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滿洲)지역 개관목 차1. 동북3성과 길림성의 지역개관2. 만주지역의 역사적 의의3. 연길, 연길4. 항일운동의 요람 용정5. 용정지역의 기독교6. 용정의 은진중학7. 용정에서 명동촌 가는 길8. 규암 김약연9. 명동학교10. 명동약도11. 명동촌 지도12. 윤동주 생가와 명동교회, 기념비13. 정재면 목사14. 두만강의 유래, 삼합에서 회령15. 도문, 봉오동 전투지16. 민족의 성산 백두산17. 고구려와 신흥무관학교의 터-통화와 집안18. 단동에서 압록강철교19. 발해만의 대련20. 무정부주의자 이회영(1867-1932)※ 논문 - 중국동북지역 한국무장독립전쟁의 역사적 의의1. 동북3성과 길림성의 지역개관동북3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은 우리 민족의 혼과 한이 서려 있는 뜻깊은 곳이다. 일찍이 고조선·고구려·발해 등이 중국의 동북3성을 무대로 민족의 기상을 곳곳에 떨쳤으며, 일제강점 하에서는 우리의 선조가 눈물을 머금고 고향 땅을 그리워했던 곳이다.그러한 이유로 동북3성 곳곳에 민족의 문화유적이 널리 퍼져 있으며, 연변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번성하고,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백두산을 찾고 있다. 동북 3성과 러시아 사이에는 내몽골 자치구가 위치하고 있으며, 한 때 그 세력을 유럽까지 떨쳤던 징기스칸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길림성(吉林省)은 중국의 동북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체 면적이 19만 7천㎢로 중국 면적의 약 2%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는 약 2,500만 명으로 동북쪽은 험준하며 서북쪽은 낮고 평탄한 곡차지대이다. 길림성은 다민족 집결지로서 고대 왕조문화의 유적이 산재되어 있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곳이다. 부여·선비·고구려·말갈·거란·여진·몽골 등 민족은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며 중화민족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길림은 만족어 길림우라(吉林烏拉)의 약칭이다. 청나라 초기에 도통(都統)을 설치하고, 강희 12년(1673) 길림시에 길림성(吉林城)을 축조하였으며, 광서33년(1907)에 현재의 길림성 전역을 통일·관지역을 통치했다. 용정은 일본총영사관이 있어 일제의 만주침략의 거점이 되었다.연길시에서 가장 높은 곳은 모아산이 있고, 하천은 부르하통하와 연집하가 흐른다. 이 두 강은 동쪽에서 두만강과 합류한다.연변조선족 자치주는 한말 우리민족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북간도라 불렸다. 연길·도문·돈화·화룡·용정·훈춘 등 6개시와 왕청·안도 2개현으로 구성된다.거리에 나붙은 모든 안내문과 간판은 한글과 한자로 병행 표기되어 있다.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으며, 연길 소영자에 광성학교는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세운학교이며, 한신대학교를 설립한 송창근 목사가 다녔던 학교이다.이동휘·윤해·김립·계봉우·김하석 등 애국지사가 교사로 활약한 길동기독학당 또는 광성학교는 간도에서 가장 과격한 항일학교였다. 무관학교 출신의 체육교사가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독립군 양성소의 역할을 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북간도 무장독립전쟁의 주역이 되었고 북로군정서 또는 대한국민회에 가입했다. 북간도3·1운동 이후 일어난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연길에 있었던 와룡동의 창동학교, 소영자의 광성학교 학생들이 주동이었고, 군자금 마련을 위해 동량리 어구에서 회령에서 용정으로 가는 일제의 조선은행권을 탈취한 ‘15만원 사건’을 일으켰다.연길은 당시 국자가로 불렸으며 북간도지역 기독교계 독립운동세력인 대한국민회의 시작이었던 간민회 본부가 있었다. 주요인물은 정재면·구춘선·김약연 등은 후에 한신대학을 설립한 송창근·김재준·정대익·문익환 등의 주역에게 영향을 준 기독교 민족운동가였다.간민회, 간민교육회는 대한국민회로 발전했고, 3·1운동에 이르기까지 북간도이주한인사회를 이끈 가장 큰 정치세력이었다.5. 항일운동의 요람 용정용정은 혜란강 하류 충적평원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1870~80년대부터 우리 동포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곳으로 용두레촌 또는 육도구라고 불렀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연변지구에 침투하는 일본제국주의의 거점이 되었다. 1907년 일제는 무장군경들을 불법적으로 주둔시키고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했다으로 고치고 이해에 6명의 학생을 제 1회로 졸업시키고 전문학교에 진학시켰다.1925년 9월 스코트 교장이 함흥으로 전근가고 페레스 목사가 제 4임교장으로 부임했다. 새 교장은 학교의 이사회를 내왔는데 남존경·김약연·이병하·김내범·문제린 등이 이사로 당선하였다.1926년부터 용정에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국이 성립되자 은진중학교에서도 허원규·이영근 등이 조선공산당지부를 비밀리에 건립하여 사회의 진보세력과 연계를 취하며 반일투쟁을 전개했다.그들은 우선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활동으로부터 반일투쟁을 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1일 단군절이 되면 학교강당에 모여 존일행사(尊日行事)를 거행하였다 공개적으로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부르고 연설자들은 연이어 연단에 올라 일제의 침략행위를 성토하곤 했다.용정 각 학교들 중 반종교투쟁은 제일 먼저 대성중학교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일제히 대성유교를 반대한 결과 대성중학교를 공교회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하여 학우회에서 자체로 학교를 운영토록 했다. 그 뒤를 이어 동흥중학교에서도 진보적 교사들이 교사단을 구성하고 천도교회로부터 학교를 접수하고 교사단에서 학교를 운영한 것이다.은진중학교에서는 시초에 자발적으로 진보적 학생들이 앞장서서 학교에서 매일 아침마다 예사로이 진행되는 예배와 성경과의 수업을 반대했다. 은진중학의 학생들은 예배를 볼 때면 불참하거나, 참가하더라도 소란을 피웠고, 성경과수업시간에는 엉뚱한 질문을 들이대 수업을 교란시켰다. 이러한 소극적 항거는 예배당에 낙서하고가, 반대 표어를 붙여 신도들을 심란케 하고 성경과 시험을 칠 때는 백지를 그대로 내는 등의 행동으로 넘어갔다.학생들의 반종교투쟁은 1926년 가을부터 의식적인 반항행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4학년 성경과 시간에 있던 일이었다. 목사가 “무릇 권세란 하나님께서 준 것이니 누구나 그에 복종해야 마땅할 지어다”라고 역설하자 여창빈 학생이 일어나 “그렇다면 일본 놈들이 조선을 침략하는 권세도 하나님이 준 것입니까? 우리 조선 사람들은 일본 놈들의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입 1920년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만주파병을 감행하면서 독립군과 항일민족운동가를 탄압·학살하면서 명동학교에 방화했다. 그러나 한인들의 2년 동안에 걸쳐 잿더미가 된 명동학교를 전보다 더 크게 중축하여 민족주의 교육을 계속함에 따라 수많은 애국인재를 배출했다.현재 명동학교는 그 터만 밭으로 남아있다. 1995년 건립한 명동학교 기념비가 서 있는데 그 비에는 “1908년 4월 27일 김약연을 비롯한 반일지사들이 창기한 근대교육학교로 이 곳에 설립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비는 가로 38㎝, 높이 82㎝, 두께 13㎝ 크기이다.명동학교는 폐교 이후 명동소학으로 개명하고, 명동촌에서 400미터 정도 떨어진 연길로 가는 길가에 신식 건물로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이 학교는 학생들이 부족하여 폐교되었고, 학생들은 지신에 있는 지신명동학교에 다니고 있다.1909년 5·6월 명동교회가 설립되었다. 교회 설립에는 국내에서 온 정재면의 공헌이 크다. 명동교회는 처음 8칸 집을 사서 사용했다. 명동교회는 길선주 목사, 김익두 부흥사를 초정하여 사경회를 개최했다. 주일 평균 예배참석자는 6~70명이 넘었고, 이동휘 전도사의 부흥회 때는 인근 수 백리에서 1천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공산혁명 이후 정미소로 사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고 폐허가 되었다. 이것을 해외한민족연구소(소장 이윤기)에서 단층 70여 평 크기의 모습으로 복원했다.복원된 윤동주 생가는 윤동주가 태어나 15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별헤는 밤? 등의 시를 통해 그리워한 북간도의 집이다. 대지 300여 평에 외양간 등이 실내에 있는 함경도 전통가옥의 본채와 별채가 그대로 복원되었다. 사각모양의 나무로 된 우물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송몽규는 용정 부근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1935년 중국 남경·제남 등지에서 민족주의 운동에 전념하였으며 이 때문에 1936년 함북 웅기경찰서에서 4개월간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구금되기도 했다. 그 후 용정에서 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 평안남도 숙천에서 아버지 정학진, 어머니 김상약의 아들로 태어났다.1898년 평안남도 순암측량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상동교회 진덕기 목사를 만나 그의 애국사상, 민족의식,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았다.정재면의 민족운동은 일찍 서울상동교회부실청년학원의 학생시절부터 시작한다. 1904년 이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시기 1905년 11월 일제가 소위 ‘을사 5조약’을 가용하여 국권을 빼앗자 그는 학교사생들과 함께 을사5조약 무효화 투쟁에 앞장서서 활동했다.상동교회 청년학원파가 중심세력의 하나가 되어 1907년 4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가 창립되자 그는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07년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하고 23세에 신민회의 파견으로 원산보광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을 때 신민회중앙간부이며 함경도 총감인 이동휘와 총서기 이동녕이 찾아와 북간도 용정에 가서 이상설이 운영하던 서전서숙의 교육사업을 계승할 것을 권고하자 이를 수락하고 북간도교육단을 결성해 용정으로 갔다.1908년 원산을 떠나 용정에 왔을 때, 서전서숙은 이미 복구운영이 불가능했다. 서전서숙 폐교 이후 박무림, 김영학이 용정에서 20리 떨어진 명동촌에 가서 김약연과 상의하고 규암재 서당을 명동서숙으로,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고치고 박무림이 교장, 김약연이 교감, 교무주임을 정재면이 맡았다. 정재면의 요구에 의해 성경과목을 설치했다. 그 후 명동학교는 중학교로 여학부까지 증설했다.정재면은 명동촌을 근거지로 배상희 전도사와 함께 191년부터 1914년까지 간도 각지에 70여 개의 학교와 교회를 설립했다. 명동촌은 정재면의 전도에 의해 기독교민족운동의 책원지가 되었고 그 후 민족반일운동의 중심이 되었다.조선인 마을 건설에 성공한 김약연, 문치정, 김하규, 남위원, 마진 등은 정재면의 권고와 이동휘의 부흥사경회로 인해 기독교 신앙을 가졌으며, 그들에게 있어 기독교 신앙과 반일민족운동은 동일한 것이었다.간민회 회장에 김약연, 부회장 김영학, 총무 정재면이었다.간민회는 북간도 조선인사회를 대표하는었다.
Ⅰ. 십자군(十字軍)전쟁의 결과십자군(十字軍)전쟁의 결과와 그 영향을 다룬 역사가들의 다양한 견해들은 크게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눠진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은 “십자군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일어난 유럽의 모든 변화는 십자군 전쟁의 결과이며, 심지어 그것은 근대 초부터 진행된 식민운동의 선구였다”라고 평한다. 이것은 중세유럽의 모든 변화가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보는 것으로서, 일부호교론적인 가톨릭 역사가들의 지나친 견해이다. 반면 부정적인 측면은 “성지(聖地)회복이라는 애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했으며, 그들의 거룩한 의도로부터 정치적인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불의의 도구로 타락되기도 함으로써, 어두운 시기를 가졌으며, 또한 그들의 영향은 해로운 기회와 환경을 제공되기도 하였다는 주장도 등장한다. 그러므로 십자군 전쟁은 그 정신과 본래의 의도 안에서만이 칭찬할 만한 위대한 역사적 운동이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즉, 십자군 전쟁이 본래의 의도했던 목적에 있어서 실패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우선 유럽사회안에 내재되어 있었던 도덕적·종교적·사회적·정치적·문화적 변화 등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먼저 스콜라 철학의 발달을 가지고 온다. 십자군 전쟁기간 동안 동방과 서방,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화적 접촉은 서방 유럽 세계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철학이 서방의 기독교인들이 그리스 철학의 전 유산을 되살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는 중세도시와 교통의 발달 및 지리상의 발견이다. 십자군 전쟁 이후 새로운 교역이 활발해 지면서, 유럽사회는 봉건사회가 서서히 안정을 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늘어나는 인구를 농장에서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이들은 농업이 아닌 다른 직업을 찾게 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상업이다. 잉여생산물의 교환으로 상업이 발달하자 자연스럽게 도시가 발달하게 되고, 이것은 봉건사회를 붕괴하는 것을의미한다. 또한 상인들의 교역범위가 넓어짐으로써 교통의 발달도 가지고 오게 되는 것이다. 상인들의 세력이 성장하자 길드라는 조직의 동업조합이 생기게 되며, 또한 십자군 전쟁은 항해술에도 큰 자극을 준다. 세 번째는 세속군주제의 성장과 봉건귀족의 쇠퇴를 가지고 온다. 급속도로 여러 도시가 번성해지고, 상인들의 세력이 커지자 유럽의 정세는 크게 달라졌으며, 도시의 상인들이 아라비아상인들과 손을 잡고 동방무역에 참여하였으며, 그 세력이 날로 커져만 갔다. 따라서 국왕은 전쟁이 후유증으로 인해 침체해 있는 영주들의 세력을 꺾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신흥 상인들과 손을 잡게 된다. 결국 도시와 국왕 간의 주종관계가 형성 되면서 국왕의 권위는 높아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봉건 영주의 많은 숫자가 십자군에 참여하였고, 그들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고리대금업자나 교회 또는 왕에게 그들이 재산을 팔거나 저당 잡힌다. 이후 봉건귀족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네 번째는 기독교의 변질과 교황권의 실추이다. 무모한 종교적 열정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가정을 파괴하였다. 십자군은 전쟁 중 교황에게 의지하였으며, 교황은 이를 뒷받침 하는 역할로써 권위가 높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회(回)를 거듭할 수 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빗나가기 까지 하자 교황권은 오히려 손상을 입게 되었으며, 더욱이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민중의 열정의식이 식었으며, 봉건제후의 세력이 약화되자,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화되었다. 결국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초래를 가지고 온다. 다섯 번째는 동·서방 교회의 분열심화이다. 십자군 전쟁의 주요목적은 동·서방 교회의 일치였다. 그러나 동·서방 교회의 일치와 성지탈환을 목적으로 일으킨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이후 14세기를 통해 동방과 서방의 교회활동을 모색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비잔틴 황제들에 의해 논의 되었으나 서로 이견을 좁히지 못하여 빈번히 실패하다가 결국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인들에게 함되자 동·서방 교회의 일치는 철회되었다. 따라서 십자군 전쟁의 주요목적 중 하나였던 동·서방의 교회일치문제는 많은 교황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초해하게 된다. 십자군 전쟁의 영향은 이것들 이외에 역사문학 발전과 아시아와 시리아,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무기의 발전, 여러 전술들과, 도시의 건축양식, 의복 등에도 많은 영향을 가지고 왔다. 즉. 십자군은 그 전체를 통하여 유럽 중세세계가 그리스도교적인 통일체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동시에, 그러한 유럽세계의 생명력과 팽창력을 증명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십자군은 유럽의 중세가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신앙의 시대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십자군에 참여한 동기가 저마다 달랐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참가자의 대다수를 움직인 것은 역시 진정한 종교적 정열과 신앙이며, 구제의 대한 갈망이었다. 다시 강조하자면 십자군(十字軍)전쟁은 중세 전반기에 급속도로 팽창하는 이슬람세력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압박만 당하던 유럽이 십자군을 통하여 비로소 이슬람에게 공세를 취하고 반격을 가하게 되었으며, 거기에 표출된 유럽의 새로운 활력과 팽창력은 그대로 유럽 중세사회와 문화를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 힘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Ⅱ. 기독교의 십자군 전쟁 실패와 역사적 변화A. 기독교 전쟁(십자군전쟁)의 패배원인십자군 전쟁은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성공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데다, 무장마저 허술했던 점이다. 당시의 교통통신 수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먼 지역에서의 전쟁, 국왕과 대영주들의 참전으로 지휘계층 갈등, 중동지역에 대한 정도의 부족과 십자군 전쟁의 본질변화 등을 실패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먼저 농민군과 지휘계층의 갈등은 第3回십자군에서 갈등이 가장 심해진다.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와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는 크게 대립하게 된다. 또한 은자(隱者)피에르가 십자군을 모병한 모습은 십자군이 성공하지 못한 사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프랑스와 독의 무지한 농노들과 그들의 아들 등 기율 없는 군중을 모았다. 두 번째는 기본이념의 변질이다. 이념의 약화내지 변질은 십자군 전쟁의 실패에 적지 않게 이바지 하였다. 이도교로부터 성지를 회복하기 위한 명분으로 시작한 종교전쟁은 점차 세속적 전쟁으로 변질되어 갔고, 더불어 숭고한 이념도 점차 약화되어 갔던 것이다. 후기 십자군 전쟁의 특징은 종교적 측면은 옅어져가는 반면 세속적 측면이 점차 짙어진다는 것인데, 이것은 第4回십자군은 그 기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교황청의 불리한 십자군 재정 운영 또한 십자군에 열정에 손상을 끼쳤다. 세 번째는 이슬람에 대한 무지이다. 십자군 전쟁과 관련해서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전쟁을 주도한 교황과 서유럽의 기사들 모두 외부세계에 무지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기독교 유럽사회의 폐쇄성이었다고 보여 진다. 네 번째는 원정의 어려움이다. 즉, 먼 길을 떠나는 원정으로 인하여 군사력의 약화와 장거리 이동으로 인한 피로 축적, 식량조달 등의 문제도 십자군 전쟁의 패배 원인으로 보여 진다. 다섯 번째는 마라에서의 만행으로 패배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마라에 도착한 십자군들은 잔인한 학살극과 약탈극을 벌이기 시작한다. 예루살렘 입성 후에도 십자군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B.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과 지중해의 변화유럽의 기독교도들의 십자군 전쟁은 성지 회복이라는 당초의 목적 달성에 실패하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상업적 성격의 전쟁으로 변질되어 십자군이란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었지만,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서히 작용했지만 그것의 영향은 결국 중세의 문을 닫고 근대의 문을 열게 했다. 먼저 경제적 변화로는 지중해는 200여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다시 유럽인의 활동 무대로 부활 하였고, 제4차 십자군 전쟁을 기점으로 상업전쟁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부활한 지중해는 원거리 상업은 서유럽 각지의 내륙시장들과 함께 유럽을 상업자본주의적 사회로 변모시켜나간다. 특히 후추는 유인들의 관심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다음으로는 정치적 변화인데,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국가를 출현시키는데 한몫을 한 것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더군다나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상업이 부활하였고, 화폐위주의 상업경제를 형성시킴으로써 토지에 의존한 봉건귀족의 경제적 지위는 물론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종교적 변화로는 십자군 전쟁은 교황이 발의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4차 십자군전쟁을 기점으로 서서히 교황의 권위는 실추하게 되고, 종교적인 부분에서 세속적인 부분으로 전화되며, 십자군 실패의 깊은 상처를 입은 교황청 앞에는 ‘아비뇽유수’와 ‘대분열’을 맞이하게 된다. 문화적 변화로는 십자군 기사들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거대한 석조 축성술을 배워 성(城)건축술을 향상시킨다. 유럽의 거대한 석조성곽이나 교회가 나타난 것은 대체로 십자군 전쟁 이후이다. 일부 십자군들은 이슬람의 문화를 전면적으로 수용했다는 측면을 보여준다. 즉, 십자군과 무슬림의 만남이 반드시 살육과 약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방과 서방의 융화를 보여주는 대목이다.Ⅲ. 십자군 전쟁의 평가A. 십자군 전쟁의 역사적 평가십자군은 본질적인 신앙심으로부터 시작된 전쟁이다. 제1차 십자군 이전의 농민십자군과 소년십자군은 종교적 열정이 낳은 전쟁임을 일깨워준다. 또한 십자군 전쟁은 중세 기사도(騎士道)의 산물이기도 하다. 십자군의 지휘를 구성하는 기사단과 성묘기사단, 병원기사단 기사들이 보여주듯이 신앙심이나 용맹성에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비잔티움을 약탈한 제4차 십자군 전쟁이라는 예외가 있긴 하였다. 후기 십자군 전쟁으로 갈수 록 십자군의 모습은 단순한 약탈이나 강도 행각을 벌였으나, 점차 살인, 강간 등의 중죄를 저지르는 폭력집단으로 변질되어 간다. 이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 하였다. 극악무도했던 십자군의 만행은 중동지역 일대에 심한 충격을 주었고, 중동지역 무슬림의 가슴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서평Ⅰ. 서론Ⅱ. 본론제1장 등자, 기마 충격전, 기사1. 봉건제 기원에 관한 전통적 이론과 그 비판2. 등자의 기원과 전파3. 기마충격전과 봉건적 생활의 성격제2장 중세초기의 농업 혁명1. 쟁기와 장원제도2. 말의 이용3. 삼포윤작제와 영양의 개선4. 유럽 중심의 북방 이동제3장 기계동력과 장치에 대한 중세 탐구1. 동력원2. 기계설계의 발전3. 동력 기술의 개념Ⅲ. 결론Ⅰ. 서론서적 선정 하게 된 동기 및 전문저널의 서평역사(歷史)란 과거로부터 전해져 오는 사실(事實) Fact를 가지로 사실(史實)을 도출하는 것이다. 또한 역사 연구는 기록에 관한 것을 바탕으로 이념, 지역, 시기, 인물, 조직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면서, 역사의 의의와 장점 그리고 한계 및 특수성을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는 보편적으로 기록에 의존하여, 인간 활동에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기록에 의존한 보편적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를 탐구하는 방략을 설정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의 「자본」은 경제에만 영향을 미친 것뿐만 아니라, 역사적 문헌자료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건축구조나 미술의 작품은 예술품의 감상 목적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료로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결국 필자가 이 서적을 읽게 된 동기는, 역사(歷史)는 역사가들이 기록을 남긴, 소수의 특정인들의 견해에만 입각한 역사가 아니라, 진정한 역사를 쓰려고 한다면, 새로운 관점에서, 기록을 고찰해야 하며 기록에 새로운 의문을 제기해야만 하고, 당시의 기록에서 그 답을 발견할 수 없다면 고고학, 건축학, 어원학, 미술학 등에 이용되는 모든 자료들을 이용하여 그 답을 찾아내야만 한다. 즉, 역사는 삶과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분된다. 수세기 전 까지도 기술은 글을 거의 쓰지 않던, 사람들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기술진보가 인간생활에 미친 역할은 무시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과거의 사실을 탐구하아서는 안 된다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도 있었다. 즉, 린 화이트의 서적에 대한 비판론 제기는 그만큼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라는 서적이 명저임을 반증하는 것이며, 비판할 가치가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물에 따른 연구를 좀 더 살펴보면, 저자 린 화이트는 1940년에 발표한 「중세 동안의 기술과 발명」을 시작으로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왔다고 하며, 새로운 발명의 놀라운 속도와 다양성을 밝혀내면서 동시에 기술이 중세 서구 문화의 제반 가치들과 어떤 연관을 가지는 가를 탐구하여 왔으며 그 결과물들을 책으로 집약 하였는데, 그 핵심이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의 저서에 담겨있다고 평가된다. 강연에서 출발하였다고는 하지만「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는 결코 교양적인 개설서가 아니다. 책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탐구의 긴장과 집요함, 그리고 정신의 밀도에서 이것은 세 개의 주제를 가진 교향곡 혹인 삼부작 드라마라고 평하는 저널도 있다. 린 화이트 말대로「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는 매우 제한적인 세 개의 연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중세초기에 있었던, 기마 충격전 이라는 전술의 변화와 그것이 귀족주의적 생활에 어떤 연관이 있나 보는 것이며, 2장은 같은 기간 동안의 농업혁명과 그것이 농민들의 생활 방식에 미친 영향을 다루게 되고, 3장은 중세 산업과 발생기의 자본주의에 미친 기계설계와 동력의 발전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그 변화를 이끌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 린 화이트는 '등자, 쟁기, 물레방아와 시계'를 이러한 변화의 주인공으로 지목한다. 즉, 등자는 기마 충격전과 봉건제의 도입을, 쟁기는 삼포 윤작제와 도시의 발전을, 마지막으로 물레방아와 시계 등 동력 기계는 근대 과학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등자, 쟁기, 물레방아가 가져온 어쩌면 작고 사소해 보이는 기술 변화가 중세인의 삶과 사회 구조에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고, 그것은 곧바로 중세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은 봉건제의 성립과 발전논문에서 시작된다. 브루너의 종합적 학설은 유럽 봉건제 기원에 관한 이후의 모든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여러 방향에서 반론들이 제기되었으나 여전히 유력한 학설로 여겨지고 있다. 결국 브루너 가설의 장대한 구성은 그 핵심 부분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마르텔, 카를로만, 피핀 치세에 동기를 결여한 이상한 드라마에 직면해 있다. 기병이 갑자기 긴급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초기 카롤링거 지배자들은 그들의 영역을 봉건제로 재편성해서 이전 보다 더 많은 기병을 양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회 혁명을 야기한 긴급한 군사적 필요성의 성격이 무엇인지 좀처럼 알 수 없다. 이것의 답은 문헌 사료가 아니고 고고학에서 발견될 수 있다.2. 등자의 기원과 전파어떤 것이 발명되었지만 잠재된 형태로만 계속 있다가, 일반적으로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침내 어떤 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경우를 역사 기록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샤를 마르텔 이나 그의 참모들은, 등자가 프랑크 인에게 알려진 지 수 십 년이 지난 후에야 등자의 잠재력을 깨달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마르텔이 등자를 그의 군대 개혁의 기술적 기반으로 이용하였을 때 등자는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즉, 반봉건적인 관계와 제도가 오랫동안 문명 세계에 짙게 깔려 있었지만, 프랑크 인들만이 아마도 샤를 마르텔의 천재성에 힘입어 등자의 잠재력을 파악해서, 결국 등자를 이용하여 우리가 현재 봉건제라고 부르는 새로운 사회 구조에 의해 지탱되는 새로운 유형의 전투법을 창조했다.3. 기마 충격전과 봉건적 생활의 성격등자만큼 단순한 발명도 드물지만, 등자만큼 역사에 그렇게 촉매작용을 한 발명도 드물다. 등자로 인해서 새로운 전투법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런 새로운 전투법의 필요성에 의해서 새롭고 매우 전문화된 방법으로 전투할 수 있도록 토지를 받은 전사 귀족이 지배하는 새로운 서유럽 사회가 등장한다. 필연적으로 이기반이 되었으며, 유럽에서는 윤작제라는 새롭고 더욱 생산적인 농업체제를 완성시킨다.3. 삼포 윤작제와 영양의 개선삼포 윤작제는 중세 유럽 최대의 농업 혁신 이라고 불려왔다. 8세기 말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새로운 윤작법의 장점은 첫째, 경작면적이 1/8증가했고, 생산성은 1/2향상되었다. 둘째, 새로운 윤작법으로 1년에 걸쳐 쟁기질·파종·수확에 노동력을 좀 더 균등하게 배분하게 되어 효율성이 높아졌다. 셋째, 재배 작물이 다양해졌고, 기근의 위험성이 줄었다. 넷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써 봄 파종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곡물인 귀리의 생산을 증진시켰다.4. 유럽 중심의 북방 이동유럽의 중심이 북쪽으로 이동했다는 난해한 역사 문제에 대한 좀 더 타당한 답은 중세 초 농업 혁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9세기 초가 되면 이 혁명을 구성하는 상호 연관된 요소들이 모두 발전했다. 즉, 무거운 쟁기 · 개방 경지제 · 헌대적 마구 · 삼포제 등이 그것이며, 편자만이 한 세기 뒤에 출현했다. 농업혁명의 생산성 향상이 심지어 샤를마뉴 시대에도 유럽의 중심이 북방으로 이동한 최대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제3장 기계 동력과 장치에 대한 중세의 탐구대략 1000년부터 15세기까지의 중세 후기는 자연력을 이용하려는 노력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발전의 시기였다. 당시까지의 경험적 모색이,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보존해서 이용하려는 의식적이고 광범한 프로그램으로 급속히 전환했다. 근대 서유럽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노동력을 정략할 수 있는 동력 기술은, 중세에 발생한 자연관의 변화만이 아니라 중세의 특정한 업적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1. 동력원물레방아는 맷돌의 수직 축과 물레방아의 수평 축을 연결하는 톱니바퀴를 갖춘 것이다. 최초의 동력 기계가 지중해, 덴마크, 중국처럼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들에서 거의 동시에 등장한 사실은, 로마 제국 동북방에 있는 아직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그 어떤 곳에서 물레방아가 전파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서구에서 최초의 확실한 풍차는 11사가는 “기계학에서 그 어떤 문제도 그렇게 단순하고 완벽하게 해결된 적이 없다.”라고 서술하였다. 983년의 세르치오에 있던 축융 공장을 시작으로 해서, 11세기와, 12세기에 많은 작업에서 캠이 응용되었다. 13세기에는 스프링과 디딤판이 발명되었고, 15세기에는 크랭크, 연결 봉, 조속기가 왕복 운동을 연속 회전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을 대단히 용이하게 했다. 인류의 역사가 대체로 매우 완만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런 기계 설계의 혁명은 놀랄 정도로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즉, 중세 시기는 다른 부가 장치가 필요할 때까지는 기술상으로 기본원리를 발견하는 것보다도 4세기 동안에 확립된 원리를 정교화하고 세련되게 하는 데 더 전념한 시기였다.3. 동력 기술의 개념중세 후기 유럽의 영구 운동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인도와 이슬람 세계와는 달리 일반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을 가졌고, 또 영구 운동의 동력을 다양화하고 실용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13세기에 서유럽은, 풍력과 수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항상적으로 작동하는 두 가지 힘인 중력과 자력을 발견했다. 그리고 13세기 중엽이 되면 적극적인 사람들이 최근의 기술적 성과에 의해 자극받았을 뿐 아니라 신기한 영구 운동에 이끌려, 기계력의 개념을 일반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주를 인간의 의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거대한 보고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망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동력에 대한 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이런 망상과 맹렬한 상상력이 없었다면 서유럽 세계의 동력 기술은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Ⅲ. 결론1260년 로저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단 한사람이 거대한 배의 키를 잡고, 여러 사람이 노를 젓는 배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기계가 가능할 것이다. 가축을 사용하지 않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마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새처럼 날개를 펄럭이는 비행기를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이나 바다 밑으로 다니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로저 베이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