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역사 캐나다의 민족구성 캐나다의 이민제도 다양한 민족 문화1. 유럽인과의 접촉 최초의 접촉:노르웨이인이 뉴펀들랜드 섬에 잠깐 정착했던 1000년전으로 추정 2. 식민 시대 “뉴 프랑스”(Nouvelle-France)와 영국의 통치 프랑스 : 1534년 가스페 반도 프랑스 영토화 1535년 지금의 퀘벡 까지 진출 1642년 몬트리올 식민지 건설 영국 : 1670년 허드슨 베이 상사 설립, 모피교역 독점 1759년 퀘벡에서 충돌, 영국의 압승 1763년 파리조약 대부분의 프랑스령이 영국으로 넘어감1791년 Upper Canada(온타리오), Lower Canada(퀘벡) 탄생 1837~8년 Upper Lower Canada의 반란, 두 식민지를 통합하여 캐나다의 통합 주를 형성 1848년 통합된 식민지에 외무 관련 업무를 제외한 책임 정부 수립 3. 국가의 탄생 북미 영토 내 영국 식민지의 독립적 성장 1867년 7월 1일 캐나다 자치령의 탄생 영국의 의회 제도, 특정 문제의 입법권은 주에 할당 1차 대전 이후 1931년 웨스트민스턴 법의 통과 헌법 자율성 획득1. 인종의 모자이크1971년,세계최초로 Multiculturalism을 캐나다의 국시로 정한다는 취지를 발표2. 캐나다 원주민 (First Canadian, Original Canadian)3. 퀘벡-파리조약에 의해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할양 받은 옛 프랑스 식민지 -영어보다는 프랑스어를 많이 사용 -캐나다 속의 프랑스쁘띠 샹플랭 거리4. 소수민족의 급증-2001년 전체 인구의 13% - 2006년 16.2% -남아시아계의 급증 -70%이상을 이민자가 차지 -다문화 현상의 극대화 -소수 민족의 영향력 확대{nameOfApplication=Show}
4-(2) 북한사회에 대한 이해 2011 년 12 월 5 일 교과서 pp. 265-274학습목표 1 2 북한 주민의 정치 , 경제 , 사회생활의 모습을 이해한다 . 북한 주민의 교육 및 문화 생활이 갖는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는 .. 통일이 갖는 의미 남북한 동포들이 한 마음 을 이루는 것 우리 민족의 새로운 역사 를 창조하는 것 완전한 한민족 국가 를 만드는 것 함께 번영하는 민족 공동체 를 이루는 것 외국의 사례 : 독일과 예멘의 통일 모 둠 토론 : 왜 통일을 해야 할까 ?북한주민의 정치생활 노 동 당 북한의 최고 통치 기관 정치적 권한 집중 5 년에 한 번 개최됨 외형상 삼권 분립 제도 사실상 김정일 국방 위원장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 주체사상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갈등 속에서 독자적인 입장을 강조한 사상북한주민의 경제생활 사회 주의 계획 경제 장마당 모든 생산 수단이 국유화 국가가 경제를 계획적으로 조절하고 통제 비효율적인 경제 구조 개선 사적인 경제 활동 인정 시장 경제 체제의 형성 텃밭과 장마당 이용 중국과의 교류북한의 교육제도 고등중학교 남한 : 9 년제 의무 교육 북한 : 11 년제 의무 교육 중학교 2 학년 = 고등중학교 4 학년북한주민의 문화예술생활 북한 문화 생활의 목표 사회주의적 민족 문화 건설 ○ 영화 : 사랑 , 우정같은 감정보다 위대한 수령과 당의 사상에 초점을 맞춤 선과 악을 강조 , 눈물의 강요 ○ 음악 : 가사 중심 , 혁명적 계급 의식의 함양 ○ 미술 : 김일성 영웅화 작업 조국해방 , 계급투쟁 , 인민의 삶 ○ 문학 : 혁명적 시 다수 ○ 민속 : 80 년대 이후 설날 · 추석등 명절이 인정됨배운 내용 확인하기 북한의 최고 통치 기관은 ( ) 이다 . 북한은 중국 , 소련과의 갈등에서 독자적 인 ( ) 사상을 폈다 . 북한의 생산수단은 ( 개인 / 국가 ) 의 소유이다 . 비효율적인 경제 구조속에서 ( ) 이 생성되었다 . 북한은 사유재산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 ) 조선 노동당 주체 국가 장마당 X배운 내용 확인하기 2 북한의 의무 교육 기간은 ( ) 년이다 .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뒤 개인의 의사에 따라 대학에 진학한다 . ( ) 북한 문화 / 예술의 목적은 사람들을 사상적으로 일깨우기 위함이다 . ( ) 북한 문화 / 예술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분야는 ? ( ) 북한은 설날 / 추석이 폐지된 적이 있다 . ( ) 북한에 대한 이해는 통일 후에 찾아오는 혼란을 불러올 것이다 . ( ) 11 X X o 영 화 o다음 시간에는 … 4-(3) 통일을 위한 노력 과제 : 북한의 음식 문화 조사해오기{nameOfApplication=Show}
세계의 민족 문제 현황평화로운 인류 공동체는 아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세계일 것이다. 이러한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이루어진 세상의 모습을 그려보고, 그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연구해왔다. 유가(儒家)에서 말 하는 대동(大同)사회라든지, 서양의 세계 시민주의(cosmopolitanism)등이 좋은 예다. 그러나 이런 노력과 성찰에도 불구하고 지난날의,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는 분쟁의 그림자가 곳곳에 드리워져있다.우리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민족 문제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소위 ‘선진국’들 중심의 국제정치에 가려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민족 분쟁의 문제를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아주 잠깐 배우고 지나쳐버리는 ‘별 볼 일 없는 사건’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별 볼 일 있는 사건’들임에 분명하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던, 그리고 일부는 지금도 진행중인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내의 민족 분쟁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했다.1) 유럽과 구소련체첸공화국, 타지키스탄, 북아일랜드 및 키프로스 등에서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1979년부터 소련은 (이어서 러시아) 남부지역의 이슬람교도들과 세 차례의 대규모 단층선 전쟁을 벌였다. 그것은 1979~89년 아프카니스탄 전쟁, 그 연장선에서 1992년 시작된 타지키스탄 전쟁, 1994년에 발발한 체첸 전쟁이다.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체첸반군은 1996년 1월 인근 다게스탄공화국의 한 병원을 점거, 민간인 1천여명을 인질로 억류했다. 또 체첸반군은 그해 3월 수도 그로즈니를 기습, 러시아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에 맞서 러시아군은 7월 반군거점을 맹폭, 3백30여명을 숨지게 했다. 이후 양측은 협상에 나서 21개월간 10만여명의 희생자를 낸 이 내전을 마감하는 공식 휴전합의를 1996년 8월에 발표했다. 이 평화협정에 따라 체첸 독립문제는 향후 5년간 사적 갈등과 반목 때문에 언제든지 이 지역에서는 분쟁이 재연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한편 러시아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포함된 반정부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타지키스탄에서도 싸움을 벌이고 있다.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해온 아일랜드공화군(IRA)이 폭탄테러와 휴전을 반복하면서 지난 27년 동안 1만여건의 폭탄테러가 발생, 3천명 이상이 사망하고 3만 9천여명이 다쳤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수상은 1997년에 영국과 북아일랜드사이에 평화협정을 성사시켰으나, 이 양자 사이의 평화유지란 단지 폭풍전의 고요에 불과한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곧 유럽의 3대 종교인 로마 카톨릭, 동방 정교,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전쟁으로서의 특성을 띄게 되었고 제국들의 경계선이 맞부딪쳐 그 종교적 파편이 쌓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곳이 보스니아다. 1995년 12월의 데이턴 평화협정으로 3년반 동안 계속된 내전이 끝난 보스니아에서는 1996년 3월 총선이 실시돼 3인의 대통령단이 선출되었으나, 워낙 인종 및 종교간 갈등의 골이 깊어 언제든 분쟁이 재연될 소지가 높은 편이다. 한편 98년 들어 다시 불거지기 시작한 코소보 사태는 이 지역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갈등으로 지금까지 2천여명이 숨지고 27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98년 초 신유고연방의 세르비아 경찰이 코소보 독립을 주장하는 알바니아계 게릴라와의 교전에서 일부 주민을 학살하고 주민들이 경찰을 공격하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게 됐다. 현재 유럽안보협력회의(OSCE) 소속 감시단 2천명이 코소보에 파견되고 유고측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선에서 그런 대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이는 분쟁 종식의 선언은 아니다. 옛 유고지역은 인종적 반목과 종교적 갈등이 그 밑바닥에 진하게 깔려있어 언제든지 분쟁이 재연될 소지를 안고 있다.※ 참고 코소보 사태란?코소보는 알바니아계 주민이 전인구의 80% 가까이를 차지하지만 영토는 신유고연방에 속해 있는 자치주이다. 그래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2) 아프리카유럽열강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종족간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아프리카는 향후에도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주요 지역이 될 것이다. 아프리카의 세 번째 대국 자이르에서 32년간 장기집권을 해온 모부투정권의 종말을 가져온 직접적 계기도 종족갈등이었다. 자이르정부가 1996년 10월 자이르 동부지역에 대대로 거주해온 30여만명의 투치족에 대해 자이르를 떠날 것을 지시하자 분개한 투치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결국 모부투정권을 붕괴시키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반란으로 인하여 후투족난민 1백만명이 실종됐으며 그해 11월 난민 역사상 최단기간에 가장 많은 50만명의 인구가 이동한 엑서더스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 투치족의 반란은 투치족이 정권을 잡고있는 르완다, 우간다, 부룬디 등 주변국들이 자이르반군을 지원함으로서 인접국들까지 이 반란에 개입하게 되었다. 1997년 5월 이 투치족반란의 지도자인 로랑 카빌라는 모부투의 정권을 붕괴시켰지만, 카빌라 대통령의 집권을 도왔던 투치족이 98년 8월 카빌라정권의 홀대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카빌라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앙골라, 짐바브웨, 나미비아, 잠비아 등 4개국이 군대를 파견하고 투치족을 후원하는 르완다, 부룬디 등도 개입함으로써 콩고민주공화국(자이르의 새 국명) 내전은 국제전으로 비화했는데 이는 카빌라 정권하의 콩고민주공화국의 앞날 또한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동아일보, 98.12.28). 한편 자이르 반란사태의 한 축인 우간다에서는 우간다의 반군세력이 수단과 자이르에 자리잡고 있어 두 종족간의 전쟁위험이 잠복되어 있는 실정이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역사적으로 이슬람계 민족들을 억압해 온 암하라 정교도들이 오로모 이슬람교도들의 반란에 직면해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교를 믿는 북부의 아랍계와 크리스트 정령 신앙을 가진 남부의 흑인들 사이에 다양한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이슬람교도와 크리스트교도의 가장 치열한 싸움은 수단에서 일어났다. 수단은 지난 83년부터 발생한 아세력다툼이 계속되고 있다. 알제리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저항세력과 정부군과의 교전이 7년째 계속되면서 6만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있다. 1992년 이슬람 구국전선(FIS)의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군부가 총선을 무효화시키자, 이슬람무장세력(GIA) 등 과격분자들은 군부의 지원을 받는 현 정권의 타도를 외치며 총을 들었다. 알제리정부는 96년 11월 개헌투표로 이슬람교정당을 불법화시키고 97년 6월의 총선 참여를 원천봉쇄함으로써 이슬람 근본주의세력의 무차별적인 테러를 야기시키고 있는데 외국인들은 물론 내국인들조차 마구잡이로 희생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28%에 이르는 실업률과 30세 미만 인구중 3분의 2 이상이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불만스런 현실도 반군의 반정부활동을 부추기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북부의 이슬람교도 세력과 남부의 크리스트교 부족들의 대립으로 그 동안 수 차례의 쿠데타와 폭동, 한차례의 전면전을 치러야 했다. 차드, 케냐, 탄자니아에서도 엇비슷한 싸움이 이슬람교도와 크리스트교도 사이에서 벌어졌다. 그 외에도 시에라 리온, 앙골라 등지에서도 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3) 아시아지난 92년 나지불라정권 몰락후 이슬람파벌간 세력다툼이 벌어진 아프가니스탄은 96년 9월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이슬람 학생 무장조직인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국토의 약 4분의 3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북부로 쫓겨간 구정부군과 군벌 도스툼장군이 反탈레반 공동전선을 구축해 탈레반을 카불 북부에서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후 97년 5월 탈레반이 수도 카불과 국토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탈레반 기치아래 아프가니스탄이 통일되는 듯했으나, 반군연합세력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또다시 유혈사태가 재연되고 있다. 구소련의 침공(1979년)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사태는 정치적 적대세력과 종교적 반목으로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입장이 수시로 바뀌면서 피의 보복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탈레반에 대해 96년 9월 쫓겨난 랍바니 전대통령의 측근 마수드 장군. 92년 무자헤딘의 이슬람혁명 이후 계속된 내전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선 7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가까운 장래에 아프가니스탄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스리랑카에서는 인종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다수파인 신할리족이 정부와 군을 장악하고 있는데 대해 스리랑카 총인구(1천8백만명)의 18%를 차지하는 타밀족이 지난 83년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라는 게릴라조직을 만들어 분리독립을 추구하면서 피의 보복이 계속되고 있다. 힌두교 계열의 타밀 반군과 불교 계열의 신할리즈 정부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인도 정부는 반군에게 막대한 지원을 제공하여 남부 인도에서 타밀 반군을 훈련시키고 무기와 자금을 보냈다. 1987년 스리랑카 정부군이 타밀 반군을 거의 진압할 단계에 이르자 이 대량 학살극을 규탄하는 인도 국민의 여론이 들끓었고 인도 정부는 타밀 진영에 식량을 공수하면서, 자예와르데네 대통령에게 타밀 호랑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인도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뒤 인도와 스리랑카 정부는 스리랑카가 타밀 지역에 상당 수준의 자치를 허용하는 대신 반군이 인도군에게 무기를 반환한다는데 합의를 하였다. 인도는 합의 내용에 따라 5만명의 병력을 스리랑카에 보냈지만 타밀 호랑이들은 무기 반환을 거부하였고 인도 정부는 한때 자신이 지원한 게릴라들과 교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인도군은 1988년초 스리랑카에서 철수하였지만, 인도 정부는 남부 인도에 거주하는 5천만 타밀인들이 반군에게 보내는 공감과 지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난 14년간에 걸친 교전으로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 반군 양측에서 모두 4만8천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섬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모로족 반군의 분리주의 운동이 25년간 계속되고 있다. 경제?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아온 데다 기독교 인구가 지속적으로 이 지역에 유입되자 소외감과 위기의식이 고조된 모로족들이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총을 들었다. 필리핀 정부는 96년 주요반군단체인 모로민족해방전선(MNLF)있다.
현대 정치와 민족 문제《 캐 나 다 》Ⅰ 캐나다의 역사1. 유럽인과의 접촉최초의 접촉은 노르웨이인이 뉴펀들랜드 섬에 잠깐 정착했던 1000년 전으로 보고 있다. 15세기부터 17세기 직전까지는 남부 유럽의 고래잡이 어부 들도 상당 수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식민 시대 “뉴 프랑스”(Nouvelle-France)와 영국의 통치처음으로 캐나다를 지배한 것은 프랑스였다. 1534년 프랑스인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2세의 명에 따라 가스페 반도에 발을 디뎠고, 다음해에는 지금의 퀘벡까지 진출하여 그 부근 일대를 프랑스 국왕의 영토로 선언하였다. 1605년에는 프랑스인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이 퀘벡시에 요새를 쌓았고, 그 곳을 근거지로 하여 오대호 연안가지 식민지화의 발을 넓혀 갔다. 1642년 에는 폴 드 메조네프가 몬트리올에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이때 프랑스는 국내의 정치, 사회문제로 인하여 당시의 영국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수의 개척자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영국은 1670년에는 허드슨만을 중심으로 허드슨 베이 상사를 설립하여 모피교역을 독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허드슨만 일대에서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키기 시작하였고, 1759년에는 급기야 퀘벡에서 충돌하였다. 이때 영국이 압도적으로 승전하였고, 이 후 프랑스의 캐나다 지배는 종지부를 찍었다. 1763년에는 파리조약으로 영국이 프랑스 식민지 대부분을 통치하게 되었다. 인구 팽창으로 1791년에 Upper Canada(현재 온타리오)와 Lower Canada(퀘벡)가 탄생되었다. 1837년과 1838년에 일어난 Upper & Lower Canada의 반란은 결국 영국으로 하여금 두 식민지를 통합하여 캐나다의 통합 주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1848년 통합된 식민지에 외무 관련 업무를 제외한 책임 정부가 주어졌다. 캐나다에 보다 많은 자율성이 주어졌지만 영국의 일부로 남아 있기는 마찬가지였다.3. 국가의 탄생북미의 영국 식민지-캐나다(현재 온타리오, 퀘벡), 노바 스코셔, 뉴 브런즈윅,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펀들랜드-들은 독립적으로 성장, 번영하였다. 1867년 7월 1일 Canada East, Canada West, 노바 스코셔, 뉴 브런즈윅 등은 모두 영국 북미 조례의 협정 하에서 캐나다 자치령으로 합쳤다. 새 국가의 정부는 총독(국왕의 대리인)과 하원, 상원으로 구성된 국회를 가진 영국 의회 제도를 토대로 하였다. 국회는 국가적 관심사(세금 및 국방)에 대한 입법권을 가지지만 “특정”문제(소유권, 시민권, 교육)에 대한 입법권은 주에 주어졌다.1차 대전에서 캐나다의 실제적인 역할은 전후 국제연맹에서 영국과는 다른 대표자를 얻어 내도록 만들었다. 독립의 목소리가 점차 커져 1931년 웨스트민스턴 법의 통과로 영국으로부터 캐나다의 헌법 자율성을 비준받았다.2차 대전 이후 캐나다 경제는 성장 일로에 있었다. 이러한 성장은 가족 수당, 연금 보장, 일반적인 의료 및 실직보험 등의 정부 사회프로그램과 결합하여 캐나다인들에게 높은 생활 수준과 바람직한 삶의 질을 제공하였다.Ⅱ 캐나다의 민족 구성1. 인종의 모자이크캐나다는 전체인구의 1.5% 정도인 47여만 명이 캐나다 원주민이고 나머지는 이민자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영국계 이민자가 약45%, 프랑스계 이민자가 약 29%, 그 밖의 유럽지역에서 약 9%(이탈리아, 독일 등), 그리고 아시아 및 기타 지역 이민자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지금도 거의 매년 약 200,000 명의 이민자들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세계각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하고 있다. 캐나다와 같이 많은 수 의 이민자가 있는 미국을 인종의 도가니 (Melting Pot) 라하는데 비해 캐나다를 인종의 모자이크(Mosaic)라 칭하는 이유는 캐나다만이 갖고 있는 다문화주의라는 독특한 문화 형식에서 기인한다. 소수 민족 문화를 용해시키기 보다는 각 문화를 살려내 화려한 모자이크 패턴을 만드는 다문화주의를 추구한다는 뜻이다.캐나다 정부는 각국으로부터 밀려드는 수십 종류의 문화를 단 하나의 문화로 통합하기 보다는 각 민족고유의 문화를 인정하고 계승 발전시켜 캐나다문화의 한 부분으로 만들기 위해서 1971년 세계최초로 'Multiculturalism' (다문화주의)을 캐나다의 국시로 정한다는 취지를 발표했다. 이에따른 정부의 다문화주의 정책은 여러 가지 방면으로 전개되었고, 특히 대학 및 여러 기관에서 세계각국의 문화를 연구 및 수집을 통해 여러 민족의 고유 문화를 유지 발전 시켜 나가고 있다. 그 한가지 예로 Indian과 Inuit(에스키모)들을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고, 소수민족에 대한 자국 언어를 장려하고 있다.공식적으로 영어와 불어 2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모든 연방정부 및 연방기관은 2가지어로 표기하고 서비스를 제공해야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캐나다에서 퀘백 (Quebec) 주 외에는 영어를 쓰고있다. 또한 북쪽에있는 Nunavut 영토 같은경우 캐나다 원주민 (First Nations)들이 많아서 원주민들의 고유어도 많이 쓰인다.2. 캐나다 원주민 (First Canadian, Original Canadian)유일한 캐나다 토착민으로 본래 캐나다 지역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혈통으로 생각되며, 이들을 제외한 모든 인구는 이주민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대서양 해안에 퍼져 있던 인디언은 북아시아계의 황색인종이 캄차카반도에서 베링해협을 건너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토템폴을 받들어 독자적인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카누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기도 하였다고 한다. 내륙지방의 인디언들은 수렵이나 농경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 중 일부는 캐나다에 정착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계속 남쪽을 선택했고 유럽인 탐험가가 도착했을 때 캐나다에는 환경에 따라 유목 생활을 하거나 정착 생활을 하는 사냥꾼, 어부 또는 농부 등 다양한 범위의 토착민들이 존재했다.3. 퀘벡(Quebec)캐나다 동부의 퀘벡주(Quebec)는 1763년의 파리조약에 의해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할양 받은 옛 프랑스 식민지이다. 이 때문에 퀘벡주에서는 영어보다는 프랑스어를 많이 사용한다. 그리고 주민의 80% 이상이 프랑스계로 이루어져 있는 '캐나다 속의 프랑스' 이다.4. 소수민족의 급증캐나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1년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했던 소수민족의 비중이 2006년 16.2%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소수민족의 수가 510만 명 이상인 것으로 나타나며 캐나다 경제에서 주축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남아시아계의 경우 매년 빠르게 신규이민자의 수가 늘고 있고 출산율이 타 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 소수민족 인구 최고를 차지하던 중국계 인구 수(2006년 조사 기준 121만 명)를 제치고 최대의 캐나다에 소수민족 그룹을 형성했다. 현재 캐나다 인구 증가의 70% 이상을 이민자가 차지하고 있을 만큼 향후 캐나다 사회에서의 이민자들의 비중 및 영향력은 지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아시아계 소수민족의 영향력 확대가 더욱 가시화될 것으로 예상된다.캐나다 이민사회의 소수민족 확대는 캐나다 사회의 인구통계학적 변화를 초래, 캐나다 소비문화 및 패턴에 대한 영향력이 지속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소수민족 사회가 캐나다 사회에 끼치는 경제적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특정 소수민족만을 대상고객으로 하는 제품 및 서비스 개발, 그리고 사업 확대가 주된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향후 캐나다 시장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더욱 다문화적이고 다양성을 지닌 시장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Ⅲ 캐나다의 이민제도1. 왜 캐나다를 선택하는가캐나다 정부는 이민자를 위해 무상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여러 가지 지원프로그램을 시행중이다. 6~12개월간 무료로 언어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며, 월 10만 원 정도만 지불하면 3개월 과정의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는 재교육기관도 매우 다양하다. 이민자를 위한 여러 가지 혜택 외에 캐나다 이민법이 미국과 비교해 훨씬 덜 까다로운 점도 캐나다 이민을 증가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우선 미국은 취업이민에 여러 단계의 순위를 정해놓고, 전체 취업이민자 수를 쿼터제로 묶어 놓았다. 예를 들면 전체 취업이민자 몇 명, 그중 1순위는 몇 명 하는 식으로 이민자 수를 할당하는데 순위가 낮을수록 할당률이 줄어들기 때문에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취업이민이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반면 캐나다는 학력·경력·직업·나이 등 기본자격 요건을 정해놓고 이를 점수로 환산해 일정 점수가 넘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민이 가능하다. 따라서 캐나다는 미국에 비해 취업이민이 훨씬 쉽고, 인터뷰 면제율도 60~90%에 달할 만큼 이민문호를 개방하고 있다.2. 투자이민인간개발지수(평균수명, 교육수준, GDP 등을 합산하여 삶의 질을 평가)에서 94년 이래 7년 연속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평가된 캐나다는 그 환경에 비해 이민의 문도 넓은 편이다. 그 중 영어권 외의 이민자들이 많이 찾는 루트가 투자 이민인데, 캐나다 경제 발전을 위하여 일정 금액을 선 기여하는 조건으로 영주권을 받는 이민이다. 투자금은 캐나다 정부에서 안전하게 관리하며 지역발전, 사업투자, 고용촉진 등의 용도로 사용된다. 각 나라별 쿼터제로 중국29%, 홍콩23%, 타이완22%, 기타26% 으로 운영되고 있는 투자이민은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히 낮은 조건을 10년간 유지해오다가, 적체현상의 심각화라는 이유로 최근 투자이민 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2010년 6월 25일에 발표된 이 개정안은, 자산규모 80만불에서 160만불, 투자금액 40만불에서 80만불로 두배씩 금액을 인상한다.
세계의 인구 이동 현황1. 인구 이동이란?● 백과사전 : 경제적·문화적·지리적·인구학적 요인에 의해 인구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 국제연합(UN) : 인구이동을 '지리상의 단위지역에 있어서의 지리적 유동성, 즉 공간적 유동성의 한 형태로서 일반적으로 출발지에서 목적지로의 주소변경을 수반하는 것'. 따라서 이 정의(定義)에 따르면 통근이나 계절이동, 품팔이, 단기간의 여행 등은 포함되지 않음. 인구이동은 전출(轉出)과 전입(轉入)을 포함하는 국내 인구이동과 이주를 포함하는 국제 인구이동으로 구별.2. 국제 연합에서 보는 인구이동의 요인(1)경제적 이동: 가장 중요한 인구이동의 목적 을 꼽으라면 당연지사 경제적 목적이다.1) 유럽인들의 식민지 건설: 영국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유럽 각지에서 산업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후, 유럽은 자신들과 교류할 또 다른 나라들이 필요했다. 따라서 풍부한 자원과 넓은 소비시장을 소유하고 있는 오세아니아와 북아메리카, 일명 '신대륙'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로 인하여 식민지 건설 경쟁이 시작 되고, 대규모로 인구가 유입된다.2) 중국의 화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 경제적 활동이 유리한 동남아시아로 중국인들은 향했다. 일명 화교라고 불리는 이들은 동남아시아에 정착하여 돈을 끌어 모았고, 큰 부자로 성장한 이들도 있다.(2)강제적 이동: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끌려간 불쌍한 사람들이다. (전쟁은 제외)1) 흑인: 값싼 노동력, 아니 무료 노동력을 제공했던 흑인들은 남아메리카에 플랜테이션으로 끌려가게 된다. 항해도중 죽는 사람도 많았는데도 현재 남아메리카에 남아있는 흑인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보아서는 그 옛날에는 얼마나 큰 인구이동이었는지가 짐작이간다.2) 조선인: 일제강점기 때의 뼈아픈 역사이다. 일본에 의해 연해주로 강제 이동되었던 우리 민족은 그곳에서 다시 러시아에 의해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로 이동되었다.(3)종교적 이동: 종교의 박해를 받던 민족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떠났다.청교도: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가 청교도를 인정해주지 않자,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기 위해 북아메리카로 간다. 현재 그곳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들은 대부분 이들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4)정치적 이동: 정치적 억압이나 전쟁으로 인한 요인이 포함된다.1)아프리카의 난민: 유럽의 식민지 지배때 부족간의 경계를 무시하고 임의로 그은 국경선이 현재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이 부족간의 전쟁을 일으키면서 난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난민들은 다른 국가로 이주했지만, 그곳에서 또다른 문화적 갈등을 일으키곤 한다.3. 민족 대 이동4세기 말 훈족(族)의 서진(西進)에 자극을 받은 게르만계의 여러 부족이 대규모로 로마제국의 영토 안으로 이주하고,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제국 각지에 정착하면서 여러 부족왕국을 건설하는 6세기 말까지의 200여 년 동안의 과정을 가리킨다.좁은 의미로는 위에서 말한 200년간의 과정을 가리키지만, 게르만 민족은 이미 BC 1000년 이래 원주지인 스칸디나비아반도 남부, 발트해(海) 연안지방에서부터 매우 장기간의 이동 ·정주(定住)의 과정을 반복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라인강 이동(以東), 도나우강 이북의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흑해 북안에 이르는 지역에 널리 퍼져 살고 있었다. BC 2세기 말경부터 로마제국에 대한 침입은 자주 시도되었고, 6세기 말엽의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입, 8세기에서 11세기까지의 노르만인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스웨덴인 등 북게르만계 여러 부족의 유럽 각지에 대한 침입, 아일랜드에의 식민(植民), 키예프 ·러시아의 건국 등(이른바 바이킹의 활동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제2차 민족대이동이라고도 한다)이 있으며, 넓은 의미의 민족대이동은 전후 2,000년에 걸친 오랜 과정으로 볼 수 있다.좁은 의미의 민족대이동이라 부르는 앞에서 서술한 200년간의 과정은 넓은 의미의 민족대이동 중에서도 이동의 규모나 속도 등이 현저하였던 시기이다. 따라서 대이동에 대한 직접원인이 동방의 훈족의 압박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게르만 민족 자체의 내부사정, 특히 인구증가에 의한 토지의 부족 등과 더불어 로마제국의 내부사정에도 관계가 있었다. 로마제국은 당시에 이미 군사적으로 약화되어 있었고 내부적 혼란과 모순으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원인으로 민족대이동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이루어졌던 것이다.4. 백제 이주민들이 이룩한 아스카 문화(1) 배 경7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당시 정치의 중심이 나라분지 남쪽 아스카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이 시대의 문화인 아스카문화는 백제 문명의 연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우리 나라로부터 많은 제도, 문물이 수입되었다. 유교, 불교를 비롯하여 건축, 조각, 회화 등의 대부분이 우리 나라의 학자, 승려, 백제유민 등에 의해 전수되었다.일본의 불교문화가 백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 아직까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일본에서의 백제 불교는 서기 552년 백제 제26대 성왕(聖王·523∼554 재위)의 왜왕실 포교가 최초였다. 이를 이어나간 것은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이름은 昌·554∼598 재위)이며, 위덕왕은 재위 기간 45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실제로 일본에서 백제 불교를 꽃피운 선두주자였다. 그 시대, 즉 일본이 자랑하는 ‘아스카문화’(飛鳥·592∼645) 시대에 일본의 왕은 왜나라 최초의 여왕인 스이코(推古·592∼628 재위) 여왕이었다. 스이코 여왕은 백제 성왕의 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백제 위덕왕과는 이복남매간이었다.일본 불교 왕조사라 할 수 있는 ‘부상략기’(扶桑略記·13세기경)에서는 593년 1월, 당시 한창 건설 중이던 “아스카절 목탑 터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법요를 가졌으며, 만조백관이 백제옷(百濟服)을 입고 있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다”고 쓰고 있다.(2) 유 물(1) 건 축 : 호류사 금당, 오중탑, 중문, 회랑(2) 조 각 : 호류사 금당 석가삼존불, 석가여래상,몽전, 구세관음상, 백제관음상(3) 공 예 : 호류사 다마무시노즈시(4) 문 학 : 역 본 - 간로쿠, 산교노기쇼(법화경과 승만경,유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