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최한기, 그는 누구인가 ?`Ⅰ.서론 - 그는 누구인가-----------------p.1~31.우리나라교육자, 왜 그를 선택했는가----------p.12.생애와 사회적시대배경--------------------p.1~23.실학을 말하는 사람 ----------------------p.2~3Ⅱ.본론 - 학문의 내용-------------------p.3~101.최한기의 자연관-----------------------------p.3~6(1)학문적 지향(2)사상적 지향(3)자연탐구의 탈주자학적 성격(4)기학적 자연관(5)자연관의 결론2.최한기의 교육관-----------------------------p.7~9(1)'운화기'의 경험적 교육관(2)‘변통’과 ‘추측’의 진보적 교육관(3)‘사무’와 ‘채서’의 실학적 교육관(4)최한기 교육관의 한계점Ⅲ.결론-------------------------------p.10~121.혜강최한기의 사상과 교육관 그리고 실학의 결론------p.102.고찰--------------------------------------p.113.참고문헌-----------------------------------p.12Ⅰ.서론 - 그는 누구인가1.우리나라교육자, 왜 그를 선택했는가최한기에 관한 연구는 1960년대에 와서 단편적인 논문이 나오고 자료들이 발굴,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학문적인 업적과 한국사상사에서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뒤늦게 발굴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동안 조선 후기 실학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많은 토론과 연구 업적을 냈다고 볼 수 있다.실학의 발전과정에서 18세기말 이후로 오면 성호학파나 북학파가 서로의 논리 구조와 인식을 공유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이러한 모습은 박제가나 정약용에서 드러난다. 최한기는 정약용 뒤의 인물이므로 이 실학적 전통을 비롯하여 조선조 전시대의 학술 토론이 전체적이고 체계화된 형태로 수용될 수 있는 시기에 살았다.그러므로 최한기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이해는 조선 후기 사상 전을 확신했던 그는 지식인의 출처를 난세와 치세에 견결시키는 유교적 상황논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훌륭한 학문을 가진 지식인이라면 현시대에 등용되지 못함이 오히려 더 다행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그에따라, 재야지식인의 훌륭한 학문은 재야에서의 축적을 통해 다음시대에 더 많은 기여를 하였다.3.실학을 말하는 사람최한기는 근대 이전의 조선 사회에서 학문에 대한 종합적인 비판과 새로운 윤리적 주체의 구성을 동시에 진행한 '실학'의 대가였다. 근대당대에 유행하던 학문 전통을 분류하여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비판작업을 수행했으며, 그러한 학문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에 머물지 않고 긍정적인 대안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새로운 모색이 각각 서양 문명을 대변하는 천주교와 자연과학이라는 핵심적 요소와 관련해 진행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또한, 최한기는 기(氣)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기복적인 성향의 방술이나 잡학, 도교,불교,등의 외도, 이핵을 차례대로 비판하였다. 또한, 당시 세계의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사유를 모색한 '세계인' 최한기는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상호교류를 통해 상대의 장점을 인정하고 배우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가 개국과 통상을 무조건 지지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무력에 의해 개항하려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의 입장을 견지했고,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을 가게 된 아들 병대의 견해에 동조하였다.그가 말하는 실학이란, 양란의 거친 뒤 동요하고 해체되어가는 조선 후기의 역사적 상황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조선 후기 사회의 전반적 동요와 해체에 따라 지배 이념과 세계관 및 절대적 진리로 저선을 떠받치던 주자학도 한편으로는 동요와 해체의 길을 밟게 되며 실학이 그것을 주도하며, 그것을 주도하는 자가 혜강최한기이다.Ⅱ.본론 - 학문의 내용1.최한기의 자연관(1)학문적 지향혜걍의 학문은 어린 시절 지도를 받아 낙론계의 정통주자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당시 학계의 여러 학문적 문제점을 이해하였다. 그러던중, 중국 고서도덕적 이해최한기가 이해한 자연은 인간의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며 인간과 무관하게 운동변화하는 객관존재이다. 자연이란 하늘의 영역이므로 사람의 힘으로 증감할 수 있는 것이아니다. 이와 같이 자연과 인간을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은 인간행위의 도덕성 여부가 자연의 운행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른바 천인감응설)에 기반한 전통적인 자연이해와 구별된다.최한기가 이해한 자연은 도덕성을 본질로 하지 않는다. 최한기에 의하면 하늘은 만물을 낳는 데 뜻을 두지 않으며 땅도 만물을 기르는 데 마음을 두지 않는다. 만물 스스로가 하늘의 힘을 빌려 생겨나고 땅의 힘을 빌려 자라날 뿐이다. 그에 의하면 만물이 생겨났다가 소멸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자연의 영역은 필연의 영역이지 선택과 결단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최한기가 말하는 기를 다시한번 살펴보자인용 : '기라는 것은 천지를 가등 채우고 있는데, 순환에는 이그러짐이 없고 모이고 흩어짐에는 때가 있어서 그조리를 기라고 한다'기의 운동변화에는 모두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그 빠르고 느린 것이 자연히 차이가 있다. 큰 것으로는 천체의 궤도, 작은 것으로는 일상적인 일까지 모든 것이 평범한 헤아림이나 억측으로는 다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최한기는 인간의 도덕적 실천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이다.②인간관그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신기의 속성을 ‘근원적 동일성’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혜강의 기학적 인간관에 나타난 사유 양식에 따르면 천지만물이 신기를 품수하고 있다는 이념적 측면에서는 우주와 인간이 통하는 근원적 평등성으로 나타나며, 나아가 누구나 하늘의 신기를 통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이 도출될 수 있다.혜강은 “사람에게 원래 사농공상의 정해놓은 한계는 없으며, 오직 조정에서 인품의 귀천을 어떻게 취사선택하느냐에 달것을 주장하였다. 기에 의거하여 필연적인 우주의 운행을 설명하는 우주관은 최한기의 일관된 견해였다. 이처럼 기의 운화로 천체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최한기의 우주관을 기학적 우주관이라는 용어로 정리 할 수 있다.(5)자연관의 결론최한기의 자연관은 전통적인 기론적 자연관과 서양 근대의 자연관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전통적인 기론을 바탕으로 서양 근대의 자연과학적 성과를 흡수한 최한기는 그만의 독특한 자연인식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것이 곧 기학적 자연관이다.최한기의 자연인식은 선진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기학적 성격을 견고하게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과의 연속성이 유지되고 있다. 최한기에 의하면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변화하는 현상은 기의 운화의 결과이다. 하늘에 가득차서 움직이는 천체는 모두 기가 만들지 않은 것이 없고, 만물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도 기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기'는 최한기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단순히 과학적 성과만을 받아들인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수용에 걸맞는 철학체계를 구성하고자 했고, 그래서 그는 기를 핵심으로 하는 기학이라는 포괄적인 철학체계를 만들어냈다.기로 천체의 운행을 설명한다거나 신기의 운화가 지각의 작용을 주관한다는 것은 결코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 아니며 오히려 최한기의 서양과학 수용의 불철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과학과 부합되지 않는 이러한 측면으로 인해 최한기는 단순한 서양과학의 수용자라는 위치를 넘어설 수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결국, 최한기가 서양의 근대과학을 수용하는데 머물렀다면 그는 단순히 근대과학의 수용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그의 과학사적 위치는 높이 평가될 수 있었겠지만 서양의 과학기술이 종교전파의 수단에서 식민재배의 도구로 탈바꿈했던 시대를 살다 간 최한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는 동서양을 통합하는 철학체계를 제시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2.최한기의 교육관- 최한기는 '기'철학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실학사라 그 기의 새로운 통로를 발견하여 불통을 통하게 하고 부적을 적으로 바꾸게 하며 무용을 유용케하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천지의 신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이며 곧 인간 자신의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변통의 노력을 내세웠던 혜강은 또한 기득의 지식을 기초로 하여 경험하지 못한 것을 사유할 수 도 있다고 하여 ‘추측’의 논리를 제시하였다. ‘추’는 여러감각기관을 통해 경험적으로 체득된 지식을 기초로 하여 추론함을 말하며, ‘측’은 추론을 통해 얻어진 것을 총합하고 성격지으며 결론을 짓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추측’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단순한 견문이나 학습한 것만을 가지고서는 시간과 공간에 주통할 체계적 인식을 얻을 수 없으며 추측의 작용과 노력에 의해서만 온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또한, ‘대기운화’)에 따라 세상이 자꾸 달라지며 발전한다고 믿었던 혜강은 인간의 식견도 ‘주통(周通)’과 ‘추측(推測)’에 의해 개명되고 진보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당시까지 무조건적으로 신봉되어온 절대적 권위의 상징인 주공과 공자의 교의에 대해서 시대에 따른 변화를 강조했다. 그는 주공과 공자의 교의만을 고수하고 이를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학문의 진보에 해가 되므로 학문도 제도와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즉, 혜강에게 있어서 선현의 학설은 고정 불변의 진리가 아닌 끊임없이 연구된 새로운 결과를 반영해야 할 진리였던 것이다. 학문을 변화된 현실에 맞도록 변통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며, 나아가 “어떠한 진리도 계속 새롭게 헤아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진보의 지속적인 과정이 현재 학문의 토대가 됨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경험주의적ㆍ진보주의적 인식론)과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3)‘사무’와 ‘채서’의 실학적 교육관그는 인간생활의 모든 일은 곧 진실된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그 사무를 제쳐놓고 따로 학문을 구한다면 그것은 허공에 뜬 하잘것없는 학문이 된다고 갈파하였다. 그의 말은 결국 인간사의.
1.창덕궁(1)창덕궁이란? ------------------(p.3)(2)창덕궁의 조경요소--------------(p.3)①창덕궁의 배치------------------(p.3)②수목-------------------------(p.4)③담장-------------------------(p.4)④건물-------------------------(p.4~5)⑤지당명에 따른 못 형태와 휴식처----(p.5~6)⑥기구-------------------------(p.6)⑦석계-------------------------(p.7)⑧계간-------------------------(p.7)2.경복궁(1)경복궁이란 ?-----------------(p.8)(2)경복궁의 조경요소-------------(p.8)①경복궁의 배치----------------(p.8)②경회루 지원------------------(p.9)③교태전 후원의 아미산-----------(p.9)④자경전의 꽃담굴뚝-------------(p.10)⑤벽면의 문양------------------(p.10)⑥자경전 서편 꽃담--------------(p.10)⑦향원정지원 및 취향------------(p.11)⑧교향원지 열상진원-------------(p.11)1.창덕궁-창덕궁(昌德宮)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궁궐이다. 건축과 조경이 잘 조화된 종합 환경디자인 사례이면서 동시에 한국적인 공간 분위기를 읽게 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15세기 초에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이궁으로 조성되었으며, 그에 따라 애초의 건립 목적이나 도성 내에 자리한 입지도 경복궁과 차이가 있었다.(1)창덕궁의 조경요소①창덕궁의 배치궁궐의 중요 건물은 유교 예법에 맞게 중심축을 형성하며 도형적으로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야 하지만, 창덕궁의 정문과 편전은 중심축 선상에 배치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배치방식은 창덕궁이 정궁인 경복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으로,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한 데서 생긴 결과이다. 창덕궁은 북쪽 응봉에 등 관목류를 심었다.③ 담 장창덕궁은 외곽으로 높은 사괴석 궁성담이 설치되어 있고 궁내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구획을 구분하는 담들이 설치되어 있다. 화전으로 쌓은 아름다운 굴뚝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건축담 사이에는 원형의 월문이나 아치형 협문이 있고, 이들 문에 장식된 화전들은 대단히 높은 미적 감각을 보여준다.이들 담들은 주합루 공간, 대조전 후원, 낙선재 후원 등을 구분하고 원의 각각의 기능을 부여하고 있으며, 동궐도에 의하면 주합루 앞의 어수문 좌우에는 취병의 울타리가 설치 되어있다.④ 건 물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지역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이익공의 팔작지붕 형태의 건축 양식이다. 누각 앞에는 부용지가 있고, 정면 맞은편에 부용정이 있다. 1층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奎章閣)이고 2층은 열람실이었는데, 이 열람실을 주합루(宙合樓)라고 한다.동 궐도에서 보면 초가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엔 후원에 있는 건물은 정자가 17동, 누가 1속, 당이 2속, 민가로 연경당의 행랑채, 안채, 사랑채, 서향제 등 4동, 사? 1동, 문門 1동, 각閣 3동, 헌軒 1동, 민가형 독서방인 제월광풍관 1동, 혼전인신선원전 구역 내 연전, 제실, 우직사 등 4동, 합해서 35동의 건물이 있다.정자는 지붕형태도 4각, 6각, 다각을 하고 있으며 난간이나 단청 등 건축의장이 화려하다. 원림이나 옥류천 개울가의 정자는 소박하고 건축의장이 간결하며, 옥류천의 청의정은 창덕궁 후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초정이다.부용정과 주합루는 천지인의 이치를 밝히고 군신의 화합과 천인합일의 이상을 조영의 기법으로 나타내고자 한 철학적 의도가 들어 있으며 건물의 높고 낮은 조화가 특이하다.비원 속에서 침실의 기능을 가진 건물은 민가형인 연경당와 폄우사, 농산정, 영화당, 가정당, 서향각 등이다. 주합루의 아래층은 국립도서관격인 규장각의 서실인데, 이곳은 마루로 되어 서고의 기능으로 알맞게 되어 있으며 서향각은 왕비가 누에를 길렀던 기능도 겸해 넓고 큰 공간을 가지고 있로는 사정기비각이 있고, 남쪽으로는 부용정이 물 위에 반쯤 떠 있다. 사방이 네모난 못인 부용지 속에는 둥글게 생긴 작은 섬 위로 소나무가 심어져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는 천원지방을 나타낸다.그림 존덕정애련정 서쪽으로는 연경당이 있다. 이 건물의 남쪽에 주작을 상징한 연못이 있고, 서쪽에 백호를 상징한 개울이 흘러 장락문앞을 지나가고, 그 개울 위에 간결한 석교가 있으며 석교가에 신산을 상징한 괴석들이 석분위에 심겨져 배치되어있다. 사랑채 동편으로 꺾으면 남북방향으로 기다랗게 건축된 선양제가 있다. 단상의 북편에는 단간의 농수정이 세워져 있다. 농수정에는 卍자무늬의 사분각이 달려 있어서 여름철에 위에 매어 달면 벽이 없는 이름그대로의 정자가 되어 한적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도록 되어있도록 계획한 것이다.이곳 연경당의 언덕을 넘으면 남북으로 긴 계곡이 전개되는데, 계곡의 입구에는 한말 일제강점기 초에 만든 길쭉한 반도지가 있고 연못의 동쪽 호안이 물 속에 뜬 것 같은 부채꼴의 특이한 관람정이 있으며, 서쪽 언덕 위의 숲속에 정방형의 승재정이 있다. 승재정 앞에는 아름다운 괴석이 배치되어 있다. 반도지 북쪽 한단 높은 지형에 반월지가 있고 이 반월지와 반도지 사이의 계간에 단아한 홍예석교가 설치되어 있다. 이 석교를 건너 들어가면 1644년에 건립된 육각형의 존덕정이 서 있다.존덕정 서쪽 산기슭에는 서실인 폄우사가 있으며 이들 건물 주위는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 서나무 등 수림이 울창하여 한낮에도 침침한 느낌을 주고 있다.⑥ 기 구기구란 원 내에 조각된 석물로 거북, 사자, 해태, 호랑이 같은 동물을 배치하기도 하고 수련을 기르거나 달빛이나 노을이 고이게 하는 돌로 만든 수구를 놓기도 하였다. 연경당 사랑 마당가와 낙선재 후원에는 무을 담는 석구가 놓여 있으며 연경당 행랑채의 중문 좌우에는 기물을 받쳤던 석대가 있다. 청심정의 빙옥지는 수조 같은 작은 석지 인데 석지 앞에는 돌거북이 조각되어 있으며 부용지 북쪽 호안에는 비가 오면 남쪽을 보고 앉아 있고, 북쪽에는 북을 지키는 거북(현무) 한 마리가 북쪽을 향해 앉아 있다. 이들 상 뒤로 홍예들이 만나는 기석에 귀면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위 양쪽에는 돌로 난간을 돌렸는데 주석이 서고 그 사이에 동자석이 설치되고 한판 돌로 만든 풍혈(風穴)이 끼어 있다. 이 난간의 하엽荷葉이나 동자 발치에 조각된 수두 및 난간 끝의 해태상들의 조각솜씨가 뛰어나다. 이 다리는 평면이 아니라 중앙이 들린 구릉형이며 보도는 중앙에 왕의 어가로 가는 보도가 있고 양쪽에 신하들이 다니던 측도가 있다.홍예교는 한틀의 홍예 위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석주와 동자주에 하엽이 새겨진 아름다운 다리이다. 이 다리는 계간을 석지처럼 판석으로 짠 개울 위에 설치되었다. 홍예교는 길이 3.52m, 너비 2.57m로 비원 속의 보도의 너비를 말해주는 기준이 되고 있다. 그 외의 연경당 입구의 판석교는 간결하게 설치한 돌다리로 한사람이 거닐기에 알맞은 다리이다.⑧ 계 간옥류천 지역에 계간이 조성되어 있는데, 어정과 정자, 원림, 암반, 돌다리들이 개울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그리고 존덕정 앞 개울에 장대석으로 석지처럼 만들고 물막이를 설치하여 물이 고이게 하였다. 비원 서쪽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계류가 있는데, 이 계류는 장대석을 쌓아 축대가 조성되어 있을 뿐 이들 건물 사이의 담들은 지면에서 장대석으로 튼튼하게 쌓고 그 위에 사괴석을 쌓았으며 그 위에 전담이나 꽃담을 쌓은 것이 많다. 특히 화계 뒤편에 전담과 꽃담이 많이 설치 되어있고 단조로운 계간이 조성 되어있다.2. 경복궁-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성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1)경복궁의 조경요소①경복궁의 배치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 잡고 있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다.경복궁은 정문인 광화문, 중문인 흥례문, 정전인 근정전, 편전인 사정전, 왕의 침전인 강녕전,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을 축선상으로 잇고 있다. 이는 축선에 맞추어 건축물을 배치함으로써 조선의 통치 이념이 역으로 중문과 정문을 거쳐 도성의 백성들에게 왜곡되지 않고 잘 전달되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남문인 숭례문을 통해 온 나라 백성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② 경회루 지원이 곳은 원래 습지로 1395년에 작은 연못이 조성 되었으며, 1412년(태종12년) 이 연못을 크게 넓히고 누각을 건립하여 이 때부터 경회루라 하고 외국 사신의 영접이나 유연소 기능및 궁중의 연회소로 사용하였다 한다.경회루 :팔작지붕을 갖는 루 건물로서, 방형의 외진 석주 (땅,陰) 24개와 원형의 내진 석주 (하늘,陽) 24개로 구성되었다.7칸 x 5칸 (= 35칸)의 루건물에 1칸 더 보태어 경회루는 36궁, 즉 36동천을 의미하며, 섬과는 돌난간이 있는 3개의 석교로 연결되어 있다.방지의 규모는 남북 113m, 동서 128m로 지안은 폭이 40cm쯤 되는 장대석으로 축조되어 있다. 못 속에는 3개의 직사각형 섬이 조성되어 있는데 동쪽의 큰 섬에 경회루가 서 있다. 경회루가 서 있는 방도의 서쪽에 장방형의 섬 두개가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 섬을 만세산이라 한다. 1506년 연산군 때, 못 서쪽에 만세산을 만들고 화려한 꽃을 심었으며, 산위에 오궁(만세궁, 놓았다.
Report-안압지교과목명 :교수님 : 학번 :이름 :제출일 :목차1.안압지란?1)안압지의 역사적배경2)안압지의 사상적배경3)안압지의 옛이름4)안압지의 규모2.안압지 구성요소1)건물지평면도2)복원건물터①제 1건물②제 3건물③제 5건물3)3개의 섬-호안, 수조유구3.안압지의 조경1)조경구성원리①개방성과 폐쇄성②열림과 막힘의 효과1.안압지란?-안압지는 신라 천년의 궁궐인 반월성에서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통일시기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 많은 부를 축적한 왕권은 극히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면서 크고 화려한 궁전을 갖추는 데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통일 직후 674년에 안압지를 만들었으며 679년에는 화려한 궁궐을 중수하고 여러 개의 대문이 있는 규모가 큰 동궁을 새로 건설하였다.안압지와 주변의 건축지들은 당시 궁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 동궁, 곧 임해전의 확실한 위치는 알수 없으며 다만 건물터의 초석만 발굴되었다.1)안압지 역사적 배경-안압지는 삼국통일 후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조성된 것이기에 신라인의 자신에 넘치는 긍지와 여유의 한 면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수십만 당나라 대군과 맞서 싸우는 전쟁 상황을 간과하는 말이다. 또 신라통일 왕권을 과시하는 기념사업이며 문무왕 자신의 심신구제를 위한 황경의 조성사업이라할수있다. 이역시 672년의 기근과 673년의 정월에 큰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있어 백성들이 불안해했을 상황과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신라는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당나라가 한반도를 무력화하려는 책략에 맞서 7년 나당대전을 치른다. 신라와 당나라 간에 벌어진 7년 전쟁은 신라가 먼저 공격했다. 그런데 이 안압지는 7년 나당대전 기간중에 조영되었다. 그당시 신라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는데 아미타부처의 힘을 나당대전을 극복하기 위해 안압지를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2)안압지 사상적 배경-안압지는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신라통일왕권을 과시하는 기념사업과 문무왕 자신을 위한 환경조성사업, 신선사상과 불교의 정토사상, 용왕신앙을 배경으로 하였고 불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것들에는 정확하다기 보다는 가설에 지나치지않음에 분명하다. 안계복은 문무왕이 나당대전 초기 당나라 50만 대군을 물리치기위해 사천왕사를 급하게 지은 사실과 안압지 발굴당시 다량으로 출토된 금동판불을 근거로 아미타불신앙이라고 주장하였다.최근 주장에서는 경주 신라 안압지는 도교의 신선사상이 아닌 불교 사상에 의해 조성됐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춘천 강선사 극락정토원 원장 춘광 스님(동국대 조경학과 박사과정)은 최근 ‘신라 안압지의 경관 조성 원리의 사상적 배경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안압지 조성은 철저하게 불교 사상에 의해 이뤄졌으며 경전에 나타난 불국 정토를 구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스님은 “안압지와 관련해 그 안에 자리한 세 개의 섬을 삼선도(三仙島)로 보는 것과 문무왕이 중국의 무산십이봉을 상징해 산을 만들고 화초와 진귀한 짐승을 길렀다는 문헌적인 기록에만 의존해 안압지 조성 배경을 도교적 세계관에 두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스님은 이어 “이 같은 선행연구결과는 안압지가 조성될 당시 사회적 배경과 통치 사상을 불교경전에 뒀던 문무왕에 대한 연구가 간과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스님은 이에 대한 근거로 문무왕의 평소 행적과 유언이 나타난『삼국유사』기이편을 들었다. 스님은 “문무왕은 평소 지의 법사와 가까웠으며 특히 그는 지의 법사에게 불법과 국토를 수호하는 수미산의 용이 되겠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고 강조했다.스님은 또 안압지 조성에 적용된 이론은 불교경전과 도상화(圖上化)된 만다라 기법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스님은 “신라 시대 대부분의 건축물과 공간 구성 요소 조영은 불교 장엄기법이 적용됐다”며 “특히 왕궁과 원찰, 탑의 조영, 원지의 조성 등은 불교경전과 도상화된 만다라가 설계도의 교본이 됐으며 실제 밀교계 경전에서는 용궁지와 같은 용궁의 묘사가 실려 있는 점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이와 함께 스님은 안압지와 황룡사 탑이 인근에 있는 입지적인 배경을 들며 “안압지는 철저하게 불교적 사상에 의해 조성됐다”고 강조했다.3)안압지의 옛이름-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에 나타나고 있다.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곳이 월지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반월성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임해전의 이름도 본디 월지궁이었다고 한다. 1975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한 발굴이 있었는데 그 결과 연못 바닥에서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유물과 불교 미술품들이 다수 발견되어 신라 시대 상류층 문화가 확인되었다.이 곳이 신라시대 월지라고 불리웠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본래이름도 월지궁이었음이 밝혀졌다.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조선의 묵객들이 안압라는 이름을 붙였다. 《삼국사기》에 동궁을 임해전, 즉 바다에 면한 건물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서 안압지는 바다를 상징한다4)안압지의 규모-면적은 1만 5,658평방미터(4,738평), 세 섬을 포함한 호안 석축의 길이는 1,285m이다. 못가의 호안은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은 절묘한 굴곡으로 만들고, 서쪽과 남쪽에는 건물을 배치하고 직선으로 만들었다. 서쪽 호안은 몇 번 직각으로 꺾기도 하고 못 속으로 돌출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못가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연못이 한없이 길게 이어진 듯 여겨진다. 못 속에 섬이 세 곳 있는데, 세 섬의 크기가 각기 다르고 윤곽선 처리가 자연스럽다. 발해만의 동쪽에 있다고 하는 삼신도(방장도, 봉래도, 영주도)를 본 딴 듯하다. 동쪽과 북쪽의 호안에는 무산 12봉를 상징하는 언덕들을 잇달아 만들어 놓았다. 높인 일정하지 않으나 3m에서 6m정도이며 선녀들이 사는 선경을 상징한다.2.안압지의 구성요소1)건물지평면도안압지는 회랑, 제1건물~5건물, 내전과 중전 그리고 정전과 중문으로 이루어져있다.2)복원 건물터:1980년에는 연못 서쪽 호안에 접하여 세워졌던 5개의 건물터 중에서 3개를 복원시켰으며,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초석을 복원하여 노출시켰다.①제 1건물:발굴 조사 겨로가 확인된 연못 서쪽가의 5개 건물터 중 현재 복원된 3동의 건물외 기외 등 출토유물을 본따 신라시대의 원형대로 추정 재현하였다.이 건물은 정면3간 측면3간의 목조필적지붕으로 건평100제곱미터 건물높이 9미터의 누각형태이다.②제 3건물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연못 서쪽가의 5개 건물터 중 현재복원된 3동의 건물은 원래 기단부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건축부재는 목부재와 기와 등 출토유물을 본따 신라시대의 원형대로 추정 재현한 것이다.이 건물은 정면 5간 측면 4간의 단층모조 팔작지붕으로 건평 187제곱미터, 건물높이 10미터의 누각 형태이다.③제 5건물: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연못 서쪽가의 5개 건물터중 현재 복원된 3동의 건물은 원래 기단부가 완전히 파괴되었던것을 복원하고 건축부재는 목부재와 기와 등 출토유물을 본따 신라시대 원형대로 추정재현한 것이다.이 건물은 정면 3간 측면3간의 단층 목초 사모 지붕으로 건평 43.5m 건물높이9m로서 이건물터 주변의 연못 속에서 나온 많은 돌난간 부재를 본따 난간을 복원하였다.4)3개의 섬: 안압지 안에는 크기에 따라 대도, 중도, 소도로 구분하는 세개의 섬이 있다. 대도는 남쪽 호안에 중도는 서북쪽에 소도는 못의 한가운데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해 있다.임해전의 동쪽에 가장 큰섬과 가장 작은 섬이 위치하며 북쪽에는 중간 크기의 섬이 위치한다.·호안-이 세 섬은 모두 호안석으로 쌓았으며 여러 가지 경성이 얹혀있다.연못주위에는 호안석을 쌓았는데 그 길이는 약 1260m이다. 호안석충 위에는 곳곳에 괴석에 가까운 생김새의 바닷가 돌을 자연스럽게 배치하여 바닷가의 경관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호안석축 쌓기에서 건물들의 기단석축은 못 속으로 돌출하여 수직으로 물속에 잠기게 했는데 물속에 잠기는 부분은 자연 그대로의 돌을 면만 골라 쌓았다.그리고 안압지를 바다로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안압지의 호안과 동해구의 모습이 놀랍도록 닮았다. 이것은 가장 한국적인 해변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