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이즘(Dadaism)에 대하여과목명 :교수명 :학생명 :목차Ⅰ. 다다이즘이란?“다다는 태양, 다다는 달걀, 다다는 경찰 중의 경찰이다.”Ⅱ. 다다이즘의 탄생과 배경“다다가 있기 전에 이미 다다가 있었다.”Ⅲ. 주요활동기지-취리히(스위스) : 목마가 무대에 오르다-베를린(독일) : 다다는 잘 나가는 사업-쾰른(독일) : 다다의 기항지 쾰른-뉴욕(미국) : 다다는 미국산이다-파리(영국) :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은 우리의 서로 다름이다Ⅳ. 다다이후 다다와 초현실주의 그 사이Ⅴ. 다다이즘의 미술기법들Ⅵ. 다다미술작품들과 다다이스트※ 결론-마르셀 뒤샹의‘샘’을 통하여Ⅰ.다다이즘이란?-다다의 어원- “다다는 태양, 다다는 달걀, 다다는 경찰 중의 경찰이다.”다다이즘이란 무엇일까. 어떠한 것을 알려면 일단 그 이름의 의미를 알아야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다이즘에서의 다다는 별 뜻이 없다. 굳이 어원을 찾자면 루마니아어로는 ‘yes, yes’ 프랑스어로는 나무조랑말 요람 또는 목마이며, 스위스어로는 옹알이를 일컫는다. (이외에도 1918년 다다선언에 의하면, 아프리카 흑인종족에서는 소의꼬리를 일컫고, 이탈리아 일부지방에서는 정육면체나 어머니를 부르는 말이며, 러시아어에서는 이중긍정을 할 때도 역시 다다라고 한다.) 의성어나 옹알이부터 목마, 소꼬리에 이르기까지 어찌 보면 명확한 뜻이 없는 엉뚱하고 우연적이며 무의미한 것이 바로 다다이즘이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키포인트이다. 게다가 다다는 다른 미술사조들과는 다르게 의도적으로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직접 지어진 이름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덧붙여 무작위로 사전을 펼쳐 나온 단어를 그 이름으로 채택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처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다다이즘(Dadaism)-다다이즘의 성격은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한 커다란 충격과, 그 무렵 합리주의 정신에 의해 산업과 기계기술의 급성장을 통해 약속된 현대 문명의 낙관주의는 큰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다.에 의해 처음으로 지금의 뜻으로 사용 됐고 1870년대에는 전위적인 입장을 내세우는 일군의 작가들과 예술가를 가리키게 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정치 사회적 의미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로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흐름이 나타나 예술 그 자체를 더욱 강조하는 실험예술, 예술적인 급진주의를 가리키기 위한 심미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아방가르드는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찬양하는 다양한 유파의 새로운 예술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는 하나의 사조도 철학도 아닌, 어떤 특정한 시대의 주류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하는 관념적인 실체로 보아야한다. 즉, 아방가르드란 개념이 등장한 훨씬 이전의 시대에도 아방가르드는 존재해 왔고 20세기 전반의 ‘다다이즘’역시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다른 말로는 전위예술이라 할 수 있으며, 전통과 권위와 싸우며 예술정신가치를 지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이끌어가는 것을 통칭한다.)-다다의 시작-다다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한 스위스에는 전쟁 전, 혹은 전쟁 중에 이미 모여든 시인, 화가, 영화감독 등이 있었으나, 이중에서 취리히는 특히나 다른 아방가르드들의 주요 도피처이기도 했다. 그 속의 다다의 본거지와도 같은 역할을 했던 카바레 볼테르는 1916년 2월에 문을 열었으며 이곳에서 후고 발과, 에미 헤닝스의 주도아래 아르프, 트리스탄 차라, 마르셀 장코, 그리고 휠젠베크 등이 모여 그룹을 형성했다. 이 카바레를 프랑스 계몽 사상가이자 풍자소설의 저자인 볼테르의 이름을 따서 ‘카바레 볼테르’라고 한 것은 독일어권인 스위스의 입장에서 보면 의미심장한 일이었지만 이는 카바레에 의해 구체화된 문화교류의 유대관계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다다이스트들은 각자 조국과의 관계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다른 그룹보다 훨씬 공개적이고 비판적으로 밝혔다. 그들은 조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을 거부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국제주의자가 되었으며,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독특한 자신들의 방식으로 리화에 대한 강한 반감과 혐오감을 나타냈다. 또한 한스 아르프는 “다다는 이성의 속임수를 파괴하고 비이성적인 질서를 발견하길 원한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은 대중을 자극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하려는 의도로 정치적인 논쟁에 참여하였던 반면에, 취리히 다다이스트들은 풍자와 비이성, 문학적인 도발에 따른 충격효과에만 의존했다. 카바레 볼테르 홀에서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낭송을 하며, 음악 및 춤을 선보였고,벽과 공간들은 예술작품들로 꾸며졌다. 발음에 의거한 의미 없는 시를 읽고, 동시에 소음과도 같은 음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그들의 공연은 과감하면서도 엉뚱하고 광기 있는 모습으로 모든 규칙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와 새로운 시도는 전쟁에 대한 유일하게 적절한 반응이었다.- 마르셀 장코가 만든 의상을 입은 후고 발, 1916년 취리히 카바레 볼테르에서, 사진“나는 장코가 특별히 디자인한 의상을 입었다. 내 양쪽 다리는 엉덩이까지 올라오는 매우 밝은 파란색의 원통형 마분지로 휘감겨 있었다.”-베를린(독일) : 다다는 잘 나가는 사업베를린에서의 다다는 1918년 1월에 I.B.노이만 미술관에서 휠젠베크의 도발적인 연설로 불이 붙었다. “오늘 저녁은 2년전 취리히에서 탄생한 새로운 국제 예술경향인 다다이즘을 동조하는 시위로 의도된 것”이라고 선포했고 그 후 몇 달 만에 요한네스 바더를 비롯해 조지 그로스, 라울 하우스만, 한나 회흐 및 존 하트필드 등이 그에게 동조했다. 1918년 4월 12일 휠젠베크는 다다 활동의 첫 번째 선언서를 발표하며 클럽 다다의 창설을 선포했다. 내용은 독일의 표현주의를 거부하며, 모순과 비논리적이 특징이었다. 베를린다다는 취리히다다보다 더욱 공격적인 표현을 보여주었다. 앞선 취리히다다는 몇몇 무정부주의적 특징을 지닌, 근본적으로 문학적인 카바레 중심이었던 반면에 베를린에서의 클럽다다는 드러내놓고 정치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논쟁을 일으키는 수많은 성명서와 선언문 및 공공이벤트를 통해 전쟁과 바이마르 공소책자 『다다는 미국산이다』에서 다다운동의 국제적인 성격을 강조하기도 했다.(이는 제목과 달리 모순적이다) 취리히나 파리의 다다와는 대조적으로 뉴욕에서 다다 운동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이들은 문학인들이 아니었다. 뉴욕다다의 지대한 공헌을 한 이들은 바로 피카비아와 만 레이, 뒤샹으로 대표되는 미술가들 이었다. 프란시스 피카비아는 기술에 대한 지배적인 열정과 현대의 발전에 대한 확신을 패러디한 부조리한 기계 구조물을 그렸으며, 만 레이는 일상 실용품과 회화적 모티프를 사용해 거기에 다른 소재를 결합하거나 분명치 않은 제목을 붙임으로써 일상의 문맥에서 동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이해하기에는 다다이즘의 반예술개념으로 충분치 않다. 그의 레디메이드는 무엇보다도 ‘미술작품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우리는 미술작품을 어떻게 인지할 수 있는가’등의 근원적인 재정의로 보아야한다. 그럼에도 그가 다룬 작품들은 다다의 성격과 통하는 부분이 일면 있는 것이 사실이다.-파리(영국) :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은 우리의 서로 다름이다국제적인 다다운동은 취리히에서 탄생하여 파리에서 묻혔다. 그러나 다다가 뒤늦게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한곳은 프랑스 파리임에 틀림이 없다. 전쟁기간동안 전선에서 복무했거나 징집을 피해 외국으로 달아났던 젊은 예술가들은 휴전이 된 후 하나둘씩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에서도 역시 다다는 무엇보다 문학 운동이었다. 그러나 다다이스트들이 짤막한 낭송이나 시, 음악, 춤 등의 프로그램으로 떠들썩하게 공연했던 취리히의 카바레와는 달리 프랑스 파리에서는 주로 수많은 출판물을 통하여 자신을 표현했다. 그것은 마치 파리 다다이스트들이 저마다 자신의 선언문이나 논문 및 시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글을 출판할 수 있는 자시 소유의 대변지를 창간한 것처럼 보였다. 1912년부터 1915년까지 간행되었던 『맹트낭』은 이후에 출판된 대부분의 잡지의 본보기가 되었고 브르통의 잡지『문학』,피카비아의『391』,차라의 『다다』시리즈, 데르메의『새로운정신』등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과 표현양식에 대한 제약을 거부했다.■포토몽타주 : 사진을 오려 그 부분을 재조립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는 합성이미지를 만드는 기법으로 조각난 사진을 이용하는 데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사진에 글씨, 색깔, 그림을 덧붙이는 것도 포함된다. 기계적 수단으로 수없이 재생산되는 대중매체를 사진과 문자들을 한 화면에 조립함으로써, 다양한 이미지들이 중첩된 화면에는 보도의 목적이 아닌 예술가가 전달하는 시각적 메시지라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정치적 미술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던 이 기법은 명확하고 사실적인 전달 수단으로도 효과적이었다.■아상블라주 : 기성품의 단면들을 해체하고, 각각 다른 사물에서의 해체된 단면들을 붙이고 조립하는 기술 및 기법을 의미한다. 이질적인 단면들에 대한 결합은 다다이스트들이 추구한 허무주의와 비이성적인 사회현상을 이야기하는 데에 적합한 수단으로 작용되었다.■레디메이드 : 미술작품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 기성품을 예술적 산물로 승화시킨 기법이다. 사실 레디메이드는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사회에 대한 비판보다는 미술작품 개념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미술가의 창조적 수작업이 아닌 산업적 오브제에 제목을 부여하고,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전시장에 놓아진 상황은 당시의 미술계에 엄청난 충격이자 아방가르드한 예술행위였기 때문이다.Ⅵ.다다미술작품들과 다다이스트우연의 법칙에 따라서 제작된 콜라주, 한스 아르프, 1916,25.3×12.5cm, 바젤 미술관아르프의 콜라주 가운데 가장 혁신적이 것은 ‘우연의 법칙에 따라서’만든 작품들이다. 종이들이 우연히 떨어지는 그 장소 그대로 붙였다. 다다이즘이 반예술 운동이라고 여겨진다면, 이방법은 가장 순수하고도 도발적인 반예술 행위였다. 아르프는 더욱 정통적인 방법으로 구성을 시도하려다 실패하자 자기의 작품을 찢은 뒤 던졌으며 얼마 후 조각들의 우연한 배열속에서 예술가의 솜씨나 판단력이 배제된 더욱 자유롭고 암시적인 방법여있다.
볼 링(볼링에 관한 조사)과목명 :교수명 :학생명 :목 차Ⅰ. 볼링 개요ⅰ. 볼링의 역사ⅱ. 볼링 용어ⅲ. 볼링 에티켓Ⅱ. 볼링의 시설과 장비ⅰ. 레인ⅱ. 핀ⅲ. 볼ⅳ. 볼링화Ⅲ. 볼링의 원리와 기술ⅰ. 볼링의 원리ⅱ. 기본자세ⅲ. 스텝ⅳ. 볼의 구질과 회전ⅴ. 스트라이크와 스페어Ⅳ. 볼링유형과 이론ⅰ. 점수계산법ⅱ. 볼링의 유형과 기술 심화ⅲ. 볼링경기와 규칙Ⅴ. 볼링의 효과 및 유의점Ⅰ. 볼링 개요ⅰ. 볼링의 역사1) 세계볼링의 기원과 역사어떠한 서있는 목표물을 향하여 볼을 던져 그것을 때려 넘어뜨리는 놀이는 인간의 제일 오래된 오락중의 하나였다. 아마도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동굴에서 살던 사람들은, 구체화된 볼링이 아닐지라도 작은 놀이로서 뾰족한 돌을 몇 줄 늘어놓고 둥근 돌 몇 개로 그것을 때려서 쓰러뜨리는 것을 하며 즐겼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떠한 곳에서는 미개한 부족이, 정복한 적의 두개골을 양쪽 눈구멍에 각기 엄지손가락과 다른 손가락을 넣어 잡고 반대편에 세운 정강이뼈들에 던져버렸다는 무서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게다가 실제로는 현재의 볼링 형태와 가장 흡사한 역사적 자료가 고대 이집트 왕후의 무덤에서 발견되었고, 영국의 고고학자 플린더스 페트리(Flinders Petrie)는 기원전 5,200년이라고 감정한 이집트의 어린아이 묘 속에서 현재의 볼링과 아주 비슷한 일종의 경기용구를 발견한 일이 있다. 이것은 현재 런던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그 스포츠 연구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에서 볼링이 어떠한 형태로 행해졌는지는 지금으로서는 확실히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현대 볼링의 기원이라고 생각되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13세기 영국에서는 “볼링 언더 그린”(잔디 위의 볼링)이라고 하는 것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볼링보다도 이탈리아의 보츄와 닮은 것이다. 이는 여러 개의 큰 볼이 '작크'(한 개의 말뚝이나 원추체 내지는 소형의 볼)를 향하여 잔디의 작은 길을 굴러가는 것이었는데, 그 목적은 작크를 쳐 쓰러뜨린다있는 고랑처럼 패인 부분.2) 그립 (Grip) : 볼을 쥐는 것, 또는 그 방법.'컨벤셔널 그립, '세미핑거 그립', '핑거팁 그립' 등이 있다.3) 딜리버리 (Delivery) : 볼을 손에 들고 있는 상태에서 볼을 던지기까지의 일련의 동작 또는 그 방법.4) 로프트 볼 (Loft bowl) : 파울 라인 앞쪽에 펑하고 떨어지는 볼. 엄지손가락을 빼는 것이 늦어진 때에 이런 상태가 되기 쉽다.5) 미스 (Miss) : 두 번째 투구에서 남아 있는 핀을 하나도 쓰러뜨리지 못하는 경우.6) 백스윙 (Back swing) : 투구하기 위해 볼을 아래에서 뒤로 들어 올리는 일.7) 백업 (Back up) : 오른손잡이인 경우 오른쪽으로 왼손잡이인 경우 왼쪽으로 휘는 훅.8) 스페어 (Spare) : 첫번째 투구에서 쓰러뜨리지 못하고 남은 핀 또는 그 핀을 두번째 투구에서 모두 쓰러뜨리는 것. 스페어 종류는 1023가지나 된다.9) 스트라이크 (Strike) : 첫번째 투구로 핀을 모두 쓰러뜨리는 것.10) 스폿 (Spot) : 레인위에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서 파울라인으로부터 4m28cm 떨어진 지점에 표시되어 있다. 볼이 지나가는 지점을 알 수 있게 해준다.11) 스플릿 (Split) : 1번 핀이 없는 상태에서 핀과 핀 사이 간격이 벌어진 상태.12) 파운데이션 (Foundation) : 9프레임에서의 스트라이크.13) 퍼펙트게임 (Perfect game) : 모든 게임을 스트라이크로 치는 경우. 점수 300점.14) 프레임 (Frame) : 한경기를 10개로 나눈 것 중 하나.15) 헤드핀 (Head pin) : 1번핀.16) 훅 (Hook) : 볼의 인위적인 회전을 가하여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구부러지게 하는 방법.●스트라이크 횟수에 따른 용어1) 스트라이크 (Strike) -1번2) 더블 (Double) -2번3) 터키 (Turkey) -3번4) 포베거 (4 begger) -4번5) 파이브베거 (5 begger) -5번6) 식스베거 (6 begger)개의 둥근 표시가 있는 곳을 말한다. 가이드 스폿은 정확한 컨트롤을 하여 에임 스폿까지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4) 에임 스폿 (Aim spot)가이드 스폿에서부터 2.14m앞쪽의 삼각형 모양으로 7개의 검은 점이 있다. 가이드 스폿의 삼각형 7개의 검은 점을 포함해 에임 스폿이라 부른다. 삼각형모양의 7개 표시는 하나하나가 핀의 위치와 평행한 위치로서 일반적으로 볼의 라인을 정하고 볼이 라인을 따라서 핀에 향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멀리 있는 핀을 직접 겨냥하여 던지는 것보다 에임 스폿을 이용하여 투구를 하는 것이 정확도와 높은 점수를 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Ⅱ. 볼링의 시설과 장비ⅱ. 핀레인의 제일 안쪽은 핀덱이라 불리며 이곳에 핀을 세운다. 핀의 재질은 공의 강한 충격에 잘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하고 견고한 단풍나무를 재료로 하여 만들고 핀 내부에는 충격을 잘 흡수하고 최대한 빨리 원래 모형으로 복원시키기 위해 구멍이 하나와 두 개인 것이 있다. 표면은 특수 도료로 칠해져 있다. 핀의 밑 부분은 각이 지지 않아 넘어지기 쉬운데 이것을 막기 위하여 원형 모양의 플라스틱 종류인 글라스 파이버(Glass-Fiber)를 부착시킨다.1)크기: 핀의 크기는 38cm로 어른의 무릎 높이쯤 된다. 가느다란 목 부분은 직경이 4cm이며 볼이 직접 닿는 볼록한 부분은 직경이 약 12cm로 되어 있다.2)무게: 핀 하나의 무게는 약 1.3kg~1.6kg까지로 규정되어 있다. 또 열 개의 핀을 세트로했을 때, 가장 무거운 핀과 가장 가벼운 핀의 무게차이는 112g 이내 이어야 한다.3)핀의 배열: 핀은 한 변이 91.4cm인 정삼각형의 바닥에 열 개의 핀이 30.48cm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핀마다 따로 번호가 정해지므로 핀의 배열과 번호를 알아두는 것이 게임을 즐기고, 스페어처리를 위해서 필수적이다.4)핀의 재료목재 핀은 그 자체를 살린 것으로 단일성의 핀이라고 일컬어지고, 무게는 20파운드 14온스~3파운드 10온스 까지 있다.금속성 핀은 3파운드 2온스~3파운드 10통에 물을 반 이상 넣고 물이 엎질러지지 않게 앞뒤로 스윙하는 느낌으로 맨손 또는 볼을 잡고 20-30회 반복연습으로 스윙 감각을 익히자2. 시계추의 원리와 스텝과의 상관관계볼의 전진력과 풍부한 회전력을 가하려면 릴리스 직전의 스윙이 리듬있게 바닥 면에 가까이 (낮게) 길게(슬라이드)되는 것이 이상적이다Ⅲ. 볼링의 원리와 기술ⅱ. 기본자세볼링경기 시 올바른 자세는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하다.볼러는 일련의 동작을 정확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운동수행을 위한 자세를 준비해야 한다.신체는 균형을 잘 잡아 편안하게 올바른 지점에 위치하여야 한다.두 가지 기본적은 자세 결정방법은 다음과 같다.첫째, 어디에 위치를 정할 것인가둘째, 어떻게 위치를 정할 것인가위 사항은 초급 볼러들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중급 이상의 볼러들에게는 자신들에게 편한 위치가 올바른 위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즉, 우리의 신체는 어떤 의식적인 사고 없이도 자연스럽게 자세를 결정하는 능력이 있음을 시사한다.(1) 준비자세 위치결정준비자세를 위한 위치 결정시 파울라인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 오른쪽 혹은 왼쪽 어느쪽에 정할 것인가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어프로치 위의 파울라인과 위치점은 준비자세를 위한 위치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준다.파울라인으로부터 거리 정하기일반적으로 사람의 키가 5피트(152.4cm) 정도인경우 파울라인으로부터 두 번째 위치점에 위치를정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신장과 보폭의 길이가다른 점을 감안하여 키가 큰 사람은 작은 사람보다 파울라인에서 더 멀리 위치를 정한다. 파울라인으로부터 정확한 위치를 위한 위치 결정은 아래의 순서로 실시하여 쉽게 결정할 수 있다.첫째, 파울라인에서 2인치(5cm) 정도 떨어져어프로치를 향해 돌아선다.둘째, 자연스러운 보폭으로 오른손 사용볼러는오른발부터, 왼손 사용볼러는 왼발부터 시작하여4와 1/2폭을 걸은 후 핀을 향하여 돌아선다.1/2폭을 더 걷는 이유는 슬라이딩을 위한 여분의스텝으로 파울라인을 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셋째, 핀을 향하여되어야 한다.3) 5스텝(five step)5스텝은 4스텝과 거의 같다. 다만 첫 스텝을 시작하는 스텝이라고 하여 두 번째 스텝까지 푸쉬어웨이가 연결되는 것이다.5스텝은 전반적으로 보폭을 적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상체의 움직임을 안정시킬 수 있으며유연한 투구 동작과 속도 그리고 전방으로의 운동량을 증가시켜 스윙에 탄력을 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4) 릴리즈(release)와 팔로스루(follow-through)릴리즈 동작은 볼의 투구 방향과 회전력 그리고 스피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동작이다.아래의 그림과 같이 릴리즈는 4스텝을 기준으로 세 번째 스텝에서 4스텝을 마침과 동시에엄지가 볼에서 빠져야 한다.볼을 계속하여 올바르게 잡고 있으면 엄지는 자연스럽게 빠지게 된다.중지와 약지 손가락은 계속 구멍에 있는 상태에서 직선으로 들어 올린다(lifting).적절하게 잡고 있으면 볼에 스핀을 주어 자연적으로 핀을 향해 나아가면서 훅(hook)이 일어나게 된다.마지막으로 팔로스루 시에 손은 악수하는 자세로 원을 그리며 천정을 향해 위로 올리면손가락은 볼에서 자연스럽게 빠진다.이때 손은 아래의 그림과 같이 스윙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목표 라인과 일직선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Ⅲ. 볼링의 원리와 기술ⅳ. 볼의 구질과 회전● 볼의 구질① 스트레이트 볼(straight ball): 볼링의 기본이 되는 투구법이다. 레인에 평행으로 회전하면서 핀을 향해 직진하는 볼이다. 던지는 방법은 엄지손가락은 위에, 중지와 약지는 볼의 바로 뒤에 두고, 볼을 내렸을 때 손바닥에 똑바로 핀을 향하도록 한다.② 훅 볼(hook ball):핀에 가까워짐에 따라 왼쪽으로 회전하면서 휘는 볼로서 파괴력이 좋다. 던지는 방법은 볼을 왼쪽으로 꼬듯이 비틀어 던지며, 손은 볼을 놓았을 때 악수를 한 모양이 된다.③ 커브 볼(curve ball):커다란 활 모양을 그리면서 휘어지며 굴러가는 볼로서, 가장 파괴력이 강하다. 그만큼 투구가 어렵다. 던지는 방법은 오른손잡이는 중앙에서 왼쪽으로 서게 한다.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서술에 관하여 과목명: 교수명: 학생명: 목차 1.역사서술의 기원 2.그리스의 역사서술 3.로마의 역사서술 4.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서술 비교분석 : 투키디데스의『역사』와 타키투스의 『역사』 5. 고전고대의 역사서술의 의미 6.그리스와 로마 역사서술의 공통점과 결점 7. 그들의 역사서술에 대하여 1. 역사서술의 기원 역사서술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봐야하는가는 명확히 정의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서술 또한 글로 쓰여 진 문학의 한 갈래에서 시작되었으며, 문학의 발생 초기부터 함께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자신들의 혹은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몇 세기의 경험을 쌓고, 자신들을 시, 연극 또는 그 밖의 예술형태로 설명하게 된 뒤부터 역사서술이 발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경우에는 역사의 기록이 시작된 시기를 구분 지을 수 있으며, 다만 사실과 전설 사이를 어디에서 구분 지어야 할 것 인지가가 역사서술의 기원을 찾는 시작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전설적 이야기에 역사적 사실이 더해진 고대 그리스 최초의 역사서술이라 볼 수 있다. 기록이 전무했던 암흑시대를 거쳐 호메로스의 글의 등장은 그들을 어둠에서 끌어내어 준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속에는 진실 된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지만, 그리스 최초의 역사사실이 중점이라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적어도 그의 글 와 같은 서사시들은 당대의 문화와 사회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여 주는 근거이며, 그의 글들은 그리스의 어느 다른 역사기록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범위와 내용면에서 훌륭한 자료들을 전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글들이 역사서술의 시작은 될지언정 역사서로 정식이 되지 못한 것엔 이유가 있다. 당시의 그리스 역사서로서 정식화되기 위해서는 문화적 배경에 있어서 몇 가지 필수적인 조건들이 필요하였다. 첫 번째로 쉽고 편리하게 산문을 서술할 수 있어야 했고, 당시 유행하던 초기 그리스에 관한 신화들을 비판적인 자세로 관철하는 태도가 요구되었으신의 판단과 공정성을 왜곡하진 않았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적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서 약간 뒤로 물러서서 보았으며, 이에 따라 페르시아전쟁을 그리스와 오리엔트 문화라고 하는 서로 다른 유형의 문화충돌이라고 묘사하였다. 또한 그는 기원전 6~5세기 서부 지중해 세계와 아시아 세계에 살고 있던 여러 사람들에 관하여 묘사하였고, 이는 일종의 문화사와 기술사회학의 혼합이었다. 그는 여러 지역의 기후에서부터 식이요법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다루었고, 인종적 편견에서 벗어나 다양한 민족을 묘사하였다. 반면에 그가 보여주지 못하였던 서술상의 정확성과 정밀함은 투키디데스의 서술이 보여주게 된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서술의 과정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었다면 투키디데스는 다른 생각으로 역사문제에 접근하였다. 투키디데스는 역사적 진실을, 자신이 이해한 대로 정직하게 서술하기 위하여 흥미위주의 서술을 포기하였다. 그는 헤로도토스가 심취하였던 심화와 전설을 엄격하게 배제하려 노력하였다. 또한 역사적인 인과관계를 다루는 데 있어서 산문시와 초자연론으로부터 역사를 분리해 내었으며, 역사사건이란 합리적인 원인이나 세속적인 구실 때문에 발생하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저서에서 투키디데스는 명확한 주제를 선정하고, 선택된 주제를 엄격하게 지키면서 서술하였다. 따라서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술의 주제인 펠로폰네소스전쟁 서술은 헤로도토스의 서술보다 훨씬 좁고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직접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던 그의 저서는 목격자로서 쓴 동시대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주로 정치적인 자료들에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역사가들 중에서는 최초로 철학적인 이해력으로 정치학을 다루었고 반면에 비정치적이며 비군사적인 요소들은 생략되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이외의 지리적 요소들이 지니는 중요성을 헤로도토스만큼 날카롭게 인식하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술에 대한 중요성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진술의 정확성에 의존해야 한다는 비평주의와 방법론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는 자료의 적이었다. 하지만 역사적 분석능력이 뒤떨어져 역사가로서는 보다 낮게 평가되었다. 그의 대표 역사서로서는 『헬레니카』와『아나바시스』가 있는데, 『헬레니카』는 투키디데스의 작품의 방법과 구상을 모방한 것이었으며, 투키데데스의 역사서술 이후부터의 그리스 역사에 대해 기술하였다. 비록 그가 문학적 표현능력은 뛰어났을지라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보력과 분석력의 수준이 낮아 중요하게 평가받진 못하였다. 또한 크세노폰은 수사학의 영향을 받은 인물 중 한명인데, 그리스에는 이미 기원전 4세기에 이르면 수사학의 영향이 막대하게 일어나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기원전 4세기 수사학자들의 지도자는 이소크라테스였으며 수사학파의 대표적 역사가는 에포로스와 테오폼포스가 있다. 특히 에포로스의 저서는 그리스의 역사서들 중에서 아마도 헬라스의 ‘민족사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속 그리스인의 최초 역사전기로 여겨지는 작품은 크세노폰이 만든 아게실라오스의 전기 였으며, 이후 역사가들은 전기 서술에 상당한 양의 지면은 할애하게 되었다. 이후 플루타르크의 작품인 『영웅열전 또한 매우 흥미진진한 것이었지만 역사적 정확성은 그다지 없었다. 다만 플루타르크가 도덕주의가로서 자신이 생각하는 윤리적인 원칙들을 보여주고자 저술하였다는 점에서만 의의가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그리스의 역사서술을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역사서술을 위한 발 돋음 단계의 문학 기원전 6세기경 최초로 과거의 이야기들을 그럴듯하게 만들어가는 시기라는데 의의가 있다. 대표적인 작품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가 있다. -두번째, 역사서술의 본질에 대한 탐구 헤로도토스는 ‘역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만들어 붙이고, 페르시아 전쟁에 관한 역사서 술과 이것 외의도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다양한 요소들을 다루었다. 투키디데스는 철저한 사료비판을 통해 인과관계를 중점으로 서술하였고, 역사는 인간의 행위의 결과로서 여기며, 신 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하는 역사서술의 발전을 이지니지 못하였다. 리비우스는 로마를 찬미하며, 애국적 정열을 고무시키기 위해 글을 썼고, 따라서 초자연적인 것이 역사에 다시 철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그의 글이 과학적으로는 훌륭한 역사서가 아닐지라도 문학적이고 애국적인 선전물로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보다 수준 낮은 로마 역사서로는 파테르쿨르의 저술이 있으며, 그것 역시 수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로마의 주요한 역사가들 중 마지막 인물은 타키투스가 있으며 그는 또한 귀족적 로마공화정에 대한 열렬한 찬미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로마제정 초기의 정치와 사회를 서술하는 관점에 있어서는 살루스트보다 더욱 비관적이었다. 살루투스는 인물묘사에 있어서는 매우 훌륭하고도 정확하며 열정적으로 서술하였으나, 주관적이고 설교적인 서술경향으로 인하여 역사적 가치는 크게 상실되었다. 주요저서로는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해부터 69년까지의 시기를 다룬『연대기』와 다시69년의 정치적 위기로부터 플라비우스 가문의 황제들 통치기를 다룬『역사』가 있다. 과학적 역사가로서 평가하자면 타키투스는 대략 리비우스와 폴리비오스 중간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리비우스보다는 조심스러웠으며 사실들을 쉽게 믿지는 않았지만, 폴리비오스처럼 냉철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폴리비오스가 역사는 정치술의 시녀가 되어야한다고 믿었던 반면, 타키투스는 역사는 사적이고 공적인 도덕성을 지탱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역사의 순환이론을 도덕의 분야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자신들의 저서가 로마의 역사서술의 한 부분으로서 자리한 인물들에는 라틴 서사시를 완성한 베르길리우스, 라틴어문장의 또 다른 대가 키케로, 시 같은 산문체형식의 글쓰기를 한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역사가들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2가지 원칙을 설명한 디오니시오스, 황제와 공화정의 연결되는 부분의 로마 전시대사를 저술한 디오 카시우스, 다양한 학문에 박식했던 수에토니우스, 고품격의 도덕론을 채택한 살루스티우스 등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로마역사가들은 초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 주저한 것 같다. 다만 69년이라는 정확한 연대로부터 96년까지의 플라비우스가문의 황제들의 통치기를 다루었다는 시간적인 경계만은 확실하다. 역사서술의 주제를 선정함에 있어서 저자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서술하였는가는 매우 중요한데, 이러한 목적에 있어서도 두 개의 작품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전자(투키디데스의 『역사(Historia)』)의 경우에는 알 수 없는 미래예측을 위한 정보로서의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으며 이는 곧 역사순환론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인류사상 최대의 전쟁이라고 확신하였으며, 이것을 기록으로 남겨 그 이후의 다른 모든 전쟁의 결과를 예견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따라서 서두의 1장 23까지를 소비해가며 이것이 인류가 경험한 최대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후자(타키투스의『역사(Historiae)』)의 경우에는 후손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을 갖고 쓰여 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문에서 그가 늙어감에 따라 풍부하고도 확실한 자료인 동시대의 이야기를 보존해야한다고 밝힌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듯 전자와 후자 모두 역사의 순환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역사서술 목적의 근원을 삼았다는 데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술방식에 있어서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전자가 서술의 정확성과 자료의 비판에 있어서 따라올 만한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는 투키디데스 그가 직접 전쟁에 참여하였고, 따라서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점이고, 이로 인해 매우 높게 평가되는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타키투스는 열정적이며 훌륭하게 인물을 묘사하는 서술을 사용하였지만 주관적이고 설교적인 경향으로 인하여 객관적인 역사서로서의 평가는 비교적 낮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개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시대적인 역사서술의 방식 영향 하에서 저술되었음은 어쩔 수 없이 글에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비교적으로 자유롭고 객관적인 서술을 중시했던 그리스와는 달리 로고.
다다이즘(Dadaism)에 대하여과목명 :교수명 :학생명 :목차Ⅰ. 다다이즘이란?“다다는 태양, 다다는 달걀, 다다는 경찰 중의 경찰이다.”Ⅱ. 다다이즘의 탄생과 배경“다다가 있기 전에 이미 다다가 있었다.”Ⅲ. 주요활동기지-취리히(스위스) : 목마가 무대에 오르다-베를린(독일) : 다다는 잘 나가는 사업-쾰른(독일) : 다다의 기항지 쾰른-뉴욕(미국) : 다다는 미국산이다-파리(영국) :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은 우리의 서로 다름이다Ⅳ. 다다이후 다다와 초현실주의 그 사이Ⅴ. 다다이즘의 미술기법들Ⅵ. 다다미술작품들과 다다이스트※ 결론-마르셀 뒤샹의 ‘샘’을 통하여Ⅰ.다다이즘이란?-다다의 어원- “다다는 태양, 다다는 달걀, 다다는 경찰 중의 경찰이다.”다다이즘이란 무엇일까. 어떠한 것을 알려면 일단 그 이름의 의미를 알아야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다이즘에서의 다다는 별 뜻이 없다. 굳이 어원을 찾자면 루마니아어로는 ‘yes, yes’ 프랑스어로는 나무조랑말 요람 또는 목마이며, 스위스어로는 옹알이를 일컫는다. (이외에도 1918년 다다선언에 의하면, 아프리카 흑인종족에서는 소의꼬리를 일컫고, 이탈리아 일부지방에서는 정육면체나 어머니를 부르는 말이며, 러시아어에서는 이중긍정을 할 때도 역시 다다라고 한다.) 의성어나 옹알이부터 목마, 소꼬리에 이르기까지 어찌 보면 명확한 뜻이 없는 엉뚱하고 우연적이며 무의미한 것이 바로 다다이즘이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키포인트이다. 게다가 다다는 다른 미술사조들과는 다르게 의도적으로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직접 지어진 이름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덧붙여 무작위로 사전을 펼쳐 나온 단어를 그 이름으로 채택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처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다다이즘(Dadaism)-다다이즘의 성격은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한 커다란 충격과, 그 무렵 합리주의 정신에 의해 산업과 기계기술의 급성장을 통해 약속된 현대 문명의 낙관주의는 큰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다드는 본래 프랑스의 군대용어로써 주력부대에 앞서 나가있는 최전방의 소수 정예부대를 뜻했는데, 프랑스의 사회주의 지도자 ‘앙리 드 생시몽’에 의해 처음으로 지금의 뜻으로 사용 됐고 1870년대에는 전위적인 입장을 내세우는 일군의 작가들과 예술가를 가리키게 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정치 사회적 의미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로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흐름이 나타나 예술 그 자체를 더욱 강조하는 실험예술, 예술적인 급진주의를 가리키기 위한 심미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아방가르드는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찬양하는 다양한 유파의 새로운 예술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는 하나의 사조도 철학도 아닌, 어떤 특정한 시대의 주류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하는 관념적인 실체로 보아야한다. 즉, 아방가르드란 개념이 등장한 훨씬 이전의 시대에도 아방가르드는 존재해 왔고 20세기 전반의 ‘다다이즘’역시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다른 말로는 전위예술이라 할 수 있으며, 전통과 권위와 싸우며 예술정신가치를 지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이끌어가는 것을 통칭한다.)-다다의 시작-다다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한 스위스에는 전쟁 전, 혹은 전쟁 중에 이미 모여든 시인, 화가, 영화감독 등이 있었으나, 이중에서 취리히는 특히나 다른 아방가르드들의 주요 도피처이기도 했다. 그 속의 다다의 본거지와도 같은 역할을 했던 카바레 볼테르는 1916년 2월에 문을 열었으며 이곳에서 후고 발과, 에미 헤닝스의 주도아래 아르프, 트리스탄 차라, 마르셀 장코, 그리고 휠젠베크 등이 모여 그룹을 형성했다. 이 카바레를 프랑스 계몽 사상가이자 풍자소설의 저자인 볼테르의 이름을 따서 ‘카바레 볼테르’라고 한 것은 독일어권인 스위스의 입장에서 보면 의미심장한 일이었지만 이는 카바레에 의해 구체화된 문화교류의 유대관계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다다이스트들은 각자 조국과의 관계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다른 그룹보다 훨씬 공개적이고 비판적으로 밝혔과 두려움 때문에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전쟁을 일종의 영웅적인 사회경험으로 이상화하는 것에 반발하였다. 다다이스트들은 전쟁의 잔인함에, 그 기계적인 익명의 살인행위에 대해, 그리고 그럴듯한 논리로 자신들의 전쟁 정책을 합법화하려는 양 진영의 당국자들이 제시한 냉소적인 합리화에 대한 강한 반감과 혐오감을 나타냈다. 또한 한스 아르프는 “다다는 이성의 속임수를 파괴하고 비이성적인 질서를 발견하길 원한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은 대중을 자극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하려는 의도로 정치적인 논쟁에 참여하였던 반면에, 취리히 다다이스트들은 풍자와 비이성, 문학적인 도발에 따른 충격효과에만 의존했다. 카바레 볼테르 홀에서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낭송을 하며, 음악 및 춤을 선보였고,벽과 공간들은 예술작품들로 꾸며졌다. 발음에 의거한 의미 없는 시를 읽고, 동시에 소음과도 같은 음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그들의 공연은 과감하면서도 엉뚱하고 광기 있는 모습으로 모든 규칙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와 새로운 시도는 전쟁에 대한 유일하게 적절한 반응이었다.- 마르셀 장코가 만든 의상을 입은 후고 발, 1916년 취리히 카바레 볼테르에서, 사진“나는 장코가 특별히 디자인한 의상을 입었다. 내 양쪽 다리는 엉덩이까지 올라오는 매우 밝은 파란색의 원통형 마분지로 휘감겨 있었다.”-베를린(독일) : 다다는 잘 나가는 사업베를린에서의 다다는 1918년 1월에 I.B.노이만 미술관에서 휠젠베크의 도발적인 연설로 불이 붙었다. “오늘 저녁은 2년전 취리히에서 탄생한 새로운 국제 예술경향인 다다이즘을 동조하는 시위로 의도된 것”이라고 선포했고 그 후 몇 달 만에 요한네스 바더를 비롯해 조지 그로스, 라울 하우스만, 한나 회흐 및 존 하트필드 등이 그에게 동조했다. 1918년 4월 12일 휠젠베크는 다다 활동의 첫 번째 선언서를 발표하며 클럽 다다의 창설을 선포했다. 내용은 독일의 표현주의를 거부하며, 모순과 비논리적이 특징이었다. 베를린다다는 취리히다다보다었고, 1920년4월 쾰른의 ‘빈터 카바레’에서 집회를 최고조로 이후 쾰른다다는 차차 막을 내리고 아르프는 취리히로, 에른스트도 파리로 떠나게 된다.-뉴욕(미국) : 다다는 미국산이다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뉴욕에서도, 다다의 무정부주의적인 충동을 전해준 이들은 주로 망명한 유럽의 예술가들이었다. 두 명의 프랑스인 마르셀 뒤샹과 프란시스 피카비아는 1919년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월터 아렌스버그는 소책자 『다다는 미국산이다』에서 다다운동의 국제적인 성격을 강조하기도 했다.(이는 제목과 달리 모순적이다) 취리히나 파리의 다다와는 대조적으로 뉴욕에서 다다 운동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이들은 문학인들이 아니었다. 뉴욕다다의 지대한 공헌을 한 이들은 바로 피카비아와 만 레이, 뒤샹으로 대표되는 미술가들 이었다. 프란시스 피카비아는 기술에 대한 지배적인 열정과 현대의 발전에 대한 확신을 패러디한 부조리한 기계 구조물을 그렸으며, 만 레이는 일상 실용품과 회화적 모티프를 사용해 거기에 다른 소재를 결합하거나 분명치 않은 제목을 붙임으로써 일상의 문맥에서 동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이해하기에는 다다이즘의 반예술개념으로 충분치 않다. 그의 레디메이드는 무엇보다도 ‘미술작품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우리는 미술작품을 어떻게 인지할 수 있는가’등의 근원적인 재정의로 보아야한다. 그럼에도 그가 다룬 작품들은 다다의 성격과 통하는 부분이 일면 있는 것이 사실이다.-파리(영국) :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은 우리의 서로 다름이다국제적인 다다운동은 취리히에서 탄생하여 파리에서 묻혔다. 그러나 다다가 뒤늦게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한곳은 프랑스 파리임에 틀림이 없다. 전쟁기간동안 전선에서 복무했거나 징집을 피해 외국으로 달아났던 젊은 예술가들은 휴전이 된 후 하나둘씩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에서도 역시 다다는 무엇보다 문학 운동이었다. 그러나 다다이스트들이 짤막한 낭송이나 시, 음악, 춤 등의 프로그램으로 떠들썩하게 공연했던 취리히의 카바레와는 달리 프레이, 막스 에른스트 등이 그와 함께 파리 초현실주의를 결성하는 데 열정적으로 참여했다.이후 수십 년간 다다이즘은 무어소다 정신적인 태도로서 자꾸 되살아났다. 다다의 소리-시는 1960년대 구체시를 쓰던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프랑스의 신사실주의자들은 아예 처음부터 자신들을 네오 다다이스트라고 불렀다.Ⅴ.다다이즘의 미술기법들 (회화,조각,콜라주 이외의)화가의 손으로 제작된 작품의 유일성, 독창성을 중시했던 과거의 미술과는 달리 다다이즘 미술가들은 과정과 아이디어를 중시했고, 이에 대한 흔적을 남기는 결과물 또한 회화, 조각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과 표현양식에 대한 제약을 거부했다.■포토몽타주 : 사진을 오려 그 부분을 재조립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는 합성이미지를 만드는 기법으로 조각난 사진을 이용하는 데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사진에 글씨, 색깔, 그림을 덧붙이는 것도 포함된다. 기계적 수단으로 수없이 재생산되는 대중매체를 사진과 문자들을 한 화면에 조립함으로써, 다양한 이미지들이 중첩된 화면에는 보도의 목적이 아닌 예술가가 전달하는 시각적 메시지라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정치적 미술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던 이 기법은 명확하고 사실적인 전달 수단으로도 효과적이었다.■아상블라주 : 기성품의 단면들을 해체하고, 각각 다른 사물에서의 해체된 단면들을 붙이고 조립하는 기술 및 기법을 의미한다. 이질적인 단면들에 대한 결합은 다다이스트들이 추구한 허무주의와 비이성적인 사회현상을 이야기하는 데에 적합한 수단으로 작용되었다.■레디메이드 : 미술작품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 기성품을 예술적 산물로 승화시킨 기법이다. 사실 레디메이드는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사회에 대한 비판보다는 미술작품 개념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미술가의 창조적 수작업이 아닌 산업적 오브제에 제목을 부여하고,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전시장에 놓아진 상황은 당시의 미술계에 엄청난 충격이자 아방가르드한 예술행위였기 때문이다