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경험 흐뭇한 이야기』 서평1. 책 소개하기(어떤 배경의 저자가 누구를 위하여 어떤 목적으로 쓴 책인가?)본서의 저자 손운산은 이화여자대학교 신학대학원의 목회상담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목회상담협회와 한국목회상담학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본서는 저자가 2012년부터 1년 동안 『기독교사상사』에 ‘돌봄의 목회’라는 주제로 연재했던 내용을 수정한 것이다. 그가 목회상담을 하며 만났던 경험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본서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저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의 수업에서 토론하면서 본서의 내용이 더욱 풍성해졌다고 말한다.본서는 따뜻한 경험을 상실한 사람들이 따뜻한 경험을 기대하며 교회를 찾아올 때 그들을 맞이해야 하는 목회자들과 상담전문가들을 주 대상으로 한다. 저자는 서론에서 본서가 이 시대의 상처 입은 영혼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교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2. 이 책이 주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자기말로 요약하기저자는 제목을 통해 본서의 주제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본서는 ‘따뜻한 경험’의 부재로 영혼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경험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그들이 스스로 자신에 대한 흐뭇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말한다.교회는 성경을 이야기하고 성경은 죄를 이야기한다. 따라서 교회는 죄와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저자는 무조건적인 회개의 강요는 치유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교회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마주하게 하여 자존감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처를 오히려 마주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교회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능한 한 모든 종류의 부재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교회는 엄마가 되어야 하며 친구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부재로 상처 입은 자들에게 사랑을 주어야 하고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따라서 교회는 정죄의한 분리였다.저자는 성경이 하나의 따뜻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정확히 말해,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따뜻한 이야기의 집합체이다. 그 안에는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으며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다. 저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품고 있는 인격적인 애정과 관심이 성경에 녹아 있다고 말한다.이러한 저자의 배경적인 사상은 한편으로는 성경을 친근하게 여기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성경의 신학적 원리를 의심하게 만든다.저자는 마가복음 6장에 등장하는 두 개의 잔치를 비교하며, 이것을 인간의 절망적인 영혼에 대입한다. 저자는 헤롯이 연 성대한 궁중 잔치와 예수님과 가난한 자들이 참여한 빈들에서의 조촐한 잔치가 이 사회의 어떤 소외된 사람들의 처지를 나타낸다고 말한다.예수님의 잔치에 초대된 자들은 궁중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가난하고 천박한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기적적인 잔치를 맛보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보리떡과 물고기뿐이다. 이런 것들은 굳이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더라도 평소에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다.게다가 그들은 잔치가 끝나면 다시 굶주린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왕과 귀족들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잔치를 배설할 수 있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자들에게 매일같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주실 수도 있는 능력이 충분하신 예수님은, 그러나 그들에게 그러한 기적을 더 이상 베풀지 않으신다. 대신 그들이 자신의 절망적인 삶을 대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저자에게 있어서 빈 들은 궁중 잔치와 비교되는 예수님의 잔치, 즉 상처 입은 영혼들이 찾아오는 교회의 잔치이다. 이 빈 들에서 목회자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고통을 나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빈 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영혼 그 자체, 혹은 그들이 처해있는 어떤 벗어날 수 없는 형편이다. 목회자의 역할은 이 빈 들을 궁중 잔치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빈 들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갖게 해 주는 사람이다.저자가 두 개의 상반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먹이신 ?게다가 주님이 베푸신 음식의 양은 그러고도 일곱 광주리나 되는 양이 남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빈 들에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 예수님의 동행에 초점을 맞춘다. 이 예수님은 그들의 생활의 전반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와 부딪치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능력을 갖는데 관심이 있으시다.나는 이 두 개의 능력을 분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을 잊어버리고 당장 먹을 음식을 걱정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자신이 베풀었던 기적을 상기시키신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예수님은 문제의 원인은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으셨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예수님은 자신의 기적을 잊어버리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빈 들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운 사람들이 자신의 고된 삶의 터전으로 당당하게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들과 먹고 마셨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목회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목회자는 그들의 삶을 실제적으로 개선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는 그들에게 삶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외면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기적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을 무책임한 희망고문이라는 말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분명한 사실은 목회자가 믿으라고 역설하는 기적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교회는 상담센터가 아니다. 목회자는 상담사가 아니다. 적어도 상담사의 역할만 감당해서는 안 된다. 상담이 내담자에게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람이라면 목회자는 성도가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궁중과 빈 들은 비교할 필요가 없는 이미지들이다. 두 개의 이미지가 상반된 풍찢어졌다는 것은 무죄한 자만이 ?속죄제를 드린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지성소가 만인에게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성소를 벗어나 인간에게로 나오셨다는 저자의 설명이다. 지성소 안에 자신을 ‘숨기고’ 계시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지성소 안에 들어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이야기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께 단번에 드려진 화목제가 되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자주 자신을 드리지 않으셨다.예수님의 죽으심은 휘장을 찢었다는 단편적인 사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행해져야 했던 제사였다. 예수님은 지성소에 숨어 계시던 하나님을 풀어주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지성소로 들어갈 수 없었던 우리가 당당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의 인격적인 속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하나님의 인간성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게다가 인간에게는, 적어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자신을 위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인간에게는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성을 버리면서까지 지성소를 나오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능력은 거룩성을 상실한 인간에게 거룩성을 회복시켜주는 데 있다.예수님의 사랑으로 치유를 경험한 인간은 기독교적 신앙과 관계없는 치유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없는 거룩한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삶의 전반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죄인에게는 도저히 허락되지 않은 하나님의 장소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저자는 성경이 대개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된다고 말한다. 하나는 ‘죄와 구원’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상처와 치유’의 관점이다.받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죄인은 본래 상처받은 도움이 필요한 한 약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회개는 병든 자의 신음소리가 되고 하나님의 용서는 치유의 경험으로 대체된다.저자는 교회가 한 개인의 죄의 문제, 즉 행위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교만한 행동인가를 지적한다.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말씀이라고 하는 잣대를 들어 정죄를 일삼는 교회 앞에 한 개인은 자신의 초라함과 마주하게 되고, 그런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절망감뿐이다.저자는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는 죄, 즉 행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따뜻한 경험을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그렇다면 성경은 실제로 죄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죄는 분명 행위의 문제이다. 그러나 인간 생애의 전체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순간순간의 행위가 아니다. 인간의 삶을 죄책감이라고 하는 껄끄러움 감정으로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것으로 죄를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인간이 불행한 이유를 따뜻한 경험의 부재라고 한다면, 성경은 그 따뜻한 경험의 부재의 원인을 말한다. 성경은 인간의 불행의 근본적인 이유를 죄에 두고 있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가장 결정적인 장애물이다. 인간이 따뜻한 경험을 하지 못해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삶에 하나님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말한다.성경이 요구하는 회개는 순간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아니다.어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한 때 무당의 삶을 살았다. 그가 원해서 무당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그 영적인 존재를 무서워했다. 그것은 몇 십 년 동안 그의 어머니를 괴롭혔고, 이제는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만약 그가 그것을 받아들여 무당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상을 옮겨 그의 동생을 괴롭히게 될 것이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무당이 되었다.많은 사람들이 그의 신기에 놀라고, 그가 매우 신통한 무당이라며 이곳였다.
『현대목회상담학자 연구』 요약1. 서론 : 현대목회상담학의 흐름홀리필드는 20세기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편대 목회돌봄 및 목회상담운동이 동시대인들을 이해하고 돕는 도구로 심리학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신학 전반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자아실현이라는 심리학의 언어가 구원이라는 신학의 언어를 대신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상담사역의 현장에서는 자아실현이라는 심리학적 용어가 자신들이 경험한 아픔과 그로 인한 상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얻는 구원마저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구원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본서는 목회돌봄과 목회상담이라고 하는 불확실한 영토를 개척한 학자들의 자취를 추적하는 데 목적이 있다. 본서를 통해 독자들은 독자 자신만의 목회상담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본서에서 다루는 목회상담학자들은 삶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신학을 펼쳤던 20세기와 21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이다.1) 목회상담 관련 주요 개념통상 목회상담이라고 부르는 분야를 지칭하는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임상목회교육, 목회돌봄, 목회상담, 목회신학 등. 임상목회교육은 임상감독의 지도 아래 신학생, 목회자, 종단의 회원, 교회의 인정을 받는 평신도들에게 ‘살아있는 인간문서’와의 만남을 통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 과정을 말한다. 목회돌봄은 도움이 필요한 개인이나 집단을 위해 목회자와 신앙공동체가 제공하는 치유,지지, 안내, 화해를 포함하는 다양한 돌봄의 사역을 가리킨다. 목회상담은 현재의 삶 속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목회적 도움을 요청하는 개인, 커플, 가족 등의 요구에 응답하는 사역을 가리킨다. 목회신학은 목회돌봄과 목회상담을 안내하는 이론, 실천, 방법론에 초점을 주는 신학 분야이다.2) 현대목회상담학의 흐름보이슨은 신학생들이 반드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힐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보이슨 이후 목회돌봄 및 목회상담 운동은 기 적용할지가 더욱 분명해진다.(3) 치료와 구원 : 보이슨은 구원을 소속감의 문제로 보았다. 구원이란 새로운 공동체, 즉 새 하늘과 새 땅에 소속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은 구별될 수 없다.(4) 임상목회교육 : 보이슨은 1625년 캐봇과 함께 ‘신학생을 위한 임상훈련’을 시작했다. 이 임상훈련의 목적은 첫째, 인간의 진정한 문제에 눈을 뜨게 하고 관찰 방법을 개발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어려움에 처함 사람을 돕는 능력을 향상시키고 영적건강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셋째, 어려움에 처함 자들을 돕는 전문가들 간의 상호이해를 향상시키는 것이다.3) 목회상담학 발전에 미친 영향과 한계보이슨은 임상목회교육 교과과정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상담기술을 중요시 하는 상담훈련생들에게 상담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통찰력과 마음가짐이라고 호소했다. 신학적 통찰은 고통과학적이며 목회적인 경험이다. 그는 ‘살아있는 인간문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하기를 당부했다. 그런데 보이슨의 ‘살아있는 인간문서’는 오히려 인간을 해석의 대상으로 폄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데 한계를 갖는다.4) 한국적 적용의 가능성과 한계‘살아있는 인간문서’로서의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 목회자의 심방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며 따라서 목회심방은 좀더 조직적이고 과학적인 교육이 요구된다. 보이슨이 시작한 임상목회교육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축어록’을 작성하도록 훈련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좀 더 객관적이고 조직적인 돌봄이 되게 하기 위해 그룹 슈퍼비전의 과정이 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효과적인 목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3. 시워드 힐트너1) 힐트너의 목회상담학(1) 목회상담의 목적과 전제 : 힐트너가 말하는 목회상담의 목적은 목회자가 교인들이 자신들의 내적 갈등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목회상담은 목회 상담자가 이해하고 수용하고 명료화하고 통합하는 한국인의 경험과 문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셋째, 그는 목회돌봄과 목회상담의 한국적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촉구한다.4. 웨인 오우츠1) 목회신학방법론과 주요 연구 주제(1) 오우츠의 목회신학 특징 : 오우츠 목회신학의 첫 번째 특징은 성서와 자유교회 전통에 입각한 신학이라는 것이다. 오우츠 목회신학의 두 번째 특징은 신학적 기초 위에 사회 과학적 접근들을 통합시키는 것이다. 세 번째로 그는 전통적인 ‘삶의 현장을 바탕으로 한 이론과 그 이론의 현장 적용’이라는 실천신학방법론 모델을 따르고 있다.(2) 오우츠 목회신학의 연구 주제 : 오우츠 목회신학의 연구 주제는 교회와 목회사역에서의 목회상담 적용이다. 목회현장의 필요에 대한 그의 관심은 기도와 이와 관련된 성령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그의 또 다른 관심은 사람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한 깊은 민감성과 연민에 기초한 돌봄이다. 그는 목회자/목회상담자는 기독교 가치체계 밖에 있는 사회과학적 통찰들을 번역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과 지혜와 말씀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2) 우우츠의 목회상담학이 현대목회상담학 발전에 미친 영향(1) 오우츠 목회상담학의 특성 : 오우츠의 목회상담학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목회상담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의 주요 목적인 치유와 해방과 위로의 사역을 수행한다. 둘째, 목회상담학은 일반상담과 달리 내담자 자신의 변화 의지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셋째, 오우츠의 목회상담은 신학의 한 영역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주요 영역이며, 유료화나 자격증화하여 개인 전문가의 의해 독점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교회의 사역이자 교인 상호간의 돌봄이다.(2) 오우츠의 현대목회상담 발전에 미친 영향 : 오우츠와 힐트너는 목회상담의 신학적 전통을 지키려 했으나 심리학은 지속적으로 그 역할을 확대해 목회상담의 학문적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왔다. 결국 1963년, 목회심리치료전문인의 양성과 훈련에 초점을 둔 미국목회상담3) 전인건강 : 전인건강 모델은 교회의 상황 속에서, 신앙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역동적인 관계를 통해서 서로 보살핌으로 치유와 성장을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면에 있어서 평등한 인간관계를 강조하고, 해방적인 관점, 신학적 기초로 해방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4) 생태적 심리치료 : 생태치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인 지구와의 건강한 상호작용에 의해서 양육되는 치유와 성장을 의미한다. 인간은 야생자연에 대한 집단무의식과 내면화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치유와 성장도 반드시 자연을 통한 치유와 성장이 동반되어야 한다.3) 목회상담학 발전에 미친 영향과 한계클라인벨이 목회상담학 발전에 미친 첫 번째 영향은 그가 기독교 목회전통 안에 심리학, 상담학의 새로운 자원들을 받아들이고 교구목사들, 전문목회상담사들이 그 자료를 사용할 수 있도록 비판적으로 통합하고 정리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영향은 그가 제시한 해방-성장모델이라는 새로운 목회상담 방법론이다. 세 번째 영향은 그의 전인건강 모델과 생태치유 모델이 1990년대, 2000년대 목회상담의 새로운 흐름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구목사의 기독교 전통적 목회돌봄을 상담과 심리치료로 물들였다는 한계를 갖는다. 또한 그는 인본주의 심리학 주제의 방법을 극복하려 노력했으나 뛰어넘지 못했다. 세 번째로 그의 수정된 모델은 일부 목회자들에 의해 오용될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클라인벨의 모델의 한계는 상당히 다원적으로 복잡하게 나열되어 있어서 목사나 목회상담사가 현장에서 적용하기 위해 집중력을 발휘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4) 한국적 적용의 가능성, 한계, 추후 연구를 위한 제언21세기 들어서면서 물질주의적이고 비윤리적은 삶으로 비판을 받는 한국교회는 인간의 성장과 건강의 핵심을 영성적이고 윤리적인 온전함이라고 강조한 클라인벨의 모델을 지표로 삼어야 한다. 이러한 클라인벨의 모델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이고 다양한 상담유형들을 제공하는 작업도구와 인본주의에 경계하는 신학적 사유가 필요최근의 상담학계의 ‘교차문화적 목회상담’을 위해서 일종의 메카 이론의 구실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목회해석학을 통해 동서양의 비교상담학적 연구나 통시대적 상담 연구와 같은 좋은 바탕이 될 수 있다.7. 단 브라우닝1) 방법론과 주요 연구주제들(1) 수정된 상관관계방법 : 브라우닝의 목회신학관은 먼저 다원화된 환경 안에서 목회신학의 과제는 신학적 윤리와 사회과학을 한데 묶어 인간적인 삶의 주기에 규범적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구체적인 목회신학방법론의 개정을 위해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브라우닝은 동일한 인간경험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에 등장하는 신학적인 해답을 다양한 학문적 관점, 즉 인간과학과 사회과학이 제시하는 대답과 비판적 연관을 시도하는 방법론인 ‘수정된 상관관계방법’을 제시하였다. 둘째, 그는 목회신학의 공적인 성격을 강조하여, 동일한 경험의 종교적 차원의 돌봄의 연관성을 식별하고 공고히 해야 할 것을 역설했다. 셋째, 그는 목회신학은 종교 윤리적 규범과 근본적으로 관련된 신학적 윤리의 한 표현으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넷째, 그는 목회신학이 인간 행위에 관한 신학 윤리적인 관점과 심리 역동적 관점을 연결시키는 실제적인 전략을 마련하고, 구체화하며, 어떠한 시점에 실행할지 등에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2) 실천철학적(해석학적) 접근 : 브라우닝은 실천철학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해석학적 틀에서 신학의 지평이 확장되기를 제안하면서, 모든 신학은 근본적으로 실천신학적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통적인 신학자들의 실천신학관, 즉 철학적, 역사적 신학에서 실천신학을 향해 가는 구조가 아닌, 실천에서 이론으로 그리고 다시 실천으로 진행되는 해석학적 재편성의 필요를 역설했다.(3) 비판적 실천신학 : 브라우닝의 목회신학의 방법론은 킬리히의 상관관계방법을 확장한 비판적 상관관계로 접근하는 비판적인 실천신학이다.2) 목회상담학 발전에 미친 영향과 한계브라우닝의 주요한 학문적 공헌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라인홀드 니버와 사회정의』 서평1. 요약본서의 저자는 기독교인이 정치권력이 행사되는 정치적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의 규범을 이기적이고 구조적인 모순과 불의로 가득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가, 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사랑의 규범과 윤리적 실천 사이에서 야기되는 갈등의 문제에 대해 정의실현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방법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완전한 평화와 정의가 있는 이상 사회를 꿈꾸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정의 실현을 위한 비폭력적인 강제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1) 정의와 사랑니버는 유대 ? 기독교의 중요성을 정의의 초월성에서 찾았다. 이 예언자적 종교의 정의는 모든 역사와 혈실을 초월하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한다. 니버는 예언자적 종교인 유대 ? 기독교의 정신만이 우리 시대의 사회적, 도덕적 문제들을 충실하게 다룰 수 있고, 일시적 과정의 상대성에 숭복하지 않고 모든 역사가 영원한 세계를 향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했다.니버는 예언자적 기독교의 완성을 예수의 윤리에서 찾는다. 그의 정의는 언제나 사랑과 역설적인 관계를 갖는다. 정의는 사랑 속에 포함되었을 때 완전하게 된다. 사랑의 법은 정의의 근원적인 기준일 뿐만 아니라, 정의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게 하면서 모든 근사적 정의 속에 내포되어 있다. 요컨대, 정의는 초월적인 사랑에 대한 근사적 성취인 셈이다. 정의와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지만 정의와 사랑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사랑은 이상적 상태의 원리이지만 정의는 인간의 죄에 감염된 불완전한 세계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버는 사랑을 정치영역에 직접 적용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니버에 의하면 사랑은 종교적 윤리의 이상인 반면, 정의는 이성적 윤리의 목표이다. 따라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자원은 바로 이성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하고 절대적감각을 통제하고 영원법은 이성을 통제한다.니버에게 있어서 정의는 오직 아가페 사랑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관계만이 정의를 정의답게 한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의 완전한 표현인,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구현한 희생적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 역사 속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이상이지만, 다른 모든 규범의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초월적인 규범으로 제시된다. 이 사랑은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자발적인 행위인 동시에 규범으로서 명령받을 수 있는 강제적인 것이다.2) 정의와 힘니버는 이성은 언제나 어떠한 사회의 상황 속에서의 이해관계의 노예가 되기 때문에 사회의 부정의는 도덕적 또는 합리적 설득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충돌은 불가피하며 힘에 대하여는 힘으로 도전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적 불의는 이 힘의 불균형에서 야기된다.니버는 힘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힘이 얼마든지 선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힘은 도덕적, 합리적 설득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죄악성을 제약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힘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다만 어떠한 목적으로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가치를 판단할 뿐이다. 사회 집단 간에 작용하는 힘은 곧 집단 이기심이며 이것은 힘의 불균형을 가져온다. 즉, 사회적 부정의를 심회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또 다른 힘, 즉 제재나 강제력을 가진 법적 힘을 사용해야 한다. 니버의 정의는 정치 현실 속의 힘이라는 수단, 특히, 정치적 강제인 권력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 요컨대, 니버의 사회정의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적 개념을 기초로 한 힘의 균형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정의라 할 수 있다.따라서 저자는 니버의 정의론을 이렇게 요약한다. “니버의 정의론은 이성과 자연법적인 정의를 토대로 하지 않은 성서적 개념의 정의에서 동기를 부여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현된 희생적 사랑의 초월적 이상과 사회현실 속에서 정치의 궁극적인 목문이다. 집단 안에서 이기심이 없는 순수한 도덕성을 회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회에서는 희생을 요구하는 순수한 사랑의 윤리가 적용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사회 문제에 개인적 도덕의 규범을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그러나 니버는 사회 윤리와 개인 윤리가 상호의존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버는 사회적 관점에서의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의지만, 개인적 관점에서의 최고의 이상은 무사성(unselfishness)이라고 주장했다. 주지했다시피 사랑과 정의의 변증법적 관계는 사회윤리를 위한 원리적 기초이다. 따라서 사회 윤리에서는 마땅히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데, 이 사회정의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기 정치적 방법인 권력정치론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니버에게 있어서 정치와 도덕은 상호 보충적 개념이다. 니버는 도덕성으로 정치를 해결하려는 한계를 비웃는 정치적 냉소주의와 패배주의, 그리고 정치영역에서 도덕성을 배제하려는 야수적인 정치 현실 속에서 기독교 윤리의 책임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기독교 윤리는 정치와 윤리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즉, 니버는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윤리적 이상인 사랑의 타당성과 책임성을 상대적인 정치 영역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과 열정인 권력정치론이라는,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방법론을 확립한 것이다.권력정치론의 필요성에 대한 니버의 역설을 통해 우리는 그가 가진 인간의 개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인간 안에는 죄의 불가피성과 인간의 자유가 역설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을 지나친 비관주의로도, 지나친 낙관주의로도 보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인간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원의이다. 니버는 인간은 비록 원죄를 가졌지만 부분적으로 원의 또한 남아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므로 인간의 자유는 부정의로 기우는 경향을 갖는다. 여기에서 니버는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주창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니버의 인간론은 비관적인 정통적 기독교의 인간위한다는 목적을 가지며,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일상과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민주주의는 전체 국민들이 공동의 선을 정의하는 과정과 결정에 기여할 수 있도록 충분한 이해와 덕을 갖추게 하고, 엘리트보다 더 적절하게 자신들의 삶의 문제에 대한 옳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견제한다. 그리고 시민 각자가 한 인격으로서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도록 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유일한 공헌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니버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기반을 종교적 겸손에 둔다.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관용은 기독교적 겸손 없이는 불가능하다. 민주주의적 삶은 개인 상호간 또는 집단 상호간에서 관대한 협력의 정신을 요구한다.저자는 니버가 말하는 정치와 힘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한다. “니버는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적인 방법으로서 힘의 분재와 균형, 즉 권력정치론을 제안했다. 이 권력정치론은 개인윤리가 아닌 사회윤리 영역에 적용된다. 사회영역의 정치는 도덕과의 관계성 속에서 정치의 본질인 사회정의를 구현할 수 있으며, 사회정의는 권력, 민주적 합의에 의한 합법적인 강제로 성취될 수 있다. 니버의 권력정치론은 낙관적인 동시에 미관정신 성서적이며 연설적인 인간 이해와 체제 안에서 견제와 비판이 가능한 민주주의 체제와 종교적 겸손을 통한 시민적 관용이라는 전제를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3) 저자의 비판 : 정의와 평화저자는 니버의 권력정치론이 말하는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에는 폭력과 전쟁의 용인과 힘의 사용을 통제하는 국제적 메커니즘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니버의 정의론에는 사랑이 기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의 복음이 평화의 복음이라고 말하면서 평화와 정의라는 개념들이 기독교 정치윤리의 결정적인 기본도식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성서적 개념의 기독교 평화는 전쟁의 부재라는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정의 실현이라는 적극적 평화의 개념을 연결하는 동시에 정의를 통한 평화의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인 평화라 할 수 있다 교회의 신학이기보다는 정치 현실 속에서 최소한의 신학적 또는 기독교적 개념의 타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니버의 정의론이 보다 건전한 성서적, 신학적인 기독교 정의론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전 세계의 연대를 통한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실천하기 위해 고난과 비폭력적인 저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2. 감상니버는 정의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 안에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는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이상인 사랑에 가장 가까운 곳에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상이다. 그의 비관론적인 혹은 낙관론적인 인간론은 인간의 한계를 정의에 못 박아 둔다. 니버의 정의론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기대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무한한 동경이다.니버의 정의는 마치 사랑의 대체처럼 보인다. 진실한 사랑을 실현할 수 없는 인간은 정의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니버의 믿음대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상일까?하나님의 사랑의 긍극적 완성을 이끌어낸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한 바 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주는 “본”을 보여준 뒤에 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사랑이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요한복음 15장에 이르러 예수는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 그는 자신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밝힌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이것은 니버는 물론이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적 메시지에 동의하는 사람은 누구나 동의할 사랑의 정의이다.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을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노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랑의 본을 보인다. 물론 이 죽음은 제자들만을 않다.
「예배와 예식 모범」 요약 및 감상1. 서론서론에서 저자는 본서의 용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본서는 기독교 전통 내에 존재하는 여러 예배 형태들 속에서 집례자들이 각 상황에서 필요로 하는 주요 제스처 혹은 행위를 돕기 위해 만든 일종의 안내서이다. 따라서 본서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든 교파를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해당될 만한 기본 해설서라 할 수 있다. 본서의 용도는 기독교 예배에서 집례의 본질적 요소들에 대해 실제적으로 안내하는 데 있다. 이 본질적 요소는 집례자와 여러 예배 위원들 간의 교환 행동 및 하나님과 예배공동체 간의 상호 참여에 관한 것이다. 예전은 예배 의식을 통해 우리가 함께 공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이며, 한편으로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수여의 행위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예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곧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며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되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며,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저자는 이런 경축에서 가장 중요한 예식이 성찬이라고 말한다. 유월전 만찬에서 비롯된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후계자가 되었다는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예배는 오늘까지 어떠한 변화를 거쳐 왔는가. 처음 4세기 동안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실행되던 예전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 학문적 발전과 개혁의 진행에 따라 이루어진 에큐메니컬한 교류 덕분에 현재 모든 중요 교파에서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된 예배에 관한 수많은 자료들과 의식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문제점을 둔다. 저자는 모든 기독교 예배의 상징 행위적 특성의 중요성과 예식서의 활용 방법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이 이 책의 저술 목적인 것이다.저자는 신실한 예배는 육화된 언어와 제스처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달하는 바른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스처와 말은 서로 결합하여 특정의 역사와 사회적 관계 속의 의미들을 창출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표현들을 이해하고 소통하도록 방향을 잡아주고 도와준다. 따라서 이 책은 예배에 반드시 필요한 제스처, 신체적 표현, 그리고 움직임들을 제시한다. 20세기(그러나 저자는 본서가 21세기에도 유용하게 사용되기를 바라 마지않을 것이다) 예배의 개혁은 우리 공동의 기독교적 유산인 초대교회의 형태와 신학적 감각을 회복하였다. 집례자들과 목회자들은 공통된 범위 안에 있는 예배의 제스처들을 지킴으로서 그 전통을 존중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앙의 근본적 일치를 가능하게 한다.2. 예전과 그에 따른 제스처들1) 말씀 예전 : 기독교 공동체는 처음부터 성서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모여, 떡을 뗌(성찬)과 공동기도의 교제 속에서 믿음을 지속해 나갔다(행 2:42 이하). 말씀 주변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믿음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읽기, 듣기, 찬양, 예배 등을 통해 역사를 공유하고 기억하였다.주일 예배에서, 말씀 예전은 특별히 기도와 찬양을 배경으로 성서와 선포(설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이 말씀 예전은 성찬 예전과 근본적인 연계성을 가진다. 성찬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신비를 세상에 드러낸다. 말씀 예전은 이 성찬 예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하여 육화된 말씀 속에 온전히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기억해야 할 제스처로는 성서 봉독과 설교 시에 사용되는 제스처이다. 성서 봉독을 할 때는 성서의 우위성과 성서 봉독의 위엄이 드러나야 한다. 따라서 리듬은 자연스러우면서 서두르지 않도록 하고 손은 책 위나 봉독대 위에 있는 것이 좋다. 봉독 자체만으로도 선포이므로 봉독자나 집례자는 희한한 행동을 과도하게 극화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 제스처는 설교이다. 몸, 얼굴, 손의 태도 등은 설교자가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바와 밀접히 연계되어야 한다. 관련 없는 우연적 행동, 우쭐하는 태도, 방어적이거나 지나치게 극적인 제스처는 전해지는 언어의 의미나 힘을 애매하게 하거나 변질시킬 수 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하는 것이고, 기도하러 온 사람들에게 오늘을 향한 말씀이 들려지게 하는 것이다.2) 성찬 예전 : 하나님은 말씀 예전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성찬 예식을 통해 응답한다. 기독교 성찬 예배의 모양은 떡을 취함, 축복함, 떡을 뗌, 떡을 나눔 등의 네 가지 행위로 나타난다. 세례, 감독 안수식, 성찬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을 통해 성찬예식의 제스처를 살펴볼 수 있다. 성찬식은 감독들의 감독 후보자에 대한 안수기도 후 새로운 감독에 의한 성찬식 거행에 이어 입맞춤을 교환으로 시작된다. 이후 성찬상 주변 각 위치에 자기 역할에 맞게 배치하는 행위, 엄숙히 성찬성물 등의 봉헌물을 받고 그것들을 준비하며 기도 하고 그 위에 놓은 행위인 봉헌식이 거행된다. 봉헌식 후 집례자과 사람들은 소위 수르슴 코르다라고 하는 시작대화를 나눈다. 이어 성별의 기도인 삼성송이 시작된다. 봉헌물을 드릴 때 행해지는 기도인 대감사기도는 감사, 제정자, 기념, 성령초빙, 영광송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다. 기도가 끝난 뒤 분병과 배찬이 이어진다. 사제는 당시에는 하나의 덩어리였던 떡을 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그것을 받는다. 배찬은 기립한 상태로 진행된다.유난히 상징적인 제스처로 가득한 성찬 예식의 제스처들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를 꼽으라 한다면 제정사와 성령초빙, 그리고 분병과 배찬에 사용되는 제스처가 아닐까 싶다. 제정사의 제스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기 전 하셨던 말씀을 행위를 통해 생생하게 재연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이어 성령초빙의 제스처는 이 성찬 예식에 ‘그’ 예수님께서 임재하심을 확인시킨다. 이어 쪼개진 떡과 사람마다 분배되는 포도주는 성찬예식의 의미를 강하게 되새기게 한다.3) 세례 :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그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은 수세자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신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언약을 구체화 하는 것이다. 집례자, 돕는 이들, 그리고 회중들의 특정 제스처들과 상징행위들의 저변에 깔린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례를 통해 몸 된 교회에 들어온 수세자들에게 구원과 보존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근본적인 신학적 진리이다. 후보자와 전체 교회는 몸의 제스처와 주체적인 상징들을 통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주시는 신비에 대해 열린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세례 안에서의 행위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 나타난 구원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의 회심과 그리스도 안에서 완숙의 모습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성장과 관련된다.교회가 본서에서 논의되는 제스처들의 의미와 상징행위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세례식은 그만큼 빈약해질 것이다. 세례식의 각 차원 ?기도, 제스처, 음악, 침묵, 움직임, 상징들- 은 하나님의 신비에 우리가 참여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묻고 답하는 예배학 Cafe」 서평1. 책에 대한 소개저 자 : 조기연저서명 : 묻고 답하는 예배학 Cafe출판사 : 대한기독교서회출판일 : 2009년 2월 27일분 량 : 327p저자는 본서의 제목을 「묻고 답하는 예배학 Cafe」라고 정했다. 본서가 보다 폭넓게 읽히기를 원하는 저자의 의도가 십분 드러나 있는 제목이다. 서론에서 저자는 본서가 “학국교회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이 책을 통해 예배에 대한 이해를 한층 증진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본서는 신학적 소양이 없는 평신도는 이해하기 힘든 신학전공서적이 아니다. 저자의 의도는 목회자는 물론 예배에 직접 참여하는 평신도들이 함께 교회 공동체가 되어 주체적으로 예배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있다. 카페에 앉아 각자 기호에 맞는 차를 마시며 예배에 관한 무거운, 혹은 가벼운 주제를 스스럼없이 나누며 더 나은 예배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교회 공동체를, 저자는 책을 통해서나마 실현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물론 저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카페”라는 단어가 주는 자유로움과 다소의 가벼움이 아니라 “예배학”이 가지는 중요성이다. 저자는 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인 성도의 존재 목적을 예배에서 찾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때, -성경적, 신학적 지식을 근거로 하여- 저자가 단언하는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예배”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바른 성경적 지식을 토대도 하여 격식에 맞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올바른 예배자의 자세라고 주장한다.2. 저자의 의도저자가 서론에서 밝힌 대로 본서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예배 현장에서 직접 부딪치는 구체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10여 년 동안 예배학을 강의하면서 받아온 공통적인 질문들을 추려 총 57가지의 질문과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본서의 내용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예배의 일반적인 이해를 시작으로 예배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내용들을 하나하나 풀어 가다가 마지막에는 기독받은 질문들은 “주일”의 의미나 “예배와 집회의 차이”, “성만찬의 의미”, “예배에서의 찬송의 역할과 중요성”. “예배당의 필요성”과 같은 다소 굵직한 것들부터 “예배를 드리는 구체적인 시간”, “대표기도”, “인터넷 예배의 정당성”, “성만찬에서 사용하는 포도주와 빵의 양”, “성가대 좌석의 위치”, “강대상의 위치” 등과 같은, 언뜻 보기에는 사소하다고도 할 수 있는 세밀한 질문까지 다양하다. 저자는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종류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독자가 납득하고 이해할만한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3. 내용저자가 추구하는 예배는 어떤 독자에게는 지극히 전통적인 예배로 비춰질 수도 있다. 저자는 예배의 순서나 각 순서마다 이루어지는 행동 양식 하나하나에 성경적, 신학적, 그리고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힘쓴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예배의 구성 요소는 수정하거나 과감히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저자가 추구하는 예배는 전통적이나 한편으로는 개혁적이다.저자는 초대교회 때 행해졌던 예배의 의미와 영성을 되찾기를 촉구한다. 소위 이 “회복된 예배 형식”은 “예배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성만찬을 매주 예배의 정규 순서로 회복시키며, 성경을 두 곳 내지는 세 곳 읽고, 교회력과 성서정과를 지키는 것”이다. 현대의 교회가 초대교회 공동체의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와 현대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전통이라고 말할 수도, 관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어찌 되었든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퇴색되거나 변형된 예배 대신 순수함에 가까운 예배를 회복하는 데 있는 것이다.그러나 저자가 마치 골수분자처럼 역사 속으로 들어가 초대교회의 예배를 통째로 떠온 것 같은, 시대착오적인 예배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초대교회 예배를 추구하는 이유는, 그 예배가 가지고 있는 내용에 부합하는 형식을 추구하기 때문인 것이다.본서에서 저자는 “이머징 워적 예배“라고 평가한다. 이머징 워십은 현대의 예배가 놓치고 있는 ”초대교회의 예배“를 포스트모더니즘에 맞게 재해석하고 새롭게 구체화 시킨 것이다.저자는 예배의 풍성함이 회중의 참여도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이해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회중이 제자리에 앉아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일어서거나 앉고, 찬양하고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다. 회중의 참여는 성만찬을 통해서, 혹은 교창과 같은 음악적 도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요컨대 저자가 지향하는 예배는 “오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예배인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예배를 한 마디로 “온 몸을 통한 예배”라고 정의한다. 저자는 “지, 정, 의 모두를 동원하여 예배를 드릴 때,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주장한다.저자는 한편으로 예배의 거룩성을 강조한다. 예배의 목적을 어디에 둘 것이냐에 대해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자답한다. 예배의 제1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열린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저자는 열린 예배가 가지는 몇 가지 단점을 제시한다. 그 중의 하나가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배의 본질은 선교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재현하는 행위이지 선교의 적절한 행위는 될 수 없다.” 따라서 소위 “구도자를 위한 예배”라고 불리는 종류의 예배들은 “예배”라고 지칭되어서는 안 된다.저자는 이렇게 예배와 예배가 아닌 것들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많은 신자들이 예배라고 오해하고 있는 집회의 성질과 예배의 성질을 분명하게 밝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신약공동체의 예배에서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 예배의 모습을 찾는데, 이러한 예배에는 독서와 강론, 성만찬, 그리고 기도와 찬송이 동반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들을 기본으로 하여 그 순서에 맞추어 하나님과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 드리는 거룩한 행위가 예배인 와 집회의 성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둥으로 여길 정도이다.그러나 저자가 열린 예배나 집회를 부정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주일 오후 예배에 대해 설명하면서 저자는 주일 오전 예배는 “성경적, 신학적으로 충실한 예배를 드리되 주일 오후나 저녁에는 자유로운 형식의 집회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집회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에 선교의 도구나 성도로 하여금 주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거룩한 오락거리로 사용될 수 있다.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성만찬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저자는 성만찬이 매주 행해지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유월절을 기념하는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이어져,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게 하였다. 따라서 성만찬의 기원은 신약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배는 성만찬으로부터 태어나고 성장했으며, 주께서 친히 제장하신 성만찬이 예배와 함께 할 때, 우리는 훨씬 더 생생하게 주님과 만날 수 있다.”저자는 성만찬에 다섯 가지의 의미를 부여한다. 첫째, 성만찬은 주의 부활을 기념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둘째, 성만찬은 감사의 식사이다. 유대인들은 본래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떡을 떼었고, 이것은 성만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셋째,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재현하는 것으로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성도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총을 다시 한 번 체험하게 된다. 넷째, 성만찬은 주께서 성도들에게 친히 베풀어주실 천국잔치의 모형이다. 마지막으로 성만찬은 위의 네가지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신비한 영적 사건이다.저자는 예배 음악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 저자는 예배에 적합한 찬양의 특징을 세 가지로 설명하는데, 첫째, 개인적인 체험 대신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가사가 담겨 있어야 하고, 둘째, 1인칭보다 2인칭 복수가 사용되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직설화법의 존칭형 어미가 사용되어야 한다.” 여기서 독자는 다시 하나님께 드려지되, 개인이 아닌 교회 공동체에 의해 드려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가 하나님의 면전에 직접적으로 드려지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예배에 있어서 음악 ?찬송-은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지만, 모든 찬양이 예배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저자가 예배와 집회를 구분한 것처럼 찬양에도 예배용 찬양과 집회용 찬양이 있다. 저자는 예배의 경건성과 거룩성을 시종일관 강조한다. 그 어떤 순서나 부분에서도 이것들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찬양 또한 예배의 본질을 흐릴 소지가 있는 것이면 예배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저자는 현대의 성가대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예배는 교회 공동체 전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회중을 대표하거나 대신하여 찬양하는 성가대는 이러한 예배의 성격에 맞지 않다. 오히려 성가대의 존재는 예배에 대한 회중의 집중도를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그래서 저자는 현대의 성가대를 거룩한 예배에 맞게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저자는 예배의 형식과 내용뿐 아니라, 예배를 뒷받침하는 외적인 조건들에 관한 질문에서 성실하게 대답한다. 대체로 그러한 질문들은 예배당의 필요성, 십자가의 의미, 강대상의 위치와, 예배인도자의 복장 등에 관한 것들이다. 저자는 예배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예배의 형식 또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예배를 드리는 장소의 구조와 분위기, 예배인도자의 복식에서 관심을 기울인다.4. 논지저자는 예배야말로 교회의 본질이며, 성도의 삶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자신이 드리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자신이 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바로 알 책임이 있다. 저자는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고 넘길 수 있는 문제들을 조목조목 되짚으며 예배의 모든 요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상세하게 밝힌다. 저자의 의도는 성도가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고,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예배자의 위치와 예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