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비서사시와 판소리?판소리계 소설에 대하여 설명하시오.(한국문학통사 3권 9.14. 서사무가에서 판소리계 소설까지를 중심으로)한국 본토의 구비서사시는 서사무가, 서사민요, 판소리의 세 가지 갈래로 존재한다. 서사무가는 무당서사시이고, 서사민요는 농민서사시이며, 판소리는 광대서사시이다. 이야기를 노래로 하는 점은 서로 같아 서사시의 기본 특성을 이룬다. 그러면서 서사민요는 단형이고, 서사무가는 장형이며, 판소리는 구조가 한층 복잡한 장형이다. 농민서사시인 서사민요는 누구나 부를 수 있지만, 무당서사시인 서사무가는 특별한 자격을 얻어야, 광대서사시인 판소리는 전문적인 수련을 거쳐야 구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서사시는 곧 영웅서사시라는 선입견을 배제하고, 범인서사시도 서사시임을 알아야 서사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신령서사시였다가 영웅서사시로 자라난 서사무가는 범인서사시의 특성도 지니는 변화를 겪었다. 서사민요는 오직 범인서사시이다. 판소리 또한 범인서사시이면서 서사무가에서 물려받았다고 생각되는 영웅서사시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서사무가는 오랜 내력이 있다고 인정되고, 서사민요는 족보를 알 수 없으며, 판소리는 18세기 무렵에 생겨났다.세 가지 구비서사시는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다르다. 서사무가는 원시서사시이고 고대서사시였는데 중세 이후의 서사시로 변모되기도 했다. 서사민요는 중세서사시로 자리잡고 시대의 변천에 따른 개작을 겪었다. 그러나 판소리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서사시로 창조되었다.그렇다면 이 세가지 구비서사시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우선 서사무가는 원래 나라 무당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국중대회를 거행할 때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서 부른 노래이다. 나라의 시조를 섬기던 노래가 무속의 신을 기리는 노래로 기능이나 내용이 바뀌면서 발전되었다. 종교적 소망의 성취만을 위해 연행된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감흥 충족까지 기대했다. 대표적인 서사무가로는 와 가 있다. 는 아비 없는 자식을 잉태하고 출산한 처녀의 수난을 시각하게 그려 하층의노래가 많아 서정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건전개에 뚜렷한 유형구조가 있어 서사문학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서두에는 반드시 고난이 등장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 이야기 전개의 중심이된다. 그러다 결말부에서는 좌절하거나 또 다시 해결을 위한 시도를 하며 마무리된다. 더러는 해결되는 결말구조를 같기도 하지만 드물게 나타난다. 이때, 해결의 시도가 정상적인 것이냐 아니면 엉뚱한 것이냐에 따라서 작품의 성격이 비극적, 희극적으로 나뉘게 된다.비극적 성격을 지닌 서사민요는 주로 고난 해결의 시도가 정상적인 것이다. 노래하는 사람이 주인공과 밀착되어 연행이 진행된다. 흔히 시집살이의 고난 문제를 다룬 것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 등이 있다. 반대로, 비극적 성격을 지닌 서사민요는 고난의 해결 시도가 엉뚱하게 진행된다. 이런 경우 노래하는 사람이 주인공에게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내심의 욕구를 자기가 아닌 다른사람의 일로 전가시켜 웃음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 등이 있다.서사무가와 서사민요는 이정도로만 알아두고, 이제 본격적으로 판소리에 대해 연구해보도록 하겠다. 판소리에 대한 연구는 판소리의 정의와 연행 방식, 판소리 발생 배경, 판소리의 사적 전개양상, 판소리의 음악적 구성요소, 판소리 12마당, 판소리와 소설의 장르교섭 양상 순으로 진행하도록 하겠다.첫 번째로 판소리의 정의와 연행 방식에 대해 알아보자. 판소리란 한명의 창자가 부채를 들고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추어 긴 줄거리를 갖춘 이야기를 창(소리·노래)과 아니리(말)를 섞어가며 연행하되, 너름새(발림·몸짓)를 곁들여 표현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연행 예술이다. 창자는 보통 목청을 조절하고, 청중의 호응 파악과 주의 집중을 위하여 먼저 짧은 노래인 단가를 부른 다음에 본사가인 판소리를 부르는데, 소리판의 사정에 따라 하나의 작품 전체를 부르기도 하고(완창), 특정한 부분만 부르기도 한다(토막소리). 과거에는 판소리 한바탕을 완창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에나 ·청중이 삼위일체가 되어 호흡함으로써만 성공적인 판소리 연행이 가능한 것이다.두 번째로는 판소리의 발생 배경에 대해 알아보겠다. 판소리의 형성을 알아보는 것은, 곧 판소리 특성의 이해와도 연결된다. 모든 문학장르가 그러하듯이, 특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 문학의 발생론적인 차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구비문학의 각 형태는 그 정확한 기원과 면모를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 예사이다. 그런데 판소리는 그렇지 않아서 대개 조선후기에 그 양식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후기는 민중문화가 크게 일어나기도 했던 때인데 이에 대한 집약적 표현의 하나로서 판소리가 나타났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조선후기의 문예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인간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예술적인 형상화의 주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결국 조선후기 사회의 역동적인 상황을 일러 주는 것으로서 그만큼 세계관의 변화에 대한 민중의 자의식이 각성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서 당대의 문학은 당대인의 현실적인 삶의 세계를 조명하게 되고 그리하여 삶 자체의 모습이 꾸밈없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중화관을 고수하는 지배계층의 이념이 많은 모순을 안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중세적 세계관의 보편주의 자체가 이러한 이념을 합리화 시키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는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직접적으로 중세문화의 상징적 실체인 한자와 한문학 양식에 대한 갈등을 통해서 드러난다. 곧 중세적인 공동문어 자체가 이러한 지배적 이념을 견고하게 하는 토대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문학의 규범양식은 사대부계층에 한정되어 계승되어 왔고, 따라서 과거와 제반 인재등용은 제한된 계층을 위주로 이러한 규범문의 수련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당시에 일어난 국어문예에 대한 관심, 곧 국어로 글을 쓰고 그를 통해 조선인의 성정을 꾸밈없이 표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이러한 공동문어권의 문학양식에 대한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출발한 것이라고 하겠다. 고유의 언 하면서 발달하고 잇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둘 수 있는 것이다. 소리갈래는 민요나 잡가, 판소리로 점차 발달하면서 고도의 예술성을 통해 성장해왔던 것이며, 그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민 하층민들에게서부터 사대부들에게 이르기까지 사랑받으면서 국어문예의 가장 중심적이며 역동적인 갈래로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세 번째로 판소리의 사적 전개 양상에 대해 살펴보자. 판소리는 그 전개 양상에 따라 형성발전기, 전성기, 쇠퇴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우선 형성발전기는 17~18세기이다. 17세기 판소리는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전통적인 민간 연희 양식의 하나였으며, 부르는 사람과 청중 모두 민중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18세기에 들어와 서서히 양반 지식인층에까지 침투하게 되어 향유층을 확대하였고, 지역적으로도 발생지인 호남, 호서지역을 넘어 서울에까지 확대되었다.다음으로 전성기는 19세기이다. 이 시기는 수많은 명창들이 배출되어 각기 뛰어난 기량으로 서민뿐만 아니라 중인, 양반 사대부 계층으로부터도 크게 환영받고, 그 결과 그들의 사회적 위상도 크게 향상된 시기이다. 음악적으로는 장단·악조·더늠 등의 특성 있는 개발과 완숙미로 그 수준을 한층 높이면서 유파별 창제의 분화도 이루어졌고, 판소리 레퍼토리도 12마당으로 확충되었다. 문학적으로는 판소리에 바탕을 두거나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판소리계 소설이 방각본으로 다수 간행되면서 독서물로서도 커다란 애호를 받기에 이르렀다.마지막으로 쇠퇴기인데, 이는 20세기이다. 19세기 말엽 최전성기를 맞은 후, 점차 쇠퇴하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판소리 래퍼토리 12마당 중 5마당만 전승되고 나머지는 소리를 잃게 된다.네 번째로 판소리의 음악적 구성요소에 대해 알아보자. 판소리의 음악은 성음, 조, 장단으로 구성된다.성음은 소리의 결이다. 성음을 즐긴다는 말은 목소리의 결, 곧 목소리의 음질을 즐긴다는 뜻이다. 판소리의 기본 성음은 거칠고 쉰소리인 ‘수리성’이고, 이보다 상대적으로 맑고 고운역시 그만큼 장단이 중요한데, 상황에 맞는 장단은 판소리의 표현력을 극대화 한다.다섯번째로 판소리의 레퍼토리에 대해 알아보자. 판소리의 래퍼토리를 정리하여 전해 내려오는 것을 ‘판소리 12마당’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본래 열두 마당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가창되고 있는 것은 다섯 마당이다. ‘마당’이라는 말은 원래 놀이하는 장소를 뜻하다가 변해서 놀이 한 편을 일컫게 되었다. ,등이 각기 한마당이다. 판소리가 열두 마당이라고 한 것은 그런 작품이 꼭 열두 편이었다기보다 상당히 많았다는 뜻으로 융통성있게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송만재의 에 의거해서 정리해보면 (1),(2),(3),(4),(5),(6),(7),(8),(9),(10),(11),(12)이 열두 마당을 이루었다. 열두 마당 가운데 없어진 것들은 ‘타령’, 전승되는 것들은 ‘가’라는 말이 작품명 말미에 붙었다. ‘타령’보다 ‘가’는 내용이 풍부하고 표현의 격조가 높은 차이점이 인정된다. 현재까지 노랫말로 전승되고 있는 작품은 (1)에서 (5)까지이며, 나머지 작품은 창을 잃은채 전승되고 있다.마지막으로, 판소리와 소설의 장르교섭에 대해 살펴보자. 판소리는 민간 전승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황을 복잡하게 하고 인물들 사이의 대립을 심각하게 하는 방향으로 개작을 해서 질적 비약을 이룩했다. 설화에서 볼 수 있는 단순 논리에 따라 예정된 방향으로 치달을 것 같은 사건을, 장애요인을 설정해 뒤집어놓고, 거기 휘말린 인물들이 자기 나름대로 일방적인 행동을 해버릴 수 없도록 했다. 자아와 세계가 상호우위에 입각해 대결하는 갈래 특징을 소설과 공유하면서 한층 다면화된 시각에서 가치관의 논란을 펼쳤다. 그래서 소설발전에 큰 자극이 되고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의 관계를 조망할 때, 우선 구비 문학과 기록 문학의 관계망 속에서 투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판소리는 판소리계 소설보다 구비성을 좀더 강하게 지니고 있다. 판소리에는 대화를 이끄는 바탕글이 생략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판소리 창자가다.
※ 조선후기 가사의 양상을 기술하시오.(한국문학통사 3권 9.9. 가사의 다양한 모습을 중심으로)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중세적 질서를 변화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는 중국과 일본 내에서의 정권 교체를 가속화 하였으며, 조선은 정권의 교체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임진왜란을 계기로하여 조선시대를 전후로구분할 만큼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보고서에서도 앞선 보고서와 마찬가지로, 논의의 편의상 조선후기를 임진왜란 이후부터 개화기 이전까지로 규정하려 한다. 또한, 작품 개개의 구체적인 내용과 의미보다는 어떠한 성격의 작품들이 창작되었고, 어떠한 방식으로 향유되었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는데 중점을 두려한다.전란이 거듭 닥쳐와 태평성대의 환상이 흔들리는 충격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대부는 자기네 문학의 기존 갈래 중에서 가사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흔들려서 무너져 내리는 형편은 한시나 시조로 집약하기보다는 실제로 겪은 대로 늘어놓아야 어울리고, 산문으로 기술하고 말자니 미진했으며, 탄식을 곁들인 노래로 자세하게 나타내야만 실감을 돋굴 수 있었는데, 가사는 그런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우선 조선후기 가사의 형식적 측면의 변화를 살펴보자. 여기서 필자는 이전 보고서 주제이기도 하였던 조선후기 시조의 모습과 가사를 비교하며 논의를 진행해보려 한다. 동시대의 문학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이며, 변화에 있어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이기 때문이다.가사는 동시대의 문학장르인 시조와는 조금은 다른 변화를 보이며 발전한다. 시조와 가사는 상보적 발전을 해온 문학갈래인데, 후기가사는 형식 자체의 변화를 보인 사설시조의 경우와는 달리, 오히려 더욱 정형화된 기계적 율격을 보이고 있다. 이 점은 언뜻 보기에 상당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즉 근대의식의 소산이랄 수 있는 산문정신의 영향으로 사설시조가 생겨났다면, 같은 논리로 가사의 형식도 파격을 보여야 할 텐데 실상은 그 반대로 더욱 정연한 율격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시조와 가사는 왜 같은 토양에서 그 변모양상이 각기 달리 치달았을까? 이는 행의 제한과 무제한에서 오는 차이점으로 보인다. 즉 시조의 3장 6구 형식은 고도의 함축성과 긴장미를 요구하므로 평민들의 문학수준으로는 그 제한된 율격에 견디기 어려워 사설시조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사는 4음보격만 요구될 뿐, 행의 길이는 무제한으로 연속된다. 이것이 시조와는 달리 가사의 형식에 파격이 나타나지 않은 안전판의 역할을 해주었다.한편, 시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사에서도 그 향유계층이 전기에는 양반 일변도였으나, 후기에는 평민과 부녀자계층이 대거 참여하여 눈길을 끈다. 즉, 담당층, 내용, 형식, 작품수 등의 측면에서 매우 다양하고 풍성해졌다. 때문에 가사문학사에서 조선후기는 확장기 또는 보편화기, 변모기 등으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장르적인 측면에서도 다양한 방향으로 분화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이에 후기가사는 그 창작계층에 따라 양반가사, 평민가사, 여류가사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창작의욕을 느낀 이들의 참여로 인해 작가계층이 크게 확대되었고, 이것은 다시금 독자계층의 확대를 가져왔다. 여기서 전기 풍류감정 위주의 작품에서 벗어나 일상의 생활감정을 노래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창작계층과 독자계층의 거리를 좁힘으로써 가사문학이 크게 변화하게 되는 파급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가사문학에 익숙해진 이들은 새로운 창작욕구를 느끼며 본인들의 감정을 확산시켜 나갔고, 창작계층과 독자계층이 한 덩어리가 되면서 더욱 상승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이번에는 향유방식에 대해 살펴보자. 가사는 가창, 음영, 율독의 방식으로 향유되었다. 이것들은 달리 표현한다면, ‘노래하기’, ‘읊기’, ‘읽기’가 될 것이다. 17세기까지의 가사는 대체로 가창의 방식으로 향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제목에 이라고 한 것이 많아 고려때의 속요나 경기체가의 제목과 비슷한 점이 보이는데, 이러한 관행으로 보아 가창을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초기 가사 작품에 관한 기록에 가창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가창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18세기 무렵부터는 가창과 무관한 음영이 보편적인 향유방식으로 자리잡았다. 17세기 이후에 등장한 서민가사나 규방가사 또는 나 같은 장편가사는 이전의 가사처럼 가창되지 않고 음영되었다. 장편가사가 음영되었음은 를 보면 알 수 있다. 만언사에는 무수한 궁녀가 둘러 앉아 한 책을 보며 오열하기도 하고 절도하기도 하며 탄식하고 칭찬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여러 가지의 사오항이 동시다발적으로 연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한 사람이 읽어주고 다른 사람들은 주위에서 듣고 있던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다.여기까지가 가사의 형식적인 측면과 향유방식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한 논의라면, 지금부터는 조선후기를 두 시기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들이 창작, 향유되었는지를 알아보려 한다. 우선 시기의 나눔은 숙종조를 기점으로 하려 한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부터 숙종조 이전까지는 ‘가사의 확장기’로, 숙종조 이후부터 개화기 전까지를 ‘가사의 확장기’로 지칭하려 한다.우선, 임진왜란 이후로부터 숙종조 전까지의 시기를 가사의 ‘변모기’라 한다. 이시기는 사대부가사의 작가의식이 변모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임·병양란을 거치면서 양반들의 허위가 폭로되고 서민들이 각성하기 시작함으로써 의식의 전환이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사대부가사 작가들도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전대의 가사 작품들에는 유교적 이념과 가치관이 투철히 반영되었으나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피폐한 사회상과 생활고를 토로하고 사회현실을 비판하는 가사들이 상당히 나타나게 되었다.박인로의 , , 채득기의 등은 임·병양란을 소재로 하여 왜나 청에 대한 적개심과 전쟁의 비참함을 읖고 있으며, 최현의 에는 전쟁으로 인한 사회의 피폐상과 파당과 분쟁을 일삼으며 수탈을 자행하는 위정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박인로의 와 정훈의 , 는 생활고에 찌든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는 인조의 덕을 찬양하는 반면 광해군의 폭정과 관리의 부패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한편 허전의 는 만조백관의 부패상을 은유적 수법으로 읊었으며, 이원익의 는 당파 싸움에만 몰두하고 있는 집권관료들을 풍자하였다.물론 이 때에도 강호가사, 유배가사, 기행가사 등은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강호가사로는 고응척의 , 박인로의 , , , 윤이후의 , 조우인의 이, 연군가사로는 조우인의 가, 유배가사로는 송주석의 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조우인의 , , 이현의 , 박권의 과 같은 기행가사도 이어졌다.이 시기의 가사는 작가의식의 변모뿐만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다소의 변화가 초래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노계가사에는 2음보를 기저율격으로 하는 6음보 1행이 많이 쓰였는데 이는 일정한 형식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서민의식의 반영이라 하겠다. 그리고, 각 작품의 중간에 감탄낙구의 성격을 띤 척사가 더러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은 가창할 때에 변화를 줌으로써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가의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하겠다.다음으로, 숙종조 이후부터 개화기 전까지의 시기를 살펴보자. ‘변모기’까지의 가사문학은 그 본질태인 음영 위주로 향유되었고 , 등 유명한 가사는 창으로 불리었으나, 17세기 후기부터 한편으로는 음영화가 강화되어 차츰 장편화 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항의 전문 소리꾼에 의하여 가창가사(歌唱歌辭)가 유행되어 12가사와 같은 ‘가사(歌辭)의 가사(歌詞)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2가사는 조선 후기에 성행하여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12편의 가창가사, 춘면곡, 백구사, 황계사, 죽지사, 양양가, 어부사, 길군악, 상사별곡, 권주가, 수양산가, 처사가, 매화타령을 가리킨다.그리고 이 시기에는 서민가사와 규방가사가 등장하고 천주교가사가 나타나는 등 가사문학의 작자와 향유층이 크게 확대되었다.17세기 말엽에 서민의 각성과 실학사상 및 새로이 유행하게 된 삭대엽과 같은 촉급한 음악 등의 영향을 받아 서민문학의 일환으로 등장한 서민가사는 유·불의 기존이념을 파괴하면서 연정과 취락을 비롯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숨김없이 노래하였다.
민속극의 유형과 특성에 대하여 설명하시오.(한국문학통사 3권 9.15. 민속극의 저력과 변용을 중심으로)본디 한국에는 전통적으로 창작극이 없었다. 창작극은 극작가가 각본을 가지고 배우가 배역을 맡아 연습해서 공연하는 연극을 말하는데, 개화기 이전까지 한국에는 극본을 짓거나 각색하는 극작가가 없었다. 그 이유는 작품을 짓는 일은 글을 잘 아는 유식한 사람이 하는 일로서, 그 유식한 사람이란 한문을 잘하는 사대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배우는 대개 천민인 데다 무식하였고, 관중도 한문 대사를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한문 극본은 쓸모가 없었다. 또한 사대부 문인이 한글로 극본을 쓸 수도 있었지만 한글로 놀이를 위한 글을 짓는다는 것은 사대부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고유의 연극 문화 또는 극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민속극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번 보고서에서는 민속극 전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보려 한다.민속극은 민간에서 행위로 전승되는 연극으로서, 한국의 민속극에는 무극, 가면극, 인형극 세가지가 있다. 넓은 의미로 본다면 판소리도 민속극에 포함시킬 수도 있겠지만, 판소리에 대한 논의는 앞선 보고서에서 다뤘으므로 본고에서는 무극, 가면극, 인형극에 대해서만 다루도록 하겠다. 무극은 굿에서 연행되는 굿놀이를 말하며, 인형극은 남사당이라는 유랑 연예집단이 연행하던 꼭두각시놀음을 말하고, 가면극은 각 지역에서 행해지던 탈놀이를 말한다.이들 중 우선 무극에 대해 살펴보자. 무극은 굿에서 연행되는 연극을 말한다. 무극을 ‘굿놀이’라고 하거나 ‘희곡무가’라고도 한다. 무극은 개인이나 가정의 요구에 의해 연행하는 굿이 아닌 마을 단위의 굿인 별신굿 등에서 주로 연행되었다. 또한 무극은 강신무가 아닌 세습무들에 의해 주로 연행되고 있다. 그리고 무극을 연행하는 무당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남성이 일반적인 굿거리를 연행하는 제주도에서는 남자 무당인 심방이 무극을 주도하며, 동해안의 경우에도 남자 무당인 화랭이(또는 ‘양중’이라고 함)가 주도한다. 물론 여자 무당이 무극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남자 무당이 주도적이며, 남자 무당만으로 연행되는 무극도 있다.현재까지 알려진 무극 자료로는 서울지역의 , 경기도 양주의 , , 황해도지역의 , , , , , , 평안도지역의 , , 경기도지역의 , 동해안지역의 , , , , , , , 전남 순천 등지의 , 거제도지역의 , 진도지역의 , 제주도지역의 , , , , , , , , , 등이 있다.다음으로 무극의 연행방식 중 눈여겨 볼만한 부분을 살펴보자. 우선 무극의 특징은 ‘관중의 등장인물화’이다. 무극의 등장인물은 주로 무당이 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관중에게 배역을 맡기기도 한다. 관중을 등장인물로 전환시키는 방식은 그 자체가 희극미를 발생시킨다. 또한, 관중을 관중으로 남겨두지 않고 극 속의 인물로 전환시킴으로써 ‘보기만하는 연극’이 ‘더불어 하는 연극’으로 바뀌게 된다.두 번째 특징은 성적 표현의 증가이다. 무극에는 모의적인 성행위와 성적 표현이 자주 보인다. 모의적인 성행위나 성적 표현의 증가를 반드시 주술적인 의미로 파악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모의적인 성행위나 성적 표현이 과거에는 주술적 의미를 지닌 것일 수 있으나, 현재 연행되는 무극에서 성적인 요소는 주술적 의례나 흔적이 아닌 예술적 소재일 뿐이다. 왜냐하면 굿이나 탈춤이 아닌 문학에서도 남녀간의 성문제는 문학의 소재이기 때문이다. 성적인 소재는 민속 연행문학에서 희극미를 창출하며, 희극은 성적인 문제를 표현한 것이 기원이라는 사실로도 이는 확인된다.세 번째로는 주술적 의미의 부여이다. 무극에서 연행자는 극중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주술적 의미를 수시로 부여한다. 극적 행위에 주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행위가 모두 보통의 행위가 아닌 것들이다. 성적 행위 또는 욕설등 해서는 안되거나 하기 힘든 행위들을 시키거나 하는 것이다. 무당들은 이런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주술적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무당은 관중이나 제관들에게 별비를 요구하면서 주술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다음으로 가면극에 대해 살펴보자. 가면극의 기원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은 농악굿 기원설이다. 이 학설은 조동일이 주장했는데 가면극은 농촌의 마을 공동제전인 마을굿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마을굿에는 농악대의 ‘잡색놀이’라고 하는 탈놀이가 있으며, 가면극의 대사 가운데는 마을 수호신으로서 남신과 여신의 역할이 나타난 예가 있다. 또한 가면극에서의 남녀 결합과 아이의 출산은 농경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적 요소가 강하다. 이런점에서 한국의 가면극은 농촌의 제전에서 형성된 것임이 확실시된다.가면극의 공연방식은 다음과 같다. 가면극을 연기하는 배우는 마을 사람 중에서 연기수업을 받은 숙달된 사람이며, 도시 가면극의 경우는 전문적인 연희자가 있으나 연희만을 직업으로 해 생계를 꾸려 가지는 않는다. 공연장소는 관중이 많이 모여 관람하기 편리한 곳이면 어디나 다 좋다. 무대를 따로 가설하지 않으며 마당 한가운데서 공연을 하는데, 다만 가면을 바꾸어 쓰고 옷을 갈아입는 ‘개복청’이란 가건물을 공연장소 귀퉁이에 설치해 놓을 뿐이다. 관중석과 무대는 특별한 구분이 없고 같은 평면으로 되어있는데, 봉산탈춤의 경우는 관람석을 공연무대보다도 높게 다락으로 만들기도 한다. 극중인물이 관중을 대화의 상대로 끌어들이기도 하는데, 이같은 경우는 상황에 따라 대화의 내용이 달라진다. 하나의 극은 대체로 여러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과장은 거의 독립적이어서 한 과장이 끝나면 가면을 바꾸어 쓰고 다른 배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가면극은 지역별로 아주 다양하게 존재한다. 모두를 살펴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이번 보고서에서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과장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각 지역에서 전승되는 가면극의 공통된 과장은 영노과장, 미얄과장, 노장과장, 양반과장이다. 영노과장은 영노또는 이시미라는 무서운 동물이 사람을 잡아먹는 모습과 이 동물을 물리치는 내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재해에 맞서서 싸우는 원시적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미얄과장에서는 영감과 미얄, 돌모리집의 갈등으로 한 남성과 두 여성 사이의 삼각관계를 보여주는데, 늙은 여성이 젊은 여성에게 패배하고 영감은 젊은 여성과 결합해 아기를 출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영감과 미얄이 생산을 맡은 남신과 여신이라는 점에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생산신 제전에서 유래한 과장으로 생각된다. 노장과장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승의 권위가 확립된 이후에, 그리고 양반과장은 사회의 상층신분으로서 양반계층이 형성된 이후에 형성된 과장이라고 본다.마지막으로 인형극을 살펴보자. 인형극은 주로 남사당패에서 연행되었는데, 꼭두각시놀음, 만석중놀이, 발탈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중 꼭두각시놀음이 자료도 가장 풍부하고, 인형극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므로, 본고에서는 꼭두각시놀음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해보려 한다.꼭두각시놀음은 일명 박첨지놀음으로 불렸다. 등장인물의 하나인 박첨지는 연분홍색 바탕의 얼굴에 흰머리와 흰수염을 하고 소매가 긴 저고리를 입은 허름한 노인인데, 놀이의 진행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본래는 첨지중추부사와 같은 벼슬아치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실제 놀이에서는 평범한 서민으로 등장한다. 그의 극중역할은 두가지다. 해설자역과 등장인물역이 그것이다. 이 두 역할을 효과적으로 전개시킴으로써 화소의 설정, 장면의 구성, 인물간의 상관성 등을 익살스럽고 원활하게 이끌어간다.다음으로 꼭두각시놀음의 언어적 요소에 대해 알아보자. 꼭두각시놀음에서 언어적인 요소는 재담과 노래 가사이다. 꼭두들은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조종사들과 산받이가 인형의 재담을 대신한다. 재담 도중에 가끔씩 부르는 노래 역시 그들이 대신한다. 이른바 ‘목소리 출연’인 것이다. 조종사들은 무대(포장) 안에서 인형을 조종하면서 밖을 내다보지 않고 재담을 하거나 노래해야 하므로 분주하면서도 능숙하고, 익살스러우면서도 치밀하게 움직이는 데 숙달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조종사의 역할을 원활하게 도와주고 연출의 방향을 잡아주는 일은 산받이가 맡아서 하게 된다. 산받이는 무대 밖에 앉아 있으므로 인형의 움직임과 관중의 반응을 동시에 살필 수 있다. 그러므로 놀음 전체의 방향과 전개상황을 고려하여 순간순간 적절한 반주와 재담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목소리 출연만이 아니라 연출까지 겸하는 것이다.
고산 윤선도에 대한 연구- 자연을 노래한 작품을 중심으로 -강의명교수명소속학번이름제출일목 차Ⅰ. 서론Ⅱ. 본론1. 윤선도의 생애 1 ~ 52. 견회요, 우후요, 몽천요 5 ~ 123. 만흥 12 ~ 154. 오우가 15 ~ 185. 어부사시사 18 ~ 27Ⅲ. 결론※ 참고문헌Ⅰ. 서론하나의 문학장르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작가와 대표적인 작품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은 작가의 상황과 현실인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생애에 대한 연구도 작품의 이해, 나아가서 장르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시조장르에서 우수한 작가로 칭할만한 사람은 누가 있을까? 바로 고산 윤선도가 그에 해당할 것이다. 고산 윤선도는 송강 정철과 함께 우리나라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송강 정철이 가사 문학의 으뜸이라면, 고산 윤선도는 시조문학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본고에서는 시조장르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차원에서, 고산 윤선도의 생애와 그의 주요 작품들에 대해 연구해보려 한다. 주요작품으로는 견회요를 포함한 3개의 ‘요’ 작품과 오우가, 만흥, 어부사시사를 선정하였으며, 창작연대순으로 작품에 대한 분석적 연구를 진행해보도록 하겠다.Ⅱ. 본론1. 윤선도의 생애윤선도(1587년 선조 20년 6월 22일 ~ 1671년 현종 12년 6월 11일)의 자는 약이, 호는 고산 또는 해옹이다.선생은 서울 종로구 연지동(옛 한경 동부 연화방)에서 예빈시 부정인 윤유심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선생의 모친은 좌의정을 지낸 안현의 손녀다.윤고산 선생은 시조 윤존부의 16세손이며, 당대의 국부였으며 해남윤씨의 중흥을 이룬 어초은 윤효정은 고산의 고조부이다. 효정의 여섯 아들 가운데 윤구, 윤행, 윤복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특히 윤행은 8주 목사를 역임하였고, 윤복은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여 이름을 날렸다.윤구(호·귤정)의 차남 윤의중은 평양감사와 한성부 좌윤, 형조·공조·예조판서(정2품)에 좌참찬 등으로게 되는데, 금쇄동은 4차에 걸쳐 약 10여년을, 부용동은 7차에 걸쳐 약 13년을 머물렀던 곳이다.이상 고산의 생애를 통해 살펴본 바, 그의 삶은 평탄치가 않았다. 그는 8세에 양자로 입적되어 외롭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야 했던 소년시절을 겪는다. 유가이념에 충실했던 고산은 불의를 참지 못해 출사보다 먼저 유배 생활(14년 4개월)을 거쳐야 했다. 그가 인조반정으로 해배된 이후 시작한 관직생활은 수차에 거친 과거 입격(10회)이나 관직제수 횟수(임명-25회, 부임-19회)에 비해 그 기간(8년 10개월)이 비교적 짧은 편이다. 이후 정치생활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결행한 고원(주로 해남과 보길도)에서의 은둔생활은 그의 정신적 고뇌를 대변해준 삶의 흔적들이다. 결국 고산은 유배-출사-은둔을 반복하면서 좌절과 고통·득의와 환희·풍류생활의 만끽 등 인생의 희로애락을 골고루 경험하며 살다간 탈 많고 사연 많은 85세의 인생 행로였다.풍파 많은 인생을 살았지만, 고산은 1991년 문화부에서 문화의 인물로 선정하여 문화행사를 하고 있으며, 출생지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오우가를 새긴 출생지 기념비가 세워졌다. 한국관광공사에서는 1988년에, 명동 성당 앞에 윤고산 선생 옛 집터 표석을 세웠으며,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윤고산둑」위의 굴포 4개부락 주민들은 1991년에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또한 그의 생활공간이자, 작품의 배경이었던 보길도에는 세연정과 돈천석실이 복원되었다. 이외에도 고흥군 금산면 홍연리에는 윤고산선생 기념식수인 고산목 표석을 1994년에 금산친목회에서 세웠고, 윤고산의 종가 본댁인 해남 연동에는 「고산유적관리사무소」와 유물전시관이 건립, 개관되어 한국 문화의 본산으로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이것으로 고산의 생애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음 장에서 볼 것은 3개의 ‘요’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그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2. 견회요, 우후요, 몽천요병진년 난정을 주도한 집권당의 이이첨 등을 죽여야재가 개과했다”는데, 이 때 마침 오랜 장마가 개이었다. 내 말하기를 “그가 개과함이 진실로 오랜 장마가 개이고, 구름이 걷히며, 앞 내가 다시 맑아짐과 같다면, 우린들 어찌 어진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는가”하고 드디어 우리말 노래를 지어 그것을 노래로 불렀다.그 노래 이름 하여 라 했는데, 다음과 같다.(1) 구즌비 개단 말가 흐리던 구룸 걷단 말가압 내희 기픈 소히 다 맑앗다 하나산다진실로 맑디옫 맑아시면 갇긴 시서 오리라.앞의 서문으로 이 노래는 한 인간(당시의 어느 재상)의 개과천선함을 형상적으로 표현한 우의임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지루하게 내리던 궂은비와 어둡게 하늘을 뒤덮었던 흐린 구름이 개이고 걷힌 뒤 파란 하늘에 밝은 태양이 비침을 그렸다. 그러나 그러한 형상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남이 전하는 말로 듣고는 믿기지 않는 듯이 “~말가?”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자연의 변화된 형상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인감심성의 변화를 우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심성의 변화란 가시적이기가 어렵다. 또 궂은비는 냇물을 붇게 하지만 온갖 진애를 쓸어 넣어 그 물을 흐리게도 한다. 그 흐리던 물도, 구름 걷히고 비개여 푸른 하늘에 밝은 태양이 떠 있게 되면, 다시 맑아진다. 이제 앞 내의 깊은 소가 다 맑았다고 한다. 서문에서 ‘환청’이라 하였으니, 물은 맑음이 본성인데 그 본성을 회복하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앞 내의 깊은 소의 물이 맑디 맑다면 갓끈을 씻어 오겠다는 뜻을 나타내었다.맹자는 말하기를 어떤 아이가 노래하는데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굴원의 에서는 “어부 빙긋이 웃고 노 저어 가면서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 흐리면 내발을 씻으면 되노라’이라”로 풀이된다. 흐린 것을 없애고 더러움을 멀리하여 맑게 되는 것을 뜻하니, 이 맑은 물에 갓끈 씻음은 ‘거탁원예’하여 맑음을 획득한것이겠지만, ‘세속초월’을 형상화하는데 관용되었다은 욷?다 ?다마?어리고 햐암의 뜻의? 내 分분인가 ?노라고산은 이 시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살고 싶은 자신의 소망을 드러낸다. 고산은 산과 물이 흐르는 지역에 있는 바위 아래에 띠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노래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의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고 싶어 하는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행동을 비웃는다. 이는 고산이 다른 사람을 중상 모략하는 혼탁한 정치생활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고산이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어 하는가에 대한 소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다음으로, 6수 중에서 2를 읽어보자.보리밥 픗??을 알마초 머근 後후에바횟긋 믉?의 슬?지 노니노라그 나믄 녀나믄 일이야 부? 줄이 이시랴이 시는 시인이 1연에서 지은 바위 밑의 띠집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시인은 2연에서 보리밥과 풋나물을 적당히 먹고 바위옆의 물가에서 노니는 유유자적한 삶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삶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내려놓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초장에서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조촐한 삶을 나타냈으며, 종장에서는 물과 바위를 벗 삼으며 자연인이 되어 가는 정경을 그렸다. 그리고 종장은 ‘녀나믄 일’을 통해 시인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인간의 오욕칠정에서 벗어나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제시한다.이제 6수 중에서 3을 읽어보자.잔 들고 혼자 안자 먼 뫼흘 ?라보니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옴이 이리?랴말?도 우움도 아녀도 몯내 됴하 ?노라이 시는 시인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만족하며 지낼지라도 때로는 과거의 임이 그리울 때를 노래한 시이다. 물론 이 임은 과거에 한양에 있을 때에 자신이 모시던 왕이나 대군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사랑하는 그의 가족들이 될 수도 있다. 시인이 속세를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삶에 만족을 할지라도, 때때로 사랑하는 임들이 그리워지곤 했으로 자신의 자태를 드러낸 것처럼 자신의 지조와 절개도 어떠한 고난과 사회적 변화가 다가와도 전혀 변함이 없이 처음 그대로라는 것을 소나무의 상징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고산은 중장의 ‘모르는다’라고 반문함으로써 소나무의 이미지를 한층 강조하고 있다.이제 6수중에서 대나무(竹)를 노래한 시를 읽어보자.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곳기?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다뎌러코 四?時시예 프르니 그를 됴하 ?노라사군자(四君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이다. 매난국죽은 조선시대의 선비들에게 군자로 비유되었다. 대나무는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르름을 유지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식물이었다.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대나무는 곧게 하늘을 향하여 뻗어 있어서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굳게 지킨다는 것의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이는 고산 자신이 대나무처럼 영원히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표상이다.마지막으로 6수중에서 달(月)을 노래한 시를 읽어보자.쟈근 거시 노피 떠셔 萬만物믈을 다 비취니밤듕의 光광明명이 너만?니 또 잇?냐보고도 말 아니?니 내 벋인가 ?노라시인은 달이 하늘 높이 떠서 온 세상을 비추어 주니 깜깜한 밤에 너만한 것이 또 있겠느냐고 자문하고 있다. 고산은 바위와 물, 소나무와 대나무를 벗으로 노래한 이후에 마지막으로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오우로 사용했다. 이러한 달의 이미지는 현상세계에서 천상세계로 자신의 상상력을 확장시켜 자신과 대우주와의 통합을 노래한다. 그래서 고산은 낮에는 바위와 물, 소나무와 대나무와 우애를 나누지만, 밤에는 동산에 떠 있는 달과 교감을 나누면서 우정을 속삭이고 있다.요컨대, 고산은 에서 바위와 물, 소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달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자연을 벗삼아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것들은 결코 새로운 테마가 아니다. 자연물 속에서 항상적 원리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강호가도의 일반적 패턴이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