또한 메피스토펠레스 못지않다. 뿔이 달린 붉은 얼굴, 붉은 눈과 날카로운 이빨……, 다스 몰의 얼굴은 바로 표범과 같은 야수의 얼굴인 것이다. 이 야수의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린아이도 알 정도로 분명하다. 야수와 같은 심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도 흔해 누군가를 욕할 때 쓰는 “짐승 같은 놈”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는 아예 수심(獸心)을 인면(人面) 위에 덮어씌움으로써 충격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스타워즈』시리즈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다스 베이더(Darth Vader)경도 마찬가지다. 나치의 철모를 연상시키는 헬맷 아래로 짐승의 이빨 같은 모양의 턱을 한 면갑을 씌워 기계적이면서도 야수 같은 이미지로 냉혹한 비인간성을 표출시키고 있는 것이다.)영화 『데블즈 애드버킷』의 포스터다스 몰과 다스 베이더의 흉측하고 끔찍한 얼굴은 가슴 깊은 곳의 욕망을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얼굴에 그대로 자리 잡은 악마적 상징, 이것이 우리에게 충격이 되고 공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그 얼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얼굴에 나타난 욕망과 악마적 속성이 그 누구에게도 해당이 되는 데에 있다. 『스타워즈』에서 악에 맞서 싸워 투쟁하는 루크 스카이워커는 제다이가 되기 위해 수련하던 다스 베이더의 철가면 안에 자신의 얼굴이 들어 있는 환상을 보게 된다. 이 장면은 루크가 다스 베이더의 아들이라는 어떠한 암시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다스 베이더가 하나의 ‘전형’이며, 그러한 전형의 위험성은 선의 상징인 루크의 내면에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를 현대적으로 패러디한 영작한다.
1. 서론 : 원균(元均)과의 만남2. 본론2.1. 『선조수정실록』과 『징비록』을 통해 본 임진왜란 해전사(海戰史)의 일반적인 인식2.2 원균을 위한 변명2.2.1. 스스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전함을 가라앉혔다, 겁장(怯將).2.2.2. 영웅을 모함하고 권세에 아첨했다, 악장(惡將).2.2.3. 전투에서 패배하여 달아나다 죽었다, 패장(敗將).2.3 역적 원균, 그 편견의 시작3. 결론 : 이순신과 원균의 화해맹신 속에 감춰진 임진왜란 해전사1. 서론 : 원균(元均)과의 만남9월의 어느 한가로운 날, 인터넷을 웹 서핑 하던 도중 ‘미디어 다음’의 한 게시판에서 『을 본 일본인 왈...』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다. 관심이 가는 주제였다. 우리에게 있어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말할 것도 없는 구국의 영웅이만, 일본 사람들은 과연 이순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KBS드라마 은 우리나라에서 상당한 시청률을 올리며 많은 인기를 끌었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볼 때, 특히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순신에 대한 감정, 우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지 않을까?어제 회사일로 한류상품을 취급하는 일본인 밴더와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다가 재방송을 보았습니다. 작년에 우연히 이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일본군 장수들이 왜들 하나 같이 소리만 버럭 지르고 했던 말만 반복하는 바보들처럼 묘사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중략) 그러면서 사실 임진왜란이야 말로 최고의 한류 콘텐츠가 아니겠느냐고 해요. 특히 일본인들로서는 피부에 와닿고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소재라고... (중략) 당시 조선에 이순신 같은 영웅들이 있었듯이 일본에도 히데요시나 이에야스를 비롯해서 많은 군웅들이 할거했던 시대이고, 임진왜란은 바로 한-일의 영웅들이 바다와 육지에서 7년동안 펼친 대 서사시라고 하더군요. 세계적으로도 이만한 소재는 더는 없을 거라 확신한다고...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글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나타나는 원균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계사년(1593년) 2월 23일. 경상 우수사 원균은 그 흉악하고 음험함이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계사년 8월 19일. 아침 식사 후에 원균 수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내 배에 옮겨 타라고 청하였다. (중략) 말하는 가운데서 원 수사의 음흉하고 도리에 어긋난 일이 많으니 그 속임과 거짓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1593년 8월 28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왔다. 음흉하고 속이는 말을 많이 하였다. 몹시 해괴하다.)원균(元均)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토로하는 일기임을 감안할 때,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개인적인 평가 또한 몹시 좋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음흉하고 흉악한 자,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악장(惡將),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은 원균의 전부이다. 보다 정확한 정황 파악을 위해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여기던 대로 임진왜란 해전사(海戰史)의 진행양상을 여러 책을 참고로 정리해 보았다.선조 26년(1592년) 4월 12일, 일본군의 대 선단이 부산 앞바다에 출현한다. 동래부사 송상현이 분투하였으나 부산성은 함락되고 이 소식은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전해진다. 이순신에게 침략 소식이 알려진 것은 15일이었다. 원균은 일본군의 거대한 전력을 보고 겁에 질린 나머지 거제도 가배포의 경상우수영에 가까운 해변에 매어 두었던 군선, 화포, 병기류를 모두 침몰 시키고 1만이 넘는 수군 장병들의 군무를 풀어주어 귀향 허가를 내린다. 또한 자신은 육로로 도망가려 한다.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일본군 선단이 바다를 뒤덮으며 항진해오자 경상우수사 원균이 그 형세가 매우 큰 데 놀라서 감히 출전하지 못하고 전선 100여 척과 화포, 군기 등을 바다에 버렸다. 그리고 수하비장(裨將) 이영남(李英男) ? 이운룡(李雲龍)등 만을 거느린 채 4척의 배에 타고 곤양 바다 어귀에 상륙하여 적을 피하려 했다. 그리하여 그가 거느린 수군 1만 여 명이 모두 무너순신은 그러한 조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명량 해전에서 12척의 배로 30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하는 쾌거를 이룬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할 때 까지, 이순신은 23전 23승, 놀라운 전승의 신화를 낳는다. 총탄에 맞은 이순신이 남긴 유언,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병졸들과 국가를 생각했던 영웅의 비장한 최후를 멋지게 장식해 준다.2.2 원균을 위한 변명원균, 정말로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장수였을까? 원균에 대한 주요 쟁점 3가지를 가지고 ‘실록’의 기록을 통해 조목조목 따져 보기로 하자.2.2.1. 스스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전함을 가라앉혔다, 겁장(怯將).원균의 여러 행적 가운데서도 가장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던 사실이 바로 겁이 나 싸워 보지도 않은 채 병사들을 해산 시킨 일이었다. 과연 원균은 이 정도로 겁이 많은 겁장(怯將)이었을까? 『선조실록』에는 원균이 북방 오랑캐를 토벌할 때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소신이 일찍이 종성(鍾城))에서 그(원균元均)를 보니, 비록 만군(萬軍)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횡돌(橫突)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행군(行軍)도 매우 박실(朴實)하였습니다. 탐탁(貪濁)한지는 모르겠습니다.”하였다.상(선조)이 이르기를,“이와 같은 장수는 많이 얻을 수 없다.”(『선조실록』 선조 29년 1-월 21일))원균은 당대의 명장으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그간 왜병의 침입 여부에 대하여 설왕설래를 하고 있던 중 임진년에 이르러 그들의 침입이 급작해지자 왜병의 침입의 길목이 되는 경상우수영에 그를 급작스러이 수사로 배치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던 것은 선조 24년(1591년) 1월이었다. 이순신에게는 1년이라는 전쟁 준비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원균이 동래에 부임한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불과 석 달 전, 충분한 전쟁 준비를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시간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원균은 분투한 것으로 보인다. 왜의 육이 군공 장계 사건의 진상이다. ‘함께 군공 장계를 올리자’는 원균의 제안에 이순신은 ‘소소한 것을 어찌 일일이 보고하겠느냐, 천천히 하자’고 대답하고는 밤에 단독으로 장계를 올려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보고했다는 것이다. 이 군공 장계 사건은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에 공통적으로 드러나 있다. 더욱이 이순신이 원균보다 높은 벼슬을 제수받자(이순신은 정2품의 자헌대부, 원균은 종2품의 가선대부를 제수받았다.) 원균의 불만은 더 심해져갔고 급기야 이순신에게 노골적으로 화를 분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원균의 행동은『난중일기』의 곳곳에서 볼 수 있다.계사년(1593년) 5월 14일 영남우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이 심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배 안의 모든 장병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의 허튼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계사년(1593년) 8월 2일 저물녘에 우수사[이억기]가 배에 와서 하는 말이, (중략) 또 우수사 원균이 망령된 말을 하며 나에게 도리에 어긋난 짓을 많이 하더라고 말했다. 모두가 망령된 짓이니,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갑오년(1594년) 4월 12일 순무어사)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우수사[이억기]와 경상수사[원균], 충청수사[구사직]가 함께 왔다. 술이 세 순배 돌자 원 수사가 짐짓 술 취한 척하고 미친 듯이 날뛰며 억지소리를 해대니, 순무어사가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원 수사가) 하는 짓이 매우 흉악하였다.)원균은 매우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순신과 단 둘이 있을 때 뿐 아니라 다른 장수가 있는 곳에서도, 심지어는 임금이 보낸 어사 앞에서도 자신의 억울함을 직접적으로 피력하였다. 두 무장의 과도한 쟁공(爭功) 행위는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휘하 부장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집단적 양상을 띠게 된다.이정형이 아뢰기를,“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용납하지 못할 형세입니다.”하고, 김수가 아뢰기를,“원균은 매양 이순신이 공을 빼앗았다고 신에게 말하였습니다.”김수가 아뢰기를,“서성(徐?)이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고서 두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성룡이 아뢰기를,“한산에 거의 이르러서 칠천도(七川島)에 도달했을 때가 밤 2경이었는데 왜적은 어둠을 이용하여 잠입하였다가 불의에 방포하여 우리 전선 4척을 불태우니 너무도 창졸간이라 추격하여 포획하지도 못하였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에는 이미 적선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아군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육지에 내려보니 왜적이 먼저 하륙하여 이미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앞의 것은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 보고한 것이고 아래의 것은 수군의 패배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던 중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한 말이다. 이를 토대로 정리해 보면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한산도로 돌아가던 도중 칠천도에서 왜적에게 포위를 당한다. 포위망을 풀지 못한 원균은 어쩔 수 없이 고성으로 상륙하였고 육지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왜병들에게 몰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아군이 부득이하게 고성으로 향하였습니다.’ 부분을 원문 그대로 쓰면 ‘我軍不得已 向固城登陸’이 되는데, 이는 우리 수군이 집단적으로 상륙하였다는 뜻이 된다.) 일신의 안위를 위한 도망이 아니라 다음을 기약하려는 움직이었거나 육전(陸戰)을 시도하려 하였던 것이었다. 이덕형의 보고를 보면 당시 남부 지역의 원균에 대한 민심을 확인할 수 있다.이덕형이 아뢰기를,“외부의 공론은 모릅니다. 신이 지난해에 남방을 왕래하면서 그 고장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개는 모두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선조실록』 선조 34년 1월 17일)2.3. 역적 원균, 그 편견의 시작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원균과 『선조실록』등에 쓰여 있는 원균의 모습, 그 커다란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까.
들어가며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며 하늘에 내려온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은 그들에게 쑥과 마늘을 주며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범은 이를 능히 지키지 못하였지만 곰은 이를 지켜 삼칠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다. 웅녀가 잉태하길 빌자, 환웅은 잠시 인간의 몸으로 화(化) 하여 그녀와 혼인하였다.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했다.이 이야기가 바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심지어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이라 해도 모르는 이가 없는 ‘단군 신화’이다. 어렸던 나에게 단군신화는 그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곰의 자손이겠네?’ 하며 우스워 했었던 기억이 난다. 단군 신화를 동물숭배사상, 즉 ‘토템이즘’과 연관 지어 해석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단군 신화의 내용이 환웅으로 대표되는 천신숭배사상을 가진 부족과, 웅녀 곧 곰을 숭배하는 곰 토템을 가진 부족 사이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이러한 설명을 듣는 순간, 단군 신화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정확한 견해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있어 이러한 견해는 허무맹랑한 옛이야기정도로만 여겼던 단군 신화를 보다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이러한 역사적인 해석 방법이 ‘수많은 학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이를 알게 되면서, 신화를 바라보는 나의 눈은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우리 신화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건국 신화의 주인공은 결코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이들이 아니었다. 신화 속에는 우리의 선조의 얼이 있었고 대한민국이 있었고 지금의 내가 있었다. 신화에 나타난 신화 주인공들의 수많은 삶의 모습 중에서, 특별히 인상 깊었던 그들의 탄생과 고난, 등극과 장례와 같은 통과 의례의 양상을 정리해 보며, 지금 우리의 모습을 다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온 환웅은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단군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은 하늘의 자손이요, 환웅천왕의 아들이니 그는 그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신성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주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다섯 마리의 용이 이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머리에는 오우관(烏羽冠)을,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찬 해모수(解慕漱)는 이규보가 말한바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다. 웅심산(熊心山)에 강림한 그와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곧 주몽이니, 주몽은 단군 못지않은 신성성을 보장받는다. 유화가 해모수와 정을 통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방 안에 갇힌 유화의 복부에 햇빛이 비춰 주몽을 잉태했다는 것도, 주몽이 난생(卵生), 즉 태양을 상징하는 알로 태어났다는 것도 그가 태양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훌륭한 장치가 된다. 무엇보다도 위기에 처한 주몽이 스스로 태양의 아들(我是日子)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뚜렷한 증거가 될 것이다.수로와 혁거세의 탄생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점에서는 단군 신화와 주몽 신화와 같은 형태지만, 확실한 부계(父系)를 통해 신성함을 보장받았던 단군과 주몽의 경우와는 조금 차이가 난다. 삼월 계욕일에 부족장인 구간이 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그 명령에 순종하여 구지봉 정상의 흙을 파서 한 줌 쥐며 가무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랬더니 잠시 후 붉은색 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는데, 이 줄 끝에는 붉은 보자기에 황금빛 상자가 싸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해와 같은 여섯 개의 황금 알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이 알이 화하여 여섯 동자가 되었다. 이가 자라 범상치 않은 용모를 가지니, 이들이 각각 육가야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들 중 첫째가 수로(首露)인 것이다. 혁거세 신화도 이와 비슷하다. 육촌의 조상들이 군주를 구하니 하늘에서 이상한 기운이 땅에 비쳤고, 그곳에는 백마 한 마리가 붉은 알에 꿇어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알을 깨니 그 안에서 나온 동자가신화와 사소 신화, 탈해 신화 등이 있다. 이들은 수평이동을 통해 등장한다. 허황옥은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수로왕의 배필이 되기 위해 배를 타고 가야국에 도달한다. 중국 황실의 딸 사소 또한 배를 타고 진한에 도착한다. 용성국 용왕의 아들 탈해는 두 마리의 붉은 용의 호위를 받으며 가락국에 등장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오는 형태를 띠는데, 이럴 경우 하늘에서 내려온 강림형 신화 주인공들에 비해서는 그 신성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신성함을 보장받는다. 허황옥은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배를 타고 등장하는데, 이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의 ‘붉은색’을 통해 신성성을 부여받는 장치가 된다. 탈해가 용왕의 아들로 군왕(君王)을 상징하는 붉은 용의 호위를 받았던 것 또한 같은 이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들의 신성함을 증명하는 가장 큰 장치는 바로 ‘선진문물’이다. 허황옥과 사소는 비단을 짜는 직조기술을 통해, 탈해는 숯과 숫돌, 즉 제철기술을 통해 그들의 신성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진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은 이를 가지고 있지 않던 옛 한반도의 거주자들에게 크나큰 관심과 존경, 그 이상을 받았을 것이다. 선진 문물과 기술에 대한 관심과 동경은 신화시대를 훌쩍 지낸 현대 사회까지도 변함없이 보여 진다. 단지 현대 사회가 정보 지식 기반 사회이기에 그러한 선진 문물이 고급 정보나 지식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남들이 가지지 못한 정보 기술을 가진 이들이 다른 이들의 우러름과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선진 문물’의 중요성은 여전히 크다고 볼 수 있겠다.신화 주인공들의 탄생은 영험한 것일 수밖에 없다. 특히 건국 신화의 주인공들은 남들과 다른 고귀한 혈통을 자랑함으로서 그 국가와 민족의 자부심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대개 난생이라는 기이한 탄생의 방법을 선택 하백의 미움을 받아 석자나 늘어난 그 입을 세 차례나 잘라내야 했고 또 한동안 어두운 방 안에 유폐당해야 했다. 주몽의 삶은 시련과 고난의 결정판이었다. 태어나자마자 들판으로, 길가로, 돼지우리로 버림을 받아야 했고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미움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마구간에서 말을 키우는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다가 어렵게 탈출한 순간에도 여지없이 그의 앞은 엄수라는 큰물에 가로막혀 있었다. 주몽의 아들 유리는 아비 없는 자식이란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아버지와의 상봉에 앞서서는 수수께끼를 먼저 풀어야만 했다. 또한 가락국에 도착한 탈해는 수로왕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신라로 도주하고 말았다. 직접적이고 육체적인 고난을 겪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화 주인공들은 중요한 순간마다 어떠한 간접적인, 혹은 상징적인 의례를 치러야만 했다. 신성한 혈통을 가졌던 그들 조자 이러한 의례를 통해서만 완전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로는 알로 탄생한 후 일정기간동안 보에 싸여 어떤 장소에 안치되어 있다가 태어났다. 붉은 배를 타고 도착한 허황옥은 망산도에서 이주의례를 행하고 이어 비단바지를 벗어 그것을 제물 삼아 성인의례이자 혼인의례인 제를 행해야했다. 혁거세는 알을 깨어 세상에 나온 후 동천에서 목욕하고 나서야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여 일월이 청명하였으며 혁거세왕(赫居世王)이란 호칭을 얻었다. 그의 부인 알영 또한 닭 부리와 같던 입술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월성 북천에서 목욕시키고 나서야 빠졌다.하나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아픔의 과정을 겪고 나서야 그들이 진정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웅녀는 고통을 인내했기에 사람이 되어 민족의 시조 단군을 낳을 수가 있었다. 유화는 석자나 나온 주둥이를 가위로 세 번을 자르고 나서야, 어두운 방 안에서 유폐되는 성인의례 겸 혼인의례를 치르고 나서야, 즉 무적 시련을 겪고 나서야 진정한 신모(神母)이자 지모신(地母神)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직접적인 육체적 고통을 겪지 않은. 스펙터클한 영웅의 일대기를 다룬 주몽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주몽이 놀라운 능력과 하늘의 도움으로 시련을 극복하여서 결국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사실까지 만을 다루고 있어 안타깝게도 과연 주몽이 몇 년을 향수(享壽)하였고 그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신화 내용만 가지고는 알기 어렵다. 대개 모든 신화 주인공들이 그들의 탄생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는 다르게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의 모습은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역시 ‘건국신화’라는 특성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의 성립 과정’을 신성한 건국시조(建國始祖)의 능력을 빌어 숭고하게 나타내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건국신화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에 관해서는 그리 자세하게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예외도 존재한다. 바로 혁거세 신화이다.혁거세 신화에는 혁거세의 기이한 죽음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는데 칠일 뒤에 그 유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왕후도 따라 죽었으며, 국인이 이를 모아 합장하려 하였지만 큰 뱀이 쫓아와 방해하였기 때문에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 지내 오릉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강림한 고귀한 건국 시조의 죽음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상당히 기이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고 혁거세왕이 전쟁 중에 적국에 잡혀 처형되었거나 암살당했을 것이라 주장하는 글도 보았다. 혁거세왕의 뒤를 따라 왕후도 자결하였으며 혁거세의 유체를 합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큰 뱀은 아마도 박씨 세력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던 석씨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글을 읽으며 꽤나 허무맹랑한 주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워낙 이상한 죽음의 기록이기에 이러한 견해까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신화주인공이 죽어서까지 풍요를 보장해주리라는 신념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동서남북과 중앙이라는 다섯 방위의 무덤으로 나누어서 장례를 지냈다는 사실은, 곧 풍요의 상징인 건국 시조 혁거세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