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일어난 3대 사화는 훈구와 사림의 권력싸움에서 사림세력이 훈구세력에게 밀려서 화를 당한 것이라 정의한다. 누군가에게 사화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아마 적어도 고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통상적으로 위와 같이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사화와 반정의 시대란 고리타분한 역사적 타이틀과는 달리 이 책은 그동안의 훈구-사림간의 관계에서 벗어난 관점에서 사화를 분석했는데, 거시적 관점으로 본다면 조선의 중앙정치는 국왕과 신하라는 양대 정치세력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리고 개인인 국왕과 달리 신하들은 그 품계의 고하와 직무의 차이에 따라 대신과 삼사로 다시 나누어졌다. 성종대에 접어들면서 삼사의 기능이 확립되면서 정치 제도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대신과 국왕 삼사의 관계가 재정립되게 되었다. 주로 2품 이상의 관원 중에서도 의정부 당상과 육조 판서를 중심으로 한 대신과 감찰을 맡은 사헌부와 국왕에 대한 간쟁을 맡은 사간원에 홍문관이 합류하면서 삼사가 비로소 확립이 되면서 조선의 중앙정치는 국왕. 대신. 삼사라는 세 개의 주요한 정치세력이 시기와 국면에 따라 협력과 대립관계를 줄다리기 했다.이런 복잡한 정치적 구조는 성종부터 중종까지의 세 왕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삼자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 시기의 정치적 변화와 의미를 분석했다.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들며 세부적인 사항을 지적했는데, 첫째, 전근대의 왕정에서 국왕의 영향력은 치세의 전체적 성격과 특징을 일차적으로 규정했다는 사실과 둘째, 대신과 삼사로 양분한 신하들의 영역에서 각 관직의 고유한 임무와 관직체계의 운영원리를 충분히 고려, 셋째, 동시기의 인사행정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 넷째, 각 정치세력의 활동을 객관적으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특히 통상적으로 훈구와 사림이란 도덕적 선악구도로 이분하는 시각이 만연한데 이 책은 그런 점을 배제하고 서술해가는 점이 흥미롭다.책은 크게 성종대에 관한 1장과 연산군에 관한 2장, 중종대의 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화란 사건이 가지는 과정과 성격 의의를 서술하기 전에 앞서 성종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정치적 배경과 상황을 설명해 사화의 원인을 규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입부에 세조대의 정치적 구도와 상황을 간단히 언급해서 자연스레 성종대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세조의 정치적구조(일부 공신들에게만 편중된 권력)는 실제로는 상당히 허약했으며, 대간의 언론을 강력하게 제한했기 때문에 성종 즉위 무렵 대신에 대항할 만한 비판세력의 존재는 미미했다. 25년에 걸친 성종의 치세는 이런 구도에서 출발했다.책은 성종의 정치적 위상과 대신, 삼사의 관계와 그리고 그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빚어진 정치제도의 변화를 통해 세 시기로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 시기는 즉위부터 수렴청정이 끝나고 원상제의 혁파이며 이 시기는 정국 운영 방식의 외형과 실제 모두 왕정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두 번째 시기는 친정의 시작부터 홍문관의 탄핵으로 대신과 대간 전체가 사직을 요청하는 이례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동왕 17년까지이며 이 기간에는 정치적 권력관계가 재편되면서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 시기는 친정을 시작하면서 성종이 왕권을 확립, 왕정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대신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대간의 언론권을 재고시킴으로써 내부세력의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세 번째 시기는 성종 18년부터 치세가 끝나는 시기인데, 이 시기의 정치적 변화는 홍문관의 언관화였다. 삼사의 확립이 이루어졌고 중반부터 커진 대간의 영향력을 견제코자 홍문관의 언관화를 추진하였는데, 이 시기 즉, 성종 후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일어났던 문제점이 연산군대로 이어지면서 사화라는 결과가 일어나기 때문인데, 대간이 과도한 언론권을 행사함으로써 국왕. 대신과 점차 커다란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 시기에 성종이 이루고자 했던 권력의 균형에는 대간에 의해 균열이 가기 시작했으며 갈등의 심화가 점차 증폭되어 연산군대에 폭발하게 된다.연산군대로 이어진 이러한 정치현상을 능상으로 규정했고 연산군대의 모든 정치적 사건과 왕권의 작용은 바로 이 능상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고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는가에 관한 문제였다. 책에서는 또한 연산군의 통치 실패와 국왕.대신.삼사의 관계로 변화로 분석을 했는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기점으로 삼분했다.첫 번째 시기는 연산군 즉위부터 무오사화로써 대간의 강경한 언론활동으로 인해 국왕과 대신이 많은 갈등을 빚은 시기였다.두 번째 시기는 연산군 5년부터 갑자사화까지이다. 무오사화로 대간을 제압한 연산군이 왕권을 점차 자의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연산군의 정치적 노선에 공감했던 대신들도 많은 간언을 올리게 됨으로써 삼사와 비슷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치세력의 권력관계는 국왕이 고립되고 대신과 삼사가 가은 편에 서는 구도로 재편되었고 삼사에 국한되었던 무오사화의 숙청과는 달리 대신 전체에 대한 무차별적 처벌로 퍼지게 된 까닭도 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세 번째 시기는 연산군의 폭정부터 반정으로 폐위된 기간인데, 책은 연산군의 치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연산군이 폭정을 행하게 된 동기와 사화의 원인 분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앞서서 말했듯이 각 정치세력의 활동을 객관적으로 파악했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의 상황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해서 그런 폭정이 나타나게 된 근본적 원인을 규명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야기된 국정의 총체적 난맥상을 수습해 왕권을 회복하고 성종대의 안정된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으로 즉위되었고, 중종대는 정치적인 관계가 훨씬 더 복잡해지는 시기였다. 기묘사림의 등용과 숙청, 권신 김안로의 전횡과 밀지에 의한 제거, 그리고 대윤과 소윤의 형성까지 굉장히 많은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시점이었다.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중종과 대신·삼사는 다양한 성취와 한계를 경험했으며, 그 결과는 대체로 다섯 시기로 구분되어 나타났다. 먼저 첫 번째 시기는 반정부터 조광조 등 기묘사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인 중종 9년까지다. 반정의 영향에 따라 정국공신들이 이 시기의 주도적 정치세력으로 활약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성종 초반 수렴청정 아래서 원상을 중심으로 한 대신들이 정국을 주도했던 국면과 유사했는데 위상을 회복하면서 이런 현상은 점차 바뀌어 갔다.
이 책은 조선 明宗에서 宣祖에 이르기까지의 명재상인 柳成龍이 宣祖25년에 일어난 임진 왜란,정유재란에서 보고, 겪은 것을 바탕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인 宣祖 32년에 관직에서 물러나서 고향인 풍산 하회로 돌아와 전쟁중에 겪었던 成敗의 자취를 곰곰이 반성, 고찰하여 회고록인 懲毖錄을 편찬한 것으로서 현재는 국보132호에 지정되어있다.그의 간단한 약력을 소개하자면 호는 西厓, 본관은 ?山으로 明宗 21년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 權知副正字에 보직되었으며, 선조3년에 弘文館 副修撰이 되었으며 당시의 제일가는 講官으로 인정되었다. 선조23년 우의정에 승진되고 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훈3등에 서록되어 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24년에는 좌의정에 승진되었고 왜란이 발발하자 播遷 과정중 개성에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이내 파면되고 다시 府院君으로 敍用, 이후 그는 난이 끝날 때까지(1598) 四道 都體察使, 三南都體察使로서 외교·군무·민정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본래 징비록이란 서명은 그의 자서 시경에서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뒤에 근심이 있을까 삼가노라’ 고 한 문구에서 인용 한 것인데, 임진란 중의 일을 회고 반성하여 뒷날에는 이런 낭패스런 일이 없도록 미리 조심하자는데 의의를 두고 집필하였다.柳成龍은 그의 자서에서 “나같이 불초한 사람이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중한 책임을 맡아서 위태로운 시국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데도 오히려 전원에서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이 어찌 임금의 관대한 恩典이 아니겠는가? -중략- 이로써 내가 전원에 있으면서도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뜻을 표시하기로 하고, 또한 어리석은 내가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나타내고자 한다.” 는 동기를 표방하며 정국의 최고 책임자로서 전쟁 처리의 잘못을 통감하고 국가에 사죄하는 의미를 엿볼 수 있다.징비록은 16권 6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에서 2권은 전쟁의 起因및 전쟁의 상황을 서술해놓았으며, 3권은 芹曝集 箚·啓, 4권과 5권은 근폭집 계, 6권에서 14권까지는 辰巳錄 狀·계, 15를 흩어놓으니 기생과 악공이 서로 줍기를 다투어 좌석의 질서가 없어지자 나라의 운명을 운운하며 비아냥 거렸다. 이는 전쟁 전에 조선의 무비가 허술하고 나라의 질서가 문란함을 적은 이미 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평수길이 원하는 답을 갖고 돌아오지 못하자 야스히로는 죽임을 당하고 뒤이에 일본국사 평의지가 조선땅을 밟았다. 통신사 파견에 대한 조정의 의논은 결정을 짓지 못하고 머뭇거렸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첨지 황윤길과 사성 김성일을 적임자로 하여금 경인년(宣祖 23년 : 1590) 3월에 평의지 등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신묘년(宣祖 24년 :1591)봄에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한 반면 김성일은 “그러한 징조를 보니 못했다.”라는 의견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 때 통신사가 가져온 왜의 국서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에 뛰어 들어가겠다.”라는 내용이 존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묘년(1591) 여름에 평의지가 부산포에 와서 변장에 말한 내용에 “일본은 명나라와 국교를 통하고자 하는데, 만약 조선이 이를 위하여 그 뜻을 알려주면 아주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두 나라는 장차 화기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큰일인 까닭에 와서 알려 드립니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찍부터 왜는 군사를 도모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상황을 감지하고 조선의 조정에서는 왜국의 움직임을 근심하여 변방을 수비하는 일에 밝은 재신들을 가려서 하삼도를 순찰하여 이에 대비케 하였고 성을 새로 쌓는가 한편 증축하기도 하였다. 이때는 세상이 태평스러운지가 이미 오래되어, 중앙과 지방이 다 편안한데 젖어있었으므로 백성들은 성 쌓는 일과 같은 노역에 원망하는 소리가 가득했다.임진년 4월 13일 왜적의 배가 대마도로부터 온 바다를 덮고 건너왔고 부산에 상륙하자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은 임무를 지켜 목슴을 버렸으나 나머지 수신과 진장들은 도주하였으니 관군은 붕괴상태에 이르렀다.亂이 일어나자 민심은 극도로 離叛되어 서울에허진과 장단부사 구효연이 支待差使員으로 그곳에 와 있으면서 간략하게 임금에게 올릴 음식을 마련하였는데, 호위하는 사람들이 종일토록 굶고 온지라 난잡하게 주방으로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빼내어 먹어서 장차 임금에게 올릴 음식이 없어졌다. 이를 본 허진과 구효연은 두려워하여 도망하고 말았다.5월 3일에는 왜적이 서울에 들어오고, 유도장과 도원수는 도망하였고 宣祖는 개성을 지나 7일에는 평양으로 들어갔다. 왜적은 뒤따라 함경도로 들어오고 두 왕자가 적의 수중에 잡히게 된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께 회령부에 이르렀는데, 회령부의 아전 국경인은 그 무리를 거느리고 배반하여, 먼저 왕자와 종신을 결박하여 왜적을 맞아들였다.한편 명에서는 사자를 보내어 왜적의 정세를 탐지하였고 왜적이 선조를 뒤따라 대동강에 이르자 宣祖는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였고 주요대신은 평양에 머물러 성을 지켰다. 임금이 평양성을 나온 뒤로부터 인심은 더욱 더 허물어져서 지나는 곳마다 난민들이 문득 창고로 들어가서 곡물을 약탈하여 順安·安州·寧邊의 창고가 차례로 다 허물어져 버렸다. 宣祖가 의주에 이르자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명나라의 구원병 5천명이 평양성을 치다가 실패하였다.계속되는 육지의 패배속에서 전라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은 적병을 거제도 바다 가운데서 크게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순신은 앞서 거북선을 창조하였는데, 거북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징비록에 수록되어있다.거북선은 널판자로 배 위를 덮어 그 모양이 활처럼 가운데가 높고 주위가 차츰 낮아져서 거북과 같았고, 싸우는 군사들과 노 젓는 사람들은 다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활동하고, 왼쪽 오른쪽 앞뒤에는 火砲를 많이 싣고 마음대로 이리저리 드나드는 게 마치 베짜는 북 드나들 듯하였다.책에는 이순신의 수군이 서해바다 장악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것이 가지는 의의를 명시하고 있는데, 적의 장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평양까지 뒤따라 와서 우리 조정에 글을 보내어 “일본의 수군 10여만명이, 서쪽 바다로 오는 중이니 대왕의 행차가 어디로양지도를 꺼내들어 그 지방의 형세와 군사적 요충지를 의논하여 宣祖 26년 정월에 명군이 평양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평양을 수복할 수 있었다.의병의 활동임진왜란은 왜의 침략을 받아 국토가 황폐화된 전쟁이라고 단순하게 단정 짓기보다는 무능력한 조정과 관군을 대신하여 각 道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왜적을 토벌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전라도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김천일과 고경명 최경희였다. 경상도에서는 곽재우와 김면, 정인홍이 그 주요 인물이었고 충청도에서는 승병 영규와 조헌 등이었다. 경기도에서는 사간 출신인 우성전과 남언경, 또한 강원도에서는 사명대사인 유정이 금강산에서 왜군과 맞섰고 북도에서는 정문부와 고경민의 공이 가장 뛰어났다.특정 道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주목 할만한 점은 지방의 사족과 유생이 중심이 되어 民을 이끌었다는 점과 예외적으로 승려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점이다.명의 李如松은 평양을 수복한 후에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파주로 나아가 왜적과 벽제의 남쪽에서 싸웠으나 불리하여 개성으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이후 이여송은 전투를 피하면서 병을 핑계로 왜적을 뒤쫓지 않고 두려워하였다.4월 20일에는 서울이 수복되어 柳成龍은 명군과 함께 서울로 들어왔는데, 처참한 도성의 상황은 징비록에선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성 안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백 명에 한 명 꼴도 살아남아 있지 않았고, 그 살아 있는 사람도 다 굶주리고 야위어 병들고 피곤하여 낯빛이 귀신과 같았다. 이때는 날씨가 몹시 무더웠는데, 죽은 사람과 죽은 말이 곳곳에 드러난 채 있어서, 썩는 냄새가 성 안에 가득 차서 길을 다니는 사람들이 코를 막고서야 지나갈 형편이었다.관청(公)과 사사(私)집 할 것 없이 하나도 없이 다 없어져 버리고, 오직 숭례문으로부터 동쪽에서 남산 밑 일대에 왜적들이 거처하던 곳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 宗廟와 세 대궐 및 종루·各司·館學등 큰 거리 이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타서 없어지고 오직 재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柳成龍은 李如松에게 왜적이 곤궁하여졌다.이때의 형세는 왜적은 남하하고 관군이 추격하는 형세였으나, 아직 왜적의 세력은 강건하였고 조선의 군사들은 무능력하고 군량도 감당할 수 없는 처지였다.10월(1593)에 宣祖는 서울로 돌아왔고 이에 앞서 沈惟敬등이 일본에 다녀가며 관백을 만나 협상의 조짐을 띄기 시작했다.조정에서는 柳成龍이 천거한 李舜臣에 대한 관점이 양분되어서 柳成龍의 반대세력은 원균등과 합세해 李舜臣을 강력히 공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문을 행한 후에 사형을 감하여 관직을 삭탈하여 권율의 막하로 가서 白衣從軍케 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는 원균으로 봉해졌으나, 원균이 패하여 한산도 수군이 무너지고, 원균은 사망하였다. 때문에 이순신을 기용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삼고 선조 31년(1598) 10월에 명나라 제독 유정이 순천적영을 쳤는데, 이순신은 적의 구원병을 노량 앞 바다에서 크게 깨뜨리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적장 코니시는 성을 버리고 도망했으며, 부산·울산·하동·연해에 진쳤던 적군도 모두 물러갔다. 이순신은 명나라 장수 陳璘과 함께 海口를 끼고 닥쳐 오니 코니시는 사천에 있는 시마도노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진격해 크게 깨뜨리니 적선 2백여 척을 불살르고 적병을 무수히 죽였다. 추격하여 남해 지경까지 이르러 싸우던 중, 날아오는 탄환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나갔다. 좌우 사람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가 말하길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말라.”하고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노량해전이상이 전쟁의 기인 및 전쟁의 상황을 서술한 1권과 2권의 전문이다.제3권에서 제5권까지는 「芹曝集」이란 편명으로 임진년에서 병신년까지의 군국정무에 관한 箚·啓 등 문자를 수록한 것이다. 임진년 9월에 올린 시무를 진술하는 箚子에서는 撻子가 왜란을 구원한다는 주장에 안녹산, 사사명의 난을 예로 들며 군사를 많이 동원하여 압록강변에 주둔하면 명분은 구원이나 그 이면을 알 수 없다 하며 달래어 오는 수고를 끼치지 않을 것을 주장하며 宣祖에게 글을 니다.
童蒙先習동몽선습天地之間 萬物之衆 惟人最貴 所貴乎人者 以其有五倫也천지지간 만물지중 유인최귀 소귀호인자 이기유오륜야▶ 천지 사이에 있는 만물의 무리 가운데에서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다.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다.是故 孟子曰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人而不知有五常 則其違禽獸不遠矣시고 맹자왈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인이불지유오상 칙기위금수불원의▶ 이 때문에 맹자(孟子)께서는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는 친애(親愛)함이 있어야 하며,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義理)가 있어야 하며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구별(區別)이 있어야 하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하며 친구 사이에는 신의(信義)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면서 오상(五常)이 있음을 알지 못하면 짐승과의 차이가 크지 않을 것이다.然則 父慈子孝 君義臣忠 夫和婦順 兄友弟恭 朋友輔仁然後 方可謂之人矣연칙 부자자효 군의신충 부화부순 형우제공 붕우보인연후 방가위지인의▶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며, 임금은 신하에게 의리를 지키고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하며, 남편은 가족을 화합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형은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형을 공경하며, 친구 사이에는 인(仁)을 도와준 뒤에야 비로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父子 天性之親 生而育之 愛而敎之 奉而承之 孝而養之 是故 敎之以義方 弗納於邪 柔聲以諫 不使得罪於鄕黨州閭부자 천성지친 생이육지 애이교지 봉이승지 효이양지 시고 교지이의방 불납어사 유성이간 불사득죄어향당주려▶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정해준 친한 관계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사랑하고 가르쳐야 하며, (자식은) 부모를 받들어 부모님의 뜻을 이어가고 효도하면서 봉양해야 한다. 이 때문에 (부모는) 자식을 올바른 도리로 가르쳐서 부정한 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해야 하며, (자식은) 부모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려서 고을에서 죄를 얻지 않게 해야 한다.苟或 父而不子其子 子而不父其父 바로잡아 땅이 하늘에 순종하는 도리를 받든다면 집안의 도리가 바로 서게 될 것이다. 만약 이와 반대로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제어하지 못하여 올바른 도리로 다스리지 못하고, 아내가 남편의 약점을 틈타 올바른 도리로 섬기지 않아서 삼종(三從)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칠거(七去)에 해당하는 악행이 있으면 집안의 법도가 무너질 것이다.須是夫敬其身 以帥其婦 婦敬其身 以承其夫 內外和順 父母其安樂之矣수시부경기신 이수기부 부경기신 이승기부 내외화순 부모기안악지의▶ 모름지기 남편은 자기 몸을 삼가서 아내를 잘 거느리고, 아내는 자기 몸을 공경하여 남편을 잘 받들어서 내외가 화순해야 부모님께서 편안하고 즐거워하실 것이다.昔者 ?缺? 其妻?之 敬 相待如賓 夫婦之道 當如是也 子思曰 君子之道 造端乎夫婦석자 극결누 기처엽지 경 상대여빈 부부지도 당여시야 자사왈 군자지도 조단호부부▶ 옛적에 극결(缺)이 밭에서 김을 매고 있을 때, 그 아내가 새참을 내왔는데 서로 공경하여 상대하기를 마치 손님 모시듯 하였으니, 부부간의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자사(子思)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의 도리는 부부 사이에서 비롯된다.”고 하셨다.長幼 天倫之序 兄之所以爲兄 弟之所以爲弟 長幼之道 所自出也 蓋宗族鄕黨 皆有長幼 不可紊也장유 천륜지서 형지소이위형 제지소이위제 장유지도 소자출야 개종족향당 개유장유 불가문야▶ 어른과 아이는 하늘이 차례 지어 준 관계이다. 형이 형 노릇하고 아우가 아우 노릇 하는 것이 어른과 어린이의 도리가 비롯된 유래이다. 종족과 향당에는 모두 어른과 아이가 있으니, 이를 문란 시켜서는 안 된다.徐行後長者 謂之弟 疾行先長者를 謂之不弟 是故 年長以倍 則父事之 十年以長 則兄事之 五年以長則肩隨之 長慈幼 幼敬長然後 無侮少陵長之弊 而人道正矣서행후장자 위지제 질행선장자를 위지불제 시고 년장이배 칙부사지 십년이장 칙형사지 오년이장칙견수지 장자유 유경장연후 무모소릉장지폐 이인도정의▶ 천천히 걸어서 어른보다 뒤에 쳐져 가는 것을 공손한 태도라고 이르고, 빨리 걸어서 어른보다 앞서 걸어가는 것을孝爲百行之源차오품자 천서지전 이인리지소고유자 인지행 불외호오자이유효위백행지원▶ 이 다섯 가지 일은 하늘이 펼쳐 준 모범이고 사람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도리이다. 사람의 행실이 이 다섯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오직 효도가 모든 행실의 근원이 된다.是以 孝子之事親也 鷄初鳴 咸漱 適父母之所 下氣怡聲 問衣寒 問何食飮 冬溫而夏? 昏定而晨省 出必告 反必面 不遠遊 遊必有方 不敢有其身 不敢私其財시이 효자지사친야 계초명 함수 적부모지소 하기이성 문의한 문하식음 동온이하청 혼정이신생 출필고 반필면 불원유 유필유방 불감유기신 불감사기재▶ 이 때문에 효자가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첫닭이 울면 모두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기운을 낮추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옷이 더운지 추운지를 여쭈며, 무엇을 잡수시고 마시고 싶은지를 여쭈며,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돌봐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여쭈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부모님을 대면하며, 멀리 나가 놀지 않으며 나가 놀되 반드시 일정한 장소를 두며, 감히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감히 재물을 자기 것으로 사유하지 않는다.父母愛之 喜而不忘 惡之 懼而無怨 有過 諫而不逆 三諫而不聽 則號泣而隨之 怒而撻之流血 不敢疾怨 居則致其敬 養則致其樂 病則致其憂 喪則致其哀 祭則致其嚴부모애지 희이불망 악지 구이무원 유과 간이불역 삼간이불청 칙호읍이수지 노이달지류혈 불감질원 거칙치기경 양칙치기악 병칙치기우 상칙치기애 제칙치기엄▶ 부모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시거든 기뻐하되 잊지 않으며 미워하시거든 두려워하되 원망하지 않으며, 부모님께서 과실을 저지르시면 말리되 거스르지 않으며 세 번 간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시거든 부르짖고 울면서 따르며, 부모님께서 노(怒)하여 종아리를 때려 피가 흐르더라도 감히 미워하거나 원망치 않으며, 거처할 때에는 공경함을 극진히 하고, 봉양할 때는 즐거움을 극진히 하고, 병환이 드셨을 때는 근심을 극진히 해야 하고, 상(喪)을 당해서는 슬冠百王 孔子定書 斷自唐虞소호 전욱 제곡 제요 제순 시위오제 고기직계 좌요순 이요순지치 탁관백왕 공자정서 단자당우▶ 소호(少昊)와 전욱(?頊)과 제곡(帝?)과 요(堯)임금, 순(舜)임금을 오제라 한다. 고요(皐陶)와 기(夔)와 직(稷)과 설(契)이 요·순을 도와 정치가 모든 왕의 으뜸이 되었다. 공자(孔子)께서 서경(書經)을 정리할 때에 당(唐)·우(虞)시대로부터 단정하셨다.夏禹 商湯 周文王武王 是爲三王 歷年 或四百 或六百 或八百 三代之隆 後世莫及 而商之伊尹傅說 周之周公召公 皆賢臣也 周公 制禮作樂 典章法度 粲然極備하우 상탕 주문왕무왕 시위삼왕 역년 혹사백 혹육백 혹팔백 삼대지륭 후세막급 이상지이윤부설 주지주공소공 개현신야 주공 제례작악 전장법도 찬연극비▶ 하(夏)나라 우왕(禹王)과 상(商)나라 탕왕(湯王)과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武王)을 삼왕(三王)이라 일컫는다. 지나온 햇수가 혹은 400년이며 혹은 600년이며 혹은 800년이었다. 삼대의 융성함을 후세에는 미칠 수가 없었으며, 상나라의 이윤(伊尹)이나 부열(傅說), 주나라의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모두 어진 신하였다. 주공(周公)이 예를 만들고 음악을 만드시니 전장(典章)과 법도가 지극히 찬란하게 갖추어졌다.及其衰也 五覇?諸侯 以匡王室 若齊桓公 晋文公 宋襄公 秦穆公 楚莊王 迭主夏盟 王靈不振급기쇠야 오패루제후 이광왕실 약제환공 진문공 송양공 진목공 초장왕 질주하맹 왕령불진▶ 주(周)나라가 쇠할 때에 미쳐 오패(五覇)가 제후들을 이끌어 왕실을 바로 세웠으니 제환공과 진문공과 송양공과 진목공과 초장왕이 차례로 중하의 맹세를 주장하였으니 왕의 위엄이 떨쳐지지 못했다.孔子以天縱之聖 轍環天下 道不得行于世 刪詩書 定禮樂 贊周易 修春秋 繼往聖, 開來學而傳其道者 顔子曾子 事在論語 曾子之門人 述大學공자이천종지성 철환천하 도불득행우세 산시서 정례악 찬주역 수춘추 계왕성, 개래학이전기도자 안자증자 사재론어 증자지문인 술대학▶ 공자(孔子)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수레바퀴 자국이 천하를 두루 돌았으나 도(道)가 세상에낙(洛)·관(關)·민(?)에 여러 현인들이 무리로 나오니니, 주돈이(周敦)와 정호(程顥)와 정이(程?)와 사마광(司馬光)과 장재(張載)와 소옹(邵雍)과 주희(朱熹) 같은 학자들이 서로 이어 일어나 이 유학의 도를 밝히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로 삼았지만 자기 몸도 용납 받지 못했다. 주자(朱子)가 제가(諸家)의 학설을 모아서 사서와 오경을 내셨으니 배우는 자들에게 공이 있음이 크다.然而 國勢不競 歷年三百 契丹 蒙古 遼 金 迭爲侵? 而及其垂亡 文天祥 竭忠報宋 竟死燕獄연이 국세불경 역년삼백 거란 몽고 요 금 질위침일 이급기수망 문천상 갈충보송 경사연옥▶ 그러나 국가의 힘이 강하지 못하여 왕조의 수명이 300년에 그쳤으니 거란과 몽골과 요(遼)와 금(金)이 차례대로 침략하고 망조를 드리움에 미쳐 문천상(文天祥)이 충성을 다하여 송(宋)나라에 보답하다가 마침내 연나라의 옥에서 죽었다.胡元滅宋 混一區宇 綿歷百年 夷狄之盛 未有若此者也 天厭穢德 大明中天 聖繼神承 於千萬年호원멸송 혼일구우 면력백년 이적지성 미유약차자야 천염예덕 대명중천 성계신승 어천만년▶ 오랑캐인 원(元)나라가 송(宋)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면면히 백년을 이어갔으니 오랑캐의 성함이 이 때만한 적이 없었다. 하늘이 더러운 덕을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대명(大明)이 천운에 맞아 성인(聖人)과 신인(神人)이 계승하였으니 아! 천만년을 이어가리로다.嗚呼 三綱五常之道 與天地 相終始 三代以前 聖帝明王 賢相良佐 相與講明之 故 治日常多 亂日常少 三代以後 庸君暗主 亂臣賊子 相與敗壞之 故 亂日常多 治日常少 其所以世之治亂安危 國之興廢存亡 皆由於人倫之明不明如何耳 可不察哉오호 삼강오상지도 여천지 상종시 삼대이전 성제명왕 현상량좌 상여강명지 고 치일상다 란일상소 삼대이후 용군암주 란신적자 상여패괴지 고 란일상다 치일상소 기소이세지치란안위 국지흥폐존망 개유어인륜지명불명여하이 가불찰재▶ 아!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도리는 천지와 더불어 서로 종시를 같이 하니, 삼대(三代) 이전에는 성스러운 임금, 명철한 군주와 어진 재상과 뛰어난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루소의 사회계약론 비교 연구- 홉스의 절대군주: 人爲 vs 루소의 자연상태: 無爲: -Ⅰ. 머 리 말Ⅱ. 홉스와 루소ⅰ) 홉스의 생애와 리바이어던ⅱ) 루소의 생애와 사회계약론Ⅲ. 루소와 홉스의 주권론의 비교ⅰ) 루소의 국민 주권론ⅱ) 홉스의 군주 주권론Ⅳ. 맺 음 말Ⅰ. 머 리 말오늘날 한국인은 ‘사상’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선 ‘사상’이라는 그 자체가 너무 지루하고 어렵게 들리며, 보다 중요한 것은 ‘사상’=‘철학’이라는 인식이 한국인에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인문학으로 확대·적용 시켜보면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위협’의 길로 치닫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우리나라는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민주주의가 왜, 어디서 출발했는지 우리는 대부분 모르고 있다. 불과 30-40년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자유’를 억압당하는 사회였다. 따라서 우리는 ‘유신’, ‘삼청 교육대’ 그리고 6·10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빼앗긴 ‘자유’를 보장받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그런데 ‘자유’라는 말은 대한민국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은 ‘자유’를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게 된 것인가. 그리고 그 출발점은 어디인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홉스와 루소가 살았던 17-18세기 중·후반은 종래 르네상스 문화에서 근세로 이행하는 격변기이었다. 즉 홉스가 살았던 당대 영국에서는 국왕과 의회의 대립으로 인한 청교도 혁명으로 정치적으로 상당히 혼란한 시기였다. 이에 홉스는 ‘어떻게 하면 정치 공동체의 평화를 확립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 이에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저술하였다. 즉, 홉스는 리바이어던 통해 자유 상태에 있는 개인을 방치한다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빠진다고 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주장을 내세우게 된다.프랑스 태생은 루소는 어린 시절 가정이 몰락하게 된다. 13살의 나을 맺는 기회를 갖게 된다. 1636년 피렌체에 있는 말년의 갈릴레오를 방문한 홉스는 물리학에서 거둔 방법론의 성공을 사회철학에 적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1640년 5월 5일 의회가 해산되는 등 영국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고 시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중 홉스의 최초의 정치론인 『법의기초』가 초고 형태로 회람된다. 이해 가을 장기 의회(Long Parliament)가 결성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홉스는 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 여행을 떠난다. 1641년 11월 1일자로 『시민론』이 디본셔 공작에게 헌정된다. 1642년 영국 시민전쟁이 시작되고, 파리에서 원 제목이 였던 『시민론』이 출판되었다.1645년 존 브럼홀(John Bramhall) 감독을 만나 ‘의지와 자유’, ‘자유와 필연’의 문제로 철학적 논쟁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논쟁은 1668년까지 계속되게 된다. 1647년 후에 찰스 2세가 될 웨일즈의 황태자(Prince of Wales)의 수학교사로 지명된다.1651년 5월 홉스의 대표작 『리바이어던』이 런던에서 출판된다. 1654년 2월 홉스는 11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Ecclesiasticall and Civil』 ? commonly referred to as Leviathan ? is a book written by Thomas Hobbes (1588?1679) and published in 1651. Its name derives from the biblical Leviathan. The work concerns the structure of society and legitimate government, and is regarded as one of the earliest and most influential examples of social contract theory. Written during the English Civil War (1642?1651), Leviathan argues fo대표민주주의를 설명했다. 그리고 후반부인 제3부는 「크리스트교 국가론」, 제4부는 「암흑의 세계론」으로, 제3, 4부는 교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인간의 최고 가치를 ‘자기보존’으로 보았다. 따라서 홉스는 전통적 권위나 신의 이름에 의한 비합리적인 지배는 배제되어야 하기때문에 진정한 권력의 기초는 사회 구성원의 동의(계약)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정치권력은 폭력이 아니라 정당한 권위에 의해 행사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권력 운용은 모든 구성원의 이익과 깊이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인권과 권력의 상호의존 관계를 해명한 근대 민주주의 국가론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ⅱ) 루소의 생애와 사회계약론루소는 1712년 프랑스 태생의 시계공이었던 이삭 루소의 둘째 아들로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많은 불행 가운데서 최초의 것이었다.”고 루소가 술회하듯 일생동안 겪은 불행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책을 매우 좋아했던 아버지는 형과 루소에게 소설, 역사 그리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어주곤 하였다. 이 책을 통해 루소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덕과 위대함에 감명 받았다. 훗날 그는 이때의 독서로 자의식을 끊임없이 전개시킬 수 있었으며 세파에 부딪치면서도 자신의 안목으로 사회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루소가 10살 때 아버지는 하찮은 싸움 끝에 제네바를 떠나야했다. 이로 인해 두 아들은 고아가 되었다. 루소는 캘빈주의 목사에게 의탁되어 약간의 초보적인 교육을 받았다. 13살의 나이에 조각가의 도제로 들어갔으나 주인의 횡포와 속박으로 많은 고통과 번민 속에 살았다.1728년 16살의 루소는 고향을 떠나 프랑스로 향함으로써 긴 방랑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루소는 무질서와 번민 속에서 방황했지만 훗날 사상의 방향을 결정짓는 귀중한 사실들을 체험하게 된다. 도제제도의 부조리와 주인의 횡포, 절대주의 아래에서 자행되었던 특권계급의 타락과 만행, 짓밟힌 수많은 민중들의 고통, zed about the best way to establish a political community in the face of the problems of commercial society, which he had already identified in his Discourse on Inequality (1754).The Social Contract helped inspire political reforms or revolutions in Europe, especially in France. The Social Contract argued against the idea that monarchs were divinely empowered to legislate; as Rousseau asserts, only the people, who are sovereign, have that all-powerful right.-사회계약론은 원어로 Du contrat social로 불리운다. 사회계약론을 간단히 평하자면 루소는 인용문에서도 나타내듯이 홉스의 일인독재와는 대조적으로 주권을 가진 사람이 모든 힘의 권리를 지닌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사회계약론』에서 루소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도처에서 속박되어 있다”라는 말로 서두를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루소가 의도하는 바는 이러한 사회적 속박을 제거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로웠던 자연 상태를 전제하면서 루소는 ‘이러한 원시적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현재의 사회질서를 어떻게 정당화 하는가’에 대한 답을 사회 또는 국가가 개인들 간의 계약으로 성립되었다는 계약이론에 있다.홉스가 제기한 사회계약론은 로크와 루소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루소가 이전의 사회 계약론자들과 뚜렷하게 다른 점은 모든 권력이 국민의 주권에서 나온다는 ‘국민주권’의 원리를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국가의 주권은 신으로부터 주권자에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지만 홉스의 주장처럼 주권자자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인정하고 구성원은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정리하자면, 결국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절대 권력, 즉 군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개인의 자율성을 군주가 통제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군주주권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홉스는 그가 확립한 무제한의 주권사상을 전제로 하여 군주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시민의 이기심을 억제하는 것으로써 공동체의 범적 평화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다고 할 것이다.ⅱ) 루소의 국민주권론루소는 로크처럼 자연 상태를 전제로 하여 국가의 성립을 설명하고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통일적 지배권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고 원하는 것을 언제나 얻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타인과의 분쟁이 발생할 때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구성원들 간의 계약으로 사회를 형성한다고 하였다.It follows from the above that the general will is always in the right and inclines toward the public good, but it does not follow that the deliberations of the people always have the same rectitude. People always desire what is good, but they do not always see what is good. You can never corrupt the people, but you can often fool them, and that is the only time that the people appear to will something bad....If, assuming that the people were sufficien 있다.
목 차서 론Ⅰ.헤로도토스의 생애 및 저술 배경Ⅱ. 『역사』의 내용과 관점Ⅲ. 역사의 탄생A. 이야기와 구별되는 역사의 등장B. 사료 수집 및 비판을 통한 역사 기술Ⅳ. 맺음말-참고문헌서 론태초부터 역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의 탄생은 인간이 자신의 살의 자취를 연구·조사하여 산문으로 기록할 때 이뤄졌으며, 이에 서양에서 역사를 탄생시킨 아버지가 있다. 서양에서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0년경에 출생하여 기원전 429년경에 사망한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헤로도토스가 Historiai를 집필하므로써 역사라는 장르가 생겨났다. 최초의 역사가로 일컫어지는 헤로도토스는 그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세계사를 집필하게 되었다.헤로도토스는 어떤 연유로 역사를 썼을까? 헤로도토스는 사촌의 반란 사건으로 고향에서 추방된 정치적 망명자였다. 기본적으로 역사가란 삶 속에서 좌절과 시련을 많이 겪음으로써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인생의 좌절을 체험하고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목적으로 과거사를 탐구함으로써 운명적으로 역사가가 된 경우가 많다. 헤로도토스는 개인적인 불행을 역사를 쓰는 에너지로 전환시켰기 때문에 사학사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역사가가 되었다.역사란 인간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방식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여러 방식이 있고, 그것은 변화하며 발전해왔다. 세상에서 최초의 방식은 구술문화의 전통 하 형성된 신화였다. 신화는 자연현상과 인간 삶에 대해 인간이 던진 질문에 대한 최초의 답으로서, 이는 서사시의 형태로 전승됐다. 문자문화로의 이행과 더불어 음유시인에 의해 구전도어 온것을 문자로 기록 정리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그리고 헤시오도스 『신통기』가 나타났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이행은 사실을 전달하는 데 적합한 산문을 출현시켰고, 이로써 로고그라포이라고 불리는 산문작가들이 등장했다. 산문작가의 등장으로 지식 페러다임이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전환하고, 이와 더불어 epos 시대가 종경의 수이다스(Suidas) 사전에 그의 생애에 대한 짤막한 요약이 수록되어 있다.-Herodotus identifies himself in the prologue to his work as a native of Halicarnassus (on the south-west coast of Asia Minor, modern Turkey) and this is accepted as his birth place even though Aristotle and the Suda claim his was a native of Thurii. This discrepancy is generally understood as a mistake made in an ancient source (possibly a translation of Herodotus’ work) as Herodotus may have lived on the island of Thurii but not been born there.-헤로도토스의 출신지는 소아시의 할리카르나소스였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도 스스로를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이라고 밝힌 바 있고 대부분의 문헌도 그렇게 적고 있다. 그러나 일부 문헌에서는 헤로도토스를 투리(Thurii)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를 투리 인으로 부른 것은 그가 투리의 식민사업에 참여했던 일과 연관되어 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헤로도토스가 투리에 거주하며 투리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를 ‘투리의 헤로도토스’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헤로도토스를 투리 인으로 여겼던 이유는 바로 그런 변화 때문이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가 기원전 420년 대의 저술인『역사』에서 자신을 할리카르나소스 인으로 기록한 것을 보면, 스스로를 할리카르나소스 인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한때 투리에 식민하여 투리 인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출신지인 할리카르나소스를 자신의 조국으로 여겼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역사』에서 할리카르나소스에 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 같다.그의 책 제목인 ‘역사’는 그리스어 ‘히스토리아’는 ‘탐구,추구’ ‘탐구를 통해 얻은 지식’, ‘탐구결과에 대한 서술’ 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처럼 ‘역사(학)’ 영역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지식 영역에서의 ‘탐구’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당시 그리스는 탐구의 시대라 할만 했다. 그리스에서의 탐구의 전통은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 지방의 자연철학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 자연철학자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신화적 설명방식을 비판하고 합리적 추론을 통해 자연계의 만물의 근원을 밝히고자 했다. 비록 그들의 주장이 과학적인 논증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적어도 기존의 설명을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탐구정신의 본보기가 되었다. 자연철학의 탐구정신은 기원전 5세기의 소피스트 운동으로 이어졌다. 소피스트들은 자연 대신 인간사회를 탐구대상으로 삼았고, 합리적 사유를 통해 전통적 가치를 부정하기도 했다. 헤로도토스는 그러한 탐구의 전통 속에서 자신의 분야를 개척할 수 있었다. 그는 사모스에서 머물며 이오니아 문화에 접할 수 있었고, 『역사』를 저술할 때에도 이오니아 방언을 사용했다. 그는 자연철학자 중의 한 명인 텔라스를 합리적인 현인으로 묘사 했으며, 그리스 인과 이방인이 전쟁에 대해 그 경과뿐 아니라 전쟁의 원원을 규명하고자 했다. 또 그는 호메로스 등의 서술내용을 선별적으로 수용했으며 수집한 자료들을 평가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은 그의 저술이 당시 그리스의 탐구 전통의 영향하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그런데 헤로도토스의 탐구 결과인 『히스토리아이』는 그 주제나 서술 형식에서 특별한 양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이 탐구활동은 인간의 과거 행적에 대한 것이었고 탐구결과도 운문이 아니라 산문으로 서술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서술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등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그의 저술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였다. 그 이전의 로고그라포이그의 저서 Histories의 내용 中 일부분이다.-Babylon lies in a great plain, and in size it is such that each face measures 22½ km, the shape of the whole being square; thus the circumference is 90 km. Such is the size of the city of Babylon, and it has magnificence greater than all other cities of which we have knowledge. First there runs round it a deep and broad trench, full of water; then a wall fifty meters in thickness and hundred meters in height [...]. At the top of the wall along the edges they built chambers of one story facing one another; and between the rows of chambers they left space to drive a four-horse chariot. In the circuit of the wall there are set a hundred gates made of bronze. (Histories, I.178-179)-앞서 기술하였듯이, 헤로도토스의 역사저술이 있기 전까지는 지역적인 특징과 정확한 지리적 정보를 알기는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헤로도토스는 바빌론 지역에 대해 위 원문을 참고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정확한 수치와 주요 지형지물을 상세하게 설명하여 역사적 진보에 굉장히 큰 이바지 하였다고 볼 수 있다.또한 헤로도토스의 서술은 이방인의 역사와 문화를 주로 서술하면서도 여담식으로 간간히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이전의 그리스의 초기 역사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테네의 경우에는 참주정의 성립 및 붕 자신의 관습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대한 증거로 그리스인과 칼라티아이라는 인토인의 각자 자신들의 장례풍습을 버리지 않고 고수하려 했던 일화를 소개한다. 헤로도토스는 이처럼 이방인의 풍습과 가치의 소중함을 인정하는 일면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Ⅲ. 역사의 탄생A. 이야기와 구별되는 역사의 등장헤로도토스는『역사』저술을 통해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고자 했다. 여기서 헤로도토스가 강조했던 것은 탐구와 기억 두가지다. 탐구가 과정으로서 방법이라면, 기억은 결과로서 목적이 된다.과거사에 대한 인간 중심적 탐구가 역사 탄생의 결정적 계기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처럼 전승된 이야기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건의 인과관계를 그것을 목격했던 사람들의 증언과 구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명하는 이야기를 씀으로써 역사가 탄생했다. 이런 역사를 헤로도토스는 ‘탐사 보고서(histories apodeksis)'라고 지칭했다. 여기서 앞의 ‘탐사’ 이상으로 주목해야 할 표현이 뒤의 ‘보고서’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의 용어로 말하면, 전자가 역사연구라면 후자는 역사서술에 해당한다. 연구만 하고 서술하지 않는 다면 역사는 기억의 기능을 행하지 못한다.과거는 없고 이야기(logos)만이 존재한다. 구술을 매체 하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할 때마다 스토리가 달라지는 특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가이다. 헤로도토스의 Historiai는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에 대한 이야기들(logoi)을 탐구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그는 제 1장 서언에서 전쟁 발단의 책임에 대한 페르시아 측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는 제1권 1장을 “페르시아 학자들에 따르면, 헬라스인과 비헬라스인들이 반목하게 된 것은 포이니케인(페니키아인)들 탓이라고 한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지중해연안에 정착하여 해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