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역사, 역사적 사실의 의미와 역사가의 위치-진정으로 역사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르며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인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이 물음에 대답을 하자면, ‘역사란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사이의 상호작용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의 미래지향적인 대화의 장’ 정도로 요약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강의 첫 시간에 교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 하셨지만 이것은 실제로 그리 간단하게 답하기가 쉽지는 않은 질문임에 틀림이 없다. 사학이라는 것이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볼 때, 역사를 규정하고 위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사학에서 해야 하는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에서 Carr의 논의는 매우 방대하다. 철학적인 쟁점들도 많이 등장하며 기존에 우리가 인식하고 있었던 역사관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인식론적으로 부정하거나 수정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루고 있는 주제들의 양도 상당하거니와 단순히 책의 내용을 요약 제시하는 것은 지면 관계상 어려울 듯 하고 어찌 보면 진부한 작업이 될 것 같아 나는 이 글에서 사회나 과학과 역사의 관계나 인과관계와 같은 문제는 제외하고 책의 전체적인 커다란 흐름을 따라 역사와 역사가의 관계, 역사가가 역사해석에서 갖는 의미를 중심으로 논의를 풀어 나가려고 한다.첫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역사, 혹은 역사적 사실은 모두에게 다 같은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책의 초반부에서 Carr가 지적하고 있다 시피 기존에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던 역사란 과거의 사실을 가감없이 명확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과연 역사가 그러한 객관적 사실만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점에서 Carr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국가는 상상의 공동체이다.’ 라는 엔더슨의 테제─다소 적절하지 못한 예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우리의 기억이 언제나 정확한 것이 아니라 조작이나 왜곡된 기억을 사실로 믿고 있을 수가 있다는 맥락에서─에서도 어렴풋이 알 수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의 사실이 반드시 우리의 기억이나 기록과 일치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본문 중에서도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고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어떤 입장에서 어떤 관점을 갖고 사건을 기록,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역사적 사실은 판이하게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기록하고 싶고 남기고 싶은 사건이라면 조금 과장되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고, 부끄럽거나 좋지 못한 사건일 경우 아예 은폐하여 기록으로 남기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은 듯 적은 지면만을 할애한 채, 혹은 미화하여 좋게 꾸미는 형태로 후대에 전해 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일제를 침략의 역사로 보는 한국과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일본과의 갈등 역시 바로 이러한 문제를 배경에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두 번째로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취사선택된 사실이라는 점이다. 추석연휴 전주의 강의에서 배웠던 것처럼, 과거의 사실이라고 하여 전부 다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이라는 개념의 범주는 매우 넓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내가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것 또한 수 십년 후에 돌이켜 보면 명백한 과거의 ‘사실’이며 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라는 점 또한 과거의 ‘사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것은 역사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며, 박근혜대통령이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점은 역사로 기억될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두 ‘사실’의 차이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Carr가 언급하고 있는 중요한 테제중 하나로 역사는 역사가에 의한 역사라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사실과 기록들이 모두 역사로 불릴 수는 없으며 그저 단순한 ‘사실’과 역사로 쓰여 지는 역사적‘사실’을 구분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역사에 대하여 흔히 하는 오해중 하나가 과거의 사실과 역사를 등치시켜 이해한다는 점인데, 과거의 사실이라고 하여서 곧 역사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배웠던 4개의 기준과 합치하는 것 혹은 역사가가 선택하는 과거의 사실이 역사가와 만나 비로소 역사로 재탄생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일 것이다.여기까지 역사란 같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보는 관점이나 입장, 시대적 배경 등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존재한다는 것과 모든 사실들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역사가의 역할이 중요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사는 역사가와 만났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하겠다. 책의 내용에 대한 요약정리는 이쯤 하도록 하고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역사가 역사가에 의해 재해석된 사실이고 그 해석은 역사가 마다 상이할 수 있으며 과거의 모든 사실이 역사는 아니라고 한다면 역사는 객관적이지 않은 걸까? 수많은 사실들이 역사가에 의해 선택될 것이고 그 선택된 사실들에 또 다시 재해석이라는 가공이 덧입혀진다면 각기 역사들은 서로 다를 것이며 모두가 주관적인 역사가 될 터인데, 무엇을 우리는 진실 된 역사로 보아야 하는 걸까? 또한 역사가들의 수만큼이나 역사는 다양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사는 객관적이지 않고 진실 된 역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이고 역사는 매우 다양하다는 생각이다. 왜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자세히 살펴보겠다.사실 Carr의 논의들은 기존에 역사관의 주류적 흐름을 차지하고 있던 랑케식 역사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랑케의 역사관은 역사란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해야 하며 역사가의 사적인 관점을 비롯한 주관적인 부분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진정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주관적인 해석이 없는 역사는 과연 객관적일까? 과거에 존재하였던 사실들은 무수히 많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한다고 하여도 그렇게 서술된 역사 역시 역사가에 의해 취사선택된 일부의 사실만이 사용된 이야기일 것이다. 다시말해,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한 치의 가감 없이 정확하게 서술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모든 역사서들은 각기의 문제의식이나 관심분야에 대하여 과거의 사실을 선택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기전체를 예로 설명한다면 열전, 본기, 지 세 가지가 각기 인물사, 정치사, 문화사로서 구분되는 것이 그 특정 분야에 대하여 서술한 것이므로. 앞선 논의에서 다뤘듯이 기록된 사실들 역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나 그것을 기술한 집단 혹은 개인에 의하여 골라진 사실들이고 일정부분 왜곡되거나 과장된 부분이 존재 할 수 있다. 이렇게 사료 그 자체가 완전히 객관적이라고 보기 어려울 뿐더러 아무리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하여도 그 서술의 대상이 되는 사실들마저도 역사가에 의해 주관적으로 선택된 사실들로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하였던 역사가의 해석을 중심으로 서술을 하였던지 간에 어쨌든 그것은 선택된 역사이고 이미 주관성을 띈다고 볼 수 있겠다.
거대한 전환-폴라니의 시각으로 본 현 시기의 세계경제 위기-통시적으로 바라볼 때 세계는 역사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어 왔으며 그 중에서도 괄목할 만한 급격한 변화를 몇 차례 겪었다. 맑스주의적인 해석으로 역사를 5단계로 구분하여 그러한 급격한 변화를 묘사하든, 홉스적인 관점에서 이중혁명의 전과 후를 구분하든, 흔히 말하는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의 구분을 하던지 간에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의 차이가 있다면 있겠으나 전체적인 구조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변화들은 반복된다고 볼 수 있다. 폴라니의 책이 오늘날 다시 읽히며 재해석 되고 있는 이유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폴라니가 읽히는 구체적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는데, 비록 이 책이 쓰여 질 당시 시대적 배경은 2차 세계대전 이지만 폴라니의 시각이 한시적으로 당대에만 머무른 분석이 아니라 장기적인 담론을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혁신적이며 새롭고 또한 우리들이 놓치고 있는 많은 부분들을 재조명 할 수 있는 안목을 선물해 준다는 점에서 역시 의미가 있다.폴라니를 읽다보면 기존에 경제나 시장, 국가에 대하여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보편적인 인식론적 틀을 깨고 밖으로 나오게 된다. 보통 경제학에서는 국가를 설명하기를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이 통제하지 못하거나 시장의 자유로운 기능을 방해하는 것을 대신 통제하고 시장을 돕는, 간단히 말해서 시장에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러한 것을 국가의 미덕인 양 선전하여 정책에 반영하고 또 사회에 적용 해 왔다면 폴라니는 정 반대의 논리를 펴고 있는 셈이다. 경제와 정치를 근본적으로 분리하여 보지 않았기에 경제체계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지대하다는 입장이 그것이다. “자유방임은 국가에 의한 계획의 산물이다(Laissez-faire was planned)” 라는 폴라니의 명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경제학에서 굳게 믿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자생적으로 기능한다손 치더라도,─물론 폴라니는 그렇게 보고 있지 않다─또한 국가가 그에 대한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에 불과할 지라도 경제는 시장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상품인 화폐와 노동력을 스스로 관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이는 프레드 블록의 해제에서 아주 잘 설명되어 있는데,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과 같은 특수상황은 반드시 국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수 밖에 없으며─시장이 스스로의 내적 동학을 통해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수요와 변동을 유기적으로 관리해야 할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현 시기의 세계경제 위기를 바라본다면, 우선적으로 국가가 화폐라는 상품의 관리에 있어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지난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부터 세계적으로 확산된 미국 발 경제위기─사실 1929년 대공황 이후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보는 편이 알맞을 수도 있겠지만─는 통제되지 않는 금융자본의 무제한 유통으로 인해 생긴 부동산시장에서의 버블이 주된 이유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화폐가 국가에 의하여 통제되지 않은 탓이라 볼 수 있겠다.구체적인 논의에 앞서 먼저 폴라니의 가정과 이론적 전개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존경제학과 다르게 제도주의자로서 폴라니는 시장을 사회제도로 이해하였다. 사회에 외재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다고 맑스와 같이 시장(경제)을 사회와 같은 것으로 바라 본 것 또한 아니다. 사회에 경제가 배태되어있다는 개념으로 폴라니는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사회라는 틀 속에 시장이 착근된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언제나 같지 않고 때로는 시장이 사회의 밖으로 뽑아 올려지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경제와 사회의 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자본주의가 농업에서 상업으로, 다시 산업의 영역으로 변화되고, 이러한 자본주의적 질서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때 사회의 변화는 어떠한가 하는 것이 폴라니의 주된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거대한 전환’의 시기인 19c영국헤게모니의 세계질서를 폴라니는 백년평화, 금본위제, 자기조정적 시장경제, 자유주의국가의 틀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백년평화 라는 것은 유럽대륙에서 100년간 전쟁이 없었다는 의미이고 그로 인해 영국이 헤게모니를 지배하고 끝없는 축적이 가능해 진 것인데 그 배경으로 폴라니는 금본위제를 말한다. 금으로 평가된 영국의 파운드는 가격변동의 영향이 없는 절대적 기준으로 보이지만 경제적 공황이 발생할 때 사회는 경제에 대하여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자기조정적 시장경제가 스스로 해결하도록 놔둬야 하는 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같으면 이러한 상황이 도래한다면 사회적 불만과 갈등이 만만치 않겠으나 당시에는 시장은 가만히 두면 스스로 균형을 회복할 것이라는 고전경제학적인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이데올로기를 통해 유지가 가능했다.영국헤게모니 아래에서 국제경제는 금본위제를 통해 유지되고 이것은 고도금융의 초국적 자본으로 통합되는 성격을 지녔다. 하지만 폴라니의 해석대로라면 사회에서 벗어난 시장은 문제를 야기하는데,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사회를 호혜성사회, 재분배사회, 시장교환사회로 구분하여 살펴본다. 호혜성사회는 시장이 생성되기 이전이며 권력관계도 없는 일종의 선물경제로 대표될 수 있는 사회이다. 등가교환의 형태를 갖지 않고 말 그대로 호혜적인 경제인데,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주는 것은 아니고 줄때는 주고 받을 때는 받는 불규칙적인 교환관계가 이뤄지는 곳이다. 재분배사회는 권력의 중심점이 하나로 모여진 사회이며 로마제국이나 중국을 예로 들 수 있다. 물자의 집중을 통해 재분배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고 또 이를 통해 사회가 유지되는 것인데 재분배사회에서는 권력의 중심이 하나인 만큼 개인이 가난한 것은 권력자의 책임이었다. 재분배사회에서는 시장이 등장하였기 때문에 자본의 논리에 종속될 위험이 있는데 이는 권력자가 상업자본을 통제하는 것을 통해 극복되었다. 중국의 환관이나 중세의 종교와 같은 것으로 자본주의를 억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비록 시장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사회가 그것을 안고 있는 형태이므로 아직까지는 경제가 사회에 배태된 상태이다. 그러나 시장교환사회가 등장하면 경제가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뽑아 올려지게 되는데 이때 시장을 다시 3가지로 구분한다. 중요한 것은 각 시장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인데, 국지적 시장에서 원거리시장으로, 원거리시장에서 전국시장으로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각 시장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논리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시장은 교환상품의 영역이 다르고 소비자층도 다르므로 단절적이라는 설명이다. 국지적시장과 원거리시장의 경우 독점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데 반해, 전국시장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국가의 개입을 통해 형성된 인위적인 시장이 전국시작인데, 그 시초는 중상주의정책을 통해 대자본가를 육성하고 군사력으로 대자본가의 무역을 보호해 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정치와 경제가 연합하여 독점자본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만약 국가의 개입이 없었다면 개별자본이 시장 전체를 잠식해 들어가는 독점이 일어나는 것을 쉽게 상상하기는 어렵다.이렇게 보면 시장경제가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할지도 모르지만 자세히 보면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 전국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들은 생필품이며, 그것들의 공급자가 무한한데 이 이야기는 공급이 무제한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원자재나 생산설비는 그렇다 치고 가장 중요한 노동력은 어디서 무한히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자본주의가 생산의 영역을 장악해야 가능한데, 장악하는 방법은 기계제 생산의 도입으로 가능하다. 기계를 도입할 때 발생하는 risk, 즉 고정자본투자의 손실을 막아주는 역할을 국가가 하고 노동력의 끊임없는 공급을 위해서 노동력은 상품화 되어야 한다. 맑스가 명확히 밝히지 못한 노동력 상품화의 맹아를 폴라니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해답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는데, 노동의 상품화는 기아의 규율을 통해 이뤄진다. 엔클로져 운동을 통해 토지로부터 분리된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산수단인 토지와 분리되어 존재하게 되며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노동자들은 도시로 몰려들게 된다. 이러한 노동자들을 구빈원이 한데 모아 놓고 굶어죽을 것인가 노동을 할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하는 기아의 규율을 적용하여, 토지로부터 분리된 모든 개인들의 노동력을 상품화 시키는 것이다. 노동력과 토지, 그리고 화폐까지 본래 상품이 아니던 것들이 상품화 되기 시작하면서 사회의 모순이 커지고 따라서 발생하는 위기를 사회는 이중운동의 개념으로 설명되는 사회의 자기보호 매커니즘이 작동하여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다. 바로 그 사회의 자기보호 매커니즘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뉴딜정책, 이탈리아의 파시즘, 동구권의 사회주의인데 이 세 가지 중 뉴딜만이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따라서 세계헤게모니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 ‘거대한 전환’의 맥락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왜 일본은 몰락하는가-인구증감과 그 질적변화의 동학-20세기는 세계가 동아시아에 주목한 시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고대로부터 열전체제 이전까지 역사가 깊고 문명의 수준이 높았던 동아시아는 서구열강들이 열전체제를 개막한 이후, 소위 말하는 근대성을 획득하지 못함으로써 침략당하고 지배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던 동아시아가 20세기 일본을 필두로 놀랄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다시 옛날의 영광을 되찾을 만한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중 한국과 대만은 일본의 경제성장 모델을 벤치마킹하여 성공한 사례로 분류할 수 있다. 또한 현재는 중국이 G2로 분류되며 일본은 미국 다음가는 제2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은 지난 해 20-50클럽에 가입하면서 동아시아의 성장은 여전히 괄목할 만한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지속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중국은 여전히 매년 엄청난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불경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보이며 대한민국 또한 비록 1%대의 성장률이긴 하나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았을 때는 오히려 높은 수치라고 할 수 있으나, 일본의 경우는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닥치기 이전부터 내부적으로 불황을 맞고 있었으며 현재와 같은 세계적 위기 속에서 더욱 더 벗어나기 힘든 불경기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동아시아의 경제성장과 국제적인 입지를 강화하는데 일본이 한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으며 그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전쟁을 일으킬 만큼의 강대국이 되었는지, 어떻게 미국 다음가는 경제대국으로 까지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현재 일본의 경기가 침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 볼 필요가 있는데, 이 책은 그에 대한 해답을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제공하고 있다고 보인다. 20세기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의 롤 모델이 되었던 일본.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룩하였으며 세계대전을 일으킬만한 군사력을 가졌던 일본. 제 2의 경제대국이라는 별호까지 얻으며 세계정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강대국 일본에게 요즘 몰락론이 대두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모리시마는 맑스의 토대-상부구조론을 빌려 와 사회변동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명제는 수용하였으나 맑스의 커다란 허점인 경제환원론은 수용하지 않았다. 즉 토대를 경제로 보지 않고 경제 또한 어떤 토대 위에 올려진 상부구조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며 토대를 인간이라 규정한다. 미래사회를 예측하거나 사회변동을 논하기 위하여서는 바로 그 토대가 되는 인간의 양적, 질적 변화를 예상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 이며 여기서부터 그는 논의를 전개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인간이 있어야 경제가 성립한다는 말은 동의하지만, 사회구조의 토대를 인간으로 설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토대-상부구조론이 건축학적인 발상에서 나온 만큼, 토대도 상부구조도 그것을 건설하는 어떤 ‘주체’가 있어야 존재 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이란 바로 그 주체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모리시마의 주장대로 인간이 사회의 토대라면, 그 토대를 생산한 자는 누구란 말인가? 어쨌든, 일단 전제를 수용하고 그의 논리 전개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제2장 ‘인구의 분열’에서 모리시마는 인구성장의 불안정성을 논한다. 나는 여기서도 모리시마의 주장이 인간이 사회의 토대이다 라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허점이 존재한다고 보는데, 저출산 국가인 일본이 자국민의 인구증감을 예측한 결과 2050년 일본의 인구가 1억5천만에 육박할 것이라는 것은 고위추계이고 중위, 저위추계의 경우가 인구가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을 통하여 일본국민은 장래에 인구가 감소한다면 아이들이 짊어져야 할 사회가 너무나 부담스럽기 때문에 한층 더 산아제한을 하게 되어 예측치보다 더욱 급속하게 인구가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동의하기는 힘들다. 모리시마의 논리대로 인구감소예측이 나오면 예측치보다 미래에 인구가 더욱 감소할 여지는 충분하나. 또한 반대로 생각 해 볼 수도 있다. 인구감소에 대한 예측이 등장하는 순간 한국,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 특유의 애국심이 작동하여 ‘인구가 감소한다면 국제적 지위나 세계경제에 있어서 현재 일본이 획득하고 있는 위치가 하락할 것이다. 일본을 살리는 길은 미래의 인구를 증가시키는 길 밖엔 없다.’라는 생각을 통하여 출산율이 상승할 여지 또한 충분히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 사회과학에서 미래를 예측하고 사회변동을 예상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우며 아무리 탄탄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할 수는 없다. 즉,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반대의 논리 또한 포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인데 이러한 맥락에서 모리시마는 앞서 1장에서 페트릭과 고미야를 비판하면서 계량경제학적인 근거가 부족하여 지극히 주관적이며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라고 비난한 바 있는데, 인구감소예측을 보고 출산율이 더욱 하락할 것이라는 모리시마의 주장 역시 주관적인 해석에 기대고 있는 면이 많은 것으로 볼 때 그다지 계량경제학적인 근거가 탄탄하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뒤에 이야기 할 인구의 질적 수준은 차치하고서라도 ‘절대적인 인구가 감소하기 때문에 일본의 미래는 어둡다’라는 모리시마의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일본 몰락의 근거의 두 번째로 모리시마는 미래의 일본을 이끌 주역들의 정신적 황폐를 주장한다. 여기서 ‘몰락’ 이라는 말은 이전시대에서의 성공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성공한 적이 없었다면 몰락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 모리시마 또한 전작으로 ‘왜 일본은 성공 하였는가’를 집필한 바 있다. 따라서 몰락을 살펴보기 위하여는 성공을 살펴보는 것이 불가피 한데 흔히들 일본의 성공을 논할 때 다음과 같은 7가지를 꼽는다. ①좋은 품질의 상품 생산, ②근검절약하는 금욕주의 국민정신, ③엘리트관료, ④시장에서의 가격경쟁에 우위를 점하기 위한 다품종 대량생산, ⑤삼인일각 : 정경관 밀착, ⑥종신고용제와 연공 서열제, ⑦모방의 경제. 모리시마가 전작에서 일본의 성공에 기여한 요소들로 어떤 것 들을 들어 설명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책에서는 위의 언급한 7가지 중 4가지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일본식 유교윤리의 결여를 주장하고 있다. 이는 서구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뿌리내리고 성장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베버가 진단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유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볼 수 있는데, 상당히 특이하고 신선한 주장이라 할 만 하다. 모리시마는 이 유교윤리를 국민이 획득하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일본의 국민을 전전시대, 전중시대, 전후시대 3가지로 구분하는데, 전전시대는 유교윤리를 모든 국민이 가지고 있었던 시대이고 전중시대라는 과도기를 거쳐 전후시대는 유교윤리가 부재한 시대로 정의된다.이 부분은 상당히 설득력 있고 충분히 동의할 만한데, 2차 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패전국의 낙인이 찍히게 된다. 따라서 전쟁 전, 즉 전전시대에 지도층을 재생산 하는 매커니즘으로서의 교육 분야에서 차이를 보이게 된다. 기존에 전체주의적이거나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부분을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로부터 유교윤리의 부재가 시작된 것이다. 패전 이후 국제질서가 냉전체제로 접어들면서 자본주의국가였던 일본은 구미식의 개인주의와 평등주의, 민주주의를 교육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전후시대에 이러한 구미식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들과 기존 사회의 주요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기성세대들 간에 인식론적인 단절이 불가피한 것이다. 일본만의 특수한 유교윤리로 인해 금욕주의가 국민정서 일반을 점유하고 또한 섬나라라는 특성상 영토가 한정되어 있어 공동체주의의 발달로 인하여 정치, 경제, 관료의 친밀성이 증대되며 이에 파생된 종신고용제를 보증수표로 하던 일본의 성장이었다. 그러나 전후사회로 돌입하면서 이와 같은 일본인의 정서가 전과 같이 유지될 수 없는 환경들이 교육을 시작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자신들의 성장동력이었던 유교윤리로 함축되는 국민정서 동학의 변화로 인하여 몰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모리시마는 이에 대한 원인으로 일본 문무성의 감수성이 결여되어 이에대한 적절한 처방을 내리지 못한 채 단절을 더욱 지속화 시킨 것을 이야기 한다.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은 유교윤리의 상실이 일본몰락의 시초였다는 점은 동의할 만하나, 그 변화의 동학을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 논리적 취약성이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 근본적인 문제가 유교윤리의 부재인지, 교육을 통한 전전세대와 전후세대의 정신적 단절인지가 설명이 불분명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만약 유교윤리의 상실이 근본적인 문제라면 전후시대의 교육에 있어서 과연 전전시대와 마찬가지로 전체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교육을 지속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올바른 것인가 하는 의문점이 들고, 유교윤리의 부재를 반드시 교육적인 측면에서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 전전시대의 일본은 분명 사상적인 측면에서 자국민 내의 단결을 유도하여 성장의 동력이 되었던 것은 맞지만 그것이 올바른 사상적 단결이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회의적이다. 전범국가로서의 일본을 자라게 한 바탕 또한 전전시대의 교육에 있었을 텐데 말이다. 과연 일본의 성장 동력으로서의 유교윤리를 반드시 전전시대의 교육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전후시대의 교육에 유교윤리를 접합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두번째로 두 세대 간의 정신적 단절이 주요한 원인이라면 과도기적 시대에 있어서는 물론 단절점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젊은 세대가 사회로 진입하면서 기성세대나 사회지배적 규범에 대하여 괴리감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매우 당연하고 동의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세대부터는 온전히 전후시대의 교육을 받은 자 들로만 사회가 구성될 것이 자명한데, 정신적 단절이 그때 까지도 지속되느냐 하는 점이다.
4천원 인생-당신의 인생은 얼마입니까-과목명:담당교수:학과:학번:성명:바로 어제 대한민국이 20-50클럽에 가입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국민소득 2만달러, 인구수 5천만을 세계에서 7번째로 돌파했다는 뜻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제의 일이고 책이 쓰여 졌을 당시는 몇 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기가 조금 어페가 있을 수 있으나 당시보다 지금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은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개인적은 생각으로는 별로 변화된 점이 없을 것이다. 다른 20-50클럽의 국가들이야 어떨지 모르지만─설사 그들도 그렇다 할지라도─비록 산술적 수치로나마 선진국 반열에 진입한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정말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당신의 인생에 값을 매긴다면 얼마를 주고 싶은가? 책의 제목 ‘4천원 인생’ 이란 책을 읽고 나면 ‘시간당 급여를 4천원 씩 받고 일해서 살아가는 인생’ 정도로 의미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워낙 저명한 도서라 읽기 전에도 그러한 느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기 전에 제목을 보고 ‘4천원’ 이라는 단어가 인생의 값어치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삶을 돈이라는 물질적 가치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모순적인 부분이 많겠지만 본문 중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람들─감자탕집 노동자, 갈빗집 노동자, 마트 비정규직 노동자, 각종 외국인 노동자, 기타 책에 관찰대상으로 등장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인생을 나는 감히 평가하건데 그 값에 ‘4천원’ 이라는 금액을 매겨주고 싶다. 그만큼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다.이 책을 내가 서평 도서로 선택을 했고 읽는 동안 너무 흥미롭게, 한편으론 정말 감동을 받으면서 읽었지만 막상 서평을 쓰려고 하니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노동’ 이라는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많이 다뤄지고 있으며 관련 도서나 논문 또한 수없이 많다. 그만큼 깊이 있는 주제인 것이다. 더군다나 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는 ‘노동’ 은 일반의 ‘노동’ 과는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책의 저자─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인터뷰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인 기자들이 이야기를 엮어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노동 현장의 분위기와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삶에 대한 부분들이 특별한 수사법이나 묘사를 하지 않고 단순한 기술로만 내용이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극장에서 3D영화를 보듯이 선명하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눈으로만 읽는 한권의 책이지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지루하지 않은 책이며 노동자들이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 그들의 일상에서 일 거수 일 투족이 가슴속에 짠하게 다가온다. 이들은 언제부터 존재 했는가? 몇 달 전? 혹은 몇 년 전부터? 아니다. 책을 읽기 전이나 읽은 후나 이들은 우리 삶 곳곳에 숨어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식당에 가면 물컵과 물수건을 서빙하고, 마트에 가면 계산을 해주고, 지금 내가 만지고 있는 노트북도 어느 공장의 ‘누군가’ 의 손길이 묻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 관심도 없었으며 알려고 하는 시도조차 해 보지 않았다. 이러한 소외 중에 어느 공장의 누군가는 불법사람이 되었고, 9번 기계가 되어 버렸다. 그들이 우리의 생필품을 만들고, 식당에서 먹거리를 만들고, 마트에서 물건을 계산하고 공장에서 상품을 만든다. 이 책의 주인공은 항상 각자의 자리에 서있으면서 아무말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 왔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투명인간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바로 그 투명인간들이 ‘4천원 인생’ 이라는 특수 안경을 통해서 이제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그들이 있었고 내 집안 곳곳에 그들의 숨결이 묻어 있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4천원 짜리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계량적으로 파악된 각종 통계수치를 넘어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미묘한 사회과정을 역동적으로 연구했다. 그 방식이 위장취업이라는 점에서 윤리적 문제가 공장 노동자로, 우리가 주말마다 찾아가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마트의 계산원으로, 코리안 드림을 안고 이 땅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으로 들어갔다. 정부나 각종 리서치기관의 숫자들에 가려져 사회 소수라고 생각되고 그저 남이라고만 알아 왔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이상 남이 아니며 어느 먼 곳에서 살고 있는 다른 민족이 아니라는 점을 나에게 일깨워 주었다. 우리는 그동안 이들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아마 이러한 비정규직이 있고 정규직보다는 좋지 못한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수준에서 그쳤음에 틀림이 없다. 이들은 그저 정규직보다는 못한 대우를 받고 살아가는 것일까. 그 정도로 이들의 삶을 모두 설명하기란 너무나 부족하다. 각종 통계들이나 전문가들의 입장이 아닌 현장에서 실제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비정규직에 대해 무지하고 안일한 사고를 갖고 있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읽는 동안 웃기도 많이 웃었고 울기도 많이 울었으며 정말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것이 질적 현장연구로써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책이 아니라─ 저자들이 꾸며낸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만큼 그들의 삶은 사회를 잘 모르고 아직 치기어린 내가 상상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임금이 적어도, 비인간적인 일을 수없이 겪어도, 아파도 휴가를 얻지 못해도 그 일자리를 그만 두지 못하고 계속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들에겐 있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노동자들은 아마도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환자들과 육체적. 정신적 장애인들을 제외하면 가장 최하위 계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정규직일수도 있고 소외된 사람들일수도 있으며 사회적 약자이기도 한 이들을 무어라고 정의를 내리던 간에 이들의 삶이 평범한 그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지닌다는 사실에 모두들 동의할 것이다.이들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꾸는 꿈이 우리의 꿈처럼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아주 소박한 것을 꿈으로생으로 한정되어 조사가 되었다는 한계점이 있으나 전체 표본의 약 80%에 육박하는 대다수의 인원들이 비정규직에 대한 인식도가 상당히 높았다. 우리가 세부 척도로 설계하였던 비정규직 문제 인식정도, 사회적으로 비정규직이 갖는 의미 등의 인식이 대체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체감도에서 드러났다. 자세히 말하면, 비정규직에 대해 많이 인식하고 있고 그 문제에 심각성을 느끼고 있는 인원이 전체의 80%인 반면에 전체의 30%정도의 인원들만 비정규직에 대한 체감도가 높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비정규직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고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다고 분명히 생각하고 있지만 그 비정규직은 나와는 관련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타자화를 시켜 버렸다고 추측할 수 있다.그러나 연구 결과에서처럼 과연 비정규직의 문제가 그들과 우리를 분리시켜서 볼 문제인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일반적으로 우리가 비정규직이라고 생각하는 집단의 공통점은 학력수준이 낮고, 가정환경이 열악하며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 한 어떤 능력─우리사회가 요구하는 전문 기술이나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실제로 책속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학력이 떨어지고 태어날 때 가정환경부터가 그리 부유하지 못하였으며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며 가진 바 전문 기술이나 지식이 없다. 따라서 누군가의 말처럼 이러한 현재가 그들의 노력의 부재에 대한 결과로써 나타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논의 가 타당한지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노력하고 싶지 않아서 노력하지 않았는지, 우리 사회가 노력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에 노력하지 못 하였는지 말이다. 나는 후자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그 증거로 그들은 열심히 노력하며 산다. 책을 읽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근무하고 근무가 끝나면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에 설레어 하며 귀가한다. 일 끝나고 소주한잔 사먹을 돈을 아까워하며 자녀들에게 주는 용돈에는 형ime' 이라는 영화가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시간을 곧 돈으로 사용하는 먼 미래의 이야기로, 시간은 손목에 저장해 사용한다. 거주지는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변두리는 최하층이 거주하며 도시 중심부에는 최상층이 거주한다. 변두리에 거주하는 하층민들의 경우 하루 벌어 하루를 산다. 버스요금이 1시간으로 버스타기에도 부담을 느끼며 손목시계에 시간이 다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아 간다. 시간을 24시간만 소유하고 있어도 그들 사이에서는 부자로 통한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중심부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손목시계에는 적어도 수 백 년의 시간이 있다. 영화에서 가장 부자의 경우 수 천 년을 소유하고 다니며 금고에는 자그마치 1백만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저장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아무리 가난해도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의 답은 ‘아니오’ 이다. 도시 변두리지역에서 시간을 많이 버는 자가 생겨난다면 중심부에 위치한 권력자들은 각종 요금을 올린다. 버스요금 1시간에서 2시간으로, 커피한잔 4분에서 6분으로. 요금을 올리면 가난한자들은 그만큼 더 힘들어지고 부자들은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을 번다. 각 구역별로 적정량의 시간만 유통되도록 정책을 펴는 것이다. 가난한자는 계속 가난하게 살고, 각종 요금들이 부당하게 올라도 어쩔 수 없이 구매하고 살아가야 한다. 언제 시간이 다할지 모르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말이다.이 영화에서 변두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책의 노동자들과 정말 닮아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본문 중에 이러한 내용의 표가 있다. ‘선지해장국(5천원) 1시간 8분의 노동, 간장게장(1만 2천원) 2시간 40분의 노동, 소갈비 1인분(1만 8천원) 4시간 3분의 노동, 한우 꽃등심 1인분(3만 5천원) 7시간 52분의 노동’ A갈빗집에서 일하는 어떤 아주머니의 사례를 소개하며 곁들인 표인데, 가장 저렴한 5천원 짜리의 선지해장국 조차 이들의 한 시간 노동의 대가도 되지 못한다는 것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